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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General Edu > Volume 15(4); 2021 > Article
교양교육에 남긴 1828 예일보고서(The Yale Report of 1828)의 유산

Abstract

19세기 초 미국의 지리적, 경제적, 교육적 급팽창과 그에 따른 미국 사회의 변화의 요구에 대한 ‘대응’으로 1828년 출간된 예일보고서는, 대학 교양교육의 목적을 ‘우월한 교육의 기반을 마련해주는 것’’으로, 이를 달성하기 위한 교수법으로 능력심리학에 기초한 정신의 훈육을 규정했는데, 이 과정에서 교양교육에 후대까지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긍정적⋅부정적 유산들을 남겼다. 교양교육의 정체성을 보편적 기초원리와 이론교육의 제공으로 규정하고, ‘전반적인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일반교육제도의 기초를 정립했고, 교양교육을 전문교육이나 직업교육과 구별했으며, 이에 상응해서 근대 대학의 역할과 기능도 규정했다. 또한 이 과정에서 학부교육과-향후의-대학원 교육을 구분했다. 그러나 이런 구분은 교양교육이 전공의 기초교육으로 전락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어놨다.
한편, 능력심리학은 내용 중립적인 철학이기 때문에, 非교양 학문분과들도 전이성과 범용성을 띤 정신 능력 개발 가능성을 이론적으로 제시할 수 있다면 이들도 교양교육과정에 진입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으며, 그만큼 교양교육의 위상이 악화될 수 있는 위험성도 높아졌다. 또한 교수자 중심의 능력심리학은 부모의 책임을 맡은 보호자로서 학생들에게 교양교육과정을 필수화 할 수 있었다. 능력심리학은 당대 사회의 변화된 요구를 수용하여 신공화주의를 구현할 수 있게 해주었지만, 교양교육의 도구이자 기술이며 또한 ‘내용 중립적’이며 ‘가치 중립적’인 정신적 능력이 교양교육의 내용과 덕성 및 공공의/윤리적⋅도덕적 목적보다 상위의 개념이 되는, 전도 현상이 발생했다. 교양교육이 정신의 훈육에 의해 덕성, 가치, 도덕적⋅윤리적 공공의 목적을 상실하며 아노미 현상을 보이고 있는 상황은, 현재 ‘핵심역량’에 포획되어 교양교육의 덕성과 가치를 잊어가고 있는 대한민국의 교양교육에 던지는 시사점이 대단히 크다.

Abstract

The Yale Report was published in 1828 as a response to the rapid geographic, economic, and educational expansion in early, nineteenth-century America. The Report defined the purpose of collegiate liberal education as one that should ‘lay the foundation of superior education.’ According to the Report, this was to be best achieved by disciplining and grounding the mind on the faculty of psychology. In this process, the Report left both positive and negative legacies which have had long-term impacts on liberal education.
The Report defined liberal education as one that provides general basic theories and principles. In addition, by stressing the importance of a ‘thorough education,’ the Report not only laid the basis for general education in later centuries, but also distinguished liberal education from professional, or vocational education, and the role and function of colleges accordingly. Moreover, the Report made a distinction between undergraduate and graduate studies. However, this distinction made it possible for liberal education to be downgraded into basic education for the study of concentrations.
Meanwhile, the overemphasis on universal mental faculties which is content-neutral made it possible for non-liberal disciplines to be included within the curriculum of liberal education, which in turn would lower the status of liberal education. In addition, teacher-centered faculty psychology enabled the college as the guardian who took the parental responsibilities to enforce prescribed curriculum on their students. Moreover, faculty psychology also enabled liberal education to accommodate the new entrepreneurial and business demands of a rapidly changing society and thereby opened a way for neo-republicanism to be realized in America at that time. However, ironically, the discipline of the mind which was originally a tool and a skill for liberal education became its purpose since the notion of mental faculties was content-free as well as value-free. As a result, liberal education lacked virtues, values, moral⋅ethical ends, and public good. This undesirable phenomenon would give a grave lesson to the liberal education in current Korea enthralled by the notion of ‘core competencies.’

1. 들어가며

1827년 9월 11일, 예일대학(Yale College)1) 자치운영위원회(Yale Corporation)가 열렸다. 여기에 코네티컷 주 상원의원 직권(職權)에 의한 회원 자격으로 참여한 달링(Noyes Darling) 판사는 예일대학의 고전 중심 교육과정이 이리 운하(Erie Canal)의 개통(1825년)으로 상징되는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서 그는 ‘죽은 언어(deal languages)’, 즉 고전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입학시험과 교육과정에서 제외하고, 대신 근대 언어와 새로운 직업 관련 과목이나 ‘실용적 과목들’을 포함시키라고 요구하면서, 모교의 교육과정 개혁을 요구했다. 주(州)의 명망 있는 핵심 인물일 뿐 아니라, 예일대학 동문(1801년 졸)이자 튜터(1804-1808)로도 일했던, 즉 학생과 선생으로서 예일대학의 교육 수준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인물이 이런 비판을 가했다는 점에서 그의 개혁 요구는 더 충격적이었다(Kimball, 2010: 263; Potts, 2010: 12-40).
예일대학은 이런 비판에 대응하기 위하여 별도의 위원회를 조직했고, 이 위원회는 1828년 4월 첫 모임에서 교수진의 의견 표명을 요청했다. 교수진을 대표하여 예일대학 총장 데이(Jeremiah Day, 수학, 자연철학 담당)2)와 고전학 담당 교수인 킹슬리(James L. Kingsley)가 각각 보고서를 작성하여, 1828년 8월에 두 보고서로 구성된 ‘교수진 보고서(Report of the Faculty)’를 해당 위원회에 제출하였다. 이 두 보고서는 ‘정신의 훈육(the discipline of the mind)’ 교수법 논리를 동원하여 고전교육 중심의 교육과정 유지의 타당성을 피력했다. 다음으로, 1828년 9월에 별도의 위원회를 대표하여 톰린슨(Gideon Tomlinson) 주지사3)가 7쪽 반짜리 ‘위원회 보고서(Report of the Committee of the Corporation)’를 통해 두 사람의 주장을 지지했고 이 보고서를 자치운영위원회에 제출했다. 자치운영위원회는 이렇게 탄생한 세 개의 보고서로 구성된 56쪽짜리 팸플릿, 즉 ‘예일보고서(The Yale Report)’4)를 출간했다. 1829년 화학 담당 교수인 실리먼(Benjamin Silliman)은 자신이 창간하여 편집장을 맡아보고 있던 The American Journal of Science and Arts라는 유명 학술지에 이 보고서를 출판하여 세상에 널리 알렸다(Yale College(이하 ‘Yale Report’라 칭함), 1828: 3-45); Potts, 2010: 25-28; Urofsky, 1965: 57-58).6)
예일보고서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예일대학 역사를 연구한 한 역사가는 이 보고서가 “‘좋건 나쁘건, 예일대학으로부터 나온 가장 영향력 있는 교육 성명’”이 되었다고 평가했다(Herbst, 2004: 214). 당대 예일대학은 다른 많은 대학에 가장 많은 총장을, 또 (프린스턴 대학과 더불어) 가장 많은 교수진을 제공하고 있었는데, 한 연구는 이런 리더십 덕택에 예일보고서는 “19세기 전반기 미국 고등교육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문서”(Hofstadter and Smith, 1961: 275)가 되었다고 평가했으며, 다른 연구는, 당대 고등교육의 내용과 실천에 있어서 “‘전통적 지혜(conventional wisdom)’”가 되었다고 평가했다(Potts, 2010: xv). 최근의 연구들은 예일보고서의 영향력을 그 영역이나 시기 면에서 더 확대했다. 한 연구는 “미국 고등교육의 교육과정 역사를 기록한 모든 성명 중에 다른 어떤 문서도 [예일보고서]보다 핵심적이고 지속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못한다”고 주장했으며(Herbst, 2004: 213), 또 다른 연구는 이 보고서가 “오늘날 [미국] 대학들과 대학교들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시야를 제공”하기 때문에 “미국 고등교육의 목적과 미래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에게 예일보고서는 민주주의 사회의 교양교육(liberal education)7)의 핵심 목적과 방법을 연구하는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Potts, 2010: xv, xvii).
이런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예일보고서는 미국에서도 소수의 교육사(史) 전문 연구자, 특히 남북전쟁 이전의 대학사(史) 전문가들 외에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이 문서에 제대로 된 관심을 기울여 깊이 있고 심도 있는 분석을 시도한 연구도 소수에 그치고 있다(Potts, 2010: xv, xvi). 물론 예일보고서를 언급한 연구들은 많지만, 이들도 예일보고서를 자기 연구의 후기나 각주에서 혹은 다른 주제들을 다루면서 부분적⋅분적절으로 다루는 경우가 많았다(Pak, 2008: 32-33 참조). 국내에서는 예일보고서만을 전면적으로 다룬 연구는 전무(全無)하며,8) 한국 대학 교육 전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미국의 고등교육 통사(通史) 한 권 제대로 없는, 통탄스러운 상황이다. 이에 본고는 예일보고서를 둘러싼 시대적 배경과 연구사를 살펴보고, 이 보고서가 당대와 현대 미국-나아가 대한민국의-교양교육과 고등교육에 남긴 긍정적⋅부정적 유산을 고찰해보고자 한다.

