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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General Edu > Volume 18(6); 2024 > Article
플라톤의 인간과 교육 -모두를 위한 국가, 훌륭한 시민을 위한 교육

Abstract

이 논문은 플라톤의 저작들에 나타나는 인간과 교육에 관한 논의들의 궁극적인 지향점이 ‘모두를 위한 국가 속에서 훌륭한 시민을 위한 교육’이라는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우리는 플라톤이 이른바 ‘이상 국가’에서 제시하는 모든 시민을 위한 교육과 자신의 학교 아카데미아에서 펼친 교육 내용을 비교하면서 서론의 논의를 시작한다. 본론에서는 먼저 플라톤의 철학이 제시하는 인간관과 세계관을 철학사적 맥락 속에서 검토한 다음, 플라톤 철학의 방법론인 디알렉티케 혹은 대화법의 실상으로 플라톤의 초기 저작에 나타나는 논박술과 중후기 저작에 나타나는 산파술이 펼쳐지는 실제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플라톤의 교육 이론 안에서 최대의 쟁점으로 남아 있는 문제, 즉 ‘덕(aretē, 훌륭함)이나 지식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국가』의 이상적인 교육론과 메논』의 상기설이 상반되는 지점을 비교 검토함으로써 일정한 결론을 도출해낼 것이다. 이러한 검토와 논의들을 통해 우리는 모두를 위한 교육으로서 교양교육 혹은 시민교육의 시작을 이루는 플라톤의 교육 이론의 핵심적인 문제에 대한 하나의 답을 얻어낼 수 있다. 인간은 시민으로서 국가의 공적인 교육과정을 거치면서 어느 단계에서든 국가의 기능에 필요한 지식을 갖추고 그 기능을 수행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국가가 하나인 것처럼, 국가의 시민도 자신의 전문적인 기능을 발휘함으로써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의 총체적 지식-기능의 통일체를 이루게 된다. 시민들의 지식의 총합은 국가의 기능의 총합과 같다.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이란 ‘아름다운 국가’ 안에서의 잘 살기(eu zēn)이며. 이것은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플라톤 교육의 특징인 ‘덕(훌륭함)의 내재화’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배움을 통해서 혹은 영혼의 전회인 깨달음을 통해서 훌륭함을 내 안에 갖추는 일이다.

Abstract

This paper aims to reveal that the ultimate directing point of the discussions on human being and education in Plato’s dialogues is ‘education for good citizens in a state for all.’ We begin our introductory discussion by comparing the education for all citizens presented by Plato in the so-called ‘ideal state’ with the educational contents that he presented in his own school, the Academy. In the main text, we first examine the perspective on human beings and the worldview presented by Plato’s philosophy in the context of the history of philosophy. And then, we will show the method of refutation(elenchos) of Plato’s early period and the method of midwifery(maieutikē) of his middle and late period, as the actual appearances of the educational methodology of Plato’s philosophy, dialectic or dialogue. Based on these works, we will compare and examine the conflicting points between the ideal education theory of the Republic and the doctrine of recollection(anamnēsis) in the Meno in order to find an answer to the question that remains as the greatest issue in Plato’s educational theory, namely, ‘can virtue(aretē, excellence) or knowledge be taught?’ Through these examinations and discussions, we will be able to obtain an answer to the core issue of Plato’s educational theory, which is the beginning of liberal education or citizen education as education for all. As citizens, humans acquire the knowledge necessary for the functions of the state at some stage while going through the public education process of the state and live while performing those functions. Just as the state is one, the citizens of the state also perform their specialized functions, forming a single, comprehensive knowledge-function unity. The sum total of the knowledge of the citizens is equal to the sum total of the functions of the state. The happiness we pursue is well being(eu zēn) in a ‘beautiful country.’ This is related to taking care of one’s own soul. This can be called the ‘internalization of virtue’, which is a characteristic of Plato’s education. It is the process of acquiring excellence(aretē) within oneself through learning or enlightenment, which is a turning of the soul.

