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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General Edu > Volume 18(1); 2024 > Article
포스트후마니타스 -문명의 전환과 새로운 인간다움

초록

인공지능 기술을 필두로 한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간 삶의 방향은 물론 그 의미 자체를 뒤흔들고 있다. 본 글에서는 포스트휴먼 시대라는 새로운 문명의 전환이 갖는 의미를 좀 더 거시적인 차원에서 조망하여,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을 새로운 시각에서 해석해 보려 한다. 이를 위해 근대의 인간중심주의를 반대하고 새로운 세계관과 인간관을 제시하는 현대의 철학자 라투르, 해러웨이, 바스카, 페란도의 통찰을 살펴본다. 그들은 인간과 비인간의 존재론적 관계의 진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특히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은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도구적 관계에서 확장해 상호 의존적인 행위 주체적 관계로 상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포스트휴먼의 시대에는 새로운 ‘후마니타스(인간다움)’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 근대의 인간중심적 인간다움의 한계를 극복해야 할 것이다. ‘후마니타스’는 교양교육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그 지향점의 의미와 내용, 개념의 변화와 변천의 과정에 대한 논의와 논쟁이 지속되길 희망한다.

Abstract

The advancement of science and technology, led by artificial intelligence, is not only shaping the direction of human life but also shaking its very meaning. In this article, I will explore the meaning of the transition to a new civilization called ‘the post-human era’ from a more macroscopic perspective and attempt to interpret our current reality from a new standpoint. To achieve this, we will examine the insights of contemporary philosophers such as Latour, Haraway, Bhaskar, and Ferrando, who oppose anthropocentrism of the modern era and propose new worldviews and perspectives on humanity. They argue that there is a need for the evolution of the ontological relationship between humans and non-humans. Particularly, the development of artificial intelligence technology demands a shift in the relationship between humans and machines from a tool-based connection to a mutually interdependent, agentive relationship. Therefore, in the era of post-humanism, a new concept of humanity is required, and through this, we must overcome the limitations of the anthropocentric notion of humanity from the modern era. ‘Humanitas’ is also a guiding principle in liberal education. I hope for ongoing discussions and debates regarding the meaning and content of this guiding principle, as well as the evolution and changes in the concept.

