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학예와 기초학문의 관계설정을 위한 역사적 탐구-교양의 학문적 정체성 확보를 위한 시론
A Historical Inquiry into the Relationship-Setting Between Liberal Arts and Basic Disciplines: A Preliminary Discussion on Securing the Academic Identity of Liberal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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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본 논문의 목적은 자유학예와 기초학문 간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규명함으로써 분과학문 체제 아래에서 드러난 기초학문의 한계를 밝히고, 그 한계 속에서 자유학예의 역할을 연구와 교육의 관점에서 정립하고자 하는 데 있다. 교양학의 학문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일은 단순한 교양교육의 개선을 넘어, 대학 내부의 학문 체계를 새롭게 구성하는 과제와 직결된다. 그러나 오늘날 교양은 교육 중심으로 편중되고 연구 기반이 취약하기 때문에 학문으로서의 위상과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따라서 자유학예와 기초학문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일은 이러한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고 교양학의 학문적 위상을 제고하는 핵심 과제라 할 수 있다.
근대 이후 인문학은 분과 중심의 전문화된 연구 체제로 전환되면서 통합적 인간 형성의 기능을 점차 상실하였고, 연구 중심 문화와 실용주의에 압도되면서 기념비적 담론으로 주변화되었으며, 인문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교육적 기반 역시 약화되었다. 사회과학은 근대 국가 형성과 실용적 요구에 따라 분과화되었으나, 국가 이데올로기와 실증주의, 과학주의에 매몰되면서 인간 행위의 복합성과 사회 구조의 총체성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도구적 합리성에 종속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자연과학은 4과의 통합적 인식 체계에서 분과학문으로 전환되며 학문적 전문성을 축적하였으나, 학문 간 단절과 과학의 윤리적 함의 축소라는 문제를 낳았다. 이들 세 영역 모두 분과학문이라는 제도적 틀 속에서 학문 간 연계성과 사회적 책무성을 약화시키며, 오늘날의 복합적 문제에 대응하기 어려운 구조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자유학예의 새로운 변형태로서 교양 인문학, 교양 사회과학, 교양 자연과학을 정립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함이다.
학문으로서의 교양은 교육에 치중된 기존의 틀을 넘어 진리 탐구를 지향하는 연구의 사명과 지식 전수를 원리로 하는 교육의 사명을 주축으로 하는 통합적 학문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교양학은 기초학문의 횡단적 성과를 구축하는 이론적 측면과 인간의 자기형성을 추구하는 실천적 측면을 아우르는 학문, 곧 학문성과 인간성을 겸비한 학문으로 정립될 필요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교양이 ‘오래된 미래’로서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길이다.
Trans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historically clarify the relationship between liberal arts and basic disciplines, thereby revealing the limitations of basic disciplines within the the disciplinary system, and to establish the role of liberal arts within those limitations from the perspectives of research and education. Securing the academic legitimacy of liberal arts and Sciences(LAS) extends beyond merely improving liberal arts programs. it is directly linked to the task of reconfiguring the entire academic structure within the university. However, today’s liberal arts education is disproportionately focused on teaching and lacks a robust research foundation, leading to persistent questions about its status and identity as an academic discipline. Therefore, reconstructing the relationship between liberal arts and basic disciplines is a core task for overcoming these structural limitations and enhancing the academic standing of LAS.
Since the modern era, the humanities have gradually lost their function of fostering integrated human development as they shifted to a specialized, discipline-centered research system. Overwhelmed by research-oriented culture and pragmatism, they became marginalized into monumentalized scholarly discourse, while the educational foundation for realizing humanistic values also weakened. Social sciences became compartmentalized in response to modern state formation and practical demands, yet they faced criticism for becoming mired in state ideology, positivism, and scientism. This led to an inability to fully explain the complexity of human behavior and the totality of social structures, subordinating them to instrumental rationality. Natural science accumulated academic expertise by transitioning from the integrated cognitive system of the Quadrivium to specialized disciplines, yet this gave rise to problems of interdisciplinary fragmentation and the reduction of science’s ethical implications. All three domains reveal structural limitations within the institutional framework of specialized disciplines, weakening interdisciplinary connectivity and social accountability, making it difficult to address today’s complex problems. The reason we must establish liberal studies in humanities, liberal studies in social sciences, and liberal studies in natural sciences as new forms of the liberal arts is precisely to overcome these limitations.
Liberal arts as an academic discipline must transcend the existing framework centered on education and establish itself as an integrated discipline anchored in the mission of research which pursues truth and the mission of education which is based on the transmission of knowledge. LAS must be established as a discipline that encompasses both the theoretical aspect of building cross-disciplinary achievements in foundational studies and the practical aspect of pursuing human self-formation—a discipline that combines academic excellence with humanity. This, ultimately, represents the path through which the liberal arts can secure their sustainability as an “old future”
1. 들어가면서: 현대 학문의 전문화와 자유학예의 중요성
시대 변화는 학문의 경계를 새롭게 규정하고 지식의 위상과 기능을 지속적으로 변모시켜왔다. 따라서 학문을 이해한다는 것은 당대의 시대상과 사회구조 속에서 이 같은 변화의 모습을 정교하게 추적하고 해명하는 작업과 직결된다. 오늘날 우리는 단일 학문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복합적 문제의 출현, 기초와 응용의 경계가 무너진 융합연구의 확산, 개별 학문을 넘어서는 ‘공통의 지적 원리’에 대한 관심의 부활 등 학문간 ‘통합’(intergration)을 요구하는 흐름과 마주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에도 불구하고 현대 학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인 ‘전문화’는 오히려 시대 요구에 역행하는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근대 과학혁명 이후 가속화되었던 학문의 분화와 이로 인한 지식의 파편화가 현시대의 학문적 경향에 부합하지 않다는 점은 명확하다. 일례로 미국 대학교육협의회(AAC&U)는 팬데믹 이후 고등교육 혁신의 방향을 가늠하면서 통합적 측면에서의 자유학예의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팬데믹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이 있다면, 학문 분야의 전문화로 인해 생산된 파편화된 지식이 우리 상황에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팬데믹 이후 세계에서 점점 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통합된 이해가 필요하다. 새로운 형식의 교육과정과 교육적 통합을 실현하면 자유 학예를 고등교육과 지식 생산의 최첨단으로 되돌릴 수 있다. 학부 교육과정에서 학문 분야의 전문화와 대학원 및 전문 교육의 전통적인 패턴을 완화하면 도덕적 삶, 직장 및 시민적 삶에 대한 폭넓은 준비를 원하는 학생들의 요구에 보다 잘 부합하는 혁신의 문이 열릴 수 있다(Adams, 2022).
