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대학은 단지 수단에 불과하다. 그들에게는 직업적 목표가 있고 대학은 그곳에 이르기 위한 수단일 뿐, 마치 특정 목적지로 가는 비행기 표와 같은 것이다. 반면에 자유교육은 여권과 같다. 그것은 우리를 어떤 목적지로든 데려갈 수 있다. 비행기 표와 달리 자유교육은 무한히 갱신될 수 있다. 또한 개인 맞춤형이어서 우리의 교육 여정의 모든 기착지를 상기시켜 주는 사진들, 그리고 스탬프들과 함께 완성된다. 여권과 마찬가지로 자유교육은 평생 효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졸업 후에도 그것을 소중히 여긴다.
1. 들어가는 말
인공지능 기술이 급격한 혁신을 이루어내면서 그에 따라 세상도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 2016년 알파고(AlphaGo)와 이세돌의 역사적인 바둑 대국 이래 놀랄만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인공지능이 작사⋅작곡을 하고, 그림과 동영상 제작은 물론이고 여태까지 창의적인 과업이라고 여겨진 일들도 해내기 시작했다. 챗지피티(chatGPT)나 마이크로소프트 코파일럿(Microsoft Copilot)의 효과적 활용은 사무직과 연구직 종사자들의 작업효율을 획기적으로 높여주고 있으며, 그로 인해 머지않아 직업의 미래를 걱정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인공지능의 혁신은 로봇공학에도 영향을 주어 스스로 청소법이나 요리법을 학습하는 휴머노이드 로봇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산업과 서비스업계는 물론 의료와 무기체계에 이르기까지 사회 체제 전반에 커다란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이미 인터넷 상점에서 인간의 형태를 한 2족보행 로봇이 판매되고 있을 정도다.
1) 알파고 충격 후 불과 10년도 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이러한 혁신은 아마도 18~19세기에 일어난 산업혁명이 인류의 삶을 바꾸어 놓은 것과는 차원이 다른 변화와 충격을 가져다 줄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변화와 충격에 따라 대학 교육은 어떻게 될 것이며 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격변의 시기를 지나면서 교육에서도 변화를 거듭해왔는데, 가장 큰 두 변화를 꼽으라면 아마도 중세 유럽에서 대학이 생겨난 것과 산업혁명 이후 대학의 변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11~12세기 종교적 이유와 더불어 도시화 및 무역의 발달로 사회 체제의 변화가 일어나자 그에 따른 교육받은 엘리트 지배층 양성의 필요에 따라 대학(universitas)이 생겨났다. 당시 대학 교육은 이른바 3학 4과로 대변되는 자유학예(artes liberales)교육이었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로부터 전해 내려온 노동으로부터 면제되거나 자유로웠던 계층의 사람들을 위한 교육이라는 이념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산업혁명의 여파로 19세기를 거치면서 대학은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는데, 그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자유학예 또는 그것을 가르치는 자유교육의 정신은 여전히 대학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로 남았다. 이제 오늘날의 급격한 변화에 대한 대학의 대응을 대학의 역사에서 제3의 물결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른바 제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 시대에 촉발된 제3의 물결에서 2천 년 이상 면면히 이어져 온 자유교육의 이념은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2. 실용적 자유교육
미국대학교육협회(AAC&U, American Association of Colleges and Universities)는 21세기의 대학교육, 특히 자유교육(liberal education)은 어떤 목적을 지녀야 하고 어떻게 교육되어야 하는지와 관련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른바 “자유교육과 미국의 약속”(LEAP, Liberal Education and America’s Promise)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는 2002년 『위대한 전망』(Greater Expectations)이라는 보고서로 출간되었다. 이 보고서 작성에 참여한 패널들은 급격하게 변화하는 시대에 걸맞은 자유교육의 틀을 제시하고 있는데, 가장 주목할 만한 키워드는 ‘실용적 자유교육’(practical liberal education)이다.
