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떠나 산속에서 10년 동안 수련한 차라투스트라가 동굴에서 내려와 선포한 첫 번째 가르침이 바로 위베멘쉬(Übermensch)였다. 『차라투스트라』 제1부의 시작 부분인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에서 니체는 여러 번 반복하여 위버멘쉬를 전한다. ”나 너희에게 위베멘쉬를 가르치노라!”(차라, 16-20). 그렇다면 니체가 가르치고자 하는 위버멘쉬란 어떤 존재인가?
3.1. 니체의 위버멘쉬론에 나타난 교양교육론
우리는 『차라투스트라』에서 니체가 위버멘쉬를 가르치면서 위버멘쉬와 다른 존재들을 비교하는 네 가지 사례를 접한다: ‘짐승-사람-위버멘쉬’ 계열, ‘낙타-사자-아이’ 계열, ‘대중-보다 지체 높은 인간-위버멘쉬’ 계열, 그리고 ‘인간말종-위버멘쉬’ 계열. 각각의 사례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첫째, ‘짐승-사람-위버멘쉬’ 계열을 살펴보자.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서론 격인 제1부의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에서 ‘짐승-사람-위버멘쉬’ 계열에 대해 말한다. ”사람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를 잇는 밧줄”(차라, 20)이다. 사람이 짐승과 다르듯이, 위버멘쉬는 사람과 다르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이 위버멘쉬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알 수 있다. 둘째, ‘낙타-사자-아이’ 계열을 살펴보자. 니체는 제1부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의 첫 번째 장인 ‘세 변화에 대하여’에서 ‘낙타-사자-아이’ 계열에 대해 말한다. “정신이 어떻게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며, 사자가 마침내 아이가 되는가를”(차라, 38). 여기서 우리는 아이가 위버멘쉬에 해당하고, 정신이 아이⋅위버멘쉬가 되기 위해서는 낙타에서 사자로, 그런 다음 다시 사자에서 아이로 순차적으로 변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셋째, ‘대중-보다 지체 높은 인간-위버멘쉬’ 계열을 살펴보자.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1-4부에 걸쳐 ‘대중-보다 지체 높은 인간-위버멘쉬’ 계열에 대해 말한다. 대중에 대해서는 특히 제1부의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에서 집중적으로 얘기하고 있으며, 보다 지체 높은 인간에 대해서는 제4부 전체에 걸쳐 다루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위버멘쉬가 대중과 다를 뿐만 아니라 ‘보다 지체 높은 인간’과도 다름을 알 수 있다. 넷째, ‘인간말종-위버멘쉬’ 계열을 살펴보자. 니체는 제1부의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에서 인간말종(der letzte Mensch)을 위버멘쉬와 대립시킨다. 니체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대중의 목소리를 통해 이를 보여준다. ”오 차라투스트라여, 우리에게 그 인간말종을 내놓아 라. … 우리가 그대에게 위버멘쉬를 선사하겠으니!”(차라, 26). 여기서 우리는 인간말종과 위버멘쉬가 대립 구도의 양극단에 위치함을 알 수 있다.
니체가 위버멘쉬를 설명하면서 제시하는 네 가지 사례를 종합해 보자. 여기서 우리는 짐승에서 위버멘쉬에 이르는 하나의 큰 계열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짐승-대중(인간말종/낙타)-보다 지체 높은 인간(사자)-위버멘쉬(아이)’의 계열이다. 이를 니체의 ‘짐승-사람-위버멘쉬’ 계열과 비교해 보면, 사람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에 위치한 존재로서 대중이거나 보다 지체 높은 인간 중 어느 하나에 해당한다. 달리 말하면, 니체에게는 대중과 보다 지체 높은 인간이라는 두 유형의 사람이 존재한다.
먼저 니체에게 대중이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자. 니체는 대중을 한편으로 인간말종이라 부르며, 다른 한편으로 낙타에 비유한다. 여기서 인간말종과 낙타는 각각 대중의 다른 측면을 묘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인간말종으로서의 대중은 어떤 특징을 지닌 사람인가? 차라투스트라는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차라, 17), 즉 위버멘쉬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대중은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비웃었다. 이를 보면서 니체는 대중이 ”저들 나름으로 자부심을 가질 만한 어떤 것”, 즉 ”교양”이라 불리는 어떤 것을 갖고 있으면서 스스로를 교양 없는 ”염소치기와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다(차라, 23).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대중도 스스로 ‘교양’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니체는 교양이 없으면서 교양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런 대중을 더 없이 경멸스러운 사람, 즉 ”인간말종”이라 부른다(차라, 24). “춤추는 별 하나를 탄생”시키려면 ”자신 속의 혼돈”을 지닌 사람이 필요한데, 이런 혼돈을 지니지 못한 사람, ”동경이 무엇이지? 별은 무엇이고? … 묻고는 눈을 깜박”이는 사람, 즉 대중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말한다(차라, 24). 니체는 이런 대중을 ”더 이상 사람 저 너머로 동경의 화살을 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비판한다(차라, 24). 요컨대, 니체는 현재의 자기를 넘어 미래의 새로운 자기에 대한 동경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을 인간말종이라 부른다.
