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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General Edu > Volume 19(2); 2025 > Article
한나 아렌트의 시선으로 교양교육 성찰하기

Abstract

이 연구는 한나 아렌트의 사상을 바탕으로 대학 교양교육의 방향성을 재조명하고, 인간다운 삶을 위한 교양교육의 중요성을 논의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1958)과 『과거와 미래 사이』(1961)에서 노동, 작업, 행위로 인간 활동을 구분하면서, 근대 이후 과학기술의 발달로 노동과 작업이 강조되는 현실을 비판한다. 그는 인간다운 삶을 위해 복수성에 기초한 행위와 공적인 삶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아렌트의 관점을 적용하면, 교양교육은 단순한 지식이나 기술 습득을 넘어서야 한다. 특히, 그는 실리만을 추구하는 교육 방식이 교양 없는 속물주의를 조장하고, 교양교육을 특정한 목적 성취의 도구로 전락시킨다고 진단한다. 대학의 교양교육은 단순한 실용성을 넘어서 인간다운 태도를 함양하고, 정치적 참여를 통한 공적인 삶을 강조해야 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다운 교양은 비판적 사고와 다수의 목소리를 존중하는 태도이며, 교양교육은 학생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는 열린 토론과 성찰의 과정이 되어야 한다.

Abstract

This paper aims to re-examine the direction of modern liberal education in universities based on the philosophy of Hannah Arendt and to discuss the importance of liberal education for a truly human life. In The Human Condition (1958) and Between Past and Future (1961), Arendt categorizes human activities into labor, work, and action, criticizing how modern scientific and technological advancements have prioritized labor and work over action. She argues that a truly human life requires an emphasis on action and public life. Drawing on Arendt’s concepts, this paper asserts that modern liberal education must go beyond the mere acquisition of knowledge and skills. It critiques an education system that prioritizes utility and efficiency, fostering philistinism - an attitude that reduces education to a tool for social status and economic gain. Arendt contends that true liberal education should cultivate attitudes that transcend mere utility and encourage political engagement in public life. Furthermore, the paper discusses how modern society has become a ”consumer society,” where education is increasingly tied to economic utility. Arendt warns against this shift, arguing that liberal education should not focus solely on acquiring specific skills but instead foster critical thinking and respect for diverse perspectives. According to Arendt, liberal education should be an open process of discussion and reflection, allowing students to express their own voices while listening to others.

1. 머리말

인간의 삶의 양식을 완전히 바꿔 버릴 듯한 첨단 기술이 개발되고 발달할수록, 인간은 과연 ‘인간다운 삶’이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을 더욱더 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 농업혁명부터 증기기관의 발명까지, 각종 도구의 발명과 발달 과정에서도 인간은 이러한 물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물음은 기본적이면서 단순하지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현재는 이 질문조차 던지지 않으며, 이러한 질문 제기는 시간 낭비로 여겨지기도 한다. 특히, 대학의 교양교육에서는 더 그렇다. 이러한 현상은 대학이 점점 더 전문 직업 교육과 무관하지 않은 현실적 조건에 얽매이기 때문이다.
본 연구는 한나 아렌트의 시선을 통해 교양교육의 방향성을 재조명하고, 인간다운 삶을 위한 교양교육의 중요성을 논의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적 사상가로 잘 알려진 한나 아렌트는 과학기술의 발달과 급변하는 사회 환경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고유성을 지키기 위해 ‘인간다운 교양’의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그런데, 아렌트에 관해 여러 분야에서 비교적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으나, 대학의 교양교육과 관련해서는 연구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교육 관련 연구라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대부분 대학 이전의 학교 교육과 관련된다.1) 그러나, 아렌트의 텍스트들을 면밀히 분석해 보면, 아렌트의 주요 사상이 대학의 교양교육과 관련해 예상보다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특히, 갈수록 인공지능과 같은 과학기술의 발달이 대학의 교양교육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아렌트의 비판적 논의는 깊게 고민하고 성찰할 화두를 제공해준다. 본 연구는 아렌트의 비판적 시선을 통해 어떻게 교양교육이 단순한 지식이나 기술 교육을 넘어서, 진정한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데 중점을 두는 교육이 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성찰하고 모색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본 연구는 일차적으로 아렌트의 관련 문헌들을 정확하게 분석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 내용을 토대로 그의 사상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고 교양교육에 적용 가능한 시사점을 도출하고자 한다. 특히 『인간의 조건』(1958)과 『과거와 미래 사이』(1961)의 관련 부분들을 중심으로 아렌트의 시대 진단과 교양의 개념을 분석하여, 이를 바탕으로 교양교육의 방향을 재검토해 볼 것이다.

