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교양교육 콘텐츠로서의 셰익스피어 -상호텍스트성과 고전의 현대적 재생산 양상-<햄릿>을 중심으로

Shakespeare as Liberal Art Education Contents -Intertextuality and Reading Intertextually Reproduced Modern Hamlets

Article information

Korean J General Edu. 2023;17(2):115-127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3 April 30
doi : https://doi.org/10.46392/kjge.2023.17.2.115
한도인
단국대학교 교수, handosa@dankook.ac.kr
Professor, Dankook University
이 논문은 2022학년도 단국대학교 대학연구비 지원으로 연구되었음.
Received 2023 March 20; Revised 2023 April 02; Accepted 2023 April 17.

Abstract

셰익스피어는 시대와 언어를 뛰어넘은 문학의 아이콘이자 장르를 초월한 문화 콘텐츠이다. 특히 상호텍스트성을 통해 재생산된 셰익스피어는 융복합적인 문화의 시류를 타고 글로벌 시대에 보편적인 문화교양 콘텐츠가 되었다. 상호텍스트성이 고전과 현대를 이을 수 있는 이론적 고리이므로, 셰익스피어를 다루는 다양한 재현 방식에 대한 논리적 접근을 위해 우선 상호텍스트성이란 개념에 대해 면밀하게 고찰해 보는 것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햄릿>의 상호텍스트적 재생산인 스토파드의 <로젠크란츠와 길던스턴은 죽었다>는 햄릿 주변의 미미한 두 인물을 주인공으로 끌어내 원작에서는 없었던 새로운 이야기로 햄릿의 이면을 보여준다. <오필리아>는 여성의 관점에서 <햄릿>을 상호텍스트적으로 다시 쓰기한 소설/영화로써, 오필리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원전의 수많은 죽음 대신 미래를 약속하는 열린 결말을 택하는 플롯의 변형을 통해 현대의 독자/관객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지역적 특성으로 재생산된 상호텍스트의 예로 한국의 연극 <햄릿>을 들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서구적 연기 양식에 한국적 이미지와 춤, 노래로 각색함으로써 공연지의 문화적 특성을 구현한 작품이다. 세익스피어의 한국화 혹은 한국적 재현으로 칭해지는 상호텍스트적 특성이 문화적 가치의 지속성이라는 측면으로 확대되기 위해서는 한국이라는 개성을 드러내는 지역과 문화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셰익스피어가 지닌 인류 보편적 가치를 성공적으로 전할 수 있도록 하는 고전에 대한 문해력이 선행되어야 함을 확인하였다.

영미권의 고전인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현대적 다시쓰기를 통해 상호텍스트적인 의의를 이해하는 것은 세계화 시대에 다양한 문화 변주를 해독하는 문해력을 양성하는 데에 배경지식이 된다. 따라서 본 연구는 독자/학습자가 동시대에 구현된 상호텍스트적 재생산이 내포하고 있는 철학적 사유와 사회적 의의를 이해하는 비판적 문해력을 제공하는 훌륭한 인문교양교육 콘텐츠이다.

Trans Abstract

Shakespeare is an icon of literature that transcends time and language and a cultural content that transcends genres. Especially Shakespeare which have been reproduced intertextuality is not a British speciality, but an essential content of liberal arts education in the flow of convergence culture in this global era.

To have logical approach to the various representations of Shakespeare, the concept of intertextuality is closely examined at the beginning, from Kristeva to the present, which is theoretical link that connects the classics and the modern.

Tom Stoppard’s Rosencrantz and Guildenstern are Dead is a modern reproduction of Shakespeare’s Hamlet, clearly shows the absurdity of modern life by drawing insignificant characters around the main character, Hamlet.

Ophelia, a novel intertextually rewritten Hamlet from a woman’s point of view and produced as a movie presents a new defamiliarized perspective to modern readers/learners through genre transformation as well as ending transformation.

Hamlet and Yeonsan, two plays directed by Lee in Korea, are the discernible examples of Korean intertextual representations which show regional and cultural characteristics of Korea, that is, an outside of the Anglo-American region. By representing Shakespeare’s Hamlet using both Korean symbols, dances, and songs abd western acting style, it suggests the process of expanding intertextuality into interculturality. In addition, it can be said that readers/learners’ literacy to the classics should be preceded to secure the global value of Koreanization.

Understanding modern adaptations of Shakespeare is an essential backup for leaders/learners to decipher the synthetic syndrome of global culture of the moment. Therefore, as liberal art education content, it seems necessary to recommend to readers/learners who need to develop critical literacy to understand the current cultural trend to read the intertextually reproduced Shakespeare.

1. 서론

영문학 고전인 셰익스피어는 수 백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시대와 언어를 뛰어넘은 문학의 아이콘이자 장르를 초월한 문화 콘텐츠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셰익스피어 작품이 지니고 있는 인간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보편적 진리, 그리고 유려한 대사를 통해 구현된 뛰어난 심리 묘사는 그 자체로 뛰어난 연극성을 발휘할 뿐만 아니라 정신분석학이나 여성주의처럼 새로운 철학적 인식이나 세계관을 무리 없이 흡수하는 융복합적 특성을 구현한다. 언어가 유일한 전달 매체였던 시대에는 문학 텍스트로서, 그리고 연극의 모태로서 존재하였고, 기술의 발달에 따라 영화라는 매체가 생겨난 이후에는 고전이면서도 대중성을 확보하는 흔치 않은 역할을 해오고 있다.

셰익스피어가 탁월한 고전으로 자리하고 있는 데에는 시대를 초월한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탐구가 담겨 있다는 예술적 문학적 가치와 더불어 실제 연극 공연이라는 물리적 재현을 통해 매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 역할을 해 온 문화 매체로서의 역할이 크게 공헌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재현을 통해 셰익스피어는 시대적 특성은 물론, 재현되는 지역의 언어적 특성과 문화를 반영함으로써 역사적 공시성 뿐만아니라 통시성 역시 획득해 왔기 때문이다. 지난 수 세기 동안 언어적인 재현은 물론, ‘시네마토그래프(Cinematographe)’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영상 매체가 생겨난 후에도 셰익스피어는 끊임없이 재생산되어왔다. 백여년이 지난 1990년대에 이르러 시대에 따른 혹은 관점에 따른 재해석과 그에 따른 재생산의 과정과 그 결과물은 은 ‘다시쓰기’ 혹은 ‘상호텍스트성’이라는 개념으로 문예 논리를 갖추기에 이르렀다.

