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다머와 랑시에르의 관점을 적용한 문학 고전 읽기 교육
Classic Literature Reading Education with Applying Gadamer and Rancière’s Perspect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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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이 연구에서는 문학 고전 읽기에서 문학 고전이라는 텍스트를 잘 이해하는 과제와 학생이 주체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하는 과제가 함께 이루어질 수 있는 측면을 가다머와 랑시에르의 논의를 활용해 탐색하고자 했다. 두 과제가 양립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텍스트 중심과 학생 중심이라는 성격이 다르다 보니 실제 수업에서 조화롭게 학습 목표를 이루기 어려운 점이 있다. 가다머는 해석학적 관점에서 텍스트 이해에 대한 유용한 시사점을 주고 랑시에르는 모든 학생이 이미 지니고 있는 보편 교육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여 스스로 지식의 주체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 학교 교육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피력한 바 있다. 두 철학자의 관점과 기반이 다르지만 문학 고전이나 예술을 바라보는 공통점을 기반으로 두 과제를 함께 해결하는 실마리를 찾고자 했다. 특히 가다머의 경우 텍스트 중심을 보수적으로만 이해했던 부분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기에 랑시에르와의 접점이 좀 더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었다. <명저읽기> 수업에서 그리스 비극이라는 문학 고전을 읽는 경우 읽고 토론하고 쓰는 기존의 교수학습방법을 사용하되 가다머와 랑시에르의 철학적 관점을 적용했을 때 교수자가 목표로 한 주체적 읽기의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 가다머의 이론에서는 텍스트 이해의 과정에서 학생의 선입견이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하는 측면, 랑시에르의 이론에서는 작품마다 같은 질문을 통해 자신의 관점에서 일관되게 읽을 수 있는지와 작품들을 비교하는 것, 그리고 외부의 지식이나 의견을 스스로 판단하고 조정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마지막 과정은 학생의 선입견을 긍정적으로 활용하도록 하는 가다머의 논의와도 무관하지 않다.
Trans Abstract
This study aims to explore how the task of understanding classic literature as a text and the task of students interpreting and judging autonomously can coexist by applying the discussions of Gadamer and Rancière. While these two tasks are not mutually exclusive, their differing natures—text-centered versus student-centered—make it challenging to achieve harmonious learning objectives in practice. Gadamer provides valuable insights into understanding texts from a hermeneutic perspective, while Rancière argues that it is possible, even in school education, to enable students to become autonomous agents of knowledge by utilizing their inherent universal ability to learn. Although their perspectives and foundations differ, the study seeks to find clues to address both tasks based on their shared view of classic literature and art. In particular, new possibilities for interpreting Gadamer’s conservatively perceived text-centered approach were discovered, allowing for a more natural connection with Rancière’s perspective. In the context of a Reading Great Books class, when reading Greek tragedies as classic literature, the traditional teaching methods of reading, discussing, and writing can be enhanced by applying the philosophical perspectives of Gadamer and Rancière, increasing the potential for autonomous reading as aimed by educators. Gadamer’s theory emphasizes the positive role of students’ preconceptions in the process of understanding texts, while Rancière’s theory underscores the importance of consistently engaging with questions from one’s own perspective, comparing works, and independently evaluating and adjusting external knowledge or opinions. This final process aligns with Gadamer’s emphasis on utilizing students’ preconceptions positively.
1. 서론
교양교육에서 고전 읽기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교과목을 개발하여 필수나 선택 교과목으로 이수하도록 하는 학교가 적지 않다. 2023학년도 교양교육과정 기준으로 고전 읽기 교과목을 개설한 대학은 193개(사이버대학, 교육대학, 각종학교 제외) 4년제 일반대학 가운데 48개(24.87%)였고, 그 가운데 필수로 개설한 대학은 13곳이다(윤승준, 2024, 77-78). 덕성여대와 같이 고전 읽기 교육의 오랜 역사를 가진 경우도 있지만 2000년대 이후 중요성을 인식하고 새롭게 교과목을 개발하여 정착시킨 사례가 많다. 고전 읽기 교육과 관련한 여러 연구들도 이러한 최근의 경향을 반영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새롭게 개발된 교과목의 필요성과 목적, 성격과 운영방식, 교수학습법까지 다양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앞으로도 본질적인 가치부터 실용적이고 교육적인 측면 그리고 교양 교육과정으로서의 의미 등 지속적인 연구가 이루어질 분야이다. 이 논문에서는 철학적 관점에서 고전 읽기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추구할 수 있는 읽기 방법의 적용을 통해 학생의 주체적 읽기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측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교수자가 학생을 어떤 존재로 볼 것인가하는 관점과도 연관된다는 점에서 새롭게 다뤄볼 만하다고 판단된다. 고전 읽기 교육의 문제로 지적되는 것 중의 하나가 몸에 좋은 쓴 것을 주는 것의 필요성이 강하게 작동하여 일방적이고 폭력적일 수 있다는 것(김주환, 2021), 젊은 세대들에게 전통적인 읽기 방식을 강요할 수 있다는 것(김현주, 2011; 한수영, 2023)이기에 학생을 어떤 존재로 보고 고전 읽기 방법을 적용할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다.
