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제자해>의 서두에 반영된 철학적 사유의 전거(典據) 분석
[
그림 1]은 『훈민정음』 해례본 가운데 <제자해> 시작 부분을 보인 것이다. 가장 먼저 첫 행에 권두 서명(卷頭書名)을 ”訓民正音解例”이라 하여 ≪해례≫가 시작됨을 보여 준다.
2) 이어서 2행에 제시된 편목(編目) ”制字解”는 글자를 만든 원리에 대해 설명한 텍스트임을 알려준다. 이 가운데 <제자해>의 서두 부분을 발췌해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그림 1]
天地之道∘一陰陽五行而已。坤復之間爲太極∘而動靜之後爲陰陽。凡有生類在天地之間者∘捨陰陽而何之。故人之聲音∘皆有陰陽之理∘顧人不察耳。今正音之作∘初非智營而力索〭∘但因其聲音而極其理而已。理旣不二∘則何得不與天地鬼神同其用也。正音二十八字∘各象其形而制之。
3) [정음해례1ㄱ:1-1ㄴ:3]
“天地之道∘一陰陽五行而已。”라는 문장으로 <제자해>의 내용이 시작되는데, 이 연구에서는 ”正音二十八字∘各象其形而制之。”까지를 서두로 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正音二十八字∘各象其形而制之。”는 문자학적 제자 원리로 파악하여 기능상 독립된 의미 단락으로 간주하지만, 서두의 내용을 논리적으로 해석해 보면 이 문장을 반드시 포함시켜야 할 필요성이 대두된다(이에 대해 3.2.에서 다룸). <제자해>의 서두 부분은 훈민정음의 철학적 원리와 제자 원리를 담고 있다. 훈민정음 제자의 대원칙을 밝히고 있어 매우 함축적이지만 그 나름의 완결성을 지닌다. 이 서두를 구성하고 있는 문장들 가운데 철학적 사유가 반영된 표현들을 중심으로 하나씩 자세히 살펴보도록 한다.
(1) 天地之道∘一陰陽五行而已。 [정음해례1ㄱ:3] (천지의 도는 오직 음양 오행일 뿐이다.)
<제자해>의 첫 문장으로서 훈민정음 제자에 대한 철학적 근본 원리를 가장 먼저 내세우고 있다. ”천지의 도(道)는 오직 음양과 오행뿐이다.”라고 하여 ‘而已(~뿐이다)’라는 표지를 사용해 철학적 근본 원리를 매우 강하고 단호한 어조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철학적 원리를 토대로 한 훈민정음 제자(制字)에 대해 설명하겠다는 의도를 나타낸다. 이 첫 문장은 철저히 역학적 사유에 기반한 내용인 만큼 그 전거(典據)가 분명히 존재할 것으로 보이는데, 기존 국어학계의 논의에 따르면 ≪주역≫주<계사전> 상 5장의 첫 대목에 기술된 ”一陰一陽之爲謂道”(한 번 음하고 한 번 양하는 것을 일컬어 도라고 한다.)를 <제자해>에서는 ”天地之道 陰陽五行而已”(천지의 도리는 오직 음양뿐이다.)라고 바꿔 표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상 홍기문, 1946;
남성우, 1979;
강신항, 2010;
김만태, 2012).
≪주역≫ <계사전>에는 많은 명제들이 기술되어 있는데, <계사전> 상의 5장 첫 대목인 ”一陰一陽之爲謂道”가 핵심 명제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계사전>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구절이라 전한다. ≪주역≫ <계사전>에 따르면 ‘한 번 음이 되었다가 한 번 양이 된다’는 것은 음과 양 사이에 변화하는 관계를 말한 것인데, 단순한 대립의 관계가 아니라 음과 양이 갈마드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한 번 음하고 한 번 양하는 것을 ’도(道)’라고 하였으니 ‘일음지(一陰之)’와 ‘일양지(一陽之)’ 그 자체가 ‘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일음지(一陰之)’와 ‘일양지(一陽之)’가 갈마들어 음양 사이에 소멸하고 성장하며 조화를 이루거나 상호 전환하는 것이 바로 ‘도(道)’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도’는 음양 사이에 드러나며 음양이 교대하는 관계, 음양의 미묘한 변화, 음양의 상호 전환하는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 이것이 一陰一陽之爲謂道”의 진정한 의미이다. 이렇게 본다면 음양의 도는 자연의 이치대로 만물을 고무시키고 추진하며 변화시키고 자라게 하여 생장을 돕는다.
이처럼 ≪주역≫주<계사전>에 ”一陰一陽之爲謂道”라는 명제를 분명히 제시함으로써 음양을 주역의 도(道)로 삼았다. ≪주역≫은 음양의 이치를 말한 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一陰一陽之爲謂道”라는 명제의 파급 효과는 대단하다. ”一陰一陽謂之道”에 대해 정이천(程伊川)은 ”道非陰陽 所以一陰一陽道也”하고, 주회암(朱晦庵)은 ”陰陽只是陰陽 道是太極 所以一陰一陽者也”라고 주석을 내었다. 이러한 내용은 ≪주자어류≫
4) 권 94의 122조목에서 확인할 수 있다.
