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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General Edu > Volume 17(3); 2023 > Article
반사궁 개념에 대한 듀이의 비판과 교양교육적 함의

Abstract

심리생리학 이론에서 ‘반사궁’은 감각 신경계에서 척수나 두뇌를 경유하여 운동 신경계에 이르는 감각-운동의 기제가 궁이나 호의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실험 심리학이 생겨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반사궁 기제는 감각-운동의 과정이나 구조를 설명하는 가장 기본적인 설명 모형으로 기능하였다. 손다이크는 반사궁 모형을 적극적으로 교육심리학 분야에 적용하여 이론화시켰고, 듀이는 그런 반사궁 이론에 대해 크게 반대했다. 20세기 중후반에 걸쳐 손다이크의 반사궁 이론은 교육계에 상당하게 수용되어 큰 흐름을 형성했지만, 반사궁에 반대하는 듀이의 주장은 실제 별다른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여기서는 특히 교육 분야에서 반사궁 모형에 대한 찬반의 입장을 각기 손다이크와 듀이를 인용하여 제시하고, 그 찬반의 입장이 교육 일반과 관련하여 중요한 함의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사궁 방식의 과학적 심리학에 기초하여 교육을 과학으로 정초하는 방식과 그 결과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인 평가를 제기한다. 반사궁에 대해 유기적 협응을 추구하는 방식이 교양교육 일반의 목표와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 목표 실현에서 현장 교육자가 연출하는 주요한 역할에 주목한다. 교양 교육자를 특히 전문가이자 실천가인 전문 실천가로서 규정하고, 동료와 교수-학습자 간의 총체적인 상호작용에 관한 이해를 통해서 ‘반사궁 이론이 교육에 대해서 갖는 부적절한 함의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논증한다.

Abstract

The term ‘reflex arc’ is used in psycho-physiological theory such that the sensory-motor mechanism has a shape of an arc from the sensory nervous system to the motor nervous system via the brain and spinal cord. As experimental psychology has emerged and developed, such a reflex arc mechanism has come to be seen as an extremely basic explanation model of explaining the sensory-motor process. Thorndike had positively theorized the reflex arc model by applying it to the field of educational psychology, while Dewey objected thereto. The reflex arc theory of Thorndike was largely accepted by educators during the middle and later periods of twentieth century, but Dewey’s objections thereto did not exert any touchable practical effect. Here, pro and con positions to the reflex arc model will be presented, particularly in the field of education, by citing Thorndike and Dewey, respectively. Deep consideration will be given to what implications such reflex arc-related pro and con positions have as to education as such, while the way and the results of building the education as science on the model of reflex arc being tested and evaluated. The genuine science of education turns out to conform in purpose to that of liberal education as such, so that in-situ educators of liberal education serve important roles in realizing such a science, and act as a specialist-practitioner. This study argues that the improper implications of the reflex arc model to education could be dissolved or removed by understanding and encouraging holistic transactions between the teacher-learners as well as between the peers.

1. 서론

심리생리학 이론에서 ‘반사궁(reflex arc)’은 감각 신경계에서 척수나 두뇌를 경유하여 운동 신경계에 이르는 감각-운동의 기제(mechanism)가 궁(弓)이나 호(弧)의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실험 심리학이 생겨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반사궁 기제는 감각-운동의 과정이나 구조를 설명하는 가장 기본적인 설명 모형으로 기능하였다. 예컨대 심리학사에서 대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제임스(William James)의 <심리학의 원리>에 보면, 아이가 밝게 빛나는 촛불에 이끌려 손을 뻗다가 화상을 입는 과정이 이런 반사궁 모형에 기초하여 도식화되어 있다(윌리엄 제임스, 2005: 55-59).
미국 교육심리학의 토대를 세웠다고 평가되는 손다이크(Edward L. Thorndike) 또한 그의 초기 저작인 <인간본성클럽>에서 제임스의 촛불 지각 사례를 그대로 인용하면서 반사궁 모형을 인간 학습 이론을 정초하는 데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다(Thorndike, 1901: 9). 그는 자신의 박사학위논문을 책으로 엮은 <동물지능>에서 동물실험을 통한 결과를 ‘효과 법칙’으로서 제시하는데,(Thorndike, 1911: 29-155, 241-294) 이는 좋은 효과를 내는 경우는 해당 자극-반응 연결체를 강화하고 나쁜 효과를 내는 경우는 해당 자극-반응 연결체를 약화시킨다는 취지의 법칙이다. 그는 이런 법칙을 인간에게도 그대로 적용하여 <교육심리학>에서 학습의 ‘효과 법칙’으로 정식화시킨다. (Thorndike, 1914: 170-194) 즉 동물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에서도 좋은 효과를 내는 자극-반응 연결체는 강화되어 성공적인 학습을 이뤄내고 나쁜 효과를 내는 연결체는 약화되어 학습 실패를 낳는다는 것이다. 이런 효과 법칙은 바로 반사궁 가설 모형을 법칙으로 이론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특히 손다이크의 관점에서 반사궁 모형에 따른 효과 법칙은 학습 단위를 양적으로 계산 가능한 단위로 만들기에, 통계 이론의 도움을 받아 교육의 결과를 예측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교육과학’의 가능성을 보장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듀이(John Dewey)는 <심리학에서 반사궁 개념>에서 이런 자극-반응 이론을 강하게 비판한다(Dewey, 1896: 357-370). 듀이가 보기에 반사궁에 기초한 심리학 이론은 인간 정신이 작용하는 구조를 근본적으로 훼손하여 나타낸다. 인간이 수동적으로 외적인 대상에 의해 자극을 받아 두뇌나 척수를 통하여 신호를 변형하고 운동 기관에다 반응 명령을 내린다는 선형적 도식은, 인간 정신이 작용하는 역동적이고 복합적인 과정을 단순 기계적인 과정으로 환원시켜버리는 것이다. 듀이가 보기에, 자극과 반응은 별개의 존재로서 분리될 수 있는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환경 속에서 일어나는 인간 행동을 구성하는 기능적 국면들(functional phases)일 뿐이다. 단지 그런 국면들 속에 있는 것일 뿐이기에 우리가 자극과 반응으로서 구분하고 있는 것들은 실제로는 각기 자극-반응을 모두 그 계기로서 포함하고 있는 행동일 뿐이다. 전체로서 해당 기제를 하나의 행동으로서 바라본다면 다만 끊임없이 자극-반응-자극-반응…으로 순환하는 원적인 회로로서만 나타낼 수 있을 뿐이다. 그러한 원의 일부일 뿐인 반사‘궁’은 온전한 인간 행동을 파편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특히 반사궁 이론에 기초한 엄밀한 양적 계산을 지향하는 손다이크적 방식의 교육과학은 듀이가 보기에 유사(pseudo) 과학에 불과한 것이고, 진정한 의미의 교육과학은 지성적인 민주 시민으로서 학습자의 성장에 기여하는 그런 것일 뿐이다.
저명한 교육사가인 라게만(Ellen C. Lagemann)은 특히 20세기에 전개된 미국 교육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왜 듀이가 패하고 손다이크가 승리했는지’ 그 이유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Lagemann, 2000: xi). 이는 20세기 중후반에 걸쳐 손다이크의 반사궁 이론이 교육에 그대로 적용되어 큰 흐름을 형성했지만, 반사궁에 반대하는 듀이의 이론은 실제 별다른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진단에 따른 것이다. 손다이크의 교육 이론은 수많은 유학생을 통하여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수입되어 현 우리 교육계에서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박승배, 2010: 2, 15). 이에 그 실제적인 지위나 서열에서 벗어나서, 손다이크와 듀이의 심리 이론이 가지고 있는 교육적 함의를 드러내고 그 효과를 따져보는 것은, 특히 파편화된 기계적 인간관이 우위를 점하고 있고 교육에서 전체적인 조화나 협력보다는 영역별 경쟁이 우선시되는 시기에 전인 교육을 지향하는 교양 교육자들에게 시의적절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손다이크와 듀이 모두는 실험 중심의 과학적 심리학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어떻게 당시 경험주의 전통의 내성 심리학이 그런 과학적 심리학으로 이행하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고찰해볼 것이다. 반사궁 또는 자극-반응 심리학을 제임스가 제시했던 촛불 사례를 중심으로 제시하고, 그 찬반의 입장을 각기 손다이크와 듀이를 인용하여 제시할 것이다. 반사궁 개념에 대한 찬반의 입장이 교육 일반과 관련하여 어떤 함의를 갖는지 고찰하고, 과학적 심리학에 기초하여 교육을 과학으로 정초하는 방식과 그 결과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진정한 교육과학의 목표는 교양교육 일반의 목표와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 목표 실현에서 현장 교육자의 적정한 역할은 무엇인지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교양 교육자를 특히 전문가이자 실천가인 전문 실천가로서 규정하고, 동료와 교수-학습자 간의 총체적인 상호작용에 관한 이해를 통해서 ‘반사궁 이론이 교육에 대해서 갖는 부적절한 함의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논증한다.