2. 시대적 배경

2.1 지리적⋅경제적 팽창

예일보고서가 출현한 1828년은 대륙 내에서의 미국의 지리적 영토팽창이 한참 진행 중이던 때였다. 1620년 필그림들(Pilgrims)이 ‘플리머스 바위(Plymouth Rock)’에 첫발을 디딘 후 성립한 13개의 식민지는 1776년 시작된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1783년 파리조약으로 독립을 국제적으로 승인받으면서 애팔래치아 산맥 너머 서쪽으로 미시시피강에 이르는 영토를 영국으로부터 할양받았다. 미시시피강을 따라서 오늘날 북쪽의 미네소타주로부터 남쪽의 미시시피주에 이르는 긴 선을 국가의 서쪽 경계로 하는 넓은 영토가 생겨난 것이다. 이로부터 정확히 20년 후인 1803년, 미국은 프랑스 혁명전쟁으로 전비가 급히 필요했던 B. 나폴레옹으로부터 ‘루이지애나 매입(Louisiana Purchase)’를 단행하여 영토를 거의 두 배로 넓혔다. 이제 미국의 서쪽 국경선은 미시시피강을 넘어, 북쪽의 캐나다로부터 콜로라도주 덴버까지 뻗어 내려오는 로키산맥, 그리고 그 밑으로는 현재 텍사스주의 우측 경계까지로 확장되었다. 이어서 1840년대 말까지는 현재의 캘리포니아주, 즉 태평양 연안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대서양과 태평양 두 대양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갖게 되었다([그림 1] 참조).
[그림 1]
By United States federal government (en:User:Black and White converted it from JPEG to PNG and retouched it) - National Atlas of the United States [1],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178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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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는 정치적으로도 신생 독립국의 정체성을 명확히 확립해나가야 하는 과제가 대두된 시기였다. 1781년 연합규약으로 이미 느슨한 연방국가가 되어있던 13개 주는 1787년엔 연방헌법을 제정하여 2년여에 걸쳐 이를 승인함으로써, 마침내 1789년 미합중국이라는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에 기초한 연방공화국이 정식으로 출범했다(수정헌법은 1791년에 추가됨). 미국은1812-1815년에 2차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 1821년에는 먼로선언(Monroe Doctrine)을 단행하여 근대국가 미국의 근대민족주의(modern nationalism)9)적 자부심을 만방에 선포하고, 1828년에는 서부 빈농 출신인 민주당의 잭슨(Andrew Jackson)이 7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잭슨 민주주의(Jacksonian Democracy)’ 시대를 전개하려는 상황이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 독립선언서와 헌법에 규정해놓은 자유주의적이며 공화주의적인 ‘건국 이념’을 민주주의 국가에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 또 이를 통해 다양한 이질적 배경을 가진 각종 이민자들로 구성된 신생 공화국의 결속을 어떻게 다져 하나의 국가를 유지⋅발전시킬 것인지를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Lane, 1987: 325-338).
한편, 1828년은 경제적 팽창의 시대이기도 했다. 식민지 시대에 영국이 구축해놓은 확대재투자체제에 기초한 제국 상업망의 혜택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미국은 이제 공산품을 스스로 생산하는, 확대재생산체제를 구축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김태유 외, 2017: 68-77). 다행히, 1789년 ‘미국 산업혁명의 아버지’로 불리는 슬레이터(Samuel Slater)가 영국 직물산업 기술을 몰래 가지고 미국으로 이주함으로써 미국도 영국만큼이나 일찍이 산업혁명을 시작하게 되었다(추아, 2007: 345-346). 1860년 미국의 경제력은 영국과 독일을 제외하곤 유럽의 어떤 나라보다도 높았으며, 1870년대에 시작된 2차 산업혁명을 독일과 함께 선도하여, 1890년대 세계 최고의 산업생산력(전세계 공산품의 1/2을 생산)을 자랑하는 ‘세계의 공장(workshop of the world)’이 되었다. 이런 경제 팽창으로 인해 미국 사회와 문화에서, 비즈니스, 기업(가) 정신, 상업주의, 개인의 열망과 노력, 물질적 성공 같은 가치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증대했다.
지리적⋅경제적 팽창은 인구 팽창과 교통 혁명을 초래했다. 애팔래치아 산맥 이서 거주 인구가 1800년 30만 명에서 1820년에는 2백만 명으로, 20년 만에 7배가량 증가했다. 1818년에는 전국도로(National Road)가 메릴랜드주에서 오하이오주를 연결했고, 1827년에는 오하이오와 볼티모어를 연결했다, 또한 증기기선이 미시시피강을 누비기 시작했다. 1825년에는 이리 운하가 개통되어 동부해안선지대(Eastern seaboard) 중심 도시들10)과 오대호를 연결했고, 다른 여러 지역의 운하 건설을 촉진했다. 1830년에는 첫 증기기관차가 선을 보였고 곧 닥칠 철도 시대를 예견했다(1869년 시카고에서 동과 서에서 온 대륙횡단철도가 연결됨). 이런 교통혁명은 애팔래지아 산맥 이동과 이서 지역을 연결했다. 그 결과, 1820-30년대에 동부와 서부는 서로의 공산품과 1차산업 생산물의 시장 역할을 해주었고, (노예) 노동집약적인 면화 플랜테이션에 기초한 남부(the South)와 직물 공장들이 밀집한 북부(the North), 그리고 소수의 성장하는 도시 물산지들로 구성된 독특한 미국적 경제체제가 형성되었다(Geiger, 2015: 173-174; Potts, 2010: 7-8).

2.2 ‘대학들의 땅’

지리적⋅경제적 팽창과 이에 수반된 교통 혁명과 인구 팽창은 고등교육에 대한 수요를 증대시켰고, 이는 다시 대학 수의 팽창을 낳았다. <표 1>에서 보는 것처럼, 1820년대는 미국이 “대학들의 땅(land of colleges)”이 되어가기 시작한 시기이다(Potts, 2010: xvi, 1).
<표 1>
남북전쟁 이전 미국 대학과 대학생 수
년도 대학 수 전체 학생 수 대학별 평균 학생 수
A B C A B C A B C
1800 20 1천 (전체 동년배의 0.52%) 50
1815 28
1820 2,566 (4년짜리 백인 연령집단의 0.8%)
1828 약 50 약 3,600 8개 대학만이 100 이상, 약 반은 50 미만
= 15-20세 전체 백인 중 1% 미만/
BA 학위 취득자 전국에서 710
1820s 말 100 이상
1840 80 8,324 78 (上同 1.4%)
1850 경 200 이상 1만 (上同 1%) 50
1860 200 이상 78
1880 88

※ 19세기 초반 대학의 수나 대학생 수를 측정하는 공식 기관이 없었기 때문에(Pak, 2008: 38), 이를 조사한 역사가들이 사용한 사료에 따라 통계치가 차이가 난다.

남북전쟁 이전 시기에 대학의 평균 등록생 수는 꾸준한 증가에도 불구하고 대학 수의 증가에 따라 그 절대수치는 계속 낮게 유지되었다. <표 1>에서 보듯 1800-1850년에 대학생 수가 10배 증가하는 동안 대학 수도 10배 증가함으로써, 같은 기간 대학교육 수요의 10배 증가분은 대학 공급의 10배 증가로 상쇠되었다. 그러나 같은 기간 꾸준하게 유지된 평균 등록 학생 수 50명은 매우 낮은 수준이었다. 가이거(Roger L. Geiger) 교수의 표현대로, 당시 미국은 “작은(small) 대학들의 땅”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 점을 고려하면, 이 시기 대학의 공급이 수요를 초과했다는 전통주의자들의 주장이 틀린 말은 아니다(Pak, 2008: 38, 39-40; Geiger, 2015: 206).
당시 대학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첫 번째 이유는 정치적 분권화였다. 19세기 초 독일과 프랑스는 국가가, 영국은 교회가(잉글랜드는 성공회가, 스코틀랜드는 장로회가) 고등교육을 통제했기 때문에, 대륙과 영국에선 대학 설립에 법적⋅정치적 장애물이 많았다. 반면, 미국은 1820년대까지는 연방정부든 주정부든 대학 설립 허가권을 상실했으며, 사실상 누구든 원하면 대학 설립 특허장을 받을 수 있었다. 대학 설립을 저해할 수 있는 법적⋅정치적 장애물의 제거는 미국만의 독특한 분권화된 고등교육 체계의 수립을 가져왔다. 둘째 이유는 정치적 분권화에 상응하는 종교적 분권화였다. 미국 개신교의 어떤 교파(denomination)도 전국은 물론 한 주(의 1/5)도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다11)(Pak, 2008: 39; Geiger, 2015: 194; Potts, 2010: 2).
셋째, 가장 중요한 이유로, 프론티어, 그것도 사람이 거주하는 주로 읍(town) 형태의 ‘부동산 프론티어(real estate frontier)’의 존재를 들 수 있다. 서부의 지방 엘리트들과 사업가들(booster)이 지역의 경제를 활성화하고 삶의 질과 교육적⋅문화적 명성을 높이는 방법으로 대학 설립을 추진했다. 각 교파는 대학을 세속 신도들을 교육하여 미래의 교파 공동체를 형성하는 방법으로 인식하고 경쟁적으로 설립했다. 지방 엘리트나 사업가들도 각 교파의 모금과 대학 운영 능력을 높이 사, 각 교파를 대학 설립의 파트너로 활용하고자 했다. 실제로, 남북전쟁 이전 시기 대학의 약 80% 이상 혹은 1820-1860년에 세워진 180여 개의 대학 중 10개만이 주정부의 통제 하에 있었고, 거의 나머지는 다 교파대학(denominational college)이었는데, 교파대학들은 특히 애팔래치아산맥 이서 지역에 많이 세워졌다(Pak, 2008: 39; Geiger, 2015: 193-195; Potts, 2010: 1-4).
하나 특이한 점은 각 교파들이 목회자 양성을 위한 교육을 자신들의 교파대학보다 별도의 신학대학을 설립하여 실시했다는 점이다. 1820-1860년에 약 66개의 신학대학이 설립되었는데, 1860년에 61개의 신학대학에 2천 명의 학생이 등록되어 있었고, ‘프론티어’ 신학대학 중 1/2 이상이 교파대학 내에 존재했지만, 실상 다수는 교파대학과는 독립적으로 조직⋅운영되었다. 이런 현상으로 인하여, 각 교파대학은 설립 교파로부터 종교적 통제를 받지 않게 되어 높은 수준의 대학 운영 자율권을 갖게 되기도 했지만, 각 교파는 대학 설립 후 통상 자기 교파대학에 직접적인 재정지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파대학은 스스로 재정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사실 모든 대학에게 재학생이 내는 등록금 수입과 기부금 및 모금이 대학의 생존에 매우 중요해졌다(Geiger, 2015: 195-196, 203-205; Potts, 2010: 11).