問: 一陰一陽之爲謂道是太極否
曰: 陰陽只是陰陽 道是太極 蓋所以一陰一陽者也
(물었다. ”한 번 음하고 한 번 양하는 것을 도라고 한다는 말은 태극을 가리킵니까?
답했다. ”음양은 음양일 뿐이다. 도가 태극이니 대개 한 번 음하고 한 번 양하게 하는 자이다.)
이 외에도 『성리대전』 권 12에 수록된 ≪황극경세서≫ 6권 중 문인들의 기록이라고 알려진 <관물외편> 하에서도 ≪주역≫의 ”一陰一陽之爲謂道”에 관한 주석이 자세히 담겨 있다.
一陰一陽之爲謂道 道無聲無形不可得而見者也 故假道路之道而爲名 人之有行必由乎道 一陰一陽天地之道也 物由是而生由是而成者也
(한 번 음이 되고, 한 번 양이 되는 것을 도라고 일컫는다. 도는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어서 깨달아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길이라는 뜻의 도라는 글자를 빌려서 이름으로 삼았는데, 사람이 다닐 때 반드시 길로 다니기 때문이다. 한 번 음이 되고, 한 번 양이 되는 것이 천지의 도이다. 만물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나고 이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주자 및 주학자들의 주석을 종합해 보면 ”一陰一陽” 자체가 ‘도(道)’가 아니고, ”一陰一陽” 되는 것, ”一陰一陽” 하게 하는 것이 ‘도(道)’이다. 세상 만물과 모든 일, 사람을 포함한 천지자연의 본질적인 속성이 바로 ‘음양의 도’인 것이다. 한편, ”天地之道 一陰陽五行而已”의 문체와 관련하여
박동규(2001, p. 127)에서는 ≪황극경세서≫에 나오는 일부 문장을 변형시켜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立天之道曰陰與陽 立地之道曰柔與剛 天地之道 不過陰陽剛柔而已
(‘천의 도를 세워 음과 양이라 하고, 지의 도를 세워 유와 강이라고 한다.’라고 하였으니 천지의 도는 불과 음양과 강유일 뿐이다.)
위 문장은 ≪황극경세서≫ 3권 <관물내편> 1에 기술된 주석인데, 이 문장의 첫 구절 ”立天之道曰陰與陽 立地之道曰柔與剛”은 ≪주역≫ <설괘전(說卦傳)> 2장
5)에 ”昔者聖人之作易也 將以順性命之理 是以立天之道曰陰與陽 立地之道曰柔與剛 立人之道曰仁與義”
6)7)이라고 한 말 가운데 ”立天之道曰陰與陽 立地之道曰柔與剛”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주역≫을 지은 성인이 하늘의 도는 음양으로 확립했고, 땅의 도는 강유로 확정했다는 사실을 직접 인용하면서 이 말에 의거하여 ‘천지의 도는 불과 음양과 강유일 뿐이다(天地之道 不過陰陽剛柔而已)’라는 주석을 내놓은 것이다.
박동규(2001)에 따르면 이 주석 부분을 <제자해>에서 ”天地之道 一陰陽五行而已”로 변형시킨 것이라 보았는데, 두 문장 모두 천지의 도는 음양강유 혹는 음양오행뿐이라는 입장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표 1>과 같이 두 문장은 구조와 표현이 대단히 유사한데, 문장의 유사함을 올바로 파악하려면 표현의 양식만 가져온 것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먼저 형식적 측면에서 두 문장 모두 어조사 ‘而已’를 사용하여 문장을 종결하고 있다. 한문 문장에서 ‘而已’는 문장 끝에 놓여 ‘~뿐이다’, ‘~에 불과하다’, ‘~에 지나지 않는다’ 등의 뜻을 나타내며, 한정의 종결사로서 한정 부사와 호응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제자해>의 ”天地之道 一陰陽五行而已”에서는 ‘而已’가 부사 ‘一’(오직)과 호응되며, ≪황극경세서≫의 ”天地之道 不過陰陽剛柔而已”에서는 ‘而已’가 부사 ‘不過’(불과)와 호응을 이룬 것을 볼 수 있는데, ‘而已’가 사용되는 한문 문장의 일반적 특징을 두 문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두 문장 모두 ‘천지의 도(天地之道)’를 설명한 것으로 이 ‘天地之道’에 대한 개념 규정을 명확히 하고자 ‘而已’를 사용함으로써 ‘天地之道’가 의미하는 바를 분명하게 한정한다.
<표 1>
≪황극경세서≫의 문장과 <제자해>의 문장 비교
天
|
地
|
之
|
道
|
不 |
過 |
陰
|
陽
|
剛 |
柔 |
而
|
已
|
|
天
|
地
|
之
|
道
|
一 |
陰
|
陽
|
五 |
行 |
而
|
已
|
그 다음으로 의미적 측면을 보면 두 문장 모두 자연의 이치와 천지 만물의 변화 법칙에 의거한 철학적 사유의 맥락에서 쓰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대 ‘天地之道’에 대한 정확한 개념 이해가 전제된 상황에서 본질적 의미를 훼손하지 않고, ‘天地之道’의 개념을 일반화하여 가장 핵심적인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 사용된 어휘에서 ‘陰陽五行’과 ‘陰陽剛柔’에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그 의미는 역학적 지식에 기반한 것으로 일맥상통한다. 결과적으로 이 두 문장이 의미 및 형식은 거이 일치하는 동형 구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제자해>의 ”天地之道 一陰陽五行而已”는 ≪황극경세서≫의 ”天地之道 不過陰陽剛柔而已”를 단장취의(斷章取義)한 것이라 보기 어렵다. <제자해>의 ”天地之道 一陰陽五行而已”의 본질적 의미는 ≪주역≫ <계사전>에 근저(根底)를 두고, 이를 명확하게 정리한 ≪황극경세서≫의 표현 방식을 취한 것일 가능성도 열어 둘 필요가 있겠다.
