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법적 지식’으로서의 역량과 OECD 역량기반 교육론의 자기모순 -라일, 오크쇼트, 폴라니의 논의에 기반하여

Competencies as ‘Know-how’ and Self-contradiction of Competency-Based Education Theory -Based on the Discussions of Ryle, Oakeshott, and Polyani

Article information

Korean J General Edu. 2022;16(6):103-118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2 December 31
doi : https://doi.org/10.46392/kjge.2022.16.6.103
장제형
인천대학교 부교수, jhychang@inu.ac.kr
Associate Professor, Incheon National University
Received 2022 November 20; Revised 2022 December 03; Accepted 2022 December 12.

Abstract

OECD DeSeCo와 그 후속 프로젝트인 OECD 교육 2030을 통해 제출된 (핵심)역량기반 교육론은 전통적으로 강조되어왔던 이론적 지식의 함양을 넘어, 실천적 지식에 대해서도 적절한 주목을 가하자는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역량기반 교육론의 지식론 및 인식론의 주요한 이론적 원천으로는 분석철학자 길버트 라일의 명제적 지식과 방법적 지식의 구분, 정치학자 마이클 오크쇼트의 기술적 합리주의 비판 및 신념정치와 의심정치의 구분, 그리고 물리화학자이자 과학사, 과학철학자인 마이클 폴라니의 암묵적 지식과 개인적 지식 개념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OECD 역량교육론이 애초에 의도했던 바와 그 실현 사이의 괴리는 일단 OECD 프로젝트의 강령 자체 속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역량교육론을 한국 고등교육 체제 속으로 도입, 적용하는 과정과 모습 속에서 더욱 심각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난맥상은 특정 교육 담론을 국가에 의해 강제적으로 도입하고 적용하는 조처를 철폐하고, 역량교육론을 개별 교육 단위에서의 숙고를 통한 자유로운 선택의 주제로 삼음으로써 해소된다.

Trans Abstract

The (core) competency-based education theory presented through the OECD’s DeSeCo project and its follow-up project (OECD Education 2030), stems from the motivation to pay appropriate attention to practical knowledge beyond cultivating theoretical knowledge that has been traditionally emphasized. The main theoretical sources constituting the epistemology of competency-based education theory can be presented as follows: analytical philosopher Gilbert Ryle’s distinction between ‘know-how’ and ‘know-that’, political scientist Michael Oakshott’s criticism of technological rationalism and his distinction between the politics of faith and that of skepticism, and physical chemist, historian of science, and philosopher of science Michael Polanyi’s concepts of tacit knowledge and personal knowledge. However, discrepancy between what the OECD’s competency-based education theory originally intended and its actual realization is first found in the program of the OECD projects itself; and this problem is much more seriously revealed in the process and appearance of introducing and applying competency-based education theory into the Korean higher education system. This self-contradiction that ‘betrays’ the original theoretical request of competency-based education theory is identified in the following areas: the OECD projects’ reduction of competences as ‘know-how’ to the form of propositional knowledge, in the situation in Korea, in the state’s status that claims to be a rule maker, in the future discourse based on simple logic of technological determinism, and in the making of propositions and the quantification of competencies. Such problems are resolved by abolishing measures of forcibly introducing and applying a specific educational discourse by the state, and making the competency-based education theory a subject of free choice through deliberation at individual educational units.

1. 들어가며

현재 핵심역량 교육론은 초중등 교육에서 고등교육에 이르기까지 한국 교육의 대세가 되었다. 그러나 특히 고등교육의 영역에서 이 대세의 흐름이 교육의 핵심축을 이루고 있는 교수자들의 내재적 요구에 기반한 광범위한 동의로부터 비롯되었는지 여부와 관련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상당하다. 핵심역량 교육론의 문제에 대한 비판은 그간 꾸준히 제기되어왔음에도 불구하고(유성상 외, 2015; 박휴용, 2015; 김민정, 2019; 서경혜, 2020; 정훈, 2021; 최석민, 2021; 서정일, 2021; 손종현, 2022; 김혜나, 2022), 이제 역량교육론은 전국 대학 교수자들이 거부할 수 없는 모두의 일반적인 문제가 되어버렸다. 이는 대학기본역량진단에 핵심역량 기반교육 구축 항목이 포함된 점과 긴밀히 관련된다. 이는 2018년의 진단에서 교양교육 분야에서 5점 배점으로 반영된 것을 필두로, 2021년의 진단에서 교양교육에는 “핵심역량 제고”로, 전공 영역에는 “전공능력 제고”로 각각 7점 배점으로 확대 반영된다. 총 52개교의 대학이 탈락한 2021년 평가의 결과로 탈락 대학의 총장들이 줄사퇴하고 이 대학들이 행정소송과 헌법소원을 제기하겠다고 밝히는 등 광범위한 후폭풍이 인 것을 감안하면, 높은 배점이 할애된 평가 지표상의 요구를 무시한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역량교육론의 도입 과정과 관련해 확인되는 점은 교육 행정 단위로서의 국가와 교육 실행의 주체로서 대학 간의 현저한 비대칭 관계이다. 여기에서 국가는 교육체계 재편을 위한 규칙 제정자로서 역할을 담당하고, 모든 대학의 교육과정은 이러한 사전에 부여된 규칙에 의해 전체적으로 규정되어야 하는 대상이 된다. 국가와 대학 간에 성립된 이러한 관계는 대학 내 다양한 전공 및 교양 교과 과정의 전반적인 체계 속으로 그대로 반영되어 이식된다. 그렇기에 핵심역량 교육체계가 여러 대학에서 수립되는 과정과 그 모습은 대동소이할 수밖에 없다. (1) 먼저 모든 교과를 포괄하는 대학 차원의 핵심역량이 선정된다. 이는 대학 내 TF 내부 논의를 통해 이루어지기도 하고, 혹은 델파이 조사를 통한 ‘여론 수렴’의 차원에서 행해지기도 한다. (2) 이를 통해 대개 5-6개 정도의 핵심역량이 간추려지면, 이를 각 교과목과 연결시키는 맵핑 작업이 이어진다. 가령 해당 대학의 핵심역량이 의사소통능력, 창의적사고능력, 문제해결능력, 대인협업능력 등이라고 한다면, <교육학개론> 교과목에서 의사소통능력은 3점, 창의적사고능력은 5점, 문제해결능력은 4점, 대인협업능력은 2점에 해당하는 ‘역량’을 키울 수 있다는 식이다.

역량은 이처럼 교과목 별로 맵핑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개별 학생 자신에 대해서도 측정되고 검증될 수 있다. 말하자면 어느 학생이 스스로 핵심역량을 얼마만큼 갖추었는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할 경우, 20-30개에 달하는 설문지 형식의 검사를 통해 자신의 역량 지수를 ‘진단’할 수 있다. 가령 이 학생이 자신의 의사소통역량 정도를 알고자 한다면, 그에 해당하는 “나는 나의 생각을 명확하게 전달한다”, “나는 상대방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다” 등의 몇몇 문항에 대해 “전혀 그렇지 않다”부터 “매우 그렇다”에 이르는 5개 척도 중 해당하는 곳을 클릭하면 된다. 이렇게 산정된 각각의 문항 점수를 합산함으로써 나는 내가 현재 갖춘 핵심역량 지수를 ‘스스로’ 진단할 수 있게 된다.

획일적 요구는 획일적 결과를 낳는다. 한국 고등교육 기관에서 핵심역량 기반교육의 적용은 대개 위와 같은 모습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면 큰 무리가 없다. 한국 대학에 도입된 역량교육론은 이미 잘 알려져 있듯 1997-2003년 사이에 진행된 OECD 1차 프로젝트 “핵심역량의 정의와 선택(Definition and Selection of Key Competencies)” (이하 ‘DeSeCo’)를 그 주요 출처로 삼고 있다. 이 도입 과정은 OECD 교육 거버넌스가 지닌 권위와 영향력과 같은 외부 정당성에 대해 보여주는 매우 높은 수용과 동의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성열관, 2014). 2015년에 시작되어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후속 프로젝트인 “OECD 교육과 기량의 미래 2030(OECD Future of Education and Skills 2030)”(이하 ‘교육 2030’)에서는 이전과는 달리 수용과 동의의 차원을 넘어 국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가령 현행 교육 2030의 중간보고서 격인 『개념 노트(Concept Notes)』의 말미에 수록된 「OECD 학습 컴퍼스 2030 기여자 목록」을 보면, 주OECD 대표부 공사, 특명전권 대사, 참사관 등 대표급을 위시하여 국책기관인 한국교육개발원과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연구원들 다수가 기여자로 등재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OECD, 2019: 133-149). 그런데 역량교육론을 적극적으로 소개, 도입하는 수준을 넘어 이제 그 이론적 정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한국이지만, 그 고등교육 현장의 상황을 정작 일별하면 위와 같은 역량교육론의 적용 모습이 과연 그 실질적인 출처인 OECD 역량교육론 본연의 취지와 의도를 제대로 현실화시키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감추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OECD 핵심역량 교육론 자체와 더불어, 이의 성립을 가능케 했던 이론적 배경까지 함께 검토하는 포괄적인 작업이 요구된다. 역량교육론의 기본 취지는 그간의 전통적인 지식 중심 교과 교육의 모습을 탈피하고, 기존의 이론적, 명제적 지식(know-that)을 넘어서고 보완하는 실천적, 방법적 지식(know-how)에 대해서도 주목을 가하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동원되었던 중요한 이론적 출처는 철학과 인식론, 과학사와 과학이론, 정치학 등 다양한 영역에 걸친다. 그러나 문제는 OECD에서 역량교육론을 제시하는 방식뿐 아니라, 한국에서 역량교육론의 도입과 적용 과정 또한 이 역량교육론이 극복하고자 한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으로써 현 역량교육론은 그 강령의 제시와 실행 양자에 걸쳐 자신의 주요한 출처를 ‘배반’하는 자기 모순적 형태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OECD 역량교육론의 주요한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는 이들의 논의에 기반하여(2장), 한 편으로는 OECD 프로젝트에서 역량을 이해하고 제시하는 방식(역량의 명제화)에 대해, 다른 한 편으로 한국 고등교육 기관에 도입, 적용된 역량교육 체계의 현 모습(국가적 강제, 미래 담론, 역량의 명제화 및 계량화)에 대해 비판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3장).

