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교육 이념으로서 행복

Happiness as the Ideal of Liberal Education

Article information

Korean J General Edu. 2025;19(1):221-235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5 February 28
doi : https://doi.org/10.46392/kjge.2025.19.1.221
박선균
전 한국외국어대학교 미네르바교양대학, 강사, sunkyoon@hanmail.net
Former Lecturer, Hankuk University of Foreign Studies
이 논문은 2022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22S1 A5B5A17038150)
Received 2025 January 27; Revised 2025 February 11; Accepted 2025 February 17.

Abstract

2000년대 초부터 대학의 교양교육 과정이 대대적으로 개편되면서 학교마다 교양교육의 목표를 다양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 목표의 내용을 살펴보면 결국 지적 능력(지성)과 인성의 함양으로 수렴되는데, 본 연구는 이 두 측면이 교육의 최종목표가 아니라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 필요한 선결조건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행복이 마땅히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하고 행복의 정의와 조건에 대한 여러 논의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기원하는 ‘행복’(eudaimonia) 개념이 교양교육 이념으로서 최종의 교육목표에 가장 부합하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한다. 이에 본 연구에서 먼저 기존의 교양교육의 목표를 검토하고 지성과 인성과 관련하여 교양교육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살펴본다. 그 다음에 교양교육 역사에서 ‘교양’(Bildung) 개념의 성립과 관련, 자연스럽게 접목하는 ‘인문학’과의 관계를 규명하고 인문학의 어원인 ‘인간다움’(humanitas) 이 ‘다른 사람과 함께 잘 삶’을 전제하고 있어 결국 교양교육의 목표는 ‘행복’이라는 것을 밝히려고 한다.

Trans Abstract

Since the early 2000s, liberal education curricula at universities have undergone significant reforms, with each institution presenting diverse objectives for liberal education. Upon examining these objectives, they ultimately converge on the cultivation of intellectual ability (intellect) and character. However, this study posits that these two aspects are not the ultimate goals of education but rather prerequisites necessary for living a happy life. Therefore, happiness should rightfully take precedence as the primary objective, and among various discussions on the definition and conditions of happiness, the concept of eudaimonia, originating from ancient Greek philosophy—particularly Aristotle—best aligns with the final educational goal of liberal education. To substantiate this argument, this study first reviews the existing objectives of liberal education and explores the perspectives of Plato and Aristotle, who can be regarded as the intellectual foundations of liberal education, particularly concerning intellect and character. Next, it examines the historical development of the concept of Bildung in liberal education and its natural connection to the humanities. Given that the etymology of the humanities (humanitas) presupposes ”living well together with others,” this study ultimately aims to demonstrate that the true goal of liberal education is happiness.

1. 머리말

2000년대 초부터 대학의 교양교육 과정이 대대적으로 개편되면서 학교마다 교양교육의 목표를 다양하게 제시하고 있다(손동현, 2019, pp. 277-310). 이 목표의 내용을 살펴보면 결국 지적 능력(지성)1,)과 인성의 함양으로 수렴되는데, 본 연구는 이 두 측면이 교육의 최종목표가 아니라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 필요한 선결조건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행복이 마땅히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하고 행복의 정의와 조건에 대한 여러 논의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기원하는 ‘행복’(eudaimonia)2) 개념이 교양교육 이념으로서 최종의 교육목표에 가장 부합하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한다.

새로운 교양교육 과정이 개설되면서 강의의 취지와 목표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가 제시되지만 서술의 특성상 정당성이나 세부사항의 관계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러기 때문에 수업의 방향과 지향점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여 불필요한 혼란이 발생하기도 한다.3), 따라서 교양교육이 지향하는 이념과 관련된 쟁점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이에 본 연구에서 먼저 기존의 교양교육의 목표를 검토하고 지성과 인성과 관련하여 교양교육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살펴본다. 그 다음에 교양교육 역사에서 ‘교양’ (Bildung) 개념의 성립과 관련, 자연스럽게 접목하는 ‘인문학’과의 관계를 규명하고 인문학의 어원인 ‘인간다움’ (humanitas) 이 ‘다른 사람과 함께 잘 삶’을 전제하고 있어 결국 교양교육의 목표는 ‘행복’이라는 것을 밝히려고 한다. 이에 이런 입장의 근거를 플라톤의 『국가』, 『법률』, 『필레보스』4),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하 EN으로 약칭), 『정치학』5), 등에서 찾아 일시적인 주관적 만족 상태로 오해받는 통상적인 행복과 구별되는 ‘탁월성’(aretē)6),이 실현되는 ‘좋은 삶’으로서 ‘행복’이 교양교육 이념으로 타당하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다.7)

연구주제와 관련하여 기존의 많은 연구들이 있다. 교양교육의 개념과 역사에 관해서는 홈볼트(Humboldt)를 중심으로 한 독일전통을 다룬 연구(서정일, 2019; 이기흥 2012)와 프랑스 교양교육의 역사적 변천과 현황에 대한 연구(이기라, 2015)를 참고하여 양쪽의 차이를 비교할 수 있다. 손종현(2020)은 대학의 이념과 교양교육을 연계하여 뉴먼(Newman)의 입장을 정리한다. 이 연구에서는 교양교육의 역량 중심 교육과정이 오히려 교양교육의 정체성을 혼란시키기 때문에 대학 본래의 이념에 따라 지성인의 마음을 계발(mental cultivation)하여 인성을 도야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본 연구의 방향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데, 다른 점은 본 연구는 지적 역량교육이 인성의 함양을 위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김민수(2014)는 인성의 ‘인간다움’이 ‘습관’(ethos)에서 유래한다면서 칸트의 ‘상상력’(Einbildungskraft)이 인성의 선험적(a priori) 근거라고 주장한다. 한편 문동규(2017)는 교양교육의 지향점으로서 ‘인간다움’이 그리스에서 로마로 이어지는 전통적 사유보다는 하이데거의 본래적 현존재(Dasein)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 이 두 연구는 ‘인간다움’을 각각 칸트와 하이데거에 연결한 흥미로운 연구라 할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이 부분까지 다룰 수 없었지만 둘을 같이 보면 독일의 대표적 근현대 철학자들의 입장을 비교하는데 도움이 될 듯하다. 동양철학에서도 인간다움을 본격적으로 다룬 단행물이 있는데, 신정근(2005)은 인(仁)의 역사와 문화를 아우르는 결과물을 낸다. 이 저작에서 중국 유가의 ‘인간다움’을 살펴볼 수 있다. 인문학(humanitas)과 자유교양학문(artes liberales)이 역사적으로 로마에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분석한 논문이 있다(안재원, 2010, 2015). 같은 맥락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이창우(2009)의 연구가 있는데, 본 연구에서는 이 둘을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적 맥락을 이끌어주는 준거로 사용할 것이다. 한편, 손병석(2017), 전헌상(2018), 장미성(2019)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과 ‘외적 좋음’의 관계를 다룬다. 특히 장미성은 위작 논란이 아직 끝나지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대논리학』(Magna Moralia)에서 근거를 확보하여 행복이란 ”영혼의 좋음(덕), 몸의 좋음(건강, 외모 등), 그리고 외적 좋음인 돈이나 권력, 가문 등을 모두 포함한 것으로 이는 인간적인 좋음과 동시에 공동체가 향해야 할 목표(장미성, 2019, p. 186)”라고 주장한다. 이는 행복의 ‘자족성’(autarkeia)과 관련하여 쟁점이 되는 부분인데, 이런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행복의 구성요소 간의 관계를 밝히는 일 또한 의미 있는 탐구 과제가 될 것이다.8)

2. 교양교육의 목표로서 지성과 인성의 역할

대학이 교양교육의 목표를 세우는 데 지침이 될 수 있는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대학교육협의회

교양교육의 목표는 성숙한 인격체가 지녀야 할 품성, 세계시민으로서의 소양, 정보화 사회에 요청되는 판단력과 도덕성 등을 지향해야 한다. 나아가서 교양교육은 제반 학문분야에 대한 지적인 호기심을 일깨우고 자기 표현력과 의사소통능력 등을 계발시킬 수 있어야 한다.