고전교육 읽기와 관련해서 해석과 이해의 문제를 다룰 때 중요하게 언급되는 인물이 가다머이다. 해석학에 대한 가다머의 연구(배상식, 2021; 서명원, 2013; 양해림, 2006; 홍진혁, 2023) 외에 예술철학의 관점에서 가다머의 해석학을 바라본 연구(서동은, 2009; 안원현, 2009), 교육적 관점에서 살펴본 연구(서용석, 2018; 손승남, 1998; 정정순, 2023)가 있고 고전읽기 교육에 적용한 연구(김정현, 2007)도 있다. 그러나 문학 해석학 전반에 대한 가다머의 영향력이 광범위해서 고전 읽기 교육에 국한해서 다뤄지기보다 전제되는 측면이 더 크다. 이 연구에서는 고전 읽기에서 가다머의 영향력과 유용성을 인정하지만 그것이 교육에 적용될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중심으로 학생 중심의 가치관에 부합할 수 있도록 적용 가능한 지점을 탐색하고자 한다. 교수자의 관점이 아니라 학생의 관점에서 철학적 이론을 실제 수업에 적용했을 때 드러나는 측면은 학생중심의 교수법에서도 새로운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랑시에르 철학은 해방을 목표로 한다는 제도권 교육 안에서 적용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지만 학생을 대하는 태도와 관점의 변화를 근본적인 측면에서 일깨우기에 중요하다. 학생 중심의 교육에서 『무지한 스승』이 끼친 랑시에르의 영향력이 넓다는 점은 이를 반증한다. 여러 연구들의 제목은 다 다르지만 결국 기존의 교육이 하지 못한 부분을 비판하고 랑시에르를 통해 학생중심으로의 전환을 환기하는 연구들이기 때문이다(강성훈, 2013; 김재영, 2022; 목영해, 2012; 양윤의, 조재룡, 2020; 정민승, 2012; 주연제, 김회용, 2014). 대학 교양교육에서 이루어지는 고전 읽기 교육에서도 랑시에르의 학생중심은 핵심적 가치를 지닌다. 결국 고전 읽기교육을 학생중심으로 하고자 할 때 가다머와 랑시에르를 함께 살펴보는 일이 필요하다.
그런데 두 철학자를 편의적으로 활용하지 않기 위해 고전 읽기교육에서 다뤄볼 수 있도록 공통 전제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그렇지만 가다머와 랑시에르는 철학적 배경과 맥락이 다르기 때문에 두 철학자의 접점을 찾는다는 것의 의미는 교육적 가능성의 영역에서 적용 가능한 지점을 탐색하는 일로 한정할 것이다. 그리고 이 논문에서는 고전의 범위를 좁혀서 문학 고전에 한정하고자 한다. 이것 역시 예술론의 관점이라는 공통 접점을 위한 전제에 해당한다. 이러한 탐색은 가다머의 고전 읽기의 교육적 가능성을 새롭게 파악할 수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랑시에르적인 개념으로도 설명 가능한 지점을 통해 가다머 이론의 보수적이지 않은 측면을 적용하여 실천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실제 수업을 하면서 교수자가 겪는 어려움에 기인한다. 고전 읽기에 초점을 두자면 학생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약화하게 되고 학생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중요하게 여기다 보면 고전 읽기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고전 읽기 수업의 목표를 온전히 이루기 위해 두 철학자의 지혜를 빌려보고자 한다.
2. 문학 고전 읽기에 대한 가다머와 랑시에르의 철학적 관점
이 장의 제목을 문학 고전 읽기에 대한 가다머와 랑시에르의 철학적 관점이라고 했지만 두 사람의 이론을 동등하게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문학 고전 읽기에 대한 가다머의 이론을 중심으로 살피되 랑시에르의 관점을 비교함으로써 가다머의 관점이 잘 부각될 수 있도록 전략적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이는 가다머의 이론이 교육적 측면에서 살펴볼 부분이 많고 새롭게 볼 여지가 크다는 이유가 제일 중요하게 작용하지만 임의적, 편의적으로 비교하거나 인용함으로써 두 철학자의 이론을 남용한다는 혐의를 피하고자 함이다. 진리나 보편성에 대한 관점, 언어를 통한 이해에 대한 관점, 고전 텍스트에 대한 관점을 통해 가다머의 이해와 읽기가 랑시에르적 관점으로 전환 가능한지를 탐색해보도록 하겠다.
우선 예술과 진리에 대한 관점이다. ”미의 가치는 보편적 원리에서 추론되거나 증명될 수 없다”(가다머, 2012a, 74)라는 말에 드러나듯이 가다머는 보편 진리를 인간의 인식을 통해 알 수 없다는 입장이고 더 나은 해석이라고 하더라도 결코 진리가 될 수 없음을 주장한다. 더 나은 해석을 위한 끊임없는 대화를 강조했지만 그렇다고 보편적 진리를 특정하고 꾸준히 그 방향으로의 전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시간의 역사성이 쌓이면 보편적 진리에 더 가까워질 거라는 낙관적 전망은 존재한다. 그런 점에서 칸트의 주관주의를 비판했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19세기 미학이 빠져든 존재론적 곤경이 칸트에 기인한다고 보았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상학적 비판이 필요하며 미적으로 경험한 것에서 본래적인 진리를 봐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가다머, 2012a, 126). 가다머는 칸트가 공통감각을 주관적 원리로 환원시키는데 이 원리에서는 아름답다고 평가되는 그 어떠한 것도 인식되지 않으며 주체가 느끼는 쾌감이 이들 대상과 경험독립적으로 상응한다고 주장할 뿐(가다머, 2012a, 75)이라고 비판했다. 가다머는 미의 가치에 대한 인식의 보편성을 특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칸트와 비슷하다. 그러나 예술작품이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칸트와 차이가 있다. 이러한 예술작품의 특성은 놀이 개념이 잘 설명해준다. 놀이의 존재방식이 예술의 존재 방식이기 때문이다. 놀이에서 중요한 것은 놀이하는 사람이 아니라 놀이 자체이다. 놀이하는 사람은 그가 행하는 것이 놀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놀이에 대해 아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놀이처럼 예술작품이 경험하는 사람보다 본질적이며 이 놀이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래서 예술경험의 주체는 사람의 주관성이 아니라 예술작품 자체라고 말한다(가다머, 2012a, 152). 