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이 글의 목적은 대학 교양교육으로서의 ‘소양교육’의 연원에 대해 이론적으로 탐색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플라톤(Platōn, B.C. 427~347), 몽테뉴(Michel de Montaigne, 1533~1592), 로크(John Locke, 1632~1704)의 교육론에서 ‘소양교육’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소양교육’의 연원에 대한 검토가 필요한 이유는 한국교양기초교육원이 2016년 제시한 ‘대학 교양기초교육의 표준 모델’에서 찾을 수 있다. 이 ‘표준 모델’은 대학의 교양 교육과정을 ‘기초교육’, ‘교양교육’, ‘소양교육’ 3개 영역으로 구분하였다. ‘기초교육’은 대학교육을 받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교과에 대한 공통교육이고, ‘교양교육’은 인간과 사회, 자연에 대한 탐구를 위한 제학문 영역의 기본 지식 습득이 목표라면, ‘소양교육’은 학문 탐구의 목적이자 전제인 인성의 함양을 목표로 하고 정서적⋅사회적⋅신체적 체험 교육(
한국교양기초교육원, 2016)을 내용으로 하는데, 세 영역 중 ‘소양교육’ 영역이 지향하는 목표와 정체성이 다소 모호하다. 이로 인해 2019년 국내 대학의 교양교육 현황 조사에서는 소양교육이 정의와 적용에서 “가장 모호한 영역과 범주”라고 기술(윤승준 외, 2019: 113)하고 있고, 또 2020년 한국교양기초교육원의 정책연구 보고서에서는 그 “정의와 영역의 경계가 모호하고 명확하지 않아 …
1) 부작용을 낳고”(
이연주 외, 2020: 3) 있다고 문제점을 기술했다. 결국 이러한 소양교육의 문제점은 소양교육 영역 자체의 존폐에 대한 논란을 발생시켰고, 이에 대해 교양교육 전문가들 사이에서 의견이 나뉘고 있다.
소양교육이 가지는 모호성의 원인은 크게 보면 두 가지인데, 먼저 교육과정으로서의 ‘소양교육’은 거의 최초로 국내 대학 교육과정에서 시도되고 있기 때문이다. ‘표준 모델’에서 이야기하는 ‘소양교육’이 목표로 하는 인성교육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통적으로는 제시되는 것이다. 그러나 근대 대학교육 체제가 정비된 이후 교육과정에서 인성을 위한 별도의 교육영역이 편성되고 또 체험 중심의 교과로 이러한 영역이 운영된 적은 없다. 이에 따라 소양교육이 교육과정에서 별도의 영역으로 편성되어야 하는 이유나 편성의 목적, 교과 구성에 대한 충분한 검토와 논의가 아직 축적되지 못한 상태이다. 그 결과 소양교육은 모호한 영역이 되었다. 둘째, ‘소양교육’의 목표는 인성교육인데, 사실 인성을 무엇으로 보고 어떻게 함양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공유된 합의점은 아직 없는 상태이다. 그리고 인성에 대한 공유된 합의가 가능할지도 의문이다. 인성은 일관성 있는 윤리적 원리라기보다는 행위의 구체적인 방식의 문제이자 좋은 삶을 위해 필요한 조건인데, 좋은 행위와 좋은 삶에 대한 설명에는 삶의 조건으로서의 사회적⋅문화적 맥락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그런데 삶의 조건인 사회적 환경의 다양성과 불가피한 변화는 인성에 대한 보편적 인식의 성립을 어렵게 한다. 이러한 인성에 대한 보편적 인식 정립의 어려움은 인성에 대한 담론의 상이함이라는 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인성에 대한 근본적 난점이 인성교육을 목표로 하는 ‘소양교육’의 정의와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 수밖에 없게 한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소양교육에 대한 정책연구(
이연주 외, 2020)가 진행되기도 하고, 인성 교육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동양의 지성사 중 이황의 『성학십도』에 기반한 연구(
손승남⋅남기호, 2019)를 통해 인성교육과 소양교육에 대한 탐색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다만 이와 같은 ‘소양교육’에 대한 연구는 현황 파악 중심이거나 시론적 고찰 정도인 듯하다. ‘소양교육’에 대한 연구는 양적인 면에서나 질적인 면에서 아직 매우 부족한 상태로 보인다.
어딘가에서 길을 잃었거나 갈림길에서 고민하고 있다면, 최초 출발점은 어디였고 당초 목표점은 어디였는지를 다시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삶의 조건은 다양하고 변화하기 때문에 목표는 변함이 없어도 그 길이 바뀔 수도 있고, 목표 자체가 바뀌어 가야 하는 길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다. ‘소양교육’에 대해 고민이 된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교육체제가 당초 무엇을 목표로 하였고 어떤 교육내용으로 설계되었는지 확인하고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즉 대학 교육과정의 일부로서 ‘소양교육’의 존폐나 활용 방안을 정하기 위해서는 정서적⋅사회적⋅신체적 체험과 관련한 주요한 교육이론에 대해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표준 모델’에서 ‘소양(素養)’이라는 말이 『논어』「팔일편」의 “회사후소(繪事後素)”에서 온 것이라고 제시하고 있으므로 동양 지성사의 맥락에서 ‘소양교육’을 분석할 필요성도 상당하다. 다만 이 글에서는 서양 사상가들의 교육이론에서 체험 중심 교과에 대한 논의와 의미에 대해 집중하고자 한다. 이는 현대 대학의 기본 체제가 만들어진 서양의 지성사 속에서 소양교육의 성격을 우선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체험형 교과에 대한 논의가 분명하게 제시되는 플라톤, 몽테뉴, 로크 세 명의 사상가가 제시하는 교육이론에서 소양교육의 내용과 성격을 분석하고자 한다.
플라톤의 경우 자유교육 전통의 근간이 되는 자유교양 7교과 형태의 교과목을 거의 최초로 제시했고, 또 교육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인격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플라톤 이후 아리스토텔레스, 로마 지식인들을 거치면서 정립된 자유교양 7교과는 중세시대 라틴어 교육과 더불어 교육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다만 중세시대 교육은 교회를 중심으로 실행되면서 정서적⋅사회적⋅신체적 체험 중심 교육활동은 교육체제에 편입되지 못한 채 일부 귀족들의 군사훈련이나 취미 활동 정도로 치부되었다. 인간의 신체와 감각 기관, 인간 몸의 예술적 가치에 대한 재발견은 르네상스 지식인들이 그리스와 로마를 다시 돌아보면서 나타나게 되었다. 몽테뉴는 바로 이러한 르네상스라는 전환기 유럽 지식인들의 교육에 대한 관점을 잘 보여준다. 또 몽테뉴의 『수상록』은 로크와 루소의 교육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몽테뉴를 통해 근대적 교육이념의 정립 과정에서 소양교육의 의미와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로크는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라는 유명한 문구로 행복의 상태를 표현한 『교육론』으로 근대 교육이론의 중요한 토대를 제시한 인물이며, 특히 신체 교육을 비롯한 소양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강조가 선명하게 나타난다는 점에서 ‘소양교육’에 대한 연원을 탐구하기 위해서 빼놓을 수 없는 사상가이다.
이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소양교육은 기본적으로 자유교육의 전통에 그 내용이 포함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자유교양 7교과로 상징되는 자유교육이 중세 때부터 지식 중심으로 진행된 것은 분명한데, 이러한 사실이 자유교육은 지식 중심 교과를 통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분명하다. 플라톤의 경우 음악과 체육에서 체험적 활동을 제시하고 있고, 몽테뉴의 경우도 직업교육이 아닌 귀족의 교양교육에서 건강과 취미, 인내심을 위한 활동을 제시하고 있다. 로크의 경우 신체 교육과 전환과 휴식을 위한 활동을 강조하는데, 이는 직업교육의 일환이 아니라 삶을 잘 살아가기 위한 방법에 대한 교육의 일환이다.
2. 플라톤의 소양교육
정서적⋅사회적⋅신체적 체험 교육으로서의 ‘소양교육’의 기원은 플라톤에게서 찾을 수 있다. 플라톤의 교육이론은 『국가(Politeia)』와 『법률(Nomoi)』에 주로 나타난다. 플라톤에 의하면, “삶의 목표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사람에게 적합한 혼의 덕을 획득하는 것”(
Platōn, 2018: 1권 321)이다. 그리고 좋은 사람이 되기에 적합한 혼(psychē)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교육(Paideia)’이 반드시 필요(
Platōn, 2018: 1권 270)하다. 플라톤은 잘 교육 받은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될 것이고, 좋은 사람이 일도 훌륭하게 처리하므로 교육은 공동체에 승리를 가져온다고 주장(
Platōn, 2018: 1권 51)하기도 한다.