이제 낙타로서의 대중은 어떤 특징을 지닌 사람인지 살펴보자. 어떤 무거운 짐을 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항상 주인에게 복종하는 사람이 바로 낙타 같은 사람이다.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닌 억센 정신, … 정신의 강인함은 무거운 짐을, 더없이 무거운 짐을 요구한다”(차라, 38). 니체에 의하면, 낙타는 주인이 말하는 ”너는 마땅히 해야 한다”라는 명령에 복종하는 존재이다(차라, 39). 이는 우리 삶을 옭아매는 철학, 도덕, 종교가 제시하는 가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타율적 삶을 살면서 자기 자신의 가치나 관점을 갖지 못한 사람을 일컫는다. 니체는 대중을 낙타 같은 사람 또는 인간말종으로 명명하면서 ”가축의 무리”(차라, 25)로 부르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니체가 대중을 인간말종 또는 가축의 무리로 부른다고 해서 대중이 도덕적이나 종교적으로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대중은 도덕, 종교 등 외부에서 부과한 삶의 기준을 충실히 따른다는 점에서 오히려 도덕적, 종교적으로 ‘선한 사람들’로 볼 수 있다. 니체가 대중을 인간말종 또는 가축의 무리로 부른 이유는 대중이 자신에게 익숙한 현재의 삶이나 가치에 안주하면서 자기를 넘어서는 일, 즉 자기 극복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대중은 철학, 도덕, 종교가 제시하는 기준이나 가치, 즉 ‘교양’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자신들은 교양 없는 ‘염소치기와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니체는 이런 대중이 자기 극복에 무관심한 채로 현실에 안주한다는 점에서 염소치기와 다를 바 없다고 본다. ”염소치기에게 말하듯 나 저들에게 말하고 있”다(차라, 26). 요컨대, 대중은 스스로를 교양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니체는 대중을 염소치기와 마찬가지로 교양 없는 사람으로 본다.
이제 니체가 교양인으로 간주하는 ‘보다 지체 높은 인간’은 어떤 특징을 지닌 사람인지 살펴보자. 보다 지체 높은 인간은 진정한 자아를 찾아 구도 여행을 떠났다는 점에서 낙타 단계를 벗어나 사자 단계에 있는 존재로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보다 지체 높은 인간뿐만 아니라 차라투스트라 역시 진정한 자아를 찾는 구도 여행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자의 정신을 지닌 존재, 즉 교양인으로 볼 수 있다. 니체에 의하면, 이들은 현재의 삶과 가치에 안주하는 사이비 교양인인 대중과는 다른 존재, 즉 진정한 교양인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진정한 교양인으로 볼 수 있는 보다 지체 높은 인간과 차라투스트라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 간의 차이를 밝히기 위해서 ‘낙타-사자-아이’ 계열에 속해 있는 사자의 의미를 좀 더 심층적으로 분석해보자.
니체에게 사자란 어떤 특징을 지닌 사람인가? 사자란 자유를 쟁취하여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다. ”정신이 자유를 쟁취하여 그 자신의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차라, 39).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의 쟁취, … 의무에 대해서조차도 신성하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사자가 필요하다”(차라, 40). 사자의 정신은 ”나는 하고자 한다”고 말한다(차라, 39). 그러나 사자라도 ”새로운 가치의 창조, … 아직은 그것을 해내지 못한다”(차라, 40). 니체는 창조의 선결 조건인 ‘자유’는 쟁취했지만, 아직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능력은 없는 사람을 사자에 비유했다. 그러나 니체가 ‘낙타-사자-아이’ 계열을 통해 제시한 사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를 제4부의 마지막 장 ‘조짐’에 등장하는 사자 비유와 연계시켜 해석할 필요가 있다. 니체는 ‘조짐’에서 두 종류의 사자, 즉 ‘웃는 사자’와 ‘화난 사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옛 주인을 만난 개처럼, 차라투스트라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있으면서 비둘기가 건드려도 ‘웃던 사자’가 보다 지체 높은 인간들의 발소리를 듣고 사납게 포효하면서 저들을 향해 돌진하는 ‘화난 사자’로 돌변한다. 여기서 우리는 ‘웃는 사자-차라투스트라’ 계열과 ‘화난 사자-보다 지체 높은 인간’ 계열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웃는 사자-차라투스트라’ 계열부터 살펴보자. 차라투스트라는 웃는 사자를 보면서 ”내 아이들이 가까이 와 있”음을 느끼고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차라, 536). 그리고 웃는 사자는 차라투스트라의 손등에 떨어진 눈물을 연신 핥고 수줍어했다. 이때 웃는 사자와 계열을 이룬 차라투스트라가 느꼈던 가까이 와 있는 ‘아이’는 위버멘쉬를 뜻한다. 이는 곧 차라투스트라가 위버멘쉬 단계에 근접했음을 암시한다.
