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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General Edu > Volume 17(6); 2023 > Article
니체의 교양교육론의 비판적 탐색

Abstract

바젤대학 교수였던 젊은 니체는 바젤교육위원회 요청으로 교육에 관한 다섯 차례의 강연을 수행했다. 이 강연을 모아놓은 글이 「우리 교육기관의 미래에 대하여」이다. 이 강연에서 니체는 당시 독일교육, 특히 교양 교육의 문제를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했다. 이 연구는 이 강연에 나타난 니체의 교양교육론이 갖는 의미를 밝히고, 오늘날 우리나라 대학에의 적용 가능성과 한계를 탐색하기 위한 것이다. Ⅱ장에서는 강연 내용과 관련된 19세기 독일 시대 상황을 개관했고, Ⅲ장에서는 강연에 나타난 니체의 교양교육론의 주요 내용을 분석했으며, Ⅳ장에서는 오늘날의 대학의 맥락에서 니체의 교양교육론이 갖는 가능성과 한계를 논했다. 니체는 당시 교육 확장 정책으로 초래된 대중 교육의 문제와, 교육 축소 정책으로 나타난 지식과 감각의 파편화⋅실용화 문제를 지적하고, ‘천재의 형이상학’에 토대한 교육론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니체는 소수 엘리트에게, 고대 그리스에 대한 감각과 그리스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길러줌으로써 새로운 독일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 교양 교육의 목적이자 목표로 보았다. 니체의 교양교육론에 함축된 소수 엘리트 교육론과 고대 그리스 교육론은 21세기의 대학에서 수용하기 쉽지 않지만, 대학을 교양기관보다 학문기관으로 간주함으로써 발생하는 지식과 감각의 파편화⋅실용화 문제에 대한 니체의 지적은 오늘날 대학의 교양교육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임을 논했다.

Abstract

At the invitation of the Basel Education Committee, the young Nietzsche, who was a professor at the University of Basel, offered five lectures on education. The collection of these lectures is called “On the Future of Our Educational Institutions.” In this lecture, Nietzsche critiqued German schools at the time, particularly their liberal arts education, and proposed alternatives. The goal of this research is to uncover the significance of Nietzsche’s view on liberal arts education as presented in his speech, as well as to investigate its applicability and limitations to liberal arts education in Korea today. Chapter II provides an overview of 19th-century Germany relevant to the lectures, Chapter III analyzes the main contents of Nietzsche’s view on liberal arts education as demonstrated in the lecture, and Chapter IV investigates the potential of Nietzsche’s views in the context of today’s universities. Nietzsche identified the problems of mass education caused by education expansion policies, as well as the fragmentation and practicalization of knowledge caused by education diminution policies, and proposed an educational view based on the ‘metaphysics of genius’ as an alternative. Nietzsche saw the purpose and goal of liberal arts education as acquiring a sense of ancient Greece and the ability to think like a Greek in order to create a new German culture. While Nietzsche’s view on the elite education and the ancient Greek culture implicit in his discourses of liberal arts education is difficult to accept for twenty-first-century universities, Nietzsche’s point regarding fragmentation and practicalization of knowledge that arise from viewing universities as academic institutions rather than liberal arts institutions allows us to critically reflect on the nature of liberal arts education in today’s universities.

1. 서론

사람의 생각이 그가 사는 시대를 넘어설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이 있다. 근대 철학자 헤겔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어떤 철학이 그가 처해 있는 현재 세계를 뛰어넘는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한 개인이 그의 시대를, 로도스섬을 뛰어넘어 밖으로 나간다는 망상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본다(Hegel, 1821/1970, p. 51). 헤겔에 의하면, 개인이든 철학이든 자기 시대를 결코 뛰어넘을 수 없다. 그래서 헤겔은 모든 개인은 “그 시대의 아들”이라고, 그리고 철학은 “자신의 시대를 사상으로 포착한 것”이라고 말한다(Hegel, 1821/1970, p. 51). 이에 반해 현대 철학의 길을 열었던 니체는 이런 헤겔과는 의견을 달리한다. 니체는 위대한 개인이나 철학은 시대를 넘어서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자신을 “시대의 아들이게끔 만드는 것”(Nietzsche, 1888/ 2002, pp. 11-12)과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이처럼 시대를 넘어서려고 투쟁하면서 니체는 ‘반시대적 고찰’이라는 제목의 책을 썼을 뿐만 아니라 부단히 “시대의 의붓아들”(Nietzsche, 1874/2005b, p. 420)이 되고자 노력했다.
니체의 시대 비판이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글은 바젤교육위원회의 초청으로 그가 행한 강연을 모아놓은 강연록 「우리 교육기관의 미래에 대하여」(이하 ‘미래 교육 강연’으로 표현)이다. 이 강연에서 니체는 당시 김나지움과 대학의 교육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독일의 미래 교육, 즉 통일된 독일의 미래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탐색했다. 니체는 강연을 모두 마친 후에 구체적인 개혁 방안들을 담은 책을 내고자 했으며, 비스마르크 수상에게 보낼 교육개혁 제안서를 준비하기도 했다(Prideaux, 2018/ 2020, p. 5).1)
미래 교육 강연의 내용을 보면 니체는 시대에 순응하는 ‘아들’이라기보다는 시대에 저항하는 ‘의붓아들’임이 자못 분명하게 확인된다. 그는 미래 교육 강연에서 당시 학교와 독일 문화를 비판하면서 자신이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고대 그리스 문화의 토대 위에서 새로운 김나지움과 독일 문화를 창조하자고 주장했다. 당시 독일 학교와 문화를 비판했다는 점에서 니체를 ‘시대의 의붓아들’로 볼 수 있지만, 그의 그런 비판의 토대로 작용한 고대 그리스 문화에 대한 강조는 독일 신인문주의(Neuhumanismus)의 정신을 잇고자 했다는 점에서 니체를 진정 ‘시대의 의붓아들’로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니체는 미래 교육 강연에서 신인문주의의 핵심 인물인 실러와 괴테 등을 천재이자 위대한 영웅으로 묘사하면서 그들의 정신을 계승할 의지가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다. 이런 맥락에서 니체는 독일 신인문주의라는 문화사적 맥락에서 당시 프로이센의 교육 정책과 현실을 비판한 철학자로 볼 수 있다.
니체는 미래 교육 강연에서 ‘사이비-교양’을 가르치는 당시 김나지움과 대학을 ‘진정한 교양’을 가르치는 교양교육기관으로 개혁하자고 주장했다. 이런 점 때문에 니체의 교양교육론은 21세기 학자들의 관심을 끌 정도의 충분한 매력을 지닌다. 그러나 니체의 교양교육론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내용 또한 포함하고 있다. 예컨대, 그는 대중 교육보다는 소수 엘리트를 위한 교육을 주장하며, 과학과 공학 등 기술적 합리성과 실용성을 추구하는 전공교육보다는 고대 그리스 문화에 기반한 교양교육을 대학교육의 본질로 주장한다. 그렇다면 대학교육이 이미 대중화되었고, 과학과 공학 등 국가경쟁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전공교육을 대학의 핵심적인 과업으로 간주하는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서 미래 교육 강연에 나타난 ‘니체의 교양교육론’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최근 들어 니체의 교육론 또는 교양교육론을 탐색하는 연구들이 비교적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니체의 초기 교육론에 관한 대표적인 연구로는 이병승(2005)의 「Nietzsche의 초기 저작에 나타난 교육사상 탐구」와 홍사현(2014)의 「교육 속의 야만: 니체와 아도르노의 교육 비판」 등이 있다. 그리고 니체의 교양교육과 관련된 연구로는 최순영(2016)의 「니체의 교양교육 비판」과 서광열(2018)의 「니체의 교양 교육 비판과 제안 - ‘교양의 속물’과 ‘레츠테 멘쉬’ 비판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이 외에도 본 논문에서 중요하게 다룬 ‘천재’ 개념과 관련된 선행 연구로는 엄인주⋅유재봉(2017)의 「니체의 이상적 인간 ‘천재’를 통해 본 자유교육의 의미」가 있다. 이런 연구들은 니체 교육론 일반이나 교양교육론을 소개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이들은 첫째, 시간의 흐름에 따른 니체의 (교양)교육론의 변화가능성에 대한 검토 없이 니체의 초기 교육론을 니체의 일반 교육론의 지평에서 다루고 있으며, 둘째, 니체 교양교육론이 오늘날의 교양교육에 주는 시사점을 찾는 데에 관심을 집중한 나머지 니체 초기 교양교육론의 문제나 한계를 충분히 다루고 있지 않다. 더 나아가 니체의 교양교육론을 가장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는 「우리 교육기관의 미래에 대하여」에 나타난 니체의 교육론 또는 교양교육론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글은 아직까지 찾을 수 없다.
평생에 걸쳐 자기 극복을 강조했던 니체는 종종 자기 사유에 대한 비판을 시도했다. 그래서 그의 교양교육론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의 사상의 변화 흐름 속에서 그의 교양교육론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니체의 초기 저작과 후기 저작 사이에는 사상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날 뿐만 아니라 교육에 대한 그의 생각도 전⋅후를 가를 수 있을 만큼 다소 뚜렷한 불연속이 존재한다. 이런 문제의식을 지니고 니체의 ‘미래 교육 강연’의 전후 맥락을 살펴보자. 이 강연은 1872년 1월부터 3월에 걸쳐 다섯 차례 행해졌다. 강연은 고대 그리스의 관점에서 당시 독일의 학교와 문화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고대 그리스 문화의 중요성은 니체가 이보다 먼저 집필한 『비극의 탄생』(1871년 집필, 1872년 출판)이나 이보다 조금 늦게 집필한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1874)에서도 반복되어 나타난다. 『비극의 탄생』이 고대 그리스 문화의 토대 위에서 당시 독일의 대중문화를 비판하면서 진정한 독일 문화라는 대안을 탐색하는 책이라면,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는 니체가 문제 많다고 생각했던 당시 김나지움이나 대학과는 구별되는 교육과 교육자상을 탐색하는 책이다. 그러나 니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초기 저작들에 대한 자기 비판을 수행했다.
바젤대학 교수 시절 『비극의 탄생』과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를 썼던 젊은 니체는 자신의 책상 위쪽에 바그너와 쇼펜하우어의 초상화를 걸어놓을 만큼 그들 사상에 도취되었다. 니체의 처녀작 『비극의 탄생』은 그가 바그너와 대화했던 내용을 토대로 집필했을 뿐만 아니라 바그너에게 헌정한 책이다. 그리고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글을 여러 차례 인용하는가 하면, 한 번은 여러 쪽에 이르는 분량을 통째로 인용할 정도로 쇼펜하우어 사상에 심취했었다.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별이 빛나는 밤하늘로 우리를 인도한 지도자며, … 가장 앞장서서 이 길을 걸어간 지도자”(Nietzsche, 1874/2005b, p. 413)로 칭송하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점차 바그너나 쇼펜하우어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2) 니체는 그토록 존경했던 바그너를 나중에는 “데카당스 예술가”, “인간”이 아니라 음악을 병들게 하는 “질병”이라고 비판했다(Nietzsche, 1888/2002, p. 28). 더 나아가 바그너를 비판하는 책을 두 권(『바그너의 경우』와 『니체 대 바그너』)이나 집필했다. 그리고 니체는 『비극의 탄생』의 새로운 서문에서 “이 책이 … 나에게 얼마나 불만스러우며, 얼마나 낯”선가라고 말하기도 했다(Nietzsche, 1872/2005, p. 12). 그는 더 나아가 이 책에서 “쇼펜하우어의 시체 썩는 냄새”가 난다고 말했으며(Nietzsche, 1889/2002b, p. 390), 쇼펜하우어 철학은 “역사상 가장 엄청난 심리학적 날조”라고 비판했다(Nietzsche, 1889/2002a, p. 159). 이처럼 니체가 바그너와 쇼펜하우어뿐만 아니라 이들의 영향을 받아 썼던 자신의 책에 대한 자기 비판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젊은 니체가 했던 미래 교육 강연 내용에 대해서도 ‘중⋅후기의 니체’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을 개연성이 있다.
이 글은 니체의 초기 교육관이 가장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는 「우리 교육기관의 미래에 대하여」에 나타난 니체의 교양교육론에 관한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1872년에 행해진 니체의 미래 교육 강연, 즉 교양교육론이 갖는 의미와 오늘날 대학교육에의 적용 가능성과 한계를 탐색하고자 한다. Ⅱ장에서는 니체의 미래 교육 강연과 관련된 19세기 독일의 시대 상황을 개관하고, Ⅲ장에서는 강연에 제시된 니체의 교양교육론의 주요 내용과 논리를 분석하며, Ⅳ장에서는 오늘날의 대학의 맥락에서 니체의 교양교육론이 갖는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2. 19세기 독일의 시대 상황