1. 서론: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와 ‘아름다운 국가’의 교육

이 논문은 플라톤(기원전 427-347)의 저작들에 나타나는 인간과 교육에 관한 논의들의 궁극적인 지향점이 ‘모두를 위한 국가 속에서 훌륭한 시민을 위한 교육’이라는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우리는 플라톤이 이른바 ‘이상 국가’에서 제시하는 모든 시민을 위한 교육과 자신의 학교 아카데미아에서 펼친 교육 내용을 비교하면서 논의를 시작한다. 본론에서는 먼저 플라톤의 철학이 제시하는 인간관과 세계관을 철학사적 맥락 속에서 검토한 다음, 플라톤 철학의 방법론인 디알렉티케 혹은 대화법의 실상으로 플라톤의 초기 저작에 나타나는 논박술과 중후기 저작에 나타나는 산파술이 펼쳐지는 실제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플라톤의 교육 이론 안에서 최대의 쟁점으로 남아 있는 문제, 즉 ‘덕(aretē, 훌륭함)이나 지식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국가』의 이상적인 교육론과 메논』의 상기설이 상반되는 지점을 비교 검토함으로써 일정한 결론을 도출해낼 것이다. 이러한 검토와 논의들을 통해 우리는 모두를 위한 교육으로서 교양교육 혹은 시민교육의 시작을 이루는 플라톤의 교육 이론의 핵심적인 문제에 대한 하나의 답을 얻어낼 수 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기원전 470-399)의 제자로 철학하기를 시작했다.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5세기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연합군의 페르시아 전쟁 승리 후 민주정 아테네에서 쟁론술(eristikē)을 가르치던 소피스트들이 공동체의 안위나 진실과 무관하게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말싸움의 승리를 추구하는 것을 심각한 문제로 보았고, 이에 대항해서 말의 논리를 이어가는 디알렉티케(dialektikē)를 통해 진리를 찾아가는 방법을 보여줌으로써 젊은이들을 가르쳤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그때까지 철학자라고 하면 모두 하늘과 천체의 문제인 자연(physis)을 주제로 삼았던 것과 달리 이렇게 국가(polis)와 시민(politēs)의 문제, 특히 사람들이 갖게 되는 개념들과 그 교육 문제를 중시했으며, 이로 인해 후일 로마 시대의 키케로는 소크라테스를 가리켜 ”처음으로 철학을 하늘에서 불러와 인간의 도시에 내려놓았다”고 말하기에 이른다(Cicero, Tusculanae Disputationes, V.10).1)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가 시민들의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죽은 후, 플라톤은 그의 유지를 받들어 철학적 사유와 교육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기원전 387년 쟁론술(eristikē)를 가르치는 소피스트와 연설술(rhētorikē)을 가르치는 수사학자가 청년들의 교육을 맡고 있던 아테네에 철학 학교이자 서구 대학교의 원형으로 불리는 아카데미아(Akadēmia)를 설립하고 교육과 함께 출판을 위한 저술을 시작했다. 소크라테스식 대화(dialogues)로 이루어진 이 책들에서 그는 철학적 방법론에서부터 존재론과 인식론, 사회철학과 윤리학을 펼치고, 언어와 법률, 그리고 우주론까지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었다.
플라톤은 소피스트들이 상대주의에 입각하여 법정에서 상대를 논박하는 쟁론술의 일부로 궤변을 가르치는 것도 거부했지만, 진리를 담보하지 않고 대중을 설득하는 기술만을 가르치는 수사학도 탐탁지 않게 여겼다. 플라톤은 그런 쟁론술이나 수사학 대신, 지혜를 사랑하고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스승 소크라테스를 지혜와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자의 모범으로 그리고 있다. 여기서, 기원전 399년 아테네 법정에 선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전통적인 이야기 속의 영웅 아킬레우스나 헤라클레스와 연결시키며 자신도 그들처럼 신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 변명』의 마지막 부분에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영웅의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는데, 즉 ”덕(aretē)에 있어서 훌륭한 사람”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넘어가야 한다고 역설한다(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38a-41d). 소크라테스가 제시한 새로운 영웅은 전쟁에서 뛰어난 육체적 능력과 전투력을 발휘하거나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익힌 지혜, 용기, 정의, 절제 등의 내재화된 덕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다. 이런 역량들을 갖추는 것을 교육의 목표로 본다면, 교육의 주안점이 몸의 훌륭함에서 영혼의 훌륭함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플라톤의 교육 이론에 이어져, 훌륭함의 기준을 육체의 능력을 바탕으로 한 외적 가치보다 지혜와 지식이라는 영혼의 능력, 즉 내적 가치에 두게 된다. 이것은 플라톤의 인간관과 교육 이론에 나타나는 ‘덕(훌륭함)의 내재화’이며, 이후 서양 사상에 깊이 뿌리내리는 주지주의(intellectualism)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의 철학에서 영혼(psychē)은 인간의 이성(logos)과 지성(nous)의 담지자로서 지혜와 진리, 그리고 올바름을 추구하는 삶의 중심이다.2) 사람이 훌륭한 삶에 이르기 위해서는 몸을 단련하는 것만큼이나 영혼을 훈련하는 것이 필수적인 과정이다. 플라톤이 영혼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인간의 내면적인 영역에 국한하지 않고 사회적 영역에도 적용된다. 그는 중기 저작인 국가』에서 인간의 영혼이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이를 가지고 국가의 구성을 설명하고 있는데, 즉 인간의 영혼이 지성(nous), 기개(thymos), 욕망(epithymia)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국가도 그렇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국가의 이 세 부분은 각각 인간의 지혜, 용기, 절제의 덕과 관련되는 것인데, 이 세 가지 덕의 조화가 바로 국가의 정의라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른다면, 교육은 개인의 문제이자 동시에 국가의 문제가 된다.
『국가』의 이 논의를 기준으로 한다면, 이곳에 나타나는 교육 원리는 인간의 성장과 타고난 영혼의 능력에 맞춘 단계별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시민은 국가가 제정한 교육과정을 거치면서 각 단계별로 국가의 다양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지식을 갖추게 되는데, 한 단계를 통과하지 못하면 그 아래, 즉 자기가 수료한 수준의 지식으로 할 수 있는 기능을 하게 되고, 그 단계를 통과하면 상위 단계로 진급할 자격이 주어지는 방식이며, 전 과정을 끝까지 이수하고 완전한 앎을 갖추게 되는 사람이 국가를 통치하도록 하는 구조이다. 시민이 지식에 따라 역할을 맡고 자기가 잘 아는 기능을 수행하게 되므로, 이런 나라는 정의롭고 아름다운 국가이다.
그러나 이것은 플라톤 자신이 아카데미아에서 제공한 교육과는 다른데, 단적으로 말하면 ‘이상 국가’의 교육은 국가의 모든 시민,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비 시민인 남녀 어린이를 대상으로 시작하는 데 비해서, 플라톤의 아카데미아는 이미 고등교육기관이며, 청년이 된 학생들을 대상으로, 국가의 특정한 전문 직업들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기능을 총체적으로 아는 지식, 즉 크게 말하면 철학을 최종 목표로 가르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실제로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서 이루어진 교육 내용은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이 없으나, 국가』에 나타나는 교육의 5단계 가운데 첫 번째 두 단계, 즉 ① 읽고 쓰기, 그리기, 셈하기와 ② 체육은 제외하고, 20세 전후부터 이루어지는 교육 내용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아카데미아에서의 교육 내용을 추정해본다면, 국가』에 나타나는 교육의 5단계 중 뒤의 세 단계를 적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③ 예비 교과목인 산술, 기하학, 천문학, 음악은 아카데미아 이전에 상당한 수준으로 공부하고 입학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아카데미아 입구의 현판에 ”기하학을 모르는 자 이 문을 들어오지 말라”고 씌어 있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사실 수학과 기하학은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 속에 존재하는 수와 도형을 다루며, 따라서 감각이 아닌 사유를 통해 얻어지는 지식이다. 예컨대, ‘삼각형’이나 ‘요소삼각형’ 같은 것은 플라톤적인 진리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3) 본격적으로는 ④ 방법론 교과목으로 변증술(dialektikē)이 있는데, 이것은 대화법 혹은 문답법이라고도 불리며, 아래에서 살펴볼 소크라테스식의 논박술과 산파술이 포함된다. 그리고 ⑤ 심화 교과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철학(philosophia)을 가르쳤다. 아카데미아의 교육 내용으로 보면, 이 철학만은 확실한 것이며, 무엇을 어떻게 가르쳤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철학적 개념들에 대한 정의의 방법과 함께 변증술을 이루는 대화법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2. 본론: 플라톤의 인간관, 방법론, 교육론