2.3 교육과정 개혁 요구

19세기 초 미국이 ‘대학들의 땅’이 되어 가면서 유럽과는 다른 독특한 고등교육 체계를 형성해낸 대학에게 두 가지 사명이 우선적으로 요구되었다. 첫째는 신생 공화국의 이질적 구성원들을 결속시킬 수 있는 공통의 가치와 공공선을 교육하여 잭슨 민주주의 시대에 생존 가능한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 수 있도록 지도자들과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일이고, 둘째는 급격한 지리적⋅경제적 팽창 속에서 개인의 경제적 기회와 열망을 성공으로 실현 가능케 해주는 것이었다(Potts, 2010: 1, 4-5). 미국의 건국 이념 두 가지 중, 전자는 공화주의를, 후자는 자유주의 중 개인주의적 가치를 강조하는 것으로서,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가 대학 고등교육이 직면한 문제의 관건이었다.
그러나 당시 대학은 이런 사명을 감당하기 어려워 보였다. 19세기 초 미국의 교육제도는 보통학교(common school), 중등학교(secondary school, ‘grammar school’ 포함), 대학(college), 전문학교(professional school)의 4단계로 구성되어 있었다. 보통학교는 각 지역에서 조직이 되고 일 년 중 일부분만 문을 열었다. 중등학교는 어중이떠중이 사립학교들과 아카데미(academy)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실 남북전쟁 이전 시기에 서부와 남부의 대학들은 대부분 그 정체성, 역할, 기능이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은 아카데미로 출발했다. 1828년 경에 아카데미는 보통학교, 중등학교, 대학 각각의 기능 일부분을 맡아 가르쳤다. 그러나 아카데미는 곧 중등교육에 관심을 집중하게 된다.12) 한편, 남북전쟁 이전 시기의 대학은 대체로 대학(colleges), 아카데미, 과학학교(scientific schools), 전문학교(professional schools) 등으로 구성된 다(多) 조직 기관의 일부였지, 독립적인 기관인 경우가 거의 없었다. 즉, 대학들은 이런 조직 구성의 다양화를 통해 재정 문제를 해결하면서 생존을 모색했던 것이다. 동 시기의 대학, 특히 서부와 남부의 대학들은 주로 중등학교의 기능을 담당하다가 나중에 대학 교과목을 제공하면서야 대학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는데, 이때는 주로 “‘보습 교육(educational upgrading)’”이 대학의 주 역할이었다. 물론 여러 대학에서 중등교육과 직업교육 성격의 수업이 제공되기도 했다. 또한 신학교(school of divinity), 법학교(school of law), 의학교(school of medicine)도 생겨나 이들이 전문교육의 도제제도를 대체하면서 전문교육의 기초를 제공하기 시작했다(Potts, 2010: 5-6, 8; Pak, 2008: 40; Geiger, 2015: 174-175, 194-195, n. 43).
이렇게 이 시기 대학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직면하여 미래의 기능과 역할도 애매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식민지 시대부터 존속해온 9개의 대학과 신생 대학 대부분은 1820년대에 들어 학생 수 감소, 재정 적자, 능력 있는 교수의 부족과 교수의 잦은 이직, 학생 소요 등을 겪고 있었다. 예일대학도 1825년에 그리스어와 라틴어 교육을 4학년에게까지 확장하려 한 직후 심각한 학생 소요 사태를 겪었다. 또한 1820년대 중반 주의 법정 지원이 끝나면서 기부기금이 급감하여 재정 형편이 크게 악화되어, 당시 300여 명이라는 전국 최대 재학생 수를 확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Potts, 2010: 11-12, 21-22; Kimball, 2010: 263).13)
미국이 ‘대학들의 땅’이 되기 전부터, 종합적인 대학교나 전문학교 등이 대안으로 거론되었다. 이 대안의 선택이 여의치 않다면, 남는 방법은 대학 교육과정을 개혁하여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는 보다 실용적인 교과목들을 교육과정에 포함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대 대학의 고전교육 중심의 교육과정은 특히 두 번째 사명을 수행하기에는 부족해 보였다. 본고의 도입부에서 언급한 달링 판사의 예일대학 교육과정에 ‘죽은 언어’를 근대 언어와 ‘실용적’ 과목들로 대체하라는 개혁 요구는 코네티컷 주 상원의원으로서 주의 경제적 성장을 고려한 요구였던 것이다(Geiger, 2015: 175; Herbst, 2004: 221).
이런 맥락에서, 1820년대에 여러 대학에서,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교육과정 개혁에 대해 논의와 실험적 시도가 활발히 일어났다. 1819년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세운 버지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Virginia, 1825년 첫 개교)가 비(非)고전 과목들을 교육과정에 편성했다. 1825년에는 제퍼슨을 추종했던 하버드대학(Harvard College)의 티크너(George Ticknor) 교수가 고전어를 하버드대학에서 계속 가르치려면 교수진에 의해 미리 정해진 필수 교과(prescribed course)가 아닌 선택제(electives)를 통해서 수강해야 하며, 암송(recitation)과 교습은 능력에 의한 분반제로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27년엔 앰허스트대학(Amherst College)이 근대 언어와 근대적 과목(예를 들면 이론 공학이나 기계공학, 교육학)들을 포함시키려 했다. 1828년엔 유니언대학(Union College)이 ‘과학’ 과목을 개설했다. 그러나 이들 개혁은 전통 교육과정의 기본 틀이나 암송 중심의 교수법을 바꾸지 못했으며, 재정적 어려움과 교수진의 능력 부족 등으로 용두사미(龍頭蛇尾) 격으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Geiger, 2015: 175-187; Potts, 2010: 15-20, 24-25, 44-45; Herbst, 2004: 220-221; Ticknor, 1825: 1-46; Amherst, 1827: 1-22).14)