2. OECD 역량교육론의 지식 이론적 기반: 라일, 오크쇼트, 폴라니

앞서 언급했듯, 현 한국 대학에 도입, 적용된 핵심역량 교육론의 직접적인 출처를 이루는 것은 바로 OECD DeSeCo와 그 후속편인 교육 2030 프로젝트이다. 선행 DeSeCo 핵심역량 교육론의 국내 도입은 관련 연구자들과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주도하에 적극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2015년 초⋅중등 영역의 개정 교과 교육과정과 2018년 고등교육에서의 대학기본역량진단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OECD 역량교육론의 본연적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한 편으로 무엇보다 OECD 차원에서 발간된 공식 문헌들 속에서 정식화된 역량교육론의 모습 그 자체에 대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역량교육론을 가능케 한 이론적 출처들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필요하다. 전자의 경우 대상이 되는 것은 DeSeCo 프로젝트 기간 중 행해졌던 1999년 1차 심포지엄(Rychen & Salganik, 2001)과 2001년 2차 심포지엄의 발표문(Rychen, Salganik & McLaughlin, 2003)과 더불어 이를 결산한 최종보고서(Rychen & Salganik, 2003), 그리고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교육 2030의 핵심 구상을 소개하고 있는 일련의 개념 노트(OECD, 2019)이다. 후자에 해당하는 작업은 선행 및 후속 프로젝트 양자에 걸쳐 역량교육론을 정립하는 데에 기반이 되었던 주요한 이론에 대한 검토 및 재구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양 프로젝트의 문헌들 속에서 제시되고 있듯, 역량교육론에서의 앎과 지식의 위상 및 인식론의 정립을 위한 주요한 출처로는 길버트 라일의 명제적 지식과 방법적 지식의 구분, 마이클 오크쇼트의 합리주의 사유와 정치에 대한 비판, 그리고 마이클 폴라니의 암묵지(tacit knowledge)와 개인적 지식 개념 등을 꼽을 수 있다(Canto-Sperber & Dupuy, 2001: 69-70, 80-81; Kegan, 2001: 192; Delors & Draxler, 2001: 218; Gonczi, 2003: 121-25; OECD, 2019: 79). 고전 문헌학자이면서 동시에 분석철학의 전통에 속해있는 옥스퍼드의 철학자 라일, 또한 옥스퍼드에서 수학하고 페이비언 사회주의자 헤럴드 라스키의 후임으로 런던정경대(LSE) 교수직을 역임한 보수주의자 오크쇼트, 그리고 헝가리 유대인 출신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의 독일에서 연구하며 물리화학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겼으나 히틀러 집권 이후 영국으로 이주하고 전공을 바꿔 제반 과학철학적 쟁점과 씨름한 폴라니는 모두 철두철미한 유럽 자유주의 전통의 흐름을 계승하고 있는 동시대인들로서, 보편적 규범과 미래의 목적을 앞세우는 경향에 반발하여 개별적 행위와 현재적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모두 동시대인들이었던 이들은 서로의 학술적 성취를 인지하고 존경했지만, 활발한 상호 지적 교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들의 사유는 전체주의에 대항해서 승리했던 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주의의 일정한 흐름을 공통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이 장에서는 OECD 역량교육론의 지식론과 인식론을 정립하기 위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던 라일, 폴라니, 오크쇼트 사유의 핵심을 역량교육론의 인식론적 요지를 분명히 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한도에서 정리, 재구성한다.

2.1. 라일의 명제적 지식과 방법적 지식

옥스퍼드의 분석철학자 라일로부터 유래한 명제적 지식과 방법적 지식이라는 유명한 구분은 서구 근대 철학사의 한 흐름을 지배했던 데카르트적 합리주의에 대한 비판에 그 동기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라일에게 극복 대상은 연장적 속성(res extensa)을 지니는 공간과 인식적 속성(res cogitans)을 지니는 정신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는 데카르트적 이원론이 된다. 이러한 이원론은 바로 근대 주체 중심주의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코기토(Cogito), 즉 모든 확실한 앎의 근거인 생각하는 나, 자아의 정립에 기원을 두고 있다. 데카르트에게 확실한 앎이란 모든 불확실성에 대한 회의로부터 출발한다. 방법론적 회의라고 불리는 이 방법은 무엇보다 모든 것을 회의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그 결과 남는 것을 바로 확실한 앎의 근거로 삼고자 하는 시도이다. 의심과 회의를 통해 모든 것이 그 불확실성으로 말미암아 배제되더라도, 끝까지 남는 것은 바로 이 회의를 하는 주체, 바로 회의하는 나의 존재이다. 그렇다면 모든 철저한 회의 끝에 남는 회의하는 주체로서 나의 존재야말로 확실한 앎을 위한 근거가 된다. 모든 앎의 근거를 바로 생각하는 나의 확실성에서 찾는 이러한 사유 구도를 통해 주체는 세계 인식을 위한 출발점이자 토대로서 확고한 위치를 점한다. 그러나 앎의 확고한 근거를 사유 주체 안에 정초하고자 하는 이러한 시도는 또한 그 대가를 치루게 마련이다. 한 중심의 설정은 동시에 그로부터 배제되는 대상화를 동반하며, 사유의 중심으로서 주체의 상정은 동시에 그 사유 대상과의 구분을 필연적으로 함축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체 대 객체의 구분이 이에 상응하는 정신-물질, 영혼-육체, 자발성-수동성, 보편적 사유-개별적 대상, 내면-외부 등 일련의 이원론적 구도를 산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이에 따라 물질, 육체, 사물 등의 외적 대상 세계는 확실한 앎을 추구하는 보편적 주체에 의해 규정되고 포섭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다시 말해, 앎이란 대상에 선행하여 주어져 있는 인식 주체의 사유가 대상을 포섭하는 작용에 의해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이러한 주체 중심적 이원론적 구도는 물론 데카르트에 의해 처음 생겨난 것은 아니다. 라일은 이를 고대 그리스의 영혼불멸설에서부터 시작해서 중세의 의지론, 양심우선설, 의식우선설 등을 제시하고 있다(Ryle, 1984, 이한우 역, 1994: 29). 이러한 철학사, 종교사, 사상사적 배경과 흐름은 근대에 접어들어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비롯하여, 계몽주의에서는 대상의 인식을 가능케 하는 조건으로서 주체의 초월성을 내세운 칸트를 지나, 자기의식의 운동과 발전의 최종 귀결점으로서 프로이센 국가를 상정한 헤겔의 관념론에게서 절정에 이르게 된다. 라일이 문제 삼고 있는 주요 대상은 ‘데카르트의 신화’이지만, 기실 그의 비판의 표적이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서구의 관념론 철학 일반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명제적 지식이라고 칭하는 것은 바로 앎의 근거로서 구체적 대상 세계에 선행하여 그 대상에 대한 앎을 가능케 만드는 조건이라고 상정되었던 초월적, 보편적, 추상적 차원 일반을 일컫는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가 “기계 속의 유령에 관한 도그마”(ibid., 19)나 “주지주의적 전설”(ibid., 39)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바의 핵심 형태는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과 명제론에까지 소급할 수 있는 참과 거짓을 판별할 수 있는 진술로서의 명제이다: “문장이 모두 명제를 나타내지는 않고, 참이나 거짓이 들어 있는 문장만이 명제를 나타낸다”(Aristoteles, 김진성 역: 17a 2-3).1) 여기에서 이 명제는 ‘S(주어)는 P(술어)이다(계사)’를 기본 형식으로 갖는다. 가령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라는 명제는 주어 ‘소크라테스’를 사람이라는 유개념(genus)의 범주에 바로 ‘~이다(is)’라는 계사(copula)를 통해 연결함으로써 성립하게 된다. 여기에서 소크라테스라는 개별자가 사람이라는 범주에 포섭되면 이 명제는 참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거짓 명제가 된다.