2.1. 인간의 영혼은 죽지 않는다

플라톤의 사상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이론이라면 이른바 ‘이데아론’일 것이다.4) 그러나 이 이데아론은 플라톤 자신이 일생의 신조로 주장했던 확고한 이론이라기보다는 그가 자신의 고유한 이론을 형성하는 시기인, 저술들의 시기로 보면 중기에 제기했던 하나의 존재론적 시론(試論)이라고 할 수 있으며, 사실 플라톤의 철학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철학적 시론 혹은 제안서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플라톤의 이 철학적 시론의 중심에는 인간에 대한 그의 새로운 이해가 자리 잡고 있다. 플라톤의 이 새로운 인간 이해는 그리스의 전통적인 인간 이해, 즉 ‘호메로스적 인간’에 대한 강력한 반발이자 획기적으로 새로운 것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의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전통적으로 모든 생명체는 영혼(psychē)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식물의 영혼은 생장하는 능력이 있고, 동물의 영혼은 생장하고 욕망하는 능력이 있다. 플라톤은 이 생각을 발전시킨다. 그에 따르면 동물의 영혼은 감각(aisthēsis)을 갖추어 감각적 대상(aisthēton)을 지각하고 그것을 욕망하는 능력이 있는 데 비해, 인간의 영혼은 욕망과 감각에 더해 지성(nous)을 갖추고 있어서 불변하고 영원한 지성적 대상(noēton)을 인식하고 영원성을 지향하는 능력이 있다. 플라톤은 이 지성이 깃들어 있는 인간의 영혼은 몸이 죽어도 죽지 않는 것이라는 새로운 생각을 펼친다. 이 생각은 아마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소크라테스의 삶의 태도와 영혼의 윤회를 주장했던 피타고라스 학파의 사상으로부터 받아들인 것 같다.
그런데 이 ‘인간의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생각은 인간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플라톤의 시대인 기원전 5세기 말 4세기 초에도 여전히 통용되었던 전통적인 혹은 호메로스적인 인간관에 따르면, 인간의 영혼은 살아있을 때는 몸속에 깃든 숨과 같은 것이고, 죽을 때는 그림자와 같이 몸을 빠져나가는 것이며, 죽은 사람의 영혼은 저승인 하데스(Hadēs)로 내려가 주인을 잃은 그림자처럼 너울너울 무의미한 움직임을 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은 죽지 않고 영원하며, 영혼은 그렇게 몸을 벗어나서 비로소 불변하고 영원하고 하나로 존재하는 참된 존재(ontōs on)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이 참된 존재가 철학사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로 불리는 것인데, 이데아는 세상의 변전하는 물질적 사물들(예컨대 사과들) 너머에 그것들이 모두 그 이름으로 불리는 근거가 되는 어떤 ‘그것 자체’(예컨대 사과 자체)로서 영원하고 변하지 않고 언제나 하나로 존재하는 형상(eidos)이다. 플라톤의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감각으로 접하는 물질의 세계를 언제든 변할 수 있는 ‘나타남의 세계’ 즉 현상계로 보고, 그 너머에 있는 우리가 지성으로 파악하는 형상의 세계를 참다운 ‘존재의 세계’ 즉 진리계로 놓는 이원론적 세계관으로 알려져 있다.
플라톤은 인간을 무엇보다도 이성을 갖춘 존재로 보는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 철학자이다. 그에게는 당시 아테네의 교육을 지배하던 소피스트의 지식도, 시인들이 기대고 있던 옛날의 호메로스적인 시가도,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수의 힘으로 성립된 법률도, 또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 패배 후 쇠락하고 흔들리는 폴리스도 새로운 지평 위에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것들이 바로 서기 위해서는 감각을 통한 오류 가능한 의견(doxa)이 아니라 지성을 통해서 파악되는 완전한 지식(epistēmē)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는데, 이런 시각은 그의 중기 이후 작품에 나타나는 형이상학에 따르면 다수의 것들이 변전하는 이 현상계 너머에 변하지 않고 영원한 일자(一者)의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플라톤은 국가』 6권과 7권에서 인간의 지적 활동을 네 단계로 분류하여, 한편으로 지식(epistēmē)과 추론적 사고(dianoia)를, 다른 한편으로 신념(pistis)과 상상(eikasia)을 구분했다.5) 그는 지식과 추론적 사고를 이데아들과 수학적 대상들에 대한 것으로 보고 이것들을 지성적 사유(noēsis)의 세계, 즉 불변의 진리계에 놓았고, 한편 신념과 상상을 감각 대상들과 모상들에 대한 것으로 보고 이것들을 의견의 세계, 즉 변전하는 현상계에다 놓은 것이다(강성훈, 2008, 177).
존재에 대한 플라톤의 이러한 새로운 접근법은 인간에 대한 이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플라톤은 사람이 죽으면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와 하데스로 가서 거기서 그림자처럼 무의미하게 너울댄다고 하는 전통적인 ‘호메로스적’ 인간 이해를 벗어나려고 한다. 그의 새로운 생각이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중기 대화편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영혼의 불사를 이렇게 증명한다. ”모든 혼은 죽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이렇다. 계속해서 움직이는 것은 죽지 않는다. 그런데 다른 것을 움직이고 다른 것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은 그 운동의 정지를 갖기 때문에 삶을 멈춘다. 자신을 움직이는 것만이 자신을 떠나지 않기 때문에 움직이기를 결코 멈추지 않을 뿐만 아니라, 움직이는 다른 모든 것들에게도 이것이 운동의 원천이자 기원이 된다. 그런데 기원은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생겨나는 모든 것은 기원으로부터 생겨나지만, 기원은 어느 것에서도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 […] 그것은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소멸하지 않는 것 또한 필연이다.”(플라톤, 파이드로스』, 245c7-d5) 여기서 ‘다른 것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은 물질적인 것, 예컨대 몸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움직이는 것이자 운동의 원천인 것은 하늘의 천체이거나 영혼이다. 이 논증에 따르면, 영혼은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자 다른 것들의 운동의 원천이기에 죽지 않는 것이다.
플라톤의 또 다른 중기 대화편 파이돈』은 아예 영혼의 불멸을 주제로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은 유비를 들어 영혼의 불사를 논증한다. 셋은 홀 자체는 아니지만 항상 홀이라는 성질을 가지고 결코 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눈은 차가움 자체는 아니지만 항상 차가움이라는 성질을 가지고 결코 뜨거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혼은 삶 자체는 아니지만, 그것이 차지하는 것에 항상 삶을 가져온다. 이것은 영혼 자체가 항상 삶이라는 성질을 가지며, 결코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음을 의미한다. 즉 영혼은 불사이다. 그런데 불사인 것이 불멸하지 않는다면 불멸한다고 할 것이 전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영혼은 불사일 뿐만 아니라 불멸한다. 소크라테스는 논증을 맺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럼 죽음이 사람을 공격할 때, 보아하니, 그의 가사적인 부분은 죽지만, 불사하는 부분은 소멸하지 않은 채 죽음으로부터 온전히 물러나 떠나가는 것 같군.”(플라톤, 파이돈』, 106e4) 여기서 ‘가사적인 부분’은 몸이고 ‘불사하는 부분’은 영혼이다. 영혼은 죽지 않기에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몸을 가진 인간은 욕망과 의견으로 흔들리지만, 다른 동물들과 달리 영혼 안에 지성(nous)이 있으며, 지성이 작동하는 한 인간은 불변하고 영원한 대상들을 파악할 가능성이 있다. 플라톤은 이 가능성이 신분이 고귀하든 아니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배움이 있든 없든 간에, 심지어 노예라고 할지라도,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다고 보았다.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그 영혼은 죽지 않고, 그 영혼 안에 불변의 영원한 일자를 인식할 수 있는 지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 지성을 계발하고 활용하는 방향으로 가느냐 여부일 것이다. 만일 인간이 이 가능성을 깨닫고 지혜와 진리를 추구하는 일에 매진한다면, 즉 철학하기를 실천한다면 영원하고 불변하는 대상을 관조하는 삶이 가능하다. 플라톤은 이 훈련을 영혼 돌보기(epimeleia tēs psychēs)라고 하는데, 이것은 영혼의 중요성을 깨닫고 몸과 감각들을 떠나서 지성의 눈을 뜨는 훈련을 하라는 것이다. 플라톤의 인간 이해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영혼이다. 이러한 인간 이해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신분이나 재산 혹은 지식 여부에 따른 인간의 가치 매기기와는 다른, 새로운 것이다. 그렇다면 영혼이 죽지 않는 인간 혹은 영혼의 중요성을 깨닫고 영혼을 돌보는 인간은 어떤 삶을 추구할 것인가?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인간 이해에 걸맞은,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시민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플라톤의 크리톤』에는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혀 있던 상황이 나온다. 크리톤이 친구로서 그를 탈옥시킴이 마땅하다고 설득했으나 소크라테스는 몇 가지 논증을 들어 탈옥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리고, 거절한다(플라톤, 크리톤』, 46b-54d). 여기서 이 거절이 시민으로서 ‘나쁜 법이라도 지켜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권창은 외, 2005; 김주일, 2006), 이 작품은 대체로 정의와 경건, 그리고 국가의 법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모든 시민의 의무를 담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플라톤, 크리톤』, 이기백 옮김, 2020, 29-41). 한편 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소크라테스가 사약을 받는 장면이 나오는 파이돈』에서 그는 ‘죽음이란 영혼이 아니라 몸이 죽는 것’이라고 하면서, 말귀를 못 알아듣는 크리톤에게 ”[내가 아니라] 나의 몸을 매장한다고 말하게”라고 지적한다(플라톤, 파이돈』, 115c-e). 그러므로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탈옥을 거절한 것은 근본적으로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영혼을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으로 간주하는 이 맥락에서, 그의 메시지는 오히려 영혼을 가진 인간이라면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 소크라테스는 바로 아테네 시민들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유죄 선고를 받았던 것인데, 그 장면이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나온다. 이 작품에서 소크라테스는 위에서 말한 ‘호메로스적’ 인간 이해를 넘어서, 좋은 사람으로서 정의나 지혜와 같은 덕을 닦으며 공익을 추구하는 ‘시민’으로서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6) 즉 사람이란 잠시 왔다가 무의미하게 가는 존재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최대의 행복을 누리며 자신의 영혼의 능력을 깨닫고 그 삶을 영원으로 이어가려고 노력하는 존재인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소크라테스가 자신이 무죄임을 말하면서도, 동료 시민들에게 자신의 삶을 구걸하는 대신 진리를 추구하는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삶을 설파한 이야기들이 바로 이렇게 이성을 갖추고 영혼이 살아있는 ‘온전한 사람’을 그려내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플라톤의 초기 저작이지만, 이때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그가 그린 새로운 국가의 시민은 이 온전한 사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7)