3. 연구사적 관점에서 본 예일보고서

이런 지리적, 경제적, 교육적 변화의 요구 속에서 출간된 예일보고서에 대한 역사가들의 견해는 미국 남북전쟁 이전 시기(antebellum period, 1800-1860년)의 고등교육의 역사를 바라보는, 대략 세 가지 견해에 따라 변화해왔다. 먼저 홉스태터(Richard Hofstadter) 교수와 메츠거(Walter M. Metzger) 교수 등이 이끌며 1950-60년대에 절정에 오른 전통주의(traditionalism) 시각은 대학 수가 급팽창했던 남북전쟁 이전 시기를 미국 고등교육의 “‘대 퇴행(Great Retrogression)’”기로 규정했다. 이들에게 이 시기는 ‘건국의 아버지들’이 장기적인 안목으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영광과, 남북전쟁 이후의 연구중심대학교(research university)의 출현으로 상징되는 ‘고등교육의 르네상스’ 사이에 있었던 “암흑기”였다. 이 시기에 교파 간 경쟁과 질투로 인해서 대학이 수요를 크게 앞질러 지나치게 많이 공급된 결과, 등록 학생 수는 위험스러울 정도로 적었고, 결국 전쟁 전의 대학 “‘폐교율(mortality rate)’”이 80%에 달했다. 나아가 교파들의 대학에 대한 통제로 인해 대학과 대학의 교육과정은 교조주의에 빠져서 시대와 고객의 요구에 제대로 호응하지 못했다(Pak, 2008: 35, 37, 56).
이런 맥락에서 전통주의자들은 남북전쟁 이전 시기 대학 교육과정 일반은 물론, 예일보고서의 주장을 평등한 교육 개혁 요구와 연구중심대학교의 태동을 저지 혹은 지연시키는, 수구적⋅보수적이고, 반동적이며 구시대의 완고한 저항으로 묘사했다(Urofsky, 1965: 53-67; Schmidt, 1936: 46-47; Kimball, 2010: 264, 265, n. 90). 예일보고서의 고전교육 고수 태도는 이들이 예일대학을 “반동적”이며 “보수적이고, 교조적이며, 종파적인 기관으로서 교육(instruction)보다는 훈육(discipline)에 더 관심이 많고 교육과정 혁신에 적대적”인 시대착오적인 존재로 규정하게 만들었다(Pak, 2008: 31-32, 43-44).
한편, 1960년대 이후 출현하여, 최근에는 폿츠(David B. Potts) 교수와 가이거 교수 등이 주도하고 있는 수정주의(revisionism)는 남북전쟁 이전 시기를 미국 고등교육의 정체나 퇴보의 시기가 아니라, 고유한 미국적 고등교육체제가 미국 전역에 뿌리 내리는 태동기라는 견해를 제시하면서 전통주의적 해석을 교정해나갔다. 수정주의 사가들은 이 시기 대학의 팽창을 긍정적으로 분석하면서, 당시 대학의 팽창은 고등교육에 대한 수요가 꾸준히 증가한 데 상응하여 대학 수도 합리적으로 증가한 결과이며, 교파가 대학을 지배⋅통제하는 일은 없었고, 등록생 수가 적어서 어려움을 겪지도 않았으며, 교육과정도 보수적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런 맥락에서 이들은 이 시기 대학 교육과정, 특히 예일보고서는 반동적이거나, 보수적, 혹은 엘리트주의적인 문서가 아니라 당대 가장 높은 수준의 대학 개혁주의자들의 요구만큼 혁신적이었다고 주장했다15) (Pak, 2008: 35-38, 43-44, 56; Kimball, 2010: 264, 265, n. 90; Lane, 1987: 325).
수정주의의 출현으로 예일보고서가 당대의 대학에 대한 사회적 요구에 대한 “반동(reaction)이 아니라 대응(response)이었다”는 견해들이 대두하면서(Lane, 1987: 332), 20세기 말-21세기에 들어 이 보고서에 대해 많지는 않지만, 전통주의와 수정주의의 장단점을 두루 수용 혹은 비판하면서, 보다 다양한 각도와 객관적 입장에서 이 보고서만을 집중적으로 분석한 연구들이 출현했다.16) 이 중 실용주의적 입장을 취한 소수의 연구 중, 팩(Michael S. Pak) 교수는 예일보고서를, “숨막히는 전통주의도 활발한 진보주의도 아닌, 끈질긴 현실주의,” 즉 “현실주의적 성명서(realist manifesto)”라고 규정했다(Pak, 2008: 34-35).17) 앞서 언급한 시대적 배경을 면밀히 고려하면, 실용주의적 견해의 설득력은 매우 높아 보인다.
예일대학 교수진도 예일대학을 포함한 모든 대학과 그 교육과정에 불만이 있으며 이의 변화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있다는 점은 잘 알고 있었다. ‘교수진 보고서’의 첫 부분은 예일대학의 교육과정이 시대의 변화를 수용할 의사가 있으며, 실제로 시대의 변화와 함께 변화해왔다고 강조한다. 예일대학 교수진은 대학 교육과정이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대한 긴박한 요구, “국가적 필요성”, “다양한 개인의 전망”과 열망, 국가가 새로이 띠게 된 “사업적 성격(business character)”을 반영하여, 전문교육과 “상인, 제조업자, 농민이 될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직업교육”을 위한 교과목을 포함하거나 혹은 이를 비학위 과정으로 운영하고, 또는 이런 과목들을 가르칠 아카데미나 전문학교 등을 대학 내의 조직으로 포함하거나, 이런 일을 하기 위한 재정 확보를 위해 입학 기준(즉, 고전어 수준)을 낮춰 보다 많은 학생을 받아들이자는 대중적 요구가 있으며, 이런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대학이 곧 버려질 것”이라는 일각의 의견도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고 설명한다(Yale Report, 1828: 6, 24-25, 42). 물론 일부 대중에게는 대학이 “대학 밖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버려진 낡은 개념과 관습이 계속 유지되는 곳”으로서 “모든 개선이 반대되고 최대한 배제되는 곳”이라는 이미지를 띠고 있으며, “대학에서 가르치는 사람들은 멍청함 면에서 다른 모두를 능가하며, 방앗간에서 계속 같은 원(round)을 돌면서 같은 길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곡물 가는 일을 영원히 수행하는 데 만족하는 사람들”이라는 인식도 일부 있다는 점도 알고 있다고 부연한다(Yale Report, 1828: 43-44).
이어서 ‘교수진 보고서’는 예일대학 교육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이미지를 반박한다. 이 보고서는 예일대학이 시대와 국가⋅사회의 변화에 발맞춰 교육과정과 교과목 변화의 필요성을 늘 인식하고 있었고 교수진은 이 문제에 최우선적인 관심을 기울여 왔다고 강조한다(Yale Report, 1828: 5, 45). 나아가 실제로 예일대학 동문들이 졸업 후 학교를 방문해서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불과 몇 년 사이에 “교과과정(course of studies)과 교수법이 크게 변화했고, 과학 과목들(whole sciences)-화학, 광물학, 지질학, 정치경제 등-이 처음으로 도입된 데 대해 놀라움을 표시했다는 말을 듣는 것”이라고 강조한다(Yale Report, 1828: 5-6, 45). 더 나아가 식민지 시절부터 예일대학이 이끌어온 교육과정의 변화까지 세세히 설명하면서, 영어, 영어 작문과 웅변, 수학, 물리학, 자연사 과목들이 추가되었다고 강조했다(Yale Report, 1828: 44-45).
그러나, 사실 교육과정의 경우 근본은 바뀐 게 없고, 교재 몇 권이 추가된 정도였다. 실제로, 킹슬리 교수는 자신의 그리스어 입문 수업 교재로 늘 주교재 격으로 사용하던 신약 성서에 호머와 Graeca MinoraGraeca Majora라는 선문집을 추가하여 수업을 확장했고, 수학 수업의 경우엔 유클리드를 추가로 읽혔다. 데이 총장은 수사⋅웅변학 교수 1명과, 수학 교수 1명을 새로 임명했고,18) 자기 수학 수업에 삼각함수와 측량을 추가했다. 3학년에게는 불어, 스페인어, 미적분학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과학 쪽에서는 보다 큰 변화가 있었다. 실리먼 교수는 화학 강의에 시연수업(demonstrations) 기법을 도입했고, 광물학과 지질학 과목도 기술적이고 분석적인 방법들을 사용해서 좋은 호응을 얻었다. 실리먼 교수는 화확, 과학의 기초 이론에 대한 이해를 통해 졸업생들이 경제발전을 가능케 하는 학술 지식에 대한 일정 정도의 이해력을 갖추고 주와 국가의 경제발전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교수법으로 강의(lecture)가 일부 도입되기도 했지만, 암송 중심의 말하기, 토론, 쓰기와 연 2회의 구두시험 방식에는 별 변화가 없었다(Geiger, 2015: 187; Herbst, 2004: 219-220; Pak, 2008: 44).
예일대학이 전통적인 고전 중심의 교육과정(고전 그리스어, 라틴어, 수학과 다른 필수과목)과 암송 중심의 교수법이라는 기본 틀을 유지하면서 과학 교과목 몇 개를 추가하는 이중 전술을 택한 데는, ‘고급 문화(high culture)’에 대한 대중의, 특히 학부모와 학생으로 구성된 ‘대학의 고객’의 요구가 크게 작용했다. 사실 대학의 고객들은 고전교육이 식민지 시절부터 국가와 주의 고위 정치인, 관료, 법조인, 목사, 의사 등 상류층이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으며 예일대학 졸업장은 바로 그 보증서였다(Herbst, 2004: 218). 이런 뜻에서 예일보고서는 “학생들뿐 아니라 학부모들도 종종 교육의 내용보다 교육의 이름(name)에 더 세심한 신경을 쓴다”고 언급했다(Yale Report, 1828: 27). 더욱이 고전교육은 이런 직업적 위상에 상응하는 상류층에 속하는 사회적 신분이 꼭 갖춰야 할 ‘고급 문화’를 제공해주었다. 고전문학의 등장인물과 사례들을 인용하며 고전어로 얘기를 한다는 것은 지적인 능력과 성취뿐 아니라 소수만이 갖출 수 있는 체통(respectability), 위엄, 품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Pak, 2008: 46-47; Geiger, 2015: 188).
실제로 예일보고서는, 한편으로는, 고전교육이 여러 높은 수준의 전문직으로 나아가는 데 매우 유용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 한편으로 이 보고서는 고전교육이 ‘고급문화’를 제공해준다는 점도 강조한다. 대학 교양교육은 “보다 높은 신분(higher walks of life)이 될 운명인 사람은 그 누구도 몰라서는 안 될 부류의 지식”을 제공하며, 교양교육은 졸업생들을 “품위를 갖추고 보다 지성적인 [사회] 집단으로 진입할 수 있게 해준다”고 강조했다. 교양교육은 “우월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교양교육을 통해 “넓고 자유로운 견해를 갖추고 탄탄하고 우아한 성취를 이뤄낸” 후 “단순한 재산 소유 이상의 탁월한 [문화] 수준에 올라설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교육이었던 것이다(Yale Report, 1828: 19, 29-30, 31-42, 52-56).
그럼 예일대학은 왜 고객의 요구를 이렇게 중시했을까? 전술한대로 1820-30년대는 대학의 수가 급팽창하던 시기로 대학 간 경쟁이 심화하던 시기였다. 남북전쟁 이전 시기 내내 예일대학은 미국에서 가장 많은 재학생 수를 갖고 있었고 또 가장 명망 있는 대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경쟁에 대비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즉, 예일 같은 최상위 대학도 학생의 확보를 위해 고객의 요구를 고려하여 학교의 “생존과 복리를 위해” 고전어를 필수 교과로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Pak, 2008: 34-35, 41).
실제로 ‘교수진 보고서’는 대학과 교육과정 변화에 대한 “모든 요구들과 관련하여, 문제는 대학이 제안들을 어떤 형태로든 급박하게 채택해야 할만큼의 변화에 대한 대중의 요구가 있는가?”라고 자문한 후, “이 대학의 후원자 대다수가 변화를 요구하는 쪽에 가담하고 있다고 믿을만한 이유가 없다”고 자답한다. 오히려 전술한 대중의 요구대로 교육과정과 대학교육체계를 바꾸면 교육의 질이 떨어져, “대학은 대중의 평가에서 대학이 차지하고 있는 현재의 가치를 유지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게 되어 “대학은 대중에게 불신을 받을 것이고 대학의 명성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상실”되어, 오히려 부모들이 자식을 대학에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연히, 이 보고서는-예일대학의 교육체계를 타 대학에 강제할 의사는 없지만-모든 대학이 모든 계층의 젊은이들에게 높은 수준의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Yale Report, 1828: 24-29, 42-43).19)
따라서, 예일보고서는 “대학이 정체되어 있고, 시대의 요구를 수용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고, [교육과정의] 남용(abuses)을 영구화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고, 그래서 대학은 설립 당시와 거의 마찬가지 상태로 남아있다는 비난은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예일대학에만 국한되긴 하지만”이라는 단서 조건을 달긴 했지만, “지난 세기 동안 이 나라에서 이뤄진 변화가 대학에서 이뤄진 변화보다 더 크지 않다”라는 과도한 주장까지 펼쳤다(Yale Report, 1828: 45-46).
팩 교수의 지적처럼, 이렇게 예일대학이 교육과정과 관련하여 전통과 혁신 간의 타협이라는 이중 전술을 채택한 점을 고려한다면, 남북전쟁 이전 시기에 교육과정의 변화가 없었다는 전통주의의 주장도 틀렸고, 교육과정에 개혁이 있었다는 수정주의 주장도 틀렸다. 예일대학이 고전 교과목을 유지한 것은, 전통주의자들의 주장과 달리, 교파들의 지배나 통제 때문도 아니고, 이들이 교조주의적이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예일대학은 대중 고객의 요구에 응답했던 것이다(Pak, 2008: 43-44, 56).