팬데믹 이후 자유학예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목은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학문적 대안으로 왜 자유학예를 주목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은 기존의 분과학문 체계로는 포착하거나 해결하기 어려운 ‘빅 퀘스천’의 형식을 띠고 있다. 기후변화, 인공지능 등과 관련한 문제들은 단일 학문의 경계를 넘어서는 복합적 사고를 요구하며, 지식의 통합과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 이해를 요청하는 대표적 사례들이다. 인간과 세계의 통합적 이해를 추구했던 자유학예가 왜 지금 여기에서 소환되는지 그 이유는 분명하다. 인간의 이성과 덕성을 통합적으로 계발하려는 시도로서의 자유학예는 오늘날 빅 퀘스천을 다루는 데 필요한 학문정신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인간향상기술(Human Enhancement Technology)이 펼쳐내는 포스트휴먼 시대 역시 인간 존재의 전통적 경계를 무너뜨림으로써 인간에 대한 재정의(redefinition)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이 같은 전환의 시기에는 인간의 본질, 자유, 책임, 공동체성에 대한 성찰적 논의를 통해 기술 중심의 사고에 균형감각을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유학예는 인간을 단지 생물학적, 기술적 존재가 아닌 윤리적이고 문화적인 존재로 파악함으로써 포스트휴먼 기술의 궤도를 수정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러므로 자유학예는 인간의 조건이 급격히 변화하는 시대에 인간성과 가치의 기준을 재정립하는 지적 자원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자유학예의 시대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자유학예를 교양교육의 본령으로 삼고 있는 교양교육 학계에는 여전히 미해결의 과제가 존재한다. 우선 자유학예를 구성하는 기초학문교육이 교양교육의 핵심으로 간주되지만, 이러한 인식은 이상에 머무를 뿐 우리 대학의 교양교육과정에서 자유학예가 차지하는 위상은 열악하다(김선영 외, 2023). 또한 기초학문 유관학과들은 교양교육에서 말하는 기초학문을 자신들만의 고유한 학문영역으로 간주하고, 교양교육 내 기초학문 교육을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의 입문 교육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교육에서 마주하는 현실보다 더 심각한 것은 연구의 측면이다. 현행 학문 분류 체계에서 교육학의 하위분야로 설정되어 있는 ‘교양교육’을 중분류 수준의 독자적 학문 분야로 격상시키고자 하는 시도 가운데서 가장 결정적인 장애물로 작동하는 것이 바로 연구 분야이기 때문이다. 현재 교양교육 관련 연구는 대부분 기초문해교육 관련 주제나 교과목 운영사례에 치우쳐 있다(백승수, 2019; 정연재, 2021). 그 결과 자유학예로부터 연원하는 깊이 있는 사상을 담아내는 연구나 기초학문 내에서의 횡단적 연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분과학문체계에서의 기초학문과는 차별화된 연구성과를 보여줌으로써 연구와 교육의 선순환 체계를 조기에 확보하는 과제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본 논문의 목적은 교양이 교양교육이라는 ‘교육’분야의 안전한 길을 벗어나 학문으로서의 정체성을 획득하기 위한 선결 조건으로 자유학예와 기초학문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규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규명 작업을 통해 분과체계 아래서의 기초학문의 한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동시에 통합적 측면의 자유학예의 역할을 연구와 교육의 측면에서 제시할 것이다. 고등교육의 위기가 심각한 상황에서 교양학의 학문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일은 단지 교양교육의 개선에 머무르지 않고, 대학의 학문체계 전반을 재구성하는 과제와 연결된다. 현재 교양은 교육에 편중되어 있으며, 이로 인해 연구 기반이 취약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고등교육의 변화와 학문의 분화과정 속에서 학문적 정체성을 강하게 의심받고 있다. 자유학예와 기초학문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일은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교양학의 학문적 위상을 제고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본 논문의 연구문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자유학예에서 기초학문으로의 이행은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이루어졌고, 이행과정에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가?
둘째, 자유학예를 주축으로 하는 교양학은 분과학문 체제 내에서의 기초학문이 지니는 한계와 공백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며, 그것은 교양학의 존재 이유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셋째, 자유학예를 주축으로 하는 교양학은 분과학문 체제 내 기초학문과 어떤 차별성을 확보할 수 있는가?
넷째, 교양학의 정체성, 존재 이유, 차별성은 교육과 연구라는 두 측면에서 어떻게 확보될 수 있는가?
2. 자유학예에서 기초학문으로의 이행: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가
2.1. 고전 인문학에서 분과 인문학으로
학문의 역사에서 인문학의 변천과정을 살피는 작업은 교양 인문학의 정체성과 차별성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전제다. 주지하다시피 인문학은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시작되어 중세의 자유학예,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거쳐 근대 대학의 성립과 함께 현대적 의미의 분과학문으로 자리잡았다. 고전 인문학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개념은 로마 공화정 시대 키케로(Cicero)에 의해 구체화된 후마니타스(humanitas)일 것이다. 플라톤이 중시한 산수, 음악, 기하학, 천문학의 교과는 4과(quadrivium)로, 이소크라테스가 강조한 문법, 수사학, 논리학은 3학(trivium)으로 각각 독자적으로 발전해오다가 후마니타스라는 통합적 이념 아래 결합되면서 자유학예(artes liberales)라는 체계를 형성하였고, 이는 진리 탐구와 인간다움의 함양을 핵심으로 하는 고전 인문학의 전통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1) 주목할 점은 이러한 자유학예의 일곱 과목이 11세기 경까지‘철학’(philosophia)이라는 용어로도 사용되었으며, 이는 서양 고대 및 중세 학문체계에서 철학, 인문학, 자유학예가 개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범주로 통합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황수영, 2010). 학문 일반으로서의 철학과 인간 교육으로서의 인문학은 자유학예라는 개념 안에서 상호 교환 가능하고 종합적인 지식체계로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정연재, 2021). 그러나 근대에 들어오면서 이러한 연관관계에 균열이 가고 인문학은 점점 분과학문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학문사적 측면에서 본다면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근대 대학제도의 성립은 자유학예 전통의 고전 인문학에서 분과학문 체제의 인문학으로 전환하는 데 중요한 계기를 형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르네상스 인문주의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키케로의 후마니타스를 스투디아 후마니타티스(studia humanitatis), 즉 인문 연구로 재개념화하면서 그 범위를 문법(grammatica), 수사학(rhetorica), 역사학(historia), 시(poetica), 도덕철학(philosophia moralis)으로 제한했으며, 각각의 분과 교육에서 라틴어와 그리스어 원전 읽기를 강조하였다. 특히 스투디아 후마니타스는 스투디아 디비니타티스(studia divinitatis)와의 대결구도에서 형성된 개념으로 당시 신학과 그것의 방법론을 마련해준 논리학 중심의 스콜라 학풍에 반대하고 인간에 대한 학문을 총체적으로 규정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중세 3학의 중추였던 논리학이 위축된 가운데 수사학이 가장 중요한 분과로 부상했으며, 4과 역시 빠져 있다는 점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황수영, 2010; 이종흡, 2007). 