2.2. 플라톤의 디알렉티케 - 논박술과 산파술

플라톤의 철학 방법론인 디알렉티케(dialektikē)는 변증술 혹은 대화법으로 불리는데, 이는 소크라테스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이 전통적으로 하늘의 문제를 다룬 데서 벗어나 인간에 대해 다루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한 앎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가치와 도덕의 문제를 철학의 중심 주제로 놓았으며, 지혜, 용기, 정의, 절제 등 윤리적인 주제에 관해 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묻고 답을 청하기를 일삼았다. 디알렉티케란 ‘말잇기’ 즉 대화(dialogos)의 기술인데, 여기서 핵심은 묻고 답하기이다. 그러나 이 대화는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거나 서로 주장을 내놓고 견주는 것이 아니며, 소크라테스가 답을 가지고 가르쳐주는 방식도 아니다. 이 문답법 대화에서 소크라테스는 언제나 무지의 질문자로서 자신은 잘 모른다고 낮추고 상대에게 발언을 양보한다. 소크라테스는 무지자의 입장에서 묻고 있는 것이며, 지자를 자처하는 상대방이 그 질문에 답하는 방식이다.
플라톤의 작품은 그래서 대부분 소크라테스와 대화 상대자가 묻고 답하는 대화체로 되어 있으며, 이 대화 안에서 방법론적으로 두드러지는 것은 논박술(elenchos)과 산파술(maieutikē)이다. 논박술은 원래 소피스트의 교육에서 가르쳤던 말싸움 기술인 쟁론술(eristikē)의 일부로 상대를 논파하는 기술인데, 플라톤의 초기 작품에 많이 나타난다. 플라톤의 초기 작품들은 대화를 이끌어가는 소크라테스가 윤리적인 용어 혹은 개념들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가’(What is X?)를 묻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예컨대 용기에 대해서 알 만한 사람에게 ”용기란 무엇인가요?”라고 묻는 방식이다. 이어지는 문답에서 대화 상대자는 어느 순간 자신의 원래 주장과 모순되는 답을 하게 되고, 안다고 믿었던 것(앎)이 사실은 허위의식(거짓)임이 드러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논박이다(Irwin, 1995, 585). 논박은 무지가 자각되는 순간이기에 논쟁에서라면 결정적인 파국이지만,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적 대화에서라면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 된다. 철학적 대화는 논박을 넘어가며, 진리의 도출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진리 추구의 과정으로서 이것 자체가 철학적인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에 나타나는 논박술(elenchos)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자. 예를 들어, 플라톤의 에우튀프론』에 나타나는 ”경건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둘러싼 대화에서 논박술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살펴보겠다. 여기에 나오는 에우튀프론은 신의 사제로서, 신을 섬기는 지식인 ‘경건’에 대해 잘 안다고 자처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소크라테스가 경건이란 무엇인지 묻고 에우튀프론이 답하는 대화는, 짧게 축약하면 다음과 같은 구조로 진행된다(플라톤, 에우튀프론』, 5d 이하; 12e-13c).
- 소크라테스: 경건함이란 무엇인가요?
- 에우튀프론: 경건함이란 신들에 대한 보살핌과 관련된 것입니다.
- 소크라테스: ‘신들에 대한 보살핌’이란 다른 것들에 대한 보살핌과 똑같은 의미인가요?
- 에우튀프론: 예.
- 소크라테스: 그것은 말이나 개, 소를 보살피는 일과 같나요?
- 에우튀프론: 그렇지요.
- 소크라테스: 가축은 인간의 보살핌으로 더 좋게 되지요?
- 에우튀프론: 그렇습니다.
- 소크라테스: 그러면 경건함도 신들에 대한 보살핌이니 신들을 더 좋게 만드는 건가요? 그래서 무슨 경건한 일을 할 때마다 신들을 더 좋게 만든다는 데 동의하십니까?
- 에우튀프론: 제우스께 맹세코, 동의하지 않습니다.8)
이렇게 대화는 에우튀프론이 경건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음에도 그것에 관한 일련의 물음에 답한 끝에, 결국 자신의 주장이 도달하는 귀결에 스스로 동의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강성훈, 2020, 99). 이것이 논박(elenchos)이다. 소피스트의 논쟁에서였다면 여기서 승패가 나고 대화는 끝났겠지만, 철학에서는 논박 이후가 새로운, 진정한 탐구의 시작이다. 즉 소피스트의 대화는 논박을 통한 논쟁의 승리가 목적이지만, 소크라테스 식의 대화는 진리를 찾아가는 것이 목적이고 논박은 다만 진리를 향한 새로운 시작을 열어준다는 의미에서 방법론적인 것이다. 이렇게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에 나오는 소크라테스의 대화에서 일련의 문답 중 대화자의 주장이 모순에 빠지는 순간, 즉 논박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때 논박이란 전제들로부터 처음 주장의 모순을 이끌어내는 추론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질문과 답변의 구조가 독특한데, 질문자는 답변자의 애초 주장에 대해 여러 형태로 명제들을 제안하고, 답변자가 질문자의 제안을 받아들일 경우, 이 명제들은 논증의 전제가 된다. 질문자는 오직 답변자가 동의한 명제들만을 가지고 대화를 수행하는데, 그러한 전제들이 답변자 자신의 처음 주장과 상충하게 되면 그 답변자는 난관(aporia)에 빠지게 되며, 논박되는 것이다. 그런데 답변자, 즉 대화 상대자들은 왜 소크라테스의 전제들을 받아들이게 될까? 이유는 그 전제들이 대화 상대자의 윤리적 신념과 태도, 그리고 그의 삶 자체에 고착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산파술(maieutikē)에 대해 알아보자. 논박술이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에 나타나는 것과 달리 산파술은 그의 중기 이후 대화편에 나타나는 대화 방법론이며, 내용상으로 볼 때 초기 논박술의 전복(뒤집기)이라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들에서 소크라테스는 앎을 자처하는 대화자들에게 소피스트의 방법인 논박술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그들의 무지를 드러내주기 위한 것이다. 반면 후기 작품인 테아이테토스』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스스로 무지하다고 믿는 이들에게 산파술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대화를 통해서 그들이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는 것, 즉 지혜롭다는 것을 밝혀주기 위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어머니가 산파였음을 밝히고, 자신도 동일한 기술을 사용한다고 하면서 다만 그 기술을 ”몸이 아니라 영혼에 대해서 사용한다”고 말한다(플라톤, 테아이테토스』, 149a-150b). 소크라테스의 말은 산파가 산파술을 사용하여 만삭이 된 임신부가 아이를 잘 출산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처럼, 정신적으로 임신한 혹은 진리를 향한 의문을 품은 사람이 그 생각을 잘 이끌어낼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는 의미로, 자신도 산파술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산파술이 펼쳐지는 사례로는 테아이테토스』에서, 나중에 유명한 기하학자가 되는, 10대 소년 테아이테토스가 ”앎(epistēmē)은 지각(aisthēsis)이다”라는 사유의 임신에서 출발하여 소크라테스의 인도에 따라 긴 대화 속에서 그 사유를 풀어내는 장면을 들 수 있다(플라톤, 테아이테토스』, 151e; 184b).9) 이 대화는 테아이테토스』의 전편에 걸쳐 진행되며, 여러 단계의 검토와 동의를 거치는 산파술의 막바지에 이르러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한다(플라톤, 테아이테토스』, 210b1-5).
- 소크라테스: 그러므로 테아이테토스, 앎은 지각도, 참인 판단도, 참인 판단에 덧붙여진 설명도 아닐 것이네.
- 테아이테토스: 그런 것 같습니다.
-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우리는 앎에 관해서 여전히 뭔가를 임신한 채 산고를 겪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모든 것들을 출산해 낸 것인가?
- 테아이테토스: 제우스께 맹세코, 후자입니다. 저로서는 선생님 덕분에 제 안에 지니고 있는 것 이상을 말씀드릴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테아이테토스는 ‘앎은 지각이다’라는 생각을 품은, 즉 영혼의 임신을 한 젊은이로 그려지며, 소크라테스는 이 지적인 임신부와의 대화를 통해서 그 사유로부터 나오는 철학적인 귀결을 이끌어내는 산파로 그려진다. 대화의 끝에 나온 테아이테토스의 말에 따르면, 그가 자신의 마음 속에 가지고 있던 것을 남김 없이, 아니 그 이상을 말할 수 있었다. 이 말은 자기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을 실은 마음 속에 가지고 있었음을 실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면, 논박술도 산파술도 둘 다 대화법이지만 논박술은 실제로는 무지하면서 앎을 자처하는 사람들을 겨냥한 것이고(강대진 외, 2020, 224),10) 반대로 산파술은 스스로 무지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알고 보면 그들이 이미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 즉 지혜롭다는 사실을 드러내주는 것이다. 이것이 플라톤의 두 가지 대화 방법론의 핵심적인 구분이다.
그런데 중기 이후 대화편의 플라톤은 왜 이러한 방법론적인 전복을 제시하는 것인가? 이 물음은 간단히 답을 내놓을 수는 있는 문제는 아닌데, 산파술이 나타나는 메논』과 테아이테토스』 등은 중기 이후 작품이고 그 이전에는 산파술이 안 나온다는 사실을 가지고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플라톤의 사상에서 지식의 목표는 참다운 앎, 즉 진리이고, 진리는 진정한 존재에 대한 앎인데, 진정한 존재는 감각의 대상(aisthēton)이 아니라 지성의 대상(noēton)이다. 그런데 인간이 지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과연 감각을 넘어가는 것, 즉 지성적 대상을 파악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다. 이것은 다름 아닌 플라톤의 이른바 ‘이데아’의 존재와 그것에 대한 인식 가능성에 대한 의문으로서, 물질과 감각을 넘어가는, 영원하고 불변하며 하나로 있는 어떤 것이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알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플라톤의 중기 대화편에는 이 문제에 대해 확신에 찬 이야기들이 많은 반면, 후기 대화편들에는 이 문제에 대한 플라톤 자신의 의문 제기와 재검토가 수행되고 있다. 즉, 이데아의 존재와 그것의 인식에 대해 중기 대화편과 후기 대화편이 사뭇 다른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방법론상으로는 중기 이후로 산파술이 ‘너는 진리를 품고 있다’ 혹은 ‘너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진리와 지식을 숨겨진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존재론과 인식론의 차원에서 제시되는 이데아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 것 같다.
따라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이 논박술과 산파술을 그의 작품의 전 시기에 걸쳐 반영한 것이며, 지혜와 진리를 추구하는 학생 혹은 독자가 스스로 무지를 깨닫고 참다운 앎을 사랑하도록 만드는 것이 이 교육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은 진정한 행복이 외모나 신분, 재산이나 권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오직 자신의 영혼(psychē)을 돌보는 데서 비롯된다는 확신에 따른 것으로 이해된다. 소크라테스의 이름으로 유명해진 델포이 신전의 금언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너 자신을 돌보라’라는 소크라테스의 말과 관련되며, 이 말은 ‘너 자신의 영혼을 돌보라’라는 의미인 것이다.