그러나 인간의 앎이 모두 남김없이 이러한 명제의 형태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라일이 주장하는 이러한 명제의 형태를 갖춘 지식과 구분되는 방법적 지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명제와는 다른 형태의 진술인가? 방법적 지식의 속성상, 이를 명제 형식으로 완전히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라일이 양 지식 간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사례를 즐겨 들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폴라니가 적시하듯, 방법적 지식의 전형으로서 기량(skill)은 책이나 처방으로 언표화되어 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본보기(example), 즉 사례를 통해 장인에게서 도제에게 습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Polanyi, 1958, 표재명 외 역, 2001: 92).

그러므로 방법적 지식에 대한 라일의 설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의와 같은 명제의 형식이 아니라, 바로 그가 들고 있는 그 지식의 사례들을 통해 파악하는 것이 효과적이며 타당하다. 라일의 방법적 지식에 관한 최근의 연구에서는 그의 전 저작에 걸쳐 들고 있는 방법적 지식의 사례로 35가지를 들고 있다(Löwenstein, 2017: 9). 다양한 종류에 걸친 이러한 방법적 지식이 발현되는 형태나 사례를 느슨한 차원의 공통분모로 묶어 제시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체스 경기나 카드 게임과 같은 놀이, (2) 등산, 권투, 수영 등의 운동, (3) 요리, 운전, 낚시, 나뭇가지 치기 등 일상 활동이나 취미 생활, (4) 계산하기와 같은 기본적인 학습부터 과학이나 철학 등에 이르는 학문 활동, (5) 조각하기, 연기하기, 광대짓하기 등의 기예/예술 활동, (6) 언어 배우기부터 시작해 시 쓰기 등 문학적 스타일의 글쓰기, 농담하기 등을 거쳐 추론, 논쟁에 이르는 다양한 언어 행위, (8) 의사의 수술, 법률가의 판결, 군인의 전투 수행, 사업하기 등 전문적 직업 활동, (9) 장례식장에서 올바로 처신하기에서 윤리적으로 행동하기에 이르는 행위 양식, (10) 그 외 매듭짓기, 지도 읽기, 옷 디자인하기 등의 활동 등.

이러한 활동의 사례들은 너무 다양해서 방법적, 실천적 지식과 결부된 행위라는 하나의 공통분모로 포괄하는 데에 일견 무리가 따르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모두 각자 자기 자신의 규칙이 존재하되, 동시에 이들 활동은 규칙으로 모두 환원되지 않는 고유한 독자성을 지니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므로 이들 독자적인 행위가 규칙을 넘어서는 영역에 있다고 여기면 곤란하다. 호이징하는 그의 주저 『호모 루덴스』에서 놀이의 참여자들은 놀이 사기꾼보다 놀이 파괴자에게 더 엄격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기꾼은 적어도 놀이를 하는 척이라도 하면서 놀이를 유지하지만, 파괴자는 놀이를 아예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Huizinga, 1955, 김윤수 역, 1981: 24). 그 정도로 게임의 규칙이 엄정하게 유지된다는 점은 명백하지만, 동시에 게임의 ‘재미’는 사전에 정해진 규칙으로 모두 환원될 수 없다. 왜냐하면 바로 그 규칙을 매번 다르게 ‘적용’하고 실현하는 개개의 활동 속에서 바로 게임의 ‘삶’을 지속하게끔 만드는 내적 추동력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즉, 이론과 실천, 혹은 더 정확히는 이론적 지식과 실천적 지식은 밀접히 관련되면서도 또한 상호 포섭 관계로 연결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른 것이다. 규칙의 엄정성과 행위의 자유로움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데카르트적 코기토의 행위는 선행하는 이론에 의해 계획되고 예비되는 것이어야만 비로소 성공적인 것이 되겠지만, 반대로 실천적 지식의 차원에서 행위란 이론을 규준으로 삼아 출발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넘어서 새로운 규칙을 창출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칸트의 천재 개념은 초합리적 능력에 대한 인증이 아니라, 기존 규범을 넘어서 새로운 규범을 창출하는 창조성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칸트의 표현을 빌자면, 전자가 보편성 아래 개별성을 포섭하는 반면(규정적 판단), 후자의 경우에는 개별성 안에서 보편성을 매 순간 새롭게 변주하며 발견해 나가는 것이다(반성적 판단).

이렇게 본다면, 가령 마라톤 완주가 ‘달리기 주법’ 교과서를 통달한다고 가능한 것도 아니며, 좋은 요리책이 맛있는 요리를 보장할 수 없는 노릇이라는 것은 자명하게 된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가 재벌은 아니며 정치학 교수가 대통령이 아니듯, 클라우제비츠와 이순신은 같으면서도 또한 완전히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판사를 인공지능으로 대체하는 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기실 법률 조문이라는 ‘알고리즘’과 이를 구체적인 개별 사례와 연결시키는 ‘판결/판단(judgement)’ 행위가 기실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전문의가 되기 위한 과정이 예과와 본과 6년으로 끝나지 않고, 거기에 인턴과 레지던트 5년의 추가적인 수련 과정이 포함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표절에 대한 제제 또한 바로 한정된 어휘와 정해진 문법 규칙의 사용, 즉 수행이 기실 무한한 사례를 만들어낸다는 인간 창의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 성립이 가능케 된다. 그러므로 무엇을 안다는 것은 해당 규칙을 바로 행위 안에서 “수행(perform)할 줄 안다는 것”이며 이를 “수행(performance) 속에서 실현”(Ryle, 1945-46: 7)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수행적 실천으로 현실화되지 않을 경우, 그 앎이란 그저 규칙을 ‘인용’하는 데 불과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종류의 지식과 행위 양태는 단지 흥미로운 사례 제시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라일보다 한참 이전인 고대 철학과 수사학에서부터 시작해 근대 학문의 다양한 흐름 안에서도 이미 집중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주제이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자기목적적이고 자기완결적인 현재적 행위로서의 ‘에네르게이아(energeia)’와 그 완결된 상태를 지칭하는 ‘엔텔레케이아(entelecheia)’, 롱기누스의 숭고론에서 생생한 재현을 의미하는 ‘에나르게이아(enargeia)’ 개념은 바로 보편적 규범으로 환원될 수 없는 개별 행위가 담지하는 생동하는 현재적 차원을 지칭하는 용어들이다. 그러므로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언어 체계로서 랑그(langue)와 개별적 발화로서 빠롤(parole)의 기본적인 구분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며, 탈구조주의와 해체론자들이 바로 이 언어의 개별적 발화가 지니는 차원에 주목하게 된 것은 - 물론 이들은 의미의 현존이 아닌, 차이 산출과 의미 지연적 차원에 주목했지만 - 자연스런 수순이라 할 것이다.2)

그러므로 사상사의 전반적 흐름을 일별할 때 명제적 지식과 아울러 실천적 지식에 상응하는 영역 또한 그에 병행하여 지속되어 왔다는 점이 확인된다. 무엇보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의 사상사는 바로 이러한 이론적, 명제적 차원이 지식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자각하면서, 이와는 구분되는 실천적 지식의 고유성과 독자성에 대해 주목하고 이를 발전시킨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실천적 지식이란 이에 대한 이론적, 명제적 설명이 실상 별반 필요 없는 군더더기가 될 정도로 우리는 이를 이미 부지불식간에 ‘알고’ 있으면서 이제까지 일상생활 안에서 자연스레 통달하며 실행하고 있는 차원인 것이다.

2.2. 오크쇼트의 기술적 합리주의 비판

OECD 역량교육론의 문헌과 논의 맥락 속에서 영국의 정치철학자 오크쇼트는 라일과 폴라니와는 달리 중심적인 지위를 차지하기보다는 명제적 지식과 방법적 지식이 거론될 때 잠시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Canto-Sperber & Dupuy, 2001: 70). 그러나 동시대인으로서 이들의 중심 입장을 공유하면서 이를 정치철학의 틀 안에서 전개, 심화시키고 있는 오크쇼트의 논의를 소개하는 것은 역량교육론의 방법적 지식과 관련한 이론적 배경에 대한 명쾌한 정리를 위해 유용한 작업이 될 것이다.