2. 아렌트의 시대 진단과 실리주의

아렌트가 살았던 시대보다 지금이 훨씬 더 새로운 기술이 발명되고 발달했지만, 아렌트는 현재 우리가 과학기술에 대해 제기할 수 있는 기본적이면서도 본질적인 물음을 이미 『인간의 조건』(1958)에서 제기한 바 있다. 이 물음 제기는 그가 살았던 시대와 우리가 사는 시대가 이미 어떤 공통의 문제에 처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근대 이후 과학기술의 급격한 발달로 인해 ‘인간의 조건’이 변화했다는 문제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아렌트에 의하면 ‘과학자들이 100년 안에 만들 수 있다고 말하는 미래 인간(future man)’은 인간의 실존을 ‘인간 자신이 만든 인공적인 것’으로 바꾸고 싶어 하며(아렌트, 2019, p. 79), 더구나 핵기술 등을 통해 이미 인간의 능력이 ‘지구상의 유기적 삶 전체’를 파괴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해졌다(아렌트, 2019, p. 244). 이미 1950년대에 아렌트가 내린 이러한 시대 진단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21세기라는 우리 시대에 고도로 발달한 인공지능과 로봇, 유전자조작 등 최첨단 기술을 떠올리게 된다.
근대 이후 자연과학적 진리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보통의 말과 사유’로는 더 이상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로 추상화, 전문화되었다(아렌트, 2019, p. 79). 그래서 과학기술이 일상에 미치는 영향력은 과거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지만, 일반 시민들은 그것에 대해 깊이 알지도 못하며 그것의 개발이나 적용 여부에 직접 관여할 수도 없다. 아렌트에 의하면 이처럼 근대 이후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달은 인간의 활동에서 ‘노동’과 ‘작업’이 ‘행위’보다 확대되고 중요해진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활동을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로 구분했다. ‘노동’은 신체의 성장 및 신진대사 등 생물학적 과정과 일치하는 활동이며 인간의 생존 자체와 관련된다. 이에 비해 ‘작업’은 인간의 실존에서 ‘비자연적 부분’에 상응하는 제작 활동이며, 모든 자연적 환경과 다른 ‘인공적 사물세계’를 제공한다. 각종 도구 제작이나 기술 발명 등이 이 작업에 해당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행위’는 사물이나 물질의 매개 없이 인간들 사이에 직접적으로 이루어지는 유일한 활동이며, 각자 개성을 지닌 다수의 인간들이 지구상에 살고 세계에 거주한다는 ‘복수성(plurality)’이라는 조건에 상응하고 ‘공적인 정치 영역’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활동이다(아렌트, 2019, pp. 83-84).
우선, 아렌트가 ‘노동’을 ‘반정치적 삶의 방식(antipolitical way of life)’, ‘작업’을 ‘비정치적 삶의 방식(unpolitical way of life)’이라고 비판적 견해를 피력하면서 ‘실리주의(banausic)’를 어떻게 비판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본래 ‘실리주의(banausic)’라는 말은 그리스어 ‘바나우소스(βαναῦσος)’에서 유래하였으며, 이는 손으로 하는 기술적 작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뜻했다(아렌트, 2023, pp. 384-385). 오늘날 이 단어는 ‘단조롭고 반복되며 창의성이 부족한 작업’을 지칭할 때 사용되며, 주로 지적 자극이 없는 일을 묘사하거나 비판할 때 부정적인 맥락에서 사용된다. 아렌트는 특히 근대 이후 인간의 활동 방식을 비판할 때 이 단어를 ‘교양 없는 속물(philistine)’이라는 단어와 함께 자주 사용한다.2)
아렌트에 의하면 ‘노동의 본질’은 ‘다수의 개인들이 마치 한 사람인 것처럼 함께 노동하는 노동자 무리의 형태로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다(아렌트, 2019, p. 316). 노동 현장에서 노동하는 사람은 ‘각자 자신만의 고유한 개성을 지닌 유일무이한(unique) 인간’으로 활동하지 못하며, 오히려 자신의 개성과 자기만의 정체성을 발휘하지 말 것을 종종 요구받는다(아렌트, 2019, 317). ”인간은 노동하면서 세계와도 타인과도 함께 하지 않으며, 스스로 생존해야 한다는 적나라한 필연성에 직면하면서 자신의 육체와만 외롭게 함께 한다”(아렌트, 2019, p. 316). 노동은 ‘다수가 하나로 통합된 상태(unitedness of many into one)’(아렌트, 2019, p. 318)이므로, 노동에 집중하는 이에게는 자신과는 개성이 다른 사람들이 공존한다는 사실도 중요하지 않다. 아렌트는 기술 발달로 인한 ‘자동화(automation)’의 출현이 인간을 노동의 부담으로부터 점점 더 해방하는 상황을 언급하면서, 근대에 모든 사회가 ‘노동 사회(laboring society)’로 변모되어 ”노동자 사회는 더 이상 그보다 더 높은 차원의 의미 충만한 다른 활동을 알지 못한다”(아렌트, 2019, p. 81)고 진단한다. 여기서 아렌트가 제기하는 문제의 초점은, ‘자동화로 인해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가’ 여부를 따지는 데 있지 않고, ‘과연 인간의 모든 활동이 노동 중심으로만 이해되는 것이 바람직한가’라는 데 있다. 