2. 내성 심리학에서 과학적 심리학으로

19세기 중반에 유럽에는 실험적 방법들에 기초한 새로운 심리학이 오직 이론가의 사색이나 직관에 의존하는 내성 심리학을 대체하며 등장했고, 그 후반에는 미국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를 듀이는 ‘새 심리학’이라고 칭하고, ‘옛 심리학’과 대비되는 특징들을 소개하였다(Dewey, 1884: 278-289). 듀이에 따르면, 로크와 흄 등 영국 경험주의자들이 대변하는 옛 심리학은 문제가 있는 원자론적이고 이원론적인 가정에 기초한 것이다. 신체적인 감각 장치와 외적 대상의 상호작용으로 인하여 인상들(impressions)을 기원으로 하는 기본적인 관념들(ideas)이 수동적으로 생겨나고, 마치 벽돌을 쌓아 집을 세우듯이 그런 관념들이 연합하여 지식을 이뤄낸다. 이런 옛 심리학은 관념을 기본 단위로 하는 그 원자론적인 접근에 맞게 사회적인 맥락과는 무관하게 개인을 구성한다. 인간 삶의 풍부하고 다채로운 경험이, 단정하고 엄밀하게 별도로 고립되어 존재하는 개인들의 심리적 관념들과 같은 단위로 주도면밀하게 해부되는 것이다. 이를 듀이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 풍부하고 다채로운 경험은 간결하고 주의 깊게 해부되었고, 그 해부된 부분들은 딱지가 붙어 해당 칸막이들 안에 넣어졌으며, 목록을 만들어 그 전체에다 기정사실이라는 도장을 찍었다. 조직적인 체계 내지는 도식적인 이론이 최상의 것이고, 궁극적인 완성의 분위기가 끝에서 끝까지 전체에 걸쳐 있게 되었다(Dewey, 1884: 278).

듀이는 이런 옛 심리학의 가정에 반대하며, 단순한 관념들과 같은 것은 순전히 임의적인 구분일 뿐이고 인간 삶은 무한하게 복잡한 것으로서 별도로 고립되는 개인들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회역사적인 기원을 가진다고 역설한다. 그래서 인간 정신을 칸막이 상자와 같은 것에다 넣어 분류하고 딱지를 붙여 기계적으로 설명해낼 수는 없는 것이다. 듀이가 보기에, 순전히 사색이나 직관에만 의지하여 심리 이론을 구성했던 내성 심리학자들은 실제 정신의 활동과 과정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인간 정신이 그렇게 단순하고 쉽게 다룰 수 있는 대상인 것은 아니라는 인식은 추상적인 단순성에서 구체적인 복잡성의 사실에 눈을 돌리게 했고, 일단 그 생리적 구조에 대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를 시작하게 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연구에서 생리학이 성장하고 그에 동반하여 새 심리학이 출현하게 되었다. 인간 신경체계의 구조와 기능들에 관한 지식이 증가하면서 심리적 문제들을 그에 기초하여 새롭게 조명하고 조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많은 이들은 생리학적 심리학이 신경체계의 본성에 의거하여 모든 심리적 삶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게 되었다. 예컨대 시각에 관한 전체 심리학은 망막의 해부학과, 망막과 두뇌를 연결하는 그 신경 연결체와 두뇌에서 시각적 기능들에 종사하는 중추에 관한 완전한 지식을 우리가 가질 때 설명된다. 또는 우리가 특정 두뇌 세포들이 신경적 인상들을 저장하고 특정 신경 섬유들이 이런 세포들을 연결하는 데 종사함을 발견할 수 있다면, 기억에 관한 모든 것을 우리가 안다. 요컨대 우리의 정신적 삶의 사건들 중 일부나 전체가 특정 신경 구조들에 물리적으로 의존해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그런 정신적 사건들을 남김없이 설명할 수 있다고 기대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생리적 지식이 아무리 중요한 것이라고 해도, 그것은 그 자체로서는 심리학을 위해 아무런 가치도 갖지 못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어떤 생리적 요소들이 심리 작용들의 기초로서 종사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리하는지 말할 뿐이다. 그 심리적 작용들이 무엇인지 또는 어떻게 그것들이 설명될 수 있는지 그것은 전혀 아무것도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다. 듀이는 이런 취지에서 생리학은 그 자체로는 한 국토의 물리적 지리가 그 국토 안에 거주해온 국가의 역사를 구성하거나 설명할 수 있게끔 하는 것 이상으로 심리적 삶의 정체와 이유와 방법을 우리에게 제시해 줄 수는 없다고 빗대어 강조한다(Dewey, 1884: 281). 그 땅이 그 모든 성질들과 더불어 그 역사를 위한 기초로서 아무리 중요하고 필수적인 것으로 작용한다고 해도, 역사 그 자체는 단지 역사적 기록들과 조건들을 통해서만 확인되고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생리학적 심리학은 다만 심리학에다 새로운 탐구 방법을 제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험의 방법이 그것으로서, 낡은 내성의 방법을 보완하고 수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심리적 사실들은 여전히 심리적인 것으로 남아서 심리적 조건들을 통해서 설명될 수 있다. 다만 이런 사실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들이 주어진 조건에서 나오는지 확인하는 우리의 수단은 계속해서 확장될 수 있다. 옛 심리학에서 내성에 의한 방법과 대비하여, 실험적 방법에서는 탐구자가 의지하는 대로 통제 조건들을 변화시킬 수 있고 양적 측정을 사용할 수 있다. 즉각적으로 주어지는 것만을 관찰하면서도 흔히 착각으로 이어지곤 하는 결함을 지닌 내성 방법으로부터 실험 방법으로의 전이는, 감각들로서 알려진 심리적 사건들이 신체적 자극들을 통해서 일어나고 의지나 의욕들로서 알려진 심리적 사건들이 신체적 운동을 결과한다는 잘 알려진 사실들로부터 출발한다. 신체적 자극들과 운동들은 직접 통제되고 측정될 수 있기에, 그로써 간접적으로 그것들이 흥분시키거나 표현하는 심리적 상태들을 통제하고 측정할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만약 특정 신경 배열이 존재한다고 밝혀질 수 있다면, 그것에 대응하는 심리적 과정이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만약 두 생리적인 신경 과정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면 우리는 대응하는 심리학적 활동들 사이에도 유사한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거나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듀이는 생리학을 포함하는 생물학 전반에서 핵심적인 유기체의 개념이 심리학에서도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간주한다(Dewey, 1884: 284-285). 심리학에서 유기체의 개념은 생명의 법칙에 따라 환경 속에서 발전하는 유기적인 과정으로서 정신적 삶이라는 인식을 낳았다. 이는 고립된 원자적인 관념들이 모여서 외적으로 교류하거나 상연되다가 분리되어 간직되곤 하는 칸막이나 극장의 개념과는 다른 것이다. 정신적 삶의 유기성에 관한 이런 인식과 더불어 사회 조직 속에서 다른 정신적 존재들과 맺는 관계에 관한 인식이 도래했다. 이는 생리학만큼이나 인간 활동의 다양한 영역들의 기원과 발전에 관한 과학들이 또한 새 심리학에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듀이에 따르면, 새 심리학은 단순히 정적인 새 학문 체계가 아니라 사회적 운동과도 같은 것이다(Dewey, 1884: 285-286). 그런 운동이 갖는 일반적인 특징은 미리 구상된 형식에다 인간 경험을 짜 넣어 맞추려고 하지 않고 경험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는 것이다. 정신적 삶은 인간 경험을 가장 완전하고 심층적이며 풍부하게 구현한다. 새로운 심리학은 바로 이런 현실적인 경험으로부터 그 논리를 직접 얻으려 한다. 그렇기에 정신을 원자적인 요소들이나 독립적인 능력들로 추상화하고 형식화시키는 대신에, 전체로서 정신적 삶이 갖는 통일성과 통합성을 강조한다. 또한 외적 강제에 의해 움직이는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 목적을 가지고 경험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실현해가는 자율적인 유기체로서 삶을 강조한다.
이처럼 듀이는 새 심리학이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학문이 아니라 생물학과 신생 사회과학들로부터 영감을 얻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생물학으로부터는 살아있고 유기적으로 기능하는 전체로서 유기체 개념을 빌릴 수 있을 것이다. 생리학적 연구는 심리적 기능을 조명하는 일에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심리학적 현상들을 생리적 과정들로 환원하여 설명하려 해서는 안 된다. 한편 다양한 인간 활동의 기원과 발전을 연구하는 신생 사회과학들은 또한 다른 조건들에서 정신적 기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한편 제임스는 그의 대작 <심리학의 원리>에서 당대의 심리학적 지식을 통합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인간의 신체적인 생리학에 대한 객관적인 설명과 인간의 의식적인 정신적 삶에 대한 주관적인 설명을 적응의 관계로 바라보면서 상호 연관시키려고 시도했다. 인간의 신경 체계를 상황에 따라 잘 적응하여 행동할 수 있도록 구성된 것으로 바라보면서, 의식적 정신 역시도 낡은 습관들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여 재조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제임스는 반사의 개념 및 자극, 관념, 반응의 삼중 관계를 이용하여 자신의 심리-생리적 관점을 표현하였는데, 이는 관념이 행동에서 정점에 달하고 그 의미를 얻는다는 실천적 고려까지 포함하였다. 다만 제임스가 시도한 종합에서는 객관적인 생리 작용과 주관적 의식 현상이 여전히 이원적인 것으로 남아 있었고, 비교적 수동적인 감각 체계와는 분리되는 능동적인 자아라는 구분이 자리하고 있었다(Bredo, 1998: 452).
듀이가 새 심리학에서 추구한 실험적 방법이 폭넓은 것으로서 여타 사회과학에서 추구하는 지성적이고 반성적인 탐구 방법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었다면, 손다이크는 자연과학의 실험에 비견되는 보다 더 엄밀하고 좁은 의미의 실험적 방법을 심리학에서 사용할 것을 주창하였다. 손다이크는 타고난 동물 행동과 획득되는 행동을 비교하기 위하여 고양이와 개들이 케이지의 출구 손잡이나 걸쇠를 열어서 스스로 그곳을 벗어날 수 있게끔 하는 실험실 상황을 설정하고는, 그에 소요되는 시간이 점점 감소하는 것을 관찰했다. 그리고 그런 기록에 기초하여 대상 동물이 타자의 행동을 모방하는 방법을 추론하기보다는 단순히 올바른 행동을 성공적인 반응과 연합하도록 학습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시행착오 학습의 논제를 당대의 신경생리학적 지식과 결합시켜 이론화한다. 동물 두뇌는 전화 교환기에 이용되는 선들처럼 주어진 상황에서 특정 감각들이나 감정들을 느끼게 하거나 행동을 하게끔 만드는 국소적인 신경 연결들의 복합체이다. 주어진 상황과 반응 사이의 연결들 중 많은 것은 태어날 때 결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습과 효과의 법칙에 따라 새로운 연결들이 각인될 수 있다. 연습 법칙은 연습이 상황과 반응 사이의 결합을 강화한다는 것이고, 효과 법칙은 만족시키는 결과들이 상황과 반응 사이의 결합을 강화하는데 비해 불편이나 곤란은 그것을 약화시킨다는 것이다(Clifford, 1962: 79). 손다이크는 이런 자신의 심리 모형이 인간의 모방적이고 추론적인 능력들을 포함하여 학습의 측면들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을 포함한 고등동물은 본능 이외에 연습 및 효과 법칙들로부터 예외를 넘어서는 그 어떤 행동도 드러내지 않는다(Thorndike, 1911: 241-294). 손다이크에 따르면, 학습은 연결 활동이고, 인간 정신은 연결체들로 이뤄진 시스템이다. 인간의 목적들도 그 본성상 다른 어떤 것만큼이나 기계적인 것이다(Thorndike, 1931: 122).
듀이는 손다이크와 같이 새 심리학의 실험적인 정신을 칭송하면서도 그 정신의 세부에 대해서는 그와 극단적으로 의견을 달리했다. 손다이크는 인간 생리학의 세부와 관련하여 제임스의 반사궁 도식을 그대로 수용했다. 제임스의 <심리학의 원리>는 듀이에게 큰 영향을 끼쳤지만, 그는 또한 제임스를 포함하여 다른 반사궁 심리학자들이 기계적이고 이원론적인 가정들을 보유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반사궁에 대한 듀이의 논문은 어떻게 제임스가 시도했던 것과 같은 종합이 좀 더 성공적으로 성취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한 시도로서 간주될 수 있다(Bredo, 1998: 452-456, Brinkmann, 2011: 305-306).