2.3. 진리, 지식, 그리고 교육

플라톤은 메논』에서 소크라테스가 기하학에 완전히 무지한 노예 소년에게 도형을 그려놓고 선과 면과 각에 대해 묻고 그가 개념들을 적용하며 문제를 풀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데(플라톤, 메논』, 82b-85b),11) 이를 통해 인간이 몸을 갖지 않고 영혼으로 존재하여 모든 진리를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있었던 시기에 이미 기하학적인 지식들을 가지게 되었으며 따라서 지식은 그 기억을 떠올리는 ‘상기’(anamnēsis)임을 입증하려고 한다. 여기에 나타나는 상기설, 즉 ‘지식은 상기이다’라는 생각에 따른다면 인간의 교육은 불필요하다. 메논』에는 ”알고 있는 것은 알고 있기에 탐구할 필요가 없고,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무엇을 탐구해야 할지 알지 못하기에 탐구할 수 없다”라는 이른바 ‘메논의 역설’이 나오는데(플라톤, 메논』, 80d-e), 이를 감안한다면 교육(paideia)과 배움이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실례로 아테네의 명사들 가운데 자식이 제대로 교육된 경우가 없고, 세상에 가르쳐서 깨달은 사람이 없다는 말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 국가』에서는 정의로운 국가(polis)는 수호자 계급 사람들이 아내와 아이를 공유하는 체제로 그려지는데(플라톤, 국가』, 457b-461d), 이 국가에서는 모든 아이들을 대상으로 공통의 교육과정이 부과되고, 각 단계마다 오직 학습 성과만을 근거로 해서 상위 과정으로 진급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시스템을 볼 때, 인간의 교육은 가능할 뿐 아니라 국가의 필수적 요소가 된다. 메논』에서처럼 지식이 상기라면 교육이 필요 없거나 불가능하고, 반대로 국가』에서처럼 이상 국가의 교육이 플라톤의 생각이라면 상기설은 폐기되어야 할 것이다. 어느 쪽이 플라톤의 생각이고, 플라톤이 주장하는 진리와 그가 추구하는 교육은 어떤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을까?
플라톤의 저술 시기를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눈다면 그는 초기와 중기에 인간과 사회를 둘러싼 문제들에 집중했다. 플라톤의 초기 저작들은 소크라테스가 생전에 실제로 사람들과 나누었던 대화들을 복기한 것처럼 윤리적인 용어 혹은 개념들에 대해 ”X란 무엇인가?”라는 형식으로 던지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는 점에서 ‘소크라테스적 대화편’이라고 불린다. 반면에, 그의 중기 저작들에는 소크라테스가 말했던 방식이나 개념이 아니라 새로운, 플라톤 자신의 생각으로 보이는 논의들이 나타나는데, 예컨대 ‘무엇무엇 자체’라고 불리는, 불변하는 형상(eidos) 개념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것은 현상계에 존재하는 이 사과, 저 사과가 아니라 ‘사과 자체’로 밖에 불릴 수 없는 것으로 ‘영원하고 불변하고 하나로 존재하는 것’인데, 이와 관련한 생각은 철학사에서 ‘이데아론’으로 잘 알려져 있다.
형상이란 변전하는 현상계의 사물들에 비해 영원하고 불변하는 존재인 참다운 실재를 의미하며, 플라톤은 인간에게 이 참다운 실재 혹은 진리를 관조하는(theorein) 삶을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제시했다. 그런데 진리를 관조하는 삶은 감각의 세계를 벗어나 불변하는 형상의 세계로 눈을, 지성의 눈을 ‘돌림’으로써만 가능하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 ”눈이 어둠에서 밝음으로 향하는 것은 몸 전체와 함께 돌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듯, 마찬가지로 혼 전체와 함께 생성계로부터 전환해야만 한다”고 말한다(플라톤, 국가』, 518c). 그러므로 영혼의 전회(periagōgē)는 현상계로부터 진리의 세계로 몸과 영혼이 완전히 방향을 바꾸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김남두, 2018, 187). 이 영혼의 전회는 다름 아닌 교육을 통해서 철학함을 배우는 데서 시작되며, 플라톤의 잘 알려진 비유인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로부터 바깥 세계로의 오름 혹은 등정(anabasis, anodos)으로 그려진다. 이것이 플라톤에서 철학 교육이 인격의 도야 혹은 사람 만들기와 만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평생 동굴 속에 묶인 채 벽에 비치는 그림자만 보며 살다가 바깥 세계로 올라와 태양 아래 모든 것들이 펼쳐져 드러나는 것을 본 사람은 자기가 지금껏 동굴 속에서 보아왔던 것들이 진짜가 아니라 그림자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다시 동굴 속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함께 있던 동료들에게 저 밖에 진짜 세계가 있다고 말해준다. 그러나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접촉에서 바로 지식의 전달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동굴 속에 남아 있던 동료들은 동굴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내려온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아니, 믿는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진리가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에게 인도되어 바깥으로 올라가 진짜 세계를 볼 때, 다시 말하면 ‘영혼의 전회’를 이루어낼 때,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동굴의 비유에서 바깥의 사물들이 진짜라고 한 것은 그것들이 그림자가 아니라 보통의 사물들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정말 참다운 존재는 항상 변화하는 보통의 사물들이 아니라 이 사물들이 모두 그것이라고 불리는 근거가 되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이데아론에서는 세상의 사과들이 모두 사과라고 불리는 근거가 되는 것을 ‘사과 자체’라고 부르는데, 이를 사과의 형상(eidos) 혹은 이데아(idea)라고 하는 것이다. 이 형상은 불변하고 영원하며 그래서 언제나 하나로 있는 참다운 존재로서, 이것이 바로 지성적 대상으로서 참다운 인식, 즉 지식(epistēmē)을 이룬다.
