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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General Edu > Volume 15(2); 2021 > Article
인문교양교육 콘텐츠로서의 셰익스피어 -다문화 관점으로 <베니스의 상인>과 <오셀로> 읽기

초록

인문 교양교육의 일환으로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과 <오셀로>를 다문화적 관점에서 고찰하여 현대의 다문화사회를 보는 균형잡힌 시각을 키우기 위한 다문화 교양교육 콘텐츠를 제안한다. 셰익스피어와 같은 고전의 존재 의의는 작품이 지녀온 역사성을 토대로 현대를 해석해 나가는 동력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크리스테바에 따르면, 공동체는 체제 유지를 위해 이방인을 타자화하고 그 타자를 배제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주체와 타자가 공존하는 다문화 시대에 인종과 문화, 그리고 종교라는 가치의 차이에서 비롯된 갈등을 고찰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베니스의 상인>을 샤일록을 중심으로 다문화적 관점으로 읽어봄으로써 인종, 종교 및 문화의 차이가 베니스의 기독교 중심 사회에서 인종 차별과 종교적 박해를 행하는 일종의 척도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것이 타자에 대한 지배 세력의 폭력적인 차별을 드러내주고 있음을 확인한다. 자신의 가치관을 고수한 샤일록은 비난과 멸시에 직면한다. 반면에, <오셀로>는 한 사회에 정착하여 성공을 이룬 이방인(유색인) 타자의 내면을 구현한다. 오셀로는 베니스 사회에 성공적으로 진입하지만, 타자로서 베니스의 가치로 착종된 자아를 지니게 된 오셀로는 베니스 사회가 그에게 부여한 명예의 비열한 정체, 즉 유색인을 향한 멸시와 성공한 군인에 대한 칭송이 지니는 양가성을 인지하지 못한다. 이와같이 <베니스의 상인>과 <오셀로>는 점차 다원화 되어가는 현대의 교육 현장에서 다문화 특성을 이해하기 위한 교육 콘텐츠로서 훌륭한 설득력을 보여준다.

Abstract

As part of liberal arts education, this study proposes multi-cultural education content by analyzing two works of Shakespeare, The Merchant of Venice and Othello, but as seen through a multi-cultural lens, in the hopes of cultivating a deeper understanding of our contemporary, multi-cultural society. The significance of classic works such as those of Shakespeare lies in the fact that we can learn the historical nature inherent in such works, which may allow us to better interpret our modern circumstances.
According to Kristeva, any given community uses certain strategies to turn strangers into the “others,” and to exclude them in order to maintain the status quo of that community. In the era of multi-culturalism, where the subject and the other must coexist, it is necessary to take into consideration issues of race, religion and culture, and the conflicts that often arise as a result of the differences between them.
Reading The Merchant of Venice with a focus on Shylock, and from a multi-cultural perspective, shows us that the differences between race, religion and culture can be used as a sort of metric for racial discrimination and religious persecution among Venetian Christianity, which in turn reveals the social and cultural violence of the ruling majority enacted upon the minority group. Shylock, who keeps to himself as a Jew, faces contempt and insults, and finally perishes in desperation. On the other hand, in Othello, Othello seems to have successfully settled in as an immigrant to Venetian society though he embodies the inner nature of the other (i.e., he is a Moor). Following the values of Venice, however, Othello seems obsessed with himself as a (real) Venetian so that he never be aware of the ambivalence of the obsequious honour that Venice grants to him: both the contempt they feel for people of colour and the praise they have for successful soldiers.
Both The Merchant of Venice and Othello have very persuasive and informative aspects to them, which could be used as multi-cultural, educational texts, especially in a society like ours that is steadily becoming more and more multi-cultural.