성공적인 개혁의 열쇠는 복잡한 세계에서 학생들이 필요로 하는 학습에 명확하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패널들은 21세기에 가장 힘을 실어줄 학습 형태로 활력 있고 실용적인 자유교육을 강력히 촉구한다. 배경이나 분야 또는 고등교육기관 유형에 관계없이 모든 학생들이 습득해야 하는 지식과 역량들을 적극 권장한다(
AAC&U, 2002, x-xi).
흔히 자유교육은 직업교육(vocational education)이나 실용적 가치를 산출하는 교육과 대비되는 것으로 여겨져 왔기에 위에서 실용적인 자유교육을 강력히 촉구한다는 표현은 새롭게 느껴진다. 그 뿐이 아니다. 보고서 내용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패널들은 최상위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 뿐 아니라, 전통적인 문리과(arts and sciences) 분야를 공부하는 학생들은 물론 모든 학생들에게 탁월한 자유교육을 제공해야 한다는 새로운 국가적 관심과 노력을 요청한다. 경영학, 교육학, 보건학, 공학 등의 전문 학문분야 역시 자유교육으로 접근되어야 한다.
『위대한 전망』의 패널들은 자유교육의 성격을 전통적인 자유학예 분야로 국한하지 않고 흔히 자유학예와 구분되고 다분히 직업⋅전문교육의 영역이라고 여겨졌던 경영학과 공학 등 응용학문을 아우르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생각은 미국 자유교육의 흐름에서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며, 20세기 전반기와 중반기를 통하여 하나의 논쟁적 주제였다.
3) 그러나 이제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자유교육과 실용교육의 구분이 인위적인 것이므로 그러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자는 것이다. 그러한 주장이 나오게 된 맥락은 당연히 시대적 변화와 관련이 있다. 지구촌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이제는 전 세계가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연결되고, 그래서 어쩌면 하나의 단일 문화권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와 동시에 하나의 국가에서도 다양한 문화가 공존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 되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백인 남성이 주도하는 사회였던 미국 역시 20세기 중후반 흑인민권운동, 페미니즘, 비서구문명의 포용 등의 변화를 겪으면서 그 이전에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유대-기독교 문명과 헬레니즘에 뿌리를 둔 자유학예의 전통적인 내용들은 더 이상 당연한 것이라고 볼 수만은 없게 되었다. 게다가 20세기 말부터 정보⋅통신 테크놀로지의 급격한 발전으로 대학 교육이 현실 세계의 문제에 적용되지 않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확대되었다. 학교에서 배운 지식이 현실 세계와 괴리되지 않고 적용 가능한 지식이 되어야 한다는 반성은 곧 자유교육과 실용교육의 엄격한 구분의 정당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 물론 이것은 자유교육이 졸업 후 사회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시장 가치를 지녀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 문제를 명확하게 보기 위해 20세기 전반기 자유교육 논쟁의 단편을 살펴보도록 하자.
3. 듀이: 자유교육과 직업교육의 융합
자유학예(liberal arts) 또는 자유교육(liberal education)이라고 하면 영어의 ‘liberal’이란 단어 때문에 정치적 함의를 지니는 교육인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즉 자유교육을 자유주의적 혹은 진보적 정치관이나 정치철학을 반영한 교육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듯이 자유학예는 노예제가 있었던 서양 고대의 ‘자유인을 위한 학예’(
artes liberales)라는 용어에서 유래했으며,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비전을 따라 다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닌 지식 자체를 추구하는 학문이라는 의미를 지님과 동시에 건전한 공동체의 유지와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시민으로서의 덕을 함양하는 교육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이러한 전통은 오랜 기간 이어져 내려와 르네상스 시기에 이르기까지 크게 도전받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자유학예 또는 자유교육은 ‘자유인을 위한 학예’라는 의미보다는 개인으로서의 ‘나를 진정 자유롭게 해주는 학문(교육)’이라는 의미로 더 빈번히 사용된다. 그런데 이처럼 자유교육의 이념으로 자유롭게 해주는 학문(liberating arts)이라는 해방적 의미가 추가된 것은 비교적 최근인 실험과학의 발달과 계몽주의가 발현한 18세기 이후의 일로 여겨진다.