전자의 문제만을 선택적으로 다루면서 거기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답변을 하는 데에만 집중하는 입장은, 정작 자신이 후자와 같은 더 중요한 물음을 놓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이것은 작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문제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의 사용을 의미하는 도구성 자체가 아니라, 유용성과 효용성을 확립하는 ‘제작 경험’을 ‘삶과 인간 세계의 궁극적 기준’으로 일반화하는 태도다. 이 일반화는 호모 파베르의 활동에 내재한다”(아렌트, 2019, p. 252). 인간은 특정한 목적을 미리 세우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적합한 수단을 고안하고 제작한다는 점에서 다른 동물과 다르다. 그런데, 아렌트는 유용성과 효용성을 목적으로 삼는 작업이 인간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활동이기는 하지만, 이 작업을 ‘인간다운 삶’의 궁극적 기준으로 내세울 수는 없다고 본다. ”인간이 [유용성을 추구하는] 제작자인 한, 그는 모든 것을 도구화하며, 그의 도구화는 모든 사물이 수단으로 전락한다는 것을, 즉 내재적이고 독자적인 가치를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아렌트, 2019, p. 252). 아렌트는 모든 것을 유용한 도구로 삼는 이러한 태도를 가리켜 ‘독창성 없는 실리주의(banausic)’나 ‘교양 없는 속물(philistine)’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편의주의적 관점에서(in terms of expediency) 생각하고 행동하는 저속함(vulgarity)’을 표현하는 말이다(아렌트, 2019, p. 252).
『과거와 미래 사이』(1961)에서도 아렌트는 고대 그리스의 사례를 들면서, 효용성을 중시하는 제작은 항상 수단 및 목적과 관련이 있으며, 행위(action)와 말[목소리](speech)에 의한 정치적 활동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제작자는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효용성의 관점에서 모든 사태를 판단하는데, 아렌트는 이러한 관점이 일반화되어 다른 영역에까지 확대되면, ‘독창성이 전혀 없는 기계적이며 실리만 추구하는 정신 상태(banausic mentality)’을 낳게 된다고 진단한다(아렌트, 2023, p. 385). 아렌트에 의하면 ”고대 그리스인은 실리만 추구하는 교양 없는 속물주의(philistinism)가 정치 영역을 위협한다고 생각했다”(아렌트, 2023, p. 386). 왜냐하면 정치 영역에서 미리 정해진 목적을 달성할 것으로 보이는 수단을 확보하는 데에만 치중하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온갖 전략과 술수만이 난무할 것이고, 진정한 의미에서 복수성에 기반한 정치 활동이 애초부터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렌트에 의하면 본래적 의미에서 ‘정치’는 ‘미리 정해진 목적을 적합한 수단을 활용해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활동’, 즉 작업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다. 작업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현상할 수 있는 자발적인 공적 영역”(아렌트, 2019, p. 315)을 설립하지 못한다. 또한 아렌트는 ‘실리만 추구하는 속물주의’가 ‘사물의 가치’를 저하시키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교양 영역 자체도 위협한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실리주의는 사물을 그 사물이 지닌 ‘내재적인 독립적 가치’로 판단하지 못하고 실리를 추구하는 주체 자신의 ‘효용성의 기준’에 따라 판단하여 결국 사물을 단순한 수단으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다(아렌트, 2023, p. 386).
그런데, 이상에서 진술한 바처럼 노동과 작업에 대한 아렌트의 비판을 두고, 아렌트가 노동과 작업의 불필요성을 주장했다는 식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삶에서 노동과 작업은 특정한 인간의 조건으로 필요하지만,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인간다운 삶’을 보장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렌트 자신의 입장이다. 아렌트에 의하면 ‘인간다운 삶’은 노동과 작업을 뛰어넘는 ‘행위’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공적인 정치’가 부재한다면 실현될 수 없다. 정치는 다수의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행위에 기반해야 하며, 행위는 생존을 위한 노동도 아니며 모든 사태를 목적과 수단의 관계로 보는 작업도 아니다. 아렌트는 노동과 작업이 어떤 식으로든 정치와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행위라는 인간 활동에 상응하는 ‘복수성’이 모든 정치적 삶의 필요조건이자 가능조건이라는 의미에서 ‘절대적 조건’이라고 주장하면서(아렌트, 2019, p. 84), 이 ‘복수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어느 누구도 지금까지 살았고 현재 살고 있으며 앞으로 살게 될 다른 누구와도 동일하지 않다는 점에서만 모든 인간은 동일하다. 이 때문에 복수성(plurality)은 인간 행위의 조건이다(아렌트, 2019, p. 85).