1. 문명의 전환과 반인간주의

교양교육연구 제17권 1호에 게재한 “‘인간다움’에 대한 반인간주의적 접근”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나는 생태환경의 파괴로 인류세의 문제가 대두되고 인공지능 기술이 인간 사회의 변곡점을 형성하는 지금이 문명 차원의 고민과 인류 차원의 대안이 논의되어야 할 시기임을 주장했다(서민규, 2023). 인류의 역사는 생명 전체의 역사에 비해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으며, 더구나 인류가 문명이라는 것을 형성하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훨씬 적은 시간의 범위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현생 인류로 알려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는 대략 35만 년 전 진화를 통해 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들이 형성한 문명은 기껏해야 B.C. 4000년경으로 그 기원을 추정하고 있음을 상기하면 인간 문명이 전체 생명의 역사에서 갖는 상대적 비중의 왜소함을 실감하게 된다.
‘문명’이라는 것은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고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생활의 양식을 반영한다. 자연에 압도당하던 인간은 한때 자신보다 우월한 존재자를 상정하고 그 존재자를 중심으로 문명을 일구어가던 시기가 있었다. 그 시기를 우리는 ‘중세(medieval period)’라 명명한다. 그렇게 신(God) 중심의 시대를 거쳐 인간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의 문명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인간을 세계의 중심으로 간주하는 ‘근대(modern period)’라는 문명이 시작된 것이다.
지구를 중심으로 우주가 움직인다는 천동설의 세계관을 허물고 지동설의 과학적 세계관을 열었던 코페르니쿠스, 그리고 진리 탐구의 방향을 인간 외부로부터 인간 내부로 전환하며 자신의 철학을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 칭한 철학자 칸트를 인간 중심의 근대적 세계관을 전개한 대표적인 학자들로 거론할 수 있다. 자연적 진화의 과정에서 뛰어난 뇌의 용량과 성능을 갖춘 인간은 절대자 신에 대한 의존을 약화시키는 대신 자신의 역량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문명의 전환을 선택했다. 과학과 기술이라는 도구로 세상의 모든 진리를 파악해 해석하고, 세상 모든 것의 소유자가 되어 스스로 세상에 대한 권리를 갖는 지배자가 되었다. 근대 이후 세계는 그들에 의해, 그리고 그들을 위한 배경이 되어갔다.
인간중심적 문명은 결국 인간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움직여갔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이념을 내세운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은 산업혁명을 통해 형성된 자본가들의 시장지배 논리와 맥락을 같이한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은 결국 대규모 산업의 성장에 필요한 자본과 기술을 소유한 그들만의 논리가 되었으며, 초기 자본주의 형성으로부터 소외된 국가와 민족들은 국제질서의 재편과정에서 자본주의 발전의 후발주자가 되거나, 그러지 못한 경우 지금도 여전히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 불안정에 시달리고 있다. 이것이 근대 이후 인류가 지속해 온 문명 전개의 현실이다.
물론 문명 근대화의 긍정적 측면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근대화의 결과로 인간은 태생적 신분 중심의 봉건 질서를 무너뜨리고 개인의 자유와 민주적 의사결정을 중시하는 공화주의 체제를 유지하며 여기까지 왔다. 만민의 정치경제적 평등을 이념으로 하는 민주주의 체제가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공산주의 혁명이 시도되었지만 자본주의의 확장력을 압도하지는 못했다. 공산주의와의 이념 대립 속에서 자유로운 시장 중심의 자본주의 체제는 더욱 공고히 구축되었으며,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 지금은 소위 ‘4차 산업혁명’이라는 지능정보사회의 시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애초에 설정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목표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져가는 현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본주의 국가의 빈익빈부익부 현상은 점점 심화되어 간다. 70억에 가까운 인류 전체를 생각한다면 자본주의는 여전히 최대다수가 아닌 절대적 소수의 이익을 대변하는 시스템으로 작동한다.
그렇다고 국내 및 국제 정치질서가 안정화된 것도 아니다. 지난 세기는 ‘인간다움’이 상실되는 야만의 시대이기도 했다(서민규, 2023: 118). 1900년을 들어서면서 시작된 5000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발생시킨 제1차 세계대전, 곧이어 전개된 제2차 세계대전은 사망자만 6000만 명 이상을 기록하며 인간의 야만성이 체계화되고 세계화 되었음을 보여주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 와중에 등장한 나치즘(Nazism)은 동일 인종이라는 미명하에 600만 명을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인간답게’ 학살하는 야만성으로 점철되었다(Arendt, 1963). 21세기라고 다를 바 없다. 지금도 여전히 특정 지역에서는 이런 저런 이유들로 무고한 생명의 죽음과 고통이 지속되고 있지만,1) 이를 막아낼 인간의 의지와 실천적 노력은 미약할 뿐이다. 민족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체제는 지난 2000여 년 동안 해결하지 못한 적대와 혐오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듯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문명의 진보를 추구하는 인간은 그다지 ‘인간다운’ 문명을 유지한 것 같지는 않으며, 그 결과 현재 우리는 지구 생태계의 파괴와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인해 자신의 생존까지도 위협받게 되는 존재론적 위기에 봉착했다.2)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생명체로서 역사적 진보의 길을 선도한다고 생각했던 인간은 과학기술을 제외한 — 과학기술 역시 진정 진보하고 발전한 것인지, 아니면 인간중심적 관점에서만 그러한 것인지 재검토해야 하겠지만 — 다른 영역에서는 그다지 진보한 것 같지 않다. 현재의 지구 생태 환경의 위기상황과 인간 세계의 윤리⋅사회⋅정치⋅경제적 상황을 생각해보라. 문명의 진보와는 거리가 먼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인간은 자신의 생존 문제와 직결된 한계상황을 맞이하기 시작한 듯 보인다.
그 한계상황의 한쪽 측면은 지구 생태계의 파괴로 인한 인류 공멸의 위기감으로 드러나고 있으며, 다른 한쪽 측면은 자신의 지능을 인공화한 기계 — 인공지능 — 가 인간을 보조하는 도구에 머물지 않고 인간보다 우월한 새로운 존재자로 등극하며 겪게 되는 존재론적 위기감에서 비롯된다. 유발 하라리(Yuval Harari)는 여기에 덧붙여 세 번째 한계상황으로 핵전쟁을 꼽고 있다. 그는 현재 인류가 직면한 핵심적 위기로 ‘핵전쟁’, ‘지구온난화’, ‘과학기술에 의한 실존적 위기’를 지목한다(유발 하라리 등, 2019:29-30). 핵전쟁의 위기는 과학기술과 연관된 영역이며, 핵무기와 관련한 국제정치의 문제는 이 글에서 다루기에 역부족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핵의 발견과 핵무기의 발명을 가져왔지만, 핵무기를 사용한 전쟁과 학살은 인간 야만성의 발현이며 인류 공멸의 모순적 상황을 자초한다.
이러한 한계상황은 인간과 세계에 관한 ‘존재’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탐구를 요구한다. 그래서 나는 “‘인간다움’에 대한 반인간주의적 접근”(서민규, 2023)에서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극복할 존재중심의 대안적 세계관으로의 이행이 지금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데 이는 나 혼자만의 주장도 아니며 지금 새롭게 떠오르는 문제도 아니다. 근대 문명이 내포한 인간중심주의의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학자들이 공유하는 관심사이며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문명의 전개과정에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모순을 직시한 철학자들의 오래된 통찰이 담론의 수면 위로 되살아나는 것에 불과하다.