3. 반사궁 개념에 대한 듀이의 비판

듀이는 <심리학에서 반사궁 개념>1)에서 심리학의 기초적인 분석 단위인 자극과 반응에 대한 공격을 ‘심리학자의 오류’를 가지고 이뤄내고 있다. 듀이의 논증은 비교적 단순하다. 새 심리학에서 반사궁의 신경회로는 잘못 해석되고 있다. 그 근본이 되는 생리학은 상호 협력하여 조응하는 요인들의 통일이나 통합을 함축하는데, 심리학은 마치 반응과는 분리될 수 있는 자극이 있는 것처럼 그것을 처리하고 있다. 즉 원인이라고 칭할 수 있는 분리할 수 있는 별도의 독립적인 사건이 있고, 그에 뒤이은 결과라고 칭할 수 있는 우연적이지만 분리할 수 있는 별도의 사건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해당 듀이 논문의 편집자는 이와 유비적으로 와츠(Alan Watts)의 선불교 논의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The Mead Project, 2007). 관찰자는 일렬로 지나가는 고양이들을 보려고 벽 틈새를 응시하고 있다. 그는 항상 고양이 수염을 먼저 보고 고양이 꼬리를 나중에 보기에 그리고 수염이 없이는 결코 꼬리도 없는 것이기에 고양이 수염이 꼬리를 야기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 사람은 그가 계속하여 관찰할 수 있는 것이 단순히 해당 현상에 대한 그의 좁은 시야가 창출한 착각임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통찰은 단순해 보이지만 그것이 갖는 함축내용은 심리학만이 아니라 교육 분야에도 아주 큰 것일 수 있다.
앞서 새 심리학의 등장 배경에서 서술했듯이 19세기에 이루어진 생리학적 연구는 신경 체계가 감각과 운동 요소로 나눠지고, 척수와 두뇌가 그 둘 사이를 중개 내지 매개한다는 것을 드러냈다. 이렇게 신경 체계가 감각 요소와 운동 요소로 분리되고 척수와 두뇌가 그 사이에 있다면, 심리적 기능도 동일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외적인 감각이 내적인 관념을 자극하고, 이것이 다시 운동 반응을 야기한다는 식의 반사(reflex) 아이디어가 유행하게 된 것이다. 이는 제임스의 촛불 사례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 감각기관을 통하여 신경 흐름이 이어지면, 하위 중추에서 반사 작용을 유발하는 것과 동시에 뇌 반구에서는 관념을 일으킨다. 관념은 문제되고 있는 반사를 계속하게 할 수도 있고, 중지시킬 수도 있으며, 또한 다른 반사로 대치시킬 수도 있다. (---) 우리 앞에 촛불을 처음 보는 아이가, 그 연령의 아이들에게 흔히 있는 반사 성향에 따라 손을 뻗어 촛불을 잡으려다 손가락에 화상을 입었다고 생각해보자. 여기까지는 두 가지 반사가 작용했다. 첫째는 눈으로부터 두뇌와 척수를 거쳐 손에 이르러 손을 뻗는 운동에 이르는 반사이고, 둘째는 손가락으로부터 두뇌와 척수를 거쳐 손에 이르러 손을 움츠리는 운동 반사이다(윌리엄 제임스, 2005: 55-56).

