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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General Edu > Volume 15(2); 2021 > Article
교양교육에서 듀이적인 과학 이미지의 활용에 관한 연구

초록

교양교육에서 과학 개념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과학은 그 폭넓은 활용에서 모든 학문 분야에 침투하며, 학문의 객관성을 보증하고 그 학문에 임하는 자의 정신을 해방시킨다. 교양교육 역시도 일반교육으로서는 모든 학문 분야를 포괄하고 자유교육으로서는 인간 해방이라는 목표를 지니고 있기에, 과학은 교양교육의 심장부에 자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 교양교육에서 과학은 그 폭넓은 의미보다는 자연과학이나 공학 분야에 제한되는 좁은 의미에서 전문적인 과학기술의 결과물을 가리키게끔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과학이 갖는 포괄적인 의미는 내용이 아니라 방법이나 태도에서 발견된다. 경험이나 실험을 통한 사실 확인이 이뤄지기 전에는 모든 이론적 지식에 가설적 지위만을 부여하는 방식, 기존에 주어진 사실보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고 모색하는 태도가 바로 그런 과학의 본령에 해당하는 것이다. 듀이의 과학 이미지는 과학이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는 도구가 됨과 동시에 사실에 기초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 새로운 가능성들 내지는 목표들을 찾게 해주는 인간 활동임을 가장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일상적 삶과 맞닿는 소박한 방식으로 드러낸다. 이런 듀이적인 과학 이미지를 교양교육에 도입할 때, 교양교육은 일반인을 위한 일반교육과 자유인을 위한 자유교육으로서 그 기능을 다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Abstract

The concept of science has been widely used in the field of general or liberal education. Science, in its extensive usage, permeates all of the academic regions to insure their objectivity and liberate the participants therein. As general or liberal education also covers all of the academics in an overall aspect, while also aiming for the liberation of people, the spirit of science penetrates to the heart of such an education. But it seems that the usage of science is narrowly restricted only to the results of professional scientific technology, and not in a broader sense.
The inclusive feature of science is embodied not in its content, but in its method or attitude. Science finds its proper province by giving only a hypothetical status to all of the theoretical knowledge, till this knowledge is confirmed through experience or experiments. Furthermore, new possibilities arise allowing for learners to explore, rather than safely remaining confined in the given facts. The Deweyan image of science intelligibly reveals in a most humble and intimate manner that science is a means of giving meaning to the so-called facts, while at the same time letting its practitioners inquire into new possibilities that transcend those facts.
This study argues that the Deweyan science image may be accommodated into the general or liberal education curriculum. For there that it might function well as an educational avenue for liberals, as well as for those in other fields of study.