2. 인간과 비인간의 연대를 위한 관계적 주체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를 쓴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는 인류학, 사회학, 실험과학에서의 통찰을 바탕으로 자연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근대적 이분법을 해체한다(Latour, 1991, 라투르, 2010). 그는 자연과 사회를 넘나드는 학제적 융합 연구를 통해 자연과 사회를 움직이는 행위 주체는 언제나 인간과 비인간이 형성하는 네트워크라는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NT: actor-network theory)’을 제시한다. 그가 말하는 비인간에는 생물, 생태, 인공적인 생산물이 모두 포함된다.
행위자-네트워크의 예로 그는 미국 사회에 만연한 총기사건을 든다. 총과 인간은 별개로 존재하지만, 총과 인간이 서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순간 새로운 객체 — 미국의 총기사건을 일으키는 인간과 비인간의 네트워크 — 가 형성된다. 총을 들고 있는 인간은 비인간인 총과, 그것들과 관계하는 기타 행위적 요소들 — 라투르는 이를 행위소(actant)라 부른다 — 과 네트워크를 형성해 전혀 새로운 생성물이 된다. 그리고 이 생성물이 미국 사회에 만연한 총기사건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양산한다. 총기를 사용하는 특정 인간이 아니라 네트워크 전체가 행위 한다. 말하는 주체, 창조하는 주체, 투쟁하는 주체, 노동하는 주체도 언제나 ‘행위자-네트워크’라고 보는 것이 라투르의 입장이다(김홍중, 2022: 19).
이러한 분석을 통해 라투르는 근대인들이 상정했던 행위의 주체들, 의도를 가진 개인이나 정치경제적 사회구조 등은 관념적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동일한 의도를 가진 개인이라고 하더라도 총기 소지가 허용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총기사건을 일으키는 행위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정치경제적 사회구조가 총기사건의 원인이라고 한다면, 그 사회에 속한 특정 개인은 왜 총기사건을 일으키지 않는지는 설명하기 힘들다.
그런데 라투르가 제시하는 ANT 이론은 총기를 사용한 개인이 총기사건의 책임자이기 때문에 그 개인을 처벌해야 한다는 개인주의적 처방이나, 총기산업과 정치집단간의 구조적 권력관계의 해체가 총기사건의 해결책이라고 제시하는 구조주의적 분석이 갖는 한계점을 드러내고, 사태 설명의 새로운 단서를 제공한다. 인간과 비인간의 하이브리드적 네트워크 형성을 사례별로 구체화하여 어떻게 분석하느냐에 따라 문제해결의 진정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데, 근대의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은 자연/사회, 인간/비인간, 개인/구조의 엄격한 이분법적 세계관에 따라 자연은 자연의 문제로만 사회는 사회의 문제로만 인식하고 해결하려 했다. 인간이 개입하지 않는 자연은 없고, 자연이 개입하지 않는 인간과 그들의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역동적이고 일원론적인 ANT의 세계관은 내부/외부, 가까움/멂, 거시/미시, 인간/비인간, 자연/사회, 구조/행위와 같은 이분법을 허용하지 않는다”(라투르 2010; 105). 이러한 이분법적 세계관은 인간을 인간이 아닌 나머지로부터 분리하고 위계상 상위에 두려는 인간중심주의의 의식적/무의식적 발현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비인간의 이분법을 반대하고 모든 존재자의 관계성을 우선시하는 또 한 명의 21세기 철학자로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과학과 기술학 연구에서 출발한 페미니스트 철학자 해러웨이는 “사이보그 선언”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 그리고 자연(생태)의 경계를 해체할 것을 주장한다(Haraway, 1991, 해러웨이, 2002). 사이보그(cyborg)가 기술과 결합한 생명체를 의미한다면 인간은 이미 사이보그이며, 유인원의 한 종류인 인류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장하여 재생산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은 기타 유인원과 차별화되며,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 사이보그와도 차별화된다는 근대의 구분법은 인간의 위계적 우월성을 확보하려는 인간중심 사회의 — 그녀에게 있어서는 ‘인간중심’은 ‘남성중심’의 동의어에 불과하다 — 이데올로기로 작동해왔다는 것이 그녀의 분석이다.
2003년 출간한 『반려종 선언』에서 해러웨이는 사이보그 선언의 문제의식을 심화하고 인류가 직면한 생태적 위기에 대응하는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한다(Haraway, 2003). 그녀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천부적 주권을 가지고 자연을 이용하고 사용해 세상을 지배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인간은 언제나 비인간과 동거해 왔고 함께 진화해 왔다. 그래서 그녀는 인간과 비인간이 서로 ‘반려종(companion)’의 관계에 있다고 본다. 주인과 종, 소유주와 피소유자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생명에 필수적인 존재가 되는 그런 관계를 말한다. 그녀에 따르면 사실 인간의 독자적인 능력만으로는 인간의 삶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 수 없었다. “오히려 인간의 삶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고 반대로 인간의 삶을 통해 구성되기도 한 쌀이나 꿀벌, 튤립과 장내 세균과 같은 모든 유기체적 존재자들은 [인간과 함께] 서로 반려종의 관계를 형성한다”(김애령, 2020:19).