Key Words

identity; the other; an obsessed self; race; Shylock; ambivalence

1. 서론

인문학 교육현장에서 고전 문학과 관련한 콘텐츠 중심의 접근 방식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특히 널리 알려진 고전을 영상으로 각색, 구현한 콘텐츠를 사용하는 것 역시 외국어를 교육하는 방식으로 효과면에도 널리 알려져 있고 이는 영문학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와 같은 고전 영문학을 영상 매체로 교육하고자 하는 것은 텍스트 자체에 대한 적절한 각색이나 현대화 없이는 학습자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에 한계가 있을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Gibson, 1992: 145).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두말할 나위 없이 뛰어난 영문학 고전이기는 하지만 영문학을 전공하지 않는 학생들에게는 여전히 어렵다거나 고리타분하다는 인식을 주고 있어 일반 교양과목으로 선택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장진태, 2019: 1492). 그럼에도 국내 많은 교수자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영문학 고전인 셰익스피어를 일반 교양과목에서 다루어 보고자 노력을 기울여 왔다. 장선영(2010)은 아시아권의 교육현장을 예로 들면서 영어 듣기와 말하기라는 실용 영어 중심으로 셰익스피어 강의실을 운영할 것을 주장하였고(233-35), 안병대는 <셰익스피어 읽어주는 남자>(2011)라는 저술을 통해 일반 독자들을 대상으로 셰익스피어를 재해석하는 시도를 한 바 있기도 하다.
이렇게 영어 열풍과 인문학 열풍은 셰익스피어에게까지로 확대되긴 했지만, 여전히 대학의 교양교육 콘텐츠로 셰익스피어를 대상화한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1). 또한, 그간 연구자들이 밝혔듯이 실제 교육이 이루어지는 경우에도 영어라는 언어적 매체에 집중하거나 주요 인물이나 주제와 관련된 단편적 콘텐츠라는 한계가 있어 왔다(장진태, 2019: 1503). 사실 셰익스피어에 관한 방대한 연구 결과들이 증명하듯이 셰익스피어는 다양하고 폭넓은 주제들을 다루었고 따라서 그의 작품에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수없이 많은 변수가 녹아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셰익스피어의 이러한 특징은 대학의 교양과목에서 필요로 하는 융복합 콘텐츠로서 손색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셰익스피어를 단순히 영어라는 외국어를 위한 교육콘텐츠로 접근하기를 지양하고 보다 폭넓은 교양교육 콘텐츠로 개발하는 작업은 유의미한 시도가 될 것이다. 나아가 학생들로 하여금 단순히 셰익스피어에 대한 호기심을 해소하는 차원에서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다양한 사회문제들을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개인적 관점에서 고찰해 보는 것 뿐만아니라 이를 토대로 현대 사회에서 마주하는 유사한 과제들을 해석할 수 있는 역량을 배양하는 계기를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일선 교육현장을 위한 이러한 작업은 다문화라는 현대 사회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에 의미있는 기여가 가능할 것이다.
현대를 가름하는 키워드로서 다문화를 빼놓을 수 없다. 다문화 혹은 상호문화라는 용어는 미국과 같은 다민족 국가들이 자국민들이 겪고 있는 문화적 충돌, 즉 이민족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자국민으로 통합하며 동시에 해외에 주재하는 자국민들의 동질성을 확보하기 위해 정립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수천년의 역사를 거치는 동안 다문화라는 개념을 단일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단일 문화를 영유해온 우리로서는, 미국에서 1960년대 있었던 ‘(인종의) 용광로’라는 표현을 하나의 통일된 동질성을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 온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시각은 한편으로는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현재 우리 주변의 ‘다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이 그즈음에서 그다지 변화된 것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 머무르는 ‘외국인’에게 ‘한국화’되기를 바라고 또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으며, 다양한 언론 매체들은 그러한 노력을 하고 있거나 이미 ‘성공적으로 한국화된’ 다문화인들의 모습을 지속해서 방영한다. 물론 외국인들이 한국에 적응한다는 측면에서는 아주 바람직한 현상이겠으나, 문제는 그러한 ‘적응’이 무언의 강요와 압박에 의한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로 인해 뚜렷한 가해자는 없으나 피해자는 존재하는 일종의 집단 폭력이 발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2)
오늘날 우리 사회의 다문화 정책은 다방면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간혹 일반 대중들이 다문화에 대한 배려 혹은 기본권 보장 등, 일견 혜택처럼 보이는 지원정책들에 대해 부정적 관점을 드러내기도 한다. 마치 포퍼(Karl Popper)가 <열린사회와 그 적들>(2006)에서 지적한 것처럼 지나친 관용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관용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스스로 관용적이지 못한 사람들에게까지 관용을 베푼다면 결국에는 그들이 오히려 관용을 베푼 자들을 공격하거나 해를 입히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설은 흥미롭게도 베니스를 배경으로 한 셰익스피어의 두 작품, <베니스의 상인>(The Merchcant of Venice)과 <오셀로>(Othello)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이기도 하다. 이 두 작품의 공통된 배경인 베니스는 백인 중심의 사회를 대표하고 있다(Kitch, 2009: 113). <베니스의 상인>에서는 샤일록이라는 유대인에 향한 ‘정의’와 ‘자비’라는 말로 이방인에 대한 이중적 시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베니스를 무대로 한 또 다른 작품, <오셀로>는 고전 문학에서는 매우 드물게 유색인 주인공을 제시하여 그의 성공과 파멸을 극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들 두 작품에는 유색인들, 즉 다문화인에 대한 주류사회의 관점과 태도가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주류인 백인 중심사회에서 정착하고자 하는 다문화인, 즉 유대인 혹은 유색인의 특별한 정체성이 드러나 있다. 베니스에서 샤일록과 오셀로가 자기 스스로를 규정하는 방식을 점검하는 것은 현재의 다문화사회에서도 고찰해 볼 가치가 있는, 다시 말하면 현대인의 다양성에 대한 인식을 넓혀주는 유익한 접근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에 본 연구는 고전을 통한 인문 교양교육이라는 명제를 위한 실천방안의 하나로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과 <오셀로>를 유대인과 유색인 주인공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읽어봄으로써 다원화된 현대 한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 특히 다문화라는 문화적 특성을 이해하고 교육하는 데 일조하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를 일반교양강의 콘텐츠로 활용하여 학생들과 공유함으로써 어쩌면 이미 자동적으로 내재하고 있을지도 모를 다문화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을 돌아보고 개선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며, 더 나아가 고전 문학의 현대적 가치를 재확인하고자 한다.

2. 왜 고전 교양교육인가

교양과정은, 현대 사회의 필요 여부에 따라 졸업 후 진로문제나 사회에서 실용성 부문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사라지는 인문, 사회, 자연과학의 기초 학문의 학과들과는 달리, 대학의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진행하므로 생존력을 가질 뿐 아니라 사라진 학과의 기초과목을 대신할 수도 있다는 융통성을 내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교양교육은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즉 타의에 의해 주어진 전공 지식을 습득하던 시기에서 벗어나서도 개인이 새로운 현실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스스로 학습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키우는 전인적 능력을 배양할 수도 있다. 박일우는 이러한 실례를 한스테트(P. Hanstedt)의 경험에서 찾는다(2020: 33). 그에 따르면, 미국의 한 대학의 영문학자인 한스테트는 홍콩의 한 대학의 교양과목<빅토리아만의 생물학>이 전공 교육과정(생물학 입문)과 자유교양과정(과학 기술 미래)과 연계하면서 굉장한 효과를 거두는 것을 목격했다고 보고한다. 그 과목은 생물학의 모든 영역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고 단지 오염의 현상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정도의 지식만을 목표로 했고 나머지는 학습자 스스로의 토론과 탐구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빅토리아만의 생물학>은 단순한 하나의 교양과목이었을 수도 있었겠으나 이를 계기로 누군가가 생물학을 전공하여 해양생물학자가 되었다거나, 부두설계사, 혹은 항만관리 공무원등을 배출하는 계기가 되었다면 이 과목은 학습자의 미래를 만들어 나가는 계기가 된 것이라고 주장한다(박일우, 2020: 34).
이와 같이 교양과목의 핵심은 다른 분야에 혹은 더 넓은 분야에 시야를 돌릴 수 있게 해주는 데에 있다. 각기 다른 학문 분야와 연구 방법, 더 나아가 다른 세계관을 접하고 이해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대학의 교양교육에서 고전 읽기는 1920년대 콜롬비아 대학에서 시작되어 1930년대 시카고학파에 의해 대학에서 뿌리를 내렸다고 볼 수 있다(안현효, 2019: 109). 현재로서는 교양교육 자체가 고전교육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그럼에도 고전이 인문교양 교육의 핵심이자 대학에서 제공해야 하는 인식의 확대와 삶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데에 필수적인 교육 매체임은 부정할 수 없으므로 고전교육의 필요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교양과정으로서의 고전교육은 전공을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강좌이므로 기초학문의 부실 문제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기도 하다(안현효, 2019: 118). 윤승준은 본인이 재직하는 학교의 자유교양대학 운영철학을 통해 교양교육의 원칙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2020: 75).
  • 인류가 축척하여 온 최고의 지적 자산을 공유하고,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오늘의 문제를 다루면서 자신에 대한 성찰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며, 자신을 둘러싼 주변과 세계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지평을 넓히도록 한다.