아렌트는 각자 자기만의 고유성을 지닌 복수의 인간들에게 고유한 활동은 ‘행위’밖에 없다고 본다. ”오직 행위만이 인간의 배타적 특권이다. 짐승도 신도 행위 능력은 없다. 행위만이 타인의 지속적인 현존을 전제 조건으로 삼는다”(아렌트, 2019, p. 102). 행위는 복수의 타인들을 전제로 한 활동이며, 그래서 인간 사회 밖에서 이루어질 수 없으며, ‘더불어 존재함(being together)’을 기반으로 ‘공적 영역’에 속하는 인간의 고유한 활동이다(아렌트, 2019, pp. 101-102).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1958) 이후 출간된 『과거와 미래 사이』(1961)에서 이러한 인간의 활동이 어떻게 교양의 측면에서 논의될 수 있는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3. 교양과 인간다움

교양에 대한 아렌트의 생각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은 『과거와 미래 사이』 중 ‘제6장. 문화의 위기. 그것의 사회적⋅정치적 의미’ 부분이다.3) 여기서 아렌트는 매슈 아널드 (Matthew Arnold)의 『교양과 무질서(Culture and Anarchy)』를 인용하면서, 흔히 ‘문화’로도 번역되는 ‘교양(culture)’의 위기를 비판적으로 진단하고 있다.4) ‘문화의 위기’에서 직접 ‘문화[교양]’의 의미에 대해 그 어원을 설명하면서 아렌트는 이 개념을 어떤 맥락에서 사용하는지를 밝힌다. ”문화[교양]라는 단어는 콜레레(colere)-경작하다, 거주하다, 보살피다, 가꾸고 보존하다-라는 단어에서 파생했으며, 기본적으로 자연[본성]을 인간의 거주에 적합해질 때까지 경작하고 가꾼다는 의미에서 자연과 인간 사이의 상호 소통(intercourse)과 관련된다. 그러므로 그것은 모종의 사랑스러운 보살핌(loving care)의 태도를 말하며, 이는 자연을 인간의 지배에 종속시키려는 모든 노력과 첨예한 대조를 이룬다”(아렌트, 2023, p. 379). 여기서 우리는 아렌트가 ‘문화(culture)’를 자연과 인간의 상호 관계까지 포괄하는 매우 넓은 의미에서 ‘교양[가꾸기](Bildug)’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할 수 있다.5) 또한, 아렌트는 키케로(Cicero)가 ‘콜레레(colere)’라는 단어를 영혼과 정신에 적용하여, ‘엑스콜레레 아니뭄(excolere animum, 영혼 가꾸기)’, ‘쿨투라 아니미(cultura animi, 영혼의 도야[교양])’라는 표현들을 사용했음을 언급하면서, ‘쿨투라 아니미(cultura animi)’가 그리스어 ‘파이데이아(παιδέια)’의 번역어라는 점을 지적하는데(아렌트, 2023, pp. 379-380), 잘 알려져 있다시피 ‘파이데이아’는 ‘아동(pais)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agō) 활동’인 ‘파이다고기아(paidagōgia)’와 연관된다.6)
아렌트의 진단에 의하면, 고대와 달리 중세를 거쳐 근대로 오면서 공공성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와 공적 영역은 점점 더 위축되며, 반면에 ‘특별한 목적을 위해 사람들이 서로 동맹을 맺는 것’을 의미하는 ‘사회적 결속(societas)’은 더욱더 확대된다(아렌트, 2019, p. 103). ”단지 생활을 위해 상호 의존한다는 사실이 공적 중요성을 획득하고, 단순히 생존에 관련된 활동이 공적으로 등장하는 형식이 사회(society)다”(아렌트, 2019, pp. 128-129). 고대 그리스에서는 사적인 생활 영역인 ‘가정’과 공적인 정치 영역인 ‘폴리스’가 비교적 선명하게 구분되고 제각기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던 반면, 근대 이후 사회는 단순히 사적이지만도, 그렇다고 공적이지만도 않은 영역이다(아렌트, 2019, pp. 119-120). 그런데, 이 사회는 매우 획일적이며 하나의 이해와 의견만을 허용하는 ‘순응주의’에 기반하고 있어서 ‘인간다움(humanity)’을 위협하고 말살할 수도 있다고 아렌트는 경고한다(아렌트, 2019, p. 128).7) 왜냐하면 발달된 기술에 기반하여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경제 영역이 공적인 정치 영역을 심각하게 잠식하면서, 생계유지를 위해 직업 생활하는 데 주로 집중하는 근대적 개인은 공동체의 일에 더욱더 거리감을 느끼며 무관심해지고, 정치적 참여 의식도 약해지기 때문이다. 각자 다른 개성을 지닌 복수의 인간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공동체로부터 개인이 멀어진다는 것은, 대중 사회 속에서 개인의 인간다운 삶 자체가 위협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렌트에 의하면, 이러한 문제의 심화는 교양의 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아렌트는 근대 이후 교양과 관련해 두 가지 사회 현상을 비판적으로 문제 삼는다. 일차적인 현상은, 실리만을 추구하는 ‘교양 없는 속물주의(philistinism)’가 모든 것을 직접적 유용성과 물질적 가치로 판단하여, 문화[교양]나 예술처럼 유용하지 않은 객체와 작업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 정신 상태가 나타난다는 것이다(아렌트, 2023, p. 364). 그런데, 아렌트는 근대 사회가 문화[교양]가 결핍되고 예술에 무관심하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문제의 복잡성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고 본다.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실리만을 추구하는 무교양의 정신 상태가 모든 문화적 가치에 오히려 지나친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그래서 아렌트는 근대 사회의 중산층이 사회적 지위와 위상과 같은 자신의 목표를 위해 역으로 문화[교양]를 독점화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경제적으로 풍족해진 유럽 중산층에게 교양은 사회적 신분 상승의 무기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했으며, 그래서 교양이 수단으로 봉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이러한 중산층 사람들을 ‘교양있는 속물(cultured philistine)’이라 부른다(아렌트, 2023, pp. 365-366). 이들에게 예술과 문화생활을 통해 교양을 갖추는 것은, 유용성과 실리만을 추구하는 자신이 처한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수단으로서 중요하다(아렌트, 2023, p. 366). 실제 현실에서는 유용한 자기 이익을 추구하며, 거기서 얻은 시간과 돈의 여유를 미술관이나 음악회 등 각종 문화 생활과 예술 활동 등에 참여함으로써 교양을 갖추어 자신의 신분 상승을 위한 표식으로 이용하려는 일련의 과정은, 지구상의 문명화된 사회, 특히 대도시 생활에서 지금까지도 여전히 지배적인 생활 방식이라고 아렌트는 비판한다.
더 나아가 아렌트는 현대 사회를 ‘소비자 사회(consumers’ society)’라고 부른다. ‘소비자 사회’는 생활을 위해 필요한 노동 시간을 제외한 여가를 ‘더 많은 소비와 더 많은 오락’을 위해 사용하며, ‘삶의 에너지’가 ‘소비를 통해 촉진되어야 하는 생활 과정’에서 점점 더 증가하는 욕구를 소비재가 다 충족하지도 못하는 사회다(아렌트, 2023, p. 378). 이러한 사회가 시간이 흐르고 여러 가지 교육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저절로 ‘더 교양있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a fatal mistake)’라고 아렌트는 진단한다(아렌트, 2023, p. 378).
  • 과거나 현재에 생산된 세상의 모든 객체와 사물이 마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만 거기 있는 것처럼 그것들을 사회의 생활 과정을 위한 단순한 기능들로서 취급할 때 교양은 위협받는다(아렌트, 2023, p. 374).