라일의 주저 『마음의 개념』에 대해 호의적인 서평(Oakeshott, 2007)을 쓴 바 있는 오크쇼트는 라일의 명제적-방법적 지식의 구분을 자신의 정치철학의 틀에 적용한다. 이는 그가 ‘정치에서의 합리주의’와 이를 가능케 하는 배경이 되었던 합리주의 철학 일반을 비판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요긴한 이론적 자원이 된다. 오크쇼트에게 비판의 주된 표적이 되는 합리주의 철학이 라일의 명제적 지식에 해당한다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합리주의를 구성하는 핵심으로써 이러한 명제적 지식은 오크쇼트에게 “기술적 지식(technical knowledge)” 혹은 “기술의 지식(knowledge of technique)”(Oakeshott, 1961: 7)에 상응하는데, 이는 “선험적 논증”(ibid., 2)에 기반하여 “규칙, 원리, 방향, 준칙(maxim) 안의 정식화”와 친화성을 지니는 “책 속의 지식, 즉 언명으로 명료하게 정식화시킬 수 있고 언표화할 수 있는 지식”(ibid., 14)에 속한다.

반면 이와는 다른 지식의 종류, 즉 그가 “실천적 지식”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방법적 지식은 규칙으로 정식화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라일이 그러했던 것처럼 오크쇼트 또한 “순수 예술, 회화, 음악, 문화”(ibid., 8) 등에서 통용되는 다른 종류의 지식을 설명하기 위해 요리, 의학, 산업 경영, 외교, 군대 지휘, 피아니스트, 체스 선수, 과학자 등 다양한 영역과 이를 수행하는 사람들의 사례를 제시한다. 그러므로 그가 예로 들고 있듯, 성경 말씀에 대한 지식이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이루는 지식의 총체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영성’과 ‘양심’에 의거한 신과의 직접적인 내면적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듯, 실천적 지식은 책으로 배울 수 있는 지식이 아니라 “오로지 이를 습득하기 위해 끝없이 실천하는 사람과의 계속된 접촉을 통해서만이 습득될 수 있다”(ibid., 11). (문자 매체학에서 흔히 인용되는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라는 고린도후서 3장 6절의 구절은 바로 양 지식의 구분에 대한 오래된 판본이라 칭하기에 충분하다.)

라일의 명제적 지식과 방법적 지식에 상응하는 내용을 오크쇼트가 ‘기술적’ 지식과 ‘실천적’ 지식이라는 좀더 사전적인 뜻을 지시하는 말로 지칭하고 있는 데에서 이 구분이 ‘테크네(technē)’와 ‘프락시스(praxis)’라는 인간 행위에 대한 고대 그리스적 분류에 출처를 두고 있다는 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전자는 물질적, 가시적 산물을 산출하기 위한 행위로서의 ‘포이에시스(poiesis)’와 밀접하게 관련되며, 이는 특정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제반 자원을 수단으로 삼아 효과적으로 투여, 배치하는 전략적 사고와 연관된다. 이에 대한 현대적 판본은 막스 베버의 “목적합리성(Zweckrationalität)”과 비판이론의 “도구적 합리성(instrumentelle Vernunft)” 개념에서 전형적으로 찾을 수 있다. 후자는 그 어떠한 가시적 산물도 생산물로 산출하지 않고 특정 목적을 추구하지 않으며, 그 자체의 실천 속에서 의미를 지니는 인간의 자기목적적 행위를 의미한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자기완결적 행위인 ‘에네르게이아’와 그 완성태인 ‘엔텔레케이아’로 표현되는 차원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전자는 장인, 직공, 혹은 생산에 종사하는 노예, 사적 가정경제의 영역과 관련되고, 후자의 경우는 바로 공공영역인 폴리스에서의 실천, 즉 정치와 긴밀하게 연관된다. 고전 문헌학 전공자이기도 한 라일과 또한 역시 고전에 해박했던 오크쇼트가 이 구분이 지니는 ‘고전적’ 차원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으리라는 점은 불문가지이다.

정치학자 오크쇼트가 중점적으로 문제 삼고 있는 바는 바로 이러한 ‘기술적’ 지식이 합리주의의 외피를 쓰고 정치적 판단과 실천을 지배하는 양상이다. “신념정치”라는 이름 아래 정치적 영역을 지배하는 이러한 사고는 행위를 그에 선행하는 “결심”, “의도”, “동기”와 같은 기획에 의해 비롯되는 것으로 보거나(Oakeshott, 2007: 34), 정치적 행위를 또한 “완성”이라는 최종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그 목적에 종속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상기 신념정치란 카를 포퍼가 ‘열린 사회의 적들’로 지칭한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처럼 사회적 총체성의 수립을 이상적인 목표로 추구하는 사유와 실천의 모든 경향을 의미한다. 이렇게 인간과 정부의 ‘완성’이라는 목표 추구, 사회공학적 설계, 종합적 목적 등 모든 총체적 질서의 추구는 개별자를 억압하는 체계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오크쇼트에게 이 신념정치의 철학적 출처는 17세기 데카르트와 베이컨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역사적으로는 영국 청교도 정치 속에서 발견되며, 그 생산주의적 판본은 중상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근면과 검소를 노동 윤리의 기본으로 간주하는 이러한 판본 속에서는 또한 칼뱅주의에 특징적인 프로테스탄트 금욕주의 노동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간에 성립하는 선택적 친화성(Wahlverwandtschaft; elective affinity)을 날카롭게 포착했던 막스 베버와 합류하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반면 이에 대립되는 의심정치에서 정치적 다스림이란 신념정치에서처럼 “명제의 “진리”를 확립하고 그 명제를 행동으로 번역하는 일이 아니라 피상적 질서를 강제하는 회의주의자의 믿음”(Oakeshott, 1996, 박동천 역, 2015: 85)에 근거한다. 이 구절은 참과 거짓을 가르는 명제적 지식이 바로 신념정치에 곧바로 상응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념정치와 구분되는 의심정치의 구체적인 모습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오크쇼트의 서술에서 특징적인 바는 의심정치의 서술이 신념정치에서 그러했던 만큼 그리 명료한 언어로 표현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즉, 목적지향성, 총체성, 도덕적 완결성, 완성의 추구 등 신념정치를 특징짓는 개념어들과는 달리 의심정치는 하나의 명징한 개념으로 서술될 수 있는 대상이라기보다는, 이 신념정치에 대한 반대항이나 그 결점을 보완하는 교정책의 차원으로 서술되고 있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앞서 명제적 지식이 참과 거짓을 가르는 진술이라는 명료한 정의와는 달리, 방법적 지식이 정의보다는 제반 사례를 통해 설명되었던 바에 그대로 상응한다. 의심정치의 관점에서 정부의 직무가 갈등을 해소함으로써 공동선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의 강도를 완화하고 그 수를 줄이는 데에 있다고 하는 진술이나(ibid., 77) 다스림이 우리를 유토피아적 천국이나 진리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지옥에서 우리를 구할 수는 있고,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줄 수 있”(ibid., 83)다는 표현은 바로 이러한 의심정치가 순수 인식론의 문제가 아닌, 현실 속 실천적 의식과 긴밀히 결부되는 사안이라는 점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합리주의로 통칭되는 명제적 지식과 그 정치적 대응물인 신념정치에 대한 오크쇼트의 회의는 진리 추구와 같은 거대 서사나 거대 담론에 대한 거부를 특징으로 하는 포스트모던 지식의 차원을 선취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Lyotard, 1979, 유정완 외 역, 1992). 본고의 맥락에서 이러한 입장은 거대 단위에서 사전에 설정된 ‘역량’이 무수히 다양한 배움의 개별 시공간을 포섭하고 있는 현 역량교육론 적용과 실행의 모습의 대척점에 놓이면서 그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가능케 하는 근거로 작용한다.

2.3. 마이클 폴라니의 암묵지와 개인적 지식

헝가리 출신 유대인으로서 베를린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현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 재직하며 물리화학자로서 탁월한 업적을 남기면서 과학자로서의 확고한 경력을 쌓아 나가던 폴라니가 이후 과학철학과 과학사가로서 자신의 전공을 바꾸게 된 배경으로 좌우 전체주의의 대두라는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인 차원을 빼놓고는 설명하기 힘들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그가 영국 맨체스터로 이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야기한 1933년 히틀러의 정권 장악과 1935년 소비에트 러시아를 방문하여 부하린을 만나게 된 경험은 이 촉망받는 과학자로 하여금 과학 연구가 지니는 탈과학적 조건에 대해 주목하게 만드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음을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자유의 경멸. 러시아의 실험과 그 이후(The Contempt of Freedom. The Russian Experiment and After)』(1940), 『과학, 신념, 사회(Science, Faith, and Society)』(1946), 『자유의 논리. 성찰과 답변(The Logic of Liberty. Reflections and Rejoinders)』(1951) 등 일련의 과학철학적 저술과 더불어 『소련의 경제(U.S.S.R. Economics)』(1935), 『완전 고용과 자유 무역(Full Employment and Free Trade)』(1945)과 같은 경제학 작업이 해당 시기와 그 이후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그의 과학철학자로의 이행 배경과 동기를 입증하는 여러 증거들이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이후 그의 본격적인 과학철학적 작업에도 깊은 영향을 드리운다. 폴라니 과학철학의 총결산이라 칭할 수 있는 『개인적 지식. 포스트비판 철학을 위하여(Personal Knowledge. Towards a Post-Critical Philosophy)』(1958)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인식론 자체에 대한 비판을 포함하고 있으며(Polanyi, 1958, 표재명 외 역, 2001: 344, 350-77), 예일대의 터너 강연록인 『암묵적 영역(The Tacit Dimension)』(1966)의 서두는 그가 부하린을 만나 나눈 다음과 같은 대화로 시작한다:3)

나는 1935년 모스크바에서 부하린과 가진 대화를 잊을 수 없습니다. […] 소련의 순수 과학 추구에 관하여 질문하였을 때, 그는 순수 과학이 계급 사회가 낳은 병폐라고 답하였습니다. 사회주의 체제 하에 과학 그 자체를 위해 추구되는 과학의 개념은 사라질 것이며, 그것은 과학자들의 관심이 소련의 5개년 계획에 따른 현실적인 문제로 자연스럽게 기울여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Polanyi, 1966, 김정래 역, 2015: 29-30).