4) 사실 ‘자유인을 위한 학예’라는 말은 자유인과 비자유인이라는 계급이 존재했고 그로 인해 노동으로부터 면제된 여가를 누리는 계급이 존재했던 시대에는 어울릴지 몰라도, 이제는 노동으로부터 면제된 별도의 여가계급이 존재한다고 볼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자유교육을 규정하는 새로운 이념적 해석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20세기 초 듀이(John Dewey)가 주목한 점이기도 하다.
프래그머티즘 철학으로 잘 알려진 듀이는 탁월한 역사적 통찰을 통해서 산업화된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교육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교육의 목적에는 자연적 발전, 사회적 효율성, 문화라는 세 측면이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사회적 효율성과 문화라는 목적이다. 사회적 효율성은 노동 생산성과 좋은 시민이 되는 것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고, 문화는 개인의 인격적 발전으로 귀결되는 고상함과 성숙함의 양성(cultivation)이다(
Dewey, 1916, pp. 130-141). 그런데 교육에서 역사적으로 뿌리 깊은 대립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바로 노동을 위한 유용한 준비로서의 교육(직업교육)과 여가로서의 삶을 위한 교육(자유교육) 사이의 대립이다. 전자는 노동 생산성과 관련된 사회적 효율성을 주목적으로 하는 것이고, 후자는 개인의 발전을 추구하는 문화와 관계된 것이다. 듀이는 이러한 두 교육의 분화는 고대 그리스에서 생계를 위해 노동을 해야 했던 계급과 그로부터 자유로웠던 계급의 분화에 기초하여 형성된 것이며, 사회적 지위에서 자유로운 계급과 노예 계급의 차이는 자유교육이 직업교육보다 본래적으로 상위의 것이라는 개념을 고착화하는데 기여했다고 본다. 그 결과 그러한 계급의 분화가 사라진 산업사회, 그리고 민주주의 사회에서조차도 “진정한 문화 또는 자유 교육은 적어도 직접적으로는 산업적인 것과 어떠한 공통점도 가질 수 없다는 생각, 그리고 대중에게 적합한 교육은 유용하거나 실용적 교육 밖에는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것이 되었다”(
Dewey, 1916, p. 289).
그러나 듀이는 교육에 대한 이러한 이분법적 혹은 이원론적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 특히 특정 학문이나 교과가 그 자체의 고정된 본성 때문에 자유학예에 속한다는 생각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다. 자유교육과 직업교육의 구분은 사회적, 문화적 조건을 기반으로 하여 형성된 우연의 산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Dewey, 1944, p. 391). 오늘날 사람들은 살아가기 위한 자원을 공급받으려면 노동을 해야 한다. 생계와 연결된 관심사가 그저 물질적인 것이고, 따라서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시간에 얻는 즐거움보다 본래적으로 저급한 것이라 해도, 그것이 유용함의 추구를 위해 사람을 훈련시키는 교육을 무시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즉 고상한 것으로 여겨지는 자유교육과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하는 직업교육이 분리된 상황을 타개하는 교육적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떤 과목은 유용하기 때문에 자유교육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어떤 과목은 유용성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자유교육의 대상이라는 생각, 즉 자유교육과 직업교육이 필연적으로 적대적이라는 믿음은 미신이다(
Dewey, 1916, p. 292).
민주주의 사회에서 교육의 문제는 [자유교육과 직업교육의] 이원론을 없애고 하나의 교육과정을 구축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고를 통해 모든 사람이 자유로운 실천을 할 수 있도록 안내해주는 과목들이어야 하고, 여가를 노동으로부터 면제된 상태가 아니라 노동할 책임을 받아들인 것에 대한 보상이 되도록 해주는 것이어야 한다(
Dewey, 1916, p. 294).