내가 나의 몸이라고 부르는 평범한 공간에 거주하는 모든 세포의 10% 정도에서만 인간 게놈이 발견된다는 사실, 세포의 다른 90%는 박테리아, 균류, 원생생물들의 게놈, 그리고 내 존재를 전적으로 살아있게 하는데 필요한 교향악 안에서 연주하는 것들과 아무런 유해 없이 나의, 우리의 나머지 부분에 올라타 휴식을 취하는 것들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나는 사랑한다… 하나임(being one)은 언제나 다수와 함께 되는 것이다(Haraway, 2016: 3-4. 김애령, 2020:28 재인용).
인간과 비인간은 항상 “공구성적 관계를 형성하며, 이러한 공구성적 관계를 이루는 어느 쪽도 [그] 관계보다 먼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과 비인간은] 교향악을 연주해내듯 절대 홀로 있지 않은 채 다른 세계들과 늘 얽힌 채로 함께 만드는 공동제작(sympoiesis)에 참여한다”(Haraway, 2016:267).
이러한 그녀의 반인간주의 철학은 ‘인류세(anthropocene)’ 담론에 대한 비판적 분석으로 이어진다. 인류세란 인류가 지구환경에 근본적 영향을 미쳐 지질학적으로 변화하게 하는 특정한 시기를 일컫는다. 인류세 개념은 노벨상 수상자인 대기화학자 폴 크루첸(Paul Crutzen)에 의해 사용되기 시작했다. 인류세의 정확한 시점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간의 논의가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이산화탄소 배출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1900년대 중반을 인류세의 출발점으로 보는데 관련 학자들은 대체로 동의한다.
인류세 개념의 등장은 인간으로 인한 지구 생태계의 위기를 상징한다. 지구의 온난화와 그로 인한 기후 위기는 이미 인간의 삶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 해마다 기록을 갱신하는 기온상승과 지구 전체적으로 녹아내리는 빙하, 사막지역에 발생하는 폭우와 열대우림지역의 가뭄 등 현재 우리가 겪는 이상 기후는 인류세 개념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하며, 그 배후에서 작동했던 근대의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해러웨이는 ‘인류세’라는 개념이 지금 인류가 — 그리고 모든 생명체가 — 처한 문제의 핵심을 빗겨간다고 주장한다. 이산화탄소의 폭발적 증가, 방사능 물질의 확산, 미세 플라스틱으로 인한 환경오염, 심지어 지표 토양에 침습하는 닭 뼈의 증가 등 인류세를 특징짓는 사건들은 모두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발생하는 대량생산과 유통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그녀는 지구 위기의 책임은 자본주의 체제와 그 체제에서 진행되는 농업의 산업화와 세계화를 문제의 핵심으로 파악하고, ‘인류세’개념을 ‘자본세(capitalocene)’와 ‘대농장세(plantationocene)’로 수정할 것을 요청한다.
그렇다면 해러웨이는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을까?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임무는 인류세를 가능한 짧고 얇게 만드는 것이며,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식을 동원하여 피난처를 다시 세울 수 있는 그 다음의 지질학적 시기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본다. 그녀가 제안하는 ‘툴루세(chthulucene)’가 바로 그러한 시기를 명명하기 위해 고안된 신조어다(Haraway, 2016).
인간과 비인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반려종이 되어 공구성적 관계를 형성한다. 반려종인 나와 타자는 서로의 삶을 공동제작하는 것이지 인간이 나머지 비인간을 지배하고 그들을 길들이는 것이 아니다. 이렇듯 툴루세는 인간과 비인간으로 이루어진 필멸의 구성체가 서로에 대해, 서로와 함께 위태로운 관계, 또는 기이한 친족 관계를 유지하는 시대를 말한다(Haraway, 2016:363. 김애령, 2020:26 재인용). 인간은 공구성의 참여자로서 모든 종들과 공진화하며 세계를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적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말하는 ‘기이한 친족 만들기’다. 해러웨이가 제시하는 툴루세의 대안은 근대의 인간주의를 넘어서는데 필요한 공진화의 가치를 실천할 수 있는 미래에 대한 제안이다.