당시 스타하노프 운동이 전형적으로 보여주었듯, 소련 경제의 당면 과제는 생산력 증대였다. 그러므로 소비에트의 이론가 부하린에게서 인민의 생활 복지 향상과 직결되는 경제 발전을 위해 과학기술이 ‘순수’하게만 남아있을 수는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과학 그 자체를 위해 추구되는 과학”이란 ‘예술을 위한 예술’만큼이나 부르주아적 유아론의 타락과 파멸을 드러낼 뿐이며, “계급 사회가 낳은 병폐”일 따름이다. 소비에트 당료들에게 과학과 기술은 바로 사회주의 공화국의 건설이라는 역사 발전의 최종 목적에 복무해야 한다는 요청은 스스로 명백한 정언명령인 것이다.

물론 폴라니에게 이러한 역사관은 서구 기독교적 종말론과 구원사의 변종에 불과하며, 이러한 선형적-일방향적 단순 논리는 그저 기계론적 역사관과 인간관을 종교적 영역에서 표현한 것 이상이 아니다. 이는 회의가 아니라 진리를, 개혁이 아니라 혁명을, 개선이 아니라 완결을 추구하는 강한 지적, 도덕적 동기, 그리고 더 나아가 그가 표현하듯 ‘보편적 정의’에의 요청을 전제로 삼고 있다(물론 폴라니가 정의 일반에의 추구에 대해 회의적이었다고 이해하면 곤란하다. 이 맥락에서 그가 문제 삼고 있는 것은 ‘기계론’이라는 말에서 엿보이듯, 바로 도덕과 정의의 이름으로 전일적으로 관철시키고자 하는 보편주의적 독선이라고 이해해야 마땅하다.) 이러한 기계론적 보편성에 대한 비판은 앞서 언급한 라일의 주지주의와 오크쇼트의 신념정치 등 구체적 대상 세계를 보편적 이성이라는 거대 서사와 거대 담론으로 포섭하고 통제 가능케 만듦으로써 세계와 역사의 방향에 대한 투명한 인식을 얻을 수 있다고 간주하는 제반 사유에 대한 비판에 상응한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한국에서 과학기술이 지니는 지위와 그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다. 대한민국 헌법 127조 1항에서 “국가는 과학기술의 혁신과 정보 및 인력의 개발을 통하여 국민경제의 발전에 노력하여야 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여기에서 과학기술은 폴라니가 주장하듯 “그 자체로 존립”하거나 “그 자체를 위해 추구”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경제의 발전에 대한 종속변수, 즉 경제 발전이라는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되고 있다. 최근 몇 년 간 떠들썩했던 ‘4차 산업혁명’이나 근자의 ‘인공지능’, ‘빅데이터’, ‘첨단산업’이라는 구호와 이에 대학 학문의 발전을 종속시키고자 하는 경향 또한 기실 폴라니가 지적했던 “강한 도덕적 동기”의 21세기형 한국판(‘사회와 기업에 필요한 인재 양성’ 등)이라 칭하기에 무리가 없을 것이다. ‘자유민주주의’가 논쟁적인 용어가 되고 ‘자유’가 최고 권력자의 입에서 그토록 강조되고 있는 곳에서 과학기술에 대한 시각이 거의 1세기 전 소비에트 러시아에서의 관점과 묘하게 일치하고 있다는 자가당착적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대목에서 공산주의적으로 세속화된 보편사적 구원사로부터 과학기술을 구출하고자 하는 폴라니의 시도가 지니는 현재성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외적 목적에 종속된 시녀의 역할을 넘어서 비로소 과학적 진리 그 자체의 내재적 가치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다름 아닌 과학적 진리와 앎 자체의 속성과 발전 원리에 대한 고찰을 통해 가능케 될 것이며, 이후 그의 과학사 및 과학철학적 작업은 바로 이를 해명하는 데에 바쳐져 있다. 라일에게서 데카르트적 코기토의 앎과 오크쇼트에게 베이컨적 경험주의의 앎이 공히 명제적 지식으로서 그 한계를 드러냈듯, 과학적 앎의 가치와 본성을 과학 외적 척도, 혹은 명제적 지식으로 남김없이 환원하여 규정하고자 하는 시도 또한 마찬가지로 그 한계가 명백한 것이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앞서 철학자 라일이 명제적 지식에 대해 방법적 지식을, 정치학자 오크쇼트가 신념정치에 대해 의심정치를 대안으로 내세운 것처럼, 이러한 과학 외적 요구에 대해 과학자 폴라니가 내세우는 핵심어는 바로 개인적 지식과 암묵지이다. 폴라니는 과학적 탐구가 지니는 개인적이고 암묵적인 차원을 설명하기 위한 근거로 라일의 명제적 지식과 방법적 지식의 개념쌍을 명시적으로 인용하고 있다(Polanyi, 2015, 김정래 역, 2015: 34; Polanyi, 1958, 표재명 외 역, 2001: 96; Polanyi & Prosch, 1975: 46). 즉, 보통 가장 엄밀한 것으로 여겨지는 자연과학적 지식 또한 모두 ‘말할 수 있는’ 명제적 지식으로 남김없이 환원된다고 할 수 없으며, 이와 더불어 동시에 ‘말할 수 없는 것’으로써 ‘개인적’이고 ‘암묵적’인 차원의 지식이 개입하고 있다는 점이 적극적으로 인정된다. 혹은 이를 넘어, 이러한 말할 수 없는 지식은 도리어 명제적 형식을 지니는 지식을 가능케 하는 필수적이자 포괄적인 조건으로 기능한다고 얘기할 수 있다. 연구자의 지적 정열, 직관, 관심, 태도, 기량, 양심 등과 같은 마음의 작용과 더불어 신체적 요소와 자기목적적 행위와 같은 실천적 차원, 그리고 자유로운 의사소통, 협력적 동료의식, 상호 인정과 확신, 개방적 시민 문화, 공적 자유와 같은 사회적 차원은 바로 과학적 발견과 창의성, 그리고 창발(emergence)을 가능케 하는 ‘개인적’이고 ‘암묵적’인 조건인 것이다. (과학의 발전과 그 ‘혁명’이 지식의 누적이 아니라 바로 패러다임 변화와 대체에 있다고 본 토마스 쿤의 입장은 과학적 지식이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식이 아니라는 이러한 시각을 급진화시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통상 가장 엄밀한 지식으로 상정되었던 자연과학에서도 또한 이러한 방법적 지식이 지니는 개별적이고 암묵적 차원이 과학적 탐구를 이루는 주요한 특성이자 구성요소가 된다는 점을 자신의 과학사적 지식과 사례를 총동원하여 설득력 있게 설파한 것이야말로 과학철학자 폴라니의 주요한 공적이라 할 것이다.