이러한 듀이의 관점이 자유학예 또는 자유교육의 가치를 폄훼하고 그 속에 직업교육의 성격을 도입하자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프래그머티즘의 관점에서 어떤 교육이건 실질적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반성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래서 강의실에서 배운 것이 현실 세계와 어떻게 관련이 되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현실의 문제에 적용할 수 있는지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 의식은 테크놀로지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여 우리의 삶에 직간접적 영향을 주는 오늘의 상황에서는 더 큰 의미로 다가온다. 실제로 듀이는 오늘날 지겹도록 강조하지만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융합교육을 하나의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그는 좀 더 포괄적인 안목에서 현대 사회에서 산업과 직업의 사회적 토대와 중요성에 대한 깊은 인식과 함께 인간과 자연에 대한 지식과 직업 준비에 대한 지식의 상호융합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말한다(
Dewey, 1944, p. 393).
4. 자유교육에 대한 20세기의 두 해석
이처럼 자유교육에 대한 듀이의 통찰은 결국 미국대학교육협회(AAC&U)의 자유교육에 대한 접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한 20세기 전반기를 통해 일어난 미국에서의 자유교육 관련 논쟁들을 살펴보면 듀이의 관점이 당시 결코 소수파 의견이 아니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와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의 제자였던 철학자 캘런(Horace Kallen)은 전통적인 자유교육의 교육과정은 물론이고, 어떠한 예술이나 공예, 어떠한 주제나 자료 또는 아이디어의 체계도 그것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벽이 아니라 길이 되어줄 때 자유교육의 도구가 된다고 보았다. 캘런이 그렇게 보는 이유는 결국 자유교육이란 인간을 자유롭게 해주는 목적을 지닌다는 것 때문이다. 그래서 농학이든 공학이든, 경영학이든 법학이든 의학이든, 학문 분야와 목적이 무엇이든 인간을 자유롭게 해준다면 그것이 곧 자유교육이라는 것이다(
Kallen, 1949, pp. 316-317).
이러한 생각은 오늘날 자유교육의 가치와 관련하여 흔히 언급되는 것이다. 예컨대 문학을 공부하면서 우리는 다른 사회⋅문화적 배경의 사람들의 삶과 이야기들을 접하고 지리적 제약을 넘어서는 통찰과 안목을 가지게 되며, 역사를 공부하면서 지금 여기를 넘어서 과거의 사람들의 삶과 일들로 우리의 관점을 확장하게 된다. 이처럼 자유교육으로서의 문학과 역사는 사람을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이른바 해방적 비전을 지닌다. 철학 역시 그렇다. 눈에 보이는 물리적, 구체적 세계의 한계를 넘어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또 다른 세계로 우리의 지성을 확장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통적인 자유학예 커리큘럼에 속하는 문학, 역사, 철학 뿐 아니라, 흔히 자유학예와 대비되는 것으로 여겨져 온 미케니컬아츠(artes mechanicae)라 할지라도 해방적 비전을 제시할 수 있다면 자유교육이라 불러 마땅하다는 것이 캘런의 생각인 것이다.