이는 다소 모호하게 기술된 면이 없진 않지만, 현대의 고전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점은 명확하다. 다시 말하자면, 현재의 학습자들이 구비해야 하는 인식의 출발점에는 고전을 통한 현대의 제반 문제에 대한 포괄적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고전으로서의 가치는 물론 언어, 특히 영어라는 외국어에 대한 호기심과 거부감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탁월한 교육 콘텐츠라고 할 수 있다. 희곡 문학은 문자로 이루어진 텍스트로 존재하는 문학 양식일 뿐만 아니라 연출, 배우, 의상, 음악 등의 결합을 지향하는 종합 예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역사성과 문학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희곡 고전이 지니는 고유의 특성은 언어적 표현력은 물론 종합적 소통능력의 측면에서도 훌륭한 교육 매체의 기능을 한다고 할 수 있다.

3. <베니스의 상인>-타자화의 함정

교양 교육, 특히 다문화 교양 교육을 위한 매체로 <베니스의 상인>을 읽고 감상함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방식대로 안토니오를 중심으로 한 권선징악이라는 주제와 포오샤를 중심으로 한 사랑과 결혼이라는 낭만적인 주제로 접근하는 것과는 달리, 인종과 문화, 그리고 종교라는 가치, 그리고 그로 인한 차별과 갈등이라는 현재적 갈등의 관점에서 작품을 대하는 것은 문학작품이 지닌 고유한 생명력을 확인하는 작업일 뿐 아니라 현대의 여러 갈등에 내포되어있는 역사성을 깨우치는 중요한 과업이 될 것이다.
<베니스의 상인>에서 샤일록은 단 7개의 장면에서만 등장하면서도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샤일록이 이러한 생명력을 지니게 된 것은 물론 그 인물을 생동감있게 그려낸 셰익스피어의 공이 가장 클 것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16세기 이후 현재까지 끊임없이 변해온 독자, 혹은 관객의 가치관도 역시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샤일록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악한’에서 ‘피해자’로 양분되어 전개되어왔다. 초기의 셰익스피어 비평가들은 샤일록을 악한으로 규정하고 기독교적인 사랑과 자비를 거부하는 암적인 존재로 규정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으나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샤일록 뿐만 아니라 안토니오를 중심으로 하는 베니스의 기독교인들의 부정적인 면들을 서서히 지적하기 시작했다(김종환, 1997: 122-27 참조). 위기에 처한 남편과 그의 친구를 구하기 위해 판사로 변장한 포오샤의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았던 이 전의 비평과는 달리, 재기 넘치는 여주인공으로서의 역할을 넘어서는 교묘한 속임수를 행한 것이며, 그로 인해 기독교의 원리와 정의가 훼손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Moody, 1991: 81). 악한 샤일록 혹은 희생자 샤일록이라는 한 인물에 대한 상반된 평가는 20세기 후반 ‘타자’(Other)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됨으로서 보다 균형잡힌 시각을 보여주게 된다. 문학 텍스트가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문화에 의해 구성되고 영향을 반영한다고 파악하는 신역사주의적 관점은 유대인인 샤일록을 베니스의 ‘인종적, 종교적, 경제적 타자’로 간주한다(한도인, 2016: 214). 샤일록이 지닌 타자성, 그리고 베니스인들이 지니고 있는 타자에 대한 차별이 그를 피해자로 인식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샤일록의 타자성은 어떻게 해서 샤일록에게, 그리고 베니스인들에게 각인된 것인가? 앞서 지적한 대로 신역사주의 관점은 근대 초기의 유대인의 유럽내 위치에 대해 상세히 고찰한다. <베니스의 상인>에서 ‘상인’(merchant)은 안토니오인 것이 당연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베니스의 유대인들은 법에 의해 상인이 되어 진짜 상품을 판매하는 일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Garber, 2004: 285).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은 유럽의 여러 지역을 연계하는 ‘혈관’(Kitch, 2009: 133)의 역할을 했고, 기독교가 사회의 중심 가치였던 베니스에서도 온갖 차별에도 불구하고 ‘베니스에서는 없어서는 안될’(Davis, 2001: 8)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유대인 특유의 근면함과 적응력은 베니스 공화국이 지중해 지역에서 우위를 점하는데 공헌하였고 터키를 비롯한 경쟁 세력들을 견제할 수 있는 힘을 갖게 하였다. 이와 같은 공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은 여전히 베니스에서 이방인으로 취급되었다. 셰익스피어는 <베니스의 상인>에서 샤일록을 비롯한 유대인들을 ‘외국인’으로 규정하고 다른 등장인물에게도 그들을 ‘외국인’으로 부르게 함으로써 이러한 사실을 명백하게 드러낸다. 예를 들면, 작품의 중심 인물인 안토니오는 샤일록을 ‘이방인’(stranger 3.3.27)이라고 언급하며, 법관 역할을 하는 포오샤는 재판 장면에서, 즉 공식 석상에서, 샤일록을 향해 ‘외국인’(alien 4.1.345)라는 표현을 쓴다.
샤일록은 샤일록이라는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유대인’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안토니오나 솔라니오 같은 베니스의 무역상들뿐 아니라 샤일록의 하인인 고보와 그의 아버지조차도 자신들이 모시는 주인을 ‘유대인 주인’(2.2.32, 37)이라고 부른다.3) 한 개인이면서도 집단을 대표하게 되는 이러한 호칭이 수반하는 문제는 그 호칭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가 사회에서 어떻게 통용되고 있는지에 따라 명예로운 이름이 될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 그 반대의 의미를 함축하기도 한다. 일찍이 스톨(Stoll)은 유대인이라는 당시의 호칭에는 명백하게 베니스 사회가 묵시적으로 약속한 “불명예의 표시”가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1911: 244).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베니스인들이 샤일록을 부르는 ‘유대인’이라는 호칭에는 거의 매번 ‘악마’(3.1.18;62) 혹은 ‘악한’(4.1.213)과 같은 부정적인 표현과 함께 쓰이거나 ‘개’(1.3.106, 2.8.14)나 혹은 ‘늑대’(4.1.128-67)와 같은 비인간적인 이미지가 투사되어 있다. 이와 같은 샤일록에 대한 호칭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베니스인들이 보여주는 반감과 혐오의 정도가 개인적인 차원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너무나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며 집요하다는 사실이다. 베니스인들이 유대인을 영원한 타자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은 샤일록의 딸 제시카가 기독교로 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교도’(infidel 3.2.217)로 불리우고 있다는 사실로도 확인할 수 있다. 제시카는 단지 유대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infidel’이라는 ‘믿음이 없는’ ‘이교도’로 여겨지고 있다.
그럼에도 베니스는 이 ‘외국인’이자 ‘이방인’인 유대인들을 완전히 배제하거나 추방해 버릴 수 없다는 사실 또한 명백하다. 베니스의 거상인 안토니오가 인정하듯이 유대인은 베니스의 정의를 구현하는 부분에 있어서 제외될 수 있는 존재는 아니기 때문이다. 안토니오는, “베니스의 무역과 이익은 여러 민족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3.3.30-31) “외국인(유대인)들이 베니스에서 갖고 있는 특권이 거부당한다면, 이 나라의 정의가 의심받을 것”(3.3.27-29)이라고 단언한다. 하지만, 이러한 베니스 경제인의 논리적 공정성은 포오샤의 입으로 대변된 국가 권력에 의해 속절없이 폐기되어 버린다. 법관이 된 포오샤는 샤일록을 ‘베니스인’인 안토니오의 생명에 위해를 가할 수도 있었던 ‘외국인’ 즉, 명백한 타자로 규정하고 처벌을 공언하기 때문이다.
  • 조용히 하시오, 유대인.