4. 유산

예일대학은 당대에 미국에서 가장 크고 가장 전국적인 대학이었다. 이런 대학이 채택한 보고서가 강조한 현실주의적 대응의 결과, 남북전쟁 이전 시기에 대학 교육과정은 표면상으로는 꾸준히 피상적인 변화가 있었으나,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하지는 않았다. 고전 교과목-즉, 라틴어, 그리스어, 수학-은 이후 두 세대 동안 미국 대학교육을 지배했고, 고전 언어, 특히 그리스어는 미국과 독일에서 점점 더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고전문학 교육의 중요성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선택제의 도입과 연구중심 대학교의 출현도 함께 지연되었다(Geiger, 2015: 188, 190, 202; Herbst, 2004: 231).
그러나 팩 교수가 지적한 이중 전술이 남긴 유산은 당대보다 후대까지 더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초나 현대나 미국-사실, 대한민국을 포함한 전 세계-고등교육기관들의 작동방식은 매우 유사한데, 예일보고서는 그 방식에 중요한 첫 선례를 남긴 것이다. 예일보고서가 추구한 것은 결국 위험할 수도 있는 전반적이고 근본적인 변화는 피하면서, 그 순간의 대중의 요구와 압박을 무마할 수 있을 만큼만 조정한다는 이중 전술을 신중하게 전개하라는 메시지를 동시대 다른 대학들에게도 전파한 것이며, 19세기 초 이래로 현재까지 이 이중 전술은 미국 대학들과 대학교들의 운영 방식의 기본 전제로 남아있다. 대학들은 지금도 심오한 구조적인 개혁은 계속 미루면서 매년, 매 학기 피상적인 조정(adjustments)만 시행하는 이중 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예일보고서는 이런 부정적인 현상의 모태가 되었던 것이다(Pak, 2008: 57).
하지만, 예일보고서가 교양교육과 관련하여 후대에 남긴 더 중요한 여러 유산은 따로 있는데, 이는 예일보고서가 강조한 대학교육, 즉 교양교육의 목적과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교수법에서 비롯되었다. ‘교수진 보고서’의 I부에서 데이 총장이 규정한 교육의 목적과 교수법은 다음과 같다.
  • 대학[교육]의 목적은 우월한 교육의 기반을 마련해주는 것(LAY THE FOUNDATION OF A SUPERIOR EDUCATION)[이며], … [이 목적은] 정신의 훈육채비(the discipline and the furniture of the mind), 정신의 힘의 확대와 정신을 지식으로 채우는 것에 의해 달성될 수 있다. 이 둘 중, 아마, 전자가 후자보다 더 중요하다(Yale Report, 1828: 6, 7, 강세는 원문 그대로임).

이 주장에 들어있는 교육의 목적 중 ‘우월한 교육’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주장들이 보고서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이 보고서가 남긴 다양한 유형의 유산의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

4.1 교육의 목적과 유산

4.1.1 근대 교양교육의 정체성 제시

먼저 ‘우월한 교육’을 ‘보편적인 기초 이론’으로 해석하면, 예일보고서는 교양교육의 올바른 정체성 확립이라는 긍정적 유산을 남긴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교수진 보고서’ 중 킹슬리 교수가 쓴 II부는 도입부에서 ‘교양교육’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 교양교육(liberal education)은 … 자유학예(the arts and sciences)의 교과목으로서, 정신능력(faculties of the mind)을 강화⋅확장하고, 동시에, 정신능력을 인간의 연구와 지식의 … 주도적인 원칙들(leading principles)에 익숙해지도록 만들도록 최상으로 고안되었다(calculated). 교양교육은 분명히 전문교육과는 다른 것이다(Yale Report, 1828: 30, 이탤릭 강세는 필자의 것임).

여기서 데이 총장이 ‘대학교육’이라고 한 말은, 킹슬리 교수의 용어로는 바로 ‘교양교육’을 의미하는 것이며, 교양교육은 ‘자유학예’에 속하는 교과목들에 들어있는 인간 ‘지식의 주도적 원리’를 교육시키는 것이라는 말이 된다. 허브스트 교수(Jurgen Herbst)의 지적대로, 예일보고서의 영속적 중요성은 이 보고서가 고전, 문학 교육을 방어하여 고전교육을 영구화시켰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학문의 기초원리(fundamentals of learning)를 강조하는 교양교육을 강력하게 정당화했다는 데 있다. 예일보고서 덕에 교양교육-적게는 대학교육-은 현재도 보편적 기초 원리와 이론 교육 제공을 본연의 업무로 알고 이에 전념하려 노력하고 있다. 실제로, 예일보고서는 실용성이나 실천보다 보편적 원리와 이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대학교육의 목적은 “과학(혹은 학문, science)의 원칙들에 대한 전반적인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므로 “[모든] 학예(arts)의 과학적 이론을 획득”하는 것이 “시간순서 상 가장 먼저 이뤄져야 한다”든가, “상부구조를 세우기 전에 주춧돌부터 먼저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이 보고서는 원리를 알면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하게 실천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이런 맥락에서 “실용적 기술은 과학적 정보에 기초한다”든가, “하나의 보편적인 법칙은 천 개 혹은 만 개의 특별 사례를 포함할 수 있다”든가 “과학적 원칙에 대한 지식”은 “실천을 위한 준비”라는 주장이 이뤄졌다(Herbst, 2004: 231; Yale Report, 1828: 16-18).

4.1.2 일반교육제도(general education)의 기초 정립

만약, ‘우월한 교육’을 예일보고서가 중요하다고 매우 강조한 ‘전반적인 교육(thorough education)’으로 이해하면, 교양교육은 전문교육이나 실용적 직업교육과는 다른, 보편적인 일반교육제도(general education)라는 유산과 더불어 근대 대학의 역할과 기능의 정의라는 유산을 후세에 남겨주게 된다.
예일보고서는 예일대학의 “교육체계의 목적은 몇 가지 부류만의 지식으로 구성된 부분적(partial) 교육이나, 반대로 거의 모든 것들의 적은 부분들만을 포함하는 [즉, 수박 겉핥기 식으로 여러 가지를 조금씩 가르치는 것으로 구성된] 피상적인(superficial)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전문교육이나 실용 교육의 자세한 내용을 완결시켜주는 것도 아니며, 전반적인(thorough) 교육을 시작하여 이를 공동 주거에서의 시간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멀리 이끌어 가는 것이다”라고 규정했다. 또한, 전문(직) 교육은 한 분야의 지식 전체를 몇 년을 투자하여 깊이 완벽하게 공부한다는 면에서 ‘부분적’인 교육인데, 이는 여러 학문 분야의 기초 원리와 기본 요소를 두루 공부하는 ‘전반적인 교육’에 비해 열등하며, 실용적 직업교육은 단기간에 겉만 속성으로 가르치는 ‘피상적 교육’이기 때문에 ‘부분적 교육’보다 더 좋지 못하다고도 규정했다(Yale Report, 1828: 18, 19-20, 이탤릭 강세는 원문 그대로임).
‘교수보고서’가 특정한 ‘전반적인 교육’은 ‘문학과 과학’, 즉 당시 예일대학 교육과정을 구성하는 두 부분, 다시 말해서 예일대학 교육과정 전체로서의 교양교육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이 보고서는 예일대학의 “적절한 교육의 목적”이 “문학과 과학에 탄탄한 교육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며, 나아가 “문학과 과학의 여러 분과들 간의 적절한 비율을 유지함으로써 학생들이 [지적인] 특성(character)의 적절한 균형을 형성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하면서, ‘부분적’ 혹은 ‘피상적 교육’과 달리, “전반적인 교육의 기초 작업은 넓고, 깊고, 탄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Yale Report, 1828: 6, 7-8, 10, 이탤릭 강세는 원문 그대로임).
이렇게 문학-즉, 후대엔 인문학과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기초 원리와 이론을 포괄하는 ‘전반적 교육’이라는 개념은 19세기 중반 이후 선택제와 전공(concentration)제도의 성장세에 밀려 쇠퇴했었다. 그러나 1945년 ‘하버드 레드북(Harvard Red Book)’과 함께 교양교육이 ‘일반교육제도’라는 틀 속에서 제공되게 되면서, 교양교육이 전공과 선택제와 더불어 미국 고등교육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이때 나타난 ‘일반교육제도’라는 체제의 정립은 결국 예일보고서가 제시한 ‘전반적인 교육’이란 개념의 부활로 보거나, 최소한 그 개념의 덕을 크게 본 것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한편, 보편적인 기초 원리와 기본 지식을 두루 공부하는 ‘전반적인 교육’의 바로 이런 특성 때문에 교양교육은 ‘부분적 교육’을 하는 전문교육이나 ‘피상적 교육’을 하는 실용적 직업교육과는 정체성을 달리하게 되었고, 이런 ‘전반적인 교육’을 제공하는 대학의 기능은 중등교육기관은 물론 당대의 각종 전문교육기관이나 아카데미와는 다르다는 점을 명백히 한 것이며(Potts, 2010: xv, 6), 이 유산은 현대까지 계승되고 있다. 그래서 전술한대로, 당대 대중이 전문교육과 상업, 농업, 제조업과 기계공업을 위한 직업교육을 교육과정에 포함하거나 혹은 비학위 과정으로 운영하거나, 이런 과목들을 교육할 전문학교나 아카데미 등을 대학 내로 흡수하자는 제안을 했을 때(Yale Report, 1828: 6, 24-25, 42), 예일보고서는 “대학교, 대학, 아카데미, 신학교는 각자 서로 다른 견해에 따라 설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동일한 모델이 아니라 서로 다른 모델로 구성해야 한다”고 하면서 “대학은 대학의 적절한 목적이 있고, 다른 기관들은 각자 적절한 목적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Yale Report, 1828: 6, 24). 이런 구분을 통해서 예일보고서는 근대 대학이 추구해야 할 역할과 기능을 정립한 것이다.