Key Words

General education; John Dewey; Science; Method; Possibility

1. 서론 - 과학의 교양 교육적 의의

사람들은 대개 일상적인 의사결정에서 애매함과 망설임을 싫어하고 쉽게 단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는 시간을 내어 곰곰이 성찰할 필요가 있는 복잡한 문제에서도 그런 경향을 보이곤 한다. 이런 성향이 집약되어 표출되는 인간 행태를 보면, 질서정연하고 안정된 것들을 좋아하면서 별 근거가 없는데도 행해야 마땅한 것으로 간주하곤 한다. 익숙하고 편안한 것이 쉽게 진리의 잣대가 되며, 무심결에 독단적인 오류에 사로잡히곤 한다. 번뜩이는 관념이나 아이디어가 생기면, 속단을 좋아하고 신중한 판단을 싫어해서 시험이나 검증 없이 있는 그대로 채택하고 실행해버린다. 표면적이고 근시안적인 대응에 만족하고, 순조롭게 일이 지속되면 자신의 생각이 확인되었다고 여긴다. 설령 실패한다고 해도 자신의 잘못이라기보다는 불리한 상황이어서 그렇다고 불운 탓으로 돌려버린다. 심지어는 자신의 생각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확인하지 않는 과감함을 자랑스레 여기기도 한다.
듀이(John Dewey)는 이렇게 얼핏 자연스러워 보이는 인간적 성향이 가져올 수도 있는 해악에 대해서 ‘과학’이 인류를 보호하는 안전장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Dewey, 1916d: 189). 과학은 그 결과를 시험하고 음미하는 과정 속에서 더욱 깊이 사고함으로써 발전시킨 방법과 구조를 담고 있다. 그래서 그 결과를 확인하지 않고 다소간에 충동적으로 이뤄지는 인간의 의사결정이나 행위는 과학의 시험에서 살아남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런 과학은 학습되는 것으로서 교육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과학적 정신이 교육적으로 전수되지 않으면 효과적인 반성을 이끌어내기 위해 인류가 지금까지 고안해낸 가장 좋은 도구를 얻을 수 없다. 듀이가 보기에 그렇게 가장 좋은 도구를 사용하지 못하고 탐구와 학습에 임하게 되면, 한갓 의견에 불과한 것과 검증된 것을 구별하는 특징들을 알 수 없고, 결과적으로 지식의 완전한 의미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듀이는 또한 과학적 방법이 갖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성격을 지적하며 사회 문제의 해결을 위한 열쇠로서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Dewey, 1988: 271). 과학적 방법은 과학자들이라고 칭해지는 사람들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보다 폭넓은 범위의 사람들이 이 방법을 따르고 있다. 과학자들이 하는 작업의 산물인 지식과 아이디어의 체계는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에너지와 대상을 지성적이고 개방적으로 다루는 방법의 결실인 것이다.
퍼트남(Hilary Putnam) 역시도 듀이와 마찬가지로 과학이 폭넓은 적용 범위를 갖는다고 주장한다(Putnam, 1994: 481-491). 그가 보기에 ‘과학’ 개념은 그 대상에다 객관성을 부여하는 포괄적 개념으로서 인간의 실천영역 전반에 걸쳐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자연과학은 다만 그 성과로 인해 큰 영예를 얻은 전형적인 사례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이런 시각 역시 과학의 내용보다는 과정이나 방법에 초점을 맞춰 실천적 사용에서 드러나는 그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성격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과학이 갖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성격과 인간 정신의 해방이라는 그 교육적 효과를 감안하면, 무엇보다도 일반교육과 자유교육을 동시에 지향하는 교양교육 분야에서 과학이나 과학적 방법이 갖는 교육적 의미에 관해 관심을 갖고 주의 깊은 성찰을 수행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실제로 ‘과학’은 소위 과학적 방법을 사용한다고 하는 분야 모두를 통칭하는 용어로 활용되고 있기에, 우선적으로 과학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쓰이고 있는지 살피고 그런 쓰임새가 과학이 줄 수 있는 교육적 효과를 충실하게 발휘하도록 기능하는지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내용의 측면에서 과학의 의미를 검토한다고 해도, 역시 과학적 방법에 준하는 과정이나 태도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로서 자리함을 볼 수 있다. 교육 분야에서 가장 통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내용으로서 과학의 의미는 ‘조직적인 구조로서 지식 체계’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다만 잡다한 지식을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중심으로 지식들이 짜임새 있게 연결되어 기능하고 있어야 하는 조직성의 요건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러한 지식체계가 ‘과학적인’ 교육을 위해서 이용된다면, 단순히 결과적인 지식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그런 ‘조직적인’ 지식을 얻는 과정 내지는 태도에 집중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결과에 불과한 지식체계를 주입하고 암기한다고 하여 학습자 스스로가 조직적인 과학에 어울리는 활동을 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과학지식을 기억하고만 있다고 하여 실제 과학자처럼 스스로 어떤 새로운 지식을 추구하고 그것을 조직적으로 산출할 수 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과학적 지식만이 아니라 과학의 과정에 대해서 알거나 체험할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어떤 주제를 설정하고 과학자들이 행하는 방식의 절차를 거쳐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밟아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과정이 내보이는 가장 본질적인 특징은 인문이나 사회 분야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다. 다만 문제의 주제나 분야가 달라질 뿐이다.
그렇다면 실제 우리의 교양교육 현장에서는 얼마나 과학적인 교육을 실시하고 있을까? 예컨대 교양교육기관이 독자적으로 담당하고 있는 과학 교육에만 시야를 좁혀 살펴보자. 자연과학 분야를 보면, 기초과학 몇 과목과 실험을 이공계 학생들 중심으로 개설하고 있고, 일반 학생들을 위해서는 한두 과목의 생활과학이나 과학사 과목을 이수하도록 되어 있다(손향구 외, 2018: 203-210). 인문사회 분야는 문학, 철학, 고전, 경제학, 정치학 등의 관련 과목을 이야기나 역사나 인물 또는 사회이론 중심으로 개설하고 있다(윤유진 외, 2018: 272-276). 그런데 어느 분야이든 대개 완결된 지식체계를 소개하거나 전달만 하고 있지, 그 완결이나 완성의 과정을 스스로 경험하게 하는 방식의 교육은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실험과목 등에서도, 목표와 주제, 도구와 방법이 이미 설정된 상태에서 정해진 실험 기법을 익히게 하는 방식에 머물러 있지, 스스로 어떤 주제나 문제를 설정하고 그 해결을 위한 가설을 구상하여 실험을 조직함으로써 해당 가설을 입증하게 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내용보다는 방법이 강조되는 철학 등의 과목에서도 과거 사상을 전수하여 이해시키는 수업이 주로 이뤄지지, 그런 사상을 재료로 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아이디어를 창출해보게끔 하는 방식의 수업은 비교적 드문 편이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이며 자유로운 과학적 교양교육의 가능성을 지향하면서, 교양교육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과학관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세 명의 과학 사상가를 인용하여 살피고 검토해볼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과학관 중에서 무엇보다도 과학적인 교육에서 방법이나 태도를 강조하는 듀이적인 과학관을 조명하고, 그에 따른 과학 이미지를 구성해볼 것이다. 다음으로 그런 듀이적인 과학 이미지가 교양교육에서 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제시하여 그 활용의 이점을 주장할 것이다.

2. 과학관의 탐색과 그 교육적 적용

1936년은 전-세계적인 대공황, 나치와 무솔리니의 파시즘 및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동맹 선언 등, 사회적인 불안이 극도로 높아진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 영미권의 두 학자인 허친스(Robert M. Hutchins)와 혹벤(Lancelot Hogben)은 과학적인 교양교육에 관하여 서로 전혀 상반되는 이론을 발표하였고, 이 이론은 오늘날까지도 교양교육 운영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듀이 역시 같은 해에 발표한 「교육의 합리성」(Dewey, 1987a)에서 이들 두 학자의 저작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과학관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지금 시기 역시 전-세계적인 질병 확산 등으로 인하여 앞선 시기만큼이나 사회적인 위기위식이 팽배한 때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시점에 비슷한 위기 속에서 교양교육에서 과학 개념의 사용에 대해서 그리고 그와 관련된 인간 행위나 실천 양식에 대해서 다른 입장을 견지했던 이들의 시각을 검토하고 시험해봄으로써, 과학적 교양교육이 나아갈 길을 다시금 짚어보는 것은 중요한 의의를 갖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과학’이 인간 지성의 결과인 지식체계를 의미한다면, 그런 과학은 허친스가 찬동할만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끊임없이 새로운 실용적인 도구와 정보를 창출하는 현대의 과학기술과 같은 것임을 의미한다면, 적어도 허친스에게 그런 과학은 지성에 해를 끼칠 수 있기에 지양해야만 하는 것일 수 있다.
  • 과학과 기술이 갖는 광대한 진보는 자료의 축적 결과인 것처럼 보였다. 정보가 많을수록 발견과 발명이 증가하여 더한 진보가 이뤄진다. 진보를 이뤄낼 길은 따라서 정보를 더 많이 얻는 것이다. 과학은 하나씩 철학과 단절되고 다음으로 서로 단절되며 그 과정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마침내 대학의 전체 구조는 붕괴하고 법과 사회과학, 심지어는 철학과 신학 그 자체가 경험적이고 실험적이며 진보적인 것이 될 때 경험주의가 최종적으로 승리한다. (Hutchins, 1936a: 11)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인간 지성은 사색이나 이론적 관조를 통하여 원리들을 추구하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들을 지향한다. 그리고 이런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들은 이미 선구적인 위대한 학자들인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 등에 의해 어느 정도 밝혀져 있다. 그래서 현대의 과학기술로 인한 가변적인 실천적 지식은 그가 보기에 인간 지성이 본래적으로 탐구할만한 것이 아니다.
  • 교육의 한 목적은 우리가 공통적으로 갖는 인간 본성의 요소들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런 요소들은 시대나 장소를 불문하고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어떤 특정 시대나 장소를 살면서 특정 환경에 적응하도록 인간을 교육시킨다는 개념은 진정한 교육 개념에 맞지 않다. 교육은 지식을 함축하고, 지식은 진리이다. 진리는 어디서나 동일하기에 교육은 어디서나 동일해야 한다. (Hutchins, 1936c: 4)