사실 미국에서 정부 차원에서 대학에서의 실용적 학문을 집중적으로 장려한 것은 1862년 모릴법(The Morrill Acts of 1862)에 따른 랜드 그랜트 대학(Land-grant university)의 전국적 설립을 계기로 하며, 이는 산업혁명에 대해 미국이 내놓은 고등교육에서의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설립된 여러 대학에서 텍사스 A&M(Texas A&M University)처럼 대학명에 농학(Agriculture)과 공학(Mechanics)을 의미하는 표현이 포함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모릴법은 농학, 공학, 군사학처럼 실용적인 커리큘럼을 갖출 것을 요구하였고 실용성을 추구한다는 상징성을 지닌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북전쟁 이전 미국의 칼리지들이 추구했던 자유학예의 정신을 소홀히 해도 좋다는 것은 아니었다. 모릴법은 특정 교과과정을 노골적으로 규정하지 않았으며, 자유학예 분야 역시 널리 장려했다(
Thelin, 2011, pp. 76-77). 따라서 모릴법이 통과된 1862년 7월 2일이 리버럴아츠칼리지가 사망한 날인 것처럼 보는 과장된 인식은 오해에 기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
전통적으로 리버럴아츠로 여겨졌든 미케니컬아츠로 여겨졌든 대학 안에서 다양한 학문들을 가르치면서 얼마든지 자유교육의 정신에 따라 교육이 가능하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순수하게 리버럴아츠칼리지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200여 개의 대학은 물론이고, 19세기 말 이래 종합대학 체제를 갖춘 수많은 대학에서도 교양교육의 이름 아래 모든 학생들에게 자유교육의 정신에 따른 교육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물론 여전히 자유학예의 고전은 변함없는 도서목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고 그러한 책들을 읽어야만 자유교육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캘런에 따르면 그러한 주장은 3학 4과 그리고 인문학에 대한 묘지숭배를 일삼는 소위 전통주의자들이 빈사상태의 과거를 되살리려고 노력하는 것일 뿐이다(
Kallen, 1949, p. 319). 학문을 기계적으로 칸막이에 따라 나누는 전통주의 또는 순혈주의를 고집하는 것은 자유로 이끌어주는 데 길이 되어주는 대신 오히려 벽을 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듀이나 캘런과는 다른 관점을 지닌 이른바 전통주의적 흐름도 무시할 수는 없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듀이와 논쟁을 벌였던 허친스(Robert Maynard Hutchins)를 들 수 있다.
6) 허친스는 모릴법에 따라 사회적으로 유용하고 쓸모 있는 기술⋅공학은 물론 직업⋅전문교육이 대학 전반에 스며들면서 전통적인 자유학예의 영역이 훼손되고 결과적으로 지식 자체를 위한 지식 추구라는 자유교육 고유의 이념과 그에 따른 학습은 사라지고 말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지녔다. 자유교육에 대한 이러한 허친스의 순혈주의적인 관점과 더불어 그가 열렬하게 옹호했던 그레이트북스 운동은 시카고대학에서 그의 동료였던 철학자 아들러(Mortier Adler), 콜럼비아 대학의 영문학자 반 도렌(van Doren)
7), 그리고 역시 시카고에서 가르쳤던 앨런 블룸(Allan Bloom) 등 영향력 있는 미국 지성에 의해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20세기말로 접어들면서 그러한 순혈주의적 관점이 학계 안팎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유지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허친스에서 블룸에 이르기까지 지식인이라면 반드시 섭렵해야 한다고 여겼던 캐논(正典) 체계는 20세기 후반 흑인민권운동, 여성주의, 문화다원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이 부상함에 따라 편협한 유럽 백인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로 비판받았다. 이는 자유교육의 고정된 커리큘럼에 대한 하나의 사회적 반론으로 여겨지기에 충분하다. 결국 자유교육에서 학습해야 할 대상과 학습 주체가 특정 텍스트나 특정 커리큘럼, 그리고 특정 계급이나 민족, 또는 성별로 국한될 수 없다는 생각이 더 큰 힘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단일 문화권이면서 일방적으로 서구 문화를 수입한 한국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점이 잘 부각되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서구의 관점에서 이러한 이슈는 자유교육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중요성이 앞에서 다룬 『위대한 전망』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5. 21세기의 자유(롭게 해주는)교육
미국대학교육협회가 『위대한 전망』에서 제시한 21세기 대학교육의 비전은 최근에 좀 더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2020년 발간된 『자유교육의 모습』에서는 자유교육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자유교육은 자유롭게 해주는 교육이다. 왜냐하면 자유교육은 마음을 해방시켜 도그마나 이데올로기, 또는 선입견에 얽매이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자유교육을 받은 사람은 스스로 생각할 수 있고, 폭넓고 열린 마음을 가지며, 따라서 조작이나 편견의 영향을 받기 쉽지 않다(
AAC&U, 2020, p. 7).