근대를 극복하는데 필요한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는 이론가로 로이 바스카(Roy Bhaskar)를 마지막으로 살펴보자. 앞에서 살펴본 두 철학자와 마찬가지로 바스카는 서양의 근대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그에 따르면 서양의 근대 철학자들은 인간 이성의 힘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존재(being)의 문제를 과학적 지식(scientific knowledge)의 문제로 환원해 버리는 ‘인식적 오류(epistemic fallacy)’ (Bhaskar, 1978:36)를 범하고 만다. 즉 존재가 인식의 문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인식이 존재를 가능하게 한다는 그릇된 세계관을 말한다. 그리고 바스카는 서양의 근대에서 인식적 오류가 발생하게 된 근원을 그 때의 철학자들에게 팽배해 있던 존재와 인식의 문제에 대한 이원론적 세계관에서 비롯되었으며, 이원론적 세계관은 서양의 근대에 깊게 뿌리 박힌 인간주의의 발현으로 본다(Bhaskar, 2016:26).
그렇다면 바스카가 제시하는 대안적 세계관은 무엇이어야 하며, 그의 세계관은 근대의 이원론을 어떤 방식으로 극복하고 있을까? 바스카는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현실 세계가 이원성(duality)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을 전제한다. 그러나 바스카는 이원성의 현실 세계를 ‘이원론(dualism)’과 ‘비이원성(non-duality)’이 서로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한 투쟁의 장소로 묘사한다. 현실 세계에서 우리는 타자와 별개의 존재로 독립해 존재한다. 때로는 타자와 대립하고 투쟁한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의 우리 삶은 타자와의 이원론적 관계를 형성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타자와의 공감과 연대 또한 일상적으로 발생한다. 바스카는 이러한 공감과 연대의 존재 확장을 ‘비이원성’의 확장으로 개념화하고, 비이원성이 존재의 근원적이고 심층적인 영역을 이루고 있음을 역설한다.
바스카는 존재의 근원적 비이원성을 확장하는 실천을 ‘자기실현(self-realization)’으로 개념화한다. 바스카는 비판적 실재론에서 그의 후기 이론인 메타실재의 철학으로의 이행을 ‘존재를 고찰함(thinking being)’으로부터 ‘존재를 존재함, 또는 존재를 체험함(being being)’으로의 이행이라고 보고, ‘존재를 존재함’이란 ‘우리 존재가 되는 것, 즉 스스로를 실현해 가는 것(becoming out being, the becoming or realization of ourselves, self-realization)’이라고 부연해 설명한다.(Bhaskar 2002a:xx) 여기서 의미하는 존재는 개체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우리 존재, 즉 비이원성의 근원적 존재를 의미한다. 비이원성의 근원적 존재는 고찰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 실천의 대상이므로 ‘존재를 존재함(being being)’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행은 ‘존재 고찰’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을 내재적으로 체화하는 셈이다.
바스카는 존재를 경험적(empirical) 영역, 현상적(actual) 영역, 실재적(real) 영역으로 구분하는 다층적 심층 존재론을 이론화 하고, 인간의 존재 역시 경험적 차원의 이원론적 주체 - ego -, 현상적 차원의 현실 주체 - embodied personality -, 그리고 실재적 차원의 비이원적 주체 - real self - 로 다층적으로 분석하여 인간의 인간다움을 존재의 심층성에 대비해 제시하고 있다(Seo, 2014).
바스카는 내가 아닌 타인, 나아가 인간이 아닌 비인간 존재자를 타자로 구분 짓고, 타인과 타자를 도구적 존재로 합리화하는 주체를 경험적(인식적) 차원에만 머무르는 이원론적 주체 - ego - 로 규정한다. 그러나 인간의 존재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인간은 타자와 이원론적 관계형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비이원적 경계 허물기를 끊임없이 시도하며, 타자와의 비이원적 존재 체험을 실천한다. 내가 아닌 타자를 도구적 존재자가 아닌 같이 살아가야 할 존재 실천의 동반자로 마주할 때 우리는 인간다움의 진정한 본질에 다가간다. 인간다움은 사해동포주의(cosmopolitanism)나 박애주의(philanthropism)가 아니다. 내 존재자만을 챙기는 이원론적 가치에 기반하고 있지 않다. 진정한 인간다움은 보편적 가치여야 하며, 그것은 비이원성(non-duality)을 본질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원성의 세계에 살아가는 현실 주체는 비이원성의 본질을 확장해가야 한다. 즉, 하이데거식으로 말하자면 존재자의 고립된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존재 실천의 영역으로 넘어가야 한다. 바스카는 이를 ‘존재를 고찰함(thinking being)’에서 ‘존재를 존재함 또는 존재를 실현함(being being)’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서민규, 2020:176). 타자의 영역이었던 주변세계를 나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인간주의적 인간다움을 극복하고 다음 단계로 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3. 근대를 넘어서는 새로운 인간다움 - 포스트휴머니즘