허친스와는 달리, 혹벤에서 과학은 자연과학의 방법론인 ‘실험’을 그 본질로 하며 경험과 유리된 이론적인 사색보다는 ‘실천’과 더 밀접한 활동이다. 과학은 자명한 것보다는 실제적인 시험에 의한 검증이나 정당화를 추구한다.
  • 과학에서 최종적인 중재는 원래 진술의 자명성도 아니고 겉으로 보기에 흠 없는 논리도 아니다. 과학 법칙은 행위 방법을 구현하기에 과학의 최종적인 타당성은 행위 영역에 있다. (…) 과학적 태도는 그 대립되는 것과는 달리 한 방법에 의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을 때 기꺼이 인정하고 다른 방법을 시도한다. (…) 자연과학은 그 원래 가정이 자명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결론이 실제 세계에서 시험되기에 정당화된다. (Hogben, 1936: 8-11)

혹벤에게서 인간은 생물학적 유기체로서 서로 많은 부분을 본성적으로 공유하고 있지만 다른 환경에서 살아가는 만큼 차이도 많은 존재이다. 그는 이를 드러내기 위해 인간 본성이라는 말보다는 인간의 ‘필요’라는 말을 사용한다.
  • (의식주와 건강 등 인간 종으로서 공통적인 필수 요소들만큼이나, 다른 유전 구조와 사회 환경에서 기인하는 개별 구성원에 고유한 필수 품목들이 있다. 이런 필수품을 ‘필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점은 사람들이 소득을 가지고 구매할 수 있는 것들의 절대 수가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사람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지 하는 것이다. 그것을 논의하기에 합당한 유일한 것은 근본적으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과 그것을 충족시키는 데 이용할 수 있는 물질적인 자원에 대한 과학적 연구이다. (Hogben, 1936: 49, 69-70)

혹벤은 현대과학이 이뤄놓은 성과와 산물에 대한 이해 없이 현대 사회의 시민으로서 인간에 대한 교육은 불가능하며 교육에서 추구할 진정한 의미의 ‘휴머니즘’은 지성적이고 문학적이며 예술적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과학적’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 과학적 휴머니즘의 관점에 따라 학교 교과과정을 개정하는 일은 대학 교육자들이 현대의 시대적 문제들을 생생하게 파악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래야만 조금이라도 자연과학에 준하는 영예를 받으면서 사회 탐구를 진행할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Hogben, 1936: 65)

혹벤에게서 과학은 우주적인 예언과 같이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행위나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는 구체적인 것이다. 예컨대 그는 순수과학과 응용과학의 구분에 대해서도 순전히 인위적인 것이라 하여 반대한다. 그것들은 마치 새싹과 뿌리가 연관되는 것처럼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얽혀 있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과학의 성장은 이론과 실천의 통합인 것이다.
  • 사회적 실천의 토양 속에 확고하게 자리한 그 뿌리들이 없다면 순수과학의 초록빛 새싹은 시들어서 형이상학의 죽은 줄기가 되어버리고 만다. 공기와 햇빛의 자양분을 가지고 그것을 지탱하는 열망하는 이론의 새싹이 없다면, 응용과학의 뿌리는 쇠퇴하여 끝없이 경험이나 되풀이하고 있는 마른 나무토막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Hogben, 1938: 1078)