그러므로 가다머의 예술과 진리를 이해하는 주요한 키워드는 예술작품(문학 고전)의 진리 내재성이고 이를 이해하고 향유하고 대화하고 전달하는 것이 핵심이다. 전통, 역사성, 지평융합이란 개념은 보편성을 특정하지 않는 대신 추구하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랑시에르는 교육에서 설명을 통해 정답을 알아야 하는 방식을 비판했고 스스로 배울 수 있는 내장된 능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것을 보편적 학습능력이라고 했다. 여기서 학생 개인의 더 나은 해석을 위한 노력은 중요하지만 하나의 해석을 진리로 정해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다머와 상통하는 지점이 있다. 그러나 철학적 전통이 다른 데서 오는 차이점이 크다. 가다머와 랑시에르의 차이는 예술의 보편적 진리 가능성 여부로 모아진다. 가다머는 예술 자체를 절대적 자율성을 지닌 것으로 보았기에 다양한 해석을 인정하지만 결국 시간이 보장해준 예술 자체가 지닌 힘을 중요하게 여기기에 예술 자체가 지닌 보편적 해석의 가능성을 전제한다. 예술을 통해 진리를 경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진리라는 보편적 개념을 상정하고 있다. 해석의 보편성 대신 예술의 보편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반면 랑시에르는 칸트를 잇는다는 점에서 예술 자체가 지닌 보편적 진리보다는 주관주의적 관점을 수용하여 주체성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다. 예술이 새로운 주체성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에 주목하고 예술의 정치적 기능을 중요하게 여긴다. 예술의 보편성이 특정되지 않는다는 관점은 같지만 가다머는 독자/해석자의 경험과 함께 시간성이 기여함으로써 예술작품 안에 보편적 진리가 있다고 보았고 랑시에르는 예술작품의 보편적 진리보다는 독자/해석자의 주체성을 통해 예술이 기여할 수 있는 측면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언어에 대한 중요성도 공통된다. 물론 가다머는 해석학자로서 언어를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지만 기능적 측면에 한정되지 않는다. 가다머에게 언어는 세계의 본질이다. 세계는 언어로 표현될 때만 세계일 뿐 아니라 언어를 통해 세계가 표현될 때만 비로소 고유한 생명을 얻는다고 했으며 다른 생명체와 달리 인간은 환경으로부터 자유로운데 언어를 통해 경험의 압박을 넘어설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가다머, 2012b, 384-385). 이렇게 어마어마한 함의를 지닌 언어가 문자로 기록되면 전달되는 과정의 가변적 변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점, 다시 말해 어느 시대의 독자에게나 동일하게 읽힐 수 있다는 점은 언어의 유용성도 잘 드러내준다. 이는 과거와 현재의 독특한 공존을 가능케 해주기 때문인데 현재의 관점에서 글이 말하는 바에 참여한다는 것을 담고 있다. 이는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의미 영역으로 들어와서 만인에게 공개되는 것”(가다머, 2012b, 313)이라는 점에서 가다머의 텍스트 중심주의를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는 측면을 드러내준다. 가다머는 특히 대화를 예술의 본질로 여겼는데 해석학적 측면 외에 공동체의 윤리적 측면까지도 확장될 수 있는 개념이다. 가다머의 대화 개념은 이해와 해석, 경험과 교육의 측면에서 핵심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가다머는 이를 정치적 측면까지 확장하지는 않았지만 랑시에르와 공통점이 가장 많이 발견되는 부분이다. 두 사람 모두 말하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랑시에르는 진리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관점이지만 말하기를 통해 주체성을 발휘하고 감각을 재분할하는 정치의 순간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랑시에르는 언어의 자의성으로 인해 학생 스스로가 모호함과 불협화음을 경험하게 되고 주체의 지적 능력을 활용할 수 있게 된다고 보았다(빙햄 & 비에스타, 2023, 181).
개인에 초점이 맞춰진다는 점도 비슷하다. 가다머의 역사성 개념을 논하려면 해석자 개인의 이해와 적용이라는 부분이 전제된다. 랑시에르는 사회주의자이지만 사회 변혁보다는 개인의 해방을 통한 사회 변화가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개별 인간은 자유롭지만 인간들의 모임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자코토의 해방교육도 사회나 제도 속으로 들어가면 지속될 수 없다는 점을 랑시에르는 『무지한 스승』 전체에서 밝히고 있다. 그런 점에서 랑시에르에게 해방된 사회는 있을 수 없고 해방된 개인이 있을 뿐이다. 방법론보다는 원칙이 중요하다는 관점도 비슷하다. 가다머는 실천적 측면에서의 방법론에 대한 모색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수성 논란이 나오게 된다. 랑시에르의 경우 좌파적 학문 배경에도 불구하고 사회 변화를 위한 방법론이 아니라 개인의 해방을 위한 원칙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물론 방법론과 실천은 다른 문제이다. 랑시에르의 경우 실천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교육적 방법론의 개념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을 말한 것이다.
가다머는 고전을 중요시했고 랑시에르는 이야기가 담긴 책을 의미 있게 봤는데 결국 관건은 예술의 진리를 작품 자체에서 찾는 가다머의 방법론과 해석자/향유자의 주체적인 행위를 중시하는 방법론을 대학 교양교육의 문학 고전 읽기에 적용했을 때 어떻게 해야 가장 바람직한 교육적 의미와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이다. 원칙에 대한 확인과 이를 교수학습 방법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이다. 가다머의 해석학은 보편성을 향해 확장되면 될수록 이론적, 추상적 성격이 강해져서, 구체적, 실천적 내용에의 직접 적용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경향이 있기에(최고원, 2009, 402) 실천적인 측면에서의 고민과 적용이 더욱 요청된다.