그러나 르네상스 인문 연구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단순한 교과내용의 변화뿐만 아니라 전문적인 연구 영역이 생겨남으로써 분과학문으로 전환되는 계기를 확보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르네상스 시기 예술과 인문주의 사유의 관계를 탐색한 크리스텔러는 인문 연구(studia humanitatis)가 논리적 훈련보다는 문학과 역사적 주제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점에 주목한 바 있고(Kristeller, 1965), 나아가 그래프턴은 르네상스 인문학이 시민적 덕성(civic virtue) 함양과 인간 형성보다는 문헌학 연구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데 주목하였다(Grafton, 1991). 그에 따르면 르네상스 인문주의 학자들은 텍스트에 대한 고증과 비평, 주석 및 해석 등 근대 과학에 못지않은 정밀성을 요구하는 해석의 과학을 구축함으로써 전문적인 연구영역을 구축하였다는 것이다.2) 이처럼 교육에 방점을 둔 고전 인문학과는 전혀 다른 길, 즉 인문학을 엄밀한 탐구 방법과 대상이 있는 학문으로 정립하는 데 관심을 두었다는 것은 고전 인문학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전인적인 인간육성’의 기능이 상대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두 번째, 근대 대학제도의 성립과 발전이다. 19세기 독일의 훔볼트 대학은 연구중심대학(research university)이라는 새로운 대학 모델을 제시하였으며, 자율성과 전문성을 갖춘 활동으로서 학문 활동을 적극 장려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인문학도 철학, 역사, 고전학, 언어학 등 독립된 학과로 분화되기에 이르렀고, 각각 성과 중심의 연구 활동이 강조되면서 분과학문으로서의 인문학이 정착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하는 대목은 독일식 대학 모델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미국 대학의 변화다. 19세기 후반 미국의 고등교육은 독일의 연구중심대학 모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학문 구조의 근본적인 재편을 단행하였는데, 가장 핵심적인 변화는 전공 중심의 분과학문 체계를 본격적으로 제도화한 것이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미국 대학의 제도적 성립과 학문의 재구조화를 탐색했던 베이시(L. Veysey)는 대학의 조직과 학문체계의 변화를 결정화(Crystallization)로 규정하면서, 미국 대학이 교양적 인간 형성을 목표로 한 고전적 전통에서 벗어나 연구 중심의 분과학문 체계로 전환한 맥락을 예리하게 분석한 바 있다(Veysey, 1965).3) 그는 미국 대학의 제도화를 단순한 규모 확대가 아니라 대학 조직과 학문 구조의 결정화라는 측면에서 이해하였다. 그에 따르면, 당시 미국 대학은 학과(department)를 기본 단위를 하는 조직으로 재편성되었고, 교수는 학과의 일원으로 소속되었으며, 이를 효율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전문적인 행정 관료체제가 도입되었다(Veysey, 1965). 베이시는 당시의 대학을 명성을 위한 경쟁의 장소로 이해하면서 세 가지 수준의 학문적 야망(academic ambition), 즉 자신의 경력을 성공적으로 만들기 위한 교수의 야망, 다른 학과보다 나은 위상을 점유하고자 하는 학과의 야망, 다른 경쟁대학보다 월등하고자 하는 대학의 야망이 중첩되었다고 본다. 특히 교수 개인과 대학 사이에 존재하는 학과는 학문적 야망의 중간 매개체 역할을 담당하면서 ‘학과 독재’(departmental dictatorship) 현상이 나타날 만큼 대학 내부에서 학과의 위상이 급속하게 증대하였다. 이에 따라 학문 구조 역시 학과 중심으로 재편성되었으며, 학과는 자체 예산, 교과과정, 학술지, 연구소를 통해 전문성과 자율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 같은 조직상의 변화는 교수의 정체성을 보편적인 교육자(general educator)가 아니라 자신의 전공에 종속된 전문가(specialist)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제도적 전환과 학문 조직의 변화는 인문학의 위상과 구조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문학, 철학, 역사, 언어학 등 전통적 인문학 분야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독립된 분과로 구성되었으며, 각각의 인문학 분과는 고유의 연구 방법론과 학술 기준을 갖춘 전문 영역으로 정립되기에 이르렀다.4) 일례로 각각의 분과는 미적 감수성, 역사적 객관성, 논리적 분석을 강조하면서 자기만의 독자적인 지적 영역을 구축하였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학문적 근거, 방법론적 엄밀성, 동료 평가에 기반한 학술공동체를 확보하였다(Veysey, 1979). 이 같은 일련의 흐름은 인문학을 사회과학 및 자연과학의 탐구방법과 유사한 학문 영역으로 인식하게 만들었으며, 그 결과 인문학은 분과학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동시에 전문화의 경향을 심화시켜 나갔다. 하지만 이러한 전문화는 인문학의 고전적 기능, 이른바 인간 형성과 인간 삶의 비판적 성찰의 역할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 점에 대해 베이시는 인간의 내적 성장과 고전적 가치 함양을 목표로 하는 고전 인문학의 전통적 역할이 연구 중심성과 실용성을 중시하는 압도적 흐름 속에서 점차 주변화되었다고 진단한 바 있다(Veysey, 1965).
또 다른 측면에서 미국 고등교육의 근대적 전환 과정을 정교하게 탐색한 루벤(J. A. Reuben)은 고전 중심의 통합적 교양교육에서 과학 중심의 연구중심대학 체제로 전환되는 과정을 ‘열린 대학’(The Open University)이라는 용어를 통해 설명한 바 있다. 열린 대학이란 개념은 과학의 객관성과 학문의 다양성이 강조되면서 나타난 새로운 대학 모델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열린 대학에서 가치중립적 과학연구가 주목받고 인격 형성을 목적으로 하는 도덕교육이 주변화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특히 루벤은 교육과정 측면에서 기존의 고전 중심의 중핵과정 대신 선택이수제를 도입하고, 교수의 역할을 강의자에서 연구자로 확장한 점을 중요한 전환점으로 지적하는데, 이러한 변화는 결국 대학교육의 목적을 진리 탐구에서 개인의 능력 개발로 전환시키고, 학생을 수동적 지식 수용자에서 능동적 탐구자로 재규정하는 계기를 만들었다(Reuben, 1996). 이로 인해 전통적 대학의 이상은 점차 해체되었으며, 과학적 사고방식이 인문학 교육 전반에까지 확산되었다. 특히 경험주의, 반권위주의, 객관성과 같은 과학의 핵심 덕목이 대학 교육의 새로운 규범으로 정착되면서, 대학은 인격 형성을 위한 교육의 장에서 점차 벗어나 전문 지식을 생산하는 장소로 재편되기에 이르렀다(Reuben, 1996). 루벤이 주목했던 변화는 인문학이 수행해왔던 인간 형성과 윤리적 성숙이라는 교육적 기능이 어떻게 퇴색하게 되었는지 역사적 맥락을 잘 설명해주는 대목이다.
베이시와 루벤의 분석은 오늘날 교양 인문학과 분과 인문학 간의 관계를 제도적 맥락에서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자유교육의 도덕적 사명이 연구와 전문화된 지식의 보다 분과화된 목표에 자리를 넘겨주었다”는 베이시의 진단이나, “도덕 교육은 확실히 우위를 점한 과학적 객관성에 기반한 교과과정 안에서 중심적인 위상을 상실했다”는 루벤의 지적은, 자유학예가 지향했던 인간 형성의 기능이 근대 대학 체제에서 점차 주변화되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언급이라 할 수 있다(Veysey, 1965; Reuben, 1996). 결국 인문학은 자유학예에서 연원하는 교육적 이상과 근대 대학의 변화과정에서 생겨난 전문성이라는 두 축 사이에서 정체성을 구성해왔으며, 이 두 흐름은 오늘날 대학 내에서도 긴장 속에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분과 인문학이 학술성과 전문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학문의 사회적 연관성과 교육적 사명을 약화시켰다는 점은 분명해보인다. 이러한 점에서 분과 인문학의 한계 극복을 위한 교양 인문학의 역할에 대해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2.2. 사회과학의 분과화와 통합 사회과학에 대한 요구
사회과학은 인문학이나 자연과학에 비해 자유학예 전통과의 연관성이 상대적으로 약한 기초학문 분야다. 인문학이 3학(trivium)을, 자연과학이 4과(quadrivium)을 각각 계승함으로써 학문적 정통성을 확보해온 데 반해, 사회과학은 근대 사회의 성립이라는 학문 외부의 변화와 함께 등장한 학문 분야이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과학은 사회현상 역시 자연현상처럼 설명가능하다는 원칙을 수용하면서 인간 사회를 과학적으로 이해하고 통제하려는 시도 가운데서 학적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따라서 사회과학의 변화를 추적하는 작업은 인문학과 자연과학과는 다르게 사회과학 내부에서 제기된 반성들을 고찰하면서 사회과학의 분과화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교양 사회과학과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방식이 될 것이다. 특히 로스(D, Ross), 마니카스(P. T. Manicas), 월러스타인(I. Wallerstein)의 논의를 중심으로 사회과학의 역사적 형성과 분과화, 그 한계와 대안적 가능성을 살펴볼 것이다.