(2) 坤復之間爲太極∘而動靜之後爲陰陽。 [정음해례1ㄱ:4] (곤괘와 복괘 사이가 태극이 되고, 이것이 움직이고 멈춘 후에 음양이 된다.)
<제자해>의 두 번째 문장 또한 두 개의 절로 이루어져 있는데, 기존 연구 결과에 따르면 앞절인 ”坤復之間爲太極”의 전거는 소옹의 발언이라 하고, 뒷절인 ”而動靜之後爲陰陽”의 전거는 주돈이의 ≪태극도설≫이라고 보고 있다. 이 문장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뒷절인 ”而動靜之後爲陰陽”부터 해당 전거를 살펴보도록 한다.
無極而太極 太極動而生陽動極而靜 靜而生陰靜極復動 一動一靜互爲其根 分陰分陽兩儀立焉 陽變陰合以生水火木金土 五氣順布四時行焉 五行一陰陽也 陰陽一太極也 太極本無極也
(무극이면서 태극이다. 태극이 동하여 양을 낳고, 동이 극에 달하면 정한다. 정하여 음을 낳고, 정이 극에 달하면 다시 동한다. 한 번 동하고 한 번 정하는 것이 서로 뿌리가 되고, 음으로 나뉘고 양으로 나뉘어 양의가 이루어진다. 양이 변해 음에 합하여 수, 화, 목, 금, 토가 생성되며, 오기가 두루 퍼져 사시로 나간다. 오행은 하나의 음양이고, 음양은 하나의 태극이며, 태극은 본래 무극이다.)
기존 연구에서는 ≪태극도설≫의 ”太極動而生陽動極而靜 靜而生陰靜極復動 一動一靜互爲其根 分陰分陽兩儀立焉”이라고 설명한 내용을 <제자해>에서 ”太極而動靜之後爲陰陽”으로 요약한 것이라 보고 있다. 이는 ‘태극’이 ‘동(動)’해서 ‘양(陽)’을 만들고, ‘동(動)’이 극에 달하면 ‘정(靜)’이 되고, ‘정(靜)’에서 ‘음(陰)’을 만들고 ‘정(靜)’이 극에 달하면 다시 ‘동(動)’한다는 순환 이론에 기반을 둔 것이다. 또한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멈추는 것이 서로 뿌리가 되어 음으로 갈리고 양으로 갈리어 양의가 맞서게 된다고 하고, 다시 양이 변하여 음에 합하여 오행이 생긴다 하였다.
부연하면 주돈이는 태극의 움직임과 고요함[動靜]을 통하여 현실로 구체화되어 드러난 양상이 음양이라는 양의(兩儀)이며, 이 음양은 다시 변합(變合)을 통해 오행과 만물을 이룬다고 보았다. 또한 음양에서 오행이 생겨나는 것에 대해 주돈이는 ‘양의 변화와 음의 결합[陽變音合]’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주돈이에 있어서 음양과 오행은 만물을 화생(化生)시키는 요소가 된다. 이처럼 태극, 동정, 음양의 작용이 다른 다섯 가지의 작용[五行]으로 충만함으로써 사시가 운행한다. 그러나 오행은 어디까지나 음양의 운동을 상세히 표현한 것이지 본래 음양과 다른 것은 아니며, 음양 또한 태극의 운동을 상세히 표현한 것으로 본질적으로 태극에 그 근본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五行一陰陽也 陰陽一太極也].
위 ≪태극도설≫의 내용과 아울러 반드시 함께 살펴봐야 할 문헌이 있는데 바로 ≪주역≫ <계사전>이다. 이 문헌에서 ‘태극(太極)’이라는 용어가 가장 처음 등장한다고 알려져 있다.
(역에는 태극(太極)이 있는데 이것이 양의(兩儀)를 낳고, 양의가 사상(四象)을 낳고, 사상이 팔괘(八卦)를 낳았다.)