반인간주의 문명 전환의 움직임은 인간을 새로운 존재자로 개념화한다. 그리고 그러한 재개념화의 핵심에 포스트휴먼 담론이 내재해 있다. 우리는 이미 휴먼이 아닌 포스트휴먼이다.3) 왜냐하면 생물학적 자연지능(natural intelligence)을 가진 기존 인간과 더불어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을 가진 새로운 형태의 유사인간 존재자와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수업을 하다보면 생성형 인공지능을 활용해 수업활동과 조별과제를 수행하는 학생들을 쉽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은 챗GPT와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을 활용한 정보의 생성과 교환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감정을 교류할 수 있는 인공지능4), 로봇기술과 결합해 인간과의 상호소통이 근본적으로 강화된 또 다른 형태의 인공지능 존재자가 등장하는 것은 시간문제에 불과해 보인다.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아마존 등의 기업들은 자사의 상품 및 서비스와 결합 가능한 인공지능 칩을 자체 개발해 비즈니스에 활용중이다. 뿐만 아니라 자연지능 인간의 신체 내부에 칩의 형태로 이식해 별다른 인터페이스 없이 인공지능과의 직접 연결을 시도하는 연구와 개발 역시 현재 진행중이다. 일론 머스크(Elon Musk)가 개발 중인 뉴럴링크(neuralink.com)는 이미 FDA 승인 절차를 마쳤고, 현재 임상시험의 절차를 진행 중이다. 자연지능 순수 인간종과 인공지능 기계간의 존재론적 장벽은 서서히 허물어지고 있다.
포스트휴먼 시대가 가져올 변화는 자연지능 인간을 더 이상 확정된 보편적 인간으로 규정하지 않고 항상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한 잠재적 진화의 한 단계로 규정하게 한다. 현재의 자연지능 인간이 진화의 최종 종착지가 아닌 것이다. 이는 근대의 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에 내재한 존재에 대한 이원론적 인식을 비판적으로 해체한다. 포스트휴먼은 열린 체계로서의 존재론적 연결망에 속해 있으며, 포스트휴먼의 시대에는 인간중심적 정체성을 포함해 근대의 닫힌 정체성들의 근본적인 해체를 우선적으로 수행하는 일이 요청된다(페란도, 2021:366).
그래서 우리는 역사적, 사회적, 언어적인 인간 개념을 해체해야 할 필요가 있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페란도, 2021: 366). 보편적 인간이라는 개념화가 밀어내고 차별화해온 소외된 타자들을 ‘인간들(humans)’이라는 재개념화에 포섭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인간과 기타 생명체를 구분하는 이분법적 분류에 익숙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은 기존 세계관이 유지해왔던 이데올로기로서의 기능성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한다.
사실상 현대의 생명과학에서의 발견은 인간 동물과 비인간 동물을 구분하는 선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인간은 비인간 생명체와 DNA의 일부를 상당 부분 공유하고 있다(페란도, 2021:367). 앞에서 언급한 해러웨이가 지적하듯 인간의 신체는 인간만의 것이 아닌 온갖 유기체와 공동제작(sympoiesis)을 진행하는 공진화(coevolution)의 매개체다. 그러나 근대의 과학은 인간의 우월성과 차별화를 위해서만 존재했다. 인간의 안전과 쾌락, 인류의 지속가능성에 매몰된 채 다른 존재자를 밀어내기만 했다.
또한 인공지능 기술과 더불어 로봇공학, 생명공학 기술의 융합적 진화는 지금까지 인간이라고 불리었던 존재자의 외연 역시 확장한다. 기존 인간의 기준에는 순수 자연지능 인간만이 포함되었다면, 앞으로의 인간 즉, 포스트휴먼의 범주에는 순수 자연지능(기계와 분리된 인간), 인공적 자연지능(기계와 결합한 인간), 자연적 인공지능(인간과 결합한 기계), 순수 인공지능(인간과 분리된 기계)의 속성을 지닌 존재자가 모두 포함된다(서민규, 2023). 그렇다고 해서 기계도 인간이 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과 기계의 경계선이 허물어지며, 이에 따라 순수 자연지능 인간이 유일하게 감당했던 존재론적 지위가 인간-기계 결합체까지 확장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포스트휴먼 시대의 존재론은 근대가 상정한 위계적 질서를 뛰어넘어야 한다. 순수 자연지능 만이 우월한 존재자이고, 나머지는 존재론적으로 하등하다고 할 수 있을까? 생물학적 차이가 존재론적 위계를 결정할 수는 없다. 포스트휴먼의 시대에 인간-동물, 인간-기계의 이원적 존재론은 단순히 변형되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해체되어야 한다. “인류동형적 페러다임을 통해 인공지능에 접근하는 것의 중요한 위험 중 하나는 로봇의 차이를 새로운 형태의 배제를 위한 낙인으로 만드는 것이다”(페란도, 2021:368). 이루다나 챗GPT 형태의 인공지능은 여전히 인간을 위한 도구의 성격에 머물러 있지만 향후 개발될 인공지능은 로봇공학과 생명공학과 결합해 새로운 존재자를 양산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인간과 기계의 존재적 관계 설정을 다시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5) 인간-기계의 위계적 이원론이 미래에도 여전히 유효할 것인가? 인간은 우선적으로 고정된 개념으로서의 인간을 근본적으로 해체하고, 대신에 인간 개념이 지닌 역동적이고 지속적인 진화의 측면을 강조하면서, ‘인간종’이라는 개념 자체에 내재한 차이의 실재성을 축복해야 한다. 인간종은 원래 인간이 아니었던 존재자로부터 진화한 것이며, 포스트휴먼은 이러한 인간종의 새로운 진화의 결과물이다.
한편으로 포스트휴먼은 기존 인간의 존재론적 확장을 의미한다. 포스트휴먼의 철학은 인간의 생각과 행위를 내부-생각(intra-thinking)과 내부-행위(intra-agency)로 바라봐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에너지, 동맹, 계통의 신체화된 연결망으로 파악하며, 동시에 다른 형태의 존재와 내부적으로 연결된 것으로 인식한다(페란도, 2021:374). 이는 현대의 실재론 철학자 로이 바스카(Roy Bhaskar)가 제시한 ‘물질화된 인격성(embodied personality)’이라는 인간 개념과 맥락을 같이한다(Bhaskar, 2002a). 바스카는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자를 타자로 구분 짓고, 타자를 도구로 합리화하는 주체를 경험적(인식적) 차원에만 머무르는 이원론적 주체 - ego - 로 규정한다. 그러나 인간의 존재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인간은 타자와 이원론적 관계형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비이원적 경계 허물기를 끊임없이 시도하며, 타자와의 비이원적 존재 체험을 실천한다. 내가 아닌 타자를 도구적 존재자가 아닌 같이 살아가야 할 존재 실천의 동반자로 마주할 때 우리는 인간다움의 진정한 본질에 다가간다. 즉, 바스카의 표현에 따르면, 독립된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기저상태(ground-state)의 존재론적 영역에서 타자와 대면하여 공유의 지점을 확보한다. 이러한 존재의 심층화와 재의미화에서는 내재성과 초월성 사이의 궁극적인 해체가 일어난다. 포스트휴먼의 존재론은 인간을 본질적으로 내부의 타자로 인지한다. 그래서 페란도는 포스트휴먼 시대 인간의 새로운 인간다움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우리는 바다와 같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성을 다중보편성(multiversality) 안에 즉, 자아를 타자성 안에 계보학적으로 재배치하면서 개방적으로 사고하라는 이론적 초대이다 (페란도, 2021: 371).