여기서 플라톤이 말하는 ‘교육(Paideia)’은 현대적 의미에서는 ‘교양교육’을 의미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은 교육받은 자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교육받지 못한 자라고 말하는데, 소매업이나 조선업, 혹은 그런 종류의 다른 일과 관련해서는 교육을 아주 잘 받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때론 ‘교육을 받지 못한 자’란 말을 사용합니다. 지금의 논의에서는 이런 직업 교육은 교육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 완전한 시민이 되고자 하는 욕구와 사랑을 가진 자로 만드는, 어릴 때부터의 덕 교육을 교육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
Platōn, 2018: 1권 56-57)
플라톤이 말하는 교육이란 ‘직업교육’과 대비되는 의미의 ‘교양교육’을 의미하고, 교양교육의 목적은 덕을 교육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양교육의 교육적 ‘성과’는 “(쾌락, 사랑, 고통, 미움)과 이성이 의견 일치”를 할 수 있는 상태이고, 이는 “미워해야 할 것은 시종일관 미워하고 좋아해야 할 것은 시종일관 좋아하도록 쾌락과 고통에 관해 올바로 훈육된 상태”(
Platōn, 2018: 1권 74)라고 부연설명 되기도 한다. 개념으로 제시되지는 않고 있지만, 여기서 플라톤이 말하는 교육이 바로 자유교육(liberal arts)의 기본적 정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플라톤의 말을 살펴보면 ‘자유교육’ 혹은 ‘교양교육’은 ‘직업교육’이 아닌 각 부류의 사람들이 자신의 생업을 위해서 받는 각기 다른 직업교육과 대비되는 것으로서, 가) 완전한 시민이 되기 위해 모든 교육 대상이 공유하는 공통교육이자 나) 인간 본질에 대한 계발 혹은 도야를 통한 덕의 성취를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러한 자유교육 혹은 교양교육의 목표는 덕의 함양인데, 플라톤은 이성이 우리의 욕구를 통제하는 상태를 덕이 함양된 상태로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성이 욕구를 통제하는 상태란 구체적으로 인간 영혼(psychē)의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가?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이 ‘이성, 격정, 욕구’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고 본다. ‘이성’과 ‘욕구’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요소로서, 이성은 영혼의 헤아리는 부분이고 욕구는 신체적 욕구와 관련된 부분이다. ‘격정(thymos)’에 대해 플라톤은 “헤아리는 부분을 보조하는 것”인데, 헤아리는 부분과 동조하여 욕구를 통제하는 역할(
Platōn, 2019: 301-303)을 수행하는 ‘영혼의 한 상태 혹은 부분’(
Platōn, 2018: 2권 166)이라고 설명한다. ‘헤아리는 부분’이 이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면, 이성이 욕구를 통제하는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성이 올바로 이끌고 격정이 이성을 올바로 보조할 수 있어야 한다. 플라톤은 이러한 상태를 ‘절제’라고 한다. 플라톤에게 ‘절제’는 개인의 차원에서는 영혼 중 나은 부분인 이성과 격정이 한결 못한 부분인 욕구를 통제하는 것(Platōn, 2019: 280)이고, 사회적인 차원에서는 개인의 영혼을 구성하는 것과 거의 동일한 세 부류의 사람들 사이의 조화로운 분업 질서를 의미한다. 이러한 절제는 덕성으로서 교육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성과이다. 따라서 플라톤의 교육이론은 이러한 절제라는 목표를 위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대중을 위한 체계적인 교육과정을 거의 최초로 제시했다. 플라톤 이전 소피스트들이 문법, 수사학, 변증학 등에 대한 전문성을 가지고 활용하기도 했지만, 이는 플라톤이 제시한 좋은 인간과 좋은 삶을 위한 영혼의 계발을 목표로 하는 대중교육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플라톤의 교육은 “모든 사람과 아이는 가능한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는 것이었고,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 대해서도 모두 똑같은 식으로 적용”되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판단에 의해 어떤 아이는 학교에 가고 어떤 아이는 학교에 못 가서 교육을 받지 못하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되는데, 이는 아이들이 “부모에 속한다기보다는 국가에 속하기 때문”이다.(
Platōn, 2018: 2권 45-46) 생업을 위한 교육과 연설을 위한 교과가 아니라 의무교육과 일반교육 이념의 원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리고 각자의 전문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중의 덕성 교육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소피스트들의 교육 및 교과와 플라톤의 것은 구분된다고 하겠다. 물론 플라톤이 말하는 교육의 대상은 기본적으로 자유민을 대상(
Platōn, 2018: 2권 72)으로 하는 것이라는 점은 간과될 수 없다.
플라톤의 교육과정은 크게 두 단계로 구분된다. ‘예비 교육’과 ‘영혼의 전환을 위한 교육’이 그것이다. 예비 교육에 대해 플라톤은 이렇게 말한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 그리고 ‘예비 교육’이라는 말 자체에서 그의 ‘예비 교육’은 현대의 초등교육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반면, 플라톤이 말하는 ‘영혼의 전환을 위한 교육’의 목표와 성격은 ‘예비 교육’과 다르다.
이건 … 밤과도 같은 낮에서 진짜 낮으로 향하는 혼의 전환(psychēs periagōgē)이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철학이라고 우리가 말하게 될 실재로 향한 등정일 것 같으이. …… 그렇다면 교과들 중에서 어느 게 이런 힘을 지니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만 되지 않겠는가? …… 앞서 체육과 시가에 의한 교육을 분명히 받았네. …… 체육은 생성하고 소멸하는 것과 물론 관련되어 있다네. …… 이는 우리가 찾고 있는 교과가 분명히 아닐 것이네. …… “화성(선법)에 의해서는 지식 아닌 조화로움을 갖게 해 주었으며, 리듬에 의해서는 단정함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찾고 계신 그런 것으로 인도하는 교과는 이 안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 그렇다면 시가와 체육, 그리고 (수공적) 기술들을 떠나, 아직도 다른 무슨 교과가 남아 있습니까?” (
Platōn, 2019: 461-463)
‘예비 교육’이 기초교육이라면, ‘영혼의 전환을 위한 교육’은 ‘실재’에 대한 인식을 위한 교육이다. 그렇다면 예비 교육과 영혼의 전환을 위한 교육의 내용은 무엇인가? 예비 교육의 경우, 『국가』와 『법률』은 모두 몸을 위한 교육으로서 ‘체육(gymnastikē)’과 영혼을 위한 교육으로서 ‘시가(mousikē)’를 제시한다. 순서는 시가 교육이 우선이고 그 다음이 체육 교육이다(
Platōn, 2019: 165). 『국가』 2권과 3권에서 꽤 길게 기술하고 있는 내용을 보면, 플라톤이 말하는 시가 교육은 ‘신’, ‘역사’, ‘시’, ‘문자’, ‘윤리학’의 내용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이는 고대사회에서 기본 지식이나 공동체의 규칙, 가치의 체계를 노래로 구전(口傳)하는 일반적인 양상을 보여주는 듯하다. 따라서 이때의 시가는 노래라는 형식보다는 지식의 전승이라는 내용에 초점이 있는 듯한데, 시가 교육은 영혼을 위한 교육이라는 플라톤의 말도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체육 교육의 경우, 『법률』에 따르면, 춤과 레슬링이라는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된다. 그리고 춤의 경우 다시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뮤즈를 찬양하기 위한 위엄과 자유인다움의 춤이 있고 신체의 양호한 상태와 민첩성과 아름다움을 위한 춤이 있다(
Platōn, 2018: 2권 26).
한편 ‘영혼의 전환을 위한 교육’으로 제시되는 교과의 경우, 『국가』에서 기술된 것과 『법률』에서 기술된 것이 조금 다르다. 『국가』에서는 ‘산술’, ‘평면 기하학’, ‘입체 기하학’, ‘천문학’, ‘음악’, ‘변증술’ 6개 교과가 제시된다(
Platōn, 2019: 463-487). 플라톤은 평면 기하학과 입체 기하학을 별도의 교과로 구분하여 6교과로 제시되었지만, 기하학을 하나의 교과로 합쳐서 본다면 5교과로 볼 수도 있겠다. 『법률』에서는 ‘문법(읽기와 쓰기)’, ‘음악’, ‘체육(춤과 레슬링, 말타기, 활쏘기, 창던지기)’, ‘산술’, ‘기하학’, ‘천문학’ 6개 교과(
Platōn, 2018: 2권 54-72)를 제시한다. 『국가』에서 거론한 ‘변증술’이 『법률』에서는 빠지고, 대신 『법률』에서는 ‘읽기와 쓰기’, ‘체육’이 ‘영혼의 전환을 위한 교육’에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는 『국가』가 주로 수호자와 통치자 교육에 초점이 있다면, 『법률』은 마그네시아(Magnesia)라는 공동체의 규칙으로서의 법률 제정에 초점이 있기 때문에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수호자와 통치자 교육을 위해서는 변증술(논리학) 교과가 강조된 것으로 보이고, 마그네시아라는 새로운 폴리스의 질서 구축을 위해서는 자유민의 전쟁기술 습득에 초점을 맞춘 체육 교과가 강조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국가』에서는 예비교육으로서의 시가 교육에서만 부분적으로 거론되던 ‘읽기와 쓰기’ 교육이 『법률』에서는 독립된 교과로 강조된다는 차이가 있기도 하다.