허친스가 말하는 그것 자체로 추구할 가치가 있는 지식체계에 해당하는 과학은 혹벤에게서는 인위적으로 구분된 순수과학이나 형이상학에 해당할 것이다. 이는 그가 보기에 사회적으로 좋은 위치에서 그것을 추구할 수 있는 이들의 필요만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지, 인간 일반의 필요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혹벤이 추구하는 과학이 되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듀이는 허친스와 혹벤의 저작과 같은 시기에 발표한 에세이에서 세 가지 측면에서 두 사람의 차이를 지적하면서 자신의 과학관을 제시하고 있다(Dewey, 1987a, 1987b). 그가 보기에, 허친스와 혹벤 및 자신은 인간 본성의 구성, 이론과 행위의 관계, 발전적 지성이라는 측면에서 상이하다.
우선 인간 본성의 구성과 관련하여, 허친스는 그것이 고정되고 항상적인 것이라고 확신하지만 혹벤과 듀이에게서 인간 본성은 공통적인 요소들을 지님에도 불구하고 상황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허친스에서 인간 본성이 지식과 그 지식을 파악하는 이성 내지 지성에 의해 크게 특징지어지는 것이라면, 혹벤에서는 인간 필요에 의해서, 듀이에서는 필요 및 습관에 의해서 특징지어진다. 허친스적인 지식은 진리로서 항상적인 것이지만, 듀이적인 필요 및 습관은 안정적이면서도 상황 변화에 따라 유동적인 것이다.
다음으로 이론과 실천 또는 행위와 관련하여, 허친스는 가변적인 상황적 지식이 본래적인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간주하기에 직업이나 전문직 중심의 실무교육 중시주의를 현대 교육의 가장 큰 병폐라고 느낀다. 그가 보기에 실무교육은 학교의 몫이 아니라 직장이나 사업장이 담당해야 할 몫이다. 이와 대비하여 혹벤은 사회적 유용성을 강조한다. 물론 그가 생각하는 사회적 유용성은 단순히 개인의 생계유지나 재화축적을 위한 도구적 기능을 넘어선다. 인간 사회의 필요나 그 충족과는 무관한 소위 순수 지식은 순전히 개인적 영달을 위한 지식만큼이나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듀이에서도 실천과 유리된 이론적 지식은 설 자리가 없다.
발전적 지성과 관련하여 허친스가 보기에 현대의 대학들은 비지성적일 뿐만 아니라 반지성적이다(Hutchins, 1936b: 11-12). 대중은 돈에 의해 움직이고 이런 대중의 즉각적인 요구에 대해 대학은 즉석에서 반응한다. 대중의 의견과 정서에는 단지 동분서주하는 흐름들이 있을 뿐으로 그들의 기분과 관심이 바뀔 때마다 대학은 분별없이 모습을 달리하며 서비스를 제공할 수밖에 없다. 누구나 똑같이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를 가지고 원하는 종류의 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대중적인 민주주의 개념은 역시 즉각적이고 우연적인 대중의 욕망들에서 비롯되는 것으로서 대학에 해로운 영향을 끼친다. 미래는 과거보다 진보할 것이라는 진보주의 개념 또한 민주주의 개념만큼이나 지성에 해롭다. 주로 물질적인 것에 국한되는 진보는 더 많은 정보와 자료의 홍수를 요구하고 산출하며, 이는 자유로운 지성을 익사시켜 죽음에 이르게 한다. 이에 대한 허친스의 치유책은 간단하다. 고등교육을 사회적 실천과 유리시켜 지성 그 자체의 발전에만 헌신케 하는 것이다.
혹벤과 듀이가 그리는 과학적 지성은 허친스적 지성과는 전혀 상반된 것이다. 일단 그들은 교육에 미치는 즉각적인 사회적 압력의 해로운 성질을 인정하면서도 과연 실천과는 전면적으로 유리된 지성 교육이 발전의 근본인 창조성을 띠게끔 할 수 있는지 의문시할 것이다. 주어진 진리를 전수하고 수용하게 하는 방식의 교육이 다만 균일한 지성을 남기지 않고 어떻게 창조적 지성을 일깨울 수 있는지 하는 물음을 진지하게 제기할 수 있는 것이다.

3. 듀이적인 과학 이미지의 구성

듀이는 허친스에 반대하고 혹벤에게 찬성하면서, 과학적이면서 발전적인 지성을 배양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필요나 경향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사회적 필요와 잠재성 내지 가능성에 대해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Dewey, 1987b: 399-401). 그가 보기에 허친스가 주장하는 진정한 지성의 대가인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 또한 시대에서 도피한 이들이 아니라 시대의 요구를 철저하게 인식하고 파악하여 그에 대응한 인물들이다. 즉 듀이는 즉각적이고 일시적인 사회적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과학적이고 발전적인 지성을 도모하는 길은 현대의 사회적인 문제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문제와 직면하여 상세하게 파악하고 그에 대응할 수 있는 가능한 길들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데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3.1 시행착오적 경험과 지성적 실험의 차이

허친스는 실험을 시행착오적 경험과 같은 선상에 두고 있다. “시행착오를 통해 당장의 즉각적 필요에 대응하는 정보를 더 많이 만들어내어 유용하게 활용하는 것”이 진보의 방식이라는 생각을 ‘경험주의’라고 칭하고, 지성의 대적자로 설정한다(Hutchins, 1936a: 10-11). 그가 보기에 이런 경험주의는 그 즉각적이고 유용한 성격 때문에 역시 지성에 장애가 되는 직업 내지는 실무교육 중시주의로 인도한다.
이에 비해서 듀이는 『민주주의와 교육』에서 ‘시행착오적 경험’과 ‘지성적 실험’을 구분하는데, 사실 그가 보기에 진정한 의미의 경험은 지성적 실험을 그 본질적 성격으로 한다. 시행착오적 경험은 주어지는 상황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상황이 변하면 그 결과도 변하기에 근시안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지성적 실험은 이와는 달리 행위와 결과의 인과관계에 주목하여 상황 변화 내지는 행위 조건 자체를 통제할 수 있게끔 함으로써 질적으로 다른 경험을 제공한다. 이렇게 구분해보면 허친스의 경험주의 비판은 단지 시행착오적 경험에 대한 것이지 지성적 실험으로서 경험에 대한 것은 아니다.
경험에서 행위와 그 결과로서 겪는 어떤 것은 밀접하게 연관된다. 능동적인 행위 국면을 수동적인 겪음의 국면과 분리시키는 것은 경험이 갖는 중요한 의미를 파괴한다. 사고는 행위와 그 결과 사이의 연관을 정확하게 잘 고려하여 설정한다. (…) 행위 결과를 예상하여 그려낸다는 것은 제안되거나 잠정적인 해결책을 의미한다. 이 가설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기존 상황을 주의 깊고 정밀하게 조사하여 가설이 함축하는 의미를 파악해야만 하고, 제안된 가설적 해결책인 아이디어를 행위를 통하여 시험해보아야 한다. 그것이 소정의 결과를 내어 세계의 변화를 가져온다면 타당한 것으로 수용하고, 그렇지 않으면 수정하여 달리 시행한다. (…) 모든 사고는 결국 지식이 되지만, 궁극적으로 지식의 가치는 그것이 사고에서 사용되는 것에 의해 정해진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곳은 정착되고 완성된 세계가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세계이기 때문이다. (Dewey, 1916a: 151)
듀이에서 모든 유의미한 경험은 행하기와 겪기로 이뤄진다. 그래서 ‘경험으로부터 배운다’는 말은 자신이 한 일과 그에 따라 겪은 일의 앞뒤를 연결하여 추후의 행위 지침을 얻는 일로서, 행하는 일은 세계에 대한 실험이고 겪는 일은 그 실험이 주는 교훈이나 의미를 얻는 일이 된다. 이는 학습 경험에도 해당하는 일로서, 진정한 의미의 학습자는 지식의 구경꾼이 아니라 참가자로서 능동적으로 지식을 창출한다.
인간 정신이 다만 지식을 구경하기만 하면서 세계와 맺는 능동적 관계에서 분리되어 버리면, 아이디어 대신에 낯선 기호들만이 작용하면서 세계를 파악하는 그 본연적인 지성적 활동에서 퇴보하여 둔화되어버린다. 그런데도 정신은 주의하기만 하면 인간이 세계와 맺는 관계를 단박에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되면서, 몸에 맞지 않는 지식이 범람하게 된다. 이를 듀이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 경험은 아주 시시한 것이라도 지성적 내용인 얼마간의 이론을 낳고 유지할 수가 있지만, 경험으로부터 이탈된 이론은 심지어는 이론으로서도 명확하게 파악할 수가 없다. 그런 이론은 단순히 언어적인 표현이나 슬로건에 불과한 것이 되어, 사고나 진정한 이론 구성을 불필요하고 불가능하게 만든다. (Dewey, 1916a: 144)