- 한국교양기초교육원

교양교육이란 올바른 세계관과 건전한 가치관을 바탕으로 세계화된 새로운 정보사회에서 비판적 창의적 사고와 원활하고 개방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공동체적 문화적 삶을 자율적으로 주도할 수 있는 주체적인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함양하기 위한 것으로서, 학업분야의 다양성을 넘어서서 모든 학생들에게 동질적인 내용을 교수하는 교육이다. (손동현, 2019, pp. 47-48)

대학교육협의회에서 제시한 교양교육의 목표는 한쪽으로 품성, 소양, 도덕성, 다른 쪽으로는 판단력, 표현력, 의사소통능력의 향상에 있다. 한국교양기초교육원의 목표 역시 세계관과 가치관, 그리고 비판적 창의적 사고, 의사소통능력, 리더십 역량의 함양에 있다. 결국 표현의 차이가 약간 있지만 지성과 인성을 키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좀 다르다. 삶이 주어진 조건과 환경에서 감각과 사유를 통해 상황을 인지하고 반응하는 인과적 과정의 반복이라면 삶의 주체로서 인간은 자신이 의도한 방향으로 결과가 이루어지길 바란다. 구체적 상황에 따라 바라는 정도가 다르겠지만 생명체로서 생존과 안녕, 감성적인 존재로서 아름다움과 정서, 인간으로서 존엄과 명예와 같은 보편적 가치를 지향한다. 그런데 이 모든 가치를 아우를 수 있는 개념을 행복이라 지칭할 수 있고 교양교육에서 의도하는 지성과 인성은 궁극적으로 이러한 행복이라는 최종목표를 이루기 위한 요건이 된다. 그러기 때문에 교양교육이 이루어지는 실제 이유가 행복이라는 주장을 제고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인 맥락에서 대학 교양교육은 소피스트의 일반교육과 함께 자유교육으로부터 기원하며 이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뿌리를 두고 있다(이창우, 2009, pp. 45-46).9,) 플라톤의 교육은 ”영혼을 빚는(plattein) 과정(플라톤, 『국가』, 377c)”인데, 이는 무지한 자들을 깨우치게 하여 새로운 진리를 파악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데 있다. 이는 지성(nous)의 작용이라 할 수 있는 지적 직관(noēsis)이 ‘실재’(to on)에 접근하여 가능하다(490a-b).10) 그리고 이렇게 지성과 실재와 일치하는 진리현상에서 알게 되는 ”가장 중요한(최고의) 배움이 ‘좋음의 이데아’이다(505a).” 그런데 여기서 교육방식은 지식(epistēmē)을 알려주는 방식이 아니라 지성을 ‘좋음’으로 이끌어 마주치게 하는 방식이다(518b-d). 그러나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진리를 알고 난 다음에는 몽매한 사람에게 자신이 알게 된 진실을 알려 무지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519d). 이는 지성이 그 자체로 완결되는 개념이 아니라 행위를 유도하여 한 사람의 인성을 평가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그리고 지성은 사회적 합의를 거쳐 집단지성으로 변모하여 모두를 행복으로 이끄는 실천의지가 된다. 이는 법(nomos)으로 구체화되어 좋음의 이데아는 법의 정신이 된다. 이렇게 ”법은 나라에서 어느 한 부류가 각별하게 잘 지내도록(살도록) 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게 아니라, 온 나라 안에 이것이 실현되도록 강구하는 데 관심이 있다(519e).” 이것은 좋음이 공동체 구성원 전체에게 고르게 실현되는 정의를 뜻한다. 정의는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면서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분배하는 원칙이며 개인의 인성으로 내면화되어 사회성, 법으로 제도화되어 시민권이 된다. 바로 이런 ”법은 옳으며, 이를 따르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한다. 그것은 모든 좋은 것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플라톤, 『법률』, 631b).” 결국 지성과 인성은 행복을 위한 사회적 시스템을 만드는 기능이 된다.

그런데 이런 지성과 인성을 키우는 교육이 소수의 엘리트 계층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국가』와 달리 『법률』에서는 ”정의롭게 다스리고 다스림 받을 줄 아는 완전한 시민이 되려고 하는 욕구와 사랑을 가진 자로 만드는 덕의 교육(643e)”을 내세운다. 그러기 때문에 ”돈이나 육체적인 힘을 지향하거나, 또는 지성과 정의를 겸비하지 않은 다른 종류의 어떤 지혜를 지향하는 양육은 천박하고 자유인에게 어울리지 않으며, 따라서 ‘교육’이라고 말할 가치가 전혀 없다(644a).” 그러므로 교육을 통해 감성적인 부분이 잘 조절되고 이성을 가진 후, 적절한 습관들에 의해 올바르게 절제된 감정과 이성이 조화(symphōnia)를 이루면서 온전한 덕이 이루어진다(653b-c). 그리하여 교육은 지성과 더불어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시민의 품성을 갖추는 것을 지향한다.

이런 플라톤의 교육은 시기별로 감정을 다루는 교육을 거쳐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지성교육으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습관으로 조절된 감정이 내면화되어 자아가 되고 반성능력을 통해 스스로의 행동양식을 정당화할 때, 이성과 감정은 괴리감 없이 일치한다. 이런 양심적인 상태가 행위로 옮겨지면 정의가 된다. 그런데 이런 덕 교육은 사회 구성원 전체가 조화롭게 행복하기 위한 최종목표에 이르기 위함이다. 이는 ”국가의 존재 이유가 특정 집단의 안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시민 전체의 행복에 있다(『국가』, 420b).”는 입장과 맥을 같이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입장에서 교육(paideia)은 인간에게 내재된 고유한 본성의 가능성을 최대한 끌어내어 현실화시키는 것이다. 즉 인간에게만 잠재되어 있는 탁월성(aretē)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교육에서 습관(ethos)과 이성(logos)11),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탁월성은 양면성이 있어서 습관에 따라 더 나쁘게도, 더 좋게도 바뀔 수 있다. 다른 동물들은 대개 본능대로 살고, 그 가운데 소수는 습관에 따라 산다. 그러나 사람은 이성의 통제 아래 살아간다. 사람만이 이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성적 사유를 통해 더 낫겠다 싶으면 습관과 본능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수 있다. 인간은 때로 습관을 통해 배우지만 또 다른 경우에는 교육을 통해 배우기 때문이다(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1332a38-1332b11).” 결국 좋은 습관을 들이는 이성적 사유가 필요하며 이를 위한 인간의 본성이 교육대상이 된다. 달리 말하면 인간의 본성은 최소한의 생명유지를 위해 필요한 식물과 같은 기본적인 특성, 자신의 본능이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위를 하는 동물적인 본성, 자신의 행위의 결과를 예측하고 행동하는 이성으로 나눠진다. 그리고 이런 본성들을 조절하고 제어하면서 최고의 판단과 행위를 이끄는 품성이 탁월성인데, 이는 습관을 통해 얻어지는 성격적 탁월성과 배움을 통해 익히는 지적 탁월성으로 구분된다.12) 그런데 행복하기 위해서는 지적 탁월성을 통해 실천적 지혜의 합리적 선택 능력(prohairesis)이 발휘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지성이 행위로 옮겨지면서 ”성격적 탁월성은 합리적 선택과 연루된 품성상태가 된다(EN, 1139a22).” 즉 지성과 인성이 결합된 영혼의 상태/성향(hexis)이 현실에서 행위로 실현되어 입증되면서 행복한 삶의 토대가 된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도 플라톤처럼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인간의 역할을 비중 있게 고려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나 개인으로서나 분명 같은 목표를 추구한다. 따라서 최선의 인간이 추구하는 목표는 최선의 정체의 목표와 같을 수밖에 없다(『정치학』, 1334a11).” 이런 목표 역시 이성이 인간의 다른 본성들을 제어하여 탁월성으로 발휘될 때, 인간다움이 돋보이면서 가능하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의식과 배려와 같은 삶의 지침이 공공영역에서의 행위를 이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바로 시민으로서 갖춰야 할 소양으로서 교육이 지향하는 행복의 전제조건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잘 지배하고 동시에 제대로 지배받는 자유인의 덕목을 얘기한다. 지배받을 때의 미덕은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공동체의 안정(sōtrēia)에 기여한다. 국가의 성립 근거가 전체 구성원의 행복을 위한 것이고 이를 위한 정체의 유지는 구성원 모두가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때 가능하다. 그러나 지배할 때는 올바른 정책을 기획하여 실행하는 지혜(phronēsis)와 함께 남을 다스리는 책임을 가진 자로서 또 다른 막중한 도덕성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통치행위는 피지배자의 입장을 이해하고 배려해야하기 때문이다. 지배자 고유의 용기(andreia)와 절제(sōphrosynē) 그리고 정의(dikaiosynē)는 피지배자의 역할로서 드러나는 방식과 다르다 할지라도 훌륭한 인간이면 누구나 지녀야 할 공통적인 탁월성이다(1276b16-1277b29). 그리하여 정치가를 통해 지혜와 인간다움이 국가정책에 반영되고 행복을 위한 프로젝트가 완성된다. 그래서 개인으로서의 인간다움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시민다움, 정치가의 지혜, 그리고 국가의 정체는 행복이라는 하나의 이념으로 수렴된다.