위 인용문에서는 한마디로 자유교육을 해방적 비전을 포괄하는 교육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규정은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도그마나 이데올로기 또는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로운 진리 추구라는 의미에서의 해방적 비전이라는 점을 분명히 함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사회⋅정치적 지형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이는 최근 미국에서 (그리고 아마도 전 세계적으로) 극단적인 당파성과 파벌주의가 민주주의의 기초인 이성적 논의와 타협, 다양성의 존중이라는 틀을 흔들고 있다는 위기의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에서 자유교육의 중요성은 언제나 민주주의의 가치 수호와 밀접한 관련을 지녀왔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그러한 중요성을 강조한 배경의 한 요인이 시민교육의 일환으로 공산주의에 맞서 서구문명에서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교육적 기초로서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면, 오늘날의 문제는 인공지능 알고리즘에 의해 영향을 받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그로 인한 정치적 견해의 극단화가 민주주의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에 대한 교정자로서 자유교육의 역할을 재정립하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자유교육이 민주주의에 적합한 교육인 반면, 그와 구분되는 비자유교육(illiberal education)은 권위주의, 전체주의, 독재정치에 적합하다고 보는 것이 그 점을 잘 뒷받침해준다(
AAC&U, 2020, p. 8).
아울러 『자유교육의 모습』에서는 그러한 최근의 사회적, 정치적 변화의 중요한 영향 중 하나인 인공지능이 가져올 미래의 광범위한 변화에 대한 준비로서 자유교육의 역할 역시 진지하게 고려되고 있다.
8)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자유학예의 문제의식이었던 인간의 문화와 물리적⋅자연적 세계에 대한 탐구, 그리고 그러한 탐구가 ‘빅 퀘스천’(Big Questions)을 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에 더하여 지적 역량은 물론이고 탐구와 분석, 비판적⋅창의적 사고, 말과 글을 통한 의사소통, 팀워크와 문제해결, 양적⋅정보적⋅과학적⋅기술적 리터러시에 이르는 실천적 역량(practical skills)을 갖출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자유교육에서 이러한 탐구와 학습의 대상이 특정 학문 분야가 아니라 전공을 가로질러 광범위하게 실행되어야 하며, 그러한 지식과 역량들을 복잡한 문제들과 다양한 환경에 적용시킬 수 있는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통합 학습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AAC&U, 2020, p. 9).
자유교육의 성격을 이런 방식으로 규정하는 것은 이미 100여 년 전에 듀이가 주장했던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앞서 다루었듯이, 듀이는 학문적 주제나 분야와 관계없이 교실에서 배운 내용이 실질적 효과를 지닐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으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통합적인 학습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다만 듀이와의 차이점이 있다면, 현재의 상황은 직업의 미래에 대한 부정적 전망이 나올 정도로 인공지능 기술 발전에 따른 불확실성이 크다는 점이다. 따라서 변화하는 시대에 자유교육이 보여주어야 할 전망은 그러한 불확실성에도 대응할 수 있는 힘이어야 한다. 『자유교육의 모습』에서 그러한 고민을 읽을 수 있다.
더욱이,
모든 학생들은 자신이 선택한 전공을 통해 예상하는 특정 직업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는 일자리와 직업을 포함하여, 일자리는 물론이고 직업마저 바꾸어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을 기대한다. 더 나아가 학생들은 또한 그들이 세계에서 잘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대비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며, 자유교육이 그들로 하여금 지역사회와 경제, 정치, 문화적으로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더 넓은 세계에서 넓은 견문과 더불어 책임감 있는 세계 시민이 될 수 있는 힘을 갖추게 해줄 것이라는 점을 이해할 것이다(
AAC&U, 2020, p. 19).
자유교육이 미래에도 그 중요성이 약화되거나 사라지지 않고 계속 추구해야 할 만큼 좋은 것이고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다면, 그것을 통해 학생들은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위 인용문에 제시되어 있듯이 오늘날 대학에서 학생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 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도 않고 불확실성이 더 큰 미래의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만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 능력이 전문화되거나 특정 직업에 초점을 맞춘 교육이 아님은 분명하고, 따라서 자유교육이 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것 역시 자연스럽게 도출될 수 있다. 결국 100여 년 전 듀이의 통찰이 옳았다.