미국 사회과학의 제도적 기원을 역사적 관점에서 고찰한 로스는 사회과학이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이라는 세 주요 분과로 제도화된 과정이야말로 학문 내부의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라 국가 이데올로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한다. 예컨대 정치학은 1880년대 국가 운영과 공공정책에 대한 실증적 연구의 필요에 따라 독립된 학문으로 정립되었으며, 경제학은 19세기 후반 정치경제학에서 분화되어 계량적 분석과 수학적 모델을 중심으로 시장 경제를 이론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사회학은 1892년 시카고대학교에서 시작되어, 도시화, 이민, 빈곤 등 근대 사회의 현안문제를 실질적으로 다루는 학문으로 정립되었다(Ross, 2008). 특히 그는 이러한 사회과학의 제도화가 미국적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 같은 이데올로기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미국적 예외주의는 청교도적 이념, 자유주의, 공화주의 전통에 기반하여 미국 사회의 특수성과 역사적 사명을 규정하는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으며, 이는 사회과학을 국가 질서 유지와 시장경제의 정당화를 위한 사상적 도구로 활용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단적으로 정치 질서 유지를 위한 정치학, 사회 통합을 위한 사회학, 시장 중심 국가체제의 수호를 위한 경제학이 사회과학의 분과화를 주도하였으며, 이는 사회과학이 국가 권력에 봉사하는 정치적 구성물이었음을 시사한다(Ross, 2008).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점은 바로 사회과학에 만연한 과학주의(scientism)이다. 로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국 사회과학은 특정한 가치를 구현한 세계에 대한 모델을 일관되게 구축했으며 미국 예외주의 라는 국가 이데올로기의 논리를 따랐다는 사실이다. 예외주의적 비전은 역사 자체의 변화에 부단히 대응해 왔으며, 대단히 다양한 분과학문적 관심들과 정치적 목적들과 개인적 경험들에 대해 개방되어 왔다. 그러는 동안 예외주의 입장은 이 분과학문들 간에 놀라울 정도의 지속성을 낳았다. 차이점과 유사성 모두가 사회과학 작업의 역사적 성격을 확인시켜 주고 예외주의 비전이 그 목적에 맞게 역사를 만들어간 힘을 확인시켜 주는 것으로 보인다. 예외주의 역사의 가장 두드러진 결과는 과학주의 자체였다(Ross, 2008).
그에 따르면, 미국 사회과학은 과학적 방법을 탐구의 주요 기준으로 설정하였고, 미국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아래서 발생하는 사회문제들을 통제할 수 있는 과학적 지식의 생산이 사회과학의 주요 임무였다는 것이다. 로스는 실증주의적 사회과학이 가지는 한계를 미국 사회과학의 실증주의적 자기묘사라로 규정지으며 이를 비판한 바 있다.
미국 사회과학의 성립과 분과화가 단순한 학문 내부의 사건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이해관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었다는 생각은 마니카스(P. T. Manicas) 역시 공유하는 부분이다. 그는 『사회과학의 역사와 철학』에서 사회과학이 실증주의와 행태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인간을 예측 가능하고 통제 가능한 존재로 환원시켰으며, 그 결과 인간 행위와 사회 구조의 복잡성을 충분히 해명하지 못하는 한계에 머물러 있다고 진단한다. 그는 미국 사회과학이 과학의 이상(ideal of science)뿐만 아니라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수용하면서 독특한 형태로 진화하였음을 지적한다. 그는 ‘사회과학의 아메리카화’(Americanization of the social sciences)라는 개념을 통해, 사회과학이 미국 사회의 실용주의, 반공주의, 경험주의, 시장주의 등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비판적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이는 미국 사회과학의 성립이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깊숙이 연관된 과정이었음을 보여주는 분석이라 할 수 있다(Manicas, 1987). 그에 따르면, 이러한 흐름은 사회과학 내부에 뿌리내린 경험주의 패러다임과 도구적 이성(instrumental reason)의 결과로 보아야 하며, 따라서 사회과학이 다시금 인간과 사회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해방을 지향하는 학문으로 복원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Manicas, 1987). 특히 그는 사회과학이 단순한 도구적 차원을 넘어서,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제공하는 공적 학문(public discipline)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는 실증주의적 분과학문의 한계를 극복하고, 역사적 맥락 속에서 사회구조와 행위의 관계를 해명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과학의 재정립을 요구하는 것이다. 사회과학의 분과화가 국가 이데올로기와 실증주의적 방법론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정치적 구성물이라는 점은 로스와 마니카스의 논의를 통해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의 진단과 비판은 사회과학이 단순한 기술적 분석의 도구를 넘어, 대안적 사회 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비판적 학문으로 재정립되어야 함을 뒷받침하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다.
또 다른 맥락에서 사회과학의 분과 체계를 해체하고, 통합적 관점에서 사회과학을 재구성할 것을 주장한 대표적 인물이 월러스타인이다. 그가 주도한 굴벤키안 위원회는 1945년 이후 사회과학 내부에서 벌어진 논쟁과 제도적 변화를 분석하여 사회과학의 전면적 재구성을 위한 구체적인 사안을 제안한 바 있다(Gulbenkian Commission, 1996). 위원회는 기존 사회과학 분과 체계가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구성된 인위적 산물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분과 체계 해체와 새로운 통합 모델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제기하였다. 우선 비판의 핵심은 기존의 사회과학이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인류학 등으로 분화되어 왔으나, 이러한 분류는 19세기 후반 서구 학문제도의 제도화 과정 속에서 형성된 것이며, 자연과 인간, 주체와 객체, 보편과 특수와 같은 근대적 이분법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결정적인 문제점은 분과 체계 아래서의 사회과학은 인간 경험의 복합성과 사회 문제의 다층적 성격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며, 오히려 현실에 대한 이해를 분절적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과학은 분과 중심의 학문 체계를 통해 지적 훈련과 경력 구조를 형성해 왔으나, 복잡한 사회 현실을 충분히 포괄하지 못하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과학의 재구성이 필수적이라는 것이 이들의 진단이다. 여기서 말하는 재구성은 학문적 분업의 유효성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고 지식 생산의 방식 자체를 재정의하는 작업을 포함한다. 위원회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기존 학문 분업 구조의 비효율성과 부적절성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비판한다.
조직의 경계를 변화시키려는 시도보다는 현재의 학문적 경계에 신경 쓰지 않고 지적 활동의 조직을 확대하는 것이 더 필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역사성을 갖는다는 것은 결국 역사가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사회과학자의 의무입니다. 사회학적이 된다는 것은 사회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사회과학자의 의무입니다. 경제 문제는 경제학자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경제적 질문은 모든 사회과학적 분석의 핵심입니다. (…) 예컨대 우리는 지혜의 독점이나 특정 대학 학위를 가진 사람에게만 허락된 지식의 영역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Gulbenkian Commission, 1996).