상호텍스트성은 구조주의를 서두로 하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원론적 설명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구조주의 문학이론이 있기 이전, 이십세기 중반 무렵 프랑스와 독일에서 활발히 진행된 실존주의는 이차 대전을 겪으면서 서구 문예 비평의 주류가 되었다, 실존주의와 셰익스피어의 만남은 얀 코트(Jan Cott)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한다. 그의 저서 <동시대인 셰익스피어>(Shakespeare Our Contemporary)는 엘리자베스시대 영국의 드라마와 이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부조리한 상황을 완벽하게 대입, 통합하는 것으로 셰익스피어를 현대적으로 받아들이는 논리적 역학을 제시하였다(Kennedy 139). 셰익스피어 원전에 대한 충직한 독해를 추구하던 이러한 견해와는 달리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과 같은 유물론자들이나 아니아 룸바(Ania Loomba)를 비롯한 여성주의 비평가들은 셰익스피어 극의 대사에 대한 절대적인 찬사와 신뢰, 그리고 그에 따른 텍스트 읽기의 강조는 제국주의적 호전성을 내포한다는 견해를 보여준다. 특히 룸바는 셰익스피어(읽기)가 영국인들 스스로 ‘문명화된 인종’이라는 일종의 우월성을 강화하는 장치로서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는 도구 역할을 했다고까지 지적한 바 있다(Loomba 1). 백인 그리고 남성 중심의 읽기에 저항한 이러한 시각은 영미권을 제외한 여러 나라에서 재현된 다양한 해석 방식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였다.

전통적인 영미권 중심의 텍스트 읽기를 지양하고자 하는 전환적인 시각은 구조주의를 토대로 하는 언어학자들에 의해 텍스트의 언어적인 면, 즉 발화라는 현상과 그 결과에 관심을 기울이는 방향으로도 전개되었다. 특히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는 언어와 그 언어의 발화 사이의 상호관계를 설명하는데 상호텍스트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미하일 바흐찐(Mikhail Bakhtin)의 대화주의 이론을 재해석한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한 ‘발화’ 즉 텍스트는 두 가지의 관계를 형성한다. 수평적 관계는 화자(작가)가 청자(독자)와 맺고 있는 관계인 반면, 수직적 관계는 어느 발화든 그 이전 시대 혹은 동시대의 다른 발화와 맺고 있는 관계를 의미한다. 크리스테바는 발화의 수직적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상호텍스트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적어도 그에 따르면, 하나의 기호체계(텍스트)는 또 다른 기호체계로 전위되게 마련이며, 따라서 모든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들을 흡수하고 변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60). 이러한 크리스테바의 상호텍스트성에 대해 롤랑 바르뜨(Roland Barthes) 역시 모든 텍스트는 과거 인용들의 새로운 조직에 불과하다고 본다(79). 하나의 텍스트는 하나의 의미만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며, 한 텍스트에는 수없이 많은 독해 단위들이 있고 이 각각의 단위들은 텍스트의 다층적이고 복수의 의미와 가치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모든 텍스트는 과거로부터의 유산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당연히 복수의 의미를 지닐 수 밖에 없으며, 텍스트 내에서도 서로 능동적으로 교류하는 양상을 띠게 되는 것이다. 텍스트에 내재한 이러한 특성을 상호텍스트성이라 할 수 있다.

기존의 읽혀지는 텍스트에서는 독자는 한정된 의미만을 획득하게 된다. 그러나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는 주체인 독자 역시 독해하는 순간까지 경험해 온 모든 것이 담긴 일종의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수많은 상호텍스트성이 마주치는 순간이 되고 새로운 텍스트가 출현하는 순간이 된다. 독자는 읽는 순간마다 텍스트를 다시 쓰는 창조적인 행위를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Fortier 88). 즉 모든 텍스트가 상호텍스트적인 구성을 이루고 있으며 읽는 행위 또한 상호텍스트적인 전환을 이루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크리스테바가 주목한 언어와 발화, 즉 텍스트와의 관련성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의 상호텍스트성으로써, 한 문학 체계에서 다른 문학 체계로의 전이뿐만 아니라 비문학적인 체계로의 전이까지도 포함하는 기호적 과정의 일부이다. 상호텍스트성을 텍스트의 의미를 가능하게 하는 지식의 집합체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더해서 조나단 컬러(Jonathan Culler)는 상호텍스트성이 어느 한 텍스트가 한 문화의 다양한 언어나 의미 행위와 맺고 있는 관계, 그리고 그 문화의 가능성을 표현하는 텍스트들과 맺고 있는 관련성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Theory 34). 텍스트가 속해 있는 문화에 주목함으로서 상호텍스트를 상호문화성으로 확대하는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상호텍스트성은 가장 좁은 의미로는 주어진 텍스트 안에서 인용문이나 언급의 형태로 다른 텍스트에 드러나 있는 경우를 말하는데, 이 경우의 상호텍스트성은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기 때문에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인지하는 데에 커다란 문제가 없기 마련이다. 반면, 가장 넓은 의미의 상호텍스트성은 단순히 한 문학 텍스트와 다른 문학 텍스트 사이의 상호텍스트성 뿐만 아니라 전혀 다른 기호 체제와의 상호텍스트성까지도 의미한다.

이런 해체의 양식을 상호텍스트로 보는 시각은 장르라는 고전적 규범을 뛰어넘는 현대의 예술을 보는 호혜적인 관점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고전 문학 작품의 현재적 재현이라는 문학이 지닌 역사성과 공시적 특성을 동시에 가늠할 수 있는 통찰을 가능하게 한다. 언어적인 텍스트가 아닌 연극적인 요소들, 즉 음향, 음질, 색, 이미지, 그리고 기술적인 요소들, 이를테면 (음향 혹은 촬영) 장비나 기술 등이 복합적으로 시각적인 대체제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화로 재현된 셰익스피어는 이와 같은 관점에서 다시 쓰인 텍스트가 된다. 같은 맥락에서 한 편의 연극으로 구현된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그 자체가 읽히는 텍스트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영화나 연극으로 재해석된 셰익스피어는 연출가가 지닌 문화적인 배경을 토대로 각각의 재현들이 해체적인 재창조의 과정을 거침으로써 동일한 원전에서 유래했지만, 차별적이고 동일하지 않은, 그래서 유일한 텍스트로 자리하게 된다. 따라서 상호텍스트성은 연극과 영화에서 보다 확대된 의미를 지니게 된다. 특히 셰익스피어의 영화에서는 셰익스피어의 언어(텍스트)와 배우들의 연기, 그리고 연출가가 끼워 넣은 사물과 그 사물의 이미지들이 (마치 언어처럼) 말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Jorgens 27). 예를 들면, 오손 웰즈(Orson Welles)의 <맥베스>에서는 맥베스에게 내재한 악을 의인화하기 위해 진흙 인형을 사용하고, 피터 브룩(Peter Brook)은 <리어왕>에서 익사한 쥐들을 보여주며 구로사와 아키라(Akira Kurosawa)의 <피의 권좌>에서는 해골 더미와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이 불길한 음악과 더불어 제시된다. 로만 폴란스키(Roman Polanski)의 <맥베스>에서는 왕관이, 그리고리 코진스키(Grigoriy Kozintsev)의 <리어왕>에서는 왕좌가 전체를 아우르는 권력과 욕망의 상징으로 빈번하게 등장하고, <햄릿>을 영화화한 작품들에서는 침대가 햄릿의 심리적 갈등과 거투르드의 욕정을 드러내는 장치가 되는 한편, <로미오와 줄리엣>에서는 영구차의 이미지가 침대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인문학 고전에 대한 통시적 이해는 현재의 디지털 환경에서도 필수적인 문해력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다.