4.1.3 학부 교육과 대학원 교육의 구분 및 전공기초

전술한 대학교육의 목적에서 매우 특이한 점은 교육의 목적이 ‘우월한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반을 마련해주는 것’이라고 한 점이다. 이 말대로라면, 교양교육은 보다 우월한 어떤 교육의 기초를 제공해주는 교육이라는 뜻이 되는데, ‘우월한 교육’을 ‘대학원 교육’으로 이해하면 교양교육은 대학원 교육의 기초가 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 1828년에 325명의 예일대학 재학생 중 3/4이 법학, 신학, 의학 전문학교에 입학하는 상황이었고(<표 2> 참조), 미국교육학회(American Education Society)가 학부 4년의 고전교육과 별도의 신학대학 3년 과정이 연계된 7년짜리 교육 체제(‘Andover system이라 함’)를 선호했기 때문에, 사실상 예일보고서는 학부교육과-향후에 나타나는-대학원 교육을 명확히 구분하는 선을 그어 그 유산을 후대에 전한 것이다(Geiger, 2015: 190, 202, 213; Geiger, 2010: 230-233; Potts, 2010: 1, 6, 24).
<표 2>
예일대학 재학생 수
년도 재학생 수
1811 증감을 거듭한 후, 305
1812 2차 독립전쟁 시작으로 감소
1820s 회복세
1828 325 (의학부 68, 신학부 54, 법학부 20, 거주 대학원생 7, 학부생은 2/3)
1835-36 413
1861 무렵 500
한편, 이 보고서는 교양교육이 전문교육이나 직업교육은 아니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지만, 대학 졸업 후 전문직이나 실용직을 얻기 위해 대학원이나 전문학교 혹은 다른 실용적 교육기관에서 공부하게 될 구체적인 전공의 ‘전공기초교육’의 성격을 띨 수 있는 부정적인 유산을 남기기도 했다. 예일보고서는 “우리 교육과정은 신학, 의학, 혹은 법학 교육을 완성시킬 의도가 없으며, 상업적, 기계공학적, 농업적 관심사의 모든 세세한 부분을 포함하려는 의도도 없다”고 선언하지만, 대학교육은 “학생의 교육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학문의 원칙들에 대한 전반적인 기반을 마련해주는 것”이며, “학문(science)의 원칙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획득하면, 학생은 자신을 상당한 정도로 교육할 수 있을 것이다. 학생은 최소한 어떻게 학습하는지를 배웠다(taught how to learn)”고 강조함으로써, “하나가 … 아닌 … 모든” 전문직종이나 실용직에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는 교육의 성격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보고서는 대학의 교양교육은 “전문직 공부나 상업, 제조업, 농업 분야의 높은 직종 공부를 하기 바로 직전의 4년간에 최대로 해야 하는 공부이다”라든가 “실용적 학예(practical arts)를 공부하는 것의 준비” 성격을 띤다고 강조했다(Yale Report, 1828: 14, 15-16, 19-20, 이탤릭 강세는 원문 그대로임). 이로써 교양교육은 대학 졸업 후의 전공교육의 기초교육적 성격을 띨 수 있는 개연성을 갖게 되었고, 남북전쟁 이후 연구중심 대학교가 성장하게 되어 학부에서도 전문직이나 실용적 성격의 분과들이 생기게 되면, 그 전공 분과의 기초교육으로 위상이 하락할 수 있는 가능성도 갖게 된 것이다.

4.2 교수법과 유산

4.2.1 교양교육과정의 위험한 개방

앞서 직접 인용한 예일보고서가 제시한 교육의 목적과 교수법을 다시 살펴보면, 데이 총장과 킹슬리 교수가 각각 강조한 ‘우월한 교육의 기반을 마련’해주고 ‘인간 지식의 기초원리를 교육’시키는 교수법은 곧 ‘정신의 훈육’, 즉 보편적 ‘정신능력을 강화⋅확장’하는 것이다. 사실 예일보고서는 19세기 미국 교육계에 유행한 스코틀랜드 상식학파(Scots Common Sense School)의 ‘능력심리학(faculty psychology)’20)에 근거하여 이 교수법을 강조한 것이었다. 이 보고서는 “전반적인 교육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있어서, 모든 중요한 정신적 능력들이 필히 훈련 되어져야만” 하며 “대학 교과목의 목적은 대학생들의 [정신적] 능력을 매일 힘차게 훈련시키는 것이 되어야”한다고 강조했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전반적인 교육’에 대한 정신적 훈육을 통해서 얻어지는 정신적 능력에는 암기력, 기억력, 비판적 사고력과 분석력, 종합능력, 의사소통능력, 상상력, 명상력, 귀납적⋅연역적 증명 추론능력, 말하기, 쓰기, 토론 등의 언어능력, 풍부한 어휘력과 감성 능력 등이 있다(Yale Report, 1828: 7-8, 52-53).
사실, 예일보고서는 매우 유사한 전례를 갖고 있었다. 19세기 초 영국에서도 고대 그리스, 로마 공화국, 기독교 스콜라 철학자들, 인문주의자와 종교개혁가들에 의해 조금씩 증보⋅수정된 자유학예(artes liberales)가 주 교육과정을 이루고 있었다. 킴벌(Bruce A. Kimball) 교수의 분류법을 빌자면, 수사학적(oratorical) 전통에 기독교적 색채(영국은 성공회, 미국은 개신교적 색채)가 가미되어 있었다. 따라서 영국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대학의 교육과정은 미리 정해진 필수 과정으로, 정해진 고전 텍스트를 읽고 분석함으로써 훌륭한 시민들의 성격, 행동, 가치의 표준을 훈련시키고 나아가 사회의 지도자들, 즉 지배계층에 대해, 특히, 정치⋅윤리 교육을 시키는 것이 목표였었다(Herbst, 2004: 224; Kimball, 1995: 37-38, 165).21) 이런 고전 중심 교육과정에 대해 1780년대부터 세계 최초로 산업혁명을 시작하여 급속한 경제적 팽창과 그에 따른 사회변화를 겪고 있던 영국도 미국에 앞서 대학교의 교육과정에 대한 같은 비판이 제기되었었다.
1810년 옥스퍼드대학교의 코플스턴(Edward Copleston) 교수는 <옥스포드에 대한 에딘버러 리뷰의 비방에 대한 대답(Reply to the Calumnies of the Edinburgh Review against Oxford)>에서 예일보고서(1828)와 거의 같은 내용과 유사한 표현에 기초한 논지를 전개했었는데, 그 기반 역시 능력심리학이었다(Herbst, 2004: 224-226). 교양교육의 이론적 내용과 실제 교육 사례에 대한 세계적 대가인 로스블랫(Sheldon Rothblatt) 교수에 의하면, 영국에서 이어진 19세기 중반의 교육과정 논쟁에서도 핵심 논제는 여전히 능력심리학이었다.
  • ‘대학교의 유일한 업무는 정신의 힘을 훈련시키는 것’이라는 정서’가 1850년대에 나온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대학에 대한 보고서들을 통해서 울려퍼졌으며, 이후 수 십년 동안 [계속] 들려왔다. 고전 언어와 문학 교사들은 주저 없이 정신의 훈련(mind-training)을 교육의 기본 목적으로 받아들였으며, 표현의 세련됨과 우아함에 앞서 정신의 훈련에 우선권을 부여했다(Rothblatt, 1976: 130).

다만 영국의 사례와 예일보고서 간의 큰 차이점은 영국에선 고전만이 “그렇게 유일하게 혹은 그렇게 효과적으로” 정신을 훈련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 반면(Rothblatt, 1976: 130-131), 예일보고서는 정신의 훈육은 고전을 통해서 가장 잘 달성된다고 강조했지만(Yale Report, 1828: 31-42, 52-55), 정신의 훈육을 할 수 있는 과목을 고전이나 다른 특정 과목으로 국한하지는 않았다. 전술했다시피, 예일보고서는 ‘균형’ 잡힌 정신적 능력의 발전을 중시했고, 이런 ‘균형’은 ‘전반적인 교육’, 즉 예일대학의 교육과정의 두 축인 ‘문학과 과학의 여러 분과들 간의 적절한 비율을 유지’함으로써 형성 가능한 것이었다(Yale Report, 1828: 6, 7-8, 10). 따라서 예일보고서는 정신 훈육의 가능성을 모든 지적 노력을 기반으로 이론적 접근을 추구하는 모든 학문분과들에게 열어둠으로써, 고전뿐 아니라 자연과학도 기초 이론을 탐구함으로써 정신 훈련을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Herbst, 2004: 230).
그러나 예일보고서는, 킴벌 교수가 지적했듯이, 중요한 정신적 능력을 기반으로 하는 이론 중심의 접근법을 강조한 점 때문에, 교양교육과정에 “비자유로운(liberal-free)” 철학적 전통을 가진 학문 분과나 연구중심대학교의 분과들이 진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Kimball, 1995: 152; Herbst, 2004: 230). 사실, 고전 중심 교육과정의 개혁 논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개혁을 지지하든 반대하든 모두 능력심리학 신봉자였다. 당대 교육과정 논쟁에서 웨일랜드(Francis Wayland)나 엘리엇(Charles William Eliot) 하버드대학 총장도 능력심리학 논리에 기초하여 선택제의 도입을 주장했다(Potts, 2010: 46-50).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팩 교수의 지적대로, 능력심리학은 고전 그리스어나 라틴어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라고 추천하지도 않았으며, “내용 중립적인(content-neutral) 교육철학”이었기 때문에, 정신적 능력은 고전 그리스어나 라틴어 외에도 “무수히 많은 과목(myriad of subjects)”에 의해서 발전 가능했다는 점이다(Pak, 2008: 34, 51-52; Potts, 2010: 46-47).22) 따라서 이론적으로, 예일보고서는 전문교육이나 실용적 직업교육을 중시하는 학문 분과가 자신들도 이론교육에 기초하여 정신적 능력 개발을 할 수 있고, 그 능력은 다른 관련 학문 분야나 그와 관련된 직업 및 일상생활에 두루 전이(轉移) 가능한 범용성(汎用性)을 띠고 있다고 주장하면, 이들도 얼마든지 교양교육과정에 진입할 수 있는 문을 열어놓음으로써, 후대에 교양교육의 정체성이 모호해 질 수 있는 가능성도 동시에 열어놓은 셈이다.