니체의 미래 교육 강연은 1872년이라는 독일의 역사적 맥락에서 교양교육의 문제와 대안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이 강연에는 당시 니체의 모국 프로이센과 관련된 여러 정책과 사건, 문화, 관련 인물들이 등장한다. 예컨대, 보불전쟁, 국민교육, 코체부(Kotzebue) 살해 사건 등 19세기 독일의 다양한 사건과 상황이 언급되고 있다. 더 나아가 니체는 당시 프로이센에 긍정적으로 또는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위대한 사상가들을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미래 교육 강연에 나타난 니체의 초기 교육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구체적인 사건과 상황 등을 포함한 역사적 맥락을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다.
니체의 「우리 교육기관의 미래에 대하여」라는 강연에서 ‘우리’는 누구를 가리키는가? 니체는 이 강연록의 ‘들어가는 말’에서 이를 분명히 한다. 이 강연은 특정 도시 바젤의 학교나 교육 문제에 관한 것도 아니고 모든 민족이나 나라를 포괄하는 학교나 교육 일반에 관한 것도 아니다. 이 강연은 독일의 교육제도에 관한 것이다. 니체는 미래 교육 강연에서 ‘우리’가 ‘프로이센-독일’ 사람임을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와 관련된 니체의 말을 인용해 보자.
나 자신이 바젤의 학교 및 교육 문제에 주제넘은 조언자로 여겨지는 것도 전적으로 거부하지만, 지금의 문화 민족들의 전체 지평에서 교양과 교양 수단에 다가올 미래를 예언할 생각은 더군다나 없다. 내 눈이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불확실해지는 것처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의 교육기관을 특수한 바젤의 교육기관으로도 또 모든 민족들을 포괄하는 더욱 광범위한 현재의 수많은 형식들로도 이해하지 않는다. 내가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여기서 향유하고 있는 독일 제도들이다. 우리는 이 독일 제도들의 미래, 즉 독일 초등학교, 독일 실업학교, 독일 김나지움, 그리고 독일 대학의 미래에 몰두해야 한다.(Nietzsche, 1872/2001, p. 166)3)
* 굵은 글씨는 니체에 의한 강조
위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니체의 강연은 프로이센-독일(이하에서는 맥락에 따라 ‘독일’ 또는 ‘프로이센’으로 표현)의 교육기관들에 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니체가 살았던 시절(1844-1900) 전후의 독일 상황은 어떠했는가? 니체가 성장하던 시절은 부르봉 왕가의 몰락과 시민사회의 출현을 촉발시킨 프랑스의 7월혁명(1830년)과 2월혁명(1848년)으로 독일에서도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많은 갈등과 변화가 시작되던 시기였다(윤병태, 2009a).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독일(당시 신성로마제국)의 영방국가 여기저기서 군주와 귀족들에 저항하는 시민운동이 일어나면서 사회 전반에 대한 개혁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당시 강력한 귀족 세력이 집권하고 있어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었던 프로이센4)은 국가가 국민교육을 책임지는 ‘국가교육체제’를 유럽에서 가장 먼저 구축했다. 17세기에 호엔촐레른 가문에서 출범한 프로이센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Friedrich Wilhelm Ⅰ: 1714- 1740) 때인 1716년에 모든 국민이 글을 읽고 쓸 수 있도록 초등학교 의무교육 정책을 도입했다. 그러나 문서상의 정책으로 상징성만을 지녔던 의무교육 정책으로 대표되는 프로이센의 국가교육체제는 프리드리히 2세(즉 프리드리히 대왕 Friedrich der Grosse: 1740-1786)의 치세 동안 안정적으로 정착되었다. 당시 교육개혁가 바제도브(Johann Basedow: 1724-1790)는 프랑스의 법률가였던 라 살로테(La Chalotais: 1701-1785)의 『국가교육론』과 루소의 『에밀』의 장점을 종합해 마련한 새로운 교육개혁 방안을 제시했다(Boyd, 1921/2016). 라 살로테는 그의 저서 『국가교육론』에서 국가가 국민교육을 책임지는 국가교육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768년에 바제도브는 라 살로테의 주장을 참조하여 프로이센에 ‘공공교육최고감독협의회’ 설치를 제안했고 몇 년 후 이 안이 프로이센에서 수용되었으며, 1794년에는 모든 대학과 학교를 국가기관으로 규정하는 교육법이 제정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유럽 국가 중 프로이센에서 국가교육체제가 가장 먼저 정착되었다. 그리고 프로이센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치세를 거치면서 18세기 중⋅후반에 경제적, 군사적으로도 유럽의 강대국 중 하나로 성장했다.
그러나 프로이센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Friedrich Wilhelm Ⅲ: 1797-1840) 때인 1807년에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영토의 3분의 1을 잃는 등 여러 수모를 겪었다. 이에 전쟁으로 잃어버린 물리적 힘을 지적인 힘으로 재건하고자 인문학자인 훔볼트를 기용하여 교육체제를 전반적으로 개혁했다. 바로 이때 후대에 근대 대학의 전형으로 알려진 베를린대학이 설립되었다(김재춘, 2023). 나아가 프로이센은 1815년에 워털루전투에서 나폴레옹의 침략군을 물리치면서 오스트리아제국과 경쟁하는 대등한 위치에 설 수 있었다. 그리고 워털루전쟁의 승리로 과거 신성로마제국에 속했던 영방국가들이 프로이센에 편입되기 시작하면서 프로이센 왕국은 점점 세력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1848년 2월혁명 이후 프로이센은 산업화, 군사력 강화, 애국주의 교육 등을 강화하면서 독일 통일의 초석을 쌓았다. 1861년에 즉위한 빌헬름 1세(Wilhelm Ⅰ: 1861-1888)는 비스마르크를 수상으로 등용하고, 1864년에 대 덴마크 전쟁, 1866년에 대 오스트리아 전쟁, 1870년에 대 프랑스 전쟁에서 연달아 승리하여 1871년에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제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윤병태, 2009b).
니체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Friedrich Wilhelm Ⅳ: 1840-1861) 때인 1844년에 태어났다. 초등학교 졸업 후 1854년에 마을에 있는 돔 김나지움에 입학했다가 1858년에 집에서 멀리 떨어진 명문 김나지움 슐포르타로 옮겼다. 당시 국제적으로 유명했던 슐포르타에서 니체는 고대 그리스에 대해 배웠다. 1864년에 본 대학에 입학하여 신학과 고대 철학을 공부했으며, 대학생 단체인 부르센사프트(Burschenschaft)에도 가입했다(Prideaux, 2018/2020).5) 군 복무로 학업을 잠시 중단했던 그는 1868년 봄에 복학하여 본 대학의 리츨 교수 밑에서 고전문헌학을 공부하다가 동년 10월에 리츨 교수를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겼다. 그리고 리츨 교수의 도움으로 24세인 1869년에 스위스 바젤대학의 고전문헌학 교수로 취임했다. 니체는 1870년에서 1871년까지 진행되었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자원하여 위생병으로 참여했고, 전쟁 후 바젤대학으로 돌아와 독일의 통일, 즉 독일제국의 성립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1년이 지난 1872년에 니체는 미래 교육 강연을 수행했다. 연이은 전쟁의 승리와 독일의 통일 등으로 독일 국민의 자긍심이 한껏 들떠 있던 상황이었다. 당시 독일에서는 “군사적 성공이 그 [독일] 교양에 이르는 무언가를 입증했다고 믿는”(Nietzsche, 1889/2002b, p. 397)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처럼 전쟁 승리와 자긍심의 고취로 형성된 독일 여론을 교양으로 간주하던, 즉 “여론에 불과한 독일 교양”(Nietzsche, 1889/2002b, p. 397)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니체는 통일된 독일의 미래 교육, 즉 진정한 교양교육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미래 교육 강연에서 제시했다.
한편 니체의 미래 교육 강연 내용은 독일 신인문주의라는 문화사적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니체가 활동하던 시대는 학문과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수많은 천재가 등장하여 ‘진정한 독일 문화’라는 탁월한 업적을 만들었던 신인문주의가 저물고 과학과 공학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시기였다. 흔히 ‘괴테시대(Goethezeit)’라고도 불리는 독일 신인문주의는 1750년대에서 1830년대까지의 문화사적 흐름을 일컬으며, 이런 신인문주의 정신은 개인의 내면적 힘의 자각과 통합적 지혜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빌둥(Bildung)’ 정신으로 요약된다(안성찬, 2009). 빌둥 개념에는 “고대 그리스 로마 이래의 서양 인문주의 문화 전통과 내면의 깊이를 지향하는 독일의 사상 전통, 그리고 당대의 계몽주의 사상이 하나로 융합된 근대적 전인교육의 이념”이 담겨 있다(안성찬, 2009, p. 101).
독일 신인문주의 전개 과정은 일반적으로 세 세대로 구분된다(안성찬, 2009, pp. 102-110). 첫 세대는 18세기 중⋅후반에 활동한 독일 시민계급 출신의 지식인들, 예컨대, 예술사가 빙켈만, 철학자 칸트, 문학자 레싱 등으로 대표된다. 이들에 의해 독일 신인문주의의 나아갈 방향이 설정되었다. 두 번째 세대는 19세기로의 전환기에 활동한 헤르더, 괴테와 실러로 대표된다. 이들은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면서 독일 신인문주의를 만개시켰다. 세 번째 세대는 19세기 초반에 활발하게 활동한 헤겔과 훔볼트로 대표된다. 헤겔은 국가 철학 체계를 정립하고, 훔볼트는 독일의 교육이념과 정책을 수립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훔볼트는 빌둥 개념을 적용하여 독일의 초⋅중등교육 체제를 정비하고 베를린대학을 설립했다(정영근, 1999). 이처럼 세 세대에 걸쳐 전개된 독일 신인문주의의 주된 특징은 고대 그리스 정신의 토대 위에서 새로운 독일 문화를 창조하고자 노력했다는 점이다. 니체는 미래 교육 강연에서 신인문주의자들을 여러 번 언급했다.6) 그중에서도 신인문주의를 꽃피운 두 번째 세대, 특히 괴테와 실러를 가장 많이 언급했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것은 니체가 첫 번째와 두 번째 세대의 신인문주의자들을 긍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반면에, 세 번째 세대의 신인문주의자인 헤겔과 훔볼트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니체는 헤겔을 국가 철학자라는 부정적인 맥락에서 주로 거론하고 있으며, 훔볼트의 경우 그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베를린대학을 설립하면서 그가 강조했던 대학의 자유, 특히 ‘학생의 배울 자유’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독일 신인문주의자들 외에 니체가 미래 교육 강연에서 언급하고 있는 중요한 사람 중 하나는 볼프(Friedrich August Wolf: 1759-1824)이다. 볼프는 1783년부터 나폴레옹이 독일을 침략했던 1807년까지 할레대학 교수로 지내면서 고전문헌학을 창시했던 사람이다.7) 고전학자였던 볼프는 문헌학을 고대의 역사, 문헌, 예술에 표현된 인간 본성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보았다. 달리 말하면, 그는 문헌학을 역사와 언어 연구를 통해 인간 삶 전체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이해했다. 니체의 미래 교육 강연에 따르면 볼프를 통해 신인문주의 정신이 김나지움에 흘러 들어갔고, 바로 이때 “학문의 양성소가 아니라 고귀한 교양을 위한 진정한 성소”라는 “김나지움에 대한 새로운 상”이 정립되었다(p. 220). 그러나 김나지움의 선생들이 볼프의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김나지움은 인문교육을 하는 곳이라기보다는 “학문성과 학자적 교육”(p. 220)을 하는 곳으로 퇴행했다. 니체는 볼프의 정신을 되살려 김나지움이 “고전교육의 위대한 흐름”(p. 220) 속에 다시 편입될 수 있기를 원했다.
다른 한편 니체는 미래 교육 강연에서 유럽에서 가장 먼저 구축한 프로이센의 국가교육체제, 즉 “국민교육”(p. 230) 또는 “보편적인 국가교육”(p. 240) 체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독일의 국가교육체제는 18세기 초 의무교육의 도입으로 시작되었다. 19세기 초 훔볼트는 의무교육으로 도입되었던 초등교육을 질적으로 개혁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그는 앵무새 흉내 내듯 암기 중심으로 진행되던 당시 초등학교 교육에 페스탈로찌(Johann Pestalozzi: 1746-1827)의 감각을 활용한 교육방법론을 적용하여 개별 아동의 성장에 의미있는 교육, 즉 자기 도야를 위한 기초교육을 수행할 수 있는 방향으로 초등학교 교육을 개혁했다. 또 김나지움에서는 고전교육을 통해 인간에게 내재한 힘들을 단련시키는 인문교육을 수행할 것을 주장했다. 이런 맥락에서 훔볼트는 오랜 전통을 지녔던 라틴어학교를 모두 김나지움으로 전환했으며8), 김나지움에서는 고대 그리스를 이상으로 삼아 인간 도야 능력을 길러주는 교육을 강조했다(정영근, 1999). 그리고 김나지움에서 그리스어, 라틴어, 모국어 등 언어교육의 중요성도 강조했는데, 이런 언어교육은 학생들이 대학에서 고전문헌학을 심층적으로 공부하는 데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유럽에서 고전문헌학은 오랫동안 신학과 법학의 부속 학문의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독일 신인문주의자들은 고전문헌학을 “신학이나 법학처럼 특정한 목적을 위한 지식이 아니라 인간을 자기 자신으로 도야하게 하는 순수한” 학문으로 생각했다(정영근, 1999, p. 348). 그리고 이들은 고전문헌학이 독자적인 학문적 정체성을 지닌다고 여기면서 이런 고전문헌학을 공부한 사람이 김나지움 교사가 되어야 김나지움 교육의 질이 높아질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지적 분위기에서 훔볼트는 1810년에 교사자격시험에 관한 법을 만들어 김나지움 교사 지망생에게 고전문헌학 시험을 치르도록 했다. 다른 한편, 김나지움 과정을 수료한 학생들이 대학에서 수학할 능력을 갖추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대학수학능력시험(das Abiturexamen), 즉 아비투어를 도입했다(Boyd, 1921/2016). 요약하면, 훔볼트는 ‘빌둥’을 위한 국가교육체제, 즉 자기 도야의 기초교육을 수행하는 초등학교,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김나지움, 스스로 학문연구를 수행하는 대학교육이라는 일관된 학교체제를 구축했다.