이렇게 볼 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성과 인성은 개인의 고유한 역할에 맞게 지혜, 용기, 절제와 같은 덕(탁월성)으로 실현되고 공동체에 요구되는 정의를 법의 형식으로 제도화하여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3. 교양과 인간다움

교양의 어원을 추적함으로써 교양 개념의 기원과 성립배경을 알아보기 전에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교양의 뜻을 새겨보자. 보통 어떤 사람의 말과 행동으로 그 사람이 교양이 있는지 없는지 판단한다. 예를 들어 말을 할 때 비속어를 사용하거나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전화통화를 하는 행위는 ”교양이 없다”고 얘기할 수 있다. 이는 불쾌감을 주는 의사소통방식이나 통상적인 사회규범을 위반하여 시민들이 기대하는 수준의 행동양식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이다. 반면에 ”교양이 있다”라는 표현은 사리에 맞게 말과 행동을 하거나 아니면 일정 수준 이상의 문화적 지식이 있는 사람을 지칭할 때 쓴다. 결국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보고 어느 정도 지식과 품성을 갖추었는지를 가늠할 때 교양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여기서 지식과 품성은 교양의 필수요건이다. 이 요건을 갖추어야 ‘교양인’ 또는 ‘지성인’이라 부를 수 있다.13) 그런데 교양이 지식과 품성을 전제하면, 이는 사회적인 덕목이라 할 수 있다. 교양은 공동체에서 다른 사람과 같이 원만하게 살기 위한 요건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품성은 기본적으로 타자를 전제하고 지식은 품성과 연계되어 행위를 결정한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어떤 특정 상황을 인식하고 판단하고 대응하는 기준이 지식과 품성인데, 교양 있는 말과 행동은 여기서 비롯된다.

교양은 독일어 ‘Bildung’의 일본어 용어를 근대 이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도야(陶冶)나 교육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Bildung’의 어근은 ‘Bild’ (그림, 형상)이고 동사형은 ‘bilden’ (형상을 이루다)이다. 이런 조어의 구조를 단순히 따르면 ‘Bildung’은 ‘그림이 됨’, ‘무형에서 유형이 이루어짐’을 뜻한다. 원래 독일어 고어에서 위와 같이 쓰이던 말이 점점 지금의 의미로 변형되었다. 이런 ‘Bildung’은 역사적으로 볼 때, ”18세기 후반, 기본개념(Grundwort)으로서 교육과 관념론적 의미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1770년부터 1830년 사이에 독일의 근대 교육 체계가 형성되면서, 개방된 사회로의 전환이라는 역사적 상황에서 시민 상류층, 즉 ‘교양인’의 정신적 개성과 자유로운 사교, 그리고 이념을 규범화하는 자기결정권(Selbstbestimmng)이 사회적으로 가능해진 이상(Ideal)을 보여주는 중요개념(Leitbegriff)이 된다(Ritter & Gründer ed., 1971, p. 922).” 한편 프랑스에서는 교양이 ‘culture’인데, ‘경작하다’는 의미의 라틴어 ‘cultura’에서 유래한다. 이 말은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정신적인 능력을 키운다는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교육에 의해 훈련된 정신상태’를 뜻하게 되는데, 이는 독일어 ‘Bildung’의 뜻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18세기말 계몽주의자들은 ‘culture’를 보편적 인간의 특징으로 삼으면서, ‘인간에 의해 역사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축적된 지식전체’를 가리킨다. 이는 개인적 차원의 교양이 아니라, ‘nature’(자연)와 반대되는 ‘인간과 관련된 모든 것’, 즉 문화 또는 문명의 의미이다. 그 결과 현재 프랑스에서 ‘culture’는 교양뿐만 아니라 경작에서부터 문화, 문명까지 다양한 뜻을 포괄하는 단어가 되었다(이기라, 2015, p 7).”

결국 교육을 통한 인격형성의 내면화가 교양, 외화된 정신활동의 총체를 문화라 지칭할 수 있다. 그런데 교양교육의 범위에는 이 양자가 다 포함될 수 있지만 교양의 이념은 인간 정신의 내적인 본질을 향한다. 교양 개념을 처음 사용한 에크하르트(Eckhart)는 교양을 인간이 신의 형상과 비슷해지도록 자기 자신을 비우고 신에게 ‘내맡김을 배우는 것’(Erlernen von Gelassenheit)으로 본다. 그러나 근대 이후에는 인문주의 관점으로 교양을 재규정하여 고대 그리스의 개념으로 돌려놓았다(손동현, 2019, pp. 21- 22). 칸트의 계몽주의에 영향을 받은 훔볼트(Humboldt)에 따르면 ”교양(교육)이란 단적으로 인간의 인간다움 그 자체만을 위한 주체적 자아의 형성이다(p. 23).” 이 시기에 이런 인격의 완성을 지향하는 인성교육이 교양교육이고 직업교육에 앞서는 교육의 목표로 설정된다. 나아가 근대 이후 파울젠(Paulsen)은 공동체 의식을 교양의 중요 요소로 포함시키고 신분의 상징과 사회적 계층의 표지로 생각한다(p. 24). 결국 교양개념의 의미가 근대 이후 인간의 내적 성숙을 지칭하는 ‘인간다움’에서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갖춰야 할 ‘사회성’으로 확장된다. 그러나 실은 인간다움과 사회성은 다른 말이 아니다. 학습과 습관으로 채굴되는 인간의 고유성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인성으로서 사회성을 뜻하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의 본성을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인 본능과 욕구로 지칭할 수도 있지만, 이는 생명체로서 갖는 종적 특이성을 보여줄 뿐이고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후천적으로 계발되는 도덕적 품성으로서 인간다움을 뜻하지 않는다.

인간다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에 대한 두 정의와 맞닿아 있다. 그는 한편으로 인간을 ‘정치적 동물’(zōon politikon), 다른 한편으로 ‘이성적 동물’(zōon logon)이라고 정의한다(『정치학』, 1253a).14) 그렇다면 이 두 정의는 어떠한 관계에 있을까? 한석환(2008, pp. 229-230)은 이 물음을 주제로 삼으면서 기존의 해석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 첫 번째는 두 명제가 서로 관계없이 양립한다는 입장, 두 번째는 ‘정치적’ 규정이 본질이고 ‘이성적’ 규정은 파생되었다는 입장, 세 번째는 두 번째와 반대의 경우이다. 그러면서 그는 세 번째 입장을 지지하는데, 이는 본 연구의 입장과 다르지 않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을 이성 유무에 따라 크게 나누고 이성이 관계하는 대상에 따라 다시 나눈다. 즉 불변하는 존재자들을 성찰하는 이론적 사유(dianoia theōrētikē)와 변화 가능한 존재자들에 관한 실천적 사유(daianoia praktikē)로 나눈다(EN, 1139a5-10). 그리고 이론적 사유에는 인식(epistēmē)과 지성(nous), 지혜(sophia), 실천적 사유에는 기술(technē)과 실천적 지혜(phronēsis)를 포함시킨다(1139b). 이론적 사유가 다른 목적 없이 그 자체의 본질을 추구하는 신적 태도라면 실천적 사유는 욕구에 따른 행위를 조화롭게 이끄는 기준을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론적 사유가 그 자체로 즐거움, 신과 같은 자족성의 특징을 갖는다면 실천적 사유는 구체적인 행동을 전제한다. 실천적 사유에서 기술은 생활에 필요한 도구를 생산하는 제작에 기여하는 반면에 실천적 지혜는 삶의 가치를 고려하는 이성의 활동 기반이다. 그런데 기술은 군집생활을 하는 다른 동물과 정도의 차이를 보이지만 실천적 지혜는 다른 동물에게 볼 수 없는 질적인 차이를 가진다.15), 실천적 지혜는 총체적인 기획으로서 입법(nomothesia)과 국가를 제대로 운영하는 정치행위(politikē)로서 심의(bouleutikē)와 사법(dikastikē)에 관여한다(1141b25). 이런 방식으로 인간 본성이 실현되어 국가를 세우고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삶을 지탱한다. 여기서 동등한 지위를 갖는 자유인들은 규약을 근거로 교대로 다스리는 정체를 실행한다. 제도화된 국가에서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온전한 인간다움이 실현되며 국가는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는 장치이다.16)

요약하면 인간은 자신의 온전한 삶을 위해 이성적으로 사유하여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이성의 합리적 의사결정과 행위를 통해 공동체 건설을 위한 지향성이 정치적 성격을 띠게 되고 구체적인 실천이성의 결과로서 국가가 탄생한다. 그래서 위의 추론이 타당하다는 전제 아래 두 명제가 결합하여 인간은 이성적이면서 정치적인 동물이 된다.