플라톤의 ‘영혼의 전환을 위한 교육’은 로마시대와 중세시대의 ‘자유교양 7교과(문법, 수사학, 논리학, 산술, 기하학, 천문학, 음악)’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이 전혀 거론하지 않은 ‘수사학’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s, B.C. 384~322)와 로마시대 키케로(Cicero, B.C. 106~43)를 거치며 7교과의 하나로 확고한 위상을 가지게 되었고, 로마시대에는 다른 교과들에 비해 가장 중요한 교과로서의 위상을 가지기도 하였다. 자유교양 교과(Liberal arts) 체제의 기원으로 기원전 1세기 마르쿠스 바로의 『학문에 관한 9가지 책』이 흔히 거론된다. 이 책에서 거론된 ‘문법학, 변증학, 수사학, 기하학, 산술, 천문학, 음악, 의학, 건축학’ 중 의학과 건축학이 누락된 후 중세의 삼학(trivium)과 사과(quadrivium)가 형성(
한철희, 2012: 173-174)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자유교양 7교과의 원형은 플라톤의 『국가』와 『법률』에 이미 상당히 구체화 되어 나타나고 있다.
플라톤의 교육이론에서 정서적⋅사회적⋅신체적 체험 교육으로서의 소양교육은 ‘체육’, ‘가무’, ‘음악’ 교과와 주로 관련될 수 있을 듯하다. 체육교육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신체적 훈련의 성격을 가지는데, 왜냐하면 이는 “신체의 성장과 쇠퇴를 관장하기” 위한 것(
Platōn, 2019: 462)이기 때문이다. 또한 플라톤은 “전쟁을 위한 모든 신체적 훈련도 체육으로” 간주하고(
Platōn, 2018: 2권 63) 아동교육에서부터 성인교육에 이르기까지 체육으로서의 군사훈련의 필요성과 그 방법에 대해 일관되게 이야기하였다.
전쟁기술로서의 레슬링이나 창던지기와 같은 체육은 고대사회라는 당시의 사회적 환경에서 자유민에게 필요한 능력이었을 것이다. 기술적이고 수공적인 성격의 전쟁기술이 자유교육 혹은 교양교육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 수 있다. 그러나 최소한 플라톤에게는 전쟁기술도 자유교육의 일부로 고려된 듯하다. 두 가지 측면에서 그렇게 볼 수 있다. 첫째, 『법률』에서 플라톤이 말하는 전쟁기술로서의 체육은 직업적 군인을 위한 수공적 내용에 대한 교육이 아니라 자유민이라면 누구나 배워야 하는 공통교육이고, 이는 여성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러한 점에서 중세시대 직업교육(Mechanical arts)의 하나로 거론되는 전쟁기술과 플라톤의 전쟁기술은 구분되어야 한다. 둘째, 플라톤에게 전쟁기술은 체육교육의 본질이라기보다는 부수적 효과에 가깝다. 『법률』에서 플라톤이 체육으로서의 춤에 대해 “그러한 움직임이 몸의 덕으로까지 이르게 될 경우에, 몸의 그런 상태를 위한 기술적 훈련을 체육이라고 부른다”고 하고, 또 같은 곳에서 “혼에 이르는 목소리에 관한 것은 덕의 교육에 속하는 것인데, … 우리는 그것을 시가라고 부른다”고 한 것(
Platōn, 2018: 1권 117)을 보면 시가와 마찬가지로 체육도 덕의 함양이 목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전쟁기술을 자유교육의 일부로 보는 것에 대해 현대 교육과정의 관점에서는 논란이 가능할 듯한데, 다만 플라톤은 명백하게 자유교육의 일부로 보았던 듯하다.
교육으로서의 체육교육의 본질은 ‘몸과 관련된 덕의 성취’라고 할 수 있을 듯한데, 그렇다면 이때 플라톤이 말하는 “덕”은 무엇인가?
이 체조와 운동은, 다른 운동 선수들이 힘을 위해서 먹을 것과 운동을 대하듯 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염두에 두고서보다는 제 천성의 ‘격정’적인 면을 염두에 두고 이를 일깨우느라 힘들일 걸세. (
Platōn, 2019: 239)
플라톤은 체조와 같은 체육은 훈련을 통해 힘이나 몸의 활용 능력을 증대하는 기술적 성장이 목표이 아니라, 영혼의 한 부분인 ‘격정’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인간의 영혼은 ‘이성, 격정, 욕구’라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이성이 이끌고 격정이 이성을 보조함으로써 욕구를 통제하는 상태가 ‘절제’이고, 플라톤은 이를 올바른 덕의 성취로 설명한다.
개인을 용기 있게 하는 부류와 방식, 바로 그 부류와 방식으로 나라 또한 용기 있는 나라로 되었으며, 훌륭함(훌륭한 상태, 덕)과 관련되는 다른 모든 것의 경우에 있어서도 양쪽 것은 마찬가지이겠지? …… 실상 이 나라가 올바르게 된 것은 그 안에 있는 세 부류가 저마다 ‘제 일을 함’에 의해서였다는 것 …… 따라서 … 우리 각자의 경우에도, 자신 안에 있는 부분들의 각각이 제 일을 하게 되면, 이 사람이 올바른 사람으로, 제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될 것이라는 점일세. …… 그러니까 지혜로우며 혼 전체을 위한 선견지명을 지니고 있는 헤아리는 부분으로서는 지배하는 것이 적합하겠지만, ‘격정적인 부분’(thymoeides)으로서는 이에 복종하며 협력자로 되는 게 적합하지 않겠는가? …… 시가와 체육의 혼화(krasis)가 이 둘을 조화되게 만들지 않겠는가? …… 그래서 바로 이 두 부분이 이처럼 양육되어 참으로 제 할 일들을 배우고 교육받게 되면, 이것들은 욕구적인 부분을 지도하게 될 걸세. (
Platōn, 2019: 304-305)
플라톤은 춤을 포함한 신체 훈련, 또 음악이 결합된 화성과 리듬이 영혼의 한 부분 혹은 상태인 ‘격정’을 올바르게 함양하여 ‘격정’이 이성을 보조하는 역할을 올바르게 하도록 하는 것이 개인의 덕의 함양이라고 보는 것이다. 음악의 경우에도, 체육이 ‘격정’을 일깨우고 고무하는 것과 거의 동일한 목표를 향한다. 플라톤은 “노래라고 부르는 것들은 … 실로 혼을 위한 주문”이고 ‘올바르게 즐거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따르게 하기 위한 것’을 음악 교육의 목표(
Platōn, 2018: 1권 88)라고 한다. 따라서 가무와 시가, 체육교육에서 ‘아름다운 것을 즐기거나 아름답지 않은 것을 미워하지 않으면서도 몸과 목소리로 잘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한 대로 몸과 목소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도 아름다운 것을 반기고 아름답지 않은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올바른 덕을 가진 사람’(
Platōn, 2018: 1권 78)이라고 플라톤은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플라톤에게서 소양교육의 역할이나 위상을 보면, 교육의 ‘기초’도 아니고 교육의 ‘목적’도 아니다. 소양교육은 예비 교육이나 영혼의 전환을 위한 여러 교과의 일부로 구성되어 있고, 별도의 범주로 구분되지 않는다. 별도의 범주로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에 소양교육이 독립적인 영역으로서의 위상은 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플라톤에게서 체육과 가무 교육은 인간 영혼의 ‘격정’이 ‘이성’을 보조함으로써 ‘욕구’를 통제하는 ‘절제’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교과이므로 소양교육은 예비교육과 영혼의 전환을 위한 교육에서 고유한 역할을 가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다만 플라톤 교육이론에서 소양교육적 요소의 존재는 신체적 활동이나 습관과 관련되는 것임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신체의 독립성이나 긍정적 역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플라톤에게서 모든 교육적 요소는 영혼이 덕을 실행하도록 하는 하나의 목표만을 향하고 있다. 플라톤의 ‘몸의 훌륭함으로 영혼의 훌륭함이라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훌륭함에 의해서 몸의 훌륭함이라는 결과가 나온다’(
Platōn, 2019: 225)는 말은 그의 인간 이해와 교육이론의 핵심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3. 몽테뉴의 소양교육
르네상스 문예부흥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몽테뉴의 교육이론은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기 지식인의 교육이론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하고, 또한 경험주의적 교육관을 제시함으로써 이후 로크, 루소와 같은 위대한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몽테뉴의 『수상록』을 보면 그의 사상은 플라톤과 관련성이 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수용이든 비판이든 『수상록』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사상가는 플라톤인데, 흥미롭게도 몽테뉴는 플라톤과 상당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플라톤은 우리가 너무 고통과 쾌락에 집착하며, 그 때문에 마음을 너무 육체에 매어 지내게 하는 것을 우려한다. 나는 반대로 생각한다. 이 집착 때문에 영혼이 육체에서 떨어져 풀려 나가는 것이 두렵다. (
Montaigne, 2021: 66)
플라톤의 영혼 중심 관점에서 몽테뉴는 영혼과 육체의 균형이라는 관점으로 전환한다. 몽테뉴는 플라톤이 주장한 영혼의 위대함과 불멸성, 완벽성에 대해, 그리고 인간 인식의 근원이자 목적은 영혼이라는 상기설에 대해 비판한다. 그에 의하면 영혼은 출생하고 성장하는 몸과 공통의 조건을 가지고 같은 길을 간다.(