3. 역량의 ‘명제적 지식’으로의 환원

이제까지 명제적 지식으로 포괄할 수 없는 방법적 지식의 특성과 더불어 전자의 배경이자 구성 조건으로서의 후자가 지니는 중요성을 철학, 정치학, 자연과학이라는 상이한 영역에서 발견되는 공통분모로서 확인했다. 개별적인 차원을 추상적인 보편성으로 포섭하여 환원시키는 경향에 대항하기 위한 관심으로부터 도출된 이러한 방법적 지식이 지니는 개인적이고 암묵적인 차원은 바로 OCED 역량교육론의 지식론과 인식론을 이루는 주요한 이론적 기반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방법적 지식에의 요청을 자신의 요체로 삼고 있는 역량교육론이 기실 그 주장과 적용의 차원에서는 명제적 지식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자기모순을 범하고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이를 비판적으로 조망할 것이다. 이러한 자기모순은 역량교육론의 출처가 된 OCED와 더불어 그것이 적용되고 있는 한국에서의 상황 모두에 해당된다. 이 장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이 양 영역을 대상으로 삼아 고찰하며, 여기에서 제시되는 테제는 다음과 같다: (1) 무엇보다 OECD의 첫 프로젝트였던 DeSeCo의 역량교육론은 방법적 지식을 통한 핵심역량 교육론의 정립이라는 본연의 의도를 온전히 관철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는 한편으로는 이론적 정립 차원에서의 불철저함과 더불어, 다른 한 편으로는 역량 자체를 명제화된 형태로 제시하는 방식 속에서 드러난다. (2) 한국에서 역량교육론의 수용과 적용 과정에서 드러나는 역량에 대한 이해는 그 형식과 내용에서 전적으로 명제적 지식의 차원으로 환원되는 문제를 지닌다. 이는 한편으로 OECD 역량교육론 자체에 내재한 결함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다른 한 편으로는 한국 대학과 사회를 지배하는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의 편향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3.1. OECD 프로젝트에서 역량의 명제화

1997년부터 2003년까지 진행된 OECD의 DeSeCo 프로젝트는 2003년의 최종보고서와 2005년의 요약보고서를 통해 자신의 활동을 마무리 짓는다. 여기에서 최종적으로 선정된 핵심역량은 다음의 세 범주로 제시되고, 이들 세 가지 핵심역량 아래에는 또한 각각 세 가지 부속 역량이 귀속된다(OECD, 2005):

(1) 도구를 상호작용적으로 사용하기(using tools interactively)

- 언어, 상징, 텍스트를 상호작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

- 지식과 정보를 상호작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

- 기술을 상호작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

(2) 이질적인 집단 속에서 상호작용하기(interacting in heterogeneous groups)

- 타자와 잘 관계 맺을 수 있는 능력

- 협력할 수 있는 능력

- 갈등을 관리하고 해결할 수 있는 능력

(3) 자율적으로 행위하기(acting autonomously)

- 큰 그림(big picture)을 가지고 행위 할 수 있는 능력

- 생애 계획과 개인 프로젝트를 형성하고 수행할 수 있는 능력

- 권리, 관심사, 한계, 필요를 주장할 수 있는 능력

그런데 위와 같은 목록화를 통해 역량을 제시하는 방식이 과연 애초 역량교육론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방법적 지식(know-how)의 취지에 부합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다분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목록화를 통한 핵심역량을 나열하는 방식은 전형적인 명제적 지식(know-that)의 전달방식이기 때문이다. 위 사례를 기준으로 살펴보자면, 도구 사용, 상호작용, 자율적 행위 등은 모두 실천적 차원을 지시한다. 이러한 행위들은 ‘S는 P이다(S is P)’라는 진술문 형식으로 정식화될 수 있다. 즉, 상기 목록 열거는 기본적으로 ‘핵심역량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A, B, C…가 핵심역량이다’의 답변 형식으로 제시된 진술문으로, 주어[=개별 행위 A, B, C…]는 계사[=is]를 통해 연결됨으로써 술어[=범주로서의 핵심역량]에 포섭된다. 이에 따라 위 목록은 ‘도구 사용은 핵심역량이다’, ‘상호작용은 핵심역량이다’, ‘자율적 행위는 핵심역량이다’ 등의 판단 명제로 정식화된다. 다시 말해 ‘S는 핵심역량이다’라는 진술로 정식화될 수 있는 상기 나열 형태는 두말할 나위 없이 바로 핵심역량론이 넘어서고자 했던 명제적 지식의 표준 형태인 것이다. 즉, 기존의 전통적인 명제적 지식과 대비되는 차원에서 그 대안으로 제시된 실천적 지식의 습득 방식이 핵심역량 교육론의 기저를 이루는 요체였지만, 이 그 역량론에 대한 표현은 흥미롭게도 스스로가 극복하고자 했던 기존의 전통적인 명제적 지식의 진술 형식을 택하는 자가당착을 드러내고 있다.

물론 방법적 지식과 명제적 지식 양자 간에는 긴밀한 관련을 지니며, 실제 DeSeCo의 모든 문헌은 물론, 본고를 포함한 모든 학문의 진술은 명제의 형식을 피할 수 없다(명제적 지식과 방법적 지식의 차이를 설명하는 방식도 기실 명제 형식을 띠고 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의 가장 큰 오류는 명제 형식을 통해 이를 넘어서는 영역과 방식을 힘주어 지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피안의 영역에 대한 서술을 바로 자신이 넘어서고자 했던 형식 안에 제한시키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렇게 더욱 비중을 두어 서술해야 할 암묵적, 개인적, 방법적 지식의 차원을 도외시함으로써, 가뜩이나 모호한 것으로 이해를 쉽게 구하지 못했던 핵심역량 개념을 현장에서 적용하는 데에 더욱 멀어지게 만든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다시 말해, 일단 DeSeCo의 3가지 핵심역량에 모두 ‘행위’와 관련된 말[=act]이 포함됨으로써 역량 형성에 있어서 실천의 차원이 지니는 중요성을 드러내기는 했지만, 이 핵심 전언이 명제적 진술문이라는 프레임 안에 갇혀버리는 한계로 말미암아 술어(역량)를 형성하는 주어(수행)의 역동적인 실천적 차원은 간과되고, 이는 단지 술어의 범주 아래 규정적으로 포섭되었던 것이다. 주어가 결국은 선행하는 술어의 지위를 확인시켜 줄 뿐인 종속적이고 부차적인 역할만을 담당할 때, 이 주어는 다른 자의적인 모종의 그 어떤 것으로 얼마든지 대체 가능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S는 핵심역량이다’라는 명제에서 주어 S 속에는 그 어떤 그럴듯한 ‘괜찮은’ 것을 넣더라도 구색이 맞아 보이면 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이러한 자의성으로 말미암아 핵심역량은 더 이상 ‘핵심’역량으로서의 변별력을 상실하게 된다.

그렇다면 핵심역량의 명제화로 귀결되었던 선행 DeSeCo 프로젝트에서의 역량교육론은 이제 새로운 후속 프로젝트에서는 어떠한 모습을 띠게 되는가?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교육 2030에서는 학습 나침반(Learning Compass)라는 개념이 중심적으로 대두되고, 이 총괄적인 학습 틀은 이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을 포함하게 된다. 이는 이전 명제화로 고착화되었던 핵심역량 개념을 좀더 다층적이고 역동적인 모델로 대체하고자 하는 고민의 소산으로 보이는데, 그 특징을 현재까지 발표된 개념 노트에 의거해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핵심역량이라는 표현은 사라지고, 대신 이는 변혁적 역량(Transformative Competencies)과 핵심 토대(Core Foundation)로 분화된다. 둘째, 학생과 교사의 행위주체성(Agency), 혹은 더 나아가 공동 행위주체성(Co-agency) 개념이 대두된다. 셋째, ‘예견-행위-반성 주기(Anticipation-Action-Reflection Cycle)’을 통해 학습에서 반성적 행위가 지니는 중요성이 부각됨으로써, 이전 핵심역량 기반 학습 개념보다 훨씬 역동적 차원이 반영된다.

행정 업무가 전근대적 도제적 전수가 아닌, 문서에 기반하여 이루어지는 근대 관료주의 체제에서의 언어는 앞서 언급했듯 명제적 진술의 형태를 띠고 또한 마땅히 그래야만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므로 새로운 역량 개념을 명제 형식으로 제시하는 것은 불가피함을 넘어 필수적이다. 이에 따라 교육 2030에서는 변혁적 역량을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기, 책임을 지기, 긴장과 딜레마에 대처하기 등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으며(가령, ‘S1, S2, S3…는 변혁적 역량이다’), 핵심 토대의 경우 인지적, 건강, 정서적 토대 등 세 가지로 간추리고 있다. 마찬가지로 지식은 학문적, 간학문적, 인식적, 절차적 지식 등 4가지로, 기량은 인지적⋅메타인지적인 기량, 사회적⋅정서적인 기량, 실천적⋅육체적인 기량 등 3가지, 가치는 개인적, 사회적, 사회제도적, 인간적 가치 등 4가지로 나열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보면, 앞서 선행 핵심역량 프로젝트의 경우에서처럼 이 모든 것들은 기실 명제화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에 부가하여 “역량 발전을 위한 토대”(OECD, 2019: 36)로서 행위주체성과 더불어 변혁적 역량에 대한 “촉매”(ibid., 123)로서 예견-행위-반성 주기 또한 제시됨으로써, 이들은 학습 나침반이라는 전체적인 틀 안에서 핵심 토대, 변혁적 역량, 지식, 기량, 태도, 가치 등의 범주에 부속된 명제화된 요소들을 규율하고 촉진시키면서 역동적 관계를 형성하는 매개체로 기능하게 된다. 이는 분명히 이전 DeSeCo 프로젝트보다 진전된 모습이다. 그런데 이러한 예견-행위-반성의 3박자 주기는 주체적 행위를 예견의 이름 아래 목적합리적인 차원으로 환원시키고, 반성의 이름 아래 또한 이 행위를 선행하는 목적에 종속된 사후 확인의 대상으로 축소시킴으로써, 결국 행위는 일종의 선형적(linear) 인과론의 틀 속에 차폐되는 한계를 지닌다(ibid., 121-22). 그럼으로써 수행 행위 자체가 지니는 고유성, 역동성, 예측 불가능성, 창발성의 차원이란 기대할 수 없게 된다. 현재진행형인 교육 2030 프로젝트가 선행 프로젝트보다는 진전된 모습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여전히 지적되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본연의 이론적 요청에 부합하는 수준을 강령적인 차원에서도 충분히 담보할 수 있을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향후 계속적으로 면밀한 관찰이 요구된다.