4. 인간다움과 인문학

교양의 실질적인 내용이 인간다움이라면 교양을 인문학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교양수업은 인문학 수업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미 인문과학과 대비되는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사회과학, 예술, 실용학문 등이 교양영역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대학 교양과정에는 현대 학문의 분류체계에서 분화된 개별 학문과 시대의 흐름에 따라 관심을 끄는 특정 이슈를 다루는 과목이 개설되어 있다. 그래서 위의 설명에서 인문학(Humanities) 대신 인문과학(Human Sciences)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렇다면 이 둘은 동의어인가? 이에 대해 분류방식이나 방법론, 역사적 맥락과 쓰임에 따라 다르게 볼 수도 있고 통상적인 관례나 허용되는 범위에 따라 같게 볼 수도 있다. 다만 현대 학문 체계 안에서 인문과학은 사회과학, 자연과학과 구분되는 학문으로 볼 수 있는 반면에 인문학은 보다 포괄적인 인간에 관한 학문을 지칭하는 용어로 이해할 수 있다. 이에 교양과 인문학의 관계를 정립하는 상황에서 ‘Bildung’ 이전의 ‘인간다움’의 뿌리를 찾아 인문학과 관련된 내용을 살펴본다.17)

서양의 인문학 개념의 탄생과정에 대해서 안재원(2010)은 로마에서 고대 그리스의 자유교양학문(paideia)을 수용한 키케로(Cicero)의 인문학(humanitas)과 바로(Varro)의 자유교양학문(artes liberales)을 비교한다. 그에 따르면 키케로의 인문학은 교육에 중점을 두고 있고(pp. 97-98), 바로의 자유교양학문은 보편적 진리나 유용한 기술의 획득과 확장을 목표로 한다(p. 108). 그러면서 바로 이후 ”인문정신(humanitas)과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humaniter vivere) 필수적으로 알아야 하는 앎에 대한 학문이 교육과정에서 사라지고, 인문학은 도구적 성격이 강조되는 개별분과학문으로 분화되었다(p. 114)”고 본다. 이런 관점을 받아들이면 인문학으로부터 분과학문이 갈라지는 시점을 이 시기로 특정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그리스 유산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인문학이 탄생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인문학의 기원이 되는 그리스 자유교양학문의 주요 과목은 문법학, 논리학, 수사학과 같은 지적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기술(technē)과 관련된 도구적 학문이다. 이에 로마의 많은 아카데미가 인간 교육이 아닌 말하는 훈련만을 답습하는 실정이 만연하여 이에 대한 비판의식이 대두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키케로의 인문학 개념이 탄생한다. 그는 진리(veritas) 보다 인간다움(humanitas)을 우선적인 이념으로 두면서 개인적으로 갖추어야 할 기능적인 기초소양과 더불어 공적인 영역에서 인간으로서 도리를 인문학의 주요 내용으로 포함시킨다. 안재원은 paideia18)와 humanitas의 관계를 볼 수 있는 겔리우스의 『아티카의 밤들』 13권 17장 1-2절을 인용한다.

1. 라틴어 ‘humanitas’를 만든 사람들이 이 단어를 사용할 때, 대중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에 대한 친절과 호의를 베푼다는 뜻으로 쓰이는 그리스어 ‘philanthropia’(박애)와 같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humanitas’는 그리스어의 ‘paideia’ (교육/교양)에 가깝고 좋은 학문을 위한 지식과 학습을 칭한다. 이런 학문을 진심으로 바라고 추구하는 자들이야 말로 가장 인간적인 자들이다. 왜냐하면 이 학문에 열정을 갖는 것과 그것을 배우고자 함은 모든 생물 중 인간에게만 주어진 [본성]이고, 이런 이유에서 ‘humanitas’(인간다움/인문학)라고 불리게 되었다. 2. 옛 어른들은 모두 이 의미로 사용했다. 다른 어떤 이보다 마르쿠스 바로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그랬는데, 모든 책들이 이를 명백하게 증명하고 있다. (안재원, 2010, p. 99에서 재인용)19)

안재원은 여기서 겔리우스가 humanitas를 paideia가 아닌 philanthrophia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증인으로 키케로를 소환한 것을 비판한다. 왜냐하면 키케로보다 더 이전 작가인 테렌티우스가 philantrophia 의미로 humanitas 개념을 이미 사용했으며 이후 키케로는 인본주의(humanismus) 이념을 설파하는 연설가로 활동하고 인본주의 이념을 교육의 목표로 삼아 인문학(humanitas)을 설정했다는 것이다. 이는 키케로의 업적을 평가해 볼 때 타당한 지적이다. 그렇다면 겔리우스는 어떤 사정으로 그런 판단을 했을까? 일단 인용한 내용을 따라가 보자. 그는 humanitas를 philanthrophia로 보는 것을 유보한 채, 지적 욕구를 인간의 본성으로 보고 이에 따른 학문을 인문학으로 해석한다. 그리하여 교양과 인문학 그리고 ‘인간다움’에 대한 관계를 유추해보면, 사람이 사는데 도움이 되는 좋은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 과정이 교양(paideia)이고 이를 추구하는 본성이 ‘인간다움’인데, 이에 따라 이루어진 학문을 인문학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문학이 삶에 필요한 실용학문인 자유교양학문(paideia)으로부터 기원한다는 전통적인 입장과 인본주의(humanismus) 또는 박애주의(philanthrophia)와 같은 도덕적 이념을 품은 윤리학으로부터 탄생한 새로운 학문이라는 주장의 친부 확인 논쟁은 인문학의 탄생배경과 관련 중요한 쟁점이 된다.20) 여기서 이런 대립적인 입장을 고수하면서 겔리우스의 주장을 변호하려면 우선적인 과제는 그를 지지할 수 있는 근거를 로마 초기문헌에서 찾는 것이다. 그러나 키케로의 인문학 역시 그리스 자유교양학문의 근원을 동시에 갖기 때문에 따로 외부로 눈을 돌릴 필요는 없어 보인다. 『수사학』 제80장을 보면 그가 지향하는 구체적인 인문학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한편 제대로 된 공부와 기술을 통해서 미리 가꾸어지고 갖추어져서 일종의 덕 수행을 돕기 위해 마음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어떤 습관들이 있다. 사적인 영역에서는 문(법)학, 산수, 음악, 기하학, 천문학, 기마술, 사냥술, 무기 다루는 법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공적인 영역에서는 특히 덕을 닦거나 신을 섬기거나 부모를 모시거나 친구를 위하거나 우선적으로 그리고 각별하게 대접해야 할 손님에 대한 예의(禮義)를 닦는 공부와 노력이 매우 중요하다. (키케로, 2006, p. 262-265)

논리적으로 매끄럽게 연결되는 문장은 아니지만 여기서 인문학의 목표는 개인적으로 삶에 도움이 되는 기술이나 지식을 배우고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잘 어우릴 수 있는 도덕적 품성을 갖추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는 그리스 자유교양학문의 전통을 수용하면서 그 단점을 보완하는 인문학 기획이라 할 수 있다. 키케로는 영혼이 없는 화려한 말솜씨로 상대방을 현혹하는 기술을 비판하면서 수사학에 인간의 얼굴을 갖게 한다. 이는 철학의 영향이라 볼 수 있는데, 타인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실천윤리의 유훈이다. 삶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이 인간의 편의를 도모하고 덕과 예의는 공동체 구성원을 배려한다. 애초에 수사학자로서 키케로가 꿈꾸는 이상적인 연설가는 단순한 웅변가가 아닌 철학자였다(안재원, 2015, p. 173). 이는 키케로가 단순히 소피스트의 후예로서 수사학뿐만 아니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특히 위의 인용은 탁월성(EN, 1103a14-1106a11)에 대한 서술과 비교해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유산으로 볼 수 있는 흥미로운 대목으로써 키케로 인문학의 토대가 된다. 결국 이와 같이 보면, 겔리우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입장에서는 키케로의 새로운 기획의도를 충분히 인지하지 못한 상황에서 기존의 인식을 고수했다는 것이다. 이런 보수적인 관점은 바로(Varro)로 이어져 또 다른 학문의 역사가 된다.