영국의 포스트모더니즘 학자인 캐서린 벨지(Catherine Belsey)는 상호텍스트성을 단순한 문학적인 현상 이상의 것으로 여긴다. 그는 문학 텍스트라 할지라도 그것이 쓰여진 시대의 지식과 당대의 언술, 그리고 특히 문화적 배경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 예로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는 16세기 엘리자베스 시대의 거의 모든 지식이 집합적으로 드러나 있다고 주장한다(407). 다시 말하자면, <맥베스>의 주요 주제인 인간 맥베스의 야심과 욕망,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양심의 가책과 징벌은 종교 개혁으로 촉발된 인간적 갈등의 본원적 문제였음을 지적하면서, 왕권 찬탈과 왕의 계승과 관련한 역사는 물론, 마법이나 광증 혹은 자살과 같은 당대의 의학적 혹은 과학적 지식이 필요한 문제들이 중요하게 다루어져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는 공시적인 상호텍스트성을 보여주는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한국을 비롯한 비영어권에서의 상호텍스트적 재생산을 공시적인 문화 재현 현상으로 파악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우선, 다양한 재현 방식에 대한 논리적 접근을 위해 우선 상호텍스트성이란 개념에 대해 고찰해 보는 것으로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그리고 상호텍스트적인 재생산의 원전으로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선택하여 이를 중심으로 상호텍스트적인 재생산의 양상을 검토해 볼 것이다. 문학텍스트로서의 재생산 예로 현대 영국의 탁월한 극작가이자 각본가인 톰 스토파드(Tom Stoppard)의 <로젠크렌츠와 길덴스턴은 죽었다>(Rosencrantz and Guildenstern are Dead)(1967)을 검토해 볼 것이다. 또한 상호텍스트적 장르 전환의 예로 리사 클레인(Lisa Klein)의 소설을 영화화한 <오필리아>(Ophilia)를 원전과 비교 분석해 볼 것이다. 이와 더불어 영어권을 벗어나 지역성을 토대로 상호텍스트적 재현은 물론 상호문화성을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 한국에서 공연된 <햄릿>을 검토할 것이다. 이 때 소위 셰익스피어의 ‘한국적 재현’의 특징적인 측면을 고찰해 봄으로써 상호텍스트성이 지역성과 어떻게 연관을 맺고 어떻게 재생산되었는지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지역적 재생산의 양상을 검토하는 것으로써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공연, 혹은 영화로 연출하면서 영어라는 절대적 권력을 지닌 언어의 권위에서 벗어나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새로운 의미를 추구할 수 있는 환경에 있음을 우회적으로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원전의 상호텍스트적인 전환이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기라는 심미적인 효과를 낳는다는 사실은 텍스트에만 해당하는 사실이 아니라 영화와 연극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지역성의 과감한 노출은 앞서 언급한 구로사와의 영화에서 드러난 일본의 전통극 양식인 노(Noh)라든가, 브레히트의 서사극 양식에 도입된 중국의 경극 경우처럼 기존의 해석이나 감상에 대한 낯선 시각을 제시하는 효과를 지닌다. 지역적인 특성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낯설게 하기는, 이미 반세기 이상 활용되어 온 상호텍스트적인 전환이면서도 여전히 영어권 현지에선 매력적이고 지역에서는 편리한 연출 방식이므로 영미권 외에서의 셰익스피어 공연에 지역색이 강하게 입히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영화나 연극이 지속적인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낯선 지역색 이상의 것이 있어야 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적인 재현이 세계적인 보편성을 확보하는 문제 역시 지역의 독특한 문화적 특질이 미학적 완성와 더불어 보편성을 성취하는 예술적인 가치로 전환되어야 하는 쉽지 않은 전제가 수반되어야 한다. 따라서 고전의 재생산에 대한 이론적 근거라 할 수 있는 상호텍스트성과 그에 따른 현대의 다양한 재생산 양상에 대한 연구는 현재 시점에서 인문 교양교육 콘텐츠로써 고전과 디지털을 아우르는 문해력 향상을 위해 필요한 시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서양의 고전으로서 현대의 여러 분야에서 언급되고 재현되고 있는 셰익스피어의 현대적 재생산이라는 융복합적 문화의 흐름의 기원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원작과 재해석된 생산물과의 상호텍스트성을 아는 것은 현대의 독자/학습자들에게 고전을 이해하는 문해력을 양성하는 측면에서도 필수적인 작업이다(Amstrong and Newman 8). 셰익스피어는 문학은 물론 영상과 연극 문화 전반에서 여러 극작가나 연출자들에 의해 다양하고도 실험적인 시도들로 전개되어왔고, 이들의 결과물은 문학과 문화는 물론, 심지어 독자/학습자들이 일상적으로 접하는 상업 광고에서도 다양하게 인용,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고전이 동시대적인 현대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음이다. 그러므로 셰익스피어와 관련한 상호텍스트적 재해석 혹은 다시쓰기에 관한 포괄적인 연구는 영상 매체에 익숙하고 이에 몰입하는 현대의 독자/학습자를 위해 그들의 문화 응용력을 확장하기 위한 보편적인 지적 배경으로서의 고전에 대한 이해와 필요성을 확인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은 본 연구의 방식이 고전에 대한 문해력을 양성하기 위한 인문교양교육 콘텐츠로 활용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고전의 현재적 재현 양상을 상호텍스트성을 토대로 분석해봄으로써 독자/학습자는 자신의 주변에 산재한 고전의 흔적을 추적할 수 있는 안목을 지니게 되고 이러한 안목은 고전에 대한 접근을 보다 용이하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고전과 그 고전의 상호텍스트성을 해독한다는 측면에서 일반적인 교양교육의 목표, 즉 문해력 함양이라는 거시적 목표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며, 디지털 시대에 필수적인 지적 배경으로서의 고전에 대한 인문적 교양을 함양하는 교양교육 콘텐츠로 셰익스피어를 활용하는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2. 본론

2.1. 상호텍스트성의 경계

크리스테바에 의해 도입된 상호텍스트성이라는 용어는 컬러의 분석 과정을 거치면서 언어의 발화, 즉 언어로 이루어진 텍스트로 확대 적용된다. 구조주의 학자인 컬러는 시를 분석하면서 어떤 한 시는 다른 시 그리고 시인의 독서 관습과의 관련성 없이는 창조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시가 시로서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관련성 때문이며, 그 시가 존재하는 위치는 변함이 없되, 만일 의미가 변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 이후에 쓰여진 다른 책들과의 관련성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Culler Signs 107). 크리스테바와 컬러에 의해 주창된 상호텍스트성 이론은 츠베탕 토도로프(Tzvetan Todorov)등의 이론을 거치면서 보다 제한적인 문학적 의의를 장착한 개념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김욱동은 크리스테바와 토도로프에 의해 본격적으로 문학 이론에 도입된 상호텍트스성을 첫째 상호텍스트성의 범주, 둘째 주어진 텍스트 내에서의 상호텍스트적인 관계를 인지하는 방법, 그리고 세 번째로 이러한 인지와 관련된 문학 텍스트 생성과 상호텍스트성의 문제로 설명한다(12). 요약하자면, 상호텍스트성은 어떤 텍스트의 의미가 다른 텍스트로 인용되거나 반복되어 사용되는 것을 통해 의미가 변형되거나 개정되는 상관관계를 설명하는 용어로써(Scolnicov 211), 주어진 텍스트와 그 텍스트의 기원이 되는 다른 텍스트들 간의 관계를 통해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텍스트언어학적 관점에서 상호텍스트성이라는 개념은 텍스트간의 연계성을 의미하면서 반복과 변형이라는 중간단계를 거치는 것으로 파악한다(안정오 127). 이때 반복이란 일정한 부분, 즉 문구, 문장, 문단등이 단순히 인용되는 것이고, 변형이란 교체, 추가, 확장 및 압축, 그리고 치환등을 통해 원전과는 다르게 변형되는 현상을 말한다. 즉 매체가 언어에서 음악으로 변형될 수도 있고, 작가가 임의로 의미를 덧붙일 수도 있으며, 저자가 의역이나 해설을 부여할 수도 있다. 따라서 텍스트언어학적인 관점에서는 희곡 작품을 무대에서 공연하는 행위는 물론 이를 영화화하는 것을 포함하여 소설 혹은 시를 이미지화하거나 음악으로 각색하는 등의 모든 미디어 창작물까지도 상호텍스트적인 영역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다.