3.2. 한국에서의 역량교육론의 수용과 적용: 국가와 대학

주지하다시피 한국 고등교육에서 역량교육론의 도입 및 적용은 OECD 프로젝트에 대한 관련 연구자들의 소개(소경희, 2006; 소경희, 2007)를 필두로 교육부(소경희 외, 2013), 한국교육과정평과원(이근호 외, 2012; 이근호 외, 2013), 한국교육개발원(윤종혁 외, 2016; 최수진 외, 2017; 이상은 외, 2018; 최수진 외, 2019) 등 정부 기관의 적극적인 발의에 의해 추동된 것이다. 이렇게 국가기관에 의해 이루어진 특정 교육 방법론에 대한 독점적 선호는 “동조 압력과 원거리 통제의 행사”(성열관 2014: 22)를 꾀하고자 하는 OECD 교육 거버넌스와 결합하고 사회적 제도화의 압력 증대로 이어짐으로써, 마침내 이는 2018년과 2021년 대학기본역량진단의 평가지표로 반영되어 실질적으로 거부할 수 없는 외적 강제로 작용하게 된다. 역량교육론에 대한 이러한 일련의 소개, 도입, 적용 과정에서 명시적이건 은연중이건 드러나는 모종의 전제와 습속은 라일, 오크쇼트, 폴라니 등 방법적 지식의 주창자들이 비판적 극복의 대상으로 삼았던 바와 묘하게 중첩된다. 이는 규칙 제정자로서의 국가의 행태, ‘미래’에 대한 강조, 역량의 ‘재구조화’ 등 크게 세 가지 대목에 걸쳐 확인할 수 있다.

(1) 고등교육 체계에 역량교육론을 도입, 적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도래한 것은 바로 대학기본역량진단 내 핵심역량 제고를 위한 교육과정 체제 구축이라는 평가지표가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진단 기관으로서 교육부와 한국교육개발원은 역량기반 교육체계 구축이라는 규칙 제정자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자임하고, 이에 대해 대학의 전공 및 교양 교과 등 개별 단위의 교육 수행의 영역은 사전에 주어진 규칙을 거스를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대상이 된다. 여기에서 역량교육론의 기저에 놓인 이론적 배경의 요체를 상기하면, 이러한 과정이 얼마나 자기모순에 가득 차 있는지 조망 가능케 된다. 왜냐하면 규칙으로 모두 환원시킬 수 없는 방법적 지식의 습득을 요체로 삼는 역량교육론이 바로 국가에 의해 도입이 강제된 규칙의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반규칙적 개별 행위 양식에 기반하는 역량의 함양이란 규칙 제정자를 자임하는 국가에 의해 철저히 강제화된 규칙으로서 도입, 적용되어야 하는 목표가 된다. 낙서를 금지하기 위해 ‘낙서 금지’라고 써 놓거나 ‘조용히 해!’라고 소리치는 자가당착적 사례와 흡사하게 한국 국가기관은 방법적 지식을 요체로 삼는 역량교육론의 도입과 적용을 명제적 지식의 형태로 강제함으로써 일종의 수행적 자기모순(performativer Selbstwiderspruch)을 범하고 있는 셈이다(Habermas, 1983, 황태연 역, 1997: 126).

(2) 한국의 교육 담론에서 항시 그렇기는 하지만, 역량기반 교육의 도입 및 적용 필요성을 제기하는 담론 속에서도 항시 빠지지 않는 것은 바로 ‘미래’에 대한 강조이다(이근호 외, 2012; 최수진 외, 2019). 물론 교육 자체가 후속 세대에 대한 현세대의 지식과 가치의 전승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보면 미래에 대한 주목과 그에 대한 대비란 불가피하며 당연하다 할 것이다(다시 한번 상기하자면, 교육 2030의 공식 명칭 또한 ‘OECD 교육과 기량의 미래 2030’이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교육 담론 일반은 물론, OECD 역량교육론의 도입 및 적용과 관련한 보고서를 일별하면 이러한 미래 담론은 OECD와 상당 부분 결을 달리한다. 한국에서의 미래 교육 담론에서는 4차 산업혁명, 산학협력, 창업, 인공지능, 빅데이터, 반도체, 첨단산업 등 기업 및 기술공학적 용어가 가히 지배적인 독점적 지위를 구가하고 있다면, 교육 2030의 미래 담론은 이에 대비되어 인류세, 환경 위기, 이민과 난민, 상호문화, 공유 경제 등과 같은 가치에 훨씬 포괄적인 관심을 부여하고 있다(OECD, 2019: 12). 한국에서의 이러한 기술결정론에 의거한 미래 담론과 그에 종속된 교육관은 소련에서 부하린과의 대화를 통해 충격을 받은 폴라니의 사례를 묘하게 연상시킨다. 서구 종교사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세속화된 구원사라는 오래된 사유 습속은 한국의 미래 교육 담론이라는 예기치 않은 장소에서 기술결정론적 유토피아로 달리 채색되어 그 기묘한 표현을 얻게 되는 것이다.

(3) OECD 역량론에서 제시된 핵심역량을 한국 상황에 적용하는 데에서 오는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은 국가와 대학 단위에서 역량의 ‘재구조화’, ‘실행전략 탐색’, 혹은 ‘고도화’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진다(이근호 외, 2013; 최수진 외, 2019). 이는 대개 해외 사례 조사나 델파이 조사를 통해 해당 국가나 대학 단위에서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핵심역량들을 간추리는 식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역량 자체가 함축하는 암묵적, 실천적, 수행적인 차원과 이를 가능케 하는 제반 조건에 대해 충분한 심사숙고를 하지 못할 경우, 역량의 선정이란 자의적으로 되기 십상이라는 점에 있다. 즉, 해외 사례건 델파이 조사를 통해서건, 역량의 ‘재구조화’나 ‘고도화’라는 명목 하에 역량의 여러 목록들을 일별하고 그중 적절하다 싶은 것들을 선정하는 과정은 기실 한 명제화된 역량의 목록을 또 다른 명제화된 역량의 목록으로 대체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더욱 심각한 경향은 ‘맵핑’이라는 이름 아래 이렇게 새롭게 선정된 역량을 계량화시킴으로써 역량을 측정 가능한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그럼으로써 역량이란 이제 속류 행동주의와 테일러주의적 변종이라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통제를 목적으로 한 명제적 지식으로 변질된다. 이러한 모습이 수행적 실천에 의해 인도되고 형성되는 언표 불가능한 개별적, 암묵적, 개인적 앎의 차원으로서의 역량 이해와 전적으로 대척점에 놓여있다는 점은 자명하다.

4)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를 넘어 한국 고등교육 기관에서 이루어져야 할 ‘올바른’ 역량기반 교육이란 어떠한 모습을 띠게 될 것인가?4) 유감스럽게도 본고에서는 지면의 제한과 논의 내용의 방대함으로 말미암아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럼에도 이에 관한 핵심 요목을 간략히 제시하자면, 다음 세 가지 정도로 간추려질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본고에서는 역량을 명제적 지식의 형태로 도식화시키는 발상에 비판의 초점을 맞추고, 이로부터 파생되는 기존의 역량기반 교육론이 지닌 역량의 목적합리적, 선형적-인과론적 이해의 한계를 지적했다. 이러한 문제는 또한 역량을 하나의 고정된 실재로 사물화하고 계측 가능한 목록으로 대상화시키는 현재의 익숙한 모습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구도 하에서 수행이란 선행하는 추상적 역량에 대한 종속적 수단 이상의 지위를 점할 수 없게 된다. 만약 ‘역량’이란 말을 포기하지 않은 채 계속 보유하면서 ‘새로운’ 역량교육론을 정립하고자 한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역량을 형성하고 정초하는 수행의 선도적 지위를 분명히 하는 수행기반 역량교육이 될 수밖에 없다. 이를 통해 추상화된 역량을 앞세우고 수행을 그에 도구적으로 종속시키는 구도는 전복된다.