모든 것이 필요 충족을 위한 기능들로만 취급된다는 것은, 노동과 제작의 관점에서 모든 것이 다루어진다는 것이다. 현대인의 여가나 취미 생활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아렌트의 주장이다. 대부분 현대인은 특정한 직업을 가지고 노동하거나 제작하면서 자신의 생활을 유지하고, 여가에는 문화생활을 하면서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났다고 착각하지만, 아렌트가 보기에 그러한 생활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교양’은 있지 않다. 결국 노동과 작업을 뛰어넘는 ‘행위’와 연관해 보면, 교양에서 중요한 것은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실용적 지식의 습득이나 축적도 아니고 새로운 기술을 익히는 것도 아니며, 소위 명품 구매와 같은 화려한 소비 생활로 자신을 뽐내는 것도 아니다. 아렌트는 이러한 것들을 초월한 지점에서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다운 교양’이 시작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아렌트는 교양을 ‘인문주의(humanism)’와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이해한다. 아렌트에 의하면 ‘진정한 의미의 교양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곧 ‘진정한 인간다움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결이 같은 물음이다.
참된 인간다움은 무엇인가? 아렌트는 ‘휴머니즘(humanism)’이 라틴어 ‘후마니타스(humanitas)’로부터 나왔으며, 이 ‘후마니타스’는 로마에서 ‘교양 있는 사람의 상징’이었다고 지적하면서, 키케로가 주장한 것처럼 ‘진정한 휴머니스트[인문주의자](true humanist)’에게는 과학자의 진실도, 철학자의 진리도, 예술가의 아름다움도 ‘절대적인 것’일 수 없다는 데 동의를 표한다(아렌트, 2023, pp. 399-400). ”휴머니스트[인문주의자]는 [한 분야의] 전문가(specialist)가 아니기 때문에, 각각의 전문성(specialty)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강제성을 뛰어넘는 판단과 취향의 능력을 행사한다”(아렌트, 2023, p. 400). 여기서 아렌트가 의도하는 교양은 흔히 문사철과 같은 특정 학문 전공분야로서 ‘인문학’조차도 가리키지 않는다. 아렌트는 특정 분과 학문으로서 철학조차도 전문가 집단에 의해 주도적으로 연구되는 분과 학문인 한, 이러한 교양에 적합하지 않다고 본다. 그래서 후마니타스[인간다움]는 ‘모든 면에서 자유로운 사람’에게 적용될 수밖에 없으며, 이들에게는 자유의 문제, 강제되지 않음이 가장 중요한 결정적 요소이다(아렌트, 2023, p. 400). 아렌트는 이 인문주의가 앞서 언급한 ‘쿨투라 아니미(cultura animi)’, 즉 ‘영혼의 도야[교양]’의 결과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세계의 사물들을 보살피고 보존하고 감탄하며 바라보는 방법을 아는 태도’를 의미한다(아렌트, 2023, p. 400). 나 아닌 타자와 사물을 나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도구화하지 않고, 타자와 사물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는 태도가 교양의 기본이다. 이 점에서 아렌트는 ”우리는 휴머니스트[인문주의자]로서 자유를 통해 우리가 반드시 배우고 추구해야 할 전문성을 넘어설 수 있다”(아렌트, 2023, p. 400)고 강조하면서, ‘도야된[교양을 갖춘] 인격(cultivated person)’은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 사람들 가운데, 사물들 가운데, 사상들 가운데서 자신의 동행(同行, company)을 선택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아렌트, 2023, p. 401)이라고 주장한다. 자신의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적합한 수단을 모색하고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다르면서도 동등한 삶의 동반자를 선택할 줄을 아는 안목을 갖추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러한 태도는 어떤 특정한 지식이나 기술을 능숙하게 알고 활용할 줄 아는 것으로 갖추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이러한 태도를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이것이 곧 아렌트가 주장하는 ‘교양있는 사람’의 태도이기도 하다.