『향연』은 플라톤의 저작 가운데 이데아론이 처음 나타난다고 알려져 있는 작품인데, 여기서 참다운 존재에 대한 인식의 과정이 설명되고, 또한 교육이 가르침과 배움, 깨달음과 앎의 과정이라는 사실도 나타난다. 향연』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책의 소재는 에로스(erōs) 즉 육체적인 사랑이지만 주제는 ‘철학에로의 인도’이다. 플라톤은 접촉을 통해서는 지혜가 전달될 수 없으며(플라톤, 향연』, 175d), 마치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가듯이 감각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온전히 정신의 눈으로 직관할 때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고 설파했다(앞의 책, 211c). 우리 세계의 모든 것들은 변전하며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으므로 이 현상의 세계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는 앎은 의견(doxa)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 지성의 눈으로 파악된 진리는 이 현상계 너머에 있는 영원불변의 존재에 대한 앎으로서, 진정한 지식(epistēmē)이다. 철학은 현상계로부터 진리의 세계로 향하는 길을 올라가는 일이며, 이 길로 인도하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다. 교사는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학생이 진리의 아름다움에 눈뜨게 하고 사랑으로 그것을 추구하게 하며, 결국 스스로 깨달음을 통해 진리를 파악하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다.
플라톤의 책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는 자신은 지혜를 추구하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며, 알지 못한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사람들과 철학적인 주제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는데, 대화를 통해 진리를 추구하는 일을 변증술(dialektikē)이라고 했다. 이것이 오늘날 소크라테스식 대화법(Socratic dialogue)이라고 불린다. 앞서 본 것처럼, 소크라테스는 테아이테토스』에서 교사로서 자신의 일을 산파의 기술에 비유한다. 다른 점은 몸이 아니라 영혼에 관한 일이라는 것이다(플라톤, 테아이테토스』, 150b). 산파가 자신이 임신한 것은 아니지만 임신부가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도와주듯이 자기는 지혜에 관한 의문을 품은 이에게 묻고 답하는 대화를 통해 그가 그 생각을 풀어내어 깨달음에 이르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산파술(maieutikē)이라 불리는 이 방법은 교사와 학생의 상호작용과 지적인 상승의 모델이다.
그렇다면 지식이란 과연 가르쳐질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우리는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가? 이것은 교육에서 근본적인 물음들이다. ‘어떻게 배울 수 있는가’라는 두 번째 물음부터 말한다면, 플라톤은 메논』에서 위에서 본 이른바 ‘메논의 역설’로 배움과 가르침이 만만치 않은 문제임을 보여준다(플라톤, 메논』, 80d-e). 한편 ‘가르쳐질 수 있는가’라는 첫 번째 물음에 대해서는 같은 책에 나오는 ‘덕(aretē)이 가르쳐질 수 있는가?’에 관한 대화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만일 덕이 가르쳐질 수 있다면 덕을 가르치는 교사가 있고 배운 사람이 있어야 할 텐데,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논리적 추론을 이어가는 로고스 차원의 논의는 막다른 길(aporia)에 빠진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한 노예 소년을 불러오게 하여 땅에 그림을 그려가며 간단한 기하학적 문제들을 물어봄으로써 아이가 기하학을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음에도 그 문제들에 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앞의 책, 82b-85b). 여기서 플라톤은 지식은 상기(anamnēsis), 즉 기억을 되새김이라는 생각을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로 들려준다. ”영혼은 불멸할 뿐 아니라 여러 번 태어나고 여기 지상뿐 아니라 하데스에 있는 모든 것들을 보았기 때문에, 영혼이 배우지 않은 것은 없다네. 그래서 덕에 관해서든 다른 것들에 관해서든 영혼이 어쨌든 전에 인식한 것들을 상기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네.”(앞의 책, 81c) 말하자면, 인간의 영혼은 죽지 않으며 몸으로 태어나고 몸에서 떠나기를 반복하는데, 영원의 세계에서 진리를 파악하고 알았으나 대부분 태어날 때 그것을 잊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이란 우리의 영혼이 이미 알고 있던 것의 상기라는 것이다. 상기의 구체적인 방법은 파이돈』에 나오는데, 여기서 플라톤은 인간이 삶 속에서 정화(katharsis)를 통해 몸의 잘못된 본성을 극복함으로써 진리를 다시 획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정화란 인간이 감각들을 넘어 지성을 사용하고 영혼의 관조를 실천하는 일로 묘사되는데(플라톤, 파이돈』, 66c), 이것은 다름 아닌 지혜사랑(philo- sophia), 즉 철학하기이다.
영혼에 관한 플라톤의 이야기를 우리가 다 받아들일 필요는 없겠지만, 이러한 생각이 그가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제시한 교육에 관한 생각들과 아귀가 맞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중요하다. 플라톤의 생각에 따르면, 학습자는 기본적인 개념들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하여 사유와 행위에 필요한 구조들을 스스로 지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교육은 교수자가 학습자에게 마치 소유물을 건네주는 것처럼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교수자와 학습자 간의 대화, 즉 상호작용을 통해 학습자가 스스로 진리에 접근하고 마침내 그것을 파악하도록 도와주는, 산파의 일과 같은 것이다. 이때 수업으로서의 대화는 교사의 교육 행위(didaskein)이자 진리로 인도하는 학습자 이끎(paidagōgē)이다. 철학 교육은, 다른 과목과는 다르게, 몸과 마음 전체의 전회를 목표로 한다. 플라톤의 국가』는 그가 교육의 문제를 국가 공동체 안에서 가장 중요한 사안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만년의 저작으로 알려진 법률』은 국가에서 법 제정의 목적이 다름 아닌 시민들의 교육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12) 이런 점에서 플라톤에 있어서 지식과 덕성과 체력, 즉 전인적 인격을 갖춘 사람 만들기가 그의 모든 학문 활동의 최고 목적에 놓여 있었던 필생의 사업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결론: 영혼의 전회