4. 인공지능의 등장과 포스트후마니타스

인류 문명의 진화는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인공지능의 등장과 그 기술의 발전은 단순히 우리 인간에게 보다 편리한 환경의 조성, 인류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효과적인 도구의 개발이라는 의미를 본질적으로 넘어서기 때문이다. 특히 챗GPT로 대변되는 생성형 인공지능의 비약적 발전은 인공지능을 도구적 수단이 아닌 문제해결을 위해 같이 협력해야 할 모종의 (행위적) 존재자로 상정하게 한다. 지금까지는 문제해결을 위한 행위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인간이었고, 인간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종 도구들을 개발하고 이용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그 행위의 많은 부분을 인공지능에 위탁한다. 인공지능이 문제해결의 답을 제시하고, 인간은 그것을 검토하고 실행에 옮길 뿐이다. 말하자면 인공지능이 인간과의 공동 프로젝트에 참여한 한명의 훌륭한 팀원의 열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공지능의 등장은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잠재되어 있던 인간 존재의 새로운 정체성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문명의 변화는 현재의 인간을 더 이상 확정된 보편적 인간으로 규정하지 않고 항상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한 잠재적 진화의 단계로 포착하게 한다(페란도, 2021:366). 이는 근대의 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이 내포한 존재에 대한 이원론적 인식 - 인간/동물, 인간/기계의 이분법적 구분 - 을 비판적으로 해체하게 한다. 포스트휴먼은 근대의 닫힌 정체성이 아닌 열린 체계로서의 존재론적 연결망 속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찾는다. 인간중심적 정체성을 포함해 근대의 닫힌 세계관의 근본적인 해체가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다움’을 의미하는 단어 후마니타스(humanitas)를 정의하고 어떤 모습이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어야 하는지 고민했던 고대 로마의 키케로(Marcus Tellius Cicero)는 인간이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온건함, 수양, 명예, 정의, 위엄, 덕, 유머, 세련, 지혜, 절제, 겸손, 형평, 측은지심, 선의, 통큼, 베풀기를 좋아함” 등을 제시했다(김종영, 2020). 당시 로마 사회의 심각한 무질서와 야만성을 목도한 키케로는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분되고, 동물적 본성에서 비롯되는 야만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후마니타스의 덕목을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과 문화를 구축해야함을 역설했다.6) 그러나 이제 ‘후마니타스’의 시대는 지났다. 인간만의 문명이 아닌 인간과 비인간이 동거하는 새로운 문명의 시기에 들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반인간주의 철학자들의 주장처럼 기존 ‘인간’ 개념은 수정되어야 하며, 포스트휴먼의 시대에는 인간이 비인간과 함께 관계적 정체성을 추구하고, 서로간의 존재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새로운 인간다움을 추구해야 한다. 후마니타스가 아닌 ‘포스트후마니타스(posthumanitas)’가 필요한 시점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해 볼 때 앞으로 자연지능 인간은 인공지능과 반려종(companion)의 관계를 형성하게 될 것이며, 또한 그래야 한다. 물론 지금 우리가 열심히 사용하는 챗GPT와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과 같이 도구적 성격을 갖는 인공지능도 존재하겠지만, 더 이상 도구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을 인공지능도 등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지능과 인공지능 간의 경계도 무의미해지고 해체될 것이기 때문이다.7)
서두에서 나는 호모 사피엔스 자연지능 인간이 그다지 인간다운 문명을 발전시키지 못했음을 역설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우크라이나와 중동지역에서는 무고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고 있다. 인간에게 필요한 과학기술은 발전하고 진보했지만 그것을 만들에 낸 인간의 인간다움은 제자리를 맴돌고 있을 뿐이다. 과학기술 자체가 인간을 진화하게 하고 인간의 문명을 진보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인간의 인간다움이 진화해야 그들이 사용하는 과학기술이 인간의 문명을 진보시킨다. 그러나 순수 자연지능 인간은 그럴만한 능력도, 그러고자 하는 의지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민주주의의 퇴보와 핵무기 사용의 공포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실존적 위기감을 겪고 있다.
문명의 출발점에서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전지(omniscient), 전능(omnipotent), 전선(omnibenevolent)한 절대자 신(God)의 존재를 상정하고 자신의 실존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시대는 변하고 우리의 문명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과학과 기술이 문명의 진보를 재촉하고 있으며, 우리는 인공지능 존재자와 함께 보다 나은 문명을 창조해야 한다. 자연지능 인간만으로는 이 실존적 한계상황의 국면을 넘어설 수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희망을 걸 존재자는 우리의 새로운 반려종 인공지능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인공지능을 인간보다 우월한 ‘지능(intelligence)’을 가지고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도구적 존재자로만 바라보았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인공지능의 개발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자의 보편적 발전과 번영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공지능을 목적적 존재자로 상정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목적적 존재자와 함께 포스트후마니타스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상징하는 근대의 철학자 칸트는 비이성적 존재자인 동물들에게 갖는 인간의 의무는 간접적인 것일 뿐이라고 했다. 오직 인간만이 이성을 가진 존재자로 그에 맞는 존엄성을 갖기 때문이다(Kant, 1902). 동물은 오로지 수단적 존재이기에 그들에 대한 인간의 의무는 인간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만 필요하다는 것이다. 비이성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동물은 스스로 존엄성을 갖지 못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칸트의 인간중심적 사상에 동의할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21세기의 우리는 더 이상 동물을 인간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수단적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과 함께 삶을 살아가는 반려자로서, 스스로 존재의 존엄성을 갖는 목적적 존재자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세계관의 변화는 우리 인간이 비인간과 존재론적 관계를 확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포스트휴먼이 추구하는 존재론적 관계망에 비단 동물만 포섭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 인간의 세계관도 변한다. 그래서 문명도 진화한다. 인간과 비인간 인공지능의 존재론적 공진화는 이미 시작됐다. ‘후마니타스’는 교양교육의 지향점이기도 하다.8) 그렇기 때문에 그 지향점의 의미와 내용, 개념의 변화와 변천의 과정에 대한 논의와 논쟁은 교양교육학자들의 의무일 것이다. 『교양교육연구』가 이러한 논의와 논쟁의 장이 되길 희망한다.