이에 따라 위원회는 사회과학의 분류 원리 자체를 재고할 것을 요구하며, 새로운 지식 체계를 세 가지 이론적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재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첫째, 연구자의 중립성과 객관성에 대한 전통적 가정을 해체하고, 지식 생산이 연구자의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 의해 구성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둘째, 시간과 공간은 단순한 분석의 배경이 아니라 내재적 범주로 통합되어야 하며, 이는 역사학, 사회학, 인류학 간의 경계를 희석시킨다. 셋째, 정치⋅경제⋅문화의 인위적 분할은 현실의 상호교차성과 복합성을 왜곡하기에 이들 간의 경계를 해체하는 통합적 분석틀이 요구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보고서는 사회과학의 새로운 분류 원리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방향을 제시한다. 첫째, 문제 중심적 탐구(problem-oriented inquiry), 둘째, 주제 중심의 조직화(thematic organization), 셋째, 분석 수준의 다양화(levels of analysis), 넷째, 지역적 맥락과 언어적 다양성을 반영하는 유연한 배열(flexible configurations)이 그것이다. 이러한 방향성은 분과간 경계의 재구성뿐 아니라, 지식 생산의 방식과 구조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궁극적으로 이 보고서는 사회과학의 분류가 고정된 체계가 아니라, 사회적 요구와 지적 맥락에 따라 지속적으로 갱신되어야 하는 유동적 체계임을 강조한다(Gulbenkian Commission, 1996).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면, 사회과학 내부의 폐쇄성과 경직성을 완화하고 보다 개방적이고 통합적인 지식 체계로 재편하는 과제는 교양 사회과학의 정립과 밀접하게 연결될 수 있다고 본다. 교양 사회과학은 전문화된 분과 교육의 예비 단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과학의 역사성과 제도적 맥락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사회구조를 이해하며, 바람직한 사회를 모색하는 실천적 기획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과학을 성찰적이고 통합적인 학문으로 재구성하려는 시도와 궤를 같이하며, 오늘날 교양으로서의 사회과학을 정립하는 데 중요한 토대를 제공할 것이다.
2.3. 4과에서 현대 과학으로: 지식의 전문화와 총체적 의미상실의 사이에서
자유학예 가운데 4과(quadrivium)가 자연과학으로 발전해간 과정은 중세 유럽의 교육과정과 근대 과학혁명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중세 대학은 자유학예를 중심으로 커리큘럼을 구성하였으며, 유럽은 대학이라는 제도적 장치를 통해 과학을 체계화하고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일찍이 그랜트가 주목한 바 있듯이 논리학과 과학이 고등교육의 바탕을 이루었던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으며, 중세 대학은 과학적 지식을 정리하고 흡수하고 확장하고 전수하는 강력한 교육기관이었다(Grant, 1992). 특히 산술, 기하학, 음악, 천문학으로 구성된 4과는 중세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위한 예비 학문으로 제도화되었는데, 우주의 질서와 조화를 탐구하는 학문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은 4과가 자연을 수학적 질서로 파악하는 중요한 지적 전통을 형성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Gerson, 2005; Grant, 2007).5) 이러한 전통은 르네상스 시기에 아리스토텔레스 자연학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플라톤과 피타고라스의 형이상학, 유클리드의 기하학이 재조명되면서 큰 진전을 이루었다. 여기서 말하는 ‘진전’이란 수학이 자연세계와 독립된 이성적 사유의 도구에서 자연세계를 측정하고 설명하는 유용한 도구로의 전환, 이른바 수학과 자연학의 결합을 의미한다. 자연현상에 대한 수학적 진술은 경험적으로 검증되어야 한다는 인식 아래 수학을 자연 인식에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흐름은 케플러, 갈릴레이 등을 거쳐 뉴턴에 이르러 고전역학의 정립으로 그 정점을 이루었다.6) 이와 같이 4과는 근대 자연과학의 사유 구조와 방법론의 원형을 제공하였으며, 자연과학의 분화가 심화된 이후에도 그 지적 전통은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4과가 수학에 기반한 세계 이해, 기하학적 사고, 시공간에 대한 과학적 해석 등 근대 자연과학의 핵심 사유틀을 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근대 과학의 발전은 단절적이고 혁명적인 출현이라기보다는 고중세 시기에 축적되었던 4과의 학문적 유산 위에 새로운 방법론과 실험적 사고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점진적 진화로도 이해될 수 있다.7)
이와 유사한 취지에서 발레리아니(M. Valleriani)는 근대 자연과학의 형성과정을 중세 이래 통합적 지식 체계였던 4과의 점진적 해체 과정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Vallleriani, 2022). 그에 따르면, 4과는 중세 대학에서 자연의 수적 질서를 탐구하는 통합적 교육 체계로 기능하였으나, 13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점차 실용적 목적에 특화된 독립 학문들로 분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이러한 분화를 4과의 해체(disintegration)로 명명하며, 이 과정에서 각각의 학문은 실용적 전환(practical turn)을 거치며 상호 연계성은 약화되고, 분야별 전문성이 강화되었다고 지적한다(Vallleriani, 2022). 이러한 분석은 근대 자연과학의 성립을 과학혁명에 의한 단절적 출현으로 보기보다는 고중세 4과의 점진적 재편성(reorganization)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근대 이후 자연과학의 분화는 지식의 심화와 기술적 진보를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학예가 지향해온 통합적 인간형성이라는 이념을 퇴색시켰다. 주지하다시피 자유학예는 고대로부터 근대 초기까지 인간을 조화롭게 계발하고, 다양한 학문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삶의 통찰력을 길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발전해왔다. 그러나 근대 자연과학은 분화과정에서 각각의 분야가 고유의 이론과 방법론을 발전시켜오면서 지식의 심화를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지만, 동시에 학문 간 단절과 과학의 총체적 의미 상실이라는 한계를 노출하였다. 나아가 자연과학의 전문화는 과학 지식을 전문가 집단의 전유물로 만들었고, 이로 인해 과학은 일반 시민이나 교양인의 이해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되었으며, 비전문가가 접근하기 어려운 폐쇄적인 담론 구조를 형성하게 되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과학이 지니는 철학적, 윤리적 함의를 부차적 사안으로 다루면서, 사회적으로 중대한 과학기술이 윤리적 공백 가운에서 다루어질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과학기술의 윤리적 공백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현대적 의미의 4과의 정신이 호출될 수 있을 것이다. 자유학예 전통은 자연과학을 인간가치와 사회적 책임의 틀 안에서 다루는 것을 중시하고, 통합 과학(integrative science)으로서 자연현상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도모할 수 있는 지적 영향력을 내재하고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통합 과학은 4과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정교한 과학지식과 인간 가치를 결합함으로써 고전적 사유의 회복을 모색하는 학문적 경향을 의미한다. 학문의 역사적 흐름을 돌이켜볼 때, 자연과학은 ‘4과에서 현대 과학으로’의 길을 걸어왔다고 한다면, 이제는 ‘현대 과학에서 4과로’의 방향 전환을 요구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대적 맥락에서의 4과는 더 이상 과거의 역사적 형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학의 수학적 성격, 학문간 융합 가능성, 그리고 지식구조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가능케 하는 유효한 지식체계로 정립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교양 자연과학은 고전적 자유학예 전통 속에서 과학이 수행했던 역할을 현대적 상황에 맞게 재구성하려는 시도이며, 문과와 이과,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의 경직된 구분을 해체하고 학문간 경계를 횡단하는 융합적 인식의 기반을 마련하려는 실천적 기획이다.