상호텍스트성과 관련한 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문학 텍스트의 생성과 상호텍스트성과의 관련성이다. 어떤 한 텍스트 내에서 어느 것이 상호텍스트적이고 어느 것은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과연 그러한 관계를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가? 하는 두 개가 질문에 대해 상호텍스트성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가장 필요한 부분이 단순한 인유 혹은 회상과 상호텍스트성을 혼돈하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즉 원전의 텍스트로부터 구성과 형식 혹은 의미를 빌어오는 것과 의미를 사용하지 않는 단순한 반복을 구분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컬러는 상호텍스트적 텍스트는 “이미 존재해 있으면서도 더 이상 그 기원을 상실한 상태”야 말로 상호텍스트성의 본질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Culler Signs 103). 더 나아가 크리스테바는 텍스트가 만들어지는 순간 이미 다른 언술, 즉 기존의 텍스트의 지배하에 있게 되고 이와 동시에 그 기존의 언술은 새로운 텍스트에 어떤 우주를 형성하는 것으로 상호텍스트적 관련성을 설명한다(11). 이러한 상호텍스트성의 통시적 특성은 헤롤드 블룸(Harold Bloom)에 의해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된다. 그는 어떠한 문학 작품도 그 자체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고 오직 다른 작품과의 관련성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함으로써 작가에 의한 텍스트의 의도적 생산에 주목한다. 블룸에 의하면 선배 작가와 후배 작가 사이에는 일종의 투쟁 관계가 있으며, 후배 작가들은 선배 작가들보다 ‘늦게 태어났다’는 불안감과 그들이 시적 영감을 소진시켰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낀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후배 작가들은 ‘의도적으로’ 선배 작가들을 오독함으로써 자신들의 상호텍스트적인 (그래서 창조적인) 시를 낳는 투쟁을 하는 것으로 본다(94). 비록 블룸의 주장은 상호텍스트성의 (크리스테바의 용어로) 수직적인 관계만을 강조한 한계를 보이지만, 그럼에도 상호텍스트적인 문학 생산 이론을 보다 선명하게 설명한 점에서는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상호텍스트적으로 재생산된 고전 (셰익스피어) 텍스트는 독자와의 동시대성으로 인해 원작보다 접근이 용이할 뿐만 아니라 같은 시대의 다른 작가들의 낯선 작품들보다 선택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이점을 예상할 수 있다(Scolnicov 210). 반면에 원작에서부터 유래한 기대감도 크기 마련이어서 상호텍스트적인 재생산이 항상 성공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표절이라는 오명을 벗을 수 없기도 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상호텍스트성이라는 개념이 단순한 표절과 어떻게 다른지를 파악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 상호텍스트성과 표절의 차이는 극명하다. 상호텍스트성은 원텍스트와 변환텍스트가 서로 긴밀한 관계에 있어 상승효과를 내지만, 반면에 표절은 그 관계가 밝혀지면 변환텍스트는 치명적인 결함을 갖기 때문이다. 상호텍스트성이 가미된 텍스트는 의미나 해석이 다양해질 수 있는 반면, 표절은 해당 텍스트에 독자의 자리가 전혀 없다. 또한 상호텍스트성은 선행 텍스트에 대한 고찰이 기본 과제이지만, 표절은 선행 텍스트를 의도적으로 은폐하기 마련이다. 상호텍스트성을 통해 원텍스트와 변형텍스트는 새로운 생명력을 갖지만, 표절텍스트에서 선행텍스트가 발견되면 바로 그 텍스트는 생명을 잃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원작에서 등장인물이나 전개 방식을 빌려오는 상호텍스트성을 넘어서 확대 적용된 상호텍스트성을 일종의 창작 원리로 사용하는 경우는 그 정도에 따라 표절 행위로 인식될 수도 있다. 반면에 상호텍스트성의 정도와 범주가 모호한 혼성모방이 창작물로 소비될 수도 있는 여지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극단적인 주장이긴 하지만 실제로 러시아 태생의 미국 작가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Bladimir Navokov)는 모든 창작은 일종의 표절 행위라고 주장한 바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보코프가 인용한 ‘표절’이라는 말은 창작함에 있어서 이전의 텍스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반어적인 표현이기는 하다. 이와 유사하게 구로사와도 “창조는 기억이다. 내 경험과 독서들이 내 기억속에 남아 있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밑거름이 된다. 나는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그 무엇도 창조해 낼 수 없다(Grilli 54 재인용)”고 밝힌 바 있다. 이러한 학술적인 측면의 근본성에 대한 도덕률을 선언하는 이러한 전문가들의 언급과는 별개로, 최근의 다양한 미디어 매체의 발달과 사용자의 애매한 지적 양심이 상호텍스트성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기도 하다. 이러한 현상을 빗대어 몇몇 학자들은 언어의 유희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play와 표절을 의미하는 plagiarism을 합성하여 playgiarism이라는 신조어로 상호텍스트성의 극단적 형태를 지적하고 있음(김욱동 33)은 주목할 만하다.

결국 상호텍스트성이라는 개념은 표절을 향한 자정 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민감한 도덕적 잣대가 필요하긴 하나 한편으로는 엄연한 창조의 수단이기도 하고 특히 모든 가능성을 향해 열려있는 융복합적인 문화의 흐름과 그 의의를 파악할 수 있는 주요 이론이라 할 수 있다.