Montaigne, 2021: 598-599)
육체는 우리 인생에 큰 몫을 차지한다. …… 우리의 이 두 가지 주요 부분을 떼어서 분리시키려고 하는 것은 잘못하는 일이다. 반대로 이 둘은 짝지어 맞춰 놓아야 한다. …… 그들의 성과가 서로 다르고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조화를 이루어 한 길로 나가도록 하라고 영혼에게 명령해야 한다. (
Montaigne, 2021: 706)
몽테뉴가 주장하는 ‘영혼과 육체의 조화’는 플라톤으로 상징되는 고대적 사유, 혹은 중세의 기독교적 관점에 비해 육체의 가치를 더 인정하는 것이고, 이러한 사고는 다시 육체에 근거한 ‘감각’의 인식적 가치를 주목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플라톤은 진리의 판단과 진리 자체를 견해와 감각과는 별개로 정신과 사유에 소속시키려고 하였다. 이 문제에서 나는 … 감각에 관해서 고찰하게 되었다. …… 모든 인식은 감각에 의해서 우리에게 온다. 감각이 우리의 주인이다. 지식은 감각을 통해서 시작되며, 속에서 해결된다. (
Montaigne, 2021: 645-646)
‘감각’이 없다면 인간의 정신은 외부 세계와 만날 수 없다. 정신은 외부 세계에 대한 인식을 위해 경험 이외의 다른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성과 감각 경험은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몽테뉴의 감각과 경험에 대한 인식적 가치의 인정은 육체가 만드는 ‘정열’에 대한 강조로 다시 이어진다.
몽테뉴의 ‘정열’은 육체에서 오는 것이라는 점에서 영혼의 일부인 플라톤의 ‘격정’과는 다르다. 분노가 용기를 만들고 욕심이 지식의 성취나 명예, 학문과 건강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처럼 정열은 배를 움직이는 바람과도 같이 우리 영혼의 추진력(
Montaigne, 2021: 621)이 된다. 게다가 몽테뉴의 ‘정열’은 단지 올바른 방향은 모른 채 불어대는 바람과 같은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이미 올바른 방향성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그에게 ‘정열’은 정신을 움직이고 행위를 만드는 동기이자 원동력으로 보인다. 또한 앞의 영혼과 육체, 정신과 감각의 조화와 균형이라는 관점의 연속선에서 몽테뉴는 이성과 정열이 균형적이어야 한다고 보고 있으며, 심지어 이성보다는 정열이 우리를 도덕으로 인도한다고 함으로써 이성의 도구적 성격을 암시하기도 한다.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몽테뉴의 관점은 고대와 중세의 것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비판적 태도는 그 자신의 다음과 같은 논리에 의해 정당화된다.
우리는 ‘키케로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플라톤의 도덕이다. 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다’라는 식으로 말할 줄 안다. 그러나 우리 자신으로는 뭐라고 말하나? …… 앵무새도 이만큼은 할 것이다. ……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과 지식을 받아 담는다. 그것뿐이다. 지식은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 남의 지식으로 학자가 되어도 적으나마 자신의 예지가 아니면 우리는 현명해지지 못한다. (
Montaigne, 2021: 152-153)
그러므로 몽테뉴에 의하면, “외워서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Montaigne, 2021: 168) 즉 습득한 지식이 자기 삶의 경험을 통해 내면화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발전에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한다. 몽테뉴는 기억력보다는 판단력이 더 중요하다고 다양한 방식으로 강조한다. 이러한 몽테뉴의 생각은 그의 교육이론에도 강하게 반영된다. 그에 의하면, 교육의 목표는 학습을 통해 스스로 더 나아지고 현명한 사람이 되는 것(
Montaigne, 2021: 168)이다. 더 나아지고 현명한 삶이란, 참된 자유를 가지는 것이다.
참된 자유란, 사회적 관습이나 명령이 아니라 스스로가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이며, 이 자유는 스스로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결정권은 반드시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
Montaigne, 2021: 1171)하다. 스스로에 대해 알고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결정권은 타락으로 향하는 문의 열쇠가 될 뿐이다. 이 때문에 몽테뉴는 영혼과 신체라는 두 측면 모두에서 견고함을 위한 훈련이 필요(
Montaigne, 2021: 170)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가 교육을 위한 교과로 제시한 것들은 영혼과 신체, 이성과 감각, 지식과 판단력의 조화와 균형을 습득하기 위한 것이다.
몽테뉴는 교과를 통한 교육이 학자를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되며, 사람들을 선량하고 현명하게 만드는 것이 올바른 목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도덕의 정의와 구분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학생 스스로 도덕과 친밀성을 느끼고 그것을 실천하려는 동기를 생성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훌륭한 교육은 사람들의 판단력을 길러주고 습관을 올바르게 형성하는 것(
Montaigne, 2021: 730)이다. 이러한 교육을 위한 몽테뉴의 교과는 ‘외국어’와 ‘역사’ 등이 새로 등장하고 강조된다는 점에서 고대와 중세의 자유교양 7교과와는 달라진다. 몽테뉴가 교육과정을 구성하는 전체 교과에 대해 기술을 하는 것은 『수상록』1권 「26.아이들의 교육에 대하여」(
Montaigne, 2021: 160-198)인데, 이 부분은 로크와 루소에게 특히 강한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몽테뉴가 교육의 순서에 따라 교과를 체계적으로 나열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이는데, 순서를 재구성해보면, 그가 교과의 첫 번째로 꼽는 것은 ‘외국어’이다. 외국어는 어린 나이에 익히는 것이 가장 적합하므로 모국어와 말이 다른 이웃 나라의 말을 배우게 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몽테뉴의 부친은 이탈리아 원정 참여를 계기로 르네상스 운동에 큰 자극을 받았고, 이로 인해 어린 몽테뉴 주변에서 프랑스어 사용을 금지하고 라틴어 교사를 두어 2세 때부터 몽테뉴에게 라틴어를 가르치게 했는데, 자신의 이러한 경험이 ‘외국어’를 첫 번째 교과로 제시하는 것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그런데 몽테뉴는 외국어의 범주에 라틴어를 첫 번째로 생각했지만, 라틴어만으로 외국어를 한정하지는 않고 있다. 아마 1522년 ‘9월 성경’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마르틴 루터의 독일어 번역본 『성경』으로 상징되는 유럽에서의 민족어에 대한 자각과 지적 활용이 몽테뉴에게도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는 ‘역사’인데, 몽테뉴에 따르면 역사적 사실을 단편적으로 가르치고 외우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역사를 비판하는 법을 가르침으로써 정신의 사유를 현실에 적용하는 법을 연습시키는 것이 역사 교육에서 중요하다. 즉 역사적 사실보다 역사를 해석하는 안목의 형성이 중요하다고 본 듯하다.
세 번째 교과는 ‘작문’, 네 번째 교과는 ‘천문학’이다. 다섯 번째에서 여덟 번째 교과는 순서 없이 ‘논리학’⋅‘물리학’⋅‘기하학’⋅‘수사학’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아홉 번째는 ‘철학’인데, 몽테뉴가 철학에 대해 “도덕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서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학문”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포괄적 철학이라기보다는 ‘윤리학’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다만 순서에서 ‘논리학’⋅‘물리학’⋅‘기하학’⋅‘수사학’이 먼저인지 ‘철학’이 먼저인지는 사실 명확하지는 않다. 몽테뉴가 ‘철학’ 교과를 이야기하다가 ‘논리학’⋅‘물리학’⋅‘기하학’⋅‘수사학’을 이야기하고, 다시 ‘철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순서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열 번째 마지막 교과는 ‘신체 훈련’을 위한 것이다. 이는 유희와 운동을 겸하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달리기⋅권투⋅음악⋅무용⋅사냥⋅승마⋅무기 다루기’ 등이 내용으로 제시된다. 이는 플라톤의 ‘체육’과 내용에서 거의 같고, 플라톤이 별도의 교과로 제시한 ‘음악’을 신체나 몸가짐과 관련된 교과에 포함시킨 것은 차이점이다.