듀이는 이런 반사궁 접근에 대해 비록 그것이 그가 ‘새 심리학’에서 상찬했던 새로운 생리학적 연구에 기초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옛 심리학에 자리한 가정들을 여전히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우선 한 복잡한 행동이 ‘자극’과 ‘반응’ 요소들의 연속으로 이뤄진다고 가정하는 것은, 복잡한 관념이 인상에서 파생된 요소적인 관념으로 이뤄진다는 옛 심리학의 연상주의 개념과 유사한 것이다. 왜냐하면 둘 다 주어진 요소들에서 시작하여 그것들이 결합하여 보다 큰 것을 이룬다고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앙의 관념이 주변적인 자극과 반응과는 구분되는 것이라는 반사 이론의 가정은 또한 정신적 관념과 감각적 인상을 구분하는 연상주의 개념과 유사하다(Dewey, 1896: 357). 별개의 분리된 것들로서 간주되는 자극과 반응의 개념조차도 환경적 요인인 입력과 그에 대한 신체적 응답인 출력으로 나누려는 시도로서 간주될 수 있다. 그런데 듀이가 보기에 이런 분리에 기초한 심리학적 개념이나 이론은 모두 환경 속에서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생물의 행동을 온전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파편화하고 왜곡시켜버린다.
이런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하기 위해서 듀이는 우선 앞서 제시한 제임스의 촛불 사례를 그대로 인용한다. 한 아이가 밝게 빛나는 촛불을 보고서 그것을 향해 손을 뻗고 있다. 아이는 촛불에 손이 닿아 뜨거움을 느끼고는 얼른 손을 움츠린다. 반사궁 모형에서 이 사건은 그 자극에서 반응에 이르기까지 다음 단계를 거친다. 아이는 촛불을 보고 그것을 향해 손을 뻗는데 화상의 고통을 느끼고서 손을 움츠린다. 이것을 도식적으로 나타내면, 자극1(촛불) -> 반응1(손을 뻗음) -> 자극2(고통) -> 반응2(손을 움츠림)이다. 이런 단계적 사건들은 각기 별도로 분리된 것으로 간주되어 독립적으로 정의되는데, 또한 선형적인 연속으로서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가진다고 간주되었다. 그런데 촛불과 관련한 아이의 행동을 설명하는 데서, 이런 반사궁 모형은 어떻게 그 상이한 행동 요소들이 함께 작용하여 하나의 통합된 행동을 형성하는지 이해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듀이는 지적한다(Dewey, 1896: 358). 만약 아이가 진실로 이렇게 분리된 방식으로 반응했다면, 그 아이가 보이는 몸짓은 어떤 행동이 아니라 단지 ‘일련의 경련들’일 뿐일 것이다. 마치 주어진 자극이 그 아이로 하여금 어떤 정해진 방식으로 기계적으로 반응하도록 만든 것처럼 말이다.
듀이는 무릎 관절을 타격할 때 일어나는 다리의 경련과 같이 단순한 반사들이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아이의 행동 설명에서 등장하는 자극과 반응은 반사궁 이론이 묘사하는 것과 같은 독립적인 사건들이 아니다. 예컨대 아이가 손을 뻗는 ‘반응1’은 한갓 촛불의 ‘자극1’에 의해 촉발되는 것이 아니다. 실상 그것은 손을 뻗어 촛불을 만지려는 시도이다. 그것은 단순한 근육 경련이 아니라 목표 지향적인 행동이다. 밝게 빛나는 촛불 감각은 또한 목표로 향하는 아이의 손을 이끄는 기능을 할 것이다. 이때 “반응은 한갓 자극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극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Dewey, 1896: 359) 반응이 특정 자극을 얻거나 낳으려는 시도가 되고 있는 것이다. 자극 또한 그렇다. 자극은 아이의 반응과는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반응에 의해 수정된다. 손이 촛불로 향하여 나아갈 때 주위 상황 변화에 대한 반응으로서 감각은 손의 운동을 조절하여 목표 지점에 잘 도달할 수 있도록 할 것이고, 이러한 운동과 감각의 상호작용은 아이가 화상을 입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촛불에 닿아 화상을 입는 결과는 새로운 자극인 ‘자극2’가 아니라 화상을 입는다는 새로운 의미를 띠도록 원래 자극이 변형되는 것이다(Dewey, 1896: 360). 이런 시각에서 자극과 반응은 별개의 것으로서 독립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호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반사궁 이론은 이렇게 상호적으로 구성되고 함께 되먹임하면서 행동을 이뤄내는 자극과 반응의 기능적 구조를 이해할 수 없게 한다.
듀이는 반사궁 이론에 대한 대안으로서 인간 행동을 전체적이고 유기적인 통일성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행동의 단위를 단순히 크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새로운 보다 큰 단위에서 똑같은 문제가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듀이에 따르면, 진정으로 유기적이고 통일적인 것은 살아 있는 유기체로서 생물의 행동이 ‘협응(coordination)’으로 이뤄진다는 사실이다. 협응은 주어진 고정 단위들의 기계적인 결합이 아니라 그 자체가 변화하는 요인들이나 국면들 간의 역동적인 어울림이나 조화나 적응을 의미한다. 외적으로 정의된 조각이나 파편들에서 출발하여 그 기계적 결합이 왜 유기적 행동의 특징을 띠지 못하는지 의아해할 것이 아니라, 잘 협응하는 상이한 국면들이 유기적 행동 안에 창출되어 자리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해야 한다.
인간 행동이 주어진 조건에서 기계적으로 일어나는 반사 경련들이 아니라 유기적 협응으로 완성되는 것이라면, 그 과정의 생리학적 측면들은 선형적이 아니라 순환적인 것이어야 한다. 한 행동은 감각-운동 순환들에 의해 형성되는데, 거기서 감각 신경과 운동 신경은 서로를 동시에 병렬로 수정한다. 예컨대 아이가 촛불을 보기 위해서는 머리를 들어 표적을 향하고 눈의 초점을 그것에다 맞추어야 한다. 시각적 감각이 근육 운동을 조절하듯이 근육 운동은 시각적 감각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듀이는 이런 과정의 구조를 단편적인 궁이나 호가 아니라 순환적인 원 또는 회로와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반사궁 이론가의 자극과 반응 요소는 순환적인 원에서 잘라낸 호이자 행동의 맥락과는 유리된 무의미한 파편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 우리가 가지는 것은 호나 깨진 원의 단편이 아니라 순환 회로이다. 이 회로는 반사적이라기보다는 유기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감각적 자극이 운동을 결정하는 것만큼이나 진실하게 운동 반응이 자극을 결정하기 때문이다(Dewey, 1896: 363).

그렇다면 듀이가 말하고자 하는 보다 적절한 ‘자극’이나 ‘반응’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들은 각기 협응 행동이면서 보다 큰 행동의 시작과 완성 국면들이다. 우리는 각각을 어떤 목표 지향적인 행동의 맥락에서 시작과 끝을 이루는 것으로 바라봄으로써만 ‘자극’이나 ‘반응’으로서 해석할 수 있다. 각각의 구성 부분을 자극과 반응으로서 구분하는 것은 단지 한 포괄적인 목적을 가정해서일 뿐이다(Dewey, 1896: 365). 듀이는 이런 해석의 관점에서 ‘자극’과 ‘반응’이 원인과 결과보다는 질문과 답변 내지는 문제와 해결로서 관련된다고까지 말하고 있다(Dewey, 1916: 24). 자극과 반응은 그 자체 협응 행동으로서 다시 서로가 요청하고 응답하는 협응을 통하여 한 행동을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촛불에 화상을 입고 난 이후 아이는 여전히 밝게 빛나는 불꽃에 끌릴 수도 있지만 또한 그에 대해 경계하게 될 수 있다. 촛불을 향해 손을 뻗는 반응과 그것으로부터 움츠리게 되는 반응 사이에서 주저하고 동요하게 되는 것이다. 촛불은 이제 미결정적인 성질을 띠게 된다. 그것은 상충하는 반응들을 꾀어내고, ‘자극’과 ‘반응’으로서의 성격이 불분명하게 된다. 반사궁 이론가는 무의미한 감각 단편들과 운동 단편들이 인간 행동에 기초적인 요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듀이가 보기에 그런 무의미한 단편들은 조직적인 행동이 내적 갈등이나 상충으로 인해서 붕괴할 때 나오는 예외적인 것들이다. 듀이는 이처럼 갈등이나 상충 때문에 의식하게 되는 행동의 단편들을 ‘의식적인 자극’과 ‘의식적인 반응’이라고 불렀다(Dewey, 1896: 367-368). 화상을 입은 이후에 다시 촛불에 가까이 다가갈 때 아이가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처럼, 의식적인 자극이나 반응은 정상적이지 못한 것으로서 새로운 적응이나 습관을 형성해야 하는 문제가 자리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앞서 이 장의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듀이는 결론적으로 반사궁 이론에 그릇된 것은 심리학적 오류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한 생물의 행동을 분석하는 일에 사용하는 구조나 규칙이나 구분들이 실제로 그 생명체 내부에 자리한다고 믿을 때 이런 오류가 일어난다. 반사궁 이론가들은 자극과 반응이라는 역동적인 생명 활동의 기능적 국면들을 별개의 분리 가능한 정적이고 고정된 실재로서 간주하고 그 기계적인 결합이나 종합을 추구함으로써 오류를 범했다. 이는 결국 열을 지어 지나가는 고양이들을 좁은 벽 틈을 통해 보면서 ‘고양이 수염이 꼬리를 야기한다’라고 판단하는 사람처럼 부분만을 보고 전체를 보지 못하여 사태를 왜곡시켜버리는 근시안적인 시야를 가지고 있다고 비판받아 마땅한 것이다.