이제 ‘화난 사자-보다 지체 높은 인간’ 계열을 살펴보자. 보다 지체 높은 인간은 화난 사자의 포효 소리를 듣자 ”한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동굴 속으로 한순간에 사라졌다.”(차라, 537). 여기서 우리는 차라투스트라와 보다 지체 높은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점과 차이를 발견한다. 앞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차라투스트라와 보다 지체 높은 인간은 모두 진정한 자아를 찾는 구도 여행을 떠났다는 점에서 낙타 단계를 벗어나 사자 단계에 있는 존재로 볼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사자의 정신을 지닌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보다 지체 높은 인간은 제4부의 마지막 장에서까지 ”자유를 쟁취하여 … 사막의 주인”(차라, 39)이 되기 위해 옛 주인과 투쟁하는 ‘화난 사자’의 상태에 머문다면, 차라투스트라는 제4부의 마지막 장에서, 즉 마지막 순간에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차라, 40)를 누리는 ‘웃는 사자’를 체험한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 극복을 위해 구도의 길을 걷는 사람들을 ‘화난 사자-보다 지체 높은 인간’ 계열에 속한 사람과 ‘웃는 사자-차라투스트라’ 계열에 속한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처럼 두 계열을 구분할 때 우리는 차라투스트라가 보다 지체 높은 인간보다 위버멘쉬에 더 근접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위버멘쉬는 어떤 존재인가? 위버멘쉬(Übermensch)는 문자 그대로 ‘인간(Mensch)을 넘어서는(Über) 존재’이다. 여기서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라는 말은 애매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한편으로 위버멘쉬를 동경의 화살이 도달해야 하는 과녁, 즉 ‘목적적 존재’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니체가 위버멘쉬를 선포하면서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라고 말했다(차라, 16-17). 자기 극복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의도했던 목적을 이룬 존재를 위버멘쉬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니체는 인간의 자기 극복을 일회적인 사건이라기보다는 영원히 반복되어야 하는 사건으로 본다. ”나 끊임없이 자신을 극복해야 하는 존재”임을 깨달았다(차라, 195). 마치 일회적인 자기 극복으로 위버멘쉬가 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차단하려는 것처럼 니체는 머리말에서 ”사람에게 있어 위대한 것은 그가 하나의 교량”이라는 것이지 ”목적이 아니라”고 못 박는다(차라, 20). 인간의 위대함은 주어진 목적의 달성 여부보다는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 자체에 놓여 있다. 차라투스트라』에 제시된 니체의 핵심 개념인 영원회귀도 이와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다. 끊임없이 자기 극복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 즉 자기 극복을 영원히 반복하는 사람이 바로 니체가 전하고자 하는 위버멘쉬이다. 우리는 차라투스트라』의 마지막까지 ‘완성된 또는 실현된 존재’로서의 위버멘쉬, 또는 이를 상징하는 ‘아이’가 결코 드러내지 않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차라투스트라가 아이들이 가까이 와 있는 조짐을 느끼는 것으로, 즉 아이가 아니라 웃는 사자를 체험하는 것으로 끝난다.
니체가 생각하는 진정한 교양인은 사이비 교양인과 어떻게 다른가? 니체에게 진정한 교양인은 위버멘쉬를 동경하면서 ‘위버멘쉬-되기’를 실천하는 사람이다. 위버멘쉬를 동경하는 사람은 ”사람 저 너머로 동경의 화살”을 쏘는 사람이다(차라, 24). 이처럼 동경의 화살을 쏘며 현재의 자신을 넘어 새로운 자신을 창조하는 위버멘쉬-되기를 실천하는 사람을 니체는 ”보다 높은 것, 보다 먼 것, 보다 다양한 것을 향한 충동”을 지닌 사람으로 묘사한다(차라, 195).