이러한 몽테뉴의 교과 구성은 몇 가지 특징을 보인다. 첫째, ‘외국어’, ‘역사’, ‘물리학’ 교과는 고대와 중세 교육의 기본틀이었던 자유교양(Liberal arts) 7교과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것인데, 몽테뉴가 새롭게 포함시켰다. 중세부터 라틴어 교육이 이미 가장 중요한 교과의 하나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던 점을 고려하면 ‘외국어’ 교과의 경우 중세 유럽의 보편어인 라틴어를 기본으로 하고 당시 새롭게 시작된 민족어에 대한 자각이 결합된 교과라고 할 수 있다. ‘역사’ 교육에 대한 강조는 지식의 현실적 효과와 자신만의 관점을 중시하는 몽테뉴의 시각이 반영된 완전히 새로운 교과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플루타르크의 『영웅전』이 몽테뉴의 사상 형성에 강하게 영향을 미친 점도 ‘역사’를 독립된 교과로 제시한 원인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물리학’의 경우, ‘Physics’로 영어 번역(Montaigne, 1991: 179)되는데, 사실 교과에 대한 몽테뉴의 설명이 거의 없어서 ‘천문학’과 구분되는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로크의 경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교육해야 한다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어서 근대 천문학의 발전이 교육 내용에 포함(Locke, 2020: 297)되고 있는데, 몽테뉴의 경우 자신이 10살 무렵에 사망한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이나 당시 물리학과 천문학의 변화에 대해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둘째, 몽테뉴는 지식을 매개로 한 정신의 훈련법으로 가장 적합한 것은 ‘논쟁/논변’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덜 읽더라도 듣고 말하는 토론이 사고력의 증진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서적에 의한 공부는 느슨하고 집중하기 어려우며 열정을 불러오기 어렵지만, 토론은 단번에 가르쳐주고 강하게 훈련시키기 때문이다. 명예에 대한 추구와 경쟁심은 발전의 원동력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교육법에 대한 근거를 몽테뉴는 로마인들의 교육법에서 찾고 있지만(Montaigne, 2021: 1021), 이는 그의 자연적 본성에 대한 긍정과 열정에 대한 강조라는 사유와도 일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셋째, 몽테뉴는 신체와 관련된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경주⋅권투⋅음악⋅무용⋅사냥⋅승마와 무기 다루기 등 유희와 운동까지도 … 공부의 많은 부분을 차지할 것입니다. … 신체의 훈련까지도 마음과 함께 다루어져야 합니다. 길들이는 것은 마음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입니다. 두 가지로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플라톤이 말하듯이 하나하나 따로 길들일 것이 아니라, 한 멍에에 매인 한 쌍의 말과 같이 동일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 신체 단련에 더 많은 시간과 더 많은 정성을 들이며, 그것으로 정신도 동시에 단련되게 되는 것이고, 그 반대가 아닌 것 같이 보이지 않습니까? (Montaigne, 2021: 184)
신체 활동 관련 교육에서 몽테뉴는 플라톤의 관점을 근거로 삼기도 하고 비판하기도 하는데,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격정’이라는 영혼의 한 부분을 위해서 신체 활동이 필요한 것이라기보다는 신체 활동을 위한 교육의 독립적 가치를 인정한다. 또 플라톤에게서 ‘체육’은 ‘예비교육’이었고 ‘전쟁기술’로서의 성격이 분명하였다면, 몽테뉴의 신체적 훈련과 관련된 교과에서는 ‘전쟁기술’로서의 의미는 거의 사라지고 좋은 사람이 되어 좋은 삶을 살기 위한 자기 계발이 강조되고, 작문⋅논리학⋅수사학 등의 교과와 대등한 교과의 하나로 나열된다.
신체 훈련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한 몽테뉴의 교육이론에서는 ‘소양교육’의 의미가 플라톤에 비해서 더 풍부하고, 더 강조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몽테뉴는 신체 혹은 몸의 가치에 대해 긍정하는데, 이러한 인간 이해의 변화가 신체와 관련된 체험 교육의 의미를 풍부하게 하고 중요하게 만든다.
감각들은 외부의 사실로밖에 사물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의 제1차적인 심판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회에 봉사하는 모든 일들 중에는 피상적인 외양과 격식, 절차의 끊임없고 보편적인 혼합이 있다고 해도 결코 놀라운 일은 아니며, 정치에서 가장 효과적인 부분은 이런 일로 구성된다. 우리에게 문제 되는 상대는 언제나 인간들이다. 그의 조건은 놀랍게도 육체적인 점에 있다. (Montaigne, 2021: 1031)
그러므로 교육에서 신체 활동을 위한 교과가 강조되고 있으며, 이는 그의 교육이론에서 세 가지 특징으로 나타난다. 첫째, 습관에 대한 강조이다. 몽테뉴에 의하면, ‘몸의 단련을 통해 욕망과 의지를 제어할 수 있고 행위는 습관을 따르므로’(Montaigne, 2021: 186) 결국 ‘우리 인생의 행복과 불행은 우리 자신에게 달린 일인데, 그것은 결국 습관에 따른다’.(Montaigne, 2021: 324) 습관은 교육, 특히 교과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양육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의견도 가능하지만, 몽테뉴의 습관에 대한 강조는 신체적 활동과 경험을 통해 올바름의 추구라는 측면에서 교육의 암묵지(暗默知, tacit knowledge)적 성격에 주목한 것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지식과 지성 중심이 아니라 지식과 경험, 지성과 감정의 균형과 조화를 강조하는 것이 몽테뉴의 생각인 듯하다.
둘째, 견고성(堅固性, solidity)에 대한 강조이다. ‘견고성’이라는 개념 자체를 몽테뉴가 제시한 것은 아니다. 영역본에 따르면, 몽테뉴의 견고성은 ‘firm minds and souls’, ‘fortitude of soul’, ‘steadfastness’ 등으로 표현되는데, ‘견디는 힘’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몽테뉴의 ‘견디는 힘’ 혹은 ‘견고성’은 “마음의 동요는 이성의 힘으로 극복해야 하고, 일을 당해서 버티는 힘은 도덕의 힘”(Montaigne, 2021: 1253)이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는 ‘고통이나 불행을 참고 견디는 내적인 힘’이다.
이러한 견고성이 필요한 이유는 “인생은 고르지 못하고 불규칙하고 여러 가지 형태로 움직이기”(Montaigne, 2021: 900) 때문이기도 하고, “인생의 공통 구성 요소인 선과 악을 함께 다룰 줄 알아야 하기”(Montaigne, 2021: 1217) 때문이기도 하다. 인생에 성취와 즐거움이 있다면, 반드시 실패와 고통도 있게 마련인데, ‘견고성’은 실패와 고통을 잘 견디어냄으로써 삶을 유지하게 하는 힘이다. 몽테뉴가 45세부터 죽을 때까지 고통받았던 담석증의 경험도 아마 이러한 ‘견고성’이라는 생각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견고성’은 마음이나 정신과 같은 인간 내면의 힘이지만, 이것을 기르는 훈련은 육체적 훈련과 관련된다. 몽테뉴는 고통이나 죽음 앞에서 어떤 철학자도 철학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운동선수나 나귀를 모는 천한 노동자들이 그들보다 고통이나 죽음을 덜 느끼고 견고한 태도를 보여준다(Montaigne, 2021: 1217)고 말하는데, 이는 이러한 견고함이 지식이나 이성에 의해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 훈련과 경험을 통해서 길러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향유 능력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향유 능력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위해서 몽테뉴는 주로 소크라테스를 활용한다.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에게 건강을 대단히 중요한 연구 과제로 하라고 충고하며, 이해성 있는 사람은 자기 몸을 단련하고 음식을 가리는 데 조심하며 …. (Montaigne, 2021: 1203)
이러한 ‘건강의 목적은 쾌락’(Montaigne, 2021: 1233)이다. 쾌락은 현자가 맛볼 가치가 없는 짐승들의 소질이라는 생각은 결코 올바르지 않다.