4. 반사궁과 듀이적인 유기적 협응 개념의 교양교육적 함의

앞서 인용한 ‘손다이크가 이기고 듀이가 졌다’는 라게만의 말처럼, 현 시대에 교육 연구에 관한 손다이크의 아이디어들은 널리 채택되어 있지만 듀이의 아이디어들은 거의 잊혀졌다. 그런데 오늘날 교육의 문제들은 당시와 비교하여 별로 개선되지 않고 상당 부분 그대로 잔존하고 있다. 이는 손다이크의 접근이 적어도 교육적인 측면에서 틀린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라게만은 이렇게 지적한다. 비록 교육은 그동안 많은 변화를 거쳤지만 좁은 연구관 내지는 과학관을 견지했다. 손다이크와 같은 전문 학자들은 이론을 실천보다 우위에 두고 자신들과 같은 전문가만이 현장 교육자를 관리 감독할 수 있다는 그릇된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실천과는 유리된 교육 과학이 체계적이고 비판적인 지성적 도구로서나 변화하는 실천적 행동의 도구로서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손다이크에 특유한 좁은 시야는 교육에 관한 학문의 과학적인 성격과 유용성 모두를 해치는 것으로서 작용했다(Johnson, 2018). 이런 시각에 비추어 볼 때, 현실에서는 패배했지만 듀이적 교육관은 인간과 학교 교육의 본성에 관한 좀 더 섬세하고 세련된 논증을 전개함으로써 손다이크적 프로그램이 갖는 취약성을 드러내고, 특히 포괄적이면서 자유로운 열린 교육을 지향하는 교양교육과 관련한 문제들의 해결을 향한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4.1. 반사궁 심리학의 부흥과 그 교육적 적용

손다이크는 앞서 언급했던 동물행동 실험을 통하여 동물이든 인간이든 모든 학습은 자극과 반응이 결합된 연결에 의해 설명된다는 이론을 제기했다. 손다이크는 이 이론을 ‘효과 법칙’이라고 불렀다. 이에 따르면, 어떤 반응이든 만족스런 결과는 주어진 상황과 맺는 연결을 강화하고, 역으로 불만족스러운 결과는 그런 연결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결국 모든 학습은 두뇌에 있는 이런 자극-반응 연결들의 총합이다. 나아가 인간 본성 또한 단순히 이런 학습된 연결들의 모음이다. 인간 본성은 어떤 학습이 일어났느냐에 따라 좋거나 나쁘게 이용될 수 있다(Thorndike, 1914: 1-4, 171-173).
이런 학습 이론은 당시 득세했던 사회적 효율성 사고방식과 아주 잘 어울렸다. 심리학자로서 손다이크의 목표는 학습을 명료하게 설명하는 것이었고, 그가 보기에 심리학은 교육의 목표들을 정의하고 분명하게 만듦으로써 더 낫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그런 것이었다(Thorndike, 1914: 5). 손다이크는 인간 학습을 두뇌의 시냅스들 내지는 소위 ‘반사궁’의 작용으로 환원시켰다. 이런 환원은 효율성을 위해 조작할 수 있는 단위들의 기계적 결합체로서 인간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길을 여는 것이다. 실제로 이는 교육 영역에서 학생 성취도와 잠재성을 기계적으로 측정함으로써 맞춤형 운명들로 분류하여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검사나 시험 및 교육 프로그램의 창출로 이어졌다.
손다이크는 자신의 학습 개념을 측정과 연결함으로써 자연스레 자극-반응 이론을 교육에 적용시켰다. 그는 자극-반응 이론에 따라 학습 성취도를 측정하기 위해 많은 영역의 검사들을 만들어냈다. 학습은 별개의 분리된 자극- 반응 연결들의 총합이다. 하나의 검사는 이런 별개의 연결들 중 하나만을 측정한다. 그리고 각기 별개의 자극-반응 연결을 측정하고 그것들을 모으면 총체적인 학습 결과를 보여줄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교육계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크나큰 호소력을 지녔다. 왜냐하면 모호한 것으로만 보이던 학습이 최종적으로는 단순하고 측정 가능한 방식들로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측정 결과는 교육계에서나 실업계에서 실제로 학생의 성장이나 잠재성에 관한 의사결정을 재빨리 내려 그 적성 등을 효율적으로 분류하고 선택할 수 있게끔 했다. 손다이크는 이런 이론화 작업을 통하여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어떤 양으로 존재하며 측정될 수 있다고 공언했다(Thorndike, 1918: 16).
손다이크는 20세기 초입에 동료인 우드워스(R. S. Woodworth)와 함께 몇 달간 실험적으로 오자나 탈자 인식, 무게나 중량 확인, 산술적 덧셈, 반대말 대응 등의 기술 능력측정을 실시하고 데이터를 수집하였다. 그리고 이런 학습 대상 기술들 중 하나로부터 다른 것으로 학습이 전이되는 현상은 거의 없었다고 보고했다(Thorndike & Woodworth, 1901: 247-261, 384-395, 553-564). 이런 단기간에 걸쳐 이뤄진 소소해 보이는 국소적 발견을 가지고 손다이크는 일반적인 학습 전이 현상 자체를 아예 부정해버린다. 그러면서 자신이 당시 우세했던 학습 이론인 “그리스어나 라틴어와 같은 고전어 학습이 심적 능력들을 일반적으로 개선시키고 다른 과목 학습에도 도움을 준다”는 이론을 직접 논박했다고 간주한다(Thorndike & Woodworth, 1901: 247-261). 손다이크에 따르면, 한 특정 과목에서의 학습이 다른 과목의 학습보다 더 일반 지성을 증가시키는 것은 아니고, 어떤 과목이든 지성에 미치는 그 효과 면에서는 동등한 것이다. 이런 견해는 많은 교육자들이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범위의 내용을 다루는 대학 과목들의 가치를 의문시하게끔 유도했다.
손다이크는 과학주의자로서 심리학을 충분히 물리학과 같은 과학으로서 정초할 수 있다고 믿었다. “동일한 자극들에 의해 작용하는 동일한 두뇌나 정신은 동일한 사고들과 느낌들과 행동들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이는 물리학에서 지구의 중심으로부터 동일한 거리에 있는 동일한 질량은 다른 것들이 같다면 그것을 향하여 동일한 속도로 낙하할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과 같다.”(Thorndike, 1935: 288) 그가 보기에, 이렇게 과학으로서 심리학이 크게 적용되는 교육 또한 아주 엄밀한 주제 영역과 특유한 방법적 체계를 갖는 전문 과학적인 것이어야 했다. 전문가들만이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다. 손다이크가 인정한 교육 전문가는 대개 심리학자들로 구성되었고, 교사는 아무리 폭넓은 지식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포함시키지 않았다(Gibboney, 2006: 170-172).
손다이크는 적정한 교육 시스템이란 효율적인 생산 시스템과 같은 것이라고 보았다. 예컨대 그는 교수 활동을 단순히 ‘특정 반응들을 산출하거나 금지하도록 자극들을 제공하거나 차단하는 기술’로서 정의하면서 교육 연구가 학교 교육의 사회적 목표들을 실현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들을 찾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Clifford, 1962: 61). 그런 과학적으로 입증된 방법들은 훈육하고 감독하는 시스템과 결합하여 평균적인 교사나 교수가 이용하는 전통적인 주먹구구식 전략들을 대체할 수 있다. 최대한의 효율성을 추구했던 손다이크에게서 노동자의 정신과 전문가의 정신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노동자의 사고가 감각적인 의견에서 나오는 주관적이고 임의적인 것이라면, 전문가의 사고는 사실들에 기초하여 객관적인 판단들을 산출하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보통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지 말고 지적으로 상위에 있는 이의 지시에 따르는 것이 더 낫다. 학교 교육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전문 연구자나 행정가들이 조직적으로 통제하면서 과학적 지식을 제공하고, 현장 교육자들은 그에 따라 충실히 일하는 것으로 이바지해야 한다.
학습이나 학교의 과학적 관리에 대한 손다이크의 견해는 당대의 교육 관료들에게 학교 교육의 모든 측면을 원자화하여 조직적으로 감시할 수 있게 하는 도구들을 제공했다. 국소적인 자극-반응 결합들의 덩어리로서 손다이크의 정신 개념은 청사진과 같이 작용하여, 공부나 학습을 요소적인 성분들로 쪼개어 각 개인에게 특정 삶의 과업에 딱 들어맞는 기술을 준비하게끔 만들었다. 앞서 학습의 전이에 대한 반대에 따라 고전은 지성을 훈육하는 데서 그 어떤 특별한 가치도 갖지 못했고, 일반적인 교양교육은 삶을 위한 좋은 준비가 아니었다. 진실로 문제가 되는 것은 타고난 학습자들의 능력이었다. 가장 유능한 아이들은 학습한 것들과는 무관하게 타고난 지성이 갖는 이점을 보여주었다(Thorndike, 1924: 94). 평균적인 아이를 계속하여 교육시키는 학교 교육은 단순히 낭비일 뿐으로서 교사의 시간을 빼앗아 가장 지성적인 아이를 교육시킬 중요한 과업을 소홀히 하게끔 만든다. 손다이크가 수십 년 동안 교육대학원 교수로 재직하면서 미국 대학과 학교 전반에 걸쳐 전파한 것은 바로 이런 취지의 교육 이론이었다(토드 로즈, 2021: 86-92). 손다이크는 심리학과 같은 전문 과학을 사용하여 사회적 오류를 제거하고 합리적인 사회를 재구성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런 과학적으로 조직된 공동체는 도덕적 부패를 막고 비효율성을 제거할 수 있다. 이는 오직 그의 기계적인 인간이나 사회에 대한 이해에 기초한 것으로서, 유기적인 공동체나 인간 성장과 같은 듀이적 개념은 손다이크에게는 너무나 낯설고 거리가 먼 것이었다.