4.2.2 교양교과목의 필수화

예일보고서는 몇 가지 논거에 기초하여 당대에 교양교육과정을 필수 과정으로 규정함으로써, 후대에까지 교양교육과정의 상당 부분이 필수 교과로 제공될 수 있는 선례를 남겼다. 이론적으로 능력심리학은 교수자 중심의 이론이다. 오직 교수자만이 학생의 정신을 훈육할 수 있고, 학생이 강화해야 할 정신 능력은 어떤 것인지 또 이를 위해서 어떤 교육과정이 필요한지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수법에 있어서도 튜터가 이끄는 암송 중심의 수업이 교수가 하는 강의보다 우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정신의 훈련에 있어서 전자는 학생이 수동적으로 수업에 참여하지만, 후자는 능동적으로 참여하기 때문이다(Rothblatt, 1976: 130, 131). 이런 이론에 근거하면 교육과정은 교수진이 결정하는 필수과정이어야 하지 학생이 선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것이다.
한편, 다른 논거에 의해서도 당대 교양교육과정은 필수과정으로 제공될 수밖에 없었다. 예일보고서는 정신적 훈육에 적합한 “교과목들은 미리 정해진 필수과목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이는 ‘우월한 교육의 기반을 마련해주는 것’은 “부모의 감독(parental superintendence)을 대신 할 대리인이 필요한 인생의 시기에 이뤄져야만 한다”는 주장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Yale Report, 1828: 6, 7, 이탤릭 강세는 원문 그대로임).
이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대학의 특징 중 하나가 “학생들이 일반적으로 부모의 감독의 대리인을 필요로 하는 나이라는 점”인데, 실제로 통상 16세에 대학에 입학하던 대학생(법으로 14세 미만은 입학 금지)들은 미성년자, 즉, 어린 나이에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 “경험해보지 않은 유혹의 감각에 노출되어”있는 미성숙한 존재였다. 따라서 이제 대학은 부모 대신의 “충실하고 애정어린 보호자(guardian)”로서, 멀리 전국 각지에서 온 이런 청소년들을 공동의 “거주지(residence)”에 사는 “하나의 가족”23)으로 받아들여, 학생들과 “상호 애정과 신뢰”의 기반 위에서 “친절한 설득을 통한 영향력”이나 필요하다면 “처벌”도 동원하여 “학생들의 손을 잡고 그들의 발걸음을 인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Yale Report, 1828: 9-10, 13, 22-23).
허브스트 교수가 지적했듯이, 미국 대학의 학생들은 아직 연장된 중등교육을 마치지 못해서, 그래서 ‘성숙 증명서(certificate of maturity)’를 받지 못한, 대륙식 용어로 말하자면, 대학생(student)이라기보다는 중등학생(pupil)이고, 성인(adult)이라기 보다는 청소년(adolescent)이었다.24) 또한, 이런 학생들이 다니는 미국 대학은 대륙, 특히 독일과 프랑스의 대학 예비학교인 김나지움(gymnasium)이나 리세이(lycee)에 상응하는 것이었지, 대륙의 대학교(university)에 상응하는 기관이 아니었다. 이제 부모의 책임을 갖게 된 대학은, 따라서, 학생들에게 육체적 정신적으로 훈육을 강제할 수 있게 된것이다(Herbst, 2004: 228). 다시 말해서, 이런 논리에 근거하여, 대학은 학생들에게 미리 정해진 필수 교과목(prescribed courses)을 강제할 수 있었으며, 이는 교과목 선택권의 거부, 즉 당대 요구되기 시작하던 ‘선택제(electives)를 거부하는 논거로 사용될 수 있었다. 나아가 후대에 교양교육과정이 부분적으로 필수과정으로 정립되는 데 기여했다.

4.2.3 목적과 수단의 전도

예일보고서가 남긴 여러 긍정적⋅부정적 유산 중 가장 중차대하고 가장 부정적인 유산은 이 보고서가 교양교육에서 정신의 훈육이라는 도구⋅수단을 사실상 교양교육의 목적으로 도치함으로써, 교양교육에서 사회적⋅도덕적⋅윤리적 목적과 덕성이 실종될 수 있는 가능성을 크게 열어놨다는 점이다.
예일보고서가 고전 중심 교육과정을 방어하기 위해 전이 가능한 범용적 정신적 능력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이 보고서는 신생 공화국 미국이 직면한 이중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신생 공화국 미국은 한편으로는 영국으로부터의 분리⋅독립을 정당화하고 미국의 이질적 구성원들을 결속시킬 수 있는 공공선을 필요로 했다. 또 한편으로 미국은 지리적⋅경제적 급팽창으로 기업가적⋅사업적 가치, 개인의 경제적 생산성, 노력, 자기수양과 열망, 물질적 성공 등이 새로운 공공선과 덕성의 표상으로 떠올랐는데, 이런 “신공화주의(neo-republican)”적 가치를 수용할 방법이 필요했다(Lane, 1987: 326, 328-330, 332, 336). 전자의 과제에 대해, 예일보고서는 고전교육이 고전적 공화주의적 덕성-자유, 애국심, 고상하고 관용적인 행동, 도덕적 가치, 시민적 및 종교적 자유, 자치 등-을 제공한다고 강조함으로써 첫 과제를 해결했다(Yale Report, 1828: 51-52). 그런데 이 고전적 공화주의적 덕성을 강조한 것은 ‘교수진 보고서’가 아니라 톰린슨 주지사가 쓴 ‘위원회 보고서’였다. 후자의 과제와 관련하여, 예일보고서는 고전적 공화주의라는 방법으로는 이 “문화적 변환”을 수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예일보고서, 특히 ‘교수진 보고서’는-전술한대로-고전교육을 통하여 범용성을 띤 정신적 능력을 훈육하여 각종 전문직뿐 아니라 상업, 제조업과 기계공업, 농업 관련 일자리에 전이할 수 있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이제 정신적 능력은 “사회적 유용성(social utility))”을 띤 새로운 공공선이 되었다(Lane, 1987: 332-337).
이런 신공화주의의 실현에 대해, 폿츠 교수는 예일대학의 ‘전반적인 교육’이 졸업 후의 전문학교 교육이나 모든 실용적 직업에 널리 적용할 수 있는 정신의 훈육을 제공함으로써 “급변하는 시대에 개인의 성공에 대한 현저하게 실질적인 준비”를 시켜주었으며, “미국 고등교육 발전의 중요 순간에 교양교육에 새로운 깊이와 자신감을 부여했다”고 함으로써, 이 현상을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Potts, 2010: 6). 또한 허브스트 교수도 대학교육의 목적은 정신 훈육이라는 자신들의 신념의 중심에 능력심리학을 위치시킴으로써, 이를 고전이라는 과거의 관행과 지혜를 보존하는 것뿐 아니라, 과학이라는 미래의 고등교육의 교과목을 수용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사용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전통주의자인 홉스태터 교수가 주장한 ‘대 퇴행’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Herbst, 2004: 229-230, 230-231).
그러나 예일보고서는 시대적 과제인 신공화주의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교양교육의 목적과 수단을 전도시켰다. 능력심리학은 어떤 교과목의 어떤 내용을 통해서라도 전이성과 범용성을 띤 정신적 능력을 훈육할 수 있기 때문에, 교양교육의 도구이자 기술인 정신적 능력이-전술한대로-‘내용 중립적’인 개념에 더해서 ‘가치 중립적’인 개념도 되도록 만들었다. 더 나아가, 정신적 능력이 교양교육의 내용과 덕성 및 공공의/윤리적⋅도덕적 목적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이보다 상위의 개념이 되는, 목적과 수단 간의 전도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이렇게 정신적 능력은 교양교육으로 하여금 “명확한 공공의/도덕적 목적”이나 “방향성”을 결여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교양교육은 더 이상 시민성(citizenship)의 전제조건이 되지 못하게 되었다(Lane, 1987: 336, 337-338, Neem, 2019: 419-420; Potts, 2010: 46-47).25)
사실, 예일보고서는 앞서의 직접 인용문에서 대학교육의 목적으로 정신의 훈육과 더불어 ‘정신을 지식으로 채우는 것’도 강조했었다. 그러나 튜터가 주관하는 암송 중심 수업은 돈이 적게 드는 교수법일 수는 있어도 학생들을 잘 가르칠 수는 없는 방법이었다. 각 과목과 교재에 대한 튜터의 지식 수준도 낮았고, 학생들의 고전 그리스어와 라틴어 수준뿐 아니라 교재 속의 지식 습득 및 이해 수준도 낮았다. 당대 예일대학 졸업생의 표현대로 1826년의 예일대학의 암송 수업은 교육이나 가르침보다 “뛰어난 반복연습(drill) 체제”였다. 여기에선 예일보고서가 약속한 ‘전반적인 교육’이 아니라 ‘피상적인 교육’이 이뤄지고 있었던 것이다(Hofstadter and Smith, 1961: 275; Geiger, 2015: 205-206).