2.2. 상호텍스트적 다시쓰기: <로젠크렌츠와 길덴스턴은 죽었다>

극의 내용이나 등장인물을 빌어오는 단편적인 개작을 넘어 상호텍스트적 재현으로 읽힐 수 있는 작품들 중에는 <로젠크렌츠와 길덴스턴은 죽었다>와 더불어<굿나잇 데스데모나 (굿모닝 줄리엣)>(Goodnight Desdemona (Good Morning Juliet))(1988)등을 들 수 있다. 전자는 <햄릿>을 원작으로 하지만 햄릿이 아닌 주변의 인물을 중심으로 다시 쓰인 부조리극이고, 후자는 <오셀로>와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서로 다른 두 작품의 여주인공을 끌어내어 여성주의 관점에서 다시 쓰인 작품이다. 이들 작품은 제목으로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상기시키면서도 원작과의 차별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다시쓰기의 전형적 특성을 보여준다. 이외에도 셰익스피어와 상호텍스트성을 보여주는 작품은 수없이 많지만, 영어권의 문학텍스트이면서 상호텍스트적인 성격을 가장 명료하게 인지할 수 있는 작품은 스토파드의 <로젠크렌츠와 길덴스턴은 죽었다>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일반적인 각색과는 달리 스토파드는 원작에서 드러나지 않은, 혹은 언급되지 않은 부분을 채우는 형식을 취한 것이기 때문이다. 극작가의 창조성이 가미된 이러한 텍스트 전환 방식은 ‘변형적 교환’(Kelly 10)라는 말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재생산 방식은 단순한 모방이나 차용보다는 보다 광범위한 상호텍스트적 변형이 가능하게 한다. 스토파드의 <로젠크렌츠와 길덴스턴은 죽었다>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모체로 하고 있으나 제목에 쓰인 로젠크렌츠와 길덴스턴이라는 인물의 배경이나 일상은 원작 <햄릿>에서는 햄릿과 클로디어스가 언급한 부분 외에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작품의 전체 맥락은 덴마크 왕실의 복수 비극이라는 원작의 구성을 그대로 가져오지만 등장 인물의 비중과 그들의 극적 행동은 전혀 새롭게 구성된 스트파드의 창작물인 것이다.

스토파드 작품의 제목은 <햄릿> 마지막 부분에 로젠크렌츠와 길덴스턴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없이 죽었다는 사실만을 언급한 영국 대사의 전언 중 일부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Hamlet 5.2.376). 이들은 햄릿의 대학 친구이지만 클로디어스의 명령으로 덴마크로 와서 햄릿을 감시하다가 햄릿이 폴로니어스를 살해한 후 다시 클로디어스의 명령으로 햄릿과 함께 영국으로 가는 배를 타는데, 영국 왕에게 보낸 밀서에서 햄릿을 죽여달라는 요청을 한 왕의 계략을 눈치챈 햄릿이 이들이 지닌 왕의 편지를 바꿔치기함으로써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교수형에 당하게 되지만 이마저도 이들에게는 인식되지 않고 햄릿의 대사로 전해질 뿐이다.

이처럼 원작 <햄릿>에서 거대한 두 주인공인 햄릿과 클로디어스에 의해 가려지고 좌지우지된 주변적 인물, 죽음조차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아무런 의미도 부여되지 않은 미미한 인물들인 로젠크렌츠와 길덴스턴을 스토파드는 극의 중심에 위치시킨다. 전체 3막으로 이루어진 <로젠크렌츠와 길덴스턴은 죽었다>는 원작에서 늘 한 쌍으로 등장하며 같은 극적 행동을 하고 본인들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죽임을 당하는 인물을 중심으로 끌어내어 반복적인 대사와 대답없는 질문으로 자신의 현재를 의심하고 왕과 왕비에 대한 극중극 놀이를 하게 하는 것으로 원작의 갈등을 대체한다. 이에 대해 스토파드가 이들에게 정체성을 추구하는 순간을 부여한다고 해석하기도 하지만(Gruber 292), 로젠크렌츠와 길덴스턴에게 현실을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전복시키는 능력은 부여하지 않는다. 작품의 일관된 희극적 어조는 덴마크 왕실의 반역과 치정 사건이 이들 두사람의 운명을 결정짓는 핵심적인 사건이면서도 막상 이들에게는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모호하게 변방의 이야기처럼 전해지게 한다. 이들의 이러한 모습은 이 작품이 메타연극적인 특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판단하게 하기도 한다(Fleming 47). 물론 구조적으로 메타연극의 특성을 구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이 작품의 핵심은 <햄릿>의 상호텍스트적 다시쓰기를 통해 스토파드가 두 인물에게서 현대인들의 무목적성, 혹은 획일화된 정체성을 발견한다는 사실이다. 원작과 동일한 시간 흐름을 택한 스토파드는 두 주인공의 불확실하면서도 알 수 없는 죽음을 원작과 마찬가지로 ‘로젠크렌츠와 길덴스턴은 죽었다’고 영국 대사가 전하는 말로 전하면서 <로젠크렌츠와 길덴스턴은 죽었다>를 종료하기 때문이다.

스토파드는 <햄릿> 다시쓰기를 통해서 원작의 주변인을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상호텍스트적인 콘텐츠의 주인공들로 발전시킨다. 주변인의 관점으로 원작의 주요 인물들을 관찰하게 함으로써 권력의 주변부에 있을 수 밖에 없는 현대인의 실존적 상황을 그려내면서, 이와 동시에 관객/독자들로 하여금 객관화되고 단순화된 권력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변인이 주인공이 되고 햄릿을 위시한 원작의 주요 인물들을 역할 놀이와 극중극 속에서 주변인처럼 등장하게 만드는 상호텍스트적 전환으로 그간 원작의 인물들에게 집중되었던 극적 행동의 의의를 부지불식간에 해체하는 효과를 초래한 것이다. 결국 <햄릿>을 토대로 다시 쓰여진 <로젠크렌츠와 길덴스턴은 죽었다>는 고전 문학텍스트의 상호텍스트적 재생산의 훌륭한 예시가 됨과 동시에 작품 자체로도 고전의 깊이와 동시대적인 현대성을 담은 새로운 창작물로써 상호텍스트적으로 전환된 문학텍스트의 전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2.3. 상호텍스트적 장르전환: 영화<오필리아>

셰익스피어의 상호텍스트적인 재생산 혹은 다시쓰기와 관련하여 상대적으로 텍스트로부터 자유로운 재현 방식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상호텍스트성의 특성상 원작의 텍스트로 회귀해야 하는 문제에 있어서 영화로의 재생산은 (연극과 마찬가지로) 셰익스피어의 언어를 어떠한 방식으로 구체화하는지에 따라 그 성격이 결정되는데, 영화라는 재현 형식은 기술적 장치를 활용함으로써 언어로 표현된 한계를 보다 다양하고 폭넓게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례로 반세기 전 일본의 감독 구로사와의 작품들은 언어로 이루어진 문학 텍스트라는 한계를 영화적 장치를 통해 성공적으로 치환한 경우를 보여준다(Morrison 160). 외국의(영어권의) 고전인 셰익스피어 원작을 일본의 이야기로 각색하고, 일본이라는 지역이 지닌 역사 문화적 특성을 강렬하게 드러낸 색채나 이미지, 그리고 음향이나 음악 등으로 화면을 구성함으로써 언어(영어)의 한계를 극복한 작품으로써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바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통한 셰익스피어의 글로벌화라는 측면에 있어서 상호텍스트적인 관점에서 고찰해 볼 수 있는 대상은 영미권 영화감독들에 의한, 따라서 여전한 서구 중심의 해석보다는 영미권 외에서 제작된 작품들이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사실 영미권 외에서 생산된 셰익스피어 영화에는 감독 혹은 연출자의 문화적 특성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고, 이러한 (서구 관점에서 독특한) 시각이 전후의 현대적인 철학 및 문예 사조와 비평적 관점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동서 냉전시대를 거친 러시아의 코진체프와 일본의 구로사와가 당시 그러한 흐름의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코진체프는 자신의 영화 <리어왕>(King Lear) (1970)에 서사극적인 기법을 도입하여 절대 군주인 리어의 운명에서 낭만적 색채를 제거함으로써 러시아의 공산당 독재와 이에 저항하는 민중적 요소들을 부각시켰다(Brode 149). 구로사와는 초기작인 영화 <피의 권좌>(Throne of Blood)(1957)부터 <란>(Ran)(1985)에 이르기까지 셰익스피어의 비극들, 특히 <맥베스>와 <리어왕>을 중세 일본의 사무라이가 주인공인 시대극으로 각색하였고, 이 작품들은 셰익스피어의 극 언어, 즉 시를 대사가 아닌 영화 속 색채나 이미지, 그리고 음향으로 구현하여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Robinson 233). 이들처럼 지역색이 두드러지는 연출 방식은 한국의 상호텍스트적인 셰익스피어 공연을 중심으로 보다 자세하게 파악해 볼 것이다.