4. 교양교육과 공적인 삶

앞서도 언급했지만, 이상과 같은 아렌트의 진단은 단순히 실용적인 지식이나 기술 교육을 하지 말자는 주장이 아니다. 실용적인 지식과 기술도 인간이 생활하는 데 필요하다. 그리고 반복되는 일상의 무료함을 달래는 문화 예술, 취미 생활도 인간에게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인간다운 삶을 충분히 꾸려나갈 수 없다는 데 아렌트가 제기하는 문제의 핵심이 있다. 대학의 교양교육조차 학생들에게 특정한 지식과 기술을 교육하는 데 과도하게 치우친 현실을 돌이켜 볼 때, 이러한 문제 제기는 매우 유의미한 울림을 우리에게 전달해 준다. 대학의 교양교육이 취업을 위한 도구적, 실용적 지식교육이나 특정 분야의 전문적 기술교육을 부분적으로 담당할 수 있고 담당하는 것이 시대적 요구 면에서 필요하지만, 교양교육 전체가 이 부분에 과도하게 치중하는 현상은 교양교육의 본래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노동이나 작업과 관련되는 전문 기술적 능력은 급격히 발달하는 반면, 일반적 교양은 그렇지 못한 상황을 빗대어, ‘우리의 기술적 능력’과 ‘우리의 일반적인 인간다운[인문적] 발전(our general humanistic development)’ 사이에 ‘시차(時差, time lag)’가 발생한다고 지적한다. 인간다운[인문적] 교양은 ‘우리의 행위와 말하기 능력(our capacity for action and speech)’을 통해 이루어진다(아렌트, 2019, 131). 그런데, 인간의 기술로 이룬 성과에 대해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미 과학기술은 저만치 앞서가 있는데, 인간은 자신이 만든 그 과학기술의 성과에 한참이나 뒤처져 뭔가를 말하려고 해도 말하기가 힘든 시대가 이미 도래했다. 예컨대, 우리는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 놓은 인공지능에 관해 비전문가로서 아무 목소리도 낼 수 없는 처지에 이미 빠져 있지는 않은가?8) 아렌트는 인간이 무엇을 만들어 놓고도 그것에 관해 정작 인간 스스로 말하고 사유할 줄 모르는 상황이 도래하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하기와 말하기를 대신할 인공 기계(artificial machines)’를 필요로 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면서, 만일 그렇게 되면 우리 인간은 ”기술이 얼마나 살인적이더라도 개의치 않으면서, 기술적으로 가능한 모든 장치의 손아귀에 내맡겨진 사유할 줄 모르는 피조물(thoughtless creatures)”(아렌트, 2019, p. 80)이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 중 ‘서론’에서 인간이 개발한 핵무기와 같은 도구에 의해 지구상의 모든 생물을 파괴할 수도 있는 시대가 이미 도래했다고 경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과연 과학과 기술의 새로운 지식을 이런 목적에 사용하기를 원하는가 하는 문제다. 이 질문은 과학적 수단으로 결정될 수 없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정치적 문제이기 때문에 전문과학자나 직업정치가의 결정에 맡길 수 없다(아렌트, 2019, p. 79).

여기서 아렌트는 ‘과학기술을 어떤 목적을 위해 개발할 것인가’ 여부는 과학 자체에 의해 결정될 수 없는 정치적 문제라고 보고 있다. 왜냐하면 어떤 과학기술을 개발할 것인가라는 문제부터 시작해, 그러한 기술을 어디에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관련되는 문제는 특정 과학 전문가나 직업정치가가 결정할 사안이 아니라, 모두에게 열려 있는 ‘공적인 문제’라고 아렌트는 보고 있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이러한 정치적 문제는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는 복수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공적 영역에서 제기되고 다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아렌트는 오늘날 사람들은 실리만 추구하는 ‘교양 없는 속물주의’와 정치의 관계에 관해 전혀 다르게 생각한다고 지적한다. 오늘날에는 정치 영역과 공적 사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오히려 ‘교양 없는 속물주의’를 유발하면서, 사태를 그 진정한 가치에서 고려할 수 있는 ‘교양있는 정신(cultivated mind)’의 발전을 도리어 가로막는다고 많이들 의심하고 있다는 것이다(아렌트, 2023, p. 387). 이러한 의심은 일반 시민들의 정치 불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아렌트의 언급처럼 일종의 정치 일반에 대한 혐오와 불신 현상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그리 어렵지 않다. 정치가 정치인들의 실리 위주의 정략적 활동으로만 간주될 경우, 당연히 정치는 교양과는 무관한, 심지어 교양있는 정신의 발전을 가로막는 일로 생각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된 결정적 이유 중 하나로, 아렌트는 ‘제작의 사고방식’이 정치 영역을 침범한 것이라고 보며, 정치적 행위도 제작처럼 목적과 수단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이에 비해 아렌트는 ‘진정한 정치 활동’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 진정한 정치 활동, 즉 행위하기(acting)와 말하기(speaking)는 타인들의 현존 없이, 공중(公衆, the public) 없이, 복수로 구성된 공간 없이 결코 수행될 수 없다(아렌트, 2023, p. 388).