이것은 … 우리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육체적 쾌락을 마땅히 받아야 할 것으로 평가한다. 다만 그는 정신의 쾌락이 더 힘차고 견실하며 편안하고 다양하며 위엄이 있다고 말하며 … 그에 의하면 정신적 쾌락은 결코 홀로 독점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우선한다. 그에게 절제는 탐락에 적대하는 것이 아니고 조절해 주는 것이다. (Montaigne, 2021: 1245)
몽테뉴에 의하면,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즐거움을 위해 노령에 댄스와 악기 연주를 배웠고, 이 시간을 유용한 것으로 생각했다.(Montaigne, 2021: 1240) 쾌락을 통해 삶을 향유하는 것은 현자 소크라테스의 삶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이러한 해석을 통해 그는 ‘육체가 정신에 손해가 되도록 자기 욕망을 추구해서는 안 되지만, 정신이 육체에 손해가 되도록 자기 욕망을 추구하는 것도 안 된다’(Montaigne, 2021: 990)는 결론에 도달한다. 몽테뉴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신체를 가꾸는 일을 경멸하고 반대하지만, 이는 비인간적인 예지일 뿐이므로 증오스러운 일이다. 쾌락을 너무 탐하는 것도 문제지만, 쾌락 자체를 나쁜 것으로 보는 것도 문제이다. 그릇이 불결하면 무엇을 담아도 쉬어버리는 것처럼 올바른 정신적 능력은 신체적 능력을 필요로 한다’.(Montaigne, 2021: 1237)
몽테뉴가 “자기의 존재를 충실하게 누릴 줄 아는 것은 절대적인 완벽이며, 신성함과 같은 일”(Montaigne, 2021: 1248)이라고 하여 삶을 즐길 줄 아는 ‘향유 능력’을 주장한 것은 앞에서 말한 고통을 견딤으로써 우리 삶을 지탱하는 ‘견고성’과 짝을 이룬다. 몽테뉴 말처럼 우리 삶은 태어남과 죽음, 성취와 실패, 즐거움과 고통이 공존하기 때문에 ‘향유 능력’과 ‘견고성’은 교육을 통해 학생들에게 반드시 길러주어야 할 요소이다. “인생을 자연스럽게 잘사는 길을 배우는 것보다 더 힘든 학문은 없다. 그리고 질병 중에서도 가장 야만적인 병폐는 우리의 존재를 경멸하는 일이다.”(Montaigne, 2021: 1241) 몽테뉴의 교육이론에서 ‘습관’, ‘견고성’, ‘향유 능력’은 지식과 이성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체험과 암묵지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소양교육의 역할에 대한 의미 있는 제안으로 볼 수 있겠다. 지식이 교육의 본질적 요소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지식 그 자체만으로는 도구적⋅기능적 역할 이상의 것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인생을 잘사는 길’은 분명 지식 이상의 경험과 성찰이 필요하다.
4. 로크의 소양교육
로크 『교육론』의 초점은 ‘신사(gentleman)’인데, 그 이유는 신사들이 바르게 되면 나머지 사람들도 그 영향을 받아 자신의 위치에서 바로 서게 되기 때문(Locke, 2020: 15)이다. 신사가 되기 위한 교육은 현대적 의미에서의 교양교육에 가까운데, 이는 “신사가 될 젊은이는 여러 학문 분야에 대한 약간의 개관과 간략한 학설 체계를 맛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Locke, 2020: 148)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로크 『교육론』의 유명한 문구인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A Sound Mind in a Sound Body)”은 “행복한 상태를 짧지만 완벽하게 묘사”(Locke, 2020: 23)하기 위한 로크의 표현인데, 아마도 교육을 통해 신사가 도달해야 하는 상태를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라는 말은 몽테뉴의 영혼과 육체의 균형적 관점을 떠올리게 하지만, 사실 플라톤적 사유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성이라는 것은 우리가 가진 가장 중요한 그리고 최고의 정신적 능력으로서 …… 이성을 올바로 향상시키고 올바로 사용하는 것은 인간이 일생 동안 도달할 수 있는 최고로 완성된 경지인 것이다. (Locke, 2020: 204)
그렇다면 로크가 “건강한 신체”를 강조한 것은 무슨 의미인가? 로크는 “정신이 올바른 방향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 교육이 추구해야 하는 유일한 목표”(Locke, 2020: 120)라고 하면서도, “그렇다고 정신을 담는 집, 즉 신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Locke, 2020: 24)고 말한다. “정신이 없으면 올바른 길로 들어설 수 없고, 올바른 길에 들어섰다고 하더라도 신체적으로 결함이 많고 연약하면 발전해 나갈 수 없”(Locke, 2020: 23)기 때문이다. 결국 정신은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역할이고, 신체는 그러한 올바름을 견지하는 역할이다.
신체가 올바름을 견지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곤란한 상황이나 고통 등을 견뎌내는 힘을 길러야 한다.(Locke, 2020: 23) 이러한 로크의 생각은 몽테뉴가 말한 ‘견고성’과 유사한 듯하다. 둘째, 이성이 인정하지 않는 욕망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하는데, 이 힘은 습관에 의해 만들어진다.(Locke, 2020: 65) 습관에 대한 중시도 몽테뉴가 신체 훈련을 중시하면서 제시한 아이디어와 상당한 연관성이 있는 듯하다.
2) 이렇게 신체에 대한 훈련을 통해 얻게 되는 ‘견디는 힘’이나 ‘습관’이라는 생각은 몽테뉴와 로크가 상당히 흡사한 듯하지만, 차이점은 로크에게 신체 훈련, 견고성, 습관 등은 모두 이성의 명령을 효율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점이다. 몽테뉴가 정신과 신체의 균형적 역할에 초점을 두고 있다면, 로크는 정신이 신체를 지배하거나 혹은 정신이 최대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한 올바르고 효율적인 방법으로서 신체의 건강함이나 견고성, 습관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로크의 “교육의 목표는 덕(德)”이라고 표현한다. ‘덕은 신사의 최우선 자질’(Locke, 2020: 223)이기도 한데, 로크가 말한 ‘덕의 함양’을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이성의 명령에 따르는 상태의 습관화’로 볼 수 있을 듯하다.
차이는, 욕망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있지 않고, 자기 내부에 있는 욕망을 지배하고 그것을 부정할 수 있는 힘이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 어려서부터 자신의 뜻을 다른 사람들의 이성에 따르도록 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이성을 활용해야 할 나이가 되어서도 좀처럼 자기 자신의 이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그것에 따르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 장차 어떤 종류의 인간이 될지는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Locke, 2020: 60)
덕성은 욕구/욕망의 부정이 아니라 그것이 이성적 판단에 따르도록 하는 습관의 형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습관은 이성보다 더 지속적이고 용이하게 작용하고, 이성보다 쉽게 행동으로 나타난다’(Locke, 2020: 176)는 점에서 습관은 강력하다. 하지만 이성의 계발 없는 습관은 방향 없는 맹목적 질주를 하도록 하거나, 자신의 생각으로 검토되지 않은 습관의 실행으로 인해 사회적 명령이나 관습에 따르는 타율적 존재의 양성이라는 결과를 부를 수 있다. 그래서 로크는 교육을 통한 이성의 계발에서 관건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고민한다.
자주 반성(reflection)하는 습관은 아이들의 마음이 지향 없이 떠도는 것을 방지하고, 그들의 생이 무심코 쓸데없이 이리저리 헤매는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아 주는 효과가 있다. …… 이렇게 하면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내부로 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인데, 이야말로 부모로서 바랄 수 있는 최상의 지적 습관이다. (Locke, 2020: 292)
지혜 혹은 지성의 향상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스스로의 지식과 습관을 ‘반성적으로 성찰하기’라는 태도의 형성이다. 로크가 말하는 ‘반성’은 현대적 의미에서의 ‘비판적 사고’에 해당되는 듯하다. 결국 로크에게 교육의 목표는 ‘덕성의 함양’인데, 덕성의 함양은 ‘반성적 성찰/비판적 사고’를 통해 이성을 계발하고, 이성을 스스로 따르도록 하기 위해서 신체적 훈련을 통해 ‘올바른 습관을 형성’하는 것이다.
덕의 함양을 목표로 하는 로크는 당시 ‘그래머 스쿨(grammer school)’의 교육방식에 대해 비판한다. 로크는 ‘학습(learning)’이 교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엽말단(the least part)’에 불과하다(Locke, 2020: 247)고 주장한다.
읽기, 쓰기, 그리고 학식을 쌓기 위한 학습이 필요하다는 점은 나도 인정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교육의 주된 목표가 될 수는 없다. …… 학식은 훌륭한 성품의 소유자로 하여금 덕이 있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데 큰 도움을 준다고 생각되지만,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다만 그들을 더욱 어리석고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데 도움을 줄 뿐이다. (Locke, 2020: 248)
덕성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지식은 무의미하거나 심지어 해롭기까지 하기 때문에 교육은 덕성을 반드시 길러주어야 한다. 교과를 통한 가르침(teaching)에서는 더 많은 지식의 습득이 목적이 되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기본적인 교육 이후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은 전적으로 학생의 학습 동기와 인내심에 달린 일이다. 왜냐하면 “어떤 학문분야에서도 선생에 의한 훈련과 강제만으로 지식을 높이 쌓거나 탁월해진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Locke, 2020: 148). 따라서 구체적인 교과 교육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 스스로 지식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를 형성하도록 하고, 그가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는 내적인 힘을 길러주는 것이다. 사물의 본질을 알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습관’과 습득한 지식과 자신의 생각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그 핵심이 될 것이다. 이것은 교과 교육을 통해 얻어야 하는 목적에 해당되는 듯한데, 이를 연습하기 위해 로크가 생각한 실제 교과는 무엇인가?