우리는 사고 내지 숙고를 통하여 자신이 시도하는 것과 결과로서 일어난 것의 관계를 인식하기에, 사고라는 요소를 포함하지 않고서는 유의미한 경험이 있을 수 없다. 모든 실험적 사고에는 위험이 따른다.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은 모험적 성질을 띤 것이고 그 결과에 대해 미리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고의 결론은 행위를 통해 검증되거나 확증될 때까지는 항상 시험적이고 가설적인 것이다.
플라톤의 『메논』 편을 인용하면서 흔히 제기되는 ‘배움의 딜레마’가 있다. 이는 배움 내지는 학습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으로 인도한다. 배우려는 것을 이미 아는 경우에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배움은 불가능하고, 모르는 경우에는 우리가 무엇을 구하는지 모르거나 우연히 그것을 발견했다 해도 그것이 우리가 구하는 바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배움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듀이에 따르면, 이 딜레마는 완전한 지와 완전한 무지의 경우만을 상정하고 ‘알게 되는 과정’이 성립할 여지를 주지 않고 있다. 하지만 탐구적 사고에는 반은 알고 반은 모르는 중간지대가 있고(Dewey, 1916a: 148), 이는 가설적 결론이 성립할 가능성을 허용한다. 즉 상황의 불확실성은 그런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몇 가지 길을 암시하고, 이런 길을 가본다면 탈출을 하든가 더 곤경에 처하든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배움의 딜레마가 주는 선언지에 매여 있는 한 과학은 발전할 수 없지만, 그 선언지를 벗어나 중간지대에 서 있으면서 가설적 결론의 가능성들을 추구할 때 과학은 성장하기 시작한다. 이제 지식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갖는 것이라기보다는 이런 가설을 세우는 기초나 수단으로서 높이 평가되는 것이고, 그래서 지식의 성장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제 앞서 인용했던 듀이의 주장이 갖는 의미가 명료해진다. 경험적이거나 실험적 사고를 통해 얻어지는 지식의 가치는 궁극적으로 그것이 도구로서 사용되는 것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곳은 확실하게 고정되고 완성된 정적인 세계가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변화무쌍한 불확실성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지식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처하기 위해 사용됨으로써 비로소 그 가치를 얻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듀이가 말하는 지성적 실험이 갖는 의미이다.

3.2 지성적 활동의 도구이자 가능성에 대한 탐구로서 과학

앞서 허친스는 뛰어난 인간 지성들이 만들어낸 지식체계가 이미 고정되어 완성된 것으로 존재하기에, 교육의 문제는 다만 학생들로 하여금 이런 지식체계를 익히게 하는 일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지식체계 자체가 교육 내지는 학습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듀이에게서 완성된 지식체계와 같은 것은 없다. 인간 성장을 위한 자양분이 되는 지식은 환경에 따른 성장 조건의 변화와 더불어 변할 뿐이다. 그는 지식이 목적 그 자체가 될 수는 없으며 다만 인간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도구가 될 뿐이라고 주장한다(Dewey, 1916e: 187-190). 지식 체계로서나 지식을 창출하는 방법으로서 과학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듀이가 보기에 과학이 갖는 교육적 의미는 미리 만들어진 재료나 내용을 그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축적하여 학생들에게 익히게 하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사고의 방법이나 태도로서 학생들이 갖는 습관을 변화시키는 데 기여하는 그런 능동적인 것이다.
듀이에 따르면, 진실로 가치 있는 지식은 단순한 정보 축적이나 습득이 아니라 지적 실천의 양식이나 성향을 쌓는 일에서 찾아볼 수 있다(Dewey, 1910: 125-127). 즉 스스로 뭔가를 탐구하는 활동을 해보야만 제대로 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방법으로서 과학은 내용으로서 과학보다 중요하고, 체계화된 지식이 과학인 것은 그 신중하고 철저한 시험 과정 때문이다. 다만 수동적인 암기 등을 통해 얻어지는 미리 만들어진 정보를 과학이라고 적절하게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다만 실험적 방법의 솜씨와 기술을 터득하는 것만도 아닐 것이다. 실험 과정을 통하여 새로운 지식을 발견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증거에 기초한 지식 탐구가 어떤 것인지 경험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과학을 학습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우리가 일반적인 교양교육을 통해서 학생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전문화된 과학 문제들과 마주하여 참 거짓을 판단할 수 있는 전문적인 지식내용을 갖추는 것이 아니다. 학생들은 증거에 기초한 믿음이 합당한 것이고 그에 따라 인간 지식은 개선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과학적 탐구 방법에 어긋나게 도달한 결론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어야만 한다. 우리의 교육은 이런 과학적 습관을 성숙시키고 효과적으로 만들 수 있는 구조를 갖출 필요가 있는 것이다.
듀이에 따르면, 과학은 무엇보다도 도구로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 설정이나 새로운 가능성의 타진에도 기여해야 한다. 과학기술이 실현하려고 목표하고 있는 이상들 중에는 이전 시대에 검토되지 않은 것들이 여럿 있을 수 있다. 그는 이런 이상들 자체가 과학적인 시험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 만약 우리가 조금이라도 사물이나 말이 아니라 지성을 관할하려고 한다면, 과학은 단지 그저 ‘어떻게’ 우리가 어떤 정해진 것을 가장 쉽게 그리고 경제적으로 할 수 있을지에 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할지에 관해서 뭔가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Dewey, 1910: 127)