위의 내용은 ≪주역≫ <계사전> 상에 기록되어 있는데 태극에서 양의와 사상, 그리고 팔괘가 나온다는 위 구절은 역괘(易卦) 발생을 압축적으로 말한 것이다. <계사전>에서는 태극이 음양으로 나누어지고 다시 사상이 되고 팔괘가 결정되며 팔괘가 있으면 곧 길흉(吉凶)을 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역≫ <계사전>의 작자는 우주 생성의 과정을 말했을 뿐 직접적으로 태극을 명확하게 규명하지는 않았다. ‘태극’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생성 변화하는 모습을 음양, 사상, 팔괘를 통하여 표현하고 있고, 그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원리로서 태극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태극도설≫과 비교해 보면, 주돈이는 ≪태극도설≫에서 태극이 동정을 반복하여 음양을 낳고 오행을 낳으며 천지만물이 생겨남을 말하고 있는 데 반해 ≪주역≫ <계사전>에서는 음양에서 오행이 나온다고 하지 않고 단지 사상에서 팔괘가 나온다는 설명만 하였다. 그리고 ≪주역≫에서 보여주는 변화는 주로 음양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데 비해 ≪태극도설≫에서는 태극의 동정(動靜)의 과정을 통한 음양의 파생을 설명한다. <계사전>에서 말하는 ‘태극’은 양의, 사상, 팔괘의 원류, 즉 세상만사와 모든 만물의 원류(源流)로 이해되는 데 비해 ≪태극도설≫에서의 ‘태극’은 우주 만물의 시원(始原)이면서 동시에 생성 원리이자 순환 원리를 상징한다.
이렇듯 ≪주역≫ <계사전>은 ‘태극-양의-사상-팔괘’로 이어지는 순차적 전개를 통해 우주 생성의 과정을 표현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 ‘태극’이라는 개념에 대해 철학적으로 논의할 만한 정의가 아직 없었다. 하지만 북송대 주돈이에 의해 그 전기가 마련된다. 당시 성행하던 도가와 불교의 우주론을 받아들인 주돈이는 처음으로 태극과 음양오행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우주 생성의 체계를 규정했다. 이로 말미암아 비로소 태극과 음양오행이 중요한 철학적 범주로 포함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상 김만태, 2012, pp. 61-62 참고).
이처럼 주돈이의 ≪태극도설≫에서 제시된 우주론은 ≪주역≫ <계사전>에서 한 단계 진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주돈이는 그의 우주론을 전개하는 데 한대(漢代)에 융성했던 음양오행설과 ≪주역≫ <계사전>의 문장을 합치시켜 ‘무극⋅태극→음양→오행→만물’로 발전하는 만물 생성의 이론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런데 태극은 음양오행이 생겨나도록 작용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 작용을 주관하는 주체를 표현하는 명칭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주돈이는 만물의 생성 변화를 주관하는 형이상학적 원리의 개념으로 ‘무극(無極)’이라는 용어를 그의 우주론 체계에 끌어들이게 되고, ≪태극도설≫의 첫머리에 이러한 형이상학적 세계의 본체를 ‘無極而太極’으로 표현한 것이다.
9) 결과적으로 무극은 모순과 대립을 지양한 완전한 조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인간의 오관(五官)을 통해서는 파악될 수 없는 존재의 근원이며 또 시간적 제약성으로부터 초월해 있다.
10) 그러므로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우주의 본체는 ‘무극(無極)’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무극은 모든 존재를 창출해 내는 모태로서 실재한다. 이러한 무극은 생성의 근원자로 파악되는 동시에 생성의 단초로 이해되기도 하는데, 이 생성의 단초로 이해될 때는 ‘태극’이라 말한다. 따라서 무극과 태극은 그 실제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다만 무시무종(無始無終)의 형이상적 본질의 근원자로서의 입장에서는 ‘무극’이 되고, 유시유종(有始有終) 생성의 단초의 입장에서 보면 ‘태극’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무극과 태극의 관계는 동일성과 차별성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그 근거에서 보면 동일하나 그 작용의 측면에서는 차별적이기 떄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관계를 주돈이는 ”무극이면서 태극이다(無極而太極)”라고 언표한 것이다(이상
함현찬, 2007, pp. 72-80 참고).
이와 같이 주돈이의 ≪태극도설≫과 그의 이론적 토대가 되는 ≪주역≫ <계사전>에서 ‘태극’에 대한 개념과 의미를 살펴볼 수가 있다. 그런데 <제자해>에서는 이 ‘태극’을 ”坤復之間爲太極”이라 설명하고 있다. 서두 두 번째 문장의 앞절에 해당하는데, 이에 관하여 이 구절의 출처가 소옹(邵雍)의 발언이라 전해진다(이상
권재선(1988),
박동규(2001),
곽신환(2016),
조희영(2018) 등).
11) ”坤復之間爲太極”의 전거가 소옹의 발언이라 할 수 있는 근거를 정리해 보면 첫째, ≪태극도설≫에서는 ‘坤復之間’을 가지고 무극을 설명하지 않았고, 『성리대전』에 수록된 어떤 문헌에서도 ‘坤復之間’을 ‘태극’(혹은 ‘무극’)과 직결한 설명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조희영(2018, p. 128)에서의 주장과 같이 ‘곤복과 복괘 사이’를 ‘무극’이라 의미를 부여한 사람은 소옹뿐이며, 이것은 그의 ‘64괘방원도’로만 설명이 가능하다는 데 있다.
『성리대전』에 수록된 소옹의 책 ≪황극경세서≫에는 직접 나와 있지는 않지만, 『성리대전』 권 12에 실린 주희의 ≪역학계몽≫ 2 <원괘획>에 ”坤復之間乃無極”이라는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진한 글씨체 및 밑줄 필자).