  • 한가지 더 법의 적용을 받을 것이 있다.

  • 이 베니스의 법률에 의하면

  • 만약 외국인으로서

  • 간접적, 또는 직접적인 수단으로

  • 베니스 시민의 생명을 위협한 범죄 사실이 명백한 경우는

  • 범인의 재산의 반은 피해자가 될 뻔한 피고의 소유로 귀속되고

  • 나머지 반은 국고로 몰수된다.

  • 동시에 범인의 생명은 오로지

  • 공작의 재량에 달려있고 타인은 절대 관여할 수 없다.

  • 알겠는가, 원고는 지금 그와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

  • Tarry Jew,

  • The law hath yet another hold on you.

  • It is enacted in the laws of Venive,

  • If it be proved against an alien,

  • That by direct, or indirect attempts

  • He seek the life of any citizen,

  • The party ’gainst the which he doth contrive,

  • Shall seize one half his goods, the other half

  • Comes to the privy coffer of the state

  • And the offender’s life lies in the mercy

  • Of the Duke only, ’gainst all other voice.

  • In which predicament I say thou stnatd’st: (4.1.343-53)

포오샤가 언급하는 ‘베니스의 법’은 베니스를 운용하는 정치 권력을 의미한다. 시민과 외국인을 구분하는 정치 논리에 의해 안토니오가 인정하고 있던 사회적 공정성이 훼손되기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포오샤의 판결은 그동안 ‘유대인’(Jew)이라 불러온 대상에 대한 차별의 고의성을 스스로 인정하는 격이 되는 것이며 동시에 ‘유대인’이라 불러온 ‘이방인’(alien)을 베니스인이라는 명예로운 집단에 속하게 둘 수는 없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이는 결국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의 용어로 설명하자면 사회가 묵인한 ‘아브젝시옹’(abjection)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4). 아브젝시옹은 라캉(Claude Lacan)의 상징계와 관련한 탈 주체 개념의 연장선에서 해석해 볼 수 있는 크리스테바의 개념으로서, 주체의 단일성 혹은 동일성을 해체할 위험이 있는 낯선 것들을 배제하고 파괴하고자 하는 현상을 일컫는다(크리스테바, 2001: 21-25참조). 다시 말하지면 (개인일 수도 있고 집단일 수도 있는) 한 주체가 자신의 정체성, 체계,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 경계, 위치, 규칙을 무시하는 것을 추방하고자 하는 심리적 과정이며 그렇게 사회에서 추방되는 것들이 아브젝트이다. 이때 주체는 아브젝트가 기실은 자신의 존재의 일부임을 인식하고 있으며 그 존재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을 잃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동시에 이들로 인해 자신의 자아가 더욱 선명해진다는 역설도 또한 인지하고 있는 불합리를 보여준다. ‘베니스의 법률’로 판결을 내린 포오샤의 경우처럼, 베니스 사회의 상도덕과 경제 원리를 알면서도 샤일록이라는 유대인을 벌하기 위해 이를 무시하고 역류하고자 하는 행위는 아브젝시옹의 과정과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포오샤로 대변된 베니스의 권력이 베니스라는 정치 공간에서 ‘외국인’과 시민을 구분한 판결 이후, 샤일록은 베니스에서 ‘외국인’인 유대인을 통제하기 위한 표본이 되었을 것이며, 따라서 샤일록은 베니스의 백인들은 물론 동족에게도 버림받는 존재, 즉 아브젝트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인 샤일록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이 안토니오를 비롯한 베니스의 남성들에 의해 구체화되고 베니스의 법률에 의해 확정된 반면,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또 다른 ‘외국인들’은 포오샤라는 여성에 의해 희화되고 비하된다. 포오샤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구혼자들에게 시험(상자 고르기)을 치르게 한다. 포오샤의 아버지가 금, 은, 동 상자에 적어둔 글귀를 보고 그의 의도를 가장 적확하게 파악한 구혼자만이 선택의 결과(포오샤)를 누릴 수 있다는 설정은 포오샤의 아버지가 자신과 같은 사고, 즉 동일한 논리 체계를 가진 자가 자신의 후계자가 되길 바란 욕망을 상징함과 동시에 사랑과 결혼으로 빛나는 벨몬트라는 사회도 베니스와 마찬가지로 타자를 경계하고 배제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동질성을 지키고자 하는 규율을 시행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므로 벨몬트를 방문한 다양한 국적을 지닌 구혼자들 중 베니스 출신인 바사니오를 제외한 모두가 다 조롱과 희화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 된다. 포오샤는 프랑스 귀족은 줏대가 없다고 비난하고(1.2.53-63), 영국 남작은 외국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조롱하고(1.2.65-73), 독일 공작은 술(맥주)주정뱅이라고 비웃는다(1.2.82-87).
네리사가 질문하고 포오샤가 대답하는 방식으로 전개된 구혼자 심사는 낭만 희극의 여주인공의 영민함을 보여주는 주요한 희극적 장면 중의 하나지만, 동시에 타자에 대한 주체 세력의 일방적 시선이라는 불편함을 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뿐만 아니라 개인의 능력이나 옷차림, 행실을 언급하며 웃음거리로 만들었던 유럽 출신의 구혼자들과는 달리, 모로코 왕에 대해서는 ‘악마의 낯빛’(the complexion of a devil 1.2.124)이라는 한마디로 평가를 함축함으로써 직설적으로 유색인을 경멸하고 거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경계하여야 할 부분은 포오샤의 외국인에 대한 편향된 시선과 언급에 따라 웃음을 터뜨리던 관객/독자는 결국 부지 불식 중에 그러한 견해에 편승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외국인 그리고 특히 유색인에 대한 이러한 차별적인 묘사를 설명함에 있어서, 이러한 장면들이 작품이 의도하는 희극적 효과라는 전통적인 견해는 극적 논리상으로는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 시대의 베니스를 세계적인 문화와 역사의 중심지라고 묘사하기 위한 장치라는 측면으로 본다면 그 실효성에 의문의 여지가 있어 보이는 것은 분명하다.