듀이가 보기에 이렇게 능동적으로 지식의 구성에 참여하는 일은 인간이 갖는 가장 지고한 특권이다. 그래서 우리의 학교가 정보를 축적하고 있는 저장소가 아니라 지식을 구성하는 실험실이 될 때 교육에서 과학은 진정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3.3 열린 지성의 고유한 특징으로서 과학적 태도와 방법

듀이는 과학적 태도가 일차적으로는 보통 세계의 대상과 사건들을 향하여 구현되고 단지 이차적으로 과학적 내용을 향하는 것이라고 간주한다. 과학적 방법은 과학자들이라고 칭해지는 사람들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과학자들이 산출하는 지식과 아이디어의 체계는 보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방법이 낳는 결실이다. 그래서 그가 보기에 과학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필요조건은 지성적으로 행하는 사람들이 모두 취할 수 있는 태도가 바로 과학적인 태도임을 파악하는 것이다.
  • 과학적 태도란 모든 삶의 도정에서 구현되는 성질이다.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부정적인 측면에서 그것은 판에 박힌 일, 편견, 독단, 시험되지 않은 전통, 순전한 자기 이해에 의해 조정되는 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긍정적 측면에서 그것은 탐구하고 시험하며 분별하는 것으로서, 이용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증거를 모으려고 애쓰고 그런 증거에 기초해서만 결론을 이끌어내려는 의지이다. 아이디어 없는 사실들은 무의미한 것임을 인식하면서 관찰 사실에 기초하여 믿음에 도달하고, 아이디어는 그 빚어지는 결과에 의해 시험할 수 있는 가설적인 것임을 아는 실험적인 태도이다. (Dewey, 1988: 273)

듀이가 보기에 이런 과학적 태도는 실제적인 조건들이 설정하고 제기하는 문제들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태도이지만, 비과학적인 태도는 그런 문제들을 회피하거나 그와 마주하지 않고 덮어버리는 태도이다. 삶은 물리적이든 문화적이든 복잡한 환경과 연계하여 일어나는 과정이다. 가정, 병원, 학교 등은 과학 실험실에서만큼이나 참된 문제들을 제시하는데, 그 방식은 보다 직접적이고 긴급한 것이다.
듀이는 전문화된 과학적 발견들이 뿔뿔이 흩어져 고립된 섬들을 이루고 있기에 그것들을 통합하여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이용하는 일이 긴박한 일이라고 생각한다(Dewey, 1988: 274-280). 심지어는 개인들이 지성적으로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쓸 때에도 흔히 편견이나 독단이나 집단적 이해나 외적 권위 등에 의해 과학적 태도를 취하지 못하게끔 방해를 받고 있다. 사회적으로도 과학적 태도의 적들은 다수이고 조직적이다. 과학은 기존의 종교, 도덕, 정치, 경제 기구가 장악하고 있는 분야를 ‘침범’할 때 환영받는 것이 아니라 반대에 직면한다. 과학의 가지들은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한 가지에서 다른 가지로의 번역은 쉽지 않다. 그렇다고 과학 용어나 조건을 어느 한 과학의 그것에 의해 정의하여 통일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는 그 첨예한 이해관계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듀이에 따르면, 과학이 세울 수 있는 커다란 저택에는 많은 작은 집들이 있다(Dewey, 1988: 276). 우리는 이 집들 간에 오갈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과학 이전의 시험되지 않은 아이디어들이 우리 모두를 여전히 지배하고 있기에, 늘 열린 시각을 가지고 과학적 태도를 견지해야 하고 개방적이고 협력적인 방식을 취해야 한다.
현행 대학에서는 상당한 경제적 자원들이 전문가 교육에 집중되고 있다. 이는 인간 일반이 과학적 태도를 지니게 만드는 폭넓고 해방적인 교육 목적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빼어난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한 좁은 목적을 설정하고 있기 쉽다. 또한 그 소수의 전문가들조차도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닌 곳에서는 지극히 비과학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는 일은 능히 가능한 일이다. 당연한 귀결로서 소위 ‘과학’은 그 자신의 분리된 영역에서 갇혀 있고, 그런 과학에 특별한 이해관심을 갖는 이들은 보편적인 과학적 태도나 방법이 사회문제 해결에 미치는 영향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학교가 독단적인 믿음을 계속하여 주입하게 되는 이유는 과학이 모든 문제를 지성적으로 다루는 유일한 보편적 방법으로서 구상되고 행사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 과학적 태도와 방법은 근본적으로 자유롭고 효율적인 지성의 방법일 뿐이다. 전문 과학들은 이런 방법이 무엇인지, 무엇을 뜻하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드러낸다. 모든 인간이 한 전문 과학의 연구자가 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과학적 태도를 갖게 되는 것은 바람직하고 어떤 조건들에서는 가능한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사람들이 과학적이기 위해서 지성적으로 사고하고 행할 수 있는 잠재적인 배아들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람직한 이유는 과학적 태도가 편견, 독단, 권위, 특정 이해관계에서 나오는 강제력을 대신하는 유일한 궁극적 대안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Dewey, 1988: 279-280)

이제 듀이가 그리는 과학 이미지를 보다 분명히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주변 환경에 적응하면서도 스스로 변화를 창출하기에 우선 자율적인 유동체여야 할 것이고, 보편적인 방법에 기초하고 있지만 다른 환경에서 다른 자율성을 보일 수 있기에 하나의 큰 집 안에 있지만 작은 집들로 구분되어 있으며, 그런 집들은 각기 연결되어 서로 빈번하고 긴밀하게 왕래 및 소통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그런 다양한 면모를 지닌 구조체여야 할 것이다. 그런 이미지를 관통하고 있는 구성적 요소는 목적 개방성, 경험, 실험, 도구, 사고, 아이디어, 소통, 가능성 등으로 이뤄질 것이다. 다음 장에서는 우리의 교양교육이 어떻게 이런 이미지를 띨 수 있고 그럴 경우 어떤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4. 교양교육에서 듀이적인 과학 이미지의 활용