이렇게 볼 때, 플라톤이 전 생애에 걸쳐 지속적으로 하나의 통일된 교육 이론을 주장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지금까지 검토해본 플라톤의 저작에 나타나는 논의들을 중심으로, 그의 인간에 대한 이해와 교육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안전한 길을 찾는다면, 플라톤의 생각을 그리스 사유의 전통 위에서 이해해보는 방법이 있다. 소크라테스 이전인 기원전 6세기나 5세기 초에는, 아니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당시에도 철학이라고 하면 우주와 만물의 본성, 즉 자연(physis)을 다루는 이른바 자연철학이 주류였으나, 소크라테스가 철학을 ‘하늘에서 땅으로’, 즉 천체와 물질의 문제에서 인간과 윤리의 문제로 내려놓은 이후, 플라톤이 펼친 철학적 가르침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국가의 시민에게 덕(aretē) 혹은 훌륭함을 요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상기를 통한 것이건 교육을 통한 것이건, 국가의 기능들에 필요한 지식을 요구했다는 사실이다. 인간에게 국가는 필수적인 삶의 조건이며 좋은 삶을 위해서는 좋은 국가가 필수적인 것인데, 국가 안에서 시민의 기능은 각자의 역할에 필요한 지식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이데아론이 작동하는 플라톤의 중기 사상에서 추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플라톤에서 덕 혹은 지식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어떨까? 답은 두 가지 상반되는 방향에서 주어질 수 있다. 먼저 상기설에 따른다면, 답은 ‘아니다’가 된다. 왜냐하면, 지식 혹은 진리는 모든 인간이 원래 갖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있을 때 철학하기 혹은 자신의 영혼 돌보기라는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다시 태어났을 때 상기에 의해 우리가 몸 없이 영혼으로 존재하는 본성의 상태에서 갖고 있던 앎, 즉 진리를 되찾을 수 있게 된다. 반면 플라톤의 국가』에 나타나는 교육 이론에 따른다면, 답은 ‘그렇다’가 된다. 인간은 시민으로서 국가의 공적인 교육과정을 거치면서 어느 단계에서든 국가의 기능에 필요한 지식을 갖추고 그 기능을 수행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국가가 하나인 것처럼, 국가의 시민도 자신의 전문적인 기능을 발휘함으로써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의 총체적 지식-기능의 통일체를 이루게 된다. 시민들의 지식의 총합은 국가의 기능의 총합과 같다. 이렇게 두 개의 답이 서로 상반되지만, 어느 경우라도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이란 ‘아름다운 국가’ 안에서의 잘 살기(eu zēn)이며. 이것은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플라톤 교육의 특징인 ‘덕(aretē, 훌륭함)의 내재화’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배움을 통해서 혹은 영혼의 전회인 깨달음을 통해서 훌륭함을 내 안에 갖추는 일이다.13)