『차라투스트라』의 위버멘쉬론에 나타난 니체의 교양인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 보자. 니체는 사람을 짐승과 위버멘쉬의 ‘사이-존재’로 자리매김한다. 사이-존재로서 사람은 대중의 삶에서 위버멘쉬의 삶에 이르는 길 위의 존재이다. 니체는 현재의 삶에 필요한 그리고 유익한 다양한 지식과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사는 대중을 사이비 교양인으로, 끝없이 자신을 극복하는 삶을 사는 존재, 즉 보다 지체 높은 인간과 차라투스트라를 진정한 교양인으로 본다. 여기서 진정한 교양인은 다시 두 유형으로 나뉜다. 하나는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과거의 지식이나 가치 사슬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즉 새로운 창조의 선결 조건인 ‘자유’를 쟁취하려 투쟁하는 ‘화난 사자-교양인’의 삶이라면, 다른 하나는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창조의 능력을 상징하는 아이가 가까이 와 있음을 깨닫는 ‘웃는 사자-교양인’의 삶이다. 차라투스트라』에서 ‘보다 지체 높은 인간-유형’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차라투스트라-유형’이 후자에 해당한다.
9) 오늘날 우리 교육계에서 유행하는 용어로 말하면, 전자는 기존의 지식이나 가치 체계를 비판적으로 검토⋅해체하는 작업을 수행하는 ‘비판적인 교양인’의 삶이라면, 후자는 새로운 지식이나 가치를 생성하는 ‘창조적인 교양인’의 삶으로 볼 수 있다.
3.2. 『차라투스트라』의 비유와 상징에서 드러나는 니체의 교양교육론
앞에서 살펴본 ‘사이비 교양인으로서의 대중’과 ‘진정한 교양인으로서의 보다 지체 높은 인간/차라투스트라’라는 해석 틀을 염두에 두고, 니체가 차라투스트라』에서 비유와 상징을 통해 제시하는 교양인의 특징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여기서는 지면의 제약 등 여러 이유로 차라투스트라』에 제시된 80개 장 중에서 니체의 교양교육론과 긴밀히 관련된다고 볼 수 있는 3개 장을 중심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먼저, 80개 장 중에서 제목에 ‘교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유일한 장인 제2부 14장 ‘교양의 나라에 대하여’에 나타난 교양인의 특징을 살펴보자. 미래 세계로 여행하던 차라투스트라가 홀로 있음을 깨닫고 섬뜩한 기분이 들어 자신의 고향인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나라, 즉 ‘교양의 나라’로 되돌아왔다. 이때 차라투스트라가 발견한 것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한 교양인들이었다. 교양의 나라에서 교양인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알록달록한 점박이들”이었다(차라, 202). 차라투스트라에게 이들은 ”낯선 존재요 일종의 웃음거리”였다(차라, 205). 교양의 나라에서 차라투스트라가 만난 교양인의 특징을 분석해 보자 첫째, 니체는 교양의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 즉 교양인들을 ‘오늘을 살고 있는 자들’로 묘사한다. 이들을 니체는 자신이 교양의 나라로 되돌아오기 전에 ”너무나도 깊숙이 미래 속으로 날아” 들어 오직 ”시간만이 나와 벗하고 있”었던 자신의 고독했던 삶과 대조시킨다(차라, 202): 오늘의 삶을 사는 사람 대(vs) 미래의 삶을 사는 사람. 앞 절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오늘 또는 현재의 삶에 안주하는 사람들이 바로 대중, 즉 사이비 교양인이다. 교양의 나라로 되돌아온 후 오늘을 살고 있는 자들의 사이비 교양에 절망한 차라투스트라는 ”나 이제 내 아이들의 나라, 아직 발견되지 않은, 멀고 먼 바다 한 가운데 떠 있는 그 나라만을 사랑하리라”고 말한다(차라, 205). 여기서 우리는 니체가 교양 또는 교양인을 ‘안주하는 오늘’보다는 ‘변화하는 미래’와 연계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니체는 사이비 교양인을 ‘알록달록한 점박이’로 묘사한다. 여기서 알록달록한 점박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이비 교양인은 ”지난날의 기호들” 위에 ”새로운 기호”를 덧칠한 탈, ”물감과 아교로 붙인 종이조각을 구워 만든” 탈을 쓰고 있는 자들이다(차라, 203). 이들은 ”얼굴과 사지에 쉰 개나 되는 얼룩”을 칠하고 있다(차라, 202).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들을 ‘알록달록한 점박이’로 묘사했다. 알록달록한 점박이는 얼핏 보면 다양한 지식을 소유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온갖 시대와 민족”의 ”온갖 습속과 신앙” 등 온갖 조각 지식과 가치로 장식한 탈을 쓰고 있는 사이비 교양인이다(차라, 203). 그래서 니체는 사이비 교양인의 이런 ”베일과 덧옷, 분칠과 거동”을 벗기면 ”갈비뼈가 드러날 만큼 깡말라 있”는(차라, 204) ”핏기 가신 … 알몸”(차라, 203)만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한다. 사이비 교양인은 마치 자신의 털을 갖지 못하고 남의 털로 화려하게 치장한 새와 같다. 이들은 실제로는 빈약한 존재이면서 다른 새들의 온갖 깃털로 자신을 위장하고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알록달록한 점박이가 교양인 행세를 하는 위선적인 모습을 보고서 ”웃지 않을 수 없었”다(차라, 202).