4.1 효과적인 학습 태도로서 방법의 구현

방법이란 재료 내지 내용을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는 효과적인 방식이다. 그런데 교육에서 이런 방법을 내용과 분리해버릴 때, 여러 폐해가 빚어질 수밖에 없다. 우선 구체적인 경험 상황들이 무시될 위험이 있을 것이다. 학교에서의 경험은 매우 인위적이고 강제적인 상황에서 이뤄지기에 획일성을 갖게 된다. 자연스레 학습에 전념하면서 유연한 경험이 이뤄지고 개인마다 그에 고유한 방법이 자리하기를 기대하기가 어렵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든 내용을 전달하기 위하여 억지 유혹을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내용에 관심이 있어서 학습하는 것이 아니기에 학습 행위를 지나치게 의식하게 되고, 억지로라도 내용에 집중하지 못하는 이들은 흔히 소외감을 느끼게 되곤 한다. 주어진 내용을 그대로 수용하는 방식이기에 기계적인 학습이 이뤄지게 되고, 이는 개인들의 독특한 성질을 질식시켜 모두를 범용한 이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
개인들이 저마다 고유한 성질을 유지하면서도 내용이나 재료를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즉각적인 관심, 편향되지 않는 열린 마음, 성실성 등의 태도가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Dewey, 1916c: 173-178). 즉 자연스레 직면한 문제 상황에 빠져들어 집중하고, 해결을 위해 가능한 모든 것들을 시간을 두어 편견 없이 고려하며 숙고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마음이 내켜서 숙고에 임해야 할 것이고, 열려 있는 것으로 보이는 여러 가능한 선택지들의 결과를 고려하고 시험하여 선택하거나 판단해야 할 것이다. 이런 태도가 내용을 다루는 데 동반되어야만, 형식적이고 기계적이며 강제적인 학습을 막고 효과적인 학습을 이뤄낼 수 있는 것이다.

4.2 완결된 지식 전수 vs. 능동적 지식 창출

이렇게 치열하게 숙고하는 능동적 지성의 구현으로서 과학을 방법이 아니라 그 결과적 내용에 사로잡혀 그것을 완결된 지식 체계로서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 교육에서 큰 문제인 것이다. 물론 과학의 결과적 내용은 입증된 결론으로서 설명적 합리성을 갖춘 완성된 지식으로 이뤄진다. 그런데 이러한 완성된 지식 그 자체가 과학적 교육에서 습득해야 할 목적이 되어 버린다면, 그 지식이 일상적인 삶의 재료와 맺는 연관성이 가려지면서 그것과는 유리되어버릴 위험이 높다.
  • 학습자의 입장에서 과학적 형식은 도달해야 할 이상이지 거기서 시작해야 하는 출발점이 아니다. 그런데도 약간 단순화된 과학의 기초 원리에서 교육을 시작하는 경우를 실제로 흔히 볼 수 있다.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나오는 결과로서 과학은 유의미한 경험에서 분리하여 고립되어 버린다. (Dewey, 1916e: 220)

전문적인 기호의 의미를 이해할 단서가 없는 상태에서 기호를 배워 그 전문적인 정보체계를 습득하지만, 그것과 그가 잘 알고 있는 대상이나 사태와의 관련을 찾아낼 능력이 학습자에게 없을 수 있다. 그런데 교육자들은 학습의 지름길이 내용을 완성된 형태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간주하고, 초심자라도 인정받은 탐구자들이 도달한 그곳에서 시작하기만 하면 시간과 에너지를 절약하고 쓸데없는 시행착오를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학생들은 일찍이 과학법칙을 배우지만 그것에 도달한 방법에 대해서는 고작 한두 마디의 지적이 있을 뿐으로, 자신들이 잘 아는 재료를 과학적으로 다루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고 다만 내용으로서 ‘과학’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학습자의 경험에서 시작하여 익숙한 재료를 과학적으로 다루는 법을 발달시켜나가는 방법은 어느 정도의 시간적 손실을 동반할 수는 있겠지만 학습자에게 생생한 흥미나 더 나은 이해라는 보상을 준다. 학습자는 적어도 자기가 배우는 것을 이해하고 과학자의 방법을 자신의 일상 속 경험재료와 연관지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재료나 자료를 처리하는 능력을 익혀 자신의 경험과는 무관한 기호적 의미만을 학습하는 데 뒤따르는 정신적 혼란과 지적 혐오감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우리 대학의 특성상 자연과학 관련 학과에 진학하는 다수의 학생들 중에서도 전문 과학자를 꿈꾸는 이들은 많지 않다. 따라서 전문 과학자가 달성한 성과를 모방하기보다는 과학적 방법에 대한 식견을 얻는 것이 그들에게도 훨씬 중요할 수 있다. 심지어는 과학 전문가가 되려는 소수조차도 완전히 전문적인 기호로 설명된 수많은 지식에 압도되어버리기보다는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탐구를 진행시키는 것이 더 이로울 수 있다(Dewey, 1916e: 221).