3. 니체의 독일 교양교육 비판과 대안 분석

니체는 미래 교육 강연에서 당시 “다른 국가들의 숭배”(p. 241) 대상이었던 독일교육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를 구체적으로 논하기 전에 그가 행한 미래 교육 강연의 구조와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자. 다섯 차례에 걸친 니체의 강연은 노 스승과 젊은 제자의 대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강연에서는 대화의 상황적 맥락과 강의의 주요 내용, 방향성이 제시되어 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강연에서는 당시 독일교육 문제에 대해 젊은 제자가 질문하고 노 스승이 대답하는 것을 니체와 친구가 옆에서 엿듣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네 번째와 다섯 번째 강연에서는 니체와 친구도 젊은 제자와 함께 노 스승에게 질문하면서 대화에 참여하는 형식을 취한다. 이런 강의 형식에서 흥미로운 것은 니체가 한편으로 노 스승에게 질문하는 젊은 사람 중 한 사람으로 등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노 스승의 입을 통해 니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섯 차례 강연에서 니체는 당시 독일교육의 문제와 원인을 지적할 뿐만 아니라 독일교육이 나아갈 방향, 즉 대안도 함께 제시하고 있다. 이 장에서는 첫째, 미래 교육 강연에서 니체가 제시한 독일교육의 문제와 그 원인을 분석하고, 둘째, 이를 극복하기 위해 니체가 제시하는 대안, 즉 미래 교육의 방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3.1. 독일교육의 문제와 원인