4. <오셀로>-타자의 착종된 자아의 한계

셰익스피어의 비극 <오셀로>는 소위 말하는 4대 비극에 속하는 작품일 정도로 그 명성은 의심할 나위가 없기는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주요 비극이 주로 정치적인 주제가 중심인 반면, <오셀로>는 상대적으로 가볍다 할 수 있는 사랑과 질투를 소재로 하고 있음과 더불어 주인공이 유색인이라는 점과 그런 그가 백인 중심 사회에서 자수성가한 인물이라는 사실은 그동안의 상반된 평가를 낳는 요인이 되었다. 전통적인 비평에서는 인물의 본성과 경험에 치중하여 오셀로의 영웅적 면모와 비극적 사랑, 그리고 이아고의 악행을 중심으로 작품을 분석하는데, 비극적 결말의 원인을 오셀로의 성급한 성격과 어리석음에서 찾음으로써 비극적인 장엄함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기도 하다(McDonald, 2000: 196). 20세기 후반의 연구 동향은 인물의 행동과 의식중심에서 주인공을 둘러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배경들을 분석하여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환경을 중점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기존의 단순한 연대기적인 역사적 접근 방식을 넘어 역사와 정치, 그리고 문화의 유기적 연계상황을 중시하는 신역사주의와 문화 유물론적인 접근 방식은 셰익스피어를 연구하는 데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Wayne, 1991: 67).
특히 <오셀로>에 관한 연구의 중심에는 흑과 백이라는 인종적 갈등(Smith, 2005: 82) 뿐 아니라 베니스라는 백인 사회의 중심으로 진입한 유색인 타자의 갈등, 즉 사회 문화적 권력체제와 타자성의 문제로 조명되었다(Greenblatt, 1980: 240). 이들은 타자인 오셀로가 베니스에 동화되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셰익스피어 시대의 인종적 편견 혹은 차별에 대한 인습적인 사고를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오셀로는 전쟁에서는 영웅이었지만 질투라는 개인적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파국을 맞이하는 ‘평범한 인물’(Cohen, 1980: 172)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사회적 정치적 타자임에도 불구하고 권력과 지배의 중심에 섰으나 결국 그 타자성으로 인해 중심에서 밀려나는 약자가 되는 것이다(Marks, 2001: 101). 유색인, 즉 무어인 오셀로는 물리적인 경계를 뚫고 특정 사회에 진입한 인종적 타자이며, 동시에 백인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는 행위로 주체 세력임을 인정받고자 하는 정치적 타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문화라는 주제로 <오셀로>를 읽어보는 것은 소위 ‘타자성’이라는 말로 손쉽게 치환되고 있는 차이에 대한 차별을 좀 더 밀착된 시선으로 보는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차별이 일상화가 된 환경에서 살고 있는 <베니스의 상인>의 샤일록과 제시카와는 달리, 오셀로는 표면적으로는 차별을 극복한, 혹은 차별을 인식하지 않은 채로 베니스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오셀로>의 오셀로는 무대에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관객들에게 특정 이미지로 소개된다. 오셀로의 부관인 이아고는 자신의 상관을 이름을 부르는 대신 피부색과 인종을 의미하는 ‘무어인’(the Moor 1.1.39)라는 말로 지칭한다. 그는 브러밴쇼에게 딸 데스데모나와 오셀로의 비밀 결혼을 고발하면서 지속적으로 저급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1.1.88-117)으로 오셀로를 음탕하고 호색적이며 야만적인 인물로 각인시킨다. 하지만 이아고의 이러한 묘사는 실재 오셀로의 모습과는 다르다. 오셀로는 야만적이지도 않고 음탕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당당하고 권위에 차있는 모습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5) 이러한 사실은 극 후반부에 로도비코가 ‘원로원 전체가 완벽하다고 인정한 고귀한 무어인’(the noble moor whom our full Senate/ Call all in all sufficient 4.1.260-61)이라고 언급함으로써 다시 한번 상기된다. 따라서 이아고의 언급은 오셀로의 진짜 모습이라기보다는 오셀로라는 개인에 대한 이아고의 반감을 표현한 것이면서 동시에 당시의 관객들이 흑인에 대해 지니고 있었던 보편적 인식에 기대어 호응을 유도했던 장치라 볼 수 있다6). 하지만, 다른 베니스의 원로원들과 마찬가지로 오셀로의 인품과 업적을 공공연히 칭송했던 브러밴쇼는 딸의 비밀 결혼 소식을 듣고 격노하면서 오셀로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드러낸다. 이아고와 브러밴쇼에 의해 언급되는 오셀로, 즉 흑인의 야만성은 베니스라는 주류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그래서 차별받고 배격되어야하는 비문명성을 의미하고 있었음을 드러내주는 것으로, 이는 <베니스의 상인>에서 샤일록에게 경제적으로는 인정하면서도 종교적인 이유로 부여되었던 타자성과 유사한 양상이다. 그러나 당사자인 오셀로는 자신이 베니스에 기여한 공로에 대한 댓가를 (결혼으로)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여기고 있으며, 브러밴쇼의 분노에 당당히 마주한다.
  • 당연히 맞이해야지.

  • 나의 행적이, 나의 직함이, 나의 결백한 영혼이

  • 나의 정당성을 설명해줄 것이오.