셋째, 니체는 사이비-교양인, 즉 온갖 지식이나 가치 조각들로 치장한 알록달록한 점박이를 ”생식 능력이 없는 존재”로 묘사한다(차라, 204). 이들은 다른 사람의 지식이나 가치를 기억하고 재현할 수는 있어도 자신의 지식이나 가치를 창조할 능력은 없는 사람이다. 이들은 ”그 누구와도 공유”(차라, 56) 할 수 없는 자신만의 선과 악, 즉 ”너의 악과 너의 선”(차라, 104)을 창조할 수 없는 사람이다. 니체에 의하면, ”창조하지 않을 수 없던 자는 언제나 … 신앙을 신앙했”다(차라, 204). 그러나 사이비 교양인은 ”전적으로 현실적인 존재”로서 미래에 대한 ”신앙을 가질 수 없는 존재”이다(차라, 204). 이처럼 미래에 대한 신앙이 없어 새로운 것을 창조할 생식 능력은 없으면서 온갖 조각 지식들로 화려하게 치장한 사이비 교양인의 허세를 간파한 차라투스트라는 알록달록한 점박이들에게 ”오늘을 살고 있는 자들이여, 너희는 내게 웃음거리다!”(차라, 205)라고 말했다.
다음으로 제3부 10장 ‘악 셋에 대하여’에 나타난 교양인의 특징을 살펴보자. 차라투스트라는 세계 저편에 서서 인류 역사상 ”더없이 사악한 것 셋을 저울에 올려놓고 인간적인 관점에서 … 저울질”(차라, 310)했다. 관능적 쾌락(Wollust), 지배욕(Herrschsucht), 이기심(Selbstsucht)은 철학, 도덕, 종교적으로 이 세계에서 가장 저주받아 온 악 셋이었다. 그러나 철학, 도덕, 종교에 기반한 의식의 끈이 이완된 꿈속에서 악 셋을 저울질한 결과 이들은 모두 긍정적인 것으로 판단되었다(차라, 310). ‘악 셋에 대하여’에 나타난 교양인의 특징을 분석해 보자. 첫째, 니체에게 교양인은 특정 사회나 시대의 가치 기준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를 자신의 삶을 기준으로 재평가하는 사람이다. 교양인은 다른 사람이 선과 악으로 규정한 것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자기 삶에 비추어 그 가치를 재평가하는 능동적인 사람이다. ‘악 셋에 대하여’는 선과 악의 가치를 스스로 재평가하는 교양인의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차라투스트라가 악 셋, 즉 관능적 쾌락, 지배욕, 이기심을 ‘인간적인 관점’에서 평가한 결과 이들은 모두 그 자체로는 순수하고 정직한 것으로 드러났다. 세상 다른 모든 가치와 마찬가지로 이들 또한 어두운 측면을 지닌다. 관능적 쾌락은 사자의 의지를 갖고 있는 자들에게는 ”대단한 강심제”요 ”포도주 중의 포도주”이지만, 쇠잔해 있는 자들에게는 ”감미로운 독”이다(차라, 312). 폭력과 억압의 상징으로 간주되는 지배욕 또한 사람을 ”자족할 만큼 높은 자의 경지”에 오르게 한 다음, 그 높은 경지에 자족하지 않고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와 ”베푸는 덕”을 실천하게 한다(차라, 313). ”신체와 영혼이 누리는 자기향락”(차라, 314)을 이기적인 것으로 비판하는 세상과 달리, 니체는 ”힘찬 영혼에서 솟아오르는 건전하고 건강한 이기심을 복된 것으로 찬양”한다(차라, 313). 이처럼 철학, 도덕, 종교적으로 선과 악으로 간주되는 선악의 가치를 재평가하여 가치전환을 시도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과 악에서 창조자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자는 진정, 먼저 파괴자가 되어 [기존] 가치들을 부숴버려야 한다”(차라, 196). 기존 가치를 파괴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가치 재평가를 통해 ”최상의 악은 최상의 선”으로 전환된다”(차라, 197). 여기서 니체는 더없이 사악한 것으로 간주 되어온 관능적 쾌락, 지배욕, 이기심이 ‘최상의 선’으로 재평가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니체에게 최상의 선이란 무엇인가? ”최상의 선은 … 창조적인 선이다”(차라, 197). 니체는 가치 재평가를 통해 최상의 악으로 간주 되어온 관능적 쾌락, 지배욕, 이기심이 최상의 선이자 창조적인 선으로 가치전환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둘째, 니체에게 교양인은 지배욕을 덕 중의 덕이자 최고의 덕인 ‘베푸는 덕’으로 전환 시킬 수 있는 사람이다. 