사실, 오늘날 산업계는 새로운 발명품의 진화를 통해 급격하고 갑작스러운 변화를 겪고 있다. 새로운 산업이 생겨나고, 기존 산업은 혁명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결과적으로 너무 구체적인 형태의 효율성을 위해 훈련하려 하는 것은 효율성이라는 목적을 스스로 저버리는 것이다. 직업이 방법을 바꾸면, 그렇게 훈련된 사람들은 좀 더 일반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들보다 재적응 능력이 더 낮은 채로 뒤처지게 된다(Dewey, 1918, p. 139).
6. 자유교육과 필수학습성과
이제 문제는 자유교육이 어떻게 미래의 변화에 잘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줄 것인가와 관련된 고민일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자유교육의 모습』에서는 인간의 문화와 물리적, 자연적 세계의 지식을 제공함과 동시에 그 과정에서 지적이고 실천적 역량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한다. 이때 그러한 역량 중 대표적인 것들이 탐구와 분석, 비판적 사고, 창의적 사고, 의사소통 능력, 협업능력, 문제해결 능력, 양적⋅정보적⋅과학적⋅기술적 리터러시 등이다. 이러한 역량을 복잡한 문제들과 다양한 환경에 적용시킬 수 있으려면 전통적인 학습 방법에서 벗어나 프로젝트 또는 체험학습과 같은 역동적 학습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이미 미국대학교육협회는 이처럼 자유교육을 통해서 잘 함양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능력들에 대해서 모든 대학생들이 수업을 통해서 얻어야 할 필수학습성과(essential learning outcomes)로 규정한 바 있다. 이들 필수학습성과는 학문분야나 전공 또는 과목에 대응하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비판적 사고는 “비판적 사고”라는 과목을 통해서 능력이 함양될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교육하는가에 따라서 경영학이나 공학 수업을 통해서도 함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유교육의 반대는 실용교육이 아니라 비자유교육(illiberal education)인 것이다. 비자유교육은 비판적 사고나 문제해결 능력과는 거리가 먼 주입식, 암기식 교육이며, 순전히 도구적 학습으로 닫힌 사고 체계를 묻지마 식으로 전수하는 것이다(
AAC&U, 2020, p. 8). 결국 자유교육은 학문 분야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과목과 관계없이 학습성과에 따라 규정될 수 있다.
예를 들어, STEM 분야인 공학을 전공하기로 선택한 학생은 기술적 숙련이 공학적 설계의 선택에 대한 윤리적, 환경적, 사회적 함의에 의해 보완될 것이라는 점에 대해 확실히 함으로써, 자유교육이 그를 더 나은 엔지니어로 만들어줄 것임을 인지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간호학으로 직업적 프로그램에 등록하기로 한 학생은 임상 기술이 환자에 대한 더 나은 성과로 이끄는 상호문화적 역량에 의해 보완될 것이기 때문에, 자유교육이 그를 더 나은 간호사로 만들 것임을 인지할 것이다. 역사학처럼 자유학예 학문을 전공하기로 한 학생은 자유교육이 그를 더 나은 역사학자가 되도록 해줄 것임을 인지할 것이다. 인간의 역사에 대한 지식은 과학적 발견과 기술적 혁신에 의해 형성된 현대적 맥락에서 역사 이해의 비판적 탐구에 대해 알려주는 과학적, 기술적 리터러시에 의해 보완될 것이기 때문이다(
AAC&U, 2020, p. 18).
9)
이러한 통찰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오늘날까지 적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자유교육에 관한 가장 중요한 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대학의 이념』에서 뉴먼(John Henry Newman)은 상업이나 직업교육이라고 해서 반드시 자유교육과 무관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며, 체육이나 전쟁술도 단지 신체적이고 기계적 훈련을 넘어 정신의 힘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가르친다면 자유교육의 영역에 포함될 수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게다가 전문화되고 특수한 분야만을 배운 사람보다 자유교육의 토대 위에서 전문교육을 받은 사람이 더 성공적인 전문가가 될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박병철, 2023, p. 16).