그러나 키케로의 이러한 인문학 구상은 유감스럽게도 실제 로마의 교육현장에서 실현되지 못한 채 세네카(Seneca)가 등장하는 제정기까지 미루어졌다(안재원, 2015, p. 174). 세네카는 키케로의 계획을 이어 받아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만 자유교양학문이 소용된다면 가치가 없기 때문에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에 기여하는 학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pp. 168, 177). 그러면서 그는 덕을 위한 학문의 필요성을 피력하는데(p. 179), 즉 좋은 사람(vir bonus)이 되기 위한 실천학을 강조하면서 용기, 신의, 절제, 사람됨과 같은 구체적인 덕목을 제시한다(pp. 181-182). 이렇게 볼 때, 키케로가 고대의 자유교양학문에 ‘인간다움’을 입혀 인문학으로 발전시켰다면, 세네카는 교육적인 측면을 강조하면서 ‘자유민에게 어울리는 교양교육’을 구체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5. 교양교육 이념으로서 행복

플라톤의 행복에 대한 생각은 같은 시대의 소피스트들과 달랐다. 소피스트들은 자연의 법칙에 따른 대결과 경쟁에서 승리함으로써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전제하고 설득의 논리와 연설능력이 개인의 가져야 할 품성에 필요한 조건임을 강조한다. 반면에 플라톤은 구성원 전체의 조화로운 행복과 관련된 지혜와 덕을 중시한다. 그리하여 이런 품성이 법(nomos) 제정에 반영되어 정의로운 국가를 세우게 되면 행복의 기반이 마련된다고 본다. 야만의 시대에서는 승리하여 누리지 못하면 패배에 따른 굴종을 감수하는 것이 유일한 삶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제한적이나마 어느 정도 동시대인과의 공존, 나아가 더불어 같이 사는 세상을 꿈꿨다는 점에서 시대정신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이는 개인적인 삶의 만족이나 다른 사람의 희생을 통해 얻어지는 일시적인 이익보다는 공동체의 이익과 정의를 우선하는 사유의 전환이다. 이는 이기적인 동물로서의 특성을 넘어서 이성적인 사유를 통한 삶의 방식의 변화이기도 하다. 약육강식의 논리로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삶의 목표가 아니라 타인과 함께 공존의 삶을 누리는 것이 인간으로서 진정한 행복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결론은 한편으로 현실적인 선택이기도 한데, 승리는 영원할 수 없으며 강자는 언젠가 더 센 강자를 만나는 법, 언제든지 패배의 쓴맛을 볼 수 있어 이런 구도에서의 행복은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 『국가』에서 글라우콘의 말을 보면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전환의 계기를 확인할 수 있다.

본디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르는 것이 좋은(agathon) 것이요, 올바르지 못한 짓을 당하는 것은 나쁜(kakon) 것이지만, 그걸 당함으로써 입는 나쁨이 그걸 저지름으로써 얻는 좋음보다도 월등하게 커서, 결국 사람들이 서로들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르기도 하고 또 당하기도 하며, 그 양쪽 다를 겪어 보게 되었을 때, 한쪽은 피하되 다른 한쪽을 취하기가 불가능한 사람들로서는 서로 간에 올바르지 못한 것을 저지르거나 당하지 않도록 약정을 하는 것이 이익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씀입니다. (『국가』, 358e-359a)

어느 순간 오래된 악습의 피해를 끊으려는 생각은 세력을 얻게 되어 실행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다 보니 이익은 정당성과 합법성을 확보하여 올바름(정의)이 된다. 그리하여 원래의 좋음(agathon)과 다른 새로운 ‘좋음’ 개념이 탄생한다. 야만의 시대에서 좋음과 올바름은 일치하지 않지만 플라톤의 좋음은 올바름과 일치한다. 이는 태양/동굴의 비유(507b-509c, 514a-520a)에서 볼 수 있는데, 동굴에 갇혀 있던 사람이 밖에 나와 태양이 밝게 비추는 좋은 세상을 보고 다시 동굴로 돌아가 이를 알리는 과정은 좋음과 올바름이 어떻게 합일되는지 보여준다. 태양을 진리(alētheia)의 근거로서 비유의 대상이 되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있지만 좋음의 이데아를 상징하여 행복의 근거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지는 설명이 필요하다. 태양을 인지하는 과정을 지성을 키워 진리를 알려고 하는 배움과 교육으로 비유할 때, 혼자만 지상으로 나온 거로 끝나면 이는 문명 이전 야만의 교육,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교육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빛을 먼저 본 자가 다시 동굴로 들어가 새로운 세상을 알려 갇힌 자들을 밖으로 이끄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행위이다. 어두운 동굴에서 여전히 사슬에 묶여 있는 옛 동료를 그대로 볼 수 없는 연민과 책임의 발로이다. 이는 혼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같이 좋은 세상을 보러 나가자는 것인데, 여기서 바깥세상은 진짜가 있는 참된 세상이면서 밝아서 살기 좋은 세상이기도 하다. 그러기 때문에 동굴로 들어간 자(철학자/정치가)는 참된 것을 알고 좋은 곳으로 사람들을 이끄는 지성과 인성을 동시에 갖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인물을 키워내기 위한 지침이 플라톤의 교육철학이다. 그리고 나아가 이러한 교육관은 구성원 전체의 행복을 위한 국가관으로 견인된다. 여기서 좋음의 이데아는 진리와 삶의 빛이 된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음의 이데아를 비판한다(EN, 1096a-b). 좋음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도 지칭하지만, 어떤 관계를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관계는 존재하는 것들의 관계이기 때문에 존재가 우선적인 실체이고 관계는 부수적인 상황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데아는 존재에 설정할 수 있지만 관계에 부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즉 ‘좋음’은 신과 지성(nous)같은 무엇, 탁월성 같은 성질, 적당한 양, 유용한 관계, 적절한 시간과 장소와 같은 것에 여러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렇기에 ‘좋음’은 공통적인 보편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범주에 다양한 모습에 대한 판단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 따른 이데아의 존재방식은 불가능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입장에서는 대안이 필요하다. 플라톤의 좋음의 이데아는 모든 종류의 좋음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추구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고 다른 좋음은 이것 때문에 비롯되는 다른 방식의 좋음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려나 즐거움, 명예 같은 것이 다른 것들 때문에 추구한다고 할지라도 어떤 사람은 그 자체로 좋은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구분은 불명확하다고 본다. 게다가 좋음의 이데아가 그 자체로 좋은 것이고 다른 좋음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 아니라면 이데아는 내용이 없는 추상적인 공허한 것으로 남을 뿐이라고 비판한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좋음에 관여하는 납득할만한 근거가 마치 하양이 눈(雪)과 백연(白鉛)에 동일하게 관여하는 것처럼 필요하다고 덧붙인다. 그러나 명예나 사려, 즐거움은 확연히 서로 차이나는 좋음이다. 그러기 때문에 상위의 이데아에 따른 공통적인 좋음은 존재하지 않아 보인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위의 주장을 받아들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eudaimonia)은 추상적이고 공허한 좋음의 이데아를 대체하는 훌륭한 개념으로 보인다. 그는 좋음의 이데아가 있다고 하더라도 공통적으로 서술되는 단일한 좋음 혹은 그 자체로 떨어져서 인간의 행위로 성취할 수 있거나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다 실용적인 도움이 되는 개별적으로 본(paradeigma)이 되는 것을 찾는다. 좋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드러나는데, 목적과 그를 위한 행위나 기술, 방법의 구도로 설명할 수 있다. 건강을 위한 의술, 승리를 위한 병법, 집을 위한 건축술을 예로 든다. 이렇게 모든 행위는 목적(telos)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어떤 목적은 상위에 목적을 전제로 한다. 건강, 승리, 집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질문에 대답을 찾는다면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명예, 즐거움, 지성을 추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추구하지만 이것들을 통해서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선택한다. 행복은 그 자체로 추구하는 최종 목적이고 다른 것을 상위에 목적으로 두지 않는다(1097a-b).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은 플라톤의 좋음의 이데아를 밀어낸다.

