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연구 대상 및 방법
이 절에서는 ‘자서전 한 페이지 쓰기’ 수업에 참여한 학습자들의 글을 분석하여, 글에 드러난 자기 이해의 양상을 질적으로 고찰하였다. 분석 대상은 2025학년도 1학기 경기도 소재 S 대학교에서 개설된 〈글쓰기와 고전읽기〉 교과목에서 실시된 수업의 결과물로, 디자인학부와 인문사회융합대학에 소속된 1학년 학생들이 작성한 총 57편의 글이다.
분석 방법은 귀납적 범주화를 통해 자기 이해 및 정체성 탐색의 양상을 중심으로 1차 분류를 시행한 뒤, 내용 기반의 반복 검토를 통해 ‘자기 틀’로부터의 거리두기, ‘다중 자아’의 인식과 수용, ‘실패와 상실’을 통한 자기 재해석, ‘외부 텍스트’를 통한 자아 반성으로 분석 범주를 도출하였다. 각 범주는 의미 중심 분석에 기반하여 학생 글의 일부를 인용하고, 이에 대한 해석과 논의를 통해 ‘자서전 한 페이지 쓰기’ 수업의 교육적 효과를 밝히고자 하였다.
4.2. 자기 이해의 양상 유형화 및 사례 분석
4.2.1. ‘자기 틀’로부터의 거리두기
이 유형은 학습자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정체성이나 내면화된 ‘착한 아이’, ‘모범생’, ‘성실한 딸’과 같이 ‘좋은 사람’의 이미지에서 비롯된 억압이나 자기 억제를 인식하고, 그 틀을 벗어나려는 시도가 확인된다. 이 과정은 감정 억압에서 감정 직면으로, 대외적 이미지에서 내면적 진실성으로 이동하는 경향을 보인다.
(가) “그동안의 나는 ‘착함 프레임’에 갇혀 나를 저 깊이 밀어내고 있었다. … ‘거짓 착함’에 갇혀 나를 더 아프게 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 남들이 보기에는 답답하고 한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나인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나’이다.” (H01)
(가)는 <데미안>을 읽은 후 자신이 오랫동안 ‘착한 아이’라는 사회적 이미지에 갇혀 감정을 억압해 왔음을 깨달았다고 서술했다. 그리고 글쓰기 과정에서 ‘착한 아이’의 틀에서 의식적으로 벗어나려는 시도를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자신에 대한 인지적 이해를 넘어, 사태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가는 주체적 결단으로 볼 수 있다(
박순영, 2001). 다시 말해, 감정을 직면하고 자신의 내면을 언어화한 행위 자체가 이해의 수행적 성격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는 ‘착한 아이’라는 타율적 자아를 넘어, 자기 감정을 스스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단계에 도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나) “나는 아직도 나를 모르겠다. … 남들, 특히 엄마가 보면 나는 그냥… 흘러가는 대로 살고 있어 보이겠다. … 하지만 가끔은 이런 내가 답답하다. 뭘 좋아하고, 뭘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맞춰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요즘엔 생각한다. 나는 대체 어떤 삶을 살고 싶은 걸까.” (D10)
(나)는 겉으로는 무난하고 흐름에 순응하는 인물로 보이지만, 내면에서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느끼고 있다. 기존의 ‘흘러가는 대로 사는 나’에 대한 회의와 더불어, 그것을 하나의 틀로 인식하고 비판적으로 성찰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감지된다. 특히 “나는 대체 어떤 삶을 살고 싶은 걸까?”라는 질문은 자기 삶에 대한 주도적 해석과 재정의의 시작점으로 기능한다.
