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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General Edu > Volume 19(1); 2025 > Art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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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본고에서는 지적 능력[역량]과 지성을 혼용하여 사용하지만, 필요에 따라 판단력, 표현력, 의사소통능력 등 개별적인 능력을 지시하거나 통칭할 때 ‘지적 능력’, 이런 지적 능력을 모두 갖춘 품성을 ‘지성’ 개념으로 구분하여 사용한다. 지성은 위의 뜻과 정확히 같지 않지만 nous의 번역어로도 사용한다. nous의 뜻에 대해서는 각주 11) 참조.
2) 원래의 eudaimonia는 eu(좋은, 잘)+daimon(수호신)의 결합어로, 신에게서 오는 행운 같은 것이거나 신과 같은 것이란 뜻인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잘 사는것’ 혹은 ‘잘 행동하는 것’으로 설명하면서, 탁월성(aretē)에 따르는 영혼의 활동, 완전한 생애, 완전성, 자족성, 그 자체로 선택할 만한 것, 최고선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여기서는 번역어로 통상적인 ‘행복’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맥락에 따라 탁월성이 실현되는 구체적인 삶의 형태를 지시하는 뜻으로 ‘좋은 삶’을 혼용한다.
4) 『법률』 1권(643c-645c), 2권(652a-653c)의 교육의 본질과 목적에 대하여 서술된 부분과 『국가』 6권(505a-511e), 9권(580b-587a), 그리고 『필레보스』 전반을 살펴보면 좋음(agathon)이 앎(epistēmē), 실천적 지혜(phronēsis), 지성(nous)인지 아니면 즐거움(hēdonē)인지 문제가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쟁점이 되는 행복(eudaimonia)과 ‘좋음’ 등의 다른 개념과의 연결점은 『법률』 2권(662b-663b)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플라톤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 가장 올바른 삶을 사는 사람인지, 가장 즐거운 삶을 사람인지 묻는다. 그러면서 가장 올바른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주장을 견지하면서 올바른 사람이 얻는 ‘좋음’의 그어떤 것도 즐거움과 떨어질 수 없는 것이며 즐거운 것과 올바른 것,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은 갈라놓을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5)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천학문인 윤리학을 이론학과 제작학으로 구분하면서, 윤리학을 배우는 목적은 수강생들에게 많은 이익을 주는 것이라고 본다(EN, 1094a24-27,1095a11). 그러면서 윤리학이 가장 으뜸 학문인 정치학의 일종이거나 정치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언명한다(『대윤리학』(Magna Moralia), 1181a25-1181b30).여기서 정치학은 (1) 시민의 공적 생활을 위해 필요한 기술적 숙련을 위한 교육 커리큘럼을 만들고, (2) 교육이 시민의 도덕적 품성과 행위를 이끌도록 입법하며관심을 기울이는 학문이다. 이런 까닭에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8권이 교육학이며, 정치가는 곧 교육자가 된다(EN, 1권 2장). 이는 윤리학과 정치학이교육을 매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하다.
6) aretē의 통상적인 번역어는 도덕적으로 뛰어난 품성을 뜻하는 ‘덕’(德)이다. 본 연구에서는 행복과의 관련성이 고려될 때, 원래의 의미에 가까운 훌륭한 품성을뜻하는 ‘탁월성’과 문맥에 따라 ‘덕’과 ‘미덕’을 혼용하여 사용한다. 플라톤의 aretē 뜻의 쓰임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필레보스』,48e 각주 313) 참조.
7) 본 연구에서는 ‘행복’(eudaimonia) 개념이 ‘기쁨’(chairein)이나 ‘즐거움’(hēdonē), ‘잘삶’보다는 ‘잘 삶’ 또는 ‘좋은 삶’의 뜻으로 쓰이는 것이 교양교육 이념에더욱 부합하다는 입장이다. ‘잘삶’을 통상적으로 ‘부유하게 살다’라는 뜻으로 풀이하는 ‘잘살다’의 명사형으로 한정한다면 eudaimonia의 번역어로 적합하지않다. 또한 ‘to zēn eu’ 또는 ‘to eu zēn’도 ‘훌륭하게 살기’를 뜻하지, ‘부유하게 살다’나 소극적으로 ‘탈 없이 지내다’라는 의미가 아니다. ‘잘’과 ‘살다’를붙여 쓰는 ‘잘살다’의 의미가 아닌 ‘훌륭하게 살다’의 의미를 명확히 보여주는 의도로 ‘잘 삶’으로 띄어 써 구분할 수 있다. 『필레보스』, 67b 각주 445) 참조.