더없이 사악한 악 중의 하나인 지배욕을 어떻게 최고의 덕인 베푸는 덕으로 전환 시킬 수 있는가? 베푸는 덕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고독의 저 높은 경지가 영원한 고독을 마다하고 자족하지 않는 것”, 자신이 깨달은 바를 다른 사람에게 선물로 베풀려고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가려는 의지를 니체는 ”베푸는 덕”으로 본다(차라, 313). 여기서 우리는 ‘관능적 쾌락-지배욕-이기심’의 가치 계열에서 지배욕이 중앙에 위치하면서 관능적 쾌락과 이기심을 연결하는 매개 역할을 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니체는 폭력과 억압의 상징인 지배욕을 악한 것으로 판단하는 세상과 달리, 가치 재평가 또는 가치 재배열을 통해 지배욕을 배우고 가르치는 활동인 교육의 추동력으로 해석한다.
10) 니체가 세 개의 악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저울 위에 올려놓자 다른 쪽 저울판에 세 개의 묵직한 대답이 올라왔다. 니체가 저울판에 올려놓은 질문들을 먼저 살펴보자.
어떤 다리를 건너 현재는 미래로 건너가는가? 어떤 강제에 의해 높은 것은 자신을 강제하여 낮은 것을 향하도록 만드는가? 그리고 무엇이 이미 최상의 단계에 이른 것을 명하여 더욱 위로 성장하도록 하는가? (차라, 311).
위의 인용문에 제시된 세 가지 질문에 대해 어떻게 답할 수 있는가? 첫째, 어떤 다리를 건너 현재는 미래로 건너가는가? 이기심이라는 다리를 통해 현재는 미래로 건너간다. 이기심이 어떻게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다리가 될 수 있는가? 너희는 일체의 사물을 ”강제하여 너희에게, 너희 속으로 흘러들어오도록” 한다(차라, 125). 이를 니체는 사물들로부터 ”온갖 가치를 강탈해내는” 이기심으로 묘사한다(차라, 125). 여기서 우리는 이런 이기심을 사악한 것으로 비난하기 전에 사물의 온갖 가치를 강탈하는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 사물들로부터 가치를 강탈하는가? 그것들로 하여금 ”너희의 사랑의 선물이 되어 다시 너희의 샘에서 흘러나가게 하기” 위해서다(차라, 125). 베푸는 자가 일체의 사물로부터 가치를 강탈하는 ‘이기적인’ 행동을 한 것은 사실 그것들을 사랑의 선물로 만들어 다시 흘러보내기 위해서다. 이처럼 사랑의 선물로 베풀기 위해 가치를 강탈하는 이기심을 니체는 ”건전하며 신성”한 이기심으로 묘사한다(차라, 125). 니체는 이처럼 베풀기 위해 강탈하는 것을 ‘건전한⋅신성한 이기심’으로 부르면서, ”단지 훔치려고만 드는 … 저 병든 자들의 이기심”과 구별한다(차라, 125). 사랑의 선물로 베풀기 위해 강탈하는 것을 결코 ‘병든 이기심’으로 볼 수 없다. 니체는 왜 베푸는 덕을 그토록 강조하는가? 베푸는 영혼이 없으면 퇴화가 일어나고, 베푸는 영혼이 있으면 상승, 즉 ”종(種)에서 그것 위에 있는 보다 높은 종을 향”하여 올라가는 진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차라, 126). 그렇다면 이기심이라는 다리를 통해 현재가 미래로 건너간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에서 ”내리막길을 가는 자”(차라, 21), ”몰락하고 있는 자”(차라, 131)를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는 자”로 묘사하면서 이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며 축복한다(차라, 21, 131). 니체는 왜 하강하고 몰락하는 자를 사랑하고 축복하는가? 이들이야말로 ”저기 다른 편의 물가를 향한 동경의 화살”을 쏜 자들이기 때문이다(차라, 21). 니체는 ‘현재의 나’를 하강⋅몰락시키고 ‘미래의 나’를 생성하는 것을 ‘저편으로 건너’ 간다고 표현한다. 요컨대, 우리는 일체의 사물로부터 가치를 강탈하는 이기심의 다리를 통해 현재에서 미래로 건너갈 수 있다.