그렇다면 이렇게 좋음의 이데아를 행복으로 바꾸면서 드러나는 플라톤과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우선은 추구하는 대상의 확실성이다. 좋음의 이데아는 공허하지만 행복은 누구나 공감하는 가시적인 욕구의 대상이 된다. 두 번째는 추구하는 결과의 실효성이다. 좋음의 이데아를 추구하는 방식은 이데아를 아는 지성(nous)을 갖추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진리의 추상성은 실천적인 삶의 지혜로 해소되어 현실이 되어야 한다. 물론 이런 이유는 인간의 한계이기도 하면서 신과의 차이이기도 하다. 진리 자체를 추구하여 행복할 수 있는 현인(賢人)의 방식은 일반인이 따라하기 힘들다. 우리의 행복은 습관과 배움을 통해 얻게 된 좋은 마음가짐이 행위로 옮겨져야 성취할 수 있다. 추상적이며 보편적인 공허함이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지침으로 바뀌면서 행복이라는 과녁이 눈에 띈다. 좋음의 이데아가 개별적으로 추구하는 대상의 공통적인 기반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한 반면에 행복은 인간의 마음으로 들어와 최종근거가 된다. 이런 행복은 좋음의 이데아의 현신(現身)으로 최상의 좋음이라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다 친절한 답변도 준비해 놓았다. 그에 따르면 행복을 우리 인간의 기능(ergon)에서 찾을 수 있다. 바이올리니스트가 좋은 연주를 위해서 연주를 잘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듯이 인간은 최상의 좋음인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에 필요한 능력이 있어야 한다.21) 그는 ”인간의 기능을 어떤 종류의 삶으로 규정하고, 이 삶을 다시 이성을 동반하는 영혼의 활동과 행위라 규정한다. 따라서 훌륭한 사람의 기능은 이것들을 잘, 그리고 훌륭하게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각각의 기능은 자신의 고유한 탁월성에 따라 수행될 때 완성되는 것이다(1098a 13-16).” 그래서 그의 생각을 받아들이면 행복은 ”최상의 가장 완전한 탁월성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1098a18-19)”이다. 물론 이는 일시적인 행위의 결과로써 찾아오는 단순한 만족이 아니므로 삶 전반에 걸쳐 일관적으로 행동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좋은 삶을 이루어 행복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교양교육의 이념으로 내세울 수 있는 행복 개념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행복은 먹고 마시고 노는 향락이 아니다. 행복은 경쟁에서 이겨 얻게 되는 승리의 도취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원하는 것을 쟁취하여 갖는 충족도 아니다. 만일 그러한 방식의 구도로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끝없는 욕망으로 인해 만족과 공허함이 반복되는 고단한 시기를 보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태도로 행복이 결정된다면, 더불어 살면서 공감하고 배려하여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실천하는 공존의 삶을 모색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마음가짐이 잘 실현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야 한다. 지성과 인성을 겸비한 덕이 실현되어 좋은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행복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행복 개념은 우리가 생각하는 교양교육 이념에 부합한다. 왜냐하면 기존의 교양교육은 인간의 본성을 함양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여기서 인간의 본성은 이성적인 사유능력인 지성과 타인을 배려하는 인성이다. 그런데 이는 다름 아닌 이성적이고 정치적인 동물로서의 인간의 정의의 구성요소이다. 즉 인간다움은 지혜를 발휘하여 사회 구성원들과 함께 좋은 삶을 실현하려는 의지를 개념 자체에 품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지가 지향하는 행복은 교양교육의 이념으로서 인간다움의 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행복을 위와 같이 이해한다고 해도 교양교육 이념으로 설정하는데 넘어서야 할 인식론적 난관이 있다. 행복은 좋음의 이데아보다 현실적이어서 받아들이기 쉬운 개념이지만 여전히 교육의 직접적인 목표로 보기 어렵다. 이는 행복이 다른 범주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외국어교육에서 언어는 눈에 보이는 대상으로서 이에 능통하여 유창하게 사용하는 것을 교육의 목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목표를 이념으로 바꾸면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외국어교육의 이념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먼저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의아해 할 것이다. 교양교육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통상적인 논의를 볼 때, 교양교육의 목표를 주제에 맞는 다양한 텍스트를 통해 지성과 인성을 키우는 것으로 설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다음에 근본적인 질문이 남아있다. 지성과 인성을 왜 쌓아야 하는가? 이에 이 연구에서는 ‘행복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기서 행복은 이 질문에 상응하는 최종답변으로서 이념(ideal)의 지위를 갖는다. 그러기 때문에 지성과 인성은 행복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직접적인 교양교육의 목표, 행복은 궁극적인 최종목표로서 교양교육의 이념이 된다. 교양교육을 교육으로 바꿔도 좋을 듯하다.

6. 맺음말

인간과 다른 동물이 태어나서 기르고 자란다는 것에 차이가 없다면,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측면에서는 그렇지 않다. 인간은 단순히 생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잘 살기 위하여 가르치고 배운다. 이에 교육의 목표는 바로 행복하기 위해서이고, 교양교육은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대학의 교양과정의 실제는 지성과 인성의 함양을 목표하고 있기에 행복과의 관계를 밝힐 필요가 있다. 이에 본 연구는 역사적인 맥락에서 교양교육 이념의 근거를 찾아 교양교육이 체계적으로 정립할 수 있는 참고할 만한 토대를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대학에 따라 교양교육의 이념을 인성교육에 두는지 또는 역량교육에 두는지 아니면 둘 다인지, 강조점에 따라 교양과목이 다양하게 개설되어 있다. 본 연구는 지적 역량교육이 지성과 함께 인성을 갖추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면서 위계를 확립하고 최종적으로 인간다운 삶이 구현되어 행복하게 사는 것이 교양교육의 이념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물론 교양교육 이념에 대해 다른 입장을 가질 수 있다. 본 연구가 전통에서 근거를 찾으려는 시도라면, 오히려 반대로 급변하는 시대의 요구에 맞게 새로운 교양교육 이념을 제시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는 본 연구의 방향과 대립하는 구도라 할 수 없다. 오히려 그러한 이유로 이 주제가 쟁점으로 부각되어 보다 다양한 관점의 연구가 진행되어 엄격한 검증절차를 거쳐, 보다 나은 교양교육 이념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당연히 우리가 밟아가야 하는 진리로의 여정이다.

이에 이 연구에서는 역사적인 맥락에서 어원을 찾아 이와 관련된 개념을 분석하는 방식으로 교양(Bildung)과 인간다움/인문학(humanitas), 지성(nous)과 이성(logos) 등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많은 경우에 주제를 벗어나지 않기 위해 교양교육 이념과 관련된 범위 안에서 문제 제기만 해놓은 상태로 만족해야했다. 아울러 핵심 주제인 ‘eudaimonia’와 관련, ‘행복’과 ‘좋은 삶’, ‘잘삶’과 ‘잘 삶’ 등의 용어의 차이점을 밝히면서 개념을 정확히 사용해야하는 필요성을 보여주려 했다.22) 경우에 따라 나름의 입장 개진이 가능하거나 다양한 해석이 용인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전제 아래 가장 적합한 개념이나 번역어 선택에 대한 논쟁은 생산적인 활동이 될 것이다. 교양교육의 이념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주요개념의 구분에 대한 문제 제기는 후속 연구의 검증대상이 되어 용어의 표준화를 위한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아가 이 연구가 행복의 조건에 대해서 동서양의 입장을 아우르는 좀 더 포괄적인 논의로 전개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하였으면 하는 기대가 있다. 크게 볼 때, 행복을 근본적으로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 채움’으로 보는 서양의 공리주의 입장과 ‘욕심을 버리는 비움’으로 보는 동양의 불교적 관점으로 구분한다면, 이 연구에서 주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탁월성의 지속적인 실천으로서의 행복은 이 둘의 범주를 종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중용, 절제 같은 인성을 ‘비움’의 한 종류로 볼 수 있고, 이 ‘비움’의 실천을 바라던 바대로 이루는 ‘채움’이라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관점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거나 다른 입장과 비교하는 연구는 다음의 과제로 남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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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1)

1) 본고에서는 지적 능력[역량]과 지성을 혼용하여 사용하지만, 필요에 따라 판단력, 표현력, 의사소통능력 등 개별적인 능력을 지시하거나 통칭할 때 ‘지적 능력’, 이런 지적 능력을 모두 갖춘 품성을 ‘지성’ 개념으로 구분하여 사용한다. 지성은 위의 뜻과 정확히 같지 않지만 nous의 번역어로도 사용한다. nous의 뜻에 대해서는 각주 11) 참조.