(다) “<데미안>의 싱클레어는 결국 남이 정해준 세계에서 벗어나 자기 안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나도 늘 ‘착해야 한다’, ‘성공해야 한다’는 말 속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말들이 꼭 나를 위한 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광장>의 이명준처럼 나 역시 두 세계 사이에서 흔들리지만, 적어도 그 흔들림 속에서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조금 알 것 같다.” (H15)
(다)는 <데미안>에서 싱클레어의 성장과 <광장>에서 이명준의 정체성 갈등을 자신에게 투사하며, 외부 세계가 부여한 ‘정해진 나’로부터 벗어나려는 전환을 경험하고 있다. 싱클레어가 ‘남이 만든 선과 악의 경계’를 넘어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처럼, 이 학생 역시 사회적 요구로 내면화된 ‘착함’과 ‘성공’의 기준을 재검토하며 스스로의 욕망을 성찰한다. 또한 이명준이 두 세계 사이의 경계에서 스스로의 자리를 찾으려 했듯, (다)는 흔들림을 회피하지 않고 그 속에서 자기 감정과 판단을 새롭게 해석한다. 이러한 서술은 과거의 자기의 행동이 외부의 시선과 평가에 있었음을 공감하면서도, 이에 거리두기를 실천하여 정해진 자아로부터의 탈피를 시도하는 사례이다. 글쓰기를 통해 학습자는 타인의 서사 속에서 자신을 비추며, 기존의 가치 틀을 해체하고 자기 이해의 주체로 서고 있다.
이 유형의 공통된 특징은 ‘정해진 나’로부터 거리두기와 탈피, 그리고 감정의 억압에서 감정의 해석과 수용으로의 전환이다. 글쓰기를 통해 학생들은 기존에 자신이 수용해온 ‘좋은 사람’, ‘이상적 자아’의 이미지를 해체하고, 자기의 모습을 마주하며 다양한 감정과 판단을 수용하는 새로운 자기를 구성해 나간다. 이는 곧 글쓰기가 자기를 이해하는 수행적 실천이라는 점을 보여 준다.
4.2.2. 다중 자아의 인식과 수용
이 유형의 글에서는 하나의 통일된 자아상이 아니라, 대인 관계나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자아를 인식하고 이를 받아들이려는 학습자의 태도가 드러난다. 학생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하나의 고정된 자아가 아닌,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복수의 자아를 이해하고 통합하고자 한다.
(가) “나를 돌아보면 내 내면 속 세계는 크게 4가지로 나뉘어져 있는 것 같다. … 어른들 앞에선 억압받고, 친한 친구 앞에선 외향적인 내가 되고, 친하지 않은 친구 앞에선 감정 소모를 줄이려 로봇처럼 대한다. … 그리고 부모님 앞에선 또 전혀 다른, 자유로운 성격이 드러난다.” (D03)
(나) “페르소나를 통해 나의 내면에 있는 여러 하자를 극복하고 싶다. … 계획적이고 현실적인 나라는 사람을 예외적으로 행동하게 만든 실연 이후,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선택들을 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혼란이 왔다. 하지만 나는 이제, 다양한 페르소나를 실현하고 싶은 욕망을 인정하게 되었다.” (D19)
(가)와 (나) 모두 관계 속에서 다층적으로 드러나는 자아의 모습을 탐색하며, 처음에는 이를 피로감이나 혼란으로 인식하지만 점차 그 다양성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가)는 는 자신의 태도를 통해 ‘일관되지 못한 나’에 대한 불편함을 드러내지만, 글의 후반부에서는 그 다면적 자아를 자연스러운 자기 구성의 일부로 받아들이려는 태도로 전환한다. (나)는 계획적인 나’와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나’ 사이의 간극을 페르소나 개념을 통해 해석하며, 다양한 자아가 공존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두 학생 모두 자아를 고정된 본질이 아닌 관계와 상황 속에서 구성되는 가변적 정체성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스스로의 내면을 조율하며 자기 일관성을 새롭게 만들어 가고 있다.