10) 마찬가지로 밀(John Stuart Mill)은 자유교육이 더 능력 있고 분별 있는 법률가나 의사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11) 결국 오늘날 미국대학교육협회에서 제공하고 있는 자유교육과 관련된 중요한 이야기들은 19세기 자유교육의 이념을 설파한 사상가들의 생각과 궤를 같이한다는 점에서 완전히 새로운 시각인 것은 아니며, 전통을 오늘의 시대적 상황에 맞게 재해석하고 재구성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그렇게 함으로써 전통적인 자유교육의 이념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다만 자유교육을 규정하는 중요 요소로 제시된 필수학습성과들이 실제 교육 현장에서 얼마나 충실하게 성취되고 있는지에 대한 평가가 자유교육의 실질적 유효성 여부를 판가름하는 관건이 될 것이다. 그래서 미국대학교육협회는 필수학습성과의 평가와 측정에 대해서 진지하게 접근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접근은 기존의 전통적인 학습방식 및 평가와는 다른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 만약 학생이 정답이 이미 알려진 문제에 정확한 답을 제시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이 이미 해결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전통적인 의미의 학업인 지식 전수에는 성공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표준화된 테스트는 자유교육의 성과를 평가하는데 완전히 부적합하다. 그것은 오히려 비자유교육의 특징이다. 자유교육과 달리 비자유교육은 인간의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채우려고 하는 것이며, 발견을 가능하게 해주는 대신 알려진 것을 전수하려고 하는 것이기에 표준화된 테스트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자유교육은 적절한 답변이 알려지지 않은 문제와 아직 해결되지 않은 복잡한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도록 의도하기 때문에, 표준화된 테스트는 자유교육의 성과 측정에 적합하지 않다. 자유교육의 성과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학생들이 학문 분야 간, 그리고 체험적 학습과 이론적 학습 사이에서 얼마나 통합에 능한지를 살펴보아야 하며, 세계시민과 문제해결자로서의 역량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도 평가해야 할 텐데, 이러한 요소들은 자유교육에 관여하는 모든 참여자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다(
AAC&U, 2020, p. 19).
12)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인공지능 분야가 어쩌면 자유교육이 제시하는 주요 학습성과의 일부를 이미 어느 정도 잠식하고 있을 수도 있다. 알파고 이후 바둑이라는 게임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듯이, 이제 글쓰기 교육은 챗지피티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분석적 추론은 오로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게 되었으며, 문예 창작과 작곡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챗지피티를 비롯한 모든 생성형 인공지능 챗봇들이 쏟아내는 신박한 답변들은 기계학습의 결과일지는 몰라도 결코 기계가 직접 경험한 것에 기초하거나 체험한 세계의 사실들을 반영한 결과가 아니다. 인공지능이 소프트웨어로 머무는 이상 그러한 상황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인공지능 또는 그 산출물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사고, 인간의 삶, 인간의 문제, 그리고 인간 그 자체와는 같은 것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이후의 자유교육은 그러한 차별점을 인식하는데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세상과의 직접적인 교류나 경험에 기초하지 않았지만 인간 뺨칠 정도로 매우 훌륭한 기계가 나타났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기는 하지만, 오히려 인공지능 시대에도 자유교육과 그 이념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밖에 없음을 확인시켜준다. 왜냐하면 결국 자유교육은 인간은 무엇이며, 인간이 사회 속에서 그리고 물리적 세계라는 환경 속에서 어떤 존재인지 그 의미를 찾아가는 것에 의미를 두고 그로부터 출발하여 현실의 문제를 찾아내고 답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직은) 인간만이 할 수 있다.
테크놀로지의 놀랄만한 위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공지능을 능가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우리가 인간처럼 생각할 때만 가능하다.
- 조셉 아운, 스티븐 코슬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