둘째, 어떤 강제에 의해 높은 것은 자신을 강제하여 낮은 것을 향하도록 만드는가? 지배욕의 강제를 통해 높은 것은 자신을 낮은 것을 향하도록 만든다. 사실 지배욕은 ”그 눈에 띄기라도 하면 [피지배인들이] 기게 되는, 머리를 조아리며, 전전긍긍하게 되는, 그리하여 뱀과 돼지보다도 더 비천하게 되”게 만드는 힘을 지닌다(차라, 313). 그러나 동시에 지배욕은 ”그것의 유혹적인 모습으로 순결한 자, 고독한 자, 그리고 자족할 만큼 높은 자의 경지”에도 오르게 하는 힘이다(차라, 313). 여기서 우리는 지배욕이 누구와 배치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지배욕이 높은 자와 만날 때 그것은 베푸는 덕으로 드러나며, 낮은 자와 만날 때 병적인 탐욕으로 드러난다. ”지배욕. 높은 자가 아래로 내려와 권력을 탐할 때 누가 그것을 두고 병적 탐욕이라고 부르겠는가! 진정 그 같은 탐욕과 하강에는 병적인 것도 탐욕적인 것도 없거늘!”(차라, 313). 산이 골짜기로 내려오고 높은 곳에 있는 바람이 낮은 곳으로 불어 내리는 것처럼, 높은 자 또는 강한 자의 지배욕은 자족할 만큼 높은 경지에 머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고독의 산물인 높은 경지를 사랑의 선물로 베풀기 위해 내려오는 것을 니체는 ‘베푸는 덕’으로 명명한다.
셋째, 무엇이 이미 최상의 단계에 이른 것을 명하여 더욱 위로 성장하도록 하는가? 관능적 쾌락이다. 관능적 쾌락은 사자의 의지, 즉 ”자유로운 마음을 지닌 자들에게는 … 지상 낙원에서 누리는 행복”이다(차라, 312). 니체에게 관능적 쾌락은 단순한 행복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약속할 때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것과 같은 ”한층 더 높은 행복과 더없이 높은 희망에 대한 위대한 비유적 행복”을 뜻한다(차라, 312). 이런 행복을 니체는 ”신체와 영혼이 누리는 자기 향락”으로 묘사한다(차라, 314). 자기 향락은 이를 경험한 자들에게 더 높은 행복을 위해 ‘더없이 높은 희망’으로 더욱 위로 성장할 것을 명령한다.
이런 묵직한 세 개의 질문과 대답을 통해 새롭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교육적 가치 계열이다. 첫째, 베풀기 위해 더 나은 경지에 이르려는 배움의 추동력으로서의 이기심. 둘째, 배움을 통해 상승된 경지에서 누리는 자기 향락으로서의 관능적 쾌락. 셋째,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는 가르침의 원동력으로서의 지배욕. 여기서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저주받아 온 악 셋이 ‘배움(이기심)-향유(관능적 쾌락)-가르침(지배욕)’이라는 새로운 가치 배열, 즉 배우고 누리고 가르치는 교육활동이라는 새로운 계열을 이루고 있음을 발견한다. 니체는 이 세계에서 가장 저주받아 온 악 셋을 ‘지배욕 = 베푸는 덕’이라는 가치 재평가를 통해 새로운 교육적 가치 계열을 생성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니체의 교양인이 새로운 가치 창조를 위해 관습적인 규정 이전의 세계로 되돌아가 선악을 포함한 모든 가치를 새롭게 재평가하여 가치전환 시킬 수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제1부 마지막 장 ‘베푸는 덕에 대하여’에 나타난 교양인의 특징을 살펴보자. 교양인은 자신의 서명(signature)이 들어간 지식을 창조할 뿐만 아니라 그 지식을 기꺼이 베푸는 덕을 지닌 사람이다. 니체는 ‘베푸는 덕에 대하여’에서 베푸는 덕을 덕 중의 덕이자 최고의 덕이라는 의미에서 ”덕의 근원”(차라, 126)으로 규정한다. 앞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베푸는 덕은 사랑의 선물로 선사하기 위해 먼저 나만의 덕을 창조하고, 그런 다음 이를 베푼다는 점에서 ‘배움과 가르침’의 덕에 상응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니체가 ‘베푸는 덕’의 마지막 절에서 제자와 스승의 관계, 특히 배움과 가르침의 관계에 대해 비교적 자세하게 언급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제자들이여, 이제 나 홀로 길을 가련다! 너희도 이제 헤어져 한 사람 한 사람 제 갈 길을 가도록 하라. … 나 진정 너희에게 권하노니, 나를 떠나라. 그리고 이 차라투스트라에 맞서 너희 자신을 지켜라! … 영원히 제자로만 머문다면 그것은 선생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쓰고 있는 월계관을 낚아채려 하지 않은가? … 너희는 나를 따르는 신도들이렸다. … 아직 너희는 너희 자신을 찾아 나서지 않고 있다. … 너희에게 명하노니, 이제 나를 버리고 너희 자신을 찾도록 하라. 너희가 모두 나를 부인하고 나서야 나 다시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 언젠가 너희는 내게 벗이 되어야 하며 하나의 희망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차라, 129-130).