둘째, 이 수행의 개념은 그간의 화행론(speech act theory)과 수행성 이론의 발전을 통해 확인되듯, 말과 행위, 언어와 실천 간의 불가분한 관계를 요체로 삼는다. 수행기반 역량론에서의 ‘수행’이란 바로 말과 글이 실천적 행위의 차원으로서 역량뿐 아니라, 바로 학습자와 교수자 간의 긴밀하고도 역동적인 교학상장의 상호작용 속에서 자신과 현실을 형성해 나가는 힘과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차원을 지시한다.

셋째, 이러한 견지에서 보았을 때, 수행기반 교육론은 비단 교양교육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고등교육의 영역 일반에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지위를 지니게 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사유 형성의 근본 매개체로서 말과 글을 통한 수행적 실천이란 서구의 근대 대학 및 학문의 발전사에서 확인되듯, 모든 전공을 망라한 학문 연구의 기본 태도이자 자세이다. 이러한 특성은 현재까지도 서구의 대학과 연구 기관 구성원들의 학문적 일상 속에서 늘 확인되는 삶의 문화라는 점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4. 나가며

본고에서는 OECD 역량기반 교육론의 지식 및 인식론과 관련하여 주요한 이론적 배경이 되고 있는 라일, 오크쇼트, 폴라니의 기본 사유에 의거해서 OECD와 더불어, 특히 한국 고등교육 영역으로 역량기반 교육론을 도입하고 적용하는 방식과 관련해 드러나는 난맥상의 양상 및 원인을 지적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역량론의 이론과 적용 형태 속에서 드러난 자기모순을 통찰하게끔 기본 시각을 제공했던 출처로 이들 3인을 대표적으로 제시했지만, 기실 이 문제는 서구의 주요한 근대 사상사적 흐름을 좀더 포괄적인 시야에서 일별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인지할 수 있는 사안이다. 예를 들자면, 저 고대 그리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지혜(‘프로네시스(phronesis)’), 개별성을 보편성 속에 포섭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개별성 안에서 보편성을 발견하는 능력을 반성적 판단력이라는 이름 아래 정식화했던 칸트, 언어의 의미가 사전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바로 언어의 사용에 의해 형성된다고 주창했던 비트겐슈타인, 참과 거짓을 가르는 진위문이 아니라 행위로서 언어의 차원에 주목한 오스틴과 설 등의 화행론, 이러한 화행론과 수행성 이론에 의거해 포스트모던 지식의 가능성과 조건을 제시한 리오타르 등 곧바로 연상되는 사상가들만으로도 역량교육론 자체의 결함뿐 아니라, 역량교육론 자신의 본연의 취지를 정면으로 ‘배반’하고 이를 형해화, 변질시키는 자기모순의 행태를 곧바로 조망할 수 있게 된다. 이 점에서 싫건 좋건 관련 전공자를 넘어 모든 대학 구성원들의 문제가 되어버린 역량교육론이 과연 수없이 다양한 세부 전공 및 교양 과정 내에 포진한 개별 연구자들에게 충분한 설득력을 지니는 탄탄한 지적 기반을 갖추었는지 여부에 대한 물음은 피할 수 없다. 이는 핵심역량 기반교육론을 대학기본역량진단의 항목으로 포함시켜 획일적이고 강제적으로 도입했던 한국의 교육 관련 국가기관 담당자들이 답변해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다양한 전공 속에서 자신의 전문성을 최고로 발휘하고자 매진하고 있는 연구자들에게 국가가 여러 측면에서 이론적 정합성과 타당성이 의심되는 하나의 특정 교육 방법론을 총동원령 식으로 강요하는 행태 자체는 폴라니에게 놀라움을 선사했던 1930년대 소련의 상황과 근본적인 구분을 행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그러므로 현재 시행이 강제되고 있는 역량교육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조처가 취해져야 한다.

첫째, 국가 주도에 의한 한 특정한 교육과정의 도입이라는 실질적인 강제 조처는 당장 중단되어야 한다.

둘째, 역량교육을 역량교육 본연의 취지에 부합하여 행하고자 한다면, 바로 국가 주도가 아니라 자유로운 발의와 선택에 기반한 개별 단위에서 행해져야 한다.

근대 대학의 선구로 간주되는 베를린 대학의 창립 책임자였던 훔볼트는 고독함과 자유로움(Einsamkeit und Freiheit)을 대학의 요체로 보았다. 자연과학이나 공학과 같이 집단 연구가 일상화된 분야의 상황을 고려할 때, 고독함이라는 말은 시대에 맞지 않는 낡은 인상을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자연과학자 폴라니가 과학 연구가 필수 불가결하게 지니는 개인적 차원을 부각시켰다는 점을 상기하고, 이 고독함을 통상적인 의미가 아닌, 명제로 환원되지 않는 앎이 지닌 암묵적인 차원으로 이해한다면, 훔볼트의 언명이 지닌 현재성이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특정한 하나의 교육 방법론이 획일적으로 강요되는 이러한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흔하고 자명한 것으로 여겨지기 쉬운 자유로움이라는 가치는 더더욱 소중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개별적, 암묵적, 개인적 앎의 촉진과 함양으로서의 진정한 역량교육은 기실 역량교육이라는 슬로건이 더 이상 상위 심급으로서 구체적인 배움의 실천을 사전에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역량이라는 말 자체가 필요 없는 교육일 것이다. 역량 없는 역량교육 - 이야말로 역량교육이 진정으로 자신의 의도와 목적을 충족시키는 데에 걸맞은 역설적 표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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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Polanyi M, Prosch H. 1975. Meaning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39. Ryle, G.(1984). The Concept of Mind, Barnes & Noble[1949]. 이한우 역(1994). 마음의 개념, 문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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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Rychen D. S, Salganik L. H, eds. 2001. Defining and Selecting Key Competencies Kirkland: Hogrefe &Huber.
42. Rychen D. S, Salganik L. H, eds. 2003. Key Competences for a Successful Life and a Well-Functioning Society Cambridge, MA: Hogrefe &Huber.
43. Rychen D. S, Salganik L. H, McLaughlin M. L, eds. 2003. Contributions to the Second DeSeCo Symposium Neuchâtel, Switzerland: Swiss Federal Statistical Office.
44. Schlegel F. 1967. Kritische Friedrich-Schlegel-Ausgabe. Zweiter Band. Charakteristiken und Kritiken I (1796-1801) Paderborn: Ferdinand Schöningh.

Notes

1)

이 명제는 이후 오스틴의 화행론에서 진위문(constatives)에 상응하면서, 수행문(performatives)과 대비된다(Austin, 1962, 김영진 역, 1992). 오스틴의 구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론에까지 소급해 올라가는 고전적인 것이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참도 거짓도 아닌 기도문과 같은 문장을 명제가 아니라고 부정함으로써 철학적 고찰의 대상으로부터 배제하고 있다: “예를 들어, 기도문도 문장이지만, 참도 거짓도 아니다. 이런 종류의 문장들은 제쳐두자. 이런 것들에 대한 고찰은 수사학이나 시학에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Aristoteles, 김진성 역: 17a 4-7).

2)

방법적 지식의 열거 사례 중 하나인 농담에 대해서는 특히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다. 농담을 가르치는 학교나 교과서가 있다는 얘기는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농담이란 결코 이론적이고 체계적인 지식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러한 지식을 뒤틀고 전도시키는 데에서 오는 순발력과 재치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번뜩이는 순간적인 자발적 행위능력에 대해 처음 주목한 것은 1800년 전후 독일의 초기 낭만주의자들이었다. 프리드리히 슐레겔이 위트를 두고 “통상적으로 이성이라고 부르는 것[=”격률, 정언명법, 규제적 원리“(Ryle, 1984, 이한우 역, 1994: 36)]”에 대립된 “두터운 불같은 이성”(Schlegel, 1967: 159), “결박된 정신의 폭발”(Ibid., 158), “단편적 천재성”(Ibid., 148)이라고 부른 것은 바로 일반적 규칙이나 이성으로 결코 환원될 수 없는 위트의 단속적이고 폭발적인 차원을 표현한 고유의 은유이다. 또한 근자의 수행성(performativity) 이론 또한 참과 거짓을 가르는 명제의 현대적 표현인 진위문으로 환원될 수 없는 개별 언어 행위 및 육체적 실천이 지니는 고유한 차원을 부각시키는 데에 그 본령을 두고 있다.

3)

부하린과의 만남에서 비롯된 폴라니의 충격에 대해서는 그의 저작에서 반복해 등장한다(Polanyi, 1940: 3-4; Polanyi, 1958, 표재명 외 역, 2001: 366; Polanyi, 1966, 김정래 역, 2015: 92-93). 이를 통해 소련에서의 경험이 이후 그의 이력에 미친 영향에 대해 짐작할 수 있다.

4)

이 4번은 “역량교육의 수용이 교양교육에 미치는 영향이나 문제”, 그리고 “제대로 된 역량교육은 어떠한 형태”가 될지에 대해 구체적인 서술을 제안했던 한 심사위원의 의견에 대한 답변으로 추가로 작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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