8) 이 주제는 각각 EN의 1권 7-13장과 10권 6-8장에서 얘기하는 행복이 모순이라는 문제와 연결된다. 1권에서는 인간의 전반적인 다양한 삶의 가치나 좋은 상태의 지속적 실천을 행복으로 보는 반면에 10권에서는 관조(thēoria)라는 한 가지 이성적 활동으로 행복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는 각각 포괄론(inclusive thesis)과 지배론(dominant thesis)이라 부를 수 있는데, 어느 해석이 맞는지 주석가들의 입장이 갈라진다(유원기, 2013, p. 2). 이에 대해 포괄론을 내세운 장미성과 달리 유원기는 『영혼에 관하여』 (De Anima) 2권 3장에서 ‘영혼의 포용성’ 개념을 가져와 최상의 영혼인 사고혼(rational soul)이 하위 영혼을 포용하여 포괄론과 지배론의 대립을 해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논거를 덧붙일 수 있다. 인간은 생명체로서 동물적 욕구를 갖고 있지만 동시에 이성을 가진다. 그렇지만 본능과 이성이 충돌되는 상황을 모순이라고 할 수 없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의 욕구는 이성과 충동하지 않는다. 다만 일방적인 한 쪽의 욕구를 충족하는 일은 장애가 따르는데, 여기서 이성은 절제의 형식으로 탁월성을 실현할 수 있다. 반면에 상대방의 의사와 관계없이 자신의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서 강제하면 욕구충족은 폭력을 수반하고 이성은 무력해진다. 이런 비열한 야수성으로 오는 성취는 행복과 동일시될 수 없으며 공허감이 수반되어 진실을 오도하던지, 자발적인 망각을 의도한다. 이에 이성적인 자제가 요청되며 실천척 지혜(phronēsis)가 필요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행복을 이끄는 삶의 지혜이다.이를 관조가 실행된 예시로 본다면 포괄론과 지배론은 하나로 통합된다. 그러나 진리를 탐구하고 숙고하는 그 자체가 목적일(te los) 수밖에 없는 활동으로 관조를 엄격하게 제한하면 대립은 유지된다. 결국 이런 상황이 해소되지 않으면 관조하는 삶과 탁월성의 실천이라는 행복을 위한 두 개의 길이 여전히 앞에 놓여 있다.
9) ‘artes liberales’는 ‘engkyklios paideia’의 번역어로 일반교육(general education)이라는 뜻으로 소피스트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그런데 ‘eleutheroi technai’(자유교육) 의미도 가지고 있어, 여기서 또한 일반교육, 인성교육의 의미가 따라 나오는 데, 이런 자유교육의 이념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발견할 수 있다(이창우, 2009, pp. 45-46).
11) 여기서 logos와 nous의 관계를 짚어보자지. “성 또한 양쪽 방향에서 최종적인 것들에 관련한다. 제일의 명제(horos)[항]에도 관련하고 최종명제에도 관련하는것은 지성(nous)이지 이성(logos)이 아니기 때문이다(EN, 1143a35-36).”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언급과 관련하여 EN의 각주 43)에서는 “지성(nous)은 넓은의미의 지적 작용 일반, 혹은 훈련에 의해 성장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가리킨다기보다 ‘직관’이나 ‘직관적 이해’에 가까운 정신 작용 내지 그러한 정신적 능력에 가깝다”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이렇게 nous를 직관, logos를 추론으로 보는 일반적인 해석에 도전하는 흥미로운 논문이 있다(Lee & Long, 2007). 이 논문은 오히려 nous가 논리적(logical)일 수 있고, logos가 직관적(noetic)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nous와 logos의 해석과 관련하여 여전히 쟁점이 되는 부분이다. logos 개념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본고 3장, 플라톤의 nous와 logos에 관해서는 『국가』, 각주 82) 참조.