『교육론』 ‘20장 학습에 대하여’, ‘21장 기타 단정한 몸가짐에 대하여’, ‘22장 손을 쓰는 일’, 3개 장(chapter)에는 교육 내용으로서의 구체적인 교과가 제시된다.
3) 20장은 주로 지식 중심 교과를, 21장과 22장은 체험 중심 교과를 나열하고 있다.
20장(147~195항목)에서 로크가 나열한 교과를 순서에 따라 재구성하면, ‘읽기’, ‘쓰기’, ‘성경’, ‘그림그리기’, ‘외국어(불어)’, ‘라틴어’, ‘지리학’, ‘산술’, ‘천문학’, ‘기하학’, ‘연대학’, ‘역사학’, ‘윤리학’, ‘법학’, ‘수사학’, ‘논리학’, ‘자연철학’으로 대략 17개 내외임을 알 수 있다. 몽테뉴도 중세의 자유교양 7교과에 외국어와 역사를 추가했는데, 로크는 성경, 외국어, 지리학, 연대학, 법학 등의 과목이 상당수 추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플라톤의 경우 위계적이고 연속적인 두 단계, 즉 예비교육과 영혼의 전환을 위한 교육 5~7개 교과 내에 지식 중심 교과와 체험 중심 교과의 모든 교육내용을 포괄하고 있다면, 몽테뉴와 로크는 지식 중심 교과와 체험 중심 교과를 모두 중시하지만 양자를 구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몽테뉴와 로크의 이러한 구분이 지식 중심 교과는 자유교양이고 체험 중심의 교과는 자유교양이 아닌 직업교육이거나 직업교육과 유사한 어떤 것이라고 구분하여 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몽테뉴도 로크도 체험 중심 교과목을 특정 직군의 사람들에게 귀속시키기보다는 건강한 삶을 위한 일반적인 필요성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크가 21장과 22장에서 말하는 소양교육 성격의 교과를 직업교육의 일환으로 보기는 어려운 듯하다.
21장(196~200항목)에서는 “공부나 책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 이외에 운동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을 위한 교과를 제시하고 있다. 모두 4개 교과를 제시하는데, ‘춤’, ‘음악’, ‘승마’, ‘펜싱’이 그것이다. ‘춤’과 ‘음악’은 교과로서 구분하여 제시하기는 했지만, 로크는 통합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 4개의 교과는 앞의 20장에서 기술된 것들과 마찬가지로 신사가 되려는 학생이, 일부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거의 필수적으로 배워야 하는 것들로 보인다.
22장(201~211항목)에서는 손을 쓰는 일, 즉 수공(手工: trade)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로크는 손을 쓰는 일로 ‘그림 그리기’, ‘농업’, ‘목공’, ‘조각⋅세공⋅연마술’ 등 4개 정도를 거론하는데, ‘조각⋅세공⋅연마술’은 더 세분화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다만 22장에서 제시한 수공 관련 교과에 대해서 로크는 1가지 정도를 선택해서 배울 것을 권장하고 있다. 로크가 가장 권장하는 교과는 ‘농업/원예’이다.
한편 로크는 23장에서 ‘해외 여행’이라는 항목을 별도로 편성하고 있는데, 그는 ‘해외 여행’에 대해 “교육의 마지막이자 신사의 완성”이라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리고 교과 나열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로크는 ‘수영’을 꼭 가르쳐야 한다(Locke, 2020: 32)고 주장한다. 근거는 로마시대에 수영이 글쓰기와 거의 동격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수영’과 ‘해외 여행’도 교육의 일부로 볼 수 있을 듯하다.
로크의 교과 구성을 살펴보면 대략 4가지 정도의 특징이 나타난다. 첫째, 플라톤 이후 자유교양 7교과 등의 교육과정에 포함되던 ‘수사학’, ‘논리학’ 교과가 로크의 17개의 지식 중심 교과에 포함되기는 하였지만, 로크는 이 두 개 교과는 최소화하거나 혹은 배제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논리학과 수사학이 진리로 사람들을 인도하기보다는 소모적인 논쟁을 초래하기 때문이고, 또한 논리학과 수사학에서 배우는 규칙을 통해 논리적으로 말하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로크는, 규칙 자체가 아니라, 규칙과 양식을 잘 지킨 모범을 따라 연습하고 응용하는 것이 더 좋은 방식’(Locke, 2020: 309)이라고 주장한다. 중세 자유교양 7교과에 대한 로크의 이러한 평가는 자유교양 교과가 로크에 의해 수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로크는 ‘라틴어’를 교과에 포함했고 그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라틴어보다는 모국어에 대한 읽기⋅쓰기 교육을 더 강조한다. 로크는 신사로서 가장 큰 자격 미달은 말이나 글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의사소통능력을 강조하는데, 특히 창의성 함양을 위해서는 모국어 소통능력이 라틴어 능력보다 중요하다(Locke, 2020: 285)고 강조한다. 로크 시대에 유럽 지식인들의 민족어에 대한 자각이 교육과정에도 반영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셋째, 플라톤이나 몽테뉴는 교과나 교육내용으로 거의 언급하지 않은 2개 교과를 로크는 제시하는데, 그것은 ‘그림그리기’와 ‘자연철학’이다. ‘그림그리기’의 경우, 교과로서 두 번 제시되는데, 20장에서 ‘학습’을 위한 교과로, 그리고 22장에서 ‘수공’의 교과로 등장한다. 20장에서는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다양한 사물이나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배우는 것(Locke, 2020: 261)이라고 하기 때문에 ‘그림그리기’는 의사소통능력의 일부로서 강조된다고 볼 수 있다. 22장에서는 즐거움을 위해 회화가 거론된다. 다만 22장에서는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해서는 과도한 시간 투자가 필요하고, 휴식이라고 하기에는 정신을 너무 많이 사용한다고 한계를 지적한다. 로크는 휴식이나 전환을 위해서는 육체 활동이 적합하기 때문에 회화를 권장하지 않는다. 또한 자연철학의 경우, 신학적 관점을 논하기도 하지만, 뉴턴(Isaac Newton, 1643~1727)이나 보일(Robert Boyle, 1627~1691) 같은 당시 최신의 과학적 성과에 대해 신사가 세계를 이해하고 실용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교과로 제시한 것(Locke, 2020: 316-324)은 근대적 과학의 발달을 교육과정에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넷째, 로크는 신체 훈련과 예의범절을 강조하고, 수공(手工) 관련 내용을 상당히 자세하게 다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요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신체적, 정서적 체험 교과에 대해 그는 플라톤이나 몽테뉴가 체육과 음악에 대해 부여한 의미와는 상당히 다른 독특한 관점을 보여준다. 로크가 신체적, 정서적 체험 형태의 소양교육에 대해서 보여주는 특징적인 관점으로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 무엇보다 먼저 지식과 거의 대등한 정도로 혹은 지식보다 더 신체적, 정서적 체험 교육이 중시된다는 점이다. 로크는 특히 예의범절(well-bred)을 강조한다.
물론 여타 지식을 소홀히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러나 절대로 예의범절보다 이런 것들을 우선시하여, 이런 것들 때문에 예절교육이 밀려나도록 해서는 안 된다. (Locke, 2020: 141)
로크는 예의범절 교육을 위해서 ‘춤(dance)’을 권장하는데, 이는 필요한 수준으로 적절하게 자신의 신체와 표정을 통제할 수 있는 훈련을 위한 것이다. 로크에게 신체적 훈련은 상당히 강조되는데, 이러한 강조의 목적은 “이성이 인정하지 않는 욕망을 본인 스스로 극기하는 힘”(Locke, 2020: 65)과 ‘위험이나 위협에 동요하지 않은 강인함’(Locke, 2020: 186)을 기르는 것이다. 로크에게 예의범절이란 쉽게 동요하거나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습관이라는 의미에 가까운 듯하다. 이러한 로크의 ‘예의범절’로 상징되는 신체적 훈련은 몽테뉴의 ‘견고성’ 개념을 연상하게 한다. 흥미로운 점은 몽테뉴는 신체적, 정서적 체험 교육이 ‘견고성’과 함께 ‘향유능력’을 배양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로크는 쾌감 혹은 즐거움을 자각하고 추구할 수 있는 ‘향유능력’을 상당히 비판적으로 생각한다.