니체가 미래 교육 강연에서 제시하는 독일교육의 문제와 그 원인은 무엇인가? 그는 당시 독일교육의 문제로 두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 ‘교육의 확장’으로 인해 나타나는 문제들이 있으며, 둘째, ‘교육의 축소’로 인해 나타나는 문제들이 있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효과에서는 똑같이 해롭고 <또> 그 결과에서는 결국 합쳐지는 두 조류가 현재 본래 전혀 다른 토대 위에 건립된 우리 교육기관들을 <지배하고 있다.> 가능한 한 하나는 교육을 확장하고자 하는 충동이고, 다른 하나는 동일한 교육을 축소하고 약화시키려는 충동이다.(p. 169)
니체에 의하면 당시 독일교육 문제의 원인 중 하나는 ‘교육 확장’ 정책이었다. 교육 확장 정책으로 교육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교양을 “가장 구석진 곳까지 전파”(p. 194)할 것을 요구하는 교육 확장 정책은 당시 대중의 주목을 받았던 “국민경제학적 교의”(p. 194)에 근거했다. 니체는 이런 교의에 기반하여 실시되고 있던 국민교육을 비판한다. 왜냐하면 “가능한 한 많은 지식과 교양―따라서 가능한 한 많은 생산과 요구―따라서 가능한 한 많은 행복” 공식에 토대한 국민교육은 “소득과 가능한 한 최대의 화폐수입”을 교양의 목적이자 목표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p. 194). 국민교육에서는 이처럼 화폐수입을 중시하는 “‘쿠란트’적 인간을 키우는 것”을 교양의 과제로 삼게 되면서 “돈과 이익을 넘어서는 목적을 설정하며 많은 시간을 소모하는 교양은 모두 증오의 대상”(p. 195)이 되었다.
교육 확장 충동이 어떤 문제를 유발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교육 확장 충동은 먼저 “김나지움의 수적 과잉과 교사 과잉”(p. 232) 현상을 발생시켰다. 그리고 학교와 교사의 과잉은 필연적으로 “무교양”(p. 239)의 학교와 교사를 생산했다. 여기서 무교양은 사이비-교양, 즉 “잡지나 신문을 통한 소위 ‘문화이해’라는 천민적 공론영역”을 “교양의 기초로 숭배”한다(pp. 238-239). 그렇다면 학교와 교사의 과잉이 어떻게 무교양을 초래했는가? 국가교육체체의 구축으로 교사의 대우가 개선되면서 “생계를 위해 교양 선생”(p. 238)으로 나선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교사자격시험의 도입으로 고전문헌학 시험만 합격하면 누구나 교사가 될 수 있었다. 이렇게 교사가 된 사람들은 “새로운 세대에게 진정으로 독일적인 것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열정의 불을 지피는”(p. 222) 일, 즉 교양교육을 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고전교육을 통해 ‘올바른 교양’을 길러주어야 하는 김나지움에서는 고대 그리스 문화와, 다양한 방식으로 고대 그리스 정신을 표현하고 있는 독일의 대가에 관한 공부가 중요하다. 또 이런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그리스, 라틴어, 독일어 등 고전어와 모국어 훈련이 필요하다. 니체는 18세기 후반에 인문교육을 강조했던 볼프 시절의 김나지움을 이상적인 김나지움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국민교육을 위해 김나지움 교육이 확대되자 김나지움에서 고전교육은 점차 “명예의 한 편대”(p. 240)라는 교육적 이상으로만 여겨졌다. 그 결과 빌둥 전통을 지닌 김나지움 교육에서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었던 “개성은 선생에 의해 비난받고 배척당하지만, 독창성은 없고 겨우 평균적인 품위를 지킨 논문은 유리한 대우”(p. 209)를 받는 현상이 나타났다. 니체는 “천재의 권리를 민주화”(p. 193)하는 이런 김나지움을 개선하고 정화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김나지움을 파괴하고 그것을 새롭게 탄생”(p. 203)시키기 위한 전투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한편 당시 독일교육을 지배했던 또 하나의 흐름은 ‘교육 축소’ 조류였다. 여기서 교육 축소란 학문의 분화로 생긴 편협한 전문성으로 인해 ‘교양’이 축소 또는 폐기됨을 의미한다. 근대 사회에서 학문 연구의 폭이 광범위해짐에 따라 학자가 업적을 이루려면 “극히 특수한 전공 분야의 연구”(p. 197)만을 수행해야 했다. 그래서 자기 전공 분야만 공부한 “배타적인 전공 학자”(p. 197)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이들은 평생 어느 연장의 특정한 나사 외에는 어떤 다른 것도 만들어 보지 않는 “공장 노동자”(p. 197)와 비슷했다. 이처럼 김나지움이나 대학에서 “자유로운 교양인이 아니라 학자, 학문적 인간”, 그것도 “가능한 한 일찍 이용할 수 있는 학문적 인간”을 길러내는 교육을 하고 있었다(Nietzsche, 1874/2005a, p. 379). 니체에 의하면 이런 교육은 “잘못되고 비생산적인 문화 개념”에 기원을 둔 것이었다(Nietzsche, 1874/2005a, p. 379). 학문이 분화되면서 특정 분야만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교양은 “우연적이고 비개연적인”(p. 197) 것이 되었고, 그 결과로 교육기관에서 “교양을 축소”하고 심지어 “폐기”하는 현상이 나타났다(p. 198). 대중적인 독일 문화는 이처럼 무교양의 “편협한 전문성”만을 지닌 학자를 비판하기보다는 이들을 “사소한 것에서의 충실”, “육체노동자의 성실”, “고귀한 자족의 표시” 등의 특징을 지닌 사람으로 해석하면서 무교양의 학자에게 오히려 영광의 면류관을 씌워주었다(p. 197).
교육의 확장과 축소라는 두 조류가 합류하자 ‘언론’이라는 커다란 하천이 만들어졌다. 신문 등 언론이 교양의 자리를 대신하면서 “신문기자, 찰나의 하인”이 “위대한 천재의 자리”를 대신했다(pp. 198-199). 그 결과 삶의 중요한 문제에서 학자, 즉 “학문적 인간”은 발언할 기회를 얻지 못한 반면에 “학문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서로 붙여주는 끈적끈적한 계층인 언론”이 시대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p. 198).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교양을 이루는 “고대 그리스의 세계”는 신문, 소설, 이른바 ‘교양서적’으로 상징되는 “사이비-교양”이라는 압연기 밑에서 가차 없이 분쇄되어 사라져 버렸다(p. 199). 그 결과 진정한 교양은 “교양을 깊은 증오심으로 거부하는”(p. 245), “교양과는 거리가 먼”(p. 246) 학식으로 대체되었다. 니체는 이런 현상을 시녀 또는 하녀가 여신의 자리를 빼앗은 것으로 비유한다. 니체는 “부드러운 발에 맑은 영혼을 소유한” 여신을 “소득과 궁핍에 봉사하는” 지적인 시녀 또는 “쓸모있는” 하녀와 혼동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p. 248). 김나지움과 대학은 생존경쟁 능력을 갖춘 시녀 또는 하녀를 기르는 기관이 아니라 고상하고 숭고한 품위를 지닌 여신을 길러내는 기관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독일교육의 문제와 그 원인에 관한 니체의 논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편으로 교육이 확장되면서 교육은 대중화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교육이 축소되면서 교육은 파편화, 실용화되었다. 교육의 대중화와 파편화⋅실용화가 만나면서 교육의 주도권은 ‘위대한 천재’에서 ‘대중적인 언론’으로 넘어갔다. 그 결과 독일교육은 고대 그리스 영웅의 정신을 지닌 ‘진정한 교양인’을 길러내는 대신에 ‘무교양’ 또는 ‘사이비-교양’을 지닌 평균적인 인간, 즉 대중적 인간을 길러내게 되었다.