3. 문학 고전 읽기에서 가다머의 영향력와 유효성
3.1. 이해의 개념과 가치
가다머 해석학에서 이해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이는 고전의 가치에 대한 인정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이지만 텍스트 읽기의 전통적인 방법론으로서 교육현장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고전적이라 일컫는 것은 시대상황의 온갖 변화에도 불구하고 상실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보존되는 가치로서 경험되거니와 어느 시대에나 그 시대와 더불어 공존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무시간적 현재성의 양상을 띠는 것”(가다머, 2012b, 167)이라는 고전의 정의에서 드러나듯이 ‘무시간적 현재성’의 가치를 이해하는 것은 해석학자로서 중요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해석학은 딜타이가 보여주듯 역사적인 관점이 중요한데 고전은 해석학의 전통적 가치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대상이다. 그런 점에서 고전의 가치는 이미 해석학의 가치 안에 들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교육적 관점에서 고전의 가치는 문학 텍스트 ‘이해’라는 과정과 결과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물론 가다머가 설명하는 이해의 방식이 추상적이어서 그 의미를 들여다봐야 한다. 특히 선입견에 대한 부분을 어떻게 수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선입견은 선이해라는 긍정적인 작용도 하지만 작품을 오해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텍스트에 의거한 문제제기를 하게 되면 자신의 선입견에 휘둘리게 될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텍스트의 생소함을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과 자신이 선입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 된다는 것이다(가다머, 2012b, 142-143). 그러나 문제는 실제로 긍정적 선입견과 부정적 선입견을 구분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선입견은 가다머 이론에서 가장 공격을 많이 받는 개념이기도 하다. 가다머 이론의 핵심에 비추어 보자면 역사적인 시간을 견뎌낸 고전과 그것을 가능하게 한 해석은 이미 긍정적 선입견이 축적된 결과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래서 ”텍스트 속에서 목소리를 내는 역사적 전통에 맞서서 자신의 목소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역사적 전통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를 멀리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개인의 올바른 판단보다 더 강력하게 개인적 존재의 역사적 현실성을 규정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가다머, 2012b, 152). 개인의 선입견이 시간을 견뎌낸 결과는 긍정적 선입견이고 그 다음으로 개인의 올바른 판단이 자리하며 개인의 부정적 선입견이 그 다음이다. 그래도 여전히 개인의 올바른 판단과 부정적 선입견을 구분하기 쉽지 않다고 느낄텐데 가다머에게 이것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다. 몇 겹의 안전장치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텍스트 중심의 보수적인 이해의 개념에 숨통을 열어주는 것이 1차적으로는 적용이다. 가다머의 이해 개념에는 적용이 이미 들어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가다머는 이해라는 것은 언제나 적용이기도 하다고 이야기했다(가다머, 2012b, 196). 그런데 가다머의 적용 개념은 해석자 개인보다 텍스트 중심적인 적용의 개념에 가깝다. 시대적 간격을 의식적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을 위한 적용이기 때문이다. 적용도 해석을 위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보편적인 것이 미리 주어져 있어서 그것을 개인의 특수한 상황에 적용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과정을 제시했다.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석자가 자기 자신이 처해 있는 구체적인 해석학적 상황을 도외시할 필요는 없고 오히려 이해를 하고자 한다면 텍스트를 그러한 상황과 관련짓지 않을 수 없다”(가다머, 2012b, 217)고 했다. 이는 적용이 이해와 동시에 작용하는 것이며 텍스트 해석을 위해 해석자의 선이해, 선입견을 적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핵심은 적용에서 해석자의 선입견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21세기 대한민국의 대학생이라는 해석자의 선입견에 의거해서 적용과 이해가 발생한다. 적용은 시간 간격과 지평융합을 통해 더 잘 설명된다. 시간간격을 활용한다는 것은 역사적 상황 속으로 들어가 역사적 지평을 재구성함으로써 전통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역사의식이 역사적 지평 속으로 옮겨간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세계와 상관없는 낯선 세계로 빠져드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는 앞서 적용의 개념을 확장해보면 알 수 있다. 자신의 관점을 다른 상황 속으로 옮겨놓는 것은 현재의 자기 자신을 유지한 채 그 상황 속으로 들어가야만 가능하다(가다머, 2012b, 190). 그러므로 ”서로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이한 지평들의 상호융합 과정”이 이해이다. ”탐구자의 역사의식은 전통과는 구별되는 자신의 타자성을 자각하고 있어서 전통의 지평을 자기 자신의 지평과는 다르게 부각시킬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은 곧 진정한 지평융합은 끊임없이 현재의 이해지평에 의해 충전될 때 이루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가다머, 2012b, 192-193). 가다머는 해석자의 관점보다 이해와 적용을 중심으로 설명했지만 이것을 해석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이해이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학생을 중심에 둔 교육에 활용할 수 있는 여지가 가다머의 이론 안에서도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제 고전 읽기에서의 핵심이라고도 할 읽기 방법에서 가다머가 이야기한 원칙을 확인해보자. 가다머의 이해에서 자주 언급되는 문장 ”전통/텍스트가 말을 걸어온다는 것”은 고전 읽기의 성격을 드러내 주지만 문학 고전 읽기 수업에서 텍스트 파악을 어렵게 생각하는 학생들에게 이 말은 추상적인 의미로 수용된다. 문학 고전의 경우 문해력 이상의 것이 요구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통/텍스트가 말을 걸어오기”를 기대하며 읽으라는 조언은 책 읽기를 비의적인 것으로 만들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이다. 이 말은 첫째 전통이 계몽주의에서 이야기하는 이성과 상반되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 이성을 동원해서 충분히 드러나는 성격의 것이기 때문이다(가다머, 2012b, 160). 둘째 이는 해석자 자신의 신비로운 개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편지를 보내오면 읽듯이 전통이 건네는 내용과 언어, 방식과 관점으로 이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가다머, 2012b, 176-177). 그러니까 과거의 누군가가 나한테 보낸 편지를 읽는 태도가 필요하다. 셋째 고전이라는 텍스트의 시간성 안에 내재한 가치를 인정하면 텍스트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자극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텍스트에 귀 기울이고 집중하면 더 많은 질문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해석자 개인의 선입견이 작용하는데 고전을 만나면 우리의 선입견이 의식되고 자극되기에 고전 텍스트는 더더욱 말을 걸어오게 된다는 것이다(가다머, 2012b, 182). 그러므로 학생들이 스스로 텍스트를 잘 읽고 있는지 아닌지는 질문(자신의 선입견이 작동한 결과로서)이 떠오르는지로 판단할 수 있다. 학생들이 자기 자신에도 집중해야 하는 이유이다. 이제는 가다머 이론에서 시간성을 내재한 고전의 가치 그 이상의 단계를 더 많이 고민해야 하지 않나 싶다. 학생들이 자신의 지평을 적용하여 고전이 건네는 말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 수업에서 좀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3.2. 경험의 보편성
문학의 경우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보다는 좀 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허용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의적일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교수자와 학생 모두에게 문학 고전을 잘 읽을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하다. 교수자는 텍스트의 변함없는 가치를 강조하게 되고 학생들은 자신들의 관점이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 간극이 너무 깊을 때 문학 고전 읽기의 의미가 퇴색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가다머가 이야기한 경험의 보편성이 도움이 된다. 가다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경험에 대한 비유를 들어 주관적이고 일회적인 경험이라도 일단 어떤 대상에 대한 관찰이 반복적 경험으로 확증될 수 있다면 그 관찰은 지속성을 지닐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경험이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사건으로 실현되기 때문에 관찰한다고 해서 규명될 수 있는 성질은 아니지만 경험의 독특한 미결정성으로 인해 하나의 경험은 새로운 경험이 습득될 때까지 유효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특정한 상황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유사한 상황에서 구속력을 지니기에 경험의 보편성을 논할 수 있게 된다(가다머, 2012b, 258-259).