Notes

1) “Socrates autem primus philosophiam devocavit e caelo et in urbibus conlocavit et in domus etiam introduxit et coëgit de vita et moribus rebusque bonis et malis quaerere.”

2) 고대 그리스의 사상에 나타나는 ‘영혼’은 psychē(프시케)의 번역어이다. 기원전 8세기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뒤세이아』에서 인간의 psychē는 몸속에 깃든 숨인데, 죽을 때 몸을 빠져나가 저승인 하데스(Hadēs)로 내려가 실체 없는 그림자처럼 생전의 습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기원전 6세기 피타고라스 학파는 그리스 세계에서 처음으로 영혼의 윤회를 주장했으며, 기원전 5세기의 서정시인 핀다로스는 소크라테스 이전에 ‘영혼의 불멸’이라는 개념을 내놓았 다.(Bremmer, 1987; 2016) 고대 그리스의 영혼 개념을 현대의 영어로는 soul과 mind로 표현할 수 있는데, ‘soul’은 종교적인 개념이고, 철학적인 개념으로는 정신과 신체의 논의와 관련되는 ‘mind’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3) 여기서 ‘삼각형’이나 ‘요소삼각형’ 같은 것을 플라톤적인 진리의 표본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사유 속에서만 완전한 형태로 존재하는 기하학적 도형의 사례로서, 플라톤의 이데아와 닮은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요소삼각형’(elementary triangles)은 플라톤의 철학에서 물질의 최종적인 형태인 불, 공기, 물, 흙 등의 요소 혹은 원소들을 이루는 삼각형이라는 의미로예, 컨 대 불 원소는 4개의 요소삼각형으로 이루어져 있다.(플라톤, 『티마이오스』 참조)

4)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그의 중기 저작들에 나타나는데, 우리가 감각으로 만나는 사물들의 세계 즉 현상계 너머에 지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각 사물들의 형상(eidos)으로 이루어진 세계 즉 진리계가 존재한다는 생각으로, ‘형상 이론’이라고도 불린다. 현상계는 ‘나타남’의 세계로 사물들이 언제나 변화하는 변전의 상태에 있는 반면, 진리계는 참다운 존재의 세계로 그곳에서 각각의 형상은 생겨나거나 소멸하지 않고 영원불변하며 언제나 하나로 존재한다. 형상은 사물이 그 이름으로 불리는 존재론적 근거이며, 사물은 자신의 형상에 관여함으로써 존재한다.(김인곤, 1993, 166; 양태범, 2016, 182; 이기백, 1998, 72; 이상인, 2010, 105)

5) 이러한 인식의 4분 구도는 플라톤 『국가』 6권 509d-511e에 나오는 ‘선분의 비유’에서, 그리고 7권의 ‘동굴의 비유’ 이후, 앞의 선분의 비유를 요약하는 부분인 533e-534a에서 잘 나타난다.

6) 『소크라테스의 변명』 28b-34b에서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삶의 원칙과 궤적을 언급하는 부분, 그리고 34b-35d9에서 국가에 좋지 않은 일이나 의무를 저버리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하는 부분 참조.

7) 플라톤의 이 ‘새로운 시민’은, 그러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국사에 참여하고, 통치하고 통치받기를 번갈아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민 개념과는 같지 않다. 이른바 ‘공민’의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나타난다.

8) 여기에 동의하는 것은 인간이 신들보다 우월한 존재라는 데 동의하는 것이며, 불경의 극단적인 형태가 될 것이기 때문에, 테아이테토스는 이것이 “경건은 신들에 대한 보살핌이다”라는 자신의 주장에서 나오는 논리적 귀결임에도 스스로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9) 한편, 짧은 시간에 산파술이 펼쳐지는 단적인 사례는, 예를 들어 『메논』에서 소크라테스가 노예 소년과 기하학에 관한 문답을 하는 과정에서 볼 수 있다. 아래 2.3절 참조.

10) 이렇게 플라톤의 저작들에서 무언가에 대해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하는 무지’는 착각 혹은 “이중적 무지”라고 불린다.

11) 이렇게 노예 소년이 기하학을 배운 적이 없음에도 소크라테스가 묻는 일련의 기하학적 물음들에 답을 해냄으로써, 스스로 무지하다고 생각하는 자가 사실은 이미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산파술의 단적인 사례이다.

12) 플라톤은 초기 저작으로 알려진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부터 중기의 『국가』와 『정치가』, 그리고 만년의 저작 『법률』에 이르기까지 줄곧 국가와 시민의 교육과 지식, 통치자와 법률의 설득과 강제의 문제를 주제적으로 다루고 있다.(손윤락, 2018, 92)

13) 고대 그리스에서 교육을 의미하는 파이데이아(paideia)는 ‘아이를 기르다’라는 뜻의 동사 paideuō에서 나온 말로, 아이에게 건강한 몸과 덕(aretē, 훌륭함)을 길러주는 가정적, 사회적 과정을 말한다. 덕이란 지혜, 용기, 정의, 절제 등 당시 사회에서 바람직한 가치로 인정되는 인간적인 훌륭함들을 가리킨다. ‘훌륭함’을 목표로 하는 교육은 원래 귀족정의 산물이었으나, 민주정에서도 ‘훌륭한 시민’을 기르고자 하는 이상으로 이어지면서 이것이 후대 서양 교육 이념의 원천이 된다. 파이데이아는 학습자의 몸과 마음을 기르고 가르쳐 전인적인 성장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동양의 ‘교육’(敎育) 개념과 유사하며, 특정한 지식의 습득만이 아니라 학습자가 스스로 성장하면서 지식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주는 일에 초점이 있다. 이 의미를 오늘날의 교육과정에 적용한다면 교양교육이 맡고 있는 보편적 가치와 전인적 역량 교육이 될 것이다. 이때 교양교육은 ‘교양교육학’으로 특화된 것이 아닌 교육의 원형에 가까운 것으로, 다름 아닌 그리스의 파이데이아 개념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훌륭함을 갖추고자 하는 플라톤의 교육 이론은 교양교육의 원형에 가까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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