그렇다면 전통적인 인문교육을 하던 김나지움과 대학이 어떻게 쿠란트적 인간을 길러내는 기관으로 전락하게 되었는가? 니체에 의하면 그 원인을 정책적 차원과 이념적 차원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국가의 인위적인 교육 확장 정책이 문제였다. Ⅱ장에서 살펴보았듯이, 프로이센은 18세기 초에 유럽에서 최초로 초등교육을 의무화했을 뿐만 아니라 19세기 초에는 초⋅중⋅고등교육의 일관된 교육체제를 구축하면서 대학수학능력시험과 교사자격시험 제도를 도입했다. 니체는 이런 국가교육체제의 구축에 대해 프로이센이 국방과 유사한 방식으로 교육을 “국가의 존속과 힘에 유익한 것”(p. 241)으로 생각한다고 비판했다. 더 나아가 프로이센은 “문화의 비교[秘敎] 사제”로서 사이비-교양을 장려하며, 모든 국민이 “보편적인 국가교육의 횃불”을 손에 들고 자기 앞에 나타날 것을 강요했다(p. 240). 이처럼 국가가 교육에 적극적으로 개입함에 따라 거의 모든 젊은 학생들이 “김나지움 시절 천편일률적인 국가 문화”(p. 241)를 경험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니체에 의하면 프로이센은 국가교육체제를 구축하면서 국가가 지닌 “교양과 학교의 최고 운영권”을 적극 활용하여 “가능한 한 많은 학교를 인문교육으로 유도”했다(p. 240). 니체의 이런 발언은 1812년에 라틴어학교를 김나지움으로 전환하는 프로이센 교육 정책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국가는 또한 교육 확장을 가속화하기 위해 김나지움에 다양한 특권도 부여했다. 국가는 “모든 고위 공직과 대다수 하위 공직, 대학 입학, 그리고 가장 영향력 있는 군대의 특전을 김나지움과 연계”(p. 240)시켰다. 이같이 김나지움 교육을 확대하려고 국가가 특권을 부여하자 김나지움은 ‘교양을 위한 교육기관’에서 “생활고를 극복하기 위한 제도”(p. 249)로 변질되었다. 니체에 의하면 인문 김나지움이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한 ‘실업학교화 경향’을 띠게 되면서 프로이센은 “교양을 위한 교육기관의 종말”(p. 250)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개인의 교양을 강조하는 김나지움 전통이 강했던 프로이센에서 국가교육체제는 어떻게 정당화될 수가 있었는가? 달리 말하면 신인문주의 영향으로 인간 도야라는 빌둥의 전통을 지닌 프로이센의 학교들이 “국가가 인간 존재의 최고 목적이며 성과”(p. 241)이자 “국가가 교양의 목표요 이상”(p. 243)이라는 국가 교육론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는가? 니체는 바로 헤겔의 국가 철학과 국가주의 교육이념에 의해 가능했다고 본다. 니체는 ‘국가가 교양의 목표’라는 당시 국가주의 교육은 “한때 국가에 의해 장려되고 국가의 목적을 추구하던 철학 경향, 즉 헤겔의 철학”(p. 241)을 상기시킨다고 말했다. 니체에 의하면, 프로이센은 국가 목표로 추구해 온 “모든 교육 계획의 세목에 실용적인 사용이 가능한 헤겔 철학의 유물을 수용”(p. 241)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국가를 ‘절대적으로 완성된 윤리적 유기체’로 묘사하면서, 국민 개개인을 위해 교양이 해야 할 과제는 그가 국가에 가장 유익하게 봉사할 수 있는 장소와 위치를 찾는 데 있다”(p. 244)는 헤겔의 국가주의 교육이념에 의해 가능했다.
그러나 니체에 의하면 국가주의 교육이념과 정책은 ‘진정한 독일 정신’에 위험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국가가 “‘교양’이라고 부르는 것”은 “진정한 독일 정신과 … 교양”에 반하기 때문이었다(p. 240). 니체는 ‘국가가 장려하는 교양’을 독일의 종교개혁, 독일음악, 독일철학에서 유래하는 ‘진정한 교양’과 대조시켰다. 전자는 “신문쟁이들의 환호”를 받는 “사이비 문화”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었다(p. 243). 따라서 프로이센이 진정한 교양교육을 원한다면, 그리스의 고대 국가가 했던 것처럼,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어느 시대에나 유일무이하다고 인정받는 문화”(p. 242)가 싹 틀 수 있도록 국가가 학교를 보호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헤겔의 국가 철학이라는 이데올로기 세례를 받은 프로이센은 국가에 부여된 권한을 최대한 활용하여 학교와 교육에 무모하게 개입함으로써 “사이비 문화를 동맹자로 생각하는”(p. 244) 우를 범했다.
니체는 헤겔의 국가주의 교육이념뿐만 아니라 홈볼트의 ‘교육 민주화’ 방안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니체는, 마치 훔볼트의 주도로 설립된 베를린대학에서 강조한 새로운 교수법인 ‘강의법’과 ‘학생의 배울 자유’를 염두에 둔 것처럼, 강의법과 학생 자유를 강조했던 당시 대학교육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대학에 강의법을 도입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교육 문제를 니체는 다음과 같이 비유적으로 표현했다. “말하는 입 하나와 아주 많은 귀들, 그 반쯤 되는 수의 필기하는 손들”(p. 277). 수업에서 교수가 말하면 학생은 “귀를 통해, 청중으로”(p. 276) 듣는다. 학생은 가끔 강의를 “들으면서 쓰기도”(p. 276) 한다. 이런 학생의 쓰는 활동을 니체는 학생이 “대학의 배꼽에 매달려 있는 순간”(p. 276)이라고 묘사한다. 학생이 대학의 배꼽에 매달려 있는 ‘순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입의 주인(교수)’은 대체로 ‘귀의 소유자들(학생)’과 분리되어 있다. 학생들이 드물게 경험하는 그런 ‘순간’을 제외하고는 학생들은 대학이라는 교양교육기관에서 독립하여 자립적으로 생활한다. 니체는 중세 이래 지배적인 교수법이었던 ‘강독법’을 대체한 당시 진보적인 교수법인 “강의식 수업”(p. 277)을 이처럼 희화화했다. 더 나아가 베를린대학이 강조했던 학문의 자유, 특히 ‘학생의 배울 자유’를 신랄하게 비판했다.9) 니체는 학생이 교수로부터 이중으로 자유롭다고 비꼬듯이 말한다. 첫째로 학생은 특정 강의를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을 자유를 지니며, 둘째로 학생은 수강하는 수업에서 교수 말을 믿지 않거나 귀를 막고 듣지 않을 자유도 지닌다. “듣고 안 듣고의 선택권과 무엇을 들을 것인지의 선택권도 … 학생들에게 위임”되어 있는 “대학의 교양기계”의 작동 방식을 니체는 개탄하고 있다(p. 277). 이처럼 학생에게 “이중적 의미에서 자립성”(p. 277)을 제공하는 현상이 대학만이 아니라 김나지움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그는 “인문 김나지움에서 추구하는 자립성”이 이제 대학에서 “‘교양을 향한 학자의 자기교육’이라는 끝 간 데를 모르는 자부심”(p. 277)으로 나타난다고 묘사했다.
그렇다면 니체는 왜 교육에서 학생의 자유 또는 자립성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가? 그는 학생의 자유 또는 자립성의 문제를 유아의 걸음 배우는 훈련에 견주어 설명한다. 니체에 의하면 김나지움이나 대학에서 ‘학생의 배울 자유’를 강조하는 것은 올바른 걸음걸이를 배울 수 있게 “걸음마 연습용 끈에 묶”(p. 277)여 있어야 할 유아에게 ‘홀로 걷게’ 내버려 두는 것만큼 부적절하다. 올바로 걷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의 고된 훈련 과정을 거쳐야 한다. 유아를 ‘걸음마 연습용 끈’에 묶어 놓은 것은 유아에게 ‘올바로 걷는 법’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니체는 김나지움에서 이루어지는 언어교육 또한 ‘올바로 걷는 법’ 훈련으로 설명한다. “미숙한 애호가나 경험론자의 걸음걸이”와 “군인으로서 걷는 법”(p. 214)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많은 훈련을 통해 배운 군인의 발동작은 “새로운 습관, 제2의 천성”(p. 215)이 된다. 이런 훈련은 김나지움의 목적인 고전교육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올바로 걷는 법’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는 “복종과 적응에 다름 아닌 올바르고 엄격한 교육”(p. 215)이 필요하다. 학생들의 성장 과정에서 “남의 도움이 가장 필요한 상태, 즉 이 자연스러운 상태”는 모두에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 이처럼 “이끌어 주는 손을 가장 필요”로 하는 젊은이들에게 자유 또는 자립성을 강조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p. 279). 왜냐하면 제2의 천성이 되도록 “엄격한 습관과 관습을 얻도록 교육”(p. 211)하는 것이 김나지움에게 주어진 최고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혹독한 훈련 없이 자유의 세례를 받고 자란 젊은이들, 즉 “학문적으로 ‘자립한 자’들은 철학도 모르고 예술도 모”(p. 281)른 채 살게 된다.10) 그러면서 니체는 되묻는다. “위대한 지도자에게 헌신하고 거장들이 걸어간 길을 열심히 따라가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시급한 욕망이어야 할 그런 나이에 그를 자립성으로 내몬 사람은 누구인가?”(p. 284).
니체는 학생의 자유 또는 자립성의 강조로 인해 학생이 “조정하는 배의 나침반이 되어줄 머리 위의 별들이 모두 저버렸다”(p. 283)고 개탄하면서 당시의 김나지움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렇다면 새로 탄생시켜야 하는 미래의 김나지움은 어떤 모습일까?11)