3. 기초학문의 분과화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의 교양학
3.1. 오래된 미래로서의 자유학예
지금까지 분과학문 체제 아래서 기초학문이 지니는 한계를 학문의 변천과정 속에서 살펴보았다. 근대 이후 인문학은 분과 중심의 전문화된 연구 체제로 전환되면서 통합적 인간 형성의 기능을 점차 상실하게 되었고, 연구 중심성과 실용성에 압도되면서 점차 기념비적 담론으로 주변화되었으며 인문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교육적 기반 역시 약화되었다. 사회과학은 근대 국가 형성과 실용적 필요에 따라 분과화되었으나 국가 이데올로기, 실증주의, 과학주의에 매몰되면서 인간 행위의 복잡성과 사회구조의 총체성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도구적 합리성에 종속되었다는 비판에 직면하였다. 자연과학은 4과의 통합적 인식 체계에서 분과학문으로 변화하면서 학문적 전문성을 축적하였으나 학문간 단절과 과학의 윤리적 함의가 축소되었다. 이들 세 영역 모두 분과학문이라는 제도 속에서 학문 간 연계성과 사회적 책무를 약화시키며, 오늘날의 복합적 문제에 대응하기 어려운 구조적 한계를 노정하고 있는 것이 공통된 특징이다. 자유학예의 새로운 변형태로서 교양 인문학, 교양 사회과학, 교양 자연과학의 정립이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함이다.
또한 기초학문의 변천과정을 통해 우리가 인식해야 하는 첫 번째 사안은 시대변화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대학의 역할과 기능이 바뀐 것처럼 교양 역시 새로운 역할과 과제를 떠맡아야 하며, 그 새로움의 중심에는 교양학이 있다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대학은 전통적으로 지식전수를 목표로 하는 고등교육기관이었고, 이러한 제도에 부합하는 형식과 내용으로 자유학예는 오랫동안 그 가치를 인정받아 왔다. 그러나 대학은 새로운 지식창출기관으로 재정립되었으며, 이에 따라 연구와 교육은 대학의 존재이유를 떠받치는 두 축으로서 자리매김되었다. 교양‘교육’이 아니라 연구와 교육을 아우르는 교양학이 필요한 것은 이러한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고등교육 체제의 변화와 학문지형의 급속한 변화 앞에서 교양은 새로운 정체성을 증명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고등교육 체계 하에서 낮은 수준의 입문 교육에 머무를 것인지, 새로운 학적 체계의 정립을 통해 연구와 교육의 경쟁력을 확보하여 기초학문 수준의 학적 위상을 확보할 것인지 중대한 갈림길에 놓여 있는 것이다.
두 번째 기초학문을 둘러싼 교양 전문기관과 전공학과 간의 인식 차이를 교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초학문의 성과를 아우르는 유효한 지적 체계로서 교양교육의 본령을 차지하는 학문 영역이라는 인식(교양 전문기관)과 기초학문이 본격적으로 분화되기 전 역사적 형태의 지식체계로 보는 인식(전공학과)을 어떻게 좁힐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소위 ‘오래된 미래’와 ‘지나간 과거’ 간의 인식 차이를 좁힐 수 있는 유효한 접근법은 교양으로서의 기초학문과 분과학문 체제 내 기초학문이 비록 학문적 대상을 공유한다고 하더라도 다루는 방법과 전략을 달리하면서 갈등의 소지를 줄이고 일종의 협력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8) 이를 통해 기초학문 유관학과와 교양으로서의 기초학문을 담당하는 기관이 상호존중 아래 각자의 학문적 활동에 힘쓰는 것이다. 특히 교양으로서의 기초학문을 담당하는 교수자는 지금까지 살펴본 기초학문의 분과화에서 나타난 문제점을 적극적으로 해결하고 연구와 교육의 선순환 체계를 확보할 수 있는 학풍을 적극적으로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것이 가능하기 위한 선결과제는 학문으로서의 교양, 이른바 교양학의 정의, 기능, 역할을 명확하게 설정함으로써 분과학문으로서의 기초학문과의 차별성을 도모하는 것이다.
3.2. 교양 인문학, 교양 사회과학, 교양 자연과학의 정의 및 기능
우선 교양 인문학은 인간의 정체성과 인간의 가치체계를 탐구하는 학문으로 문학, 역사, 철학, 언어, 예술, 종교라는 분과학문의 전문적 성과를 인간 형성이라는 규범적 맥락에서 재구성하는 메타학문 영역이다. 따라서 교양 인문학은 인문학의 분과화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유학예, 그중에서 3학(Trivium)의 전통을 이어받아 이론적 성격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기형성, 공동체의 가치창출의 기능을 실현하는 실천적 성격의 학문으로 재정립될 수 있다. 연구의 측면에서 고전 인문정신의 회복과 재구성을 목표로 인간다움의 재정의와 새로운 가치체계를 정립하는 학문적 과제를 수행하고, 교육의 측면에서 인간 가치와 생활세계와의 밀접한 연계 속에서 성숙한 인간, 책임 있는 시민 양성을 목표로 함으로써 인문적 지식의 공공성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행 인문학이 해당 학문 영역에서 유효한 미시적 주제와 이론적 정교화를 지향함으로써 분과학문 체제에서 전문화의 경향을 띠고 있다면, 교양 인문학은 시대를 초월하여 인류가 공통적으로 던져온 빅 퀘스천과 횡단적 연구주제를 지향함으로써 포스트휴먼시대의 인간 가치와 인간성의 문제를 폭넓게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
두 번째 교양 사회과학은 교양 인문학과 교양 자연과학을 연결하는 학문으로 사회의 구조적 특성과 원리, 유형과 체계를 통합적으로 분석하여 새로운 지식과 세계관을 창출하는 횡단적 성격의 학문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사회과학은 근대국가 형성과 함께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등으로 분화되어 독자적 학문체계를 구성한 바 있다. 분과화된 전통 사회과학은 고유한 이론과 방법론을 바탕으로 사회현상을 설명하고 예측하였으나 이러한 분과화는 사회현실의 복잡성, 현대사회가 당면한 큰 문제를 규명하고 해결하는 데 한계를 보여왔다. 따라서 교양 사회과학은 사회과학의 분과화에 따른 경직성을 극복하고, 사회과학의 역사성과 규범성, 과학성을 균형감 있게 추구하여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연계를 확고히 할 필요가 있다. 특히 연구의 측면에서 사회과학의 핵심주제인 사회현실과 제도를 인문학적 방법론과 자연과학적 방법론과의 연계 속에서 통합 연구를 수행하고, 교육의 측면에서 보편적이고 횡단적인 주제설정과 문제기반 접근을 통해 학생들에게 사회적 책임과 시민성, 공공성을 내면화하는 통합교육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기존의 분과학문 체제 내에서 사회현실과 제도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분과학문을 아우르는 방식을 지향하는 것은 교양 사회과학의 특성을 보여주는 접근일 것이다. 일례로 기후변화, 인공지능, 불평등의 문제를 분과학문의 경계를 넘어서는 통합적 접근을 통해 규명함으로써 탐구의 역동성을 확보할 수 있다. 또한 교양 사회과학은 분과 사회과학과 구별되는 이론과 실천, 가치와 사실의 균형을 추구하는 학문으로서 독자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복잡한 사회현실에 대한 학제간 탐구와 책임 있는 시민교육을 통해 오늘날 고등교육이 추구해야 할 통합적 학문모델으로 자리잡아야 할 것이다.