  • I must be found

  • My parts, my title, and my perpect soul

  • Shall manifest me rightly (1.2.30-32)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이러한 오셀로를 관객의 예상을 뛰어넘는 인품을 지닌 것으로 설명하지만, 이 부분에서 주목할 것은 그 어디에도 자신의 피부색을 의식하는 표현이 없다는 사실이다. 오셀로는 수년간 이루어 온 공적으로 미루어 자신이 베니스라는 백인 사회의 일원이 되었음을 의심조차 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오셀로는 자신이 백인 여성, 그것도 베니스의 권력자의 딸을 배우자로 맞이하는 것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자신하고 있으므로 브러밴쇼를 위시한 백인 귀족무리들이 칼을 들고 자신 앞에 적개심을 드러낼 때 조차도 침착하고 당당하게 ‘나이답게 행동하라’(you shall more command with years 1.2.60)고 충고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오셀로를 ‘고귀한 자아’(Muir, 2005: 103)를 지닌 인물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사실 오셀로는 자신을 베니스의 원로원들과 동등한 위치로 각인시킨 자의식으로 인해 브러밴쇼의 분노의 실체를 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이 베니스에 용병으로 투입된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않을 뿐만아니라, 오히려 베니스를 터키의 위협에서 구해낸 영웅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정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1.3.82-90). 그러므로 오셀로는 이아고의 비아냥과 브러밴쇼의 분노의 이면에 있는 유색인에 대한 차별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인식의 괴리는 베니스가 취한 오셀로라는 이방인에 대한 양가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베니스는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제거하기 위해 외부인인 오셀로를 이용하는 한편(Loomba, 1989: 48), 오셀로에게는 그러한 정치적 책략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음으로서 그가 왜곡된 정체성을 갖도록 유도해 온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베니스 사회의 이러한 책략은 데스데모나와의 결혼이라는 사건이 발생하기 직전까지 순조롭게 이루어졌지만, 바로 그러한 책략 덕택에 오셀로는 아무런 의심없이 베니스에 내재하고 있는 정치적, 그리고 인종적 경계를 넘는다. 그러나 베니스의 가치관으로 학습된 오셀로의 정체성이 당당할수록 베니스 사회는 지배 권력의 경계의식을 드러낸다. 그 한 예로 브러밴쇼는 베니스의 권력자라는 지위에도 불구하고 딸의 결혼에 대해 원로원들의 지지를 얻는데 실패한다. 오셀로의 업적이 아무리 뛰어날지라도 자신의 딸의 남편으로서 오셀로의 검은 피부는 입에 올리기도 거북한 결함이기 때문이다(Cowig, 1992: (web), 한도인, 2015: 252). 오셀로의 바람과는 달리 베니스의 지배 권력은 폐쇄적인 경계의식을 보전하고 있으며, 오셀로의 결혼은 오히려 그러한 경계의식을 점검하는 계기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결혼으로 주류사회에 진입하려는 오셀로에게 베니스 의회는 터키의 침공이라는 위기를 당장 해결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사이프러스 총독이라는 직함을 부여하기는 하지만 이는 엄밀한 의미로 보자면 베니스에서의 추방이라고 할 수 있다. 사이프러스로 부임하는 것은 베니스라는 중심에서 물리적으로 멀어지는 것이고 이는 오셀로에게 다시 변방의 존재가 될 것을 강요함과 다름이 없다.
역설적이게도 오셀로가 자신이 지닌 자의식과 정체성의 민낯을 보게 되는 계기는 바로 그의 결혼이다. 오셀로에게 있어 데스데모나와의 결혼은 베니스가 준 최대의 선물이자 보상이었기 때문에 절대로 육욕으로 더럽혀져서는 안 되는 성스러운 결합이어야 했다(1.3.262-63). 이렇게 ‘지나치게 이상화되어 현실적인 토대가 필요한’ (Neely, 1987: 83) 오셀로의 사랑은 데스데모나를 보면서 로더리고처럼 정절과 타락을 동시에 상상할 수 없으며, 캐시오처럼 이익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대할 수도 없고, 브라밴쇼처럼 성적 일탈을 대놓고 추궁하지도 못한다. 데스데모나를 성적인 대상으로 대하는 것은 베니스의 모두가 저급하게 취급하는 흑인(무어인)이나 저지르는 일이므로, 도덕적이고 이상적인 베니스의 백인의 정체성을 착종시킨 오셀로로서는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행위인 것이다. 이아고는 오셀로에게 ‘사람은 겉과 속이 같아야 한다’(Men should be what they seem 3.3.130)라고 속삭인다. 오셀로에게 있어 ‘겉’은 그의 행동을 의미하므로 ‘당연히, 사람은 겉과 속이 같아야 하지’(3.3.131)라고 대꾸한다. 오셀로는 베니스 백인 사회가 겉으로 보여주는 호의를 정직한 내면의 반영이라고 믿고 있고, 눈에 보이는 하얀 피부색을 정직함이라고 받아들이는 한편 자신도 그들과 다르지 않다고 여긴다. 오셀로의 이러한 태도는 역설적으로 오셀로의 감춰진 내면, 즉 자신이 흑인임을 알고 있고 그 때문에 오히려 흑인처럼 행동하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아고의 악의적인 고발과 브러밴쇼등의 격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당했던 오셀로는 사이프러스에서 중심을 잃고 무너지기 시작한다. 오셀로의 단단했던 자의식은 이아고의 터무니없는 계략으로 흔들리고 그러한 흔들림은 곧바로 데스데모나에 대한 불신과 책망으로 이어진다. 이아고는 오셀로의 귀에 의심이라는 ‘독’(pestilence 2.3.347)을 계속 부어 넣고, 오셀로는 데스데모나에 대한 의심이 커질수록 점차 자신의 피부색을 의식하게 된다. 그동안 단 한번도 밖으로 내뱉은 적이 없었던 자신의 검은 피부색을 데스데모나의 부정과 관련하여 언급하는 것이다.
  • 나의 명예가, 예전에는 다이아나의 외모처럼

  • 그렇게 깨끗하던 것이, 이제 더럽혀져 시커메졌구나,

  • 마치 내 얼굴처럼.