3.2. 독일의 미래 교육

당시 독일교육을 ‘교육의 확장과 축소’ 정책의 산물로 비판했던 니체는 독일의 미래 교육의 대안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이 불행한 확장과 축소의 경향에 대항해 진정으로 독일적이고 전도가 유망한 경향들이 승리할 수 있도록 돕는 일, 다시 말해 가능한 한 커다란 확장의 반대로서 교육의 수축과 집중에 대한 충동이, 그리고 축소의 반대로서는 교육의 강화와 자족의 충동이 승리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 언젠가는 가능하지 않다면, 이 불행한 확장과 축소의 경향들과 관련하여 절망적으로 자포자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p. 170)
니체는 ‘교육의 확장’ 정책의 대안으로 ‘교육의 수축과 집중’을, ‘교육의 축소’ 정책의 대안으로 ‘교육의 강화와 자족’을 제시했다. 이 절에서는 니체가 대안으로 제시했던 ‘교육 수축과 집중’, ‘교육 강화와 자족’ 원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이에 따르면 학교와 교육은 어떻게 개혁되어야 하는지 살펴본다.
먼저 학교와 선생의 과잉과 교육의 대중화에서 독일 교양교육의 실패 원인을 찾았던 니체는 소수 엘리트 교육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니체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교양을 갖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타고난 재능의 측면에서 볼 때 극소수의 사람만이 진정한 교육의 길을 걸어갈 수 있”(pp. 228-229)다. 따라서 “선발된 개인, 위대하고 영원한 일에 적합한 사람”(p. 230)을 교육해야 한다. 그리고 한 민족의 전체 교육 수준의 평가는 ‘국민 전체의 평균적인 교육 수준’을 보고 하는 평가가 아니라 “시대의 영웅을 보고 하는 평가”(p. 230)다. 이런 교육관을 지닌 니체는 학교가 시대의 영웅을 길러내기 위한 교육을 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학교가 소수의 선발된 개인들에게 “진정한 교양인의 정신”, 즉 “위대한 시인과 예술가들의 정신”(p. 207)을 교육해야 한다고 본다. 이 맥락에서 교육을 확장하더라도 학교와 선생의 질을 높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느냐는 반론이 가능하다. 이런 반론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니체는 “수적으로 감축하지 않고도 [학교와 선생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p. 228)은 교육학적 문제에 제발 관여하지 말라고 말한다. 여기서 니체의 학교관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에 따르면 학교는 교양을 위한 기관이다. 그리고 진정한 교양인의 정신은 “위대한 시인과 예술가들의 정신”(p. 207)이다. 이런 교양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래서 니체가 대안으로 그리는 학교는 “귀족학교”(Nietzsche, 1889/2002b, p. 439)다. 따라서 니체의 학교는 소수를 위한 교육기관이 되어야 하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학교가 대중에게 교양을 가르치려고 시도한다면 교양은 필연적으로 사이비-교양으로 전락할 것이다. 이런 논리로 니체는 김나지움과 대학은 선택된 소수를 위한 교양교육기관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소수 엘리트 교육을 강조하는 니체의 ‘교육 수축과 집중’ 원칙은 “천재의 형이상학”(p. 232)에 근거한다. ‘천재의 형이상학’에서 말하는 천재란 어떤 사람인가? 니체는 ‘위대한 천재’의 예로 레싱, 빙켈만, 괴테, 실러 등을 들고 있다(pp. 258-260). 이들은 힘든 “교육적 투쟁과 예술적 재능”의 결과로 “고대 그리스에 대한 감각”(p. 217)을 갖게 된 자들이다.12) 니체는 실러, 괴테와 같은 위대한 천재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리스의 고향”이라고 보았다(pp. 223, 226). 그래서 교양교육기관은 젊은이들에게 “그리스적 방식으로 생각”(p. 233)할 수 있게 교육해야 한다.
그렇다면 젊은이들이 ‘고대 그리스에 대한 감각’을 갖거나 ‘그리스적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니체에 따르면 그들은 지도자 또는 스승을 통해 이를 배워야 한다. 젊은이들에게 고대 그리스에 대한 감각을 갖춘 대가들, 즉 실러와 괴테 같은 “우리 독일의 대문호들”(p. 216)이 필요하다. 교육은 “‘자유로운 인격’ 운운하면서 이것저것 모두 용인”(p. 211)하는 야만적인 활동이 아니다. 교육은 젊은이들을 “천재의 왕권 아래 엄격한 복종”(p. 210)에 길들이는 활동이다. 그래서 니체는 모든 교양은 “복종과 함께 시작한다”(p. 288)고 말한다.
니체의 이런 주장은 당시든 현재든 대단히 과격하다. 학생의 자유와 자립성을 강조하던 계몽주의 시대에 어떻게 ‘천재의 왕권’, ‘엄격한 습관과 관습’, ‘복종’ 등과 같은 말을 그토록 당당하게 할 수 있었는가? 니체의 이런 주장 또한 ‘천재의 형이상학’에 근거한다. 그에 의하면 지성의 제국에는 ‘자연적 서열’이 존재한다. 지적 피라미드의 정점에는 “위대하고 관조적인 개인들”이 있고, 바닥에는 “잠자고 있는 둔한 대중”이 있다(p. 257). 그리고 피라미드의 정점과 바닥 사이에는 “무수한 중간 단계들”(p. 257)이 존재한다. 이런 지적 피라미드에 있는 신성한 질서를 익히고 정점에 설 수 있는 교양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교육의 힘이 필요하다. 그러나 당시 김나지움은 이런 자연의 질서에 적합한 교양인-천재를 길러내기 위한 교육과는 반대되는 교육을 수행했다. 김나지움은 “위대한 개인의 지배에서 대중을 해방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서, 지성의 세계에서 원래 작동하고 있던 “가장 신성한 질서, 천재의 왕권 아래 봉사하는 대중”(p. 230)의 질서를 뒤엎고자 했다. 니체는 학생의 자유나 자립성을 강조했던 당시 김나지움의 교육관을 “개똥철학”(p. 218)으로 비하하면서, 이를 ‘천재의 형이상학’과 대비시켰다.
그렇다면 진정한 교양교육을 위해 김나지움이나 대학에서는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니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대 그리스 고전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를 “교양의 고향”(p. 216)으로 보았다. 사실 당시 김나지움이나 대학에서도 고대 그리스를 가르치려고 “문헌학과를 신설”했을 뿐만 아니라 “고등학생들을 문헌학적으로 준비”시키는 교육을 수행하고 있었다(p. 281).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왜 김나지움이나 대학을 교양교육기관이 아니라고 말했는가? 그가 보기에 당시 학교에서는 고대 그리스를 잘못된 방식으로 가르치고 있었다. Ⅱ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김나지움 선생이 되려면 고전문헌학 시험을 치러야 했다. 그래서 당시 김나지움 교사들은 모두 고전문헌학을 공부한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대다수의 김나지움 선생들은 그리스적 감각을 갖지도 못했고 그리스적 방식으로 생각할 줄도 몰랐다. 김나지움 선생 중에는 “빵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 직업적으로 그리스인들과 관계를 맺”(p. 232)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그 결과 문헌학자들에 의해 그리스적 감각이 살아나기보다는 그리스가 “문헌학자들로 인해 산산조각”(p. 235)나기에 이르렀다. 니체에 의하면, 당시 고전문헌학이 그리스에 대한 감각을 길러주지 못하자 문헌학을 공부하다가 실제로 “손 떼고 물러난”(p. 235)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상황을 목격한 니체는 고대 그리스를 공부하는 사람을 두 유형, 즉 ‘학자’와 ‘교양인’으로 구분했다. “학자와 교양인은 두 개의 상이한 영역”(pp. 212-213)에 속한다. ‘학자’로서 공부하는 것과 ‘교양인’으로서 공부하는 것은 서로 다르다. 학자는 오로지 학식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지방과다증”(p. 238) 환자에 비유된다. 그러나 교양인에게 학식은 “고귀한 목표를 지향하는 교양에서 비롯된 자연스럽고 의도하지 않은 부수 효과”(p. 238)에 불과할 뿐이다. 당시 김나지움에는 학식만을 추구하는 지방과다증 환자로 득실거렸다. 그래서 니체는 “병든 신체의 이상비대증”(p. 238)에 비유되는 ‘학식의 양성소’ 역할을 하는 김나지움을 교양교육기관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니체에 의하면 신인문주의 정신을 지닌 전통적인 문헌학자가 ‘학식을 갖춘 교양인’이었다면, 당시 젊은 문헌학자들은 단지 ‘학식만을 갖춘 학자’였다. 니체는 이런 학식을 “먼지를 뒤집어쓴 허섭스레기”(Nietzsche, 1889/2002b, p. 408)라고 비판했다. 그가 “갓 부화한 새끼들”(p. 233)로 지칭하는 젊은 학자들은, 그리스적 감각과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교양인과 달리, 그리스의 ‘사소한 것’13)에 평생 관심을 가졌다.
니체의 ‘천재의 형이상학’이 교육 방법에 주는 시사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니체가 그리는 미래 교육에서는 학생의 자유 또는 자립성보다는 스승 또는 지도자의 훈육이 더 중요하다. 젊은이를 교양으로 인도해 줄 지도자의 유무는 학생의 삶에 큰 차이를 만든다. 지도자가 없는 경우 “회의와 활력, 삶의 궁핍, 희망과 낙담 때문에 …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방황”(p. 283)하는 젊은이들은 자신에게 진짜 중요한 것을 찾으려는 “자기 투쟁”을 멈추고 “아무 일이나 그것이 실제 유용하다면, 비록 하찮다 하더라도 그 일을 하겠다는 감정”에 사로잡힌다(p. 283). 반면, 자신을 교양으로 인도해 줄 지도자가 있는 경우 젊은이는 “다시 자신을 추스”르고 “아직 자신을 위에 붙잡아 둘 수 있는 힘”을 느끼면서 자부심과 고귀한 결의로 “편협하고 사소한 전문성”에 “다시 휩쓸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버팀목과 지주를 필사적으로 붙잡”는다(p. 282). 니체는 젊은이들이 “진정한 교양을 가진 저 흔치 않은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을 지도자와 길 안내자로 삼”(p. 267)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상에서 논의한 내용을 요약해 보자. 니체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독일의 미래 교육은 천재의 형이상학에 근거한다. 천재의 형이상학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교육적 함의를 지닌다. 첫째, 교양교육기관으로서 김나지움과 대학은 대중을 위한 교육기관이라기보다는 소수 엘리트를 위한 교육기관이다. 둘째, 김나지움과 대학은 고대 그리스에 대한 감각과 그리스적 방식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갖춘 교양인을 길러야 한다. 셋째, 이런 교양인을 기르기 위해서는 학생의 자유 또는 자립성을 존중하는 교육이 아니라 천재의 왕권에 복종하는 훈련과 교육이 필요하다. 이것이 천재의 형이상학에 근거한 니체의 대안적인 교양교육의 주요 내용이다.