세 번째, 교양 자연과학은 자연현상에 대한 통합적인 이해를 통해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정교하게 탐구하는 학문으로, 분과학문의 전문성에 앞서 자연과학 공통의 지적 원리를 탐색하는 학문 영역이다. 연구의 측면에서 자연과학의 핵심 개념과 주제를 통합적으로 고찰하며, 과학 자체에 대한 성찰적 탐구를 수행하며, 교육의 측면에서 자연과학적 지식에 대한 단순한 전달을 넘어 분과 학문과의 연계 속에서 학생들이 세계를 폭넓게 이해하고 과학의 공공성 아래서 책임 있는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교양 자연과학은 과학 개념의 기원, 의미를 해명하고 과학이 가치, 문화 등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조명하는 가운데서 연구와 교육의 체계를 정립하며, 과학의 공공성을 회복하려는 실천적 책무 역시 적극적으로 고려한다. 교양 자연과학이 인간, 사회, 문화적 맥락에서 자연세계를 이해하려는 학적 시도이기에 분과적 체계로서의 자연과학과는 차별화된 영역이 설정될 필요가 있다. 구체적 영역으로는 자연과학의 핵심 개념을 고찰하는 개념탐구(Conceptual Inquiry), 과학의 가치론적 맥락을 살피는 과학과 인간가치(Science and Human Value), 과학의 문화적 맥락을 규명하는 과학과 문화(Science and Culture), 과학의 실천적 맥락을 고찰하는 과학과 실천(Science and Practice) 등이 설정될 수 있다. 교양 자연과학은 자연과학을 인간 가치와 문화적 맥락 속에서 성찰하는 가치지향적 학문이다. 따라서 과학의 목표와 방법, 과학 이론과 과학적 설명의 기능, 과학의 가치중립성 여부, 과학 진보의 의미 등과 관련된 인식론적, 존재론적, 방법론적 문제들을 비판적으로 탐구하는 과학철학이나, 과학의 역사적 맥락에 초점을 맞추는 과학사와도, 과학과 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과 상호 작용을 연구하는 과학기술사회학과도 차별화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차별화는 상호보완적 관계로 발전가능하며, 학문의 새로운 통합모델을 구축할 수 있는 계기로 작동한다. 교양 자연과학은 과학 개념의 기원, 의미를 해명하고 과학이 가치, 문화 등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조명하는 가운데서 연구와 교육의 체계를 정립하며, 과학의 공공성을 회복하려는 실천적 책무 역시 적극적으로 고려한다(백승수 외, 2025). 교양 인문학, 교양 사회과학, 교양 자연과학 각각의 정의와 기능, 나아가 교육과 연구 지향점을 종합적으로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3.3. 연구와 교육의 선순환체계로서의 교양학을 정립하기 위한 선결과제
연구와 교육의 선순환체계로서의 교양학을 정립하기 위한 선결과제는 무엇인가? 우선 교육적 차원에서 양적인 측면과 질적인 측면 모두 점검해야 할 것이다. 최근 학부교육에서 교양교육이 차지하는 비중은 정체되거나 축소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졸업학점 대비 교양 이수학점이 감소하는 원인은 대학의 여건에 따라 다르겠지만, 지금까지 정부가 추진했던 다양한 재정지원사업의 결과가 상당 부분 반영된 것이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대학재정지원사업의 대부분이 지속가능성보다는 사회적 진출을 용이하게 하는 진입가능성 측면에 역점을 둔 정책임을 고려한다면 교육과정 내의 이러한 변화는 학생들이 졸업 요건 충족을 위한 최소 기준학점 정도로 교양 교과목을 이수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졸업학점 대비 교양학점이 한국교양기초교육원에서 권장하는 35% 이상이 될 수 있도록 편성과정에서 힘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또한 교양교육과정 내에서 자유학예교육의 비중을 확대함으로써 기초학문 중심의 교육을 통해 교양교육의 본래적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이와 더불어 다수의 대학에서 운영되고 있는 1학년 중심의 전공자율선택제는 교양 대학의 자원과 노력을 신입생 교육에 집중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으며, 이는 교양교육의 내실화를 위협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교양교육의 내실화를 도모하기 위해서라도 교양교육과정 전반에 걸쳐 기초-심화-응용 단계의 연속적 체계를 마련함으로써 전 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교양교육이 제도적으로 정착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연구 분야의 혁신은 더욱 중요한 과제다. 기초학문의 횡단적 성과가 교양 관련 연구의 핵심이 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절실하다. <표 2>와 [그림 1]에 나와 있듯이 2024년과 2025년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 분야 신진 및 중견연구자 지원사업 선정과제를 분석한 결과 전공심화형 과제가 학문횡단형 과제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제한된 자료만으로 국내 인문사회 분야 연구 전반의 경향을 단정할 수는 없으나, 국내 학술 연구가 ‘융합’과 ‘통합’이라는 시대적 요구와 다소 동떨어져 있다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그럼에도 고무적인 사실은 학문횡단형 과제 가운데 일부가 교양학 연구로 정립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초학문 중심의 횡단적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연구자 양성이 시급하게 요구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교양교육의 내실화와 교양학 연구의 토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교양 관련 교원의 확충이 필수적이다. 현재의 채용 시스템 아래서는 교양의 지속가능성이 보장되기 어렵기 때문에 채용 방식의 일대 전환이 요구된다. 협소한 전공 분야 중심의 충원 방식에서 벗어나 교양 인문학, 교양 사회과학, 교양 자연과학처럼 광역화된 학문 영역을 설정하고, 이에 적합한 학문횡단적 연구 역량과 교육 전문성을 갖춘 전임교원 확보가 필요하다. 이 같은 교원 채용시스템이 정착될 때 비로소 교양교육 현장에서 기초-심화-응용의 연속적 학습 구조가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으며, 기초학문을 기반으로 한 횡단적 연구가 교육으로 환류되는 선순환 체계가 마련될 수 있다. 결국 교양 관련 교원의 확보는 단순한 인력 충원의 문제가 아니라, 교양학을 독자적 학문영역으로 정립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라 할 수 있다.
4. 나가면서: 교양의 새로운 경로 설정
지금까지 자유학예와 기초학문의 연계성을 역사적 관점에서 살펴보면서 자유학예 전통을 계승한 교양학의 필요성을 도출하였다. 또한 급변하는 시대 상황에서 학문에 대한 반성 작업은 자유학예의 원리에 기반한 통합적 관점 아래서 이루어질 필요가 있으며, 이런 측면에서 교양학은 새로운 학문적 접근의 구심점 역할을 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무엇보다 학문으로서 교양은 진리 탐구를 목적으로 하는 연구의 사명과 지식 전수를 원리로 삼는 교육의 사명을 두 가지 축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교양학은 기초학문의 횡단적 성과를 구축하는 이론적 측면과 인간의 자기형성을 추구하는 실천적 측면을 동시에 갖춘 학문, 이른바 학문성과 인간성을 갖춘 학문으로 정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정연재, 2021). 이것이야말로 교양이 오래된 미래로서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지름길이다.