자연적 욕구는 충족시켜 주는 한편, 그 기호나 애호에서 비롯된 욕구는 절대로 만족시켜 주면 안 된다. 그것을 말로 요구하도록 허용해서도 안 된다. (Locke, 2020: 166)
이는 자신의 욕망을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의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보이고, 그래서 로크는 욕망을 억제하는 훈련을 위해 가지고 싶은 것을 쉽게 주는 것에 반대하고, 그러한 방식에 학생들이 익숙해지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로크에게 쾌락을 추구하는 ‘향유능력’이 들어설 여지는 거의 없는 듯하다.
다음으로 로크는 수공과 관련하여 한 가지 정도는 반드시 배울 것을 권장하는데, 수공을 배워야 하는 이유는 ‘기분전환 혹은 휴식’이라고 한다. 로크는 ‘휴식’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고 있던 일을 바꿈으로써 지친 신체나 정신에 전환을 주는 것(Locke, 2020: 342)이라고 설명한다. 사람이 항상 학습과 독서, 교제만을 할 수는 없기 때문에 반드시 신체 활동을 통한 전환과 휴식이 필요하다. 이러한 전환과 휴식이 있어야만 이후 유익한 활동을 할 수 있다. 만약 전환과 휴식을 위한 적절한 활동을 배우지 않는다면, 흔히 하는 것처럼 카드, 주사위, 음주와 같은 좋지 못한 활동을 기분전환이나 심심풀이라는 명분으로 하게 된다. 로크는 ‘무료함과 불안감을 견딜 수 있도록 반드시 기분전환에 적합한 수공을 배워야만 어리석고 해로운 방법으로 휴식하지 않을 것’(Locke, 2020: 344)이라고 주장한다.
로크에게 신체적, 정서적 체험 교육은 이성의 판단을 따르는 견고한 힘을 기르는 과정이자 자신에게 적합한 건전한 ‘휴식과 전환’의 방법을 익힘으로써 좋은 삶을 만들어 가게 하는 교육인 것으로 보인다. 로크는 소양교육의 내용을 통해 육체와 정신, 고통과 즐거움, 삶과 죽음을 균형 있게 보는 관점을 함양하고, 학생 스스로 자기 삶의 이끌고 관리하는 능동적 주체로서의 능력을 기를 수 있는 교육을 추구했다고 하겠다.
5. 결론
지금까지 플라톤, 몽테뉴, 로크의 교육이론에서 정서적⋅사회적⋅신체적 체험 중심 교육으로서의 ‘소양교육’이 어떤 특징과 의미를 가지는지 살펴보았다. 플라톤에게서 체육과 음악, 가무와 같은 소양교육은 인간의 영혼 중 ‘격정’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고, 다른 교과와 마찬가지로 소양교육에 해당하는 교과도 영혼의 탁월함과 절제의 실천을 위한 교육의 일부이다. 몽테뉴에게서 소양교육은 세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 습관의 형성을 통해 욕망과 의지에 대한 제어능력을 기른다. 둘째, 신체적 훈련을 통해 견고성을 제고하고 이를 통해 삶의 고통과 어려움을 견디는 힘을 기른다. 셋째, 삶에 대한 다양한 향유능력을 길러 삶의 쾌락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인간으로 성장하게 한다. 로크에게서 소양교육은 첫째, 욕망을 억제하는 신체적 훈련이라는 성격이 강조된다. 둘째, 스스로 자신의 육체와 욕구를 통제할 수 있는 견고한 자기관리 능력을 기른다. 셋째, 올바른 휴식을 통해 학습과 노동, 휴식과 전환을 실행할 수 있는 건강한 삶을 가꿀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한다.
고대의 플라톤, 르네상스 시기 몽테뉴, 근대의 로크의 교육이론에 대한 분석을 통해 체육⋅음악 등 체험 중심의 소양교육이 교육과정에 필수적으로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 세 사상가의 공통적 생각임을 확인할 수 있는데, 세 사상가가 소양교육에 대해 보여주는 특징과 의미를 세 가지 정도 추출할 수 있다.
첫째, 플라톤에게서 시작되어 몽테뉴⋅로크에게서도 공유되는 관점인데, 체육과 음악 등을 통한 소양교육은 ‘욕구를 제어하고 이성 혹은 지성의 결정을 행동으로 실천’하기 위한 것이다. 세 사상가 사이에서 부분적으로 상이함이 있기는 하지만, 소양교육의 이러한 역할과 의미는 공유되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을 구성하는 두 부분으로서 정신과 육체를 함께 균형적으로 교육해야 한다는 의미와 함께 지식이 실천되기 위해서는 육체에 대해서 알고 제어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는 자연적 성장으로 갖추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육이 필요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소양교육에 대한 담론은 ‘우리는 지식을 어떻게 실행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도 담고 있다고 하겠다.
둘째, 세 명의 사상가에게서 소양교육은 ‘지식 중심의 교과와 함께 전체 교육과정의 한 부분’을 구성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다른 교육의 기초나 목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즉 소양교육이 먼저 이루어져야 지식 중심 교과 교육이 가능한 것은 아니며, 또한 지식 중심 교과 교육 이후에 소양교육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소양교육만으로 인성 혹은 덕성을 함양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플라톤, 몽테뉴, 로크 모두 훌륭함이나 덕성, 덕의 함양을 교육의 목표로 보고 있는데, 이 목표는 지식교육과 소양교육이 함께 진행됨으로써 이룰 수 있는 최종적이고 총체적인 목표이지, 지식교육은 이성을 계발하고, 소양교육은 인성 혹은 덕성, 덕을 계발하는 방식으로 나눠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성은 지식교육과 소양교육의 총체적 결과로서의 훌륭함, 덕성, 덕의 개념과 근접한 것이거나 혹은 거의 같은 것으로 보인다.
셋째, 앞의 첫째와 둘째를 고려하면, 소양교육은 지식 중심 교과 교육에 비해 부차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소양교육은 ‘독자적인 역할과 정체성’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소양교육의 ‘독자적인 역할과 정체성’이 소양교육이 교양교육의 범위를 벗어난다거나 직업교육의 성격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소양교육은 기본적으로 플라톤이 말한 직업교육이 아닌 교육의 영역에 해당된다. 이는 소양교육이 교육대상 모두에 해당하는 공통교육이고, 인간과 삶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지주의자인 플라톤의 교육이론을 보면 예비교육에서도, 영혼의 전환을 위한 교육에서도 체육과 음악은 반드시 필요한 교육이었는데, 주로 영혼의 일부인 격정을 이성과 함께 하도록 하는 고유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몽테뉴가 말한 견고성, 향유능력은 우리 삶의 즐거움과 고통을 위한 준비로서 몽테뉴의 소양교육은 ‘인생을 잘사는 길에 대한 학문’으로서 다른 어떤 학문보다 중요하고 배우기 어려운 것이다. 고등교육으로서의 소양교육의 역할과 정체성에 대해 몽테뉴의 발상은 큰 함의를 가진 듯하다. 로크에게서는 소양교육에 해당하는 교과들이 별도의 영역으로 구분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듯하다. 로크는 지식 중심 교과, 신체훈련 중심 교과, 휴식을 위한 교과를 내용적으로 명확하게 구분하여 제시하고 있는데, 로크는 지식보다 예의범절이라는 신체적 숙련이 사회생활에서 중요하다고 보고 있기도 하고, 학습 등의 지적인 활동과 건전한 휴식의 균형과 조화를 삶의 관건이라고 주장한다.
시대를 초월하여 소양교육은 그 필요성이 인정되었다. 그런데 그러한 필요성은 거의 사상가들의 인간에 대한 이해와 그 시대 지식인들이 추구하는 인간상과 긴밀하게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조순(1928~2022)은 “율곡의 교육론은 덕(德)과 지(知)에 대해서는 강조하지만 체육에 관해서는 거의 한 마디도 언급이 없다”고 로크의 교육론과 비교(Locke, 2020: 7)하면서 아쉬워한다. 체육⋅음악⋅미술로 대표되는 체험 중심 교육이 우리 시대에 가지는 가치와 위상은 결국 우리 시대에 필요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고, 그는 어떤 능력과 자질을 갖춘 사람인가라는 질문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 논문은 그러한 질문에 답을 모색하는 과정으로서 플라톤과 몽테뉴, 로크의 교육이론 속에서 소양교육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 살펴보았다. 근대 교육이론과 교육제도의 근간을 형성한 루소, 지덕체(智德體) 전인교육의 이념을 구체화한 페스탈로찌의 교육이론에 대한 분석도 필요하나 포함되지 못하였다. 루소와 페스탈로찌의 교육이론에서 소양교육에 대한 분석은 향후의 과제로 남기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