4. 니체의 교양교육론의 가능성과 한계

앞 장에서 우리는 미래 교육 강연에 나타난 당시 독일교육에 대한 니체의 비판과 대안을 살펴보았다. 니체는 김나지움과 대학을 교양기관으로 보았다. 그리고 교육을 “자기 도야와 자기 방어라는 새로운 개념”(Nietzsche, 1889/ 2002b, p. 401)으로 규정함으로써 진정한 교육은 곧 교양교육이라고 생각했다. 달리 말하면, 니체는 교육과 교양을 동일시했다. 이렇게 볼 때 니체의 교육론 즉 교양교육론의 핵심은 첫째,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에게 둘째, 고대 그리스 감각과 사고방식을 길러주어, 셋째, 새로운 독일 문화를 창조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특징을 지닌 니체의 교양교육론을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니체의 교양교육론의 현대적 의의와 한계를 검토하기에 앞서 니체 시대와 오늘날의 학교에서 교양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니체는 당시 김나지움과 대학을 교양교육기관으로 보았다. 물론 니체가 교수로 재직했던 스위스의 바젤대학이나 훔볼트가 설립했던 독일 베를린대학에도 철학과 고전문헌학 전공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대학을 전공교육을 위한 기관이라기보다는 교양교육을 위한 기관으로 보았다. 니체는 “교양”을 위한 기관이었던 당시 김나지움과 대학이 “학식”을 위한 기관으로, 더 나아가 “언론”을 위한 기관으로 변질되었다고 비판했다(p. 206). 그러면서 대학을 학문하는 기관으로 인정하더라도 대학은 학생들에게 ‘삶의 그림’14)을 이해할 수 있는 교양을 우선적으로 길러주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야 이들이 삶을 위해서 학문을 올바르게 활용할 수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니체에게 교양기관인 대학에서는 교양교육이 본질적인 과업이며, 전공교육은 부차적인 의미만을 지닌다.
그러나 21세기 대학에서 교양과 전공의 위상은 니체의 시대와 완전히 다르다. 지금의 대학에서는 대체로 전공교육이 대학의 본질적인 과업이며, 교양교육은 전공교육을 시작하기 전에 잠깐 거치는 일종의 장식적인 교육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대학에서 교양교육의 위상은 미국과 비교할 때 매우 낮다. 우리나라에는 미국의 교양교육대학(liberal-arts college) 같은 정체성을 지닌 기관15)이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학에서 교양교육은 양적인 면에서나 질적인 면에서 주변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우리나라 대학의 교양교육의 필수이수 학점은 대체로 대학 졸업학점의 약 1/3~1/4 정도를 차지하며,16) 교양교육 강의의 상당한 비율을 비정규직 교수들이 맡고 있다. 니체의 교양교육론을 다룰 때 우리는 대학과 교양의 위상이 니체 시대와 오늘날 간에 큰 차이가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니체는 자신의 교양교육론에서 교양교육 문제의 원인으로 ‘교육의 확장’과 ‘교육의 축소’ 경향성을 지적했다. 니체가 ‘교육의 확장’의 대안으로 제시한 ‘교육의 수축과 집중’ 원칙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수용하기가 쉽지 않다. Ⅲ장에서 살펴보았듯이, 니체는 교육 확장 정책의 결과로 나타난 대중 교육을 비판하면서 교육의 수축과 집중 정책, 즉 소수의 엘리트 교육을 주장했다. 그 이유는 매우 힘들고 어려운 교양을 대중에게 가르치면 대중은 필연적으로 교양을 왜곡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교양 즉, 고대 그리스에 대한 감각과 그리스적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그리스어, 라틴어, 독일어 등 고전어와 모국어를 공부해야 할 뿐만 아니라 오랜 기간의 고된 훈련이 필요한 고전교육을 받아야 한다. 이런 고전교육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어렵고 그것이 성취되는 것은 너무 드문 일이며, 극도의 복합적인 재능을 요구”(p. 212)하기 때문에 소수 엘리트를 대상으로 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첫째,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에게 교양교육을 제공하며, 둘째, 고대 그리스적 감각과 사고방식을 길러주는 교양교육을 해야 한다는 니체의 주장에 동의하기 어렵다. 다만 후자의 경우 부분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그리스, 르네상스, 독일 신인문주의 시대가 배출한 위대한 천재, 시인이나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들을 지적 및 감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오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교양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교양인으로서 이들에 대한 이해 능력을 갖추는 것은 필요하다. 다만 니체가 특정 시대에 대한 지나친 의미 부여, 즉 고대 그리스를 ‘교양의 고향’으로 단언하는 등 고대 그리스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니체의 개인적 특성 또는 니체가 살았던 시대의 인식적 한계로 보인다. 초기 저작에서부터 후기 저작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미래 철학을 이야기했던 니체가 약 100년 전 볼프가 활동했던 시대인 18세기의 김나지움과 대학을 이상적인 교양교육기관으로 보는 한계를 드러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니체가 ‘교육의 확장’이라는 시대정신에 저항하고 비판하는 ‘의붓아들’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인정하더라도 그가 제시하는 대안은 미래보다는 과거를 지향한다는 한계를 지닌다. 미래 교육 강연에 나타난 니체의 초기 교육론은 교양교육의 이상을 미래보다는 과거 즉, 볼프 시대의 김나지움, 더 근원적으로는 고대 그리스에서 찾고자 함으로써 미래 지향적인 교양교육관보다는 과거 지향적인 교양교육관을 지녔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반면에 당시 독일교육의 또 다른 문제의 원인으로 니체가 지적한 ‘교육의 축소’ 현상과 그 대안으로 제시한 ‘교육의 강화와 자족’ 원칙은 오늘날의 대학 교양교육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니체는 자신의 전공 분야 연구만을 수행하는 ‘배타적인 전공 학자’를 길러내는 당시의 독일교육을 강하게 비판했다. 니체에 의하면, 특정 전공 분야만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는 상대적으로 깊이 있는 지식을 갖춘 전문가로 볼 수 있지만, 전공 외의 분야에서는 언론인만도 못한 사람이다. 그래서 니체는 ‘삶의 그림’을 이해할 수 있는 폭 넓은 교양을 공부하는 대신에 좁은 영역의 학문만을 공부하는 당시의 시대 경향성을 ‘교육 축소’ 충동이라고 불렀다. 이런 교육 축소 충동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교양교육, 즉 교육다운 교육을 해야 하며, 니체는 이를 ‘교육의 강화와 자족’의 원칙이라 명명했다. 니체가 언급하고 있는 이런 ‘교육 강화와 자족’의 원칙은 최근 들어 취업이 대학과 학생 모두에게 최고의 과업이 되고, 교과활동과 비교과활동을 포함한 대학의 모든 교육활동을 취업 준비와 연관시키면서 교양교육이 존립 위기에 처해 있는 우리나라 대학교육을 근본적으로 반성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 ‘교양기관’이었던 대학이 취업으로 상징되는 ‘생활고의 기관’으로 전락하면서 우리나라 대학의 교양교육은, 당시 니체가 독일교육을 비판했던 것처럼, ‘형식화된 교육’, ‘사이비-교양’, ‘기형적인 교양교육’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 이런 점에서 현재 우리나라 대학교육은 니체 당시 독일대학의 교양교육과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볼 수 있다.

5. 결론

이 글은 니체가 젊은 시절에 행한 미래 교육 강연에 나타난 교양교육론의 가능성과 한계를 탐색하는 연구였다. 젊은 니체는 자신의 ‘천재의 형이상학’에 근거하여 당시 독일교육의 문제를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미래 교육 강연을 수행했다. 니체의 교양교육론은 한편으로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수용하기 쉽지 않은 엘리트 교육론, 고대 그리스 교육론 등을 포함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니체의 교양교육론은 삶의 특정 영역만을 다루는 전공교육의 파편화 문제, 취업을 최우선적으로 준비하는 실용성 교육의 문제 등 21세기 우리 대학교육을 되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문제들도 다루고 있다. 이처럼 니체의 교양교육론에는 오늘날 교양교육 논의에 적절한 것과 부적절한 것이 혼재하고 있어서 그 시사점을 탐색할 때 니체의 교양교육론의 현대적 적용 가능성과 한계가 무엇인지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세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이 글의 서론에서 제기한 문제, 즉 니체를 ‘시대의 아들’로 볼 것인가 아니면 ‘시대의 의붓아들’로 볼 것인가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초기 교육론으로 한정해서 볼 때, 니체는 당시 독일 교양교육을 비판하면서 대안을 탐색했다는 점에서 시대의 아들이기보다는 시대의 의붓아들이 되고자 노력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니체가 미래 교육 강연에서 시대정신에 저항하면서 대안으로 제시한 교육은 미래 지향적인 교양교육이었다기보다는 과거지향적인 교양교육이었다는 한계를 지닌다. 니체가 교양의 ‘고향’을 언급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교양의 의미를 다가올 미증유의 미래가 아닌 ‘지나간 현재’인 과거에서 찾고 있다. 니체에게 진정한 교양이란 고대 그리스적 감각과 사고방식을 갖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니체는 결과적으로 ‘과거의 아들’이 되고자 당시 교육의 확장이라는 ‘진보적인’ 교육개혁 정책들을 거부한 것으로도 해석가능하다. 니체는 시대정신에 저항하는 의붓아들이 되고자 노력함으로써 우리에게 자신의 진보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면, 멀게는 고대 그리스를, 가깝게는 볼프가 활동했던 이른바 괴테시대를 교양교육이 지향해야 하는 이상적인 시대로 제시함으로써 우리에게 자신의 보수적인 면모 역시 드러냈다. 시대정신에 저항하면서 시대를 극복하고자 했던 니체가 결국 다다른 곳이 미래의 아들이 아니라 과거의 아들 자리라는 아이러니한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니체의 초기 교양교육론이 노정하는 이 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대의 의붓아들로 살고자 평생 자기 극복을 감행했던 니체를 따라 시계열적 흐름 속에서 드러날 그의 교양교육론의 변화를 추적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 다룬 니체의 교양교육론은 그의 초기 교육론, 특히 ‘미래 교육 강연’에 나타난 교양교육론이다. 니체의 초기 교양교육론은 한편으로 니체가 고대 그리스 사회를 이상적인 사회로 동경하던 시기에, 다른 한편으로 위대한 천재로 생각했던 쇼펜하우어와 바그너 사상에 사로잡혀 있었던 시기에 펼쳐진 교육론이다. 그러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집필하던 중기의 니체는 지난 10년 동안 자신이 추구했던 이상적인 지식, 즉 각종 형이상학(예컨대, 천재의 형이상학, 예술가-형이상학 등)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 니체는 이런 형이상학에는 “생리학과 의학과 자연과학” 등이 추구하는 “실재성이 결여”되어 있다면서 형이상학을 생리학과 대비시켰다(Nietzsche, 1889/2002b, p. 408). 그는 형이상학에 전제된 “이상주의”를 “반자연”적인 것으로 간주(Nietzsche, 1889/2002b, p. 386)하면서 자연주의자인 니체 자신의 사유가 미래 언젠가에는 “인류의 ‘형이상학적 욕구’의 뿌리를 발본색원하는 도끼”(Nietzsche, 1889/2002b, p. 412)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초기 니체가 형이상학에 얽매인 ‘낙타’의 삶을 살았다면, 중기 니체는 ‘사자’처럼 자유를 찾아 그런 형이상학에 저항하며 투쟁했고, 후기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라는 ‘아이’를 출산하는 정신의 변신을 경험했다. 이처럼 니체의 거듭된 변신을 고려할 때, 그리고 후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해체와 생성의 영원한 수레바퀴로서 ‘영원회귀’와 그런 영원회귀를 의욕하는 ‘힘에 의지’를 자기 사유의 핵심으로 깨닫게 된 점을 고려할 때 니체의 후기 교양교육론은 초기 교양교육론과 다를 가능성이 크다. 니체의 바그너와 쇼펜하우어와의 만남과 헤어짐, 즉 한 때 존경하며 따랐던 바그너와 쇼펜하우어를 비판하고 거리를 두면서 결국 자신만의 ‘아이’를 생산한 니체를 보면 후기 니체는 자신의 초기 교양교육론을 해체하고 새로운 교양교육론을 생산했을 개연성이 있다. 니체가 후기 저작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자기 극복을 강조하면서 이전의 자신을 파괴하고 새로운 자신을 형성하는 활동을 무한히 반복하는 영원회귀적 존재인 위버멘쉬를 새롭게 도입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만간 니체의 후기 사상에 나타난 교양교육론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Notes