(다) “나는 조용하고 즉흥적이며 마이페이스라는 세 단어로 나를 설명할 수 있다. … 사람들 앞에서는 웃고 떠들지만 속으로는 그럴 ‘척’을 하고 있는 것 같았고, 혼자 있을 때는 오히려 말하고 싶어 답답했다. … 상황과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내 모습을 보며, 어느 한쪽만이 진짜 나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모든 나의 모습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D07)
(다)에서 “모든 모습의 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서술은 자아의 다면성을 긍정하며, 고정된 자아 개념을 해체하는 태도를 보여 준다. 이는 하이데거가 말한 ‘세계-내-존재’로서의 학습자가 자신이 속한 관계망과 세계를 자각하고 조정하는 과정과 맞닿아 있다(
조홍준, 2019, p. 1237). 즉, 학습자는 관계 속에서 변화하는 자아를 인식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구성함으로써 자기 이해를 주체적으로 확장해 나가고 있다.
이 유형의 공통점은 자기의 모습이 고정적이고 단일해야 한다는 관념에서 벗어나 삶 속에서 드러나는 자아의 다면성을 인식하고 이를 수용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글쓰기를 통해 학생들은 경험 자아와 서술 자아의 거리를 두고, 다양한 자기 정체성의 층위를 조율하며 내면화한다. 이 과정은 곧 자기를 통합하는 방향으로 이어지며, 자기를 구성하는 관점의 전환과 성숙을 이끄는 지점이 된다.
4.2.3. 실패와 상실을 통한 자기 재해석
이 유형에서는 입시 실패, 인간관계의 갈등, 실연, 좌절 등의 경험을 계기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이를 새로운 의미로 재해석하며 자기 확장을 시도하는 서술이 중심을 이룬다. 학생들은 단순히 감정을 토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패와 상실을 성찰의 계기로 전환하며 현재의 자기 존재를 새롭게 이해하고자 한다.
한 학생(H20)은 “너의 스무 살은 찬란한 슬픔으로 가득했던 것 같구나. 세상에는 간절했고 최선을 다했음에도 되지 않는 것이 있단다”라고 썼다. 그는 과거의 자신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면서도, 그 실패가 “앞으로 더 치열하게 살아보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졌음을 밝힌다. 이 글은 좌절의 기억을 자기 연민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결심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 다른 학생(D30)은 입시 실패로 인한 좌절, 전공 변경, 재입시를 거쳐 디자인이라는 길을 다시 선택한 경험을 서술했다. 그는 “디자인하는 건 나를 떠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나는 다시 디자인으로 돌아왔다”라고 적으며, 방황과 혼란의 시간을 되짚는다. 이 과정에서 그는 〈데미안〉의 싱클레어처럼 내적 균열을 인식하고, 〈광장〉의 이명준처럼 소속과 선택의 문제에 부딪히면서도 자기 이해의 과정으로 나아간다. 이 글은 과거의 실패를 ‘확신을 강화하는 전환점’으로 해석하며, 자기 선택을 긍정하는 새로운 자아 이미지를 획득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실연의 경험을 다룬 학생(D04)의 글도 있다. 이 학생은 “나는 실연 이후에 달라진 나를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계획적이고 현실적인 사람이었던 내가 예외적인 행동을 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이후 서술에서 다양한 페르소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시도로 나아가며, 상실을 자기 이해의 폭을 넓히는 계기로 삼는다.
한편, 입시 실패를 두 번 경험한 학생(H13)은 처음에는 절망했으나 시간이 지나며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음악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 학생은 입시 실패를 단순한 좌절로 남기지 않고, 그 경험을 통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자기 이해가 곧 실천으로 정향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최홍원, 2012, p. 105-106). 반복된 실패의 경험을 자기 성찰의 계기로 전환함으로써 학습자는 외부의 평가 기준에 의존하던 삶의 태도에서 벗어나 자신의 내적 가치와 진정한 욕망을 중심으로 한 실천적 자기 이해에 도달한 것이다.
이처럼 ‘실패와 상실’ 유형의 글은 공통적으로 자기 서사 속의 균열 지점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그 경험을 성찰적 언어로 재구성한다. 글쓰기를 통해 상처는 서사가 되고, 서사는 다시 자기를 해석하는 언어로 기능한다.