그런데 경험의 보편성 형성 과정은 변증법적이라는 특성을 지닌다. 부정적인 경험은 지금까지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을 더 잘 파악하게 된다는 점에서 생산적 의미를 지니는데 이러한 반복 과정을 거쳐 확증된 경험에 대해 ‘체득했다’고 표현된다. 이후에는 예측하지 못했던 것을 예측할 수 있게 되고 자신의 경험을 자각하게 되는 유경험자가 되어 새로운 경험을 소화할 수 있는 지평을 얻게 된다(가다머, 2012b, 260-261). 이것은 물론 헤겔의 절대지와는 거리가 있는데 경험을 쌓은 사람은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교조적 원칙을 거부하거나 새로운 경험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경험이 통찰로, 자기인식으로 이어질 수 있는 부분이다.
가다머는 고전 텍스트를 통해 타자와 소통하는 경험이 어때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역사의식을 갖고 타자의 타자성을 인식하는 것인데 ”역사의식은 과거의 타자성 속에서 보편적 법칙성이 통용되는 구체적 사례를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일회적인 역사적 사건을 탐색하는 것”(가다머, 2012b, 271)이다. 타자를 인정하면서 자신의 모든 제약은 뛰어넘으려 하는 경향에서 벗어나 자신이 처해 있는 역사적 제약이나 편견을 인정하는 것이 타자와 상호소통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과거를 지배하는 주인이 되고자 하는” 학생들이 빠질 수 있는 오류를 잘 짚어주고 있다. 학생들은 그리스 비극을 읽을 때 자신이 현대인이라는 조건을 우월하게만 인식하여 신의 영향력에 굴복하는 인물들에 대해 무지몽매하다는 관점을 갖기 쉽다. 이렇게 읽는다면 타자를 제대로 이해하고 소통한다고 볼 수 없다. 그리스 비극 전반에는 신탁이라든지, 신의 뜻이 중요하게 작용하는데 그것에 휘둘리거나 극복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주인공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오이디푸스도 예외는 아니다. 가다머는 텍스트 이해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흔한 오류 2가지를 지적했는데 하나는 인간이 취하는 태도에서 전형적인 것을 읽어내고 그것과 같은 방식으로 텍스트 속의 타자를 이해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타자를 인격체로 고려하지만 그럼에도 나의 주관적 관심사로 타자에 대한 이해를 귀속시키는 방식이다(가다머, 2012b, 268-270). 전자는 교과서적으로 접근하여 객관적인 것 같지만 피상적인 이해에 머물게 되고 후자는 구체적으로 접근하지만 주관적 이해에 머물게 된다. 앞장에서 간명하게 제시된 ”고전이 말 걸어오는 것”을 잘 듣는 일이 간단하지 않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읽기 과정 중에 이러한 시행착오가 발생하는 일이 자연스럽기도 하다. 다만 학생들이 현대인으로서 과거에 대한 거리두기를 간편하게 해버릴 경우 텍스트가 말하는 것도 듣지 못하고 융합지평으로 나아가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이 문제를 조금 더 논의해 보겠다.
‘오이디푸스 왕’을 읽고 학생들은 오이디푸스의 정체성을 범죄자로 인식하기도 한다. 어쨌든 살인을 했기 때문이다. 친부임을 몰랐다고 하더라도 누군가를 살해하는 것은 죄라는 관점이 반영되었다. 법적인 측면이 중요해진 현대인이 지닐 수 있는 선입견이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가다머의 원칙은 이러한 선입견의 작용을 인정한다. 요즘 대학생들은 잘못을 저지르고도 음주 등의 심신 미약이 작용하여 처벌이 약화되는 문제를 사회적으로 예민하게 바라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선입견까지 가세하게 되면 오이디푸스에 공감하고 그 다음 질문을 하기보다 거리를 두고 나와는 관련 없는 인물로 치부해버린다. 가다머는 이 선입견으로 인해 하버마스의 공격을 받았는데 인종차별과 같은 것도 개인의 선입견으로 인정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다머의 관점에서 인종차별은 선입견이 아니라 판단이다. 해석학적 차원에서 선입견은 이해의 기반이자 출발점으로 인정한다는 것이지 의식의 차원으로 넘어온 잘못된 판단까지 포괄하는 것은 아니다(최고원, 2009, 397-398). 그러니까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선입견이고 의식할 수 있는 것은 편견이라는 것인데 모든 편견이 의식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물론 학생들이 오이디푸스의 정체성을 범죄자로 인식하는 경우는 편견이라기보다 선입견으로 볼 수 있기에 텍스트가 하는 말과 자신의 선입견을 대립시켜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페미니즘적 관점이 중요한 학생의 경우에도 선입견이 작용할 수 있다. 이오카스테를 더 중요하게 볼 수 있지만 오이디푸스를 민폐 캐릭터로 규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도록 하는 질문들이 필요하다. 여기서 핵심은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이다. 교수자의 역할은 학생이 그 질문을 지속할 수 있는지를 자극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질문의 주도권자는 학생이고 발전시킬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도 학생이다. 물론 그에 따른 결과물도 제각각이다.1)
3.3. 질문을 통한 대화 방식
가다머는 질문을 통한 대화가 해석학의 과제를 잘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했다. 문자로 고정된 문헌 분석보다 대화적 의사소통 과정을 분석하는 것이 해석학의 본분에 충실하다는 입장은 이를 잘 드러내준다. 실제로 여러 대학의 고전 읽기 수업에서 이는 중요한 수업방법으로 채택되어 있다. 그런데 가다머도 지적했듯이 교수자가 던지는 질문에서 개방성이 결여된 가짜 문제의식을 지닌 질문을 하게 될 가능성이 많다는 점이다. 물론 학생들도 가짜 문제의식에서 질문을 할 수 있지만 교수자의 질문은 수업의 방향을 잘못 이끌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한다. 이것은 교수자의 역할이 오해될 소지도 담고 있다. 가다머는 제대로 된 대화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플라톤의 대화편에 나오는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적 대화를 언급하는데 이러한 대화를 통해 밝혀지는 진실은 나의 것도 아니고 상대방의 것도 아닌 로고스라고 했다. 대화 당사자들의 주관적 의견은 끝까지 극복되어야 하며 대화를 이끌어가는 사람조차도 시종 해답을 모르는 사람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가다머, 2012b, 282-283). 