1) 니체는 총 6회에 걸친 미래 교육 강연을 기획했다. 그러나 5회 강연을 끝냈을 무렵 건강이 악화되어 6회차 강연을 진행하지 못했다. 그는 6회 차 강연에서는 “그동안의 내용을 바탕으로 교육개혁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들을 내놓”을 계획이었다(Prideaux, 2018/2020, p. 172).

2) 니체가 바그너/쇼펜하우어와 어떻게 만나고 왜 헤어졌는지에 관해서는 김재춘(2019)의 연구를 참조 바람.

3) 이하 이 논문의 주된 분석 대상인 「우리 교육기관의 미래에 대하여」(Nietzsche, 1872/2001)의 내용을 인용할 때 편의상 쪽 수(예컨대, p.○○○)만을 명기한다.

4) 니체는 자서전격인 『이 사람을 보라』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 프로이센의 분위기를 “[18]50년대의 눅눅한 공기”라고 표현했다(Nietzsche, 1889/2002b, p. 362). Prideaux 역시 니체의 삶을 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니체는 “전반적으로는 군국주의와 속물근성에, 구체적으로는 비스마르크가 통치하던 프로이센에 극심한 혐오감”(2018/2020, p. 141)을 표현했다.

5) 니체는 교양교육에서 지도자의 중요성을 말하기 위한 예시로 부르센사프트(Burscgenschaft)의 ‘코체부 살해 사건’을 언급한다. 니체는 당시 진보적인 대학생 단체였던 부르센사프트의 정치 참여 활동을 “강렬한 본능”(p. 288)을 지닌 활동이라며 긍정적으로 묘사했다. 다만 이처럼 ‘강렬한 본능’을 지녔던 당시 학생회가 지도자인 “천재의 부재”(p. 289)로 인해 코체부를 살해하는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다고 평가했다.

6) 니체는 미래 교육 강연에서 빙켈만, 칸트, 레싱은 각각 3번, 괴테는 10번, 실러는 13번, 헤겔은 6번 언급했다. 헤르더와 훔볼트는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 이 외에도 볼프는 3번, 베토벤은 2번 언급하고 있다.

7) 볼프는 1787년에 할레대학에 김나지움 교사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전문헌학과를 설치했다.

8) 1812년에 제정된 프로이센 규정에 따르면, 대학 진학 준비교육을 하는 모든 학교는 김나지움이라는 이름을 써야만 했다. 그 결과 예전의 라틴어학교는 모두 김나지움으로 바뀌었다.

9) 니체가 ‘학생의 자유’를 비판했다는 사실은 니체의 다른 저작, 예컨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나 『선악의 저편』에서 그토록 강조했던 ‘자유 정신’과 모순되지 않느냐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니체가 긍정하는 자유 정신은 유럽이나 미국의 영향을 받았던 당시 독일의 자유 정신과는 다른 “새로운 종류의 자유 정신”(Nietzsche, 1889/2002b, p. 400)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니체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다시 소유하는 자유롭게 된 정신”(Nietzsche, 1889/2002b, p. 404)을 추구했다.

10) 니체에게 진정한 교양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기준을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 철학에 대한 욕구, 둘째, 예술에 대한 본능적 감각, 셋째, 고대 그리스 문화 (278쪽 참조)

11) 니체는 미래 교육 강연에서 독일의 중등교육기관인 김나지움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왜냐하면 학생 자신이 선택한 학문을 스스로 연구하며 배우는 대학보다는 스스로 학문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김나지움이 독일 정신과 교양을 교육하는 데서 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12) 미래 교육 강연에서 니체는 천재를 재능과 관련해서 여러 차례 이야기했다. 진정한 교육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극소수의 사람은 “타고난 재능”(p. 228)을 지닌 사람이며, 괴테, 실러와 같은 위대한 천재들은 “교육적 투쟁과 예술적 재능의 결과”(p. 217)이다. 그리고 고전교육은 “복합적인 재능”(p. 212)을 필요로 한다. 이렇게 볼 때 니체의 초기 사상에서 ‘타고난 재능’은 천재의 필요조건이다. 니체의 초기 저작에서 빈번하게 나타났던 천재 개념은 후기 저작에서는 매우 드물게 나타날 뿐만 아니라 그 뉘앙스 또한 달라졌다. 타고난 재능을 강조했던 니체 초기의 천재 개념이 후기에서는 변신의 의지를 강조하는 위버멘쉬로 대체 또는 동일시되면서 ‘천재의 소수성’을 강조하던 니체의 초기 천재 개념이 후기에는 ‘천재의 몰락성’을 강조하는 개념으로 달라졌다. 1889년에 출간한 후기 저작 『우상의 황혼』에 제시된 니체의 천재 개념은 초기 저작에 제시된 천재 개념과 그 성격이 확연히 다르다. “천재는 - 작업에서나 업적에서 - 필연적으로 낭비하는 자이다. … 말하자면 자기 보존 본능이 풀어져 있다. … 그는 발산하고, 넘쳐흐르고, 자신을 탕진해버리며, 자신을 아끼지 않는다.”(Nietzsche, 1889/2002a, p. 185). 이런 후기 천재관은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서론에서 묘사하는 위버멘쉬의 특성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

13) 니체가 제시한 ‘사소한 것’의 예시는 다음과 같다. 그리스 시인과 로마 시인의 시구들을 세면서 7:13=14:26의 비율을 발견하거나 호메로스의 시를 ‘위로ana’와 ‘아래로kata’라는 전치사들 관점에서 보면 어떨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찾는 활동(234쪽 참조). 이런저런 철학자가 사유하거나 사유하지 않은 것 또는 이런저런 저서가 그가 쓴 것이 맞는지 아닌지 또는 이런저런 독해가 더 우수한가 하는 질문들(280쪽 참조) 등.

14) 니체에 의하면 교양은, 삶의 특정 영역의 지식을 얻기 위한 학문과는 달리, 삶의 전체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삶의 그림”(Nietzsche, 1874/2005b, p. 414)을 얻기 위한 것이다. 비유컨대, 교양인은 ‘삶의 그림’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인 데 반해, 학자는 “저 캔버스와 물감을 알려고”(Nietzsche, 1874/2005b, p. 414) 하는 사람이다. 학자가 캔버스의 특징이나 물감의 화학 성분을 파악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결코 그림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조정하는 역할의 전체상이 없다면, 개별 학문은 가도 가도 끝없는, 우리 인생을 더 혼란스럽게, 미로같이 만드는 실에 불과”(Nietzsche, 1874/2005b, p. 414)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교양은 “보편적 삶의 상형문자”(Nietzsche, 1874/2005b, p. 414), 즉 삶의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15) 미국에는 학부에서 교양교육만을 전문적으로 실시하는 교양교육대학(liberal-arts college)이 상당수 있다. 교양교육대학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미국에서 오랫동안 대학 평가를 수행해 온 한 언론(US News & World Report)은 교양교육대학의 기준을 “주로(almost exclusively) 학부교육만을 강조하는 대학”으로서 “교양 분야(arts & sciences)에서 50% 이상의 학위를 수여하는 대학”으로 삼고 있다(Morse, R. & Brooks, E., 2023, September 17, www.usnews.com/education/best-colleges/articles/how-us-news-calculated-the-rankings). US News & World Report가 2023년 9월에 발표된 2024년 ‘미국 교양교육대학 순위(National Liberal Arts Colleges Rankings)’에 따르면, 평가 대상 211개 대학 중 Williams College가 1위, Amherst College가 2위, United States Naval Academy가 3위, Pomona College가 4위, Swarthmore College가 5위로 나타났다(www.usnews.com/best-colleges/rankings/national-liberal-arts-colleges) 한국에 잘 알려진 대표적인 교양교육대학 중의 하나로 학부 4년 동안 고전 100권 읽기를 중심으로 교육하는 St John’s College가 있다. 이 대학에 대해서는 조한별(2016)의 『세인트 존스의 고전 100권 공부법』 참조 바람.

16) 한국대학교육협의회(이하 대교협)의 부속기관인 한국교양기초교육원은 교양교육 이수학점으로 대학졸업학점의 약 30% 정도를 이수할 것을 제안하며, 대교협은 기관인증평가에서 교양이수학점으로 졸업학점의 30±10% 정도의 이수를 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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