13) 이때 교양과 지성의 차이를 엄격하게 구분하기는 어려울 듯한데, 지성이 보다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품성으로 보인다. 신문의 책 소개 지면을 보면 ‘교양’과 ‘학술/지성’으로 구분되어 있는 경우가 있는데, 교양 지면은 시민으로서 갖추어야할 상식과 소양, 인성에 관한 책을 소개하고, 학술/지성 쪽은 특정 영역의 지식인이 관심을 가질만한 보다 전문적인 정보를 다룬다. 마치 대학의 교양수업이 같은 주제를 다루어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다양한 지식을 폭넓게 익히는 반면에, 전공은 해당하는 내용에 대해 보다 깊은 지식과 이론을 탐구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다.
14) 한상수(2007, pp. 540-541)는 인간이 ‘정치적 동물’이라는 명제가 정의(definition)가 아니라 기술(description)이고 ‘이성적 동물’이 정의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이 명제의 술어 중 적어도 하나는 정의의 구성요소인 유(genus) 또는 종차(differentia)이어야 하는 데, 이런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고 본다. 그러면서 아리스토텔레스 가 『동물지』(497b-488a)에서 다른 동물도 정치적이라고 말했다는 근거를 제시한다. 이는 일면 타당하다. 그러나 ‘정치적’이라는 의미를 동물에게는 ‘군집’이나 ‘협업’의 의미로 보고, 인간에게는 동물들이 가질 수 없는 ‘폴리스를 구성’(politikon)하는 뜻으로 다르게 사용하면 이 명제를 정의라고 주장할 수 있다(『정치학』, 1280a32-33). 한편 위와 같은 주장은 똑같은 논리로 이성적 동물이라는 정의에도 적용할 수 있다. 원래 “이성적 존재는 신”이라는 반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형이상 학』, 1072b). 그런데 logos는 이성 이외 ‘논리’, ‘언어’, ‘말씀’ 등으로 번역된다. 이중 어느 용어가 가장 합당한지 논란이 되는데, 사실에 부합하는 인식능력과 판단력을 지칭할 때 ‘이성’, 합리적 절차에 따른 타당한 추론 또는 계산능력을 ‘논리’, 위와 같은 사유과정을 통해 의미를 전달하는 말과 소리가 ‘언어’, 하나님의 계시와 가르침을 뜻하는 기독교의 용어를 ‘말씀’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어떻게 보면 logos가 여러 뜻을 따로 가진 것이 아니라 어떤 차원에서 어떻게 쓰이는가에 따라 다른 의미가 강조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위의 논변은 ‘이성’, ‘정치성’ 개념의 해석문제로 볼 수 있다. 이성을 중심개념으로 인간의 정의 또는 동물의 차이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은 조대호(2010), 두 정의의 관계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한석환(2008) 참조. 한편 ‘정치적 동물’을 세네카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회적 동물’로 번역하는 데, 이 문제에 관해서는 아렌트(2017, 91-98) 참조.
15) 여기서 기술에 따른 변화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정도의 차이’로 평가할 수 있다. 다른 동물의 행위가 기존의 상태를 변형하는 물리적 기술이라면 제작에 관여하는 인간의 기술은 경우에 따라 없던 것을 새롭게 창조하는 화학적 변형으로서 질적 변화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창작품의 질적 변화일 뿐이다. 이것은 삶의 일부분에 편의를 제공하는 일시적인 기쁨을 주는 외적 조건일 뿐, 행복의 근본적 조건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새 옷, 맛있는 음식, 좋은 집 같은 것에 의해 행복이 인생 전반에 걸쳐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16) 물론 이때의 인간은 시대적 한계를 가진다. 어린이와 구별되는 성인, 여자와 구별되는 남자, 노예와 구별되는 주인으로서 성인 남자가 그리스 국가(polis)에서 유일한 자유인이며 완성된 능력과 권리를 가진다.