이는 소크라테스한테도 해당되는 말이다.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대화방식을 그동안 오해해왔던 지점이 있지 않나 되돌아보게 된다. 가다머에 의하면 무지를 깨닫게 해주는 방법으로의 소크라테스식 대화의 핵심은 대화 자체에 있는 것이지 정답을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교수자)의 주도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해석할 수 있다. 물론 교수자에게는 전체적인 맥락을 볼 줄 아는 대화의 기술이 필요하지만 그것이 정답을 갖고 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교수자는 평가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대화를 이끄는 과정에서 정답을 갖고 한 방향으로 이끌면서 이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을 통해 작품을 이해한 정도를 가늠하게 된다. 이러한 행위가 학생들의 이해 정도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교수자가 설정한 정답의 방향에서 벗어났다고 무조건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학생의 문제의식이 돋보인다면 수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정당성 때문에 교수자의 질문이 학생의 무지를 공격하는데 사용될 가능성, 질문의 개방성을 닫아둘 가능성이 커진다는 점이다. 가다머는 교수자의 지평도 완결된 것이 아니라는 관점이기 때문에 지평융합을 위한 교수자의 열린 태도가 기본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에서 가다머 이론을 보수적으로 적용할 위험성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질문의 개방성에 한계는 없는가? 앞에서 언급한 가짜 문제의식을 갖지 않기 위해서도 분명 기준이 필요하다. 그런데 가다머가 제시한 기준은 다시 텍스트로 돌아간다. ”질문의 개방성은 문제지평에 의해 그 경계가 분명하게 설정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문제제기의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기준은 미지의 영역으로 열려 있는 진정한 문제의식을 제대로 짚어내는가 여부에 있다”(가다머, 2012b, 276)는 말은 기준을 제시한다기보다 다시 원점으로 돌려놓는 역할을 한다. 이는 3.1에서 논의했던 부분, 학생들이 고전을 읽고 질문이 생성되는지의 문제와 관련된다. 정리하자면 고전이 말을 건넨다는 것은 고전이 질문을 한다는 것이고 해석자가 그 질문을 이해한다는 것은 텍스트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고전이 던지는 질문을 이해한다는 것은 해석학적 지평을 획득함으로써(해석자의 선입견 혹은 개인적 지평과 텍스트의 시간성이 만든 지평이 함께 상호작용한 결과)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 해석학적 지평을 문제지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해석학적 지평이 잘 작동하기만 하면 기술적인 대화의 방법이나 기술은 필요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출발점이 되는 것은 텍스트가 해석자에게 던지는 질문이다”라는 말이 이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다. 이는 현대적이고 직관적인 방법이지만 원칙적이기도 하다.
가다머는 콜링우드의 논의를 가져와 일반적인 교육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한다. 1차적으로 텍스트가 답하는 물음을 이해하고 그 다음으로 텍스트의 답변이 적절한가를 검토하여 질문을 재구성하는 것이다(가다머, 2012b, 286). 이는 분석적으로 읽고 비판적으로 읽는 보편적 읽기 방법론으로 볼 수도 있다. 가다머는 텍스트의 의미를 저자의 의도에 가두면 안 된다면서 텍스트 자체의 의미를 탐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이러한 강조는 텍스트를 선입견이나 지평이 작동하는 곳으로 인식하기 때문이기에 제한성보다는 개방성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텍스트에 집중하라는 것은 해석자 자신의 지평을 적용하여 지속적으로 텍스트와 대화하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텍스트의 답변을 의심하는 것도 포함된다. 오이디푸스에 대한 이해에서 학생의 선입견이 조정될 수 있는 질문들을 생각해보자. 오이디푸스를 범죄자로만 단죄하고 마는 경우 학생들은 질문이 별로 없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므로 오이디푸스를 범죄자라고 여겨도 여기서 그치지 말고 어떤 범죄자인지에 대해 다시 질문하고 답변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과정에서 엉뚱한 곳으로 빠지는 학생도 있지만 적어도 단순화의 문제는 피할 수 있다. 또 많은 학생들이 다른 학생들의 의견을 통해 자극을 받고 자신의 관점을 수정하면서 답을 찾기도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 문제의식을 갖고 지속적으로 질문하는가가 관건이다.
4. 주체적 읽기에 대한 랑시에르의 관점
실천적 부분에서 가다머의 방법만으로 한계가 있는 부분을 랑시에르한테 찾아서 적용해 보고자 하지만 랑시에르의 방법은 교수학습방법이 아니라 정치적 실천이라는 점에서 교육적 적용에 한계가 있다(강성훈, 2013; 박주원, 2024). 『무지한 스승』에서 랑시에르는 바보 만들기 교육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보편적 교육을 강조했지만 보편적 가르침의 창시자 자코토가 이미 보편적 가르침이 뿌리내리지 못할 것을 예측했노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보편적 가르침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도 이야기한다(랑시에르, 2015, 256). 그러므로 제도권 교육 안에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식하면서 그럼에도 적용 가능한 측면을 모색하고자 한다. 무척 모순적으로 보이는 상황이지만 바보 만드는 자들의 학교에서도 배움이 가능한 것은 선생이 관찰하고 모방하고 해부할 수 있는 하나의 사물이자 재료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한 인간만이 한 인간을 해방할 수 있고 오로지 개인만이 이성적일 수 있다”(랑시에르, 2015, 191)는 랑시에르의 관점을 적용하자면 교수자 개인의 역할은 중요하다. 문학 고전 읽기 교육에서 학생을 보편적 학습능력을 지닌 평등한 존재로 볼 때 어떤 가능성들이 탐색될 수 있고 그것의 효과가 무엇인지가 구체적인 탐색 내용이 될 것이다. 랑시에르가 중요하게 여긴 것도 이러한 다양한 실험을 통해 평등의 전제가 잘 수행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박찬영, 2021, 38).