4.2. 듀이적인 유기적 심리학의 교육적 의의

앞서 언급한 반사궁 논문 이후 대략 35년이 지나서 발표한 <교육과학의 원천들>에서, 듀이는 교육과학의 가능성에 관해서 진지한 물음을 던지면서 자극-반응 심리학이 갖는 좁은 해석적 시야를 다시금 지적한다.
  • 자극-반응 심리학은 현 시기에 우세한 유형의 심리학이다. 자극-반응 아이디어는 의심할 여지없이 큰 가치를 지니는 한 진리를 제시한다. 그러나 이제 자극-반응 아이디어는 반사 행동 기제에 기초하면서 일반적인 생물학적 발달 과정으로부터 그 한 특정한 좁은 부분을 고립하여 유리되게끔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Dewey, 1929: 67).

당시에는 이미 손다이크가 주도한 자극-반응 심리학이 교육계에 널리 유포되어 학습 이론과 실천에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시기였다. 이에 듀이는 스스로 교육과학의 가능성을 크게 믿고 있지만 적어도 그것이 결코 손다이크적인 방식으로 실현되는 것은 아님을 주장하여 그와의 차이를 강조한다. 듀이는 앞서 반사궁 개념에 대한 반대에서 지적한 것처럼, 자극과 반응의 연결은 고정된 실재 간에 이뤄지는 견고한 연결이 아니라 다만 상황이나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유연하고 기능적인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자극-반응 연결은 전체의 필요와 관계를 맺고 있고, 전체 또한 성장이나 유기적인 변화와 긴밀하게 연관된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점을 간과한 결과로서 전체 체계는 원래 고정되고 고립된 단위들의 대수적인 합계로 환원되어 버린다. 실제적인 반사들은 단지 전체 시스템의 필요를 지원하여 기능하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이다. 이는 교육에도 그대로 적용하여 반영된다. 고립된 반사들에 기초하여 해석된 특정한 자극-반응 연결들은 고정되고 항상적인 학습 단위들로서 그때그때 단기적으로 활용되지만,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인 장기적인 성장과 변화의 요인은 무시되고 마는 것이다(Dewey, 1929: 67-68).
듀이는 학교를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갈등들이 유기적인 협응을 통해 재구성될 수 있는 곳으로 간주했다. 그런 재구성 과정을 통해서 학교는 사회변화를 위한 주요 기관이 될 것이다(Dewey, 1929: 73-76). 그런데 듀이가 보기에 손다이크식의 자극-반응 이론은 유기적 협응과는 무관하게 학습을 단순한 파편들로 붕괴시키고 있다. 듀이적인 관점에 따르면, 자극-반응 이론은 학습 과정에서 뿔뿔이 헤어진 부분을 제공하면서 마치 그것이 전체인 것처럼 여겨지게 한다. 학습에서 자극은 그저 교수자 등이 제시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학습자가 발견해야만 하는 어떤 것이다. 학습자가 자극을 적절하게 이해할 때에만 그의 반응은 온전한 것이 된다. 더욱이 운동 반응 또한 자극을 발견하는 데 기여한다. 연속적으로 협응되는 자극-반응 회로들이 서로 겹쳐 쌓이면서 학습의 습관이 창출된다. 그렇다면 학습은 뿔뿔이 헤어진 부분을 나타내는 궁이나 호가 아니라 결코 끝나지 않고 협응이 일어나는 원환이나 순환 회로들의 연속으로서, 그 안에서 삶의 경험들은 자극이자 반응으로 기능한다.
한편 앞서도 언급했듯이 듀이는 손다이크보다 덜하지 않게 인간 삶을 개선하기 위한 보편적인 도구로서 과학에 열정적으로 가담했고, 과학이 교육을 포함하여 어떤 영역에서든 우연하고 혼란스런 사건들을 지성적으로 통제하게 해줄 것이라고 믿었다(Dewey, 1929: 7-13). 중요한 차이는 손다이크가 교육과학을 실험실과 통제된 연구 기획을 관장하는 전문가들에 의해 산출된 객관적 지식의 저장소로서 바라본 곳에서, 듀이는 그것을 모든 수준에서 실천가들에 의해 이용될 수 있고 이용되어야만 하는 합리적 문제 해결의 방법으로서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손다이크와 듀이는 모두 새로운 과학적 심리학을 보다 나은 사회를 구성하기 위한 도구로서 삼았다. 그러나 손다이크는 유전적으로 타고난 능력들을 중요시하고 고정된 진리 기준들에 기계적으로 순응시키는 활동을 강조한 반면, 듀이는 유기적인 생명이나 삶의 개념을 내세우면서 인간 정신을 사회적인 적응의 과정을 통하여 설명하고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인간 공동의 협력을 옹호했다.
학교에서의 학습 활동과 관련해서, 좁고 수동적인 손다이크의 학습관과는 달리 듀이는 폭넓고 능동적인 학습관을 견지했다. 학습자는 능동적으로 그 환경과 상호작용해야 한다. 지성적 활동은 한갓 특정 기술의 습득에서가 아니라 독서와 토의/토론과 교수-학습자들 간의 상호작용에서 나온다. 심리 검사들은 특정한 지적 기술들을 측정할 수는 있겠지만, 단순히 정형화된 양적 방식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는 지적 능력을 온전하게 측정할 수 없다(Dewey, 1929: 36-39). 예컨대 어떤 능력은 단지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에 의해서만 평가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상호작용의 과정과 결과에 대한 평가는 장기간의 주의 깊은 관찰을 통한 판단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시험지 질문들에 의해서는 측정될 수 없다.
학습의 전이에 관한 듀이의 아이디어들은 또한 손다이크보다 근본적으로 좀 더 개방적이고 인간적인 것이었다. 그는 교사나 교수가 한 학생의 삶 전반에 걸쳐 지속하는 학습에 대한 관심이나 흥미를 일깨우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모두 저마다 크나큰 학습 능력을 지녔고 민주 시민으로서의 삶에 본질적인 비판적인 지성을 갖출 수 있다. 듀이가 보기에, 교육은 곧 성장인 것이다.
  • 성장은 삶을 특징짓는 것이기에, 교육은 성장과 하나이다. 그것은 그것 자체를 넘어서는 아무런 목적도 가지지 않는다. 우리는 좋은 학교의 가치를 그것이 얼마나 지속하는 학습의 욕망을 창출하고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을 제공할 수 있는 지에서 판정할 수 있다(Dewey, 1916: 53).