惑問: 無極如何設前
朱子曰: 邵子就圖上說循環之意 自姤至坤是陰含陽 自復至乾是陽分陰 坤復之間乃無極 自坤反姤是無極之前
(어떤 사람이 물었다. 무극 이전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주자가 대답했다. 소옹은 <원도>에서 순환의 뜻을 설명했다. 구괘에서 곤괘에 이르기까지 음이 양을 품고 있고, 복괘에서 건괘에 이르기까지 양이 음을 나눈다. 곤괘와 복괘 사이가 무극이고, 곤괘에서 구괘까지 돌아가가는 것이 무극 이전이다.)
위 주자의 대답에서 ”坤復之間乃無極”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邵子就圖上說循環之意”이라 하여 소옹의 설명에 따른 것임을 분명히 말해 준다. 여기서 ‘무극’의 개념을 소옹의 ‘원도(圓圖)’로 설명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때 ‘원도’는 소옹의 ‘64괘방원도’를 일컫는다.
12)
[
그림 2]가 바로 소옹의 ‘64괘방원도’인데 그림을 보면 복괘(復卦)에서 건괘(乾卦)까지는 원도의 왼쪽에 자리 잡고 있다. 양효 ‘’가 많고 음효 ‘’가 적어 양의 영역이다. 그리고 구괘(姤卦)에서 곤괘(坤卦)까지는 오른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음효 ‘’가 많고 양효 ‘’가 적어 음의 영역이다. [
그림 2]에 표시된 사각의 도형은 필자가 표시한 것으로 ‘곤괘(坤卦,

)와 복괘(復卦,

) 사이’, 즉 ”坤復之間乃無極”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그림 2]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태극’이라는 용어가 ≪주역≫의 <계사전>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소옹은 ‘태극’이 무엇인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를 그 존재를 괘를 가지고 밝히고자 하였다. 그래서 채택된 것이 ‘곤괘와 복괘 사이’이다. 여기서 ‘곤괘와 복괘 사이’는 공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만나는 지점으로 곤괘에서 복괘로 넘어가는 때를 의미한다. 그리고 소옹은 ”坤復之間乃無極”이라 하여 ‘태극’ 대신 ‘무극’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
그림 2]에서 64괘 괘도상 곤괘(坤卦)로부터 구괘(姤卦)까지 거꾸로 올라가는 지점이 ‘무극 전(無極前)’임에 대하여 곤괘(坤卦)에서 복괘(復卦)에 이르는 지점이 ‘무극(無極)’이다. 이렇게 ‘곤괘와 복괘 사이’를 ‘무극’이라고 한 것은 음기가 막 사라지자마자 양기가 처음으로 생기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며, 그 지점에서 볼 수 있는 형상이 없기 때문에 ‘없을 無’를 써서 ‘무극’이라 말한 것이다.
13) 이처럼 소옹은 음양이 서로 만나는 지점을 가지고 ‘무극’을 논하였다.
이와 같이 소옹의 ‘64괘방원도’를 통해서 설명되는 ”坤復之間乃無極”를 <제자해>에서는 ”坤復之間爲太極”이라 표현하였다. 곤괘와 복괘 사이가 태극이라 함은 곧 음기(陰氣)의 성장이 멈추고 양기(陽氣)가 자라나는 시점, 즉 생명이 태동하기 시작하는 때가 바로 ‘태극’이다. 그래서 모든 자연의 주장이 되는 근원을 ‘태극’이라 규정한 것이다[坤復之間爲太極]. 이러한 본원(本源)이 되는 ‘태극’이 동(動)하고 정(靜)한 작용을 거쳐 ‘음양(陰陽)’이 생겨난다는 것이 뒷절의 내용이다[而動靜之後爲陰陽].
<제자해> 서두의 두 번째 문장 ”坤復之間爲太極而動靜之後爲陰陽”은 앞절과 뒷절 모두 인용 표현을 사용하여 의미 간에 긴밀한 연결 관계를 보인다. 이 문장이 ‘태극’과 태극에 의한 ‘음양’의 발생 과정을 기술한 내용으로, 앞절에서는 ‘태극’이 무엇인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를 그 존재를 밝힌 것으로 소옹의 발언을 취하여 ”곤괘와 복괘 사이가 태극이다.”라고 하였고, 뒷절은 이러한 ‘태극’이 ‘동(動)’과 ‘정(靜)’의 작용을 거쳐 생긴 ‘음양’의 과정을 말하고 있다. 태극의 동정(動靜) 과정을 통해 음양이 파생한다는 ≪태극도설≫에 기반하여 ‘음양’이 생긴 것은 ‘태극’의 작용에서 비롯된 것이라 말한 것이다.
(3) 故人之聲音∘皆有陰陽之理∘顧人不察耳。 [정음해례1ㄱ:6-7] (그러므로 사람의 말소리에도 모두 음양의 이치가 있는데, 다만 사람이 살피지 않았을 뿐이다.)
대자연에서 사람의 말소리로 대상이 좁혀지는 부분이다. 천지 만물이 음양에 입각해 있다고 하였으니 사람의 말소리도 음양에 입각해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사람의 말소리에 음양의 이치가 있다 하였고, 음양의 이치는 천지의 도[天地之道]임을 볼 때 ‘사람의 말소리[人之聲音]’는 음성학⋅음운학적 차원이 아닌 역학적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聲)’에 관한 역학적 사유를 피력하려면 이에 관련된 지식 기반이 필요한데, 『성리대전』에 수록된 문헌 중 ‘성(聲)’에 관한 논의는 소옹의 ≪황극경세서≫에서만 찾을 수 있다.