  • My name, that was as fresh

  • As Dian’s visage, is now begrimed and black

  • As mine own face. (3.3.392-94)

자신의 피부색인 검은색이 내포하고 있는 부정적 이미지를 스스로 꺼내는 것은 그동안 의도적으로 무시해 온 자신의 타자성을 의식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각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자신의 피부색에 대한 자각이 데스데모나의 부정을 확신하는 도구로만 쓰였을 뿐, 오셀로 자신에 대한 자각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셀로는 부정한 아내는 ‘이교도의 목을 찔러 죽이듯이’(5.2.356) 죽임을 당해야 마땅하다고 말하며 자신이 베니스의 기독교도임을, 스스로 위장한, 혹은 학습에 의해 착종된 허구적인 정체성을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이아고와 브러밴쇼의 행동으로 드러난 베니스인들이 지닌 인종 의식의 또 다른 단면은 데스데모나를 통해서 파악해 볼 수 있다. <오셀로>에서 흑과 백이라는 인종적, 문화적 대립의 요소를 설명하면서 데스데모나를 인종 차별이라는 의제에 연결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다. 오히려 인종과 나이를 무시한 대담한 사랑으로 여성주의 비평의 우호적인 관심을 받았다(Neely, 1987: 123). 데스데모나가 오셀로라는 나이 많은 유색인을 결혼 상대자로 선택한 것은 전통적으로는 ‘부적절하고 균형이 결여된’(Coleridge(1807) Dean, 1961: 171) 행동으로 여겨지거나 ‘이국적인 것에 대한 환상’(Loomba, 1989: 176)으로 치부되기도 했지만,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여성주의적 시각에서는 오셀로의 얼굴이 아닌 마음을 보는 공정성과 열정, 그리고 적응력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Dash, 1981: 108). 하지만 데스데모나가 오셀로를 보는 시선이 일관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단순하고 이기적이기 까지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데스데모나가 오셀로가 지닌 가치관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었다고 보기는 힘든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셀로의 마음을 보고 사랑하게 되었다고 선언했으나(1.3.250), 결혼한 후에는 정작 자신을 의심하는 오셀로의 마음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역설적인 면을 보인다. 그녀는 자신의 부정을 추궁하는 오셀로에게는 자신의 정절을 설득하려 들지 않는다. 단 한번도 자신을 위해, 그리고 오셀로를 위해, 오셀로의 의심을 해소해주고자 하는 아무런 시도도, 노력도 하지 않고 오직 복종할 것만을 되뇔 뿐이다(3.3.89-90). 이러한 데스데모나의 태도는 오셀로라는 ‘이방인’에 이끌려 결혼을 결정하던 당시 아버지에게 보여주었던 파격적인 행보와는 아주 대조적인 모습이다. 일찍이 오셀로를 마음으로 보았다고 말한 것은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에 이끌린 것을 고백한 것일 뿐, 실재 오셀로라는 인물은 이해하지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조차 하지 않은 현실이 드러나고 있음이다. 이는 데스데모나가 오셀로를 여전히 결혼을 결심하던 순간의 낯선 매력이 있는 ‘이방인’으로 여기고 있음을 암시한다.
오셀로는 베니스인들에게는 베니스를 지킨 영웅이자 백인 여성을 더럽힌 괴물(2005: 134)이라는 양가적 특성을 지닌다. 그러한 이중적 가치로 인해 베니스 사회가 오셀로를 배격한 것은 합리화되고 오셀로의 자살은 불신에 대한 합당한 벌로서 인식되는 결과를 낳는다(Vitkus, 2002: 357). 더 나아가 오셀로를 지배 세력의 경계를 넘어 체제에 도전하는 타자적 존재로 규명하여 그의 자결을 목격한 베니스인들은 일종의 안도감을 느꼈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강석주, 2012: 12). 또한 오셀로와 데스데모나의 죽음이라고 결말에 대해, 이아고의 계략이 오셀로에게는 자신이 부정해온 이방인이라는 자신의 정체를 직면하게 하고 데스데모나에게는 낭만적 환상에서 깨어나 이방인의 실체를 목격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 둘의 죽음을 사회의 금기를 깨고 체제의 질서를 어지럽힌 댓가를 치룬 것으로 평가하는 관점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7). 그러나 이러한 결론들은 주류사회가 유색인을 대하는 이중적 가치관과 더불어 유색인인 오셀로가 지니게 된 양가적 특성, 즉 착종된 자아를 인지하지 못하는 인식의 한계를 드러낸 결론이라 할 수 있다. 오셀로는 이방인으로서 베니스에서 최고의 위치에 오를 만큼 뛰어난 능력과 그에 걸맞는 강한 자의식을 갖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그의 자의식은 흑인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이 백인과 다름없음을 주장하는 양태로 표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셀로가 지닌 백인 사회를 향한 강한 인정 욕구는 성취의 보상과 다름없는 데스데모나의 정절이 의심받는 순간 맹렬한 배신감으로 전이된다. 하지만 데스데모나는 오셀로의 의식의 근간이었던 성공한 베니스인이라는 착종된 자아가 부여한 환상 속에서 그의 자부심이 인종적 열등감으로 역전해가는 변화를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이와 같이, 셰익스피어의 작품 <오셀로>의 현대적 읽기를 통해 오셀로가 지닌 착종된 자아의 특성과 더불어 데스데모나가 지녔던 인식의 한계를 냉철하게 인지하는 것은 현대의 다문화사회를 살아감에 있어 필요불가결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5. 결론