그리스 비극 읽기 수업에서 첫 작품인 ‘아가멤논’을 예로 들어보겠다. 작품을 읽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독서과제를 내 주고 수업 시간에 교수자는 학생들의 답변을 서로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한다. 교수자가 학생들이 작품을 잘 읽었는지 확인하는 의미가 1차적이지만 스스로 어떤 기준을 갖고 읽으면 되는지를 확인하는 의미가 더 크다. 텍스트가 제기하는 문제를 파악하기 위해 1)객관적인 사건의 이해 2)작가가 주인공과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이해 3)코러스가 주인공과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이해 4)독자인 내가 주인공과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이해가 독서과제의 질문에 해당한다. 2)와 3)을 잘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작품의 어떤 부분을 자세히 읽고 발견한 것을 묻는 질문이 중간에 추가된다. 그렇지만 2)와 3)의 답변은 다양할 수 있다. 다만 학생이 비교적 일관성 있게 사건과 인물을 파악하려고 하는지가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통해 읽기의 방향, 독자인 내가 어떻게 이 사건과 인물을 판단하는지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한다. 이는 단지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허용하는 것과는 다르다(박찬영, 2021, 38). 학생 스스로가 기준을 마련해 갈 수 있고 그것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분명하다. 물론 기준을 일관되게 적용한 답이 모두 만족스러운 이해와 해석이라고 할 수 없다. 작품이 복잡한데 단순화할 우려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교수자가 세운 기준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 스스로가 기준을 세워 탐색할 수 있도록 한다는 데 있다. 이것은 답 비슷한 것을 맞추고 아니고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학생들의 답변을 통해 스스로의 답변에 대해 다른 문제제기를 할 수도 있고 정당화를 위해 다른 자료를 찾아볼 수도 있게 한다. 가다머의 관점에서도 고전이 건네는 질문을 자신의 삶의 지평으로 이해하고 다시 질문하는 과정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인데 랑시에르의 관점에서도 학생들 스스로가 찾아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학생들의 질문을 만드는 태도를 변화시킨다. 랑시에르를 교수법에 적극적으로 반영하기 전에는 작품 해석에서 극단의 해석만 피해가면 된다고 학생들에게 주문했다. 용인할 수 있는 해석의 스펙트럼으로 해석의 방향을 넓게 제시한 셈이다. 이 경우에 학생들이 안이하게 작품을 읽고 해석하는 경향도 없지 않아서 학생이 자신의 기준을 세워나가는 방식에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학생이 자신의 기준을 세워나가는 방식에 재미를 붙이지 못했다. 또한 이 수업의 목표가 학생들 스스로가 책을 읽고 자신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수자가 제시한 의견도 하나의 의견일 뿐이지만 학생은 여러 사람들의 중요한 질문이나 의견에 대해 판단하고 자기 질문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수용할 필요는 없지만 경청하고 자신의 질문을 다시 따져봐야 한다. 그런데 이것을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에 교수자는 정답 비슷한 범주를 넓게 두고 허용하는 것에 그치게 되기 쉽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학생들 스스로의 읽기와 이해를 통한 통찰력 향상의 과정을 지지하고 응원할 수 없게 된다. 랑시에르는 교육적 측면에서 통찰력의 향상 같은 부분에 큰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주장하는 정치성은 감각의 재분할에 기여하며 정치적인 주체로서 목소리를 내는 것이기에(랑시에르, 2008, 2016, 85) 랑시에르적인 교육에서도 통찰력은 의미있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 문학이해에서 주관적 보편성을 하나로 개념화하기 어렵지만 가다머는 이러한 측면을 모두가 알다시피 강조했고 랑시에르의 보편교육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가다머가 통찰을 중요하게 여겼고 랑시에르는 통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입장이다. 이는 소크라테스와 그리스 비극에 대한 두 철학자의 견해 차이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랑시에르는 소크라테스를 비판했는데 ”소크라테스 그 ‘무지한’ 자는 스스로가 재판정의 웅변가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고 세상의 무분별에 동의했다” 소크라테스는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 같은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들처럼 델포이 신탁을 믿었고 신이 그에게 개인적인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여겼고 그것을 동력으로 자신을 밀고한 아니토스와 멜레토스 같은 사람들을 이겼지만 사회를 바꾸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광장에서 이긴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다(랑시에르, 2015, 181). 가다머가 중요하게 여긴 통찰 개념에 의하면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저주를 벗어나기 위한 여러 노력에도 비극을 겪고 두 눈을 잃고 비로소 얻게 된 지혜가 통찰이라고 할 수 있는데 랑시에르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랑시에르는 소크라테스의 대화법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소크라테스는 지도하기 위해 질문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랑시에르가 비판하는 ‘설명자’에 가깝기 때문이다. 랑시에르도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이 진전된 형태의 것임을 인정하지만 바람직한 형태의 대화라도 해방하지 않는다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소크라테스의 방법은 예상치도 못한 목적지로 안내한 길잡이에 대한 감탄을 자아내고 정작 학생의 정신을 바보로 만든다는 점에서는 동일하기 때문이다(랑시에르, 2015, 64-65, 119).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소크라테스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가장 훌륭한 대화방법도 학생의 주체성을 억압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는 랑시에르가 주장하는 ‘해방하는 교육’이 제도권 교육에서 어렵다는 점을 확인하는 역할도 하지만 학생의 주체성 실현을 위한 교수자의 시각이 중요하다는 점을 말해준다.