西山蔡氏曰…物有色聲氣味 唯聲爲盛 且可以書別
(서산 채씨[채원정]가 이르기를…만물에는 색⋅성⋅기⋅미가 있는데 오직 성(聲)이 가장 뚜렷하고 또 글로 구별할 수 있다.)
邵伯溫曰…物有聲色氣味 可考而見 唯聲爲甚 有一物則有一聲 有聲則有音 有律則有呂 故窮聲音律呂以窮萬物之數
(소백온이 이르기를…사물에는 소리, 색깔, 냄새, 맛이 있어서 살펴볼 수 있는데 오직 소리가 가장 분명하다. 하나의 사물에는 하나의 소리가 있고, 소리가 있으면 음이 있고, 율이 있으며, 여가 있으니 성⋅음⋅율⋅려를 연구하여 만물의 수를 궁리한다.)
邵伯溫系術曰…至于聲色形氣 各以其類而得焉 可考而知 聲音爲甚 聲者陽地 而生於天 音者陰也而出乎地 知聲音之數而後萬物之數覩矣 知聲音之理而後萬物之理得矣
(소백온이 선친의 뜻을 이어받아 이르기를…성⋅색⋅형⋅기에 이르러서는 각각 그 종류에 따라 얻는다. 모두 고찰하여 알 수 있지만 성음에서 가장 잘 알 수 있다. 성(聲)은 양(陽)이고 천(天)에서 생겨나고 음(音)은 음(陰)이고 지(地)에서 생겨난다. 이 성음의 수를 안 뒤에야 만물의 수를 본다. 성음의 이치를 안 뒤에 만물의 이치를 안다.)
소옹의 후배인 채원정(蔡元定)이 말한 대목과 선친(先親)인 소옹의 이론을 잇고 있는 소백온(邵伯溫)의 두 개의 주석에서 ”오직 소리가 가장 분명하다(唯聲爲甚)”라고 하였고, ”성음의 이치를 안 뒤에 만물의 이치를 알 수 있다(知聲音之理而後萬物之理得矣)”라고 하여 성음의 중요성을 명확히 말해 준다. 만물을 식별할 수 있는 네 가지 장치인 ‘성(聲), 색(色), 기(氣), 미(味)’에서 ‘성(聲)’이 만물을 가장 잘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며, 이를 통해 만물의 이치를 파악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역학(易學)에서 성운학(聲韻學)을 도출한 사람이 소옹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이론은 이른바 수리(數理)로서 우주 만물의 생성과 구성의 원리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우주 만물의 이치를 알려면 먼저 성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인데, 성음에 만물의 이치가 들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이에 입각해서 성음 체계의 수리(數理)를 밝히고자 하였다. 그래서 사람의 말소리[聲]가 색(色), 기(氣), 미(味)와 함께 인체(人體)의 도를 갖추는 적극적인 부분들이기 때문에 천지의 도(道)나 만물의 정(情)을 구명(究明)하자면 먼저 성음의 이치부터 고구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은 소옹의 관점을 요약하면 사람의 말소리는 음양오행의 이치가 내재한 자연의 본질적 현상 중 하나이므로 성음을 통해 만물의 이치와 수를 궁구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펼친다. 사람의 성음(聲音)의 원리야말로 모든 만물의 이치가 다 이 안에 들어 있다고 주장하는 소옹의 관점이 <제자해>에서 ‘사람의 말소리에도 음양오행의 이치가 내재해 있다’고 한 ”人之聲音∘皆有陰陽之理”에 반영되지 않았을 리 없다.
(4) 今正音之作∘初非智營而力索〭∘但因其聲音而極其理而已。 [정음해례1ㄱ:7-1ㄴ:1] (이제 정음을 만든 것도 처음부터 머리를 써서 애써 찾아낸 것이 아니라, 말소리에 따라 그 원리를 깊이 탐구했을 뿐이다.)
이 부분부터 <제자해>의 중심 화제인 문자 제자로 초점이 바뀐다. 세종이 어떤 인식으로 훈민정음을 만들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천지 만물 중 생명을 지닌 것들에 음양의 이치가 담겨 있으니 사람의 말소리에도 그 이치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凡有生類在天地之間者∘捨陰陽而何之。故人之聲音∘皆有陰陽之理∘顧人不察耳。<正音解例1ㄱ:5-7>). 정음을 지은 것도 애초에 지혜를 꾀하고 힘써 찾아낸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말소리에 담긴 그 이치를 다하였다고 말한다. 여기서 사용한 ”智營而力索”이라는 표현이 ≪황극경세서≫에 나온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바이다(이상
권재선, 1988;
강신항, 2006,
2010;
박동규, 2001;
곽신환, 2016;
조희영, 2018 등).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성리대전』권 7에 수록된 ≪황극경세서≫ 1 <찬도지요> 상의 ‘복희시획팔괘도(伏羲始畫八卦圖)’에서 동일한 표현을 찾을 수 있다.