위의 인용문에 나타난 니체의 가르침은 분명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제자들에게 스승조차도 닮지 말라고 권한다. 제자들에게 서로 헤어져 각자 제 갈 길, 즉 자신의 길을 가라고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스승을 닮는 제자가 되기보다는 스승처럼 ‘자기 자신만의 지식이나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한다. 이처럼 자신의 서명이 들어간 지식이나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을 차라투스트라는 ‘벗’이라고 부른다. ”너는 노예인가? 그렇다면 벗이 될 수 없다. 너는 폭군인가? 그렇다면 벗을 사귈 수 없다”(차라, 94). 위의 인용문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스승인 나를 부인하고 나의 벗이 될 때 나 너희에게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니체는 제자들에게 ‘스승-제자 관계’를 폐기하고 ‘벗-벗 관계’를 생성할 것을 요구한다. 왜 차라투스트라는 제자들에게 제자 대신 벗이 되라고 말하는가? 니체에게 ‘창조하는 벗’은 위버멘쉬의 삶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너희에게는 벗이 … 위버멘쉬를 예감케 하는 것”이어야 하며, ”너 너의 벗 속에 있는 위버멘쉬를 너희의 존재 이유로서 사랑해야 한다”(차라, 102). 신도처럼 스승을 따르던 제자들이 자신의 가치를 창조하는 벗으로 변신할 때 차라투스트라는 제자들에게 다시 돌아올 것이며, 다시 돌아온 차라투스트라는 이전과는 ”다른 사랑으로 너희[제자]를 사랑할 것”이라고 말한다(차라, 130). 우리는 스승과 제자가 각각 자신의 지식이나 가치를 창조하여 베푸는 일을 할 때 이들은 더 이상 스승-제자가 아니라 벗-벗으로서 교육공동체에서 동등한 위상을 지닌 구성원으로 서로 사랑할 수 있음을 얘기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 보자. 니체는 기존의 진리나 도덕을 수동적으로 따르기보다는 각자 자신의 삶을 기준으로 이들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니체에게 있어서 가치 재평가의 판단 기준은 ‘인간적인 관점’ 즉 그것이 인간 성장을 억제하는가 아니면 자극하는가였다. 달리 말하면, 니체는 이 땅에서의 삶을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최고 가치로 보고, 이런 가치 실현에 도움이 되는지를 기준으로 참과 거짓, 선과 악의 가치를 재평가했다. 이런 방식으로 전통적인 악 셋은 긍정적인 것으로 재평가되었다. 즉 니체는 이기심을 현재의 삶에서 미래의 삶으로 나아가는 배움을 가능하게 하는 자리적(自利的) 동기인 ‘건강한 이기심’으로, 관능적 쾌락을 배움을 통해 증가된 힘을 스스로 누리는 ‘본능적 향유 능력’으로, 지배욕을 깨달은 지식이나 가치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려는 ‘긍정적인 지배욕’으로 재평가했다. 그 결과 니체에게 ”덕의 근원”은 ”하나의 의지만을 의욕”하는 지배욕으로 드러났다(차라, 127). ”지배욕, 높은 자가 아래로 내려와 권력을 탐할 때 … 거기에는 ”병적인 것도 탐욕적인 것도 없”다(차라, 313). 니체는 지배욕을 베푸는 덕으로 재평가함으로써 지배욕과 매개 관계를 맺고 있는 이기심과 관능적 쾌락도 베푸는 덕의 활성화에 기여하는 긍정적인 가치로 전환시켰다. 인간에게 덕 중의 덕이자 최고의 덕인 덕의 근원은 무엇인가? 지배욕이자 베푸는 덕이다. 지배욕은 사람들에게 지식이나 가치를 ‘배우고 누리고 가르치는’ 활동, 즉 교육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배욕, 즉 베푸는 덕은 니체의 교양인에게 필요한 덕 중의 하나로 해석할 수 있다. 필자는 자신이 배운 지식이나 가치를 스스로 향유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선물로 주는 베푸는 덕, 즉 배우고 누리고 가르치는 활동 역량이 바로 니체의 교양인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