희곡에서 희곡으로 재생산된 <로젠크렌츠와 길덴스턴은 죽었다>와는 달리, 비교적 최근 상영된 영화 <오필리아>(2018)는 영화라는 예술 형식이 함유할 수 있는 상호텍스트적인 특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오필리아>는 세익스피어의 <햄릿>을 여주인공인 오필리아를 중심으로 개작한 클레인의 동명 소설을 세미 셀라스(Semi Chellas)가 다시 영화로 각색하고 클레어 맥카시(Claire McCarthy)가 연출한 작품이다. 희곡에서 소설로, 소설에서 다시 영화로의 장르적 전환은 기존의 예술 규약과 한계를 뛰어넘는 상호텍스트적 특성을 영화 작품 자체가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여성에 의한 다시쓰기와 여성에 의한 각색, 그리고 여성에의 연출은 현대의 여성주의적 시각을 반영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햄릿>에서 추구하는 커다란 주제, 즉 인간에 대한 탐구라는 기본 주제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 중심인물이 햄릿이 아닌 오필리아로 변환된 사실이 <오필리아>의 상호텍스트적인 성격을 확대, 강화하는 부분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오필리아라는 여성의 관점에서 재구성된 햄릿의 서사는 원작 <햄릿>이 간과했거나 혹은 (시대적 이유로) 미처 다루지 못했던 부분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Cantrell 참조). 이는 상호텍스트성이 동시대의 문화적 시류를 반영하는 공시적 특성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영화 <오필리아>에서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여성 주인공인 오필리아가 원작 <햄릿>의 남성 주인공 햄릿처럼 전체 서사의 주요 행동과 의미있는 발견과 선택, 그리고 결정을 함으로써 이야기를 이끄는 중심인물이 된다. 원작 <햄릿>에서의 순종적이고 순수한 오필리아와는 달리, 영화 속 오필리아는 말괄량이이고 이런저런 문제를 일으키는 집안의 골칫거리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녀는 원작의 햄릿처럼, 유령을 목격하고, 선왕 햄릿을 살해한 사람이 클로디어스임을 알아내며, 광증으로 가장하여 죽음의 위기를 벗어나고, 권력과 욕망이 뒤엉킨 왕실의 비극을 직접 부딪쳐 해결한다.

여성의 역할이 부각된 <오필리아>는 클로디어스의 선왕 살해와 왕권 찬탈, 햄릿의 복수등, <햄릿>의 주요 행동들을 <맥베스>의 마녀, <로미오와 줄리엣>의 가상 죽음 등의 모티프를 적절히 차용하는 상호텍스트적 재생산의 전형적 양상을 전개하는 것으로 오필리아의 서사를 <햄릿>과는 다르게 진행한다. 오필리아가 거투르드의 시녀가 된 후, 동료들에게 가문의 미천함으로 따돌림 당한다거나, 거투르드에게 비밀의 쌍둥이 자매가 있고 그녀가 클로디어스에게 버림받은 후 은둔 생활을 한다던가 하는 여성 중심의 에피소드와 극적 배경을 요소 요소에 부여하여 영화적 재미와 더불어 기존 가치관을 돌아보는 계기를 제시하기도 한다.

또한, 원작 <햄릿>의 주인공 햄릿은 복수에 얽매여 죽음을 맞이하고 새로운 질서는 타자의 것이 되지만, <오필리아>의 오필리아는 끝까지 살아남을 뿐만 아니라, 과거의 유산이자 새로운 희망의 상징인 햄릿의 ‘아이’(저자 강조)를 데리고 넓은 평원으로 외롭지만 당당하게 나아간다. 이 마지막 장면은 <햄릿>이 보여준 종말, 즉 모두 죽어 정복자에게 새로운 미래를 맡겨야 하는 운명과는 아주 대조적인 인상을 남긴다(Aloi 참조). 단순히 줄거리나 인물의 이름을 빌려오는 것이 아니라 원작의 장르를 바꾸고 그 전환된 장르의 특성을 활용한 창조적 변형을 통해 제시된 새로운 결말은 현대의 관객에게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선 감상과 인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2.4. 상호텍스트성과 한국적 재현: 연극<햄릿>

셰익스피어를 한국적으로 각색하는 데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양상은 굿이나 마당극, 혹은 전통 연희 형식을 도입하는 것이다. 이현우는 셰익스피어의 한국적 재현에는 두 가지 방식, 즉 ‘굿에 셰익스피어를 도입하거나 셰익스피어에 굿을 들여오는 방식이 있다’고 설명하면서 그 예로 오태석의 <템페스트>(2010)를 예로 든다(250). 그는 오태석이 ‘놀이적 굿판’을 도입하고 특히 원작에서 마법사인 프로스페로를 일종의 샤먼적인 인물로 각색한 것이 ‘매우 적절한 전략’이었다고 언급한다(이현우 “굿” 266, 인용부호는 연구자 강조)1),. 오태석이 연출한 이 작품의 2011년 영국 공연에 대해서 현지 공연 관계자는 ‘셰익스피어의 줄거리에 한국의 춤과 음악이 들어간 동서양의 최고의 융합(Billington 1)’이라고 평했고 이러한 평가는 현지의 긍정적인 여론으로 한국에 전해진 바 있다2). 물론 그 이전에도 한국에서 셰익스피어의 상호텍스트적인 전환은 폭넓게 존재해 왔었다. 특히 안민수는 <햄릿>을 <하멸 태자>(1976)로 각색, 공연하여 국내외에서 상당한 반향을 일으킨 바 있었다. 그가 각색한 작품에 부여한 한국적 색채, 즉 등장인물과 배경을 시대 미상의 한국의 어느 왕실의 상황으로 각색하고 대청마루 같은 형태의 널마루로 무대를 꾸며낸 방식은 당시 ‘번역극의 한국적 수용에 대한 좋은 도전(문화포털/예술지식백과/하멸태자)’으로 받아들여졌다. 이후 셰익스피어를 한국에서 재현하면서 굿과 같은 한국의 토속적 문화 장치를 도입하는 것은 거의 관례가 되다시피 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햄릿>은 한국의 역사(야사)적 맥락이나 전통적 가치관과 맞물리는 부분이 있어 가장 빈번하게 한국적으로 각색되어 왔다(이현우 “굿” 249-250 참조). 특히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셰익스피어 원작의 내용을 각색하고 공간을 한국적 조형으로 채우는 것을 넘어서 연기와 발성, 춤은 물론 무대 전반에 한국의 전통극 양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특히 이 무렵 이윤택의 <문제적 인간 연산>(1995)과 <햄릿> (1996-2005)은 단순한 원작의 각색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적 사실(혹은 가정)을 토대로 작품에 지역적인 특성, 즉 한국적인 색채를 부여한 작품으로 주목을 받았다.