앞에서 언급한 오이디푸스 왕에 대한 해석에서 가다머 방식의 지평을 넓히는 질문을 살펴봤는데 랑시에르 방식으로 접근한다면 또 어떨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는 아이스퀼로스의 아가멤논과 다른 캐릭터이지만 국가 지도자의 비극이란 점에서 함께 살펴볼 수 있는 측면을 설정하여 두 인물을 비교하고 오이디푸스가 지닌 한계를 지적했다는 점에서 학생 스스로의 질문을 발전시켜 나간 사례에 해당한다. 학생들은 오이디푸스가 잘못을 저질렀지만 스스로 책임지는 행위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국가 지도자로서 책임감 있는 행동을 한다는 것은 미덕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오이디푸스의 과도한 자신감은 공동체의 위기를 불러왔다는 점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된다. 아가멤논이 왕으로서 전쟁에서 승리하여 책임을 다하고자 했지만 윤리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였듯이 오이디푸스도 자기처벌이라는 행위를 통해 책임을 다 했지만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랑시에르가 이야기하는 학생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교육의 함의는 넓다. 이 논문에서 오이디푸스에 대한 학생의 해석 사례 하나로 랑시에르의 방식이 적용되었다고 말하기 힘들 것이다. 그렇지만 오이디푸스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을 유지하면서 수정해 온 과정은 학생 스스로의 질문을 통한 주체적인 행위로 파악된다. 오이디푸스에 비판적이었다가 다른 학생들의 긍정적 의견을 통해 급격히 수정된 것이 아니라 아가멤논에 대한 긍정적 판단이 비판을 받자 이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오이디푸스와 비교하면서 자신의 논점을 재정립하는 고민의 절차가 있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무지한 스승』에서 자코토가 프랑스어를 모르는 학생들에게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대역판을 사용해서 프랑스어 텍스트를 익히라고 한 것과 같은 수준은 아니지만 그 과정에서 학생들이 비교하면서 터득하게 된 방법은 비슷하다. 교수자는 독서과제와 개별 작품 발표, 기말 에세이의 결과물 속에서 학생의 생각 변화를 파악할 수 있었기에 이러한 추적이 가능했다. 물론 외부 자극도 작용했다. 2024년 12월 대통령의 계엄포고라는 사건이 그리스 시대의 인물에 국한되지 않는 정치 리더에 대한 고민을 하게 했다는 점을 발표에서 드러냈다는 점에서 21세기 대한민국 대학생이라는 선입관, 가다머의 지평이 보다 눈에 띄게 작용한 점도 인정된다.
5. 결론
이 연구의 핵심은 문학 고전 읽기 교육에서 시도해 볼 필요가 있는 교수학습법으로 전통적이고 기본적인 읽기 교육과 학습자 중심 교육의 이중 과제를 철학적 관점을 적용하여 지혜를 구하고자 했다. 문학 고전 읽기 교육에서 제기되는 질문을 두 철학자의 관점에서 답해보고자 한 것이다. 가다머가 고전을 더 강조하기는 하지만 가다머와 랑시에르 모두 예술과 문학이 중요한 학습 자료가 된다는 점을 그들의 예술관을 통해 피력한 바 있다는 점에서 출발점을 삼았다. 물론 가다머와 랑시에르는 서로 다른 철학적 기반을 가지고 있어서 차이점도 크다. 그러나 전통적 문학 읽기 교육의 장점과 학생 중심의 주체적 읽기의 요구를 해결하기 위해 두 철학자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모두 유용하다. 전통적 문학 읽기 교육을 위해서 가다머의 이론을 자세히 살폈는데 현재에도 유용한 참조점을 제공해준다는 점 외에 가다머의 이론을 보수적으로 해석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도 탐색할 수 있었다. 가다머는 텍스트를 중요하게 여기는 측면이 있지만 지평융합을 더 의미 있게 보자면 학생의 선입견이나 지평을 확장하는 방안을 강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생의 역할에 대해서는 랑시에르의 관점이 매우 진취적이다. 실제로 문학 고전 읽기 수업의 목표와 수업 방식에서 랑시에르의 관점이 적용되어 있긴 하다. 단국대학교 공통교양과목 <명저읽기> 수업의 목표를 보면 ”이 교과목은 텍스트를 읽은 교수자가 텍스트를 읽지 않은 학습자에게 텍스트의 의미를 일방적으로 강의하는 강독 강좌가 아니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또한 교수자가 전공자가 아니어도 된다는 전제가 작동한다. 이는 단지 전공 교수자를 모시기 어려운 현실적 한계 때문이 아니라 교과목의 특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실제로 현대문학 전공자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가지고 수업하기도 한다. ‘우리가 모르는 것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 랑시에르가 주장한 보편 교육의 핵심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랑시에르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실제로 구현하는 문제는 또 다른 차원의 것이 된다. 모든 수업에서 교수자가 무지한 스승의 역할을 자처하기 어렵고 교수자가 전공과 무관한 내용의 책을 다룬다고 해도 여전히 권위를 드러낼 가능성은 존재한다. 교수자가 의식적으로 권위를 배제하는 노력을 한다고 해도 그렇다.
랑시에르의 진취적이고 정치적인 함의를 온전히 구현하는 일은 어렵지만 학생 스스로가 자신의 주체적 읽기를 텍스트 안에서 해 나갈 수 있도록 하는 측면에서는 일정한 성과가 있었다고 판단된다. 문제는 이것이 얼마나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느냐가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첫 작품 ‘아가멤논’에서의 주체적 읽기 경험은 많은 학생들에게 새로운 태도를 갖고 질문을 하게 했는데 이것이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한 경우와 단편적으로 작용한 경우의 차이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References
Notes
오이디푸스를 범죄자로 정리하고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 학생은 두 부류로 나뉘는데 과제 점수를 얻기 위한 학생과 이 질문이 오이디푸스한테 적절하지 않다는 판단이 들어서 방향을 바꾼 학생이다. 후자의 경우는 나름대로 성과가 있다. 그러나 이 연구에서는 처음 질문을 지속적으로 바꿔가며 고민한 학생이 얻을 수 있는 성과가 학생의 주체적 측면이 잘 드러난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와 관련된 사례는 4장에서 언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