17) 여기서는 주제에 맞게 교양과 인문학의 관계를 밝히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반면 인문학과 인문과학의 차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인문과학이 탄생하는 시점을 살필 필요가 있다, 기존의 인문학에서 탈피하여 과학적 방법론에 근거한 인문과학을 주창한 최초의 학자로 딜타이(Dilthey)를 지목할 수 있다. 그의 정신과학 입문(Einleitung in die Geisteswissenschaft, 1883)은 현대 인문과학의 토대를 마련한 주요한 저작으로 평가받는다. 이 저서에서 그는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을 구분하고, 인문과학이 인간의 내적 경험과 문화를 이해하는 학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외적 대상에 대한 객관적, 실증적 방법론을 추구한 자연과학과 달리 인문과학에서 인간의 삶과 역사에 대한 객관적 이해(Verstehen)를 도모하는 해석학적 방법론을 강조한다(Dilthey, 2014 참조).
18) paideia는 자유교양학문과 교양, 교육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Bildung, humanitas, artes liberales, paideia(paedeia), engkyklios paideia(encyclo paedeia)는 맥락에 따라 대치가 가능하다. 이와 관련하여 이창우(2009, pp. 44-46) 참조.
19) 이해를 위해 원래의 번역문을 약간 다듬었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I. Qui verba Latina fecerunt quique his probe usi sunt, ‘humanitatem’ non id esse voluerunt, quod volgus existimat quodque a Graecis philanthropia dicitur et significat dexteritatem quandam benivolentiamque erga omnis homines promiscam, sed ‘humanitatem’ appellaverunt id propemodum, quod Graeci paideian vocant, nos eruditionem institutionemque in bonas artis dicimus. Quas qui sinceriter cupiunt adpetuntque, hi sunt vel maxime humanissimi. Huius enim scientiae cura et disciplina ex universis animantibus uni homini datast idcircoque ‘humanitas’ appellata est. II. Sic igitur eo verbo veteres esse usos et cumprimis M. Varronem Marcumque Tullium omnes ferme libri declarant. Quamobrem satis habui unum interim exemplum promere.
20) 이 논쟁의 핵심은 humanitas와 humanimus 두 개념의 내포와 외연 문제이다. 이에 대한 간략한 논쟁사와 참고문헌은 안재원 (2010, pp. 93-94) 각주 5) 참조.
21) 이 부분과 관련 검토해야 할 논변이 있다. Everson (1998, pp. 99-100)에 따르면 “만일 하프를 잘 연주하는 사람처럼, 인간의 본질적인 기능을 잘 수행하는 사람이 행복하다면, 하프를 잘 연주하는 사람은 행복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로 볼 때, 하프를 잘 연주하는 사람을 탁월하다고 할 수 있지만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 동일한 맥락으로 인간의 기능(ergon)을 잘 수행하는 사람은 탁월하다고 할 수 있지만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김현, 2003, p. 240 각주 20)에서 재인용).” 그러나 여기서 Everson.은 논리적 비약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하프 비유는 연주자의 기능, 말하자면 기술(technē)과 관련한 탁월성으로서 인간의 행복을 위한 기능으로 일반화할 수 없다. 연주자로서 ‘잘함’은 행복의 구성요소로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행복을 위한 또 다른 외적 조건이지, 인간으로서의 행복을 충족시키는 본질적인 기능이 아니다. 오히려 연주를 대하는 연주자의 바른 자세가 탁월성으로서 행복의 기능이라 할 수 있다.
22) 이와 관련 Moran(2018, pp. 98-99)의 문제의식을 소개하면서 ‘eudaimonia’개념 연구의 필요성을 대변하겠다. “나(Moran)는 eudaimonia와 행복(happiness) 사이에 개념적인 불일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eudaimonia는 우리가 오늘날 말하는 행복과 같은 의미가 아니었다고 본다. 그가 이 용어를 소개할 때, eudaimonia를 ‘잘 행하다’ (to eu prattein) 또는 ‘잘 살다’ (to eu zen)와 동의어로 사용했다. 영어에는 eudaimonia에 해당하는 단어나 표현이 없고, 그리스어에도 행복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서로 다른 개념 세계에 거주한다.”...“내 생각에 eudaimonia에 가장 가까운 표현은 ‘삶에서의 성공’일 수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지는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즉, 끔찍하게 들릴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자신이 되라’는 명령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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