2)

원래의 eudaimonia는 eu(좋은, 잘)+daimon(수호신)의 결합어로, 신에게서 오는 행운 같은 것이거나 신과 같은 것이란 뜻인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잘 사는것’ 혹은 ‘잘 행동하는 것’으로 설명하면서, 탁월성(aretē)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 완전한 생애, 완전성, 자족성, 그 자체로 선택할 만한 것, 최고선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여기서는 번역어로 통상적인 ‘행복’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맥락에 따라 탁월성이 실현되는 구체적인 삶의 형태를 지시하는 뜻으로 ‘좋은 삶’을 혼용한다.

3)

교육의 목표와 관련된 논란은 현재의 대학 교양교육과정에 한정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정치학』 8권 2장에서 이 문제를 언급한다.

4)

​​​『법률』 1권(643c-645c), 2권(652a-653c)의 교육의 본질과 목적에 대하여 서술된 부분과 ​​​『국가』 6권(505a-511e), 9권(580b-587a), 그리고 ​​​『필레보스』 전반을 살펴보면 좋음(agathon)이 앎(epistēmē), 실천적 지혜(phronēsis), 지성(nous)인지 아니면 즐거움(hēdonē)인지 문제가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쟁점이 되는 행복(eudaimonia)과 ‘좋음’ 등의 다른 개념과의 연결점은 ​​​『법률』 2권(662b-663b)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플라톤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 가장 올바른 삶을 사는 사람인지, 가장 즐거운 삶을 사람인지 묻는다. 그러면서 가장 올바른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주장을 견지하면서 올바른 사람이 얻는 ‘좋음’의 그어떤 것도 즐거움과 떨어질 수 없는 것이며 즐거운 것과 올바른 것,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은 갈라놓을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5)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천학문인 윤리학을 이론학과 제작학으로 구분하면서, 윤리학을 배우는 목적은 수강생들에게 많은 이익을 주는 것이라고 본다(EN, 1094a24-27,1095a11). 그러면서 윤리학이 가장 으뜸 학문인 정치학의 일종이거나 정치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언명한다(​​​『대윤리학』(Magna Moralia), 1181a25-1181b30).여기서 정치학은 (1) 시민의 공적 생활을 위해 필요한 기술적 숙련을 위한 교육 커리큘럼을 만들고, (2) 교육이 시민의 도덕적 품성과 행위를 이끌도록 입법하며관심을 기울이는 학문이다. 이런 까닭에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8권이 교육학이며, 정치가는 곧 교육자가 된다(EN, 1권 2장). 이는 윤리학과 정치학이교육을 매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하다.

6)

aretē의 통상적인 번역어는 도덕적으로 뛰어난 품성을 뜻하는 ‘덕’(德)이다. 본 연구에서는 행복과의 관련성이 고려될 때, 원래의 의미에 가까운 훌륭한 품성을뜻하는 ‘탁월성’과 문맥에 따라 ‘덕’과 ‘미덕’을 혼용하여 사용한다. 플라톤의 aretē 뜻의 쓰임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필레보스』,48e 각주 313) 참조.

7)

본 연구에서는 ‘행복’(eudaimonia) 개념이 ‘기쁨’(chairein)이나 ‘즐거움’(hēdonē), ‘잘삶’보다는 ‘잘 삶’ 또는 ‘좋은 삶’의 뜻으로 쓰이는 것이 교양교육 이념에더욱 부합하다는 입장이다. ‘잘삶’을 통상적으로 ‘부유하게 살다’라는 뜻으로 풀이하는 ‘잘살다’의 명사형으로 한정한다면 eudaimonia의 번역어로 적합하지않다. 또한 ‘to zēn eu’ 또는 ‘to eu zēn’도 ‘훌륭하게 살기’를 뜻하지, ‘부유하게 살다’나 소극적으로 ‘탈 없이 지내다’라는 의미가 아니다. ‘잘’과 ‘살다’를붙여 쓰는 ‘잘살다’의 의미가 아닌 ‘훌륭하게 살다’의 의미를 명확히 보여주는 의도로 ‘잘 삶’으로 띄어 써 구분할 수 있다. ​​​『필레보스』, 67b 각주 445) 참조.

8)

이 주제는 각각 EN의 1권 7-13장과 10권 6-8장에서 얘기하는 행복이 모순이라는 문제와 연결된다. 1권에서는 인간의 전반적인 다양한 삶의 가치나 좋은 상태의 지속적 실천을 행복으로 보는 반면에 10권에서는 관조(thēoria)라는 한 가지 이성적 활동으로 행복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는 각각 포괄론(inclusive thesis)과 지배론(dominant thesis)이라 부를 수 있는데, 어느 해석이 맞는지 주석가들의 입장이 갈라진다(유원기, 2013, p. 2). 이에 대해 포괄론을 내세운 장미성과 달리 유원기는 ​​​『​​​영혼에 관하여』 (De Anima) 2권 3장에서 ‘영혼의 포용성’ 개념을 가져와 최상의 영혼인 사고혼(rational soul)이 하위 영혼을 포용하여 포괄론과 지배론의 대립을 해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논거를 덧붙일 수 있다. 인간은 생명체로서 동물적 욕구를 갖고 있지만 동시에 이성을 가진다. 그렇지만 본능과 이성이 충돌되는 상황을 모순이라고 할 수 없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의 욕구는 이성과 충동하지 않는다. 다만 일방적인 한 쪽의 욕구를 충족하는 일은 장애가 따르는데, 여기서 이성은 절제의 형식으로 탁월성을 실현할 수 있다. 반면에 상대방의 의사와 관계없이 자신의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서 강제하면 욕구충족은 폭력을 수반하고 이성은 무력해진다. 이런 비열한 야수성으로 오는 성취는 행복과 동일시될 수 없으며 공허감이 수반되어 진실을 오도하던지, 자발적인 망각을 의도한다. 이에 이성적인 자제가 요청되며 실천척 지혜(phronēsis)가 필요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행복을 이끄는 삶의 지혜이다.이를 관조가 실행된 예시로 본다면 포괄론과 지배론은 하나로 통합된다. 그러나 진리를 탐구하고 숙고하는 그 자체가 목적일(te los) 수밖에 없는 활동으로 관조를 엄격하게 제한하면 대립은 유지된다. 결국 이런 상황이 해소되지 않으면 관조하는 삶과 탁월성의 실천이라는 행복을 위한 두 개의 길이 여전히 앞에 놓여 있다.

9)

‘artes liberales’는 ‘engkyklios paideia’의 번역어로 일반교육(general education)이라는 뜻으로 소피스트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그런데 ‘eleutheroi technai’(자유교육) 의미도 가지고 있어, 여기서 또한 일반교육, 인성교육의 의미가 따라 나오는 데, 이런 자유교육의 이념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발견할 수 있다(이창우, 2009, pp. 45-46).

10)

주의 인용표기는 앞의 주와 같은 문헌일 때 반복되는 부분을 생략하고 표기한다.

11)

여기서 logos와 nous의 관계를 짚어보자지. “성 또한 양쪽 방향에서 최종적인 것들에 관련한다. 제일의 명제(horos)[항]에도 관련하고 최종명제에도 관련하는것은 지성(nous)이지 이성(logos)이 아니기 때문이다(EN, 1143a35-36).”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언급과 관련하여 EN의 각주 43)에서는 “지성(nous)은 넓은의미의 지적 작용 일반, 혹은 훈련에 의해 성장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가리킨다기보다 ‘직관’이나 ‘직관적 이해’에 가까운 정신 작용 내지 그러한 정신적 능력에 가깝다”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이렇게 nous를 직관, logos를 추론으로 보는 일반적인 해석에 도전하는 흥미로운 논문이 있다(Lee & Long, 2007). 이 논문은 오히려 nous가 논리적(logical)일 수 있고, logos가 직관적(noetic)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nous와 logos의 해석과 관련하여 여전히 쟁점이 되는 부분이다. logos 개념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본고 3장, 플라톤의 nous와 logos에 관해서는 ​​​『국가』, 각주 82) 참조.