4.2.4. 외부 텍스트를 통한 자아 반성
이 유형에서는 학생들이 <데미안>, <광장>, 아이유의 노래 등의 외부 텍스트에 자신의 경험을 투사하거나, 반대로 자기 경험을 해석하는 질료로 활용한다. 이는 자아를 직접적으로 인식하기보다 타인의 이야기나 세계관을 통해 우회적으로 자기 자신을 비추는 과정이다.
(가) “<데미안>의 싱클레어처럼 정체성을 찾아 치열하게 방황한 것도 아니고, <광장>의 이명준처럼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괴로워하며 나를 정의해 본 적도 없다. … 그냥 지금은 흘러가는 대로 살아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H32)
(가)는 <데미안>의 싱클레어과 <광장>의 이명준을 언급하며, 자신이 그들처럼 치열한 자아 탐색이나 이념적 갈등을 겪지 않았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은 자기 인식의 결여를 의미하기보다는 타인의 서사를 매개로 자신의 위치를 성찰하려는 반성적 태도의 표현으로 볼 필요가 있다. 즉, 학습자는 외부 텍스트 속 인물들의 내적 갈등을 기준점으로 삼아, 자신의 삶이 놓인 지점을 상대적으로 조망하고 있다. “지금은 흘러가는 대로 살아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서술은 성찰의 결과로, 주체적 선택과 수용의 태도를 내면화한 진술이라 할 수 있다.
(나) “<데미안>의 싱클레어는 늘 두 세계 사이에서 흔들린다. 나도 그렇다. 부모님은 안정적인 길을 원하시지만,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광장>의 이명준이 남과 북의 경계에서 갈등했듯, 나 역시 가족의 기대와 내 선택 사이에서 자꾸 분열된다. 예전에는 그게 나의 약점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런 갈등 속에서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D13)
(나)는 두 소설의 인물과의 동일시를 통해 자아의 복잡성을 설명하고 있다. 학생은 자신이 겪은 가치 충돌, 가족과의 거리감, 진로 선택의 고민을 문학 속 인물의 서사에 비추어 보며, 자기 경험을 외부 서사를 통해 재서사화한다. 이처럼 문학은 자기 정체성의 내면적 균열을 해석 가능하게 하는 정신적 도구로 기능한다.
(다) “아이유의 ‘스물셋’을 다시 들었다. 초등학생 때 처음 들었을 땐 ‘왜 이렇게 우유부단하지?’ 싶었다. 그땐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고, 스물셋이 되면 모든 게 확실해질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20대가 된 나는 그 가사가 말하는 혼란과 모순이 너무 잘 이해된다. ‘어른도 아이도 아닌 나’라는 말이 딱 지금의 나 같다.” (H24)
(다)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텍스트와의 관계가 변모하는 과정을 드러낸다. 과거엔 이해되지 않았던 감정이 지금은 공감되는 경험을 통해 학생은 자기 정체성이 고정된 것이 아닌 변화 중인 과정임을 인식하게 된다. 이해란 텍스트 속 세계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비추어 보는 과정으로, 학생은 음악이라는 언어를 매개로 과거의 자아와 현재의 자아를 마주하며 자기 이해의 깊이를 확장한다.
이 유형의 글들은 자아 성찰이 외부 텍스트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유도되는 과정임을 분명히 보여 준다. 문학이나 음악은 자기 인식의 출발점이자 해석의 장치가 되며, 학습자는 이를 통해 ‘이야기 속 타자’를 거쳐 ‘자기’에게 도달하게 된다.
이상의 네 유형은 서로 독립적이라기보다 상호 교차하고 중첩된다. 예를 들어, 외부 텍스트를 통해 자신을 반성하는 가운데 과거의 실패를 새롭게 바라보기도 하고, 관계 속에서 감정적 거리를 두는 시도가 다중 자아 인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자서전 한 페이지 쓰기’ 수업은 학습자가 불확실성과 시행착오를 수용하며 고정된 자아상을 넘어서는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글쓰기를 통해 학생들은 지금-여기의 자기를 이해하고, 이를 언어화하여 표현한다. 이러한 실천은 대학 글쓰기 교육이 자기 이해와 성장의 공간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