셰익스피어와 같은 고전 문학 혹은 고전 예술이 현재에 존재하는 의의는 작품이 지녀온 역사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그 역사성을 토대로 현대를 해석해 나가는 동력을 구할 수 있는 끊임없는 원천이 된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고 현대의 달라진 시각으로 고전의 작품에 그려진 세상을 바라보는 행동은 깨어있는 지성, 즉 살아있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학습활동이다. 고전을 통해 현대의 문제를 고찰해 보는 것은 학습할 수 있는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이며 대학의 교양교육은 그 현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문학작품이 지닌 고유한 생명력을 확인하는 작업일 뿐 아니라 현대의 여러 갈등에 내포되어있는 역사성을 깨우치는 데에 필요한 중요한 과업이라 할 수 있다.
현재의 다문화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다문화 이전의 사회, 즉 주체 세력과 타자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 주체 세력의 타자에 대한 억압과 차별은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을 전제로 한다. 즉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사회 혹은 집단의 동질성을 인식하고 그 동질성이라는 정체성을 위협하는 존재를 ‘나’라는 경계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공동체의 경계 밖으로 이방인, 즉 낯선 존재를 추방한다는 것은 결국 이방인을 타자화하고 그 타자를 배제하는 전략을 구사하는 것을 의미한다(크리스테바, 2001: 41). 낯섦 혹은 다름에 대한 무형의 두려움은 인종, 성, 종교, 혹은 장애 등 다양한 형태로 실재하는 차이를 차별로 인식하는 대상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왜곡되고 증폭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주류 권력에 의해 필연적으로 주변으로 밀려나는 집단들이 발생하게 되는데, 한 국가라는 관점에서 경계 외의 타자인 외국인들, 즉 다문화인들은 그 집단에 어쩔 수 없이 포함되게 된다. 이때, 다문화에 관한 관심과 이해가 타자 혹은 약자를 향한 동정적인 관점에서 머물러 있는 것은 사회 혹은 국가라는 집단은 물론, 주체 세력이라 자부하는 집단의 안위는 물론 각자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데에도 부족한 역량을 보인다. 이제는 문학, 특히 고전 문학을 통해 역사와 문학에 대한 통시적인 시각과 더불어 다문화를 대하는 시각에 대해 보다 심층적인 고찰이 필요한 시기인 것이다.
<베니스의 상인>을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방식대로 안토니오를 중심으로 한 권선징악이라는 주제 혹은 포오샤를 중심으로 한 사랑과 결혼이라는 낭만적인 주제로 읽는 대신, 인종과 문화, 그리고 종교라는 가치, 그리고 그로 인한 차별과 갈등이라는 현재적 갈등의 관점에서 작품을 대면해 보았다. 샤일록과 제시카가 본인들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미 그들의 것이 되어있는 문화적 인종적 속성으로 인해 모욕당하고 차별받으며 박해받는 것은 작품이 쓰여진 시대에는 피해 당사자들조차도 죄라고 인식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는 합리적인 여론의 힘을 간과한 가설에 불과하며, 이러한 가설에 의거하여 누군가를 타자로 인식하고 그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려 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불합리하고 비윤리적인 일이 될 것이다. 따라서 <베니스의 상인>에 대한 다문화적 관점의 고찰은 현재 다원화되어가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직시하는 데에 필수적인 교양의 일부가 되어야 함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베니스의 상인>을 통해 타자에 대한 지배 세력의 폭력적인 관점을 돌아보았다면, <오셀로>는 오셀로라는 이방인(유색인)이 한 사회에 정착하여 성공을 이룬 타자의 내면을 고찰해 볼 수 있다. <오셀로>에 그려진 비극은 물론 고의적인 인종 차별을 일삼는 이아고의 파행이 촉발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오셀로의 자아, 즉 자신이 몸담게 된 사회의 가치관을 자의적으로, 혹은 다른 한편으로는 타의적으로 학습한 결과이다. 무어인 오셀로는 용병으로 베니스에 진입하는 것으로 지리적인 경계를 넘었고 이어 수십 년 동안 숱한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어냄으로써 베니스에서 사회적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면서 베니스인이라는 정체성을 내재화한다. 탁월한 전쟁 업적을 토대로 오셀로는 누구나 칭송해 마지않는 백인 여성과 결혼함으로써 자신이 베니스의 주체 세력의 일부임을 확인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베니스 사회가 자신에게 부과하고 있는 양분된 인식, 즉 유색인을 향한 멸시와 성공한 군인에 대한 칭송이 지니는 이율배반적 양가성을 인지하지 못했다. 이는 그의 정체성이 베니스에 정착하는 동안 지배 권력에 의해 학습을 통해 잘못 배양된 허구적인 자아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오셀로>를 타자가 지니게 되는 특수한 정체성을 확인하는 방향으로 다시 읽는 과정은 우리 사회에 적응하고자 하는 다문화 동료들은 이해함은 물론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혹시 있을지 모를 편중된 가치관을 점검하게 해주는 필수적인 교육 콘텐츠라 할 수 있다.

Notes

1) 영문학을 해당 학과의 전공이 아닌 일반교양교육의 대상으로 연구한 경우는 박주은 (2011). “영문학을 이용한 대학의 교양교육”, 김수임.정혜진 (2016). “융합시대에 교양교육의 일환으로 영문학 읽기” 등이 있다.

2) 이와 관련하여 주목하게 되는 현상 중 하나는, 1990년대 이후 우리나라의 영어교육 열풍은 식을 줄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영어라는 언어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을 뿐 여타의 외국어, 특히 결혼이주여성이나 근로 연수생 등, 우리나라의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들의 대상자인 (영어권을 제외한) 외국인들의 삶과 언어에는 무관심하다는 점이다. 그들이야말로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마주하게 되는 ‘외국 문화’임에도 ‘다문화’라는 말로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문화권과 분리하는 행태를 자주 보게 된다. 외국어를 교육하는 목표가 해당 언어를 사용하는 국민의 행동 양식을 이해하고 그들의 문화를 습득함과 동시에 우리의 문화를 그들에게 올바르게 소개, 혹은 전이하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현재의 영어 중심의 외국어 교육은 좀 더 다양화될 필요가 있기도 하다. 이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다문화사회라는 현실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된, 아주 시급한 과제이기도 하다.

3) 실제로 작품에서 샤일록이라는 이름보다 유대인이라는 호칭이 세 배 이상 사용되었음이 밝혀지기도 했다(Cohen, 1980: 58).

4) 아브젝트(abject 비체), 아브젝시옹 (abjection 비체화):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의 『공포의 권력』에서 핵심적으로 사용된 개념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상징계가 요구하는 적절한 주체가 되기 위해 이질적이고 위협적인 것들을 거부, 배제, 추방한다. 그는 추방된 것을 ‘아브젝트’(abject), 추방시키는 현상을 ‘아브젝시옹’(abjection)이라고 개념화했다. 한국비평가협회에 따르면, ‘비체’ 혹은 ‘비체화’라는 번역이 원어의 뜻을 적확하게 담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아브젝시옹을 그대로 쓰기도 한다(비평용어사전, 한국비평가협회). 본 연구에서도 아브젝시옹, 아브젝트를 쓴다.

5) 사실 오셀로의 대사는 살인의 순간조차 베니스의 귀족과 다름없이 우아하고 완벽하다. 그러나 최초로 영화로 구현된 <오셀로>(1965년, 스튜어트 버지(Stuart Burge) 감독)에서는 백인 배우인 로렌스 올리비에가 얼굴에 검댕 칠을 하고 일부러 어색한 발음과 거만한 자세를 지닌 오셀로를 연기하였고 이는 오셀로의 전형이 되었다(Davis, 2007: 163-82 참조). 흑인 배우가 오셀로를 연기한 것은 올리버 파커(Oliver Parker)가 감독한 1996년 작품이 최초였다. 영화화 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역시 훌륭한 인문 교양교육 콘텐츠이며, 영화화와 관련한 부분은 다음 기회에 논하기로 한다.

6) 이아고의 유색인에 대한 차별적 언사는 오셀로에게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7) <오셀로>의 결말에 대한 다양한 견해는 아든판 <오셀로>의 부록1 참조 (Shakespeare, William (1622) Othello: Arden Shakespeare, Ed. E. A. J. Honigmann (1997). Meth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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