상호텍스트라는 특성으로 볼 때, <연산>은 ‘인척에 의한 왕위 찬탈과 비극적 폐위’가 극의 중심 행동이고, 극 중 연산의 모습은 끊임없이 햄릿을 연상시키는 한편, 찬탈한 왕권을 지키지 못하고 몰락하는 데에서는 <맥베스>를 떠올리게 한다. 한국의 셰익스피어 학자들은 <연산>을 ‘한국판 <햄릿>’(김동욱 231)이라거나 ‘<햄릿>의 번안/각색극’(이현우 “소고” 89)이라고 평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셰익스피어 원작과의 연관성이나 연극적인 완성도와 관련해 보면 <연산>은 다음 작품인 <햄릿>의 사전작업 같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연산>에 드러난 연산의 광기어린 모습이 역사속의 연산을 구현했다기보다는 현대 연극의 한 흐름이었던 아르토의 ‘잔혹극’ 이론을 답습한 듯이 보인다거나(김미도 109), 관객에게 실제 접근하는 서사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등, 한편의 극 속에 여러 연출 기교들이 마치 종합세트처럼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작 <햄릿>을 염두에 두고 <연산>을 보면, 개막 부분에서 망령을 등장시키는 것이 <햄릿>의 유령 장면과 구별되는 면모를 보여준다. <햄릿>에 등장하는 유령은 선왕 햄릿으로서 햄릿의 각성과 내면의 갈등을 반영하는 존재이지만, <연산>에서 연산은 스스로 무당, 즉 삶과 죽음을 연계하는 존재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연산은 무당으로 제례와 굿판을 벌이면서도 인수대비와의 갈등이 고조되는 순간 (왕으로써) 인수대비를 처단한다. 이와 같이 <연산>은 셰익스피어가 그려낸 덴마크 왕실의 비극이라는 원작에 조선 왕실의 비극적 역사를 상호텍스트적으로 결합하였고, 재현에 있어서도 언어적인 장애를 해소하는 방식으로 서양의 연극 양식과 한국의 굿과 제례를 혼합하는 상호문화적인 시도를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문학과 역사, 그리고 영어권과 영어권 외 지역간의 상호텍스트적 전환을 파악해 볼 수 있는 작품인 <연산>은 영문학 고전을 토대로 하면서도 동시에 한국적 정서가 충분히 드러난, 고유한 융복합적 특성이 있는 상호텍스트로 자리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에 이어 연극 <햄릿>(1996)은 영문학 콘텐츠인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한국의 이야기로 각색됨이 없이 어떻게 한국적인 특성을 지닌 한국의 공연으로 재현되었는지를 적절하게 보여준다. 연극 <햄릿>은 산자와 죽은자, 혹은 이승과 저승을 소통하는 한국 전통 의식인 굿을 적절하게 활용한다. 원작과는 달리 성벽의 유령 장면으로 시작하고, 이어 상여를 이끄는 딸랑이 소리와 더불어 선왕 햄릿의 장례식이 잇달아 재현된다(2003년 국립극장 야외극장 공연 참조 https://www.lullu.net/19466). 장례식 직후 이어지는 결혼식은 요란한 서양 음악과 경쾌한 서양의 춤으로 장식된다. 이어지는 극의 진행도 역시 전형적인 서구 연극의 틀을 유지한다. 원작과 각색이 적절히 뒤섞인 가운데, 현실은 기존의 연기 양식으로, 그리고 현대 서양의 재즈와 팝등의 서양 악기음으로 장식되지만, 죽음과 영혼, 유령의 세계는 북과 징, 딸랑이 등 한국 전통 악기의 소리로 이어진다. 또한, 햄릿의 거짓 광증 등, 삶 속의 인물들은 원작에서 제시된 전형과 달라 보이지 않지만, 죽음의 재현은 굿이라는 한국적인 색채 속에서 행해진다.

햄릿이 선왕 살해의 전모를 알게 하는 장면은 마치 무당이 접신하듯이 재현되고 있고, 미친 오필리아 역시 무당처럼 행동한다. 선왕 햄릿을 살해한 증거를 찾기 위한 극중극 장면을 굿놀이로 재현하였으며, 극의 마지막 부분에서 햄릿과 레어티즈와의 결투 장면은 죽음을 예견하는 살풀이 굿처럼 진행되고 연이은 햄릿의 죽음은 그 굿을 통해 이 생의 한을 풀고 천상으로 올라가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 공연은 제작 단계에서 국내 대학의 영문학자를 드라마투르기로 영입하여 학술적 전문성을 꾀하였고, 이로써 “한국적이면서도 셰익스피어 원작의 전형성을 잃지 않은 공연”(Han 691)이라거나, “굿을 연극에 도입하여 한국의 민속극 전통의 재정립하고자 함과 동시에 그러한 한국연극을 세계화하고자 하는 시금석”(박정근 77)이라는 평을 받았다. 연극 <햄릿>에서의 한국 전래적인 전통인 굿을 활용하는 다양한 시도는 지역적인 특성을 원작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통찰과 결합한다는 의도로 읽힌 것이고, 그 결과 영미권 외에서 행해진 지역색이 강한 공연이면서도 셰익스피어 원작에 충실한 상호텍스트성의 면모를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

박정근은 햄릿의 죽음 장면을 “성공적인 살풀이”(82)로 평하였지만, 한국적 색채로 도입한 부분들이 연결되는 관계성, 즉 무당과 광기, 그리고 죽음과 살풀이 굿이 구경거리 이상의 극적인 의의를 내포하는 논리적 귀결인지는 밝혀지고 있지 않은 한계를 보여준다. 해당 공연을 강의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수차례 관람한 연구자는 서구적 연기 양식과 굿과 마당극 무대라는 이질적인 요소가 혼재하는 소위 ‘한국적’이라는 재현이 기름과 물처럼 겉도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더 나아가 이러한 공연이 세계적일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한다만 그 대답은 여전히 회의적이라고 생각한다. 셰익스피어 원작의 무대인 영미권에서 한국의 굿 문화에 대한 이해가 보편적으로 있을 것이라고는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고, 굿과 같은 지역성을 드러낸 상호텍스트적 재현과 전개가 (원작과 비교하여) 극적이고 논리적인 타당성을 담보하고 있는지는 해당 지역의 독자/관객으로서는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기 때문이다.