西山蔡氏曰: 大傳曰 易有太極 是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生八卦 八卦定吉凶 吉凶生大業
其法自一而二 自二而四 自四而八 實則太極判而爲陰陽 陰陽之中又有陰陽 出於自然 不待智營而力索也. 其敍首乾而尾坤者 以陰陽先後爲數也(진한 글씨체 및 밑줄 필자)
(서산 채씨가 말했다. ‘대전’에서 말하기를 ”역에는 태극이 있으니 태극이 양의를 낳고, 양의가 사상을 낳고, 사상이 팔괘를 낳고, 팔괘가 길흉을 정하니 길흉이 큰 사업을 낳는다. 그 법은 1에서 2가 되고, 2에서 4가 되고, 4에서 8이 되지만 실은 태극이 갈라져 음양이 되고 음양 속에 또 음양이 있는 것이니, 자연에서 나오는 것이지 지혜로 도모하고 억지로 찾은 것은 아니다. 그 순서가 건괘를 첫머리로 하고 곤괘를 끝으로 한 것은 음양 선후로 수를 삼았기 때문이다.)
서산 채씨가 한 말에 ”智營而力索”이라는 표현이 그대로 나오는데, 단순히 표현의 양식만 가져온 것인지는 맥락 안에서 따져봐야 한다. ‘복희시획팔괘도’는 팔괘를 낳는 법을 말하고 있는데, 우선 서산 채씨가 언급한 ”大傳”이란 ≪주역≫ <계사전> 상을 말하며, ”易有太極 是生兩儀 兩儀生四象 四象生八卦 八卦定吉凶 吉凶生大業”은 <계사전> 상 11장에 기술된 내용 일부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태극’은 ‘양의’, ‘사상’, ‘팔괘’의 원류(源流)가 되어 ‘태극’은 1, ‘태극’이 ‘양의’를 낳아 2, ‘양의’가 ‘사상’을 낳아 4, ‘사상’이 ‘팔괘’를 낳아 8이 되는데, 이는 자연에서 나온 것이지 지혜로 도모하고 억지로 찾은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이처럼 팔괘를 낳는 법이 ”出於自然不待智營而力索”라는 데 대해
조희영(2018. p. 130)에서는 소옹이 강조하는 자연성을 명확히 말해 준다고 하였다.
<제자해>에 표현된 ”智營而力索〭” 또한 자연성에 기반한 맥락에서 사용되었다. 새 문자를 만드는 데 온갖 지혜를 동원하고 억지로 애써서 찾은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 곧 사람의 말소리에 담긴 이치를 좇아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대단히 현상학적이고 자연과학적인 사고를 말해 주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된 표현이다. 훈민정음 제자에 관해 ”智營而力索〭”이라는 표현을 직접 인용할 수 있었던 까닭은 자연의 이치에 기반한다. 이 대목을 그대로 인용한 것 역시 훈민정음의 자연성을 강조하기 위함으로, 천지자연의 원리에서 나온 것이지 인위적인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말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제자해>에 인용된 ”智營而力索〭”은 단순한 단장취의(斷章取義)가 아니며, ≪황극경세서≫ 1 <찬도지요> 상 ‘복희시획팔괘도(伏羲始畫八卦圖)’가 분명한 전거가 된다.
“今正音之作∘初非智營而力索〭” 그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인 ”但因其聲音而極其理而已”는 바로 앞 문장의 ”人之聲音∘皆有陰陽之理”와 직결된다. 성음(聲音)에 내재된 음양의 이치를 깊이 탐구하여 정음을 지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이 표현을 통해 새 문자를 소리글자로 만들 수 있었던 근간(根幹)을 엿볼 수 있다.
‘성음(聲音)’에 대한 논의는 ≪황극경세서≫ 2 <찬도지요> 하에서 더 찾을 수 있는데, 상관(上官) 양만리(楊萬里)가 한 말에서 ≪황극경세서≫의 성음론이 높이 평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上官氏萬里曰…惟皇極用聲音之法 超越前古 以聲起數 以數合卦 而萬物可得而推矣
(상관 만리가 이르기를…오직 ≪황극경세서≫에서 성음(聲音)의 방법을 사용한 것은 과거를 초월하여 성(聲)으로 수(數)를 일으키고 수로서 괘(卦)에 합치하게 되어 만물을 추측할 수 있게 되었다.)
상관 양만리의 주석을 통해 ≪황극경세서≫의 성음론이 옛날 성음에 관한 법칙을 뛰어넘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소옹은 성리학자이면서도 그의 아버지 소고(邵古)의 영향을 받아 사람의 성음(聲音)에 관심을 가졌고, 이를 역수(易數)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종래의 ≪절운(切韻)≫계 음계(音系)를 나타내는 운서(韻書)들과는 음운 고찰 태도를 달리하여, 12세기 개봉 지역(송의 수도)의 현실음을 올바르게 나타낼 수 있는 운도(韻圖) <황극경세 성음창화도(皇極經世聲音唱和圖)>를 창안하였다.
14) <성음창화>의 ‘창(唱)’과 ‘화(和)’는 ‘天聲唱地音’ 또는 ‘地音和天聲‘의 의미이다. 소옹은 운류(韻類)와 성류(聲類)를 차례로 병합시키고 변수(變數)나 화수(化數)의 음절수에 합치시켜서 세상의 모든 음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구현해 냈다(
심소희, 2019, p. 243).