아렌트의 관점에서 볼 때, 정치는 이데올로기나 거대 담론처럼 ‘거창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각자 스스로 생각하면서 발생한 사태를 문제시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로 물음을 제기하는 것으로부터 정치는 시작된다. 아렌트가 주장하는 ‘말하기’에는 당연히 ‘경청하기’가 동반하며, ‘행위하기’에는 ‘질문하기’가 동반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인공지능 기술 분야에 전문가가 아닌 일반 시민들도, 아직 우리 사회에서 법규나 규범이 미비한 인공지능의 개발에 막대한 자본을 투입하는 글로벌 기업의 행보에 대해 얼마든지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문제 제기를 할 수 있으며, 또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행위를 할 때, 그것이 곧 아렌트적 의미에서 정치를 시작하는 것이다. ”말하기의 적절함이 문제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사안들은 [말을 통한] 정의(定意)에 의해 정치적이 된다. 말하기는 인간을 정치적 존재로 만들기 때문이다”(아렌트, 2019, p. 80). 따라서 아렌트의 시각에서 볼 때, 과학기술에 비전문가인 평범한 시민들도 누구나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면서 정치적 존재로서 공공의 문제에 참여할 수 있고, 또 마땅히 참여해야 한다. 그리고, 아렌트는 이러한 태도를 진정한 의미의 ‘인간다운 교양’으로 간주한다. 아렌트는 각 분야의 전문가인 학자가 내린 정치적 판단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이유는, 그들 학자가 ‘말이 그 힘을 상실해 버린 세계’, 즉 전문가의 세계로 이동해 버렸기 때문이라고 본다(아렌트, 2019, p. 80). 아렌트에 의하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자신의 전문성만을 고집할 때, 거기서 인간다운 삶의 의미충만함을 경험하기는 어렵다. ”이 세계에서 살면서 움직이고 행위하는 한에서 사람들, 복수의 사람들은, 그들이 타인 및 그들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서로 이해할 수 있을 때에만 의미충만함(meaningfulness)을 경험할 수 있다”(아렌트, 2019, p. 80).
급격한 대전환의 이 시대에 대학의 교양교육도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다시 방향을 잡고 출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무엇이 인간다운 의미충만한 삶인가’를 공동체 구성원들이 함께 고민하고 성찰하면서 참여하는 과정으로 교양교육도 이해될 필요가 있다. ”현 상태의 과학적 성취에 우리의 ‘교양 태도(cultural attitudes)’를 적응시켜야 한다”라고 닦달하며 강요하는 충고를 우리가 일방적으로 따르기만 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목소리가 의미충만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을 열렬히 채택하는 것과 같을 것이라는 아렌트의 경고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아렌트, 2019, p. 80). 예컨대, 디지털 시대의 변화에 맞게 거의 모든 대학에서 대학생들에게 코딩을 교양필수로 지정하여 교육하는 상황을 떠올릴 수 있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에 상응하는 교양을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한다는 주장은, 현 상태의 과학적 성취에 우리의 ‘교양 태도’를 적응시켜야 한다는 요구이며, 이 요구는 대학생 누구나 코딩 정도는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변화된 시대의 요구에 맞게 코딩과 같은 과목을 개설해 교양교육을 하는 데 아렌트 자신도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교과의 개설과 추진 과정이 일방적인 닦달하기, 강요하기라는 일종의 폭력적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데 있으며, 이는 분명히 반교육적, 반교양적이며 인간답지 못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고 배울 것인가라는 기본적이며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대학에 속한 구성원 모두가 열린 마음으로 서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성찰해 나가는 공적 과정이 필요하다. 특정 내용에 속박되지 않고, 성급한 처방을 내세우지 않는 토론, 상호 존중하는 대화, 개방적이며 최후의 종점이나 최상의 고지를 미리 전제하지 않는 논의,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는 태도가 교양교육에는 기본적으로 필요하다(Nash, 1997, pp. 151-156). 그래서, 아렌트 자신은 교양교육 뿐만 아니라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자신의 책이 어떤 확정된 답을 제시해주지 않는다고 하면서, 다음처럼 강조한다.
  • 그러한 해답들은 매일매일 주어지며, 그리고 그 해답들은 실천적 정치의 사안들로서 복수의 동의에 종속된다. 설사 우리가 마치 단 하나의 해결책이 가능한 것처럼 여기서 문제들을 다룬다고 하더라도, 해답들은 결코 이론적 고찰이나 단 한 사람의 의견 속에 있을 수가 없다(아렌트, 2019, p. 81).