지식의 파편화와 그로 인한 소통의 단절, 학문의 비인간화, 통합적 안목에서 지식을 바라는 태도의 상실, 지식의 즉각적 활용과 실용적 가치의 확산 등은 현재 우리가 대학에서 목격하는 위기의 대표적 징후들이다. 편협한 전문화에 맞서 폭넓음과 지적 역동성을 덕목으로 하는 교양학의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분과학문으로서 기초학문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교양학은 다음과 같은 학문적 특성을 지닌다. 우선 교양학은 메타학문이다. 교양학은 경험학문이 제공한 사실적 내용을 다시 대상으로 삼아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와 해석을 제공하는 학문이다. 이러한 메타적 성격은 기초학문과의 영역 중첩을 넘어서 관련학과의 갈등을 피하기 위한 지적 시도다. 둘째, 교양학은 통합성을 지향한다. 현대 사회의 복잡하고 다양한 이슈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체를 조망하는 지적 안목이 필요하기에 교양학은 학문의 전문화로 생겨나는 지적 공백을 메우는 동시에 학문간 통합을 지향한다. 바로 이러한 통합이야말로 자유학예의 현대적 변형태로서 지적 유효성을 증명하는 시금석이다. 셋째, 교양학은 가치와 의미를 규명한다. 교양학은 학문의 본래적 가치와 사명을 인식하여 인간 가치와의 연계 속에서 학문의 가치와 의미를 규명하는 가치지향적 학문이다. 넷째, 교양학은 연결성을 지향한다. 교양학은 인간 가치와 생활세계와의 밀접한 연계 속에서 기초학문의 성과를 구축함으로써 인간, 사회, 자연에 대한 단편적이고 사실적 분석을 넘어서 일종의 실천적 관심 가운데서 학문세계와 생활세계의 연결을 확고히 하는 학문이다(정연재, 2021, 2022).
위기 앞에서 새로움보다는 익숙함을 찾는 것이 관례다. 과거의 선택이 현재와 미래의 선택을 강하게 제약하는 현상을 설명할 때 흔히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e)을 떠올린다. 한 번 특정한 경로가 선택되면, 그 길이 점점 강화되어 다른 대안을 택하기 어려워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로마제국 시대에 형성된 도로 폭이 오늘날 유럽의 교통 체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사례는 경로의존성의 강한 구속력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혁신을 표방하는 오늘의 교양교육 역시 기존 제도의 익숙함에 안주하며 경로의존성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지 근본적인 반성이 요구된다. 따라서 교양교육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익숙하고 안전한 길을 반복하는 관행을 넘어 교양의 학문적 정체성을 새롭게 수립하고 이에 상응하는 연구와 교육의 수준을 모색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노력이야말로 교양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며 장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초석이 될 것이다.
References
Notes
키케로의 다음의 언급은 고중세 인문학, 철학, 자유교양을 결속시켰던 인문 정신의 중요성을 환기시킨다.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목적에 봉사하는 모든 학문은 서로가 서로를 묶는 공통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고, 마치 혈연에 의해 연결된 것인 양 상호결속되어 있다(Cicero, Pro Archia poeta, Ch. 2, 안재원, 2015: 170에서 재인용).” 학문간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간다움(humanitas)의 형성이라는 목적 아래 모든 학문을 묶어낼 수 있다(안재원, 2015: 170)는 그의 생각은 분과학문 체계 아래서의 인문학의 학문적 사명을 일깨우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래프턴은 “르네상스 시기의 인문주의 학자들은 시민적 덕성(civic virtue)의 멘토들이라기보다는 텍스트 전통의 수호자들이 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Grafton, 1991). 이러한 인문주의자들의 노력은 전통적 가치와 새로운 과학의 경계 속에서 인문학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결정화란 미국 고등교육의 근몬적 변화를 상징하는 개념으로 1900년에서 1910년 사이 미국 대학이 전통적인 교육 중심의 기관에서 탈피하여 조직의 관료화, 학문의 분과화 및 전문화를 주축으로 제도적으로 안정화의 단계에 이르렀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등장한 단어다(Veysey, 1965). 이러한 점에서 결정화는 대학 제도의 발전, 성숙을 의미한다기보다 당시 미국 대학이 조직적으로, 학문적으로나 안정화된 형태(stable form)로 고착화된 현상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자유학예는 결정화된 대학 구조를 탈결정화(decrystallization)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베이시는 인문학을 단독의 정합적 지적 실체(single coherent intellectual entity)가 아니라 각각 고유한 접근방식을 지닌 복수의 조직화된 세계의 집합(collection of plural organized worlds)으로 간주한다. 특히 그는 근대 대학의 행정 및 조직 구조가 인문학의 여러 분야를 하나의 우산 아래 묶어놓았으나 이는 진정한 지적 통합(intellectual integration)이 아니라 각 학문의 실질적 복수성과 자율성을 은폐한 행정적 편의(administrative convenience)에 불과하다고 보았다(Veysey, 1979).
거슨은 자연을 수학적 질서의 표현으로 이해하는 전통을 공고히 한 인물로 보에티우스(Boetius)를 꼽는다. 보에티우스의 수 이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힌다. “보에티우스는 수학을 네 부분, 즉 산술, 음악, 기하학, 천문학으로 구분하고, 이를 숫자의 다양한 표현 형태로 간주한다. 산술은 숫자 그 자체이고, 음악은 시간 속의 숫자, 기하학은 공간 속의 숫자, 천문학은 시간과 공간 속의 숫자이다(Gerson, 2005).”
16, 17세기 과학의 발전은 서양 학문체계에 지각변동을 일으켰고, 특히 학문의 분과화(departmentalization)를 가속화시켰다. 분석과 종합의 절차로 구성된 뉴턴의 실험적 방법은 기존의 자연철학과 구분되는 고전 물리학을 태동시켰고, 이러한 뉴턴의 방법론은 화학, 생물학 같은 자연과학 분야뿐만 아니라 인간의 복잡한 사회현상을 해명하는 사회과학 분야에도 확산됨으로써 학문분화를 촉진시켰다. 한마디로 근대 학문의 역사는 자연과학적 지식의 지배로 특징지을 수 있다(김영식, 2007, 서양근대철학회, 2001, 김남두, 2000).
그랜트는 『중세의 과학』에서 근대 과학의 뿌리를 기독교, 대학, 아리스트텔레스 철학에 두고 있다. 신의 창조질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자연에 대한 탐구를 정당화하고 촉진시켰으며, 중세의 대학이라는 고등교육 제도로 인해 자연철학과 수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다질 수 있었고, 12세기 이후 아리스토텔레스 저작들이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그의 사상을 수용하고 변용하는 가운데서 과학 지식을 체계화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그랜트, 1992).
현재 전공자율선택제 도입으로 인한 기초학문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기초학문 관련 교과목의 이중설강 문제가 대안으로 수립된 바 있다. 하지만 전공으로서의 기초학문과 교양으로서의 기초학문이 편성취지, 교과내용 및 교수방법론 등에서 차이를 보이는 만큼 이중설강 제도의 도입 이전에 기초학문 교육의 내실화를 위한 상호간의 의견 수렴과 조율이 요구된다.
2024년, 2025년도 신진연구자 및 중견연구자 지원사업에 선정된 과제를 전공심화형 과제와 학문횡단형 과제로 분류하였다. 분류기준이 연구성과에 대한 정교한 분석이 아니라 선정과제의 연구목표, 연구내용 및 방법, 기대효과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분명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음을 미리 밝혀둔다. 전공심화형은 단일 전공(학문) 내에서 이루어진 과제를 의미하고, 학문횡단형은 다학제(multidisciplinary), 학제간(interdisciplinary), 초학제(transdisciplinary) 성격의 과제를 의미하며, 이 가운데 기초학문 분야 과제의 일부를 교양학의 연구과제로 포함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