12)

지적 탁월성을 지혜(sophia), 이해력, 실천적 지혜, 성격적 탁월성은 ‘자유인다움’, 절제와 같은 품성으로 다시 나누어진다(EN, 1102a26-1103a10).

13)

이때 교양과 지성의 차이를 엄격하게 구분하기는 어려울 듯한데, 지성이 보다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품성으로 보인다. 신문의 책 소개 지면을 보면 ‘교양’과 ‘학술/지성’으로 구분되어 있는 경우가 있는데, 교양 지면은 시민으로서 갖추어야할 상식과 소양, 인성에 관한 책을 소개하고, 학술/지성 쪽은 특정 영역의 지식인이 관심을 가질만한 보다 전문적인 정보를 다룬다. 마치 대학의 교양수업이 같은 주제를 다루어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다양한 지식을 폭넓게 익히는 반면에, 전공은 해당하는 내용에 대해 보다 깊은 지식과 이론을 탐구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다.

14)

한상수(2007, pp. 540-541)는 인간이 ‘정치적 동물’이라는 명제가 정의(definition)가 아니라 기술(description)이고 ‘이성적 동물’이 정의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이 명제의 술어 중 적어도 하나는 정의의 구성요소인 유(genus) 또는 종차(differentia)이어야 하는 데, 이런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고 본다. 그러면서 아리스토텔레스 가 ​​​『동물지』(497b-488a)에서 다른 동물도 정치적이라고 말했다는 근거를 제시한다. 이는 일면 타당하다. 그러나 ‘정치적’이라는 의미를 동물에게는 ‘군집’이나 ‘협업’의 의미로 보고, 인간에게는 동물들이 가질 수 없는 ‘폴리스를 구성’(politikon)하는 뜻으로 다르게 사용하면 이 명제를 정의라고 주장할 수 있다(​​​『정치학』, 1280a32-33). 한편 위와 같은 주장은 똑같은 논리로 이성적 동물이라는 정의에도 적용할 수 있다. 원래 “이성적 존재는 신”이라는 반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형이상 학』, 1072b). 그런데 logos는 이성 이외 ‘논리’, ‘언어’, ‘말씀’ 등으로 번역된다. 이중 어느 용어가 가장 합당한지 논란이 되는데, 사실에 부합하는 인식능력과 판단력을 지칭할 때 ‘이성’, 합리적 절차에 따른 타당한 추론 또는 계산능력을 ‘논리’, 위와 같은 사유과정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말과 소리가 ‘언어’, 하나님의 계시와 가르침을 뜻하는 기독교의 용어를 ‘말씀’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어떻게 보면 logos가 여러 뜻을 따로 가진 것이 아니라 어떤 차원에서 어떻게 쓰이는가에 따라 다른 의미가 강조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위의 논변은 ‘이성’, ‘정치성’ 개념의 해석문제로 볼 수 있다. 이성을 중심개념으로 인간의 정의 또는 동물의 차이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은 조대호(2010), 두 정의의 관계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한석환(2008) 참조. 한편 ‘정치적 동물’을 세네카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회적 동물’로 번역하는 데, 이 문제에 관해서는 아렌트(2017, 91-98) 참조.

15)

여기서 기술에 따른 변화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정도의 차이’로 평가할 수 있다. 다른 동물의 행위가 기존의 상태를 변형하는 물리적 기술이라면 제작에 관여하는 인간의 기술은 경우에 따라 없던 것을 새롭게 창조하는 화학적 변형으로서 질적 변화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창작품의 질적 변화일 뿐이다. 이것은 삶의 일부분에 편의를 제공하는 일시적인 기쁨을 주는 외적 조건일 뿐, 행복의 근본적 조건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새 옷, 맛있는 음식, 좋은 집 같은 것에 의해 행복이 인생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16)

물론 이때의 인간은 시대적 한계를 가진다. 어린이와 구별되는 성인, 여자와 구별되는 남자, 노예와 구별되는 주인으로서 성인 남자가 그리스 국가(polis)에서 유일한 자유인이며 완성된 능력과 권리를 가진다.

17)

여기서는 주제에 맞게 교양과 인문학의 관계를 밝히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반면 인문학과 인문과학의 차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인문과학이 탄생하는 시점을 살필 필요가 있다, 기존의 인문학에서 탈피하여 과학적 방법론에 근거한 인문과학을 주창한 최초의 학자로 딜타이(Dilthey)를 지목할 수 있다. 그의 정신과학 입문(Einleitung in die Geisteswissenschaft, 1883)은 현대 인문과학의 토대를 마련한 주요한 저작으로 평가받는다. 이 저서에서 그는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을 구분하고, 인문과학이 인간의 내적 경험과 문화를 이해하는 학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외적 대상에 대한 객관적, 실증적 방법론을 추구한 자연과학과 달리 인문과학에서 인간의 삶과 역사에 대한 객관적 이해(Verstehen)를 도모하는 해석학적 방법론을 강조한다(Dilthey, 2014 참조).

18)

paideia는 자유교양학문과 교양, 교육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Bildung, humanitas, artes liberales, paideia(paedeia), engkyklios paideia(encyclo paedeia)는 맥락에 따라 대치가 가능하다. 이와 관련하여 이창우(2009, pp. 44-46) 참조.

19)

이해를 위해 원래의 번역문을 약간 다듬었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I. Qui verba Latina fecerunt quique his probe usi sunt, ‘humanitatem’ non id esse voluerunt, quod volgus existimat quodque a Graecis philanthropia dicitur et significat dexteritatem quandam benivolentiamque erga omnis homines promiscam, sed ‘humanitatem’ appellaverunt id propemodum, quod Graeci paideian vocant, nos eruditionem institutionemque in bonas artis dicimus. Quas qui sinceriter cupiunt adpetuntque, hi sunt vel maxime humanissimi. Huius enim scientiae cura et disciplina ex universis animantibus uni homini datast idcircoque ‘humanitas’ appellata est. II. Sic igitur eo verbo veteres esse usos et cumprimis M. Varronem Marcumque Tullium omnes ferme libri declarant. Quamobrem satis habui unum interim exemplum promere.

20)

이 논쟁의 핵심은 humanitas와 humanimus 두 개념의 내포와 외연 문제이다. 이에 대한 간략한 논쟁사와 참고문헌은 안재원 (2010, pp. 93-94) 각주 5) 참조.

21)

이 부분과 관련 검토해야 할 논변이 있다. Everson (1998, pp. 99-100)에 따르면 “만일 하프를 잘 연주하는 사람처럼, 인간의 본질적인 기능을 잘 수행하는 사람이 행복하다면, 하프를 잘 연주하는 사람은 행복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로 볼 때, 하프를 잘 연주하는 사람을 탁월하다고 할 수 있지만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 동일한 맥락으로 인간의 기능(ergon)을 잘 수행하는 사람은 탁월하다고 할 수 있지만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김현, 2003, p. 240 각주 20)에서 재인용).” 그러나 여기서 Everson.은 논리적 비약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하프 비유는 연주자의 기능, 말하자면 기술(technē)과 관련한 탁월성으로서 인간의 행복을 위한 기능으로 일반화할 수 없다. 연주자로서 ‘잘함’은 행복의 구성요소로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행복을 위한 또 다른 외적 조건이지, 인간으로서의 행복을 충족시키는 본질적인 기능이 아니다. 오히려 연주를 대하는 연주자의 바른 자세가 탁월성으로서 행복의 기능이라 할 수 있다.

22)

이와 관련 Moran(2018, pp. 98-99)의 문제의식을 소개하면서 ‘eudaimonia’개념 연구의 필요성을 대변하겠다. “나(Moran)는 eudaimonia와 행복(happiness) 사이에 개념적인 불일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eudaimonia는 우리가 오늘날 말하는 행복과 같은 의미가 아니었다고 본다. 그가 이 용어를 소개할 때, eudaimonia를 ‘잘 행하다’ (to eu prattein) 또는 ‘잘 살다’ (to eu zen)와 동의어로 사용했다. 영어에는 eudaimonia에 해당하는 단어나 표현이 없고, 그리스어에도 행복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서로 다른 개념 세계에 거주한다.”...“내 생각에 eudaimonia에 가장 가까운 표현은 ‘삶에서의 성공’일 수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지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즉, 끔찍하게 들릴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자신이 되라’는 명령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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