여기서 아렌트는 각종 문제 해결 과정에서 복수의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과 협의 과정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공공성을 지향하는 정치적 행위와 인간다운 교양교육의 기본 요건이라고 보고 있다.

5. 맺음말

이상의 논의에서 확인한 것처럼, 아렌트는 근대 이후 과학기술의 발달로 노동과 작업이 행위보다 더 중요해진 상황으로 인해 ‘인간의 조건’이 사회의 확대와 함께 변화했다고 진단하면서, 독창성 없는 실리주의와 교양 없는 속물주의를 비판한다. 아렌트는 진정한 교양이란 도구적 유용성을 넘어서 타자와 사물을 존중하는 인간다운 태도에서 비롯된다고 보며, 이를 인문주의와 연결한다. 아렌트의 비판적 시각을 적용하여 보면, 교양교육은 실용적 지식이나 기술 교육에만 한정되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어 정치적 참여와 공적 삶을 강조해야 한다. 인간다운 교양은 복수의 목소리를 존중하는 교육 과정에서 실현될 수 있으며, 그래서 교양교육에서는 각자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서 타인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개방적이고 지속적인 성찰과 행위의 과정이 중요하다.
물론, 이와 같은 아렌트의 주장에는 구체적인 방법론이 부족하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없지 않다. 실질적인 교양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정치적 행위와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제안이 부족하기 때문에, 실제 교육 현장에서 적용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아렌트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이미 정치학의 관점에서나 교육학의 관점에서 제기된 바 있다.9)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구체성이 부족한 것이 그의 이론의 단점뿐만 아니라 장점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구체적인 방법론을 아렌트 자신이 일방적으로 제시해 줄 수도 없고, 제시해 준다고 해도 그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아렌트 자신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특히, 교양교육과 관련해서는 이점이 더욱더 중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정하기는 쉽지 않고 섣불러도, 해서는 안 되는 것만이라도 우선 분명히 가려내어 경계하고 실천해 옮겨도, 현재보다는 교양교육의 상황이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억지로 옳다고 추진하는 아집에서부터 우선 벗어나야 한다. 이를 위해,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의 핵심 주제라고 밝힌 물음, 즉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What are we doing?)”(아렌트, 2019, p. 82)는 여전히 우리에게도 유의미하다.

Notes

1) 유아교육부터 성인교육까지 아렌트 사상을 특정한 교육 분야에 활용한 최근의 대표 국내 연구로는 다음을 참조할 수 있다. 박은주(2023); 김지연, 정계숙(2020); 홍수민(2022). 또한, 교육을 중심 주제로 한 최근의 대표 국외 연구로는 다음을 참조할 수 있다. Nixon(2020); Rodowick(2021); Kloeg(2022).

2) 여기서 ‘교양 없는 속물’로 옮긴 ‘필리스틴(philistine)’은 본래 히브리어 ‘ םיתשלפ (Pelishtim)’에서 유래하였으며, 이는 고대 블레셋인을 가리켰다. 블레셋인은 고대 이스라엘과 인접한 지역인 오늘날의 가자 지구와 이스라엘 남부 지역에 거주하였던 구약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민족이며, 특히 이스라엘 민족과의 전쟁과 갈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말이 현대에 와서 ‘philistine’이라는 단어로 변형되어 17세기 중반부터 주로 예술이나 문화에 무관심하거나 부정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 비유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3) 본래 ‘문화의 위기’는 1960년에 발표되었으나, 다른 글들과 함께 1961년에 『과거와 미래 사이』 중 제6장으로 포함되어 출간되었다(박치완, 2022, pp. 2-3 참조).

4) 이 글에서는 ‘culture’를 주제와 문맥에 맞게 ‘교양’으로 옮기며, ‘문화’라는 의미를 살릴 필요가 있을 때에만 병기한다. 매슈 아널드(Matthew Arnold)의 『교양과 무질서(Culture and Anarchy)』는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중요한 사상적 저작 중 하나로, 교양을 인간의 정신적, 도덕적 성장과 관련된 것으로 보았으며, 교양이 인간의 본성을 완전히 발달시키고, 사회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핵심 요소라고 주장했다. 이 책은 교양교육이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개인과 사회의 전반적인 성장을 이끌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아널드, 2016).

5) 특히 로마 시대에 자유교양학문이 어떻게 키케로와 세네카를 거쳐 인간다운 삶과 자유민에 어울리는 덕성을 갖추는 교육으로 발전되는가에 관해서는 안재원(2015) 을 참조할 수 있다.

6)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파이데이아’를 통합인문 교양교육의 관점에서 논의한 연구로는 이은정(2018)을 참조할 수 있다.

7) 아렌트에게서 ‘사회적인 것’의 의미를 ‘권리를 가질 권리’와 연관하여 논의한 연구로는 김민수(2021)를 참조할 수 있다.

8) 이러한 문제를 의식하고, 인공지능 시대에 민주적 시민성 함양을 위한 사고와 표현 교육을 강조한 연구로는 박현희(2024)를 참고할 수 있다.

9) 예컨대, 김재춘(2022)은 교육학의 관점에서, 최치원(2029)은 정치학의 관점에서 아렌트 이론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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