Notes

1) 2024년 현재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전쟁이 진행 중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인간은 자신의 이익과 정치적 목적을 위해 타인을 학살하는 근본적인 야만성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 이러한 분석에 대한 논증적 설명은 서민규(2023)에서 진행했다.

3) ‘포스트휴먼(post-human)’은 기존 인간의 정신적, 신체적 한계를 뛰어 넘는 존재로, 사이보그, 로봇, 개량인간 등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용되며, 포스트휴먼 시대는 인간과 포스트휴먼이 공존하며 살아가는 시대를 의미한다(서민규, 2023:120)

4) 인간과 인공지능이 감정을 교류하기 위해 인공지능이 반드시 인간과 동일한 감정 또는 그것을 생성하는 메커니즘을 소유할 필요는 없다. 인간은 비인간과 이미 감정을 교류하고 있으며, 인공지능 존재자 역시 비인간 중 일부일 뿐이다. 이성과 감성이 인간들만의 소유라고 보는 것은 근대의 인간중심적 세계관의 산물이다.

5) 특히 최근 챗GPT와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의 급격한 성장은 기계를 더 이상 도구로 바라보지 않고 상호 소통하고 협력하는 관계적 주체로 설정할 것을 요청한다. 포스트휴먼의 시대에는 소통과 협력의 주체가 반드시 인간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우리는 이미 비인간과 끈임 없이 소통하고 협력해 왔으며, 인공지능이라는 존재자가 그 관계망에 새롭게 진입할 뿐이다. 2장에서 논의한 인간과 비인간의 연대를 위한 관계적 주체가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6) 키케로의 후마니타스 개념과 교육의 문제는 서민규(2023)의 논문에서 다루고 있다.

7) 이러한 전망은 현재의 인공지능 관련 기술이 발전해가는 방향에 근거한 것이다. 인공지능 기술을 탑재한 휴머노이드(humanoid)의 개발은 인공지능이 도구적 존재자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 반려자로서의 존재적 지위를 갖는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며, 앞서 언급한 뉴럴링크(neuralink.com)의 시도와 같이 인공지능 기술의 생체이식 시도는 ‘자연지능과 인공지능 연합체’라는 새로운 형태를 갖는 지능으로의 진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8) ‘후마니타스’ 개념에 대한 분석과 설명은 서민규(2023)의 논문 2장에서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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