역사와 지역을 초월하는 서양 고전이라는 원작과 그러한 원작의 지역적인 재현이라는 상호텍스트성의 가장 확장된 영역이 초래할 수 있는 함정은 그러한 상호텍스트성을 수용한 작가가 지역적 특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도 이를 자기 정체성으로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쓰거나 표절에 가까운 차용에 대한 변명으로 사용할 여지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어떤 재현 방식이 특정 문화권의 고유한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은 공개된 최초의 시점에서는, 예를 들면 서양에서는 특이한 동양적인 것으로 관심을 끌고, 반대로 영어권 외의 지역에서는 서구적인 것의 토착화라는 시각에서 관심과 찬사를 이끌어 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러한 관심과 호응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상호텍스트적 재현이 단순히 지역적 특색을 드러내기보다는 원작, 즉 셰익스피어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연구가 전제가 되거나 최소한 동반되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한국적인 재현이 일시적인 호기심의 대상이 아닌, 지속적인 찬사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원작과의 상호텍스트적인 특성이 지역색에 가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역적인 특성을 가미됨으로써 원작이 지닌 역사성과 문화적 가치가 강화되는 결과를 낳아야 할 것이다.

고전에 대한 이해와 이를 토대로 현대를 읽는 문해력이 고전의 상호텍스트적 재생산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이는 비단 한국적인 재현만의 문제가 아닌, 영화로 재현된 혹은 문학 텍스트로 재생산된 모든 상호텍스트적인 다시쓰기가 살아남기 위해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셰익스피어는 더이상 영국이라는 특정 지역의 특산품이 아니라 세계적인 문화 현상의 하나이고, ‘한류’라는 문화 콘텐츠 역시 새로운 세계 문화의 흐름 중 하나로 자리하기 시작하고 있으므로, 셰익스피어의 한국적 재현은 머지않아 한국이라는 지역성을 극복하고 영미권 사회에 새로운 셰익스피어를 소개하는 상호문화성의 실례로 자리하는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3. 결론

영문학 고전인 셰익스피어는 수 백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시대와 언어를 뛰어넘은 문학의 아이콘이자 장르를 초월한 문화 콘텐츠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영미권은 물론 전세계에서 교육 콘텐츠로서도 오락물로서도 매우 빈번하게 소비되고 있는데, 이러한 소비는 셰익스피어의 상호텍스트적인 다시쓰기 혹은 재생산을 통해 동시대적인 현대성으로 셰익스피어를 구현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현대적 전환이 상호텍스트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되고 있는 것이다.

상호텍스트성은 크리스테바와 컬러에 의해 정착한 문예 비평 용어이다. 언어의 발화, 즉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들과 통시적, 수평적 영향을 주고 받음은 물론 이전의 텍스트들과 공시적 수직적 특성을 필연적으로 공유하는 부분을 지닌다. 이렇게 공유되는 부분 혹은 특성을 상호텍스트성이라고 개념으로 파악한다. 그러므로 현재의 다양한 디지털 문화 양상을 이해하기 위한 토대로써도 고전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일 수 밖에 없다.

상호텍스트성은 고전 문학 작품과 현대의 문예와 문화를 이을 수 있는 이론적 고리라고 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한 재생산을 검토하는 것은 글로벌 시대에 적합한 인문적 교양을 연마하는 교육 콘텐츠로 셰익스피어를 인용하는 데에 적합한 접근이다. 셰익스피어는 영어권 문학의 고전이면서 동시에 현대의 지역과 언어를 뛰어넘는 글로벌한 인문 콘텐츠로서의 의의를 구현하고 있으며, 문학과 영화, 연극과 광고등에서 활발히 소비되고 있는 세계 공통의 고전이므로 셰익스피어의 상호텍스트적 재생산이 현대의 융복합적인 요구를 적절하게 충족시키는 문화 현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에서 대중에게 익숙한 <햄릿>을 중심으로 상호텍스트적인 문학 텍스트로의 재생산과 더불어 연극 혹은 영화로 재현된 양상을 검토해 보았다. 문학텍스트로 다시 쓰여진 <로젠크렌츠와 길덴스턴은 죽었다>는 작품 제목으로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상기시키면서도 이와 동시에 원작과의 차별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다시쓰기의 전형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햄릿>을 각색한 소설/영화 <오필리아>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여성인 오필리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시각으로 전개한다. 상호텍스트적 공연은 한국의 <햄릿>을 중심으로 검토하였는데 셰익스피어의 한국적 재현은 지역의 문화적 특성이 가미되어 원작의 익숙함을 벗어나서 새로운 작품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상호텍스트적 재현들이든, 즉 어떠한 방식으로 재생산되든지 재현은 궁극적으로 ‘의미 있는 행동의 재현’이라는 문학의 가치를 고려하게 되므로 다시 ‘의미’의 근원인 원전으로 회귀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디지털 시대에 풍요롭게 재현되고 있는 영문학 고전인 셰익스피어의 다양한 상호텍스트적 재생산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변형할 수 없는 항구적인 컨텐츠, 즉 셰익스피어 텍스트로 회귀해야 하는 전제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인문학 고전에 대한 선행 (혹은 후행) 읽기가 현대에도 필수인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셰익스피어 원작의 상호텍스트적인 시도들이 융복합적인 문화의 시류를 타고 지역과 세계에서 동시에 주목을 받을 수 있는 글로벌 문화 콘텐츠 중의 하나로 자리하게 하고 있으므로 상호텍스트성을 이해하고 나아가 고전과 현대를 상호텍스트성으로 연계하는 것은 현대의 독자/사용자들에게 문화 해독의 지름길을 제공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만일 현대의 독자들이 상호텍스트성을 통해 먼저 접한 익숙한 매체로 고전에 대한 문해력을 키워낼 수 있다면, 디지털 시대의 독서/읽기를 보다 편안하게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를 통해 이러한 상호텍스트적 전환과 재생산의 양상을 익숙한 이름인 셰익스피어를 중심으로 논리적으로 정리하고, 이를 디지털 문화에 익숙한 현재 세대를 위한 교양교육 콘텐츠로 활용하는 것은 시의적절하다 할 것이다.

결론으로 말하자면, 현재와 같이 다양한 상호텍스트적인 재현이 넘쳐나는 글로벌, 혹은 디지털 시대에 독자/학습자에게 필요한 핵심 능력은 그러한 재현 혹은 재생산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스스로 상호텍스트적으로 재생산할 수도 있는 지적 배경으로서의 원작 읽기, 즉 고전에 대한 문해력이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독자/학습자는 다양한 재생산 작품을 통해 원전인 고전을 접함으로써 문화적 감수성은 물론 고전에 대한 독해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독자/학습자는 그러한 문해력을 토대로 고전이 주는 의의와 가치를 성찰함으로써 동시대에 구현된 상호텍스트적 재생산이 내포하고 있는 철학적 사유와 사회적 의의를 이해하는 비판적 문해력을 키우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현재의 인문교양교육이 지향해야 할 목표 중 하나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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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1)

프로스페로를 샤먼적인 존재로 보는 해석은 이미 1970년대에 전개되었고, 따라서 이를 연출자가 인지했는가와는 별개로 연출가만의 특유한 전략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2)

하지만 동일한 평론가가 이 공연을 문화적 상호 교류가 낳은 “잡종(hybrid)(Billington 1)”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고, 이는 영국의 정통극이 아닌 외부의 다문화 특성이 드러난 텍스트/공연에 대해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함축하는 언술로 해석할 여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바로 이러한 측면이 영미권외에서의 상호텍스트적 재생산의 정체성 문제를 야기한다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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