5. 나가며

지식이 채워지지 않은 정신으로는 덕성을 설정할 수 없으며, 지식과 덕성이 없이는 당연히 공공의 선과 도덕적⋅윤리적 목적도 설정할 수 없다(Lane, 1987: 334).26) 예일보고서가 고전 교육을 방어하기 위해 동원한 능력심리학 논리는 결과적으로 바로 이런 교양교육의 아노미 상태를 초래한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교양교육도 이런 현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대한민국의 교양교육은 ‘핵심역량’ 개념에 포획되어 ‘핵심역량 기반 교양교육’(손승남 외, 2021: 22-25)이나 ‘인성역량’(조혜경, 2021: 72, 76, 81, 82)과 같은 개념을 제시하면서 교양교육이 추구해야 할 덕성과 가치에 대한 논의를 뒷전으로 밀어놓은 상황이다. 예일보고서의 유산에 대한 분석이 이런 대한민국의 상황에 심각한 경종을 울려주기를 기대한다.
이미 반세기보다 더 이전에 부르디외(Pierre Bourdieu) 교수는 “교육체계가 증대하는 다양한 직업활동에 대한 준비에 점차 맞춰지게 되면, 그 교육체계는 교육받은 계층의 문화적 통합을 위협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한 로스블랫 교수도 19세기 중반의 영국 교양교육학계에 큰 영향을 미친 능력심리학을 다루면서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
  • 그때[즉, 19세기에]는 교양교육이 정신 훈련(mind-training)의 문제가 되었다. 특정 과목 혹은 학문 분과의 가치는 그것이 배양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의 숫자에 놓이게 되었다. … 오래된 가치들-영광, 정신의 고상함, 위엄, 관대함, 후함(liberality)-은 … 사라지고 그 자리를 뇌의 자질(cerebral qualities)이 차지했다. [교양]교육[의 지향점]이 사회적 혹은 사회-도덕적 목적에서 그런 목적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지적 수단으로 이동했다(Rothblatt, 1976: 131-132, 이탤릭 강세는 필자의 것임).

Notes

1) 본 논문에서 ‘대학’은 ‘college’를, ‘대학교’는 ‘university’를 의미한다. 그러나 남북전쟁 전에 존재하던 10여 개의 ‘대학교(university)’도 이름만 ‘대학교’였지 실상은 다 자유학예대학(liberal arts college)이었다(Potts, 2010: 9).

2) 예일대학 자치운영위원회와 별도 위원회의 구성원이기도 했음.

3) 그 역시 예일대학 자치운영위원회와 별도 위원회의 구성원이기도 했으며, 특히 당시 부상(浮上)중이던 잭슨(Andrew Jackson) 대통령의 민주당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Potts. 2010: xvi, 3-4).

4) ‘예일보고서’의 원래 제목은 ‘Reports on the Course of Instruction in Yale College; by a Committee of the Corporation and the Academical Faculty (New Haven: Hezekiah Howe, 1828)’이다. 이 보고서는 총 세 개의 보고서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보고서의 영문 명칭은 어떤 형태로든 복수(‘Yale’s Reports’, ‘Yale Reports’, ‘Reports of Yale’ 등) 형태를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이미 단수 형태가 널리 사용되고 있으므로 본고도 단수 표기를 사용했다.

5) 본고의 경우 Yale Report를 인용할 때, 이 보고서를 원래 56쪽짜리 팸플릿의 형태 그대로 수록한 David B. Potts의 연구(2010: 85-140)를 활용했다. 다만, Potts의 연구는 예일보고서가 실린 첫 쪽과 마지막 쪽의 번호, 즉 ‘85’와 ‘140’만을 표기하고 중간의 쪽 번호는 모두 표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고는 원래 팸플릿의 쪽 번호(1-56)를 사용하여 Yale Report의 인용 부분을 표기했다.

6) 예일보고서가 이 학술지(The American Journal of Science and Arts 15 (January 1829), 297-351)에 출판될 때의 제목은 ‘Original Papers in Relation to a Course of Liberal Education’이었다. 이후에도 실리먼 교수는 기회가 될 때마다 예일보고서를 지지하는 주장을 펼쳤다(일 예로, Hofstadter and Smith, 1961: 306-307 참조). 예일대학은 이 보고서를 1830년에 두 번째로 인쇄, 출판했다(Potts, 2010: xvii).

7) 본고에서 ‘교양교육’은 별도의 표기가 없는 한 ‘liberal education’을 의미한다.

8) 매우 드물게 예일보고서를 다룬 국내 연구(한철희, 2009: 409-441) 역시 이 보고서를 보다 큰 신학적 주제 속에서 부분적으로 다루었다.

9) 19세기 초에 처음 출현한 근대민족주의는, 전(前)근대부터 존재했던 혈연과 문화(언어, 종교, 역사적 기억 등)적 특성의 공유를 강조하는 종족주의적 민족주의(ethnic nationalism)와 달랐다. 근대민족주의는 시민혁명의 기본 사상이었던 자유주의가 인정하는 권리를 법에 의해 시민권으로 인정받은 사람, 즉 ‘시민’들의 모임을 ‘nation(‘국민’ 혹은 ‘민족’)’으로 규정하며, 이런 원리에 입각해서 세워진 나라를 ‘modern nation state’, 즉 ‘근대국민국가’ 혹은 ‘근대민족국가’라고 규정한다.

10) 예일대학 소재지인 New Haven 포함.

11) 1850년에 어떤 교파도 한 주에서 20% 이상의 인구를 교민으로 갖고 있지 못했다(Geiger, 2015: 194).

12) 가장 지배적인 형태의 중등교육 기관이었던 아카데미는 후에 출현하는 공립고등학교(public high school)로 점차 대체된다(Potts, 2010: 6).

13) 1820년대 말 예일대학 등록금은 1년에 33달러였다(Potts, 2010: 21).

14) 1828년까지는 유럽, 특히 독일 유학 경험이 있는 젊은 미국 학자들이 귀국하여 미국 고등교육의 개혁을 시도했는데, 독일식의 ‘가르칠 자유’와 ‘배울 자유’를 강조한 독일식 모델이 이들에게 미친 영향의 정도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이뤄졌다(Kimball, 2010: 273, n. 112).

15) 전통주의와 수정주의의 두 흐름에 대한 간략한 정리와 대표적 연구들에 대해서는, Pak, 2008: 31-33, ns. 3, 5, 7, and passim 참조.

16) 이런 최근의 연구들로 Carnochan, 2002; Huston, 2015; Lane, 1987; Neem, 2019을 들 수 있다.

17) 또 하나의 뚜렷한 현실주의적 입장을 취한 연구로 Herbst, 2004를 들 수 있다.

18) 당시 예일대학에는 총장 포함, 총 5명의 교수가 있었음.

19) 최근의 몇몇 연구들에 따르면, 1828년에 전술한 ‘잭슨 민주주의’ 시대가 출범하고, 또 마침 다양한 신문, 잡지 등의 출판물의 번성과 교통⋅통신의 발달로 공론장이 형성된 상황에서, 실제로 예일대학은 예일보고서에 대한 대중여론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많은 홍보 활동을 벌였다. 예일대학이 홍보 노력을 통해 대중을 설득하여 예일보고서에 대한 민주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냈다는 점은 곧 시민들이 교양교육 교육과정의 가치를 결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예일보고서는 미국의 민주주의 문화와 정치의 발전에도 기여했으며 교양교육의 내용은 이후로도 계속 민주 시민들과 민주주의 문화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Neem, 2019: 401-422; Huston, 2015: 13-24; Potts, 2010: 12-15, 29-30, 37-38, 40-44).

20) 상식학파는 선험적 추론을 불신하는 잉글랜드의 흄(David Hume)이 주도한 경험주의적 회의론에 반하여 리드(Thomas Reid)가 수립한 학파로서, 이들이 주장한 능력심리학에 따르면, 인간은 별개의 선천적인 기능과 정신적인 능력을 갖고 태어났으며 이 능력에 의해 지식을 획득할 수 있으므로, 교육을 통해 이 능력을 개발해야 한다. 인간의 정신은 몇 개의 영역으로 구성되고 각 영역은 특정 정신 능력과 연계되어 있다. 반면, 로크(John Locke)의 Tabula Rasa론은 인간의 정신은 백지로 태어났고 (즉, 선천적인 정신적 능력이나 지식을 갖고 태어난 것이 아니며) 경험과 감지⋅인지, 즉 학습에 의해 지식을 습득한다고 본다(Kimball, 2010, 265-266, n. 91: Pak, 2008: 50; 한철희, 2009: 413-416).

21) 자유학예의 철학적(philosophical) 전통은 17세기 과학혁명에서 다시 부활하여, 18세기 계몽사상에서 큰 힘을 얻었다. 그러나 이들 자유 사상가, 실험가, 근대주의자, 그리고 철학자는 기본적으로 교육기관 밖에서 활동했다(Herbst, 2004: 224; Kimball; 1995: 126).

22) 1820년대까지는 능력심리학의 원산지인 스코틀랜드의 대학들은 ‘죽은 언어’들의 무용성을 주장하면서 문화적⋅지적 독립성의 상징으로서 非고전 중심 교육과정을 추구했다(Pak, 2008: 52).

23) 이런 맥락에서도 19세기 미국 대학이 대체로 ‘기숙학교(residential college)’가 된 이유와, (미국에서) ‘모교(母校, Alma Mater)’가 학부과정인 대학을 지칭하지, ‘부모 슬하를 떠난 성숙한 어른’이 다니는 대학원을 지칭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24) 예일보고서 전체에서, 사전적으로 ‘미성년자’, ‘피보호자’, ‘어린 학생’을 의미하는 ‘pupil/pupils’이란 용어는 10회 사용되었고, ‘학생(student/students)’이란 용어는 69번 언급되었다.

25) 한편, 능력심리학이 가치 중립적이라는 말은 정신적 능력이 계급, 종족-민족, 인종, 젠더에 따라 차등적이지 않다는 주장을 가능케 하며, 따라서 특정 자격(즉, 라틴어 기반 예비 교육)을 갖춘 모든 사람은 평등한 대학교육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논리의 연장 선상에서, 미국 대학은 독일의 김나지움이나 프랑스의 리세이와 달리 계급에 기반한 교육기관이 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런 면에서 능력심리학에 기초한 예일보고서는 결국 미국 대학들이 유럽의 중등교육기관들이나 영국 대학교들의 대학들보다 모든 집단의 학생들에게 보다 입학하기 쉬운 기관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게 했다(Pak, 2004: 231; Lane, 1987: 335).

26) 예일보고서 전체에 걸쳐서 ‘덕성(virtue)’라는 단어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Lane, 1987: 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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