손다이크가 학습의 전이를 비좁은 능력 시험에 의해 측정되는 지성과 뒤죽박죽이게끔 만들어 놓은 곳에서, 듀이는 포괄적으로 확장되는 학습의 전이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는 인간 일반을 염두에 두고 학교의 목표가 하나의 태도로서 학습을 향한 욕망을 발전시키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학교는 얼마나 이런 어려운 목표에 부응하는지에 비추어 판정되어야만 한다(Dewey, 1929: 61-66). 한 학습자가 진정으로 중요한 어떤 것을 배울 때 전이되는 것은 순전히 양적 척도에 의존한 시험이 파악하거나 측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태도로서 학습하려는 욕망이나 욕구이고, 학습의 주제나 내용은 이런 중요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사용되는 많은 수단들 중 하나일 뿐이다.
오늘날 그 ‘지속적인 학습을 통한 인간 성장’이라는 목적의 중요성은 슬프게도 간과되고 있는데, 이는 전문적이거나 국소적인 영역별 학습 내용에 기초하여 보다 높은 시험 성적만을 지향하는 세태에 기인한 것이다. 듀이의 관점에서 좋은 평가의 열쇠는 학습자들에게 그들의 성취와 잠재성에 관해서 피드백을 제공하여 그들이 새로운 성장과 발전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 흔히 실시되고 있는 심리 검사들의 결과들도 학습자들에 대한 피드백일 수 있다. 문제는 그 검사들이 평가에서 가질 수 있는 기능을 제대로 잘 이해하는 것이다. 즉 그것들은 단지 특정 기술들만을 측정하는 것이기에, 극히 부분적인 성장 요소만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그런 검사들이 평가의 완전성을 주장하면서 학습자를 위한 선택지와 기회들을 제한하는 결정을 내리는 데 이용된다면, 그것은 교육 목표인 성장에 저해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2) 그래서 교육적 목적의 심리 검사 등이 조금이라도 성공적이려면, 그런 검사의 사용 목표와 방법들, 그것이 갖는 가능성들과 한계들, 실제적인 성취 결과들에 관해 관련 교육계 구성원들이 철저하게 이해하고 있어야만 한다. 즉 이는 그 총체적 적용이 아니라 피드백으로서 부분적 적용만을 주장하는 것이다.

4.3. 유기적 협응에 기초한 새로운 교육적 가능성의 모색

손다이크식의 자극-반응 심리학에 기초한 교육관은 교육의 내용과 목적을 아주 좁게 바라보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그에 따른 전문 능력 위주의 학습은 특히 과학기술이 세계를 계속 재형성하고 있고 사회 환경이 급변하고 있는 오늘날의 교육적 필요들과 잘 일치하지 않는다. 좁은 교육관은 영역 특정적인 부분적이거나 단기적인 결과를 중요하게 추구했기에 원래 교육의 목표인 전체적인 인간 성장은 기대할 수 없게 만들었다. 반면에 유기적 협응을 중요하게 여기는 듀이적인 교육관은 단편적인 기술이나 능력 습득이 아니라 항상 전체적인 인간 성장이라는 목표를 염두에 두면서 유기적인 학습 활동을 추구하기에, 오늘날의 사회적 변화에 적응하면서도 새로운 교육적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줄 수 있다.
실제로 현 시대에는 수많은 직업들이 쇠퇴하고 아주 빠르게 없어지고 있다. 회사 경영자들은 직원들이 진보적이고 창의적으로 자신들의 일을 성취할 방식들을 발견하기를 욕구한다. 장기적 전망에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능력들은 적응성, 유연성, 응용성, 창의성 등이다. 이런 능력들은 포괄적이고 유기적인 것으로서, 학습자들에게 자신과 자신의 일에 대해 반성할 기회를 제공하여 그 모두를 개선할 수 있도록 해줄 때에만 학습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학습자들이 ‘학습하기를 학습’하여 지속적인 학습을 향한 애정을 갖게 될 때만, 그들은 그렇게 장기적으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능력을 갖출 수 있게 될 것이다.
손다이크는 기계의 이미지로 인간을 보았고 듀이는 유기적인 생명의 이미지로 인간을 보았다. 듀이는 우리의 아이디어나 행동이 갖는 실세계의 결과들은 느린 우편을 통하여 고통이나 혼란이나 기쁨 등으로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고 믿었다. 손다이크의 아이디어는 국소적이고 단기적으로는 특정 성과를 낼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이고 폭넓은 관점에서는 지적인 성장의 실패와 민주적이지 않은 사회적 불균형으로 이끌어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기보니(Richard A. Gibboney)는 20세기 후반에 미국에서 일어난 교육과정 개발 아이디어들과 그에 따른 교육개혁을 분류하고 평가하면서, 특히 손다이크의 기계적 인간관에 따른 것으로 보이는 교육적 실패의 사례들을 특징적으로 지적했다(Gibboney, 1994: 3-13). 기보니는 민주주의적 가치와 지성 함양이라는 기준에 의거하여 평가를 진행했는데, 실제 일어난 수많은 개혁들 중에서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그런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고 실패했다고 보고한다. 그리고 그런 개혁적 노력이 실패한 원인은 앞서 인용한 교육사가인 라게만처럼 손다이크식의 좁은 교육관이 20세기 후반 교육계에 팽배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는 결론적으로 보다 넓은 듀이적인 시각에 기초하여 학교와 사회가 지속적으로 개선을 위한 작은 노력들을 경주해야 한다고 촉구한다(Gibboney, 2006: 171-172).

4.4. 피드백으로서 검사나 시험

현 시대에 나타난 심리 검사들과 적성 검사들은 표준화되어 ‘올바른 행동과 사고 습관들’의 기준을 설정하고 있다. 이런 도구들은 듀이의 주장처럼 학습자를 위한 피드백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 직종 등과 관련한 성공을 예측하기 위하여 기술과 능력과 관심을 별개의 영역이나 항목으로 따로 나누어 측정하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직업 상담사들과 기업 인사 담당자들에 의해 사용되어 대상자들을 분류하고 선택하여 가장 효율적인 취업이나 고용이 가능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의 실천은 학습자의 성장을 꾀하는 일반적인 교육의 목표와는 상반되는 결과를 낳는다고 지적되곤 한다. 예컨대 직업 수행을 위한 ‘최소 생산 능력’ 검사가 강조되곤 하는데, 이는 다시 ‘최소 역량 시험’이라는 개념으로 이어진다(Herrick, 1996: 1-14).3) 그런데 이는 교과과정이 그런 최소치를 나타내는 측정 가능한 고립된 단위들로 분해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주로 기존 체제에 진입하는 수준에서 요구되는 특정한 기술들만을 가르치는 데로 이끈다. 그리고 이런 교육 방식은 그 당연한 결과로서 학생들이 나아가고 성장해갈 수 있는 수많은 가능한 길들을 가로막거나 제한해버릴 수 있다.
  • 시험은 과학의 이름으로 개인을 수적인 계급에다 침몰시켜 제한된 수의 직업들과 어울리는 능력에 비추어 그를 판단한다. 그리고 현재의 사업 표준들에 따라 서열을 매기며 정해진 곳에 그를 할당한다. 이로써 현재의 질서를 영속화하기 위해서 교육이 할 수 있는 무엇이든 하는 절차를 시험은 나타내는 것이다(Dewey, 1922: 62).

물론 검사나 시험을 통한 평가의 일차적 기능이 피드백인 한에서, 그것이 대상을 정확하게 측정하여 명료하고 분류 가능하게 만드는 일을 하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다. 이 경우 평가는 자극-반응 회로의 일부로서 학습에 필수적인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4) 하지만 양적 측정에 기초한 심리/적성 검사 등은 흔히 피드백과는 다른 목적으로 오용되곤 하고 있다. 우리는 수치에 관한 쉬운 해석에 너무나 쉽게 유혹되어 그 수치가 단지 한 영역에서 특정한 개별 반응들을 명료화하는 방식일 뿐임을 간과해버린다. 개인에 관한 전체 그림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5) 학습자들의 능력을 양적으로 비교하는 것이 교육자의 임무는 아니다. 교육자는 학습자 개개인이 그 자신의 능력을 활용하여 의미 있는 활동을 하도록 도와야만 한다. 표준적인 검사나 시험이 학생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해 사용될 때, 그 결과는 사회적인 분리나 갈등으로 나타난다. 이와 달리 그것이 피드백으로서 사용되어 학생이 주어진 결과들의 의미에 관해 반성하고 그에 따라 목표를 설정하도록 허용할 때, 그 결과는 사회적 인간의 성장이다.