4.3 사고와 효율성의 균형

듀이에서 과학적 태도 내지 방법은 곧 사고의 방법이다. 사고는 단순히 내성적인 것이 아니라 행위 양식인 것으로서 세계에 변화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다(Dewey, 1916a). 교육과 관련해서는 특히 교실에서의 사고 활동이 중요할 것이다. 교실은 사고 실험이나 실제적인 실험이 이뤄진다는 측면에서 실험실이기도 하다. 도구를 이용한 실험이든 사고 실험이든 그런 실험을 통하여 이뤄지는 사고 경험은 학생들의 지성적 경험을 풍부하게 만들기에 그들의 과학적 태도를 심화하는 최선의 방식이다.
문제를 설정하고 그 해결을 위한 정보를 찾고 관찰을 하는 과정에서 현대적 삶에서 이용할 수 있는 다방면의 정보 내용에 대한 접촉은 필수적일 것이다. 수많은 정보 홍수 속에서 무작정 헤매지 않고 필요한 것을 찾아내는 일 역시 충분한 경험을 필요로 한다. 학생들로 하여금 인문, 사회, 자연, 공학, 예술의 소재들을 다방면으로 접하여 이해하고 이용할 수 있는 경험을 쌓도록 해주어야 할 것이다. 관련이 있는 것과 무관한 것을 가려낼 수 있는 지성과 감각을 키워줘야 할 것이다. 자료에 나타난 주장들을 명료하게 정리하고 그에 기초하여 자신의 의견을 표명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선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진지하게 탐구할 수 있는 태도를 기를 수 있게끔 해야 할 것이다. 이 모두는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런 습관으로 자리할 때까지 시연되어야만 한다.
과학적으로 교양교육을 실시한다고 할 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고와 효율성의 교육적 균형일 수 있다(Dewey, 2010a). 작업자가 일을 위한 효율성은 갖추고 있지만 일의 의미를 이해하는 사고능력은 결여하고 있는 경우가 능히 있을 수 있다. 효율적인 기계는 그 구조와 작용 조건이 균일하게 남아 있다면 항상 잘 작용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삶의 조건이 항상적인 것이라면, 필요한 모든 것은 그런 조건에 맞는 기술을 익혀 필요시 그 기술을 발휘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는 이런 안정적이고 항상적인 요소들 이외에 흔히 변화하는 요소들이 자리한다. 그런 예기치 않은 요소들 때문에 우리는 단순히 기술과 같이 습관적인 요소에 의지할 수 없고 긴급한 비상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다양한 상황과 행위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사고 능력을 키우기 위해 훈련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는 아주 유동적이고 유연하며 탄력 있게 변화될 수 있어야만 하는 불확실성의 시대와 마주하고 있다. 오늘은 이런 상황을 만나고 내일은 저런 상황을 만나게 될 수밖에 없는 그런 환경인 것이다. 만약 우리의 조건들이 완전히 균일하게 고정된 것이었다면 판에 박힌 기계적 방법으로부터 효율성을 얻을 테지만 조건은 변하고 그에 따라 달리 적응해야 하기에 그에 필요한 지적인 사고 능력을 키울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갖는 한갓된 상투적 습관들과 우리의 사고가 균형을 이루지 못할 때, 우리는 기계적인 노예가 될 뿐만 아니라 비정상적인 정신적 삶을 살게 된다(Dewey, 2010a: 42). 과학적 교양교육은 일차적으로 바로 이런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학생들이 사고하지 않고 기능만을 획득하게 되면 그런 기능을 활용할 목적 등에 대해 알지 못하게 되기에, 그 기능에 따른 틀에 박힌 습관에 좌우되고 아무 생각 없이 타인의 지시에 그대로 따르게 된다. 또한 생각 없이 축적되는 정보는 죽은 것으로서 인간 정신을 압박하는 무거운 짐으로서 작용하며, 지식의 모습으로 나타나 자신을 치장하는 장식이 되지만 오히려 지성의 성장을 방해하는 장애가 되고 만다(Dewey, 1988: 278). 그래서 사고 내지 생각은 그 자체가 지성적인 경험을 인도하는 과학적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5. 결론 - 새로운 가능성의 타진

듀이에 따르면, 일어날 수 있는 것인 가능성들은 이미 존재하는 것보다 더 교육에서 중요하고, 이미 존재하는 것에 관한 지식은 단지 가능성들과 관계해서만 중요하다(Dewey, 2010b: 181). 학생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서 있다면 틀림없이 주어진 것들에 기초하면서도 그것들을 넘어서는 아이디어를 제시할 것이고, 그런 아이디어는 바로 가능성과 관계하는 것이다. 이런 가능성에 대한 사고는 이제까지 없었던 것들에 대한 사고라는 의미에서 창조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가능성과 관련된 아이디어는 정보 제공이나 주입과 같은 방식으로는 결코 전달될 수 없는 것이다. 문제 상황을 직접 다루어 자신만의 해법을 찾고 발견하는 과정에서만 그런 아이디어는 생겨날 수 있고, 그때 비로소 그는 사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사고하고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과정은 학습자마다 고유하고 제각각일 수 있기에, 진정한 교육을 위해서는 교육자 또한 항상 스스로 다양한 가능성을 추구하는 학습자가 될 수밖에 없다(Dewey, 1916b: 160).
교실을 듀이적인 과학 이미지에 잘 어울리는 실험실로 만들어 그 안에서 자유로운 아이디어의 창출과 소통 및 실험이 자연스럽게 이뤄지도록 할 수 있다면, 학생들은 항상 교실 학습과 자신의 실제적 경험을 연결하면서 지적이고 교육적인 성장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은 외따로 떨어진 섬이 되는 일 없이 학생들의 일상을 활기차고 풍요롭게 만들 것이며, 정보는 실천 방향을 인도하는 기능을 통해서 생기를 얻을 것이다. 교육의 내용과 재료는 보다 넓고 보다 직접적인 경험 세계와 연결해주는 통로로서 작용할 것이다. 이전 교실 과목은 현재 과목의 이해를 돕고, 현재 과목은 이미 배운 내용을 더 밝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회 일반의 필요에 따르는 요소를 고려하여 현재를 개선할 수 있도록 교육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전문가 집단이나 전문 연구의 필요를 교육적으로 구현하는 것은 그 다음의 것이다. 사회적으로 기본적인 것을 우선적으로 배치하여 학생들이 가장 인간적인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여기서 인간적인 경험이란 인간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가장 심오한 문제에 대한 관심에서 오는 교육적 경험이다. 학습자들은 그런 경험을 통하여 사회적 통찰력과 사회적 관심을 발달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교양교육은 폭넓고 인간적인 관심사에 부응해야 하고, 이를 위한 교육은 일반적이고 자유로운 과학적 방법에 기초한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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