성리학에 골두해 있던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은 성운학자로서도 중요한 위치에 놓인 소옹의 이론과 그에 대해 주석을 단 학자들의 이론에 크게 주목한 것은 당연하다. 소옹의 관점에 입각해서 성운의 연구를 중시하고, 거기에서 방법론을 도입함은 무리한 과정이 아니었다. 『성리대전』의 여타 문헌에서는 없는 소옹의 ≪황극경세서≫를 통해 역학적 사유로서의 성(聲)과 성음론의 중요성과 가치를 알게 됨으로써, 성음에도 자연의 이치가 내재해 있으니 사람의 말소리에 주목하고 이를 깊이 탐구하여 소리글자인 ‘정음’을 만들게 되는 근간이 된다. 이를 실재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당시 중국의 음운학인 성운학(聲韻學)을 섭렵하고 당시 우리말의 음운 체계를 깊이 연구하여 소리글자로서의 면모와 위상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렇게 훈민정음은 역학적 원리와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음성⋅음운학적인 체계를 갖춘 수준 높은 소리글자라 할 수 있다.
(5) 理旣不二∘則何得不與天地鬼神同其用也。 [정음해례1ㄴ:1-2] (이치가 이미 둘이 아니니 어찌 천지 귀신과 그 쓰임이 같지 않을 수 있겠는가?)
“理旣不二(이치가 이미 둘이 아니다)”라는 것은 ‘이치가 하나이다’, ‘이치가 다르지 않다’, 즉 ‘이치가 같다’는 뜻이다. 이때 이치란 ”天地之道一陰陽五行”로서 서두의 첫 문장과 호응을 이룬다. ”天地之道一陰陽五行”와 ”理旣不二”를 연결지어 보면 ”천지의 도는 둘이 아니다. 오직 음양오행뿐이다.”라는 언명(言明)이 강조된다. 천지 만물의 이치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이미 같은 ‘하나[一]’이라는 만수귀일(萬殊歸一)의 성리학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김만태, 2012, p. 62). 이러한 맥락에서 사용된 표현은 『성리대전』곳곳에서 보이는데, 한 가지 예를 들어 보면 권 9에 실린 ≪황극경세서≫ 3 <관물내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天地萬物皆一本 故雖萬殊 理無異致
(천지 만물은 모두 근본이 하나이므로 만물이 갖가지로 다르지만 이치는 다름이 없다.)
위 내용은 천지 만물의 근본은 하나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는 당대 송학의 지배적인 관념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理旣不二” 다음에 이어지는 ”則何得不與天地鬼神同其用也”은 ”理旣不二”를 뒷받침하는 구절로서 이치가 같다는 것을 구체화한다. 앞서 ‘천지의 도는 음양오행뿐’이라고 하였으니[天地之道 一陰陽五行] 자연의 이치가 천지 만물에 모두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명제를 ‘천지 귀신과도 이치의 쓰임이 같음’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귀신(鬼神)’에 대해
곽신환(2016, p. 37)에서는 향간의 악귀와 같은 의미가 아니라 ‘귀(鬼)’와 ‘신(神)’이 각각 음과 양의 두 기운의 양능(兩能)으로 세상의 모든 길흉 선악을 주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천지의 도가 적용되는 구체적인 설명을 ≪주역≫ <계사전> 상 4장에서 살펴볼 수 있다.
易與天地準 故能彌綸天地之道 仰以觀於天文 俯以察於地理 是故知幽明之故 原始反終 故知死生之說 精氣爲物 遊魂爲變 是故知鬼神之情狀
(역은 천지의 원리와 부합한 것으로 능히 천지의 도를 모두 포괄할 수 있다. 우러러봄으로써 천문을 관찰하고, 굽어봄으로써 땅의 이치를 살핀다. 이런 까닭에 어두움과 밝음의 연고를 알며, 처음을 근원으로 해서 마침으로 돌아가는 고로 죽음과 삶의 이치를 안다. 정과 기가 모여 사물이 되고, 혼이 돌아다니며 변화를 이루므로 귀와 신의 상태를 알 수 있다.)
≪주역≫은 천지의 도를 원칙으로 삼아 천지 만물의 법칙에 근거한 책임을 말한 것인데, 이 부분에서 ≪주역≫의 최고 명제인 ”一陰一陽之爲謂道”, 즉 음양의 변화가 잘 드러나 있다. 하늘과 땅, 어두움과 밝음, 처음과 마지막, 죽음과 삶, 유형과 무형, 정(精)과 기(氣), 귀(鬼)와 신(神)의 상황 모두 음양의 변화에 따른 것으로 모두 음양오행의 이치임을 설명해 준다. 여기서 ‘귀신(鬼神)’의 뜻이 드러나는데 귀(鬼)는 돌아감이요, 신(神)은 새로운 탄생과 관련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귀신의 상태를 아는 것[知鬼神之情狀]은 음양의 조화를 아는 것이요, 나아가 우주의 작동 원리를 깨닫는 것이다. <제자해>에서 말한 ”理旣不二則何得不與天地鬼神同其用也”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 세상 만물과 세상의 모든 일, 사람을 포함한 천지자연의 본질적인 속성이 바로 ‘천지의 도’로서 음양오행의 이치가 동일하게 작용함을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