4.5. 현장 교육자의 역할

손다이크가 순응과 주입을 통한 전문적인 훈육을 주장했던 곳에서, 듀이는 실천적인 문제들을 공동으로 해결하는 위계적이지 않은 학습 공동체를 구상했다. 일터 민주주의를 크게 믿고 있던 듀이는 손다이크와는 달리 세계의 일은 소수가 계획하고 지시할 때보다 전체적으로 서로 다른 개인들이 자유롭고 조화롭게 이뤄내는 협업 활동을 통해서 더 잘 수행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협업 활동을 중시하는 교육자들은 무엇보다도 지시 이전에 학생들 스스로가 자신의 학습이나 연구를 조직하기를 기대할 것이다. 특히 교실 현장에서 학교교육의 상당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현장 교육자들은 스스로가 자신들의 교과 구성에 참여하여, 외부 전문가의 감독과 통제를 자율적인 아이디어들의 교환과 통합으로 대체할 필요가 있다. 현장 교육자는 학습 주제에 관한 풍부한 지식, 교육 과정에 관한 실천적인 이해, 민주적인 공동체 형성을 위한 교육적 사명감을 지니고서 능동적으로 학교교육을 발전시켜나갈 필요가 있다. 손다이크와 그를 따르는 전문가 집단이 상위 계층의 사람들이 경영하는 기술주의 사회를 꿈꿨다면, 특히 교양 교육자를 필두로 하는 현대의 현장 교육자들은 듀이처럼 스스로가 전문-실천가이자 그 일원으로서 활동하는 민주주의 사회를 꿈꿀 수 있다.
현장 교육자들은 손다이크의 주장처럼 전문가들의 명령에 따르는 기술자들이 아니라, 불가피하게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실천가들이다. 교육자의 능동적인 참여가 없는 교육과학은 ‘과학’으로서의 권위만을 내세우는 것이기에 진정한 과학이 될 수 없다. 교육자가 스스로 훈련하지 않고 과학을 단지 이미 완성되어 있어서 따르기만 하면 되는 조리법 정도로 여긴다면 이는 그 본성을 보지 못하고 권위에만 휘둘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듀이는 단지 교육자들이 무비판적으로 소박하게 믿고 있는 가정들을 충분한 정보에 근거하여 자발적으로 지성적인 습관들로 대체하려고 할 때에만 교육은 과학적인 것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런 듀이적 의미의 지성은 책이나 실험실 등이 아니라 실천적인 교육 활동을 인도하는 현장 교육자의 정신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5. 결론

손다이크가 자신의 자극-반응 심리학을 별다른 수정 없이 교육에다 바로 적용한 이후, 그의 교육관은 미국만이 아니라 우리의 교육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학습 주제나 내용에 따라 서로 다른 별개의 능력이 함양될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고, 사회가 요구하는 필수적인 능력들을 다수 익히면 학습이나 교육이 완성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를 평가하기 위하여 양적 측정에 기초한 수많은 검사나 시험이 개발되었고, 이것들은 듀이적인 피드백 목적이 아니라 학생들의 자질을 분류하고 선별하여 직업적인 운명까지 결정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모두는 자극-반응 심리학이 과학으로서 교육적 실천을 관리 감독함을 통하여 교육 또한 교육과학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손다이크의 이상에 부합하는 것이다.
손다이크식의 과학적 교육관과 대비하여 듀이 역시 과학적인 교육을 추구하기는 했지만 그 목표나 방향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일단 듀이는 자극-반응 심리학을 반사궁 모형으로서 규정하고, 유기적인 협응 모형에 의거하여 해당 모형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반사궁은 원의 일부에 불과한 것으로서, 반사궁에 의거한 지각적 행동 이해는 부분을 전체로 착각하는 오류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 심지어는 자극/반응이라는 반사궁의 부분들조차도 다만 파편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 온전한 유기적 협응에 의한 것이고, 전체로서 볼 때에는 실체적으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유기적 협응을 위한 기능적 국면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자극과 반응이 별개의 분리된 것으로 감각되는 경우는 오히려 정상적인 협응이 깨지고 실패하면서 그 부분들이 의식되는 경우이다. 이 경우, 우리는 기존의 정상적 협응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협응을 모색하게 된다. 결국 듀이적 관점에서 볼 때, 손다이크식의 검사나 시험은 다만 비정상적인 경우를 전체의 것으로 착각하여 설정되는 도구일 뿐이다. 인간에서 별도의 영역에서 유리되어 별도로 학습되는 별개의 능력들이라는 개념은 성립하지 않는다. 인간의 능력들은 모두 긴밀한 상호작용에서 나오는 측면들이나 국면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능력이든 측정하려면 전체를 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듀이가 특정 기술을 습득하는 성취도보다 학습을 향한 건강하고 지속적인 태도를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 성장의 정도는 전체를 보아야만 평가할 수 있는 것이기에, 지속적으로 학습하려는 태도나 성향이 중요한 것이지 일시적인 암기력이나 단순 기술의 습득은 부차적인 것일 뿐이다.
실제로 라게만의 진단처럼 20세기에는 손다이크가 이기고 듀이가 졌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살고 있고 살아가야 할 21세기에는 사정이 달라졌고 한층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점점 더 가속화되는 사회변화는 기존 체제에 적응하는 것보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일에 더 무게의 추를 두게끔 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적어도 교육 일반의 측면에서는 기-분류된 영역에서의 탁월성을 추구하는 손다이크식보다는 전체적인 훌륭함을 추구하며 늘 탄력적으로 나아가면서 목표를 수정하는 듀이식이 더 미래 세기에 들어맞을 수 있는 방식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제는 승패를 떠나 교육 당사자들의 유기적 협응이 강조되어야 할 시기이다. 사회적으로는 무엇보다도 민주주의의 필요성이 더욱더 절실해지고 있고, 교육적으로는 학습자의 전인적인 성장이 최우선 과제로 주어지고 있다. 특히 교양 교육자를 필두로 하여 열린 교육 목표와 과정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면서 현장에서 능동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전문-실천가로서 교육자는, 이런 필요성과 과제에 대해 심층적으로 느끼고 이해하며 그 실현을 위해서 노력해야 할 책무를 지닌다.

Notes

1) 이 논문은 심리학 리뷰 저널이 창간된 이후 출판된 50권에 실린 논문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논문이라고 평가되었다(Brinkmann, 2011: 305).

2) 이렇게 학교에서 표준적인 심리 검사 등의 적용이 적절한 이해를 가지고 신중하고 주의 깊게 이뤄져야 한다는 것은 손다이크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교육학자인 발루도 재삼 강조하고 있다. “학교 시스템에다 교육적 측정의 도입 시기는 현명하게 선택되어야만 한다. 표준 검사들은 단지 그 방식이 주의 깊게 준비된 연후에만 제공되어야 한다.”(Ballou, 1918: 41)

3) 최소 역량 시험의 개념은 교육계에서 일어나는 설명 책임성(accountability) 운동과 연관지어 이해할 수 있다. 교육자에게는 자신이 행한 교육의 결과를 시험이나 검사 등을 통한 기록으로 낱낱이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책임이 부여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적어도 기업 등을 위해서는 교육자가 학생들이 특정한 최소 기술을 익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성립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설명 책임성이라는 개념은 회계에서 나온 것이다. 회계는 비용을 낮추기 위해 대상 조직체가 갖는 모든 측면들을 별개 단위로 나누어 측정한다. 물론 교육자들도 회계의 경우처럼 설명 책임이 있다. 그러나 교육자들은 교육의 목표를 위해서 설명할 책임이 있는 것이지 단기적인 산업적 이득을 위해서 그런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다. 참된 교육적 검사나 시험은 교육의 목표를 제대로 반영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4) 듀이 자신도 이렇게 말하면서 측정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가치들은 그것들이 세밀하고 정확하게 측정된다고 하여 더 이상 가치들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Dewey, 1901: 30)

5) 예컨대 결과가 바로 수치화되는 검사에서 피검사자는 주어진 문제에 그저 응답하기만 하지 스스로 문제를 설정하고 답변을 찾는 일은 하지 않는다. 이 경우 진정 중요한 반성적 사고 능력 등은 모두 해당 검사나 시험의 측정 범위를 벗어날 수 있다. 굴드(Stephen J. Gould)는 숫자의 마력에 대해 이렇게 경고한다. “수는 시사하고, 강제하고, 거부한다. (…) 해석자는 자신의 객관성을 확신하며, 때때로 자신이 얻은 수치와 일치하는 많은 해석들 중에서 하나의 해석을 고르게 하는 선입관을 간파하지 못한다. (…) 숫자와 그래프는 측정이 정밀도, 표본 크기, 또는 조작의 복잡성이 증가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권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스티븐 제이 굴드, 2019: 149-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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