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주의 관점에서 본 고등교육의 핵심체계로서의 시장주의 교육이데올로기 비판
Criticism of Market-centered Education ideology : Consideration from a Humanistic Perspec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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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이 논문에서는 인문주의 관점에서 시장주의 교육 이데올로기에 관한 비판적 고찰을 목적으로, 전통적인 교육 패러다임의 급격한 변화를 갖고 온 인간자본 및 경제 제국주의 교육 이데올로기를 조명할 것이다. 이 교육 이데올로기는 경제학에서 차용한 인적자원 이론을 바탕으로, 교육을 경제적 분석 범주에 확정하여 적용하였다. 그래서 경제적 관점이나 이익 추구의 영역에 해당하지 않는 교육, 문화 등 정신적인 부문마저 모조리 경제 분석의 틀로 재단하고 있다. 아울러 이것이 교육 전반의 주요 흐름으로 부상한 현상에 관해 살펴보고, 이에 대한 비판 논거들을 검토한다. 국제 경제기구들 역시 교육 현안 전반을 평가하는 역할을 자임할 뿐만 아니라, 교육정책의 범주를 확정⋅공표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주류와 구성원들은 이 지배적 담론을 내면화하고 체화하고 있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논문에서는 교육 시장주의를 넘어 인격적인 교육, 인문정신에 기초한 보편교양에 관해 개괄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이로써 윤리적 주체로서의 교양인의 비판적 사유능력을 기르는 교육의 본질적인 의미와 이를 위한 제도권 교육의 과제에 관한 논의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한다.
Trans Abstract
This paper will shed light on the reality of the human capital and economic imperial educational ideology from a humanities perspective. This educational ideology was based on human resources and applied education to the category of economic analysis. In addition, this study examines the phenomenon that emerged as the main source of education and reviews the arguments for criticism against it. In this way, we explore the essential meaning of education that fosters critical thinking skills as an ethical subject and the task of education regarding it.
1. 들어가는 말
지구촌에서는 사회와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오로지 경제학적 관념과 시장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분석하고 진단하려는 이른바 경제 제국주의(Ökonomischer Imperialismus) 세계관이 확산되고 있다. 그 결과, 시장주의 메커니즘에 전면적으로 포획되어, 교육 부문에도 경제학 및 경영학적 세계관에 기초한 교육 이념이 확산하고 있다. 반면, 지성과 문화, 인문 교양(Bildung)이 지향했던 가치는 점차 퇴색하고 있다. 이로써 진리의 추구, 내면의 가치에 대한 성찰, 인문학적 사유의 공간은 협소해지고, 환경 및 생태, 기후위기 그리고 인권, 난민, 노동 및 사회정책 등 글로벌 현안에 관한 논의 역시 약화하고 있다. 전통적 지식은 이 문제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촉구해 왔지만, 사회의 담론체계에서 이러한 유형의 지식은 낡은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 따라서 기존의 형이상학적 진리, 전통 인문학의 지식 개념은 정보화 사회, 새로운 지식사회에서 큰 도전을 받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논문에서는 교육정책의 방향타가 된 시장주의 교육 이데올로기에 관해 비판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먼저 2장에서는 전통적인 교육 패러다임의 급격한 변화를 의미하는 인간자본(Humankapital) 및 경제 제국주의 교육관의 실체를 조명하고자 한다. ‘인간자본’은 미국의 신자유주의 핵심 경제학자들이 교육 문제에 적용함으로써 도입한 개념이다. 이들은 경제학을 사회 전(全) 부문으로 확장하여 적용할 수 있는 분석 틀로 인식하였는데, 이들이 주창하는 인간상(像)은 활용 가능한 지식으로 무장하여 시장사회(Marktgesellschaft)에 최적화된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oeconomicus, 경제적 인간)로서 시장의 변화와 요구, 기술 발전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인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교육이란 항시 혁신하고 개혁해야 하는 유동체이다.
3장에서는 교육 현안에 깊숙이 침윤된 이 교육 이데올로기가 세계 교육계의 주요 흐름으로 부상한 현상에 관해 살펴보고, 이에 대한 비판 논거들에 관해 검토하고자 한다. 국제 경제기구들은 이미 그들의 독자적인 잣대로 교육 현안 전반을 평가하는 역할을 자임할 뿐만 아니라 교육정책의 범주를 (글로벌 차원에서) 확정⋅공표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물론 경제적 목적, 이윤추구의 가치에 함몰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비판은 팽배하지만, 사회 주류와 구성원들은 이 지배적 담론을 내면화하고 체화하고 있다.
마지막 4장에서는 효율성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교육 이데올로기의 확산으로 거대한 규범으로 뿌리내린 시장주의 교육을 넘어서 인격적인 교육, 인간화 교육의 실현 가능성과 인문정신에 기초한 보편적 교양교육의 의미에 관해 개괄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2. 인간자본 모델 및 경제 제국주의 교육 이데올로기의 본질
2.1. 경제학적 교육체계의 인간 이해: 인간자본(인적 자본) 이론
근대교육은 중세 신분제 사회의 낡은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주체적인 인간을 형성하기 위한 투쟁의 산물이었다. 이를 위한 근대교육의 이상은 서구 자유주의 전통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인간의 양심과 이성의 절대적인 자유를 주창한 이 철학은 근대의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인격체를 위한 교육 사상의 근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인 교육 이상은 20세기 후반 이후 강력하게 휘몰아친 신자유주의 흐름으로 훼손되기에 이르렀다. 국경 없는 세계화, 글로벌 경쟁이라는 화두는 지구상의 모든 재화(財貨)는 물론 문화 자산과 정신적 가치마저 상품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이 전환은 교육 실천과 행위가 서비스업으로 둔갑됨으로써 “인간자본, 경제적 성공, 성장(Humankapital, wirtschaftlicher Erfolg, Wachstum)”을 교육 관련 논의에서 지배 담론으로 정착시켰다(Graupe, 2012, p. 35). 시장원리 옹호론자들은 시장의 법칙을 일종의 자연법(Naturgesetz)으로 추켜세우면서 사회 전(全) 부문에 확장하려 한다.
과거에는 시장이 수요와 공급 관계라는 영역에만 국한되었다면, 이제는 효율성, 유용성, 활용성, 수익성을 강조하는 “시장의 명령이 사유와 행위의 보편적 법칙” (Heinzlmaier, 2013, p. 1)이 되어, “환경을 설계하고 사회 전체 국면을 시장원리로 채우는 방식으로의 통치”(요시유키, 2014, p. 84)하는 형태가 되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근대 계몽주의 이래, 즉 칸트(Immanuel Kant)와 훔볼트(Wilhelm von Humboldt) 이후 확립된 근대교육의 이념과 이상은 일순간 낡은 이상으로 치부되었다. 사람을 인간자본으로, 지식과 교육을 실용적 목적의 도구로 여기는 이 관점에는 “기능적 연관성(funktionaler Zusammenhang)” (Graupe, 2012, p. 35)이 내포되어 있다. 그것은 경제적 성취만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일체의 교육 행위를 이에 초점에 맞추는 것을 의미한다. 교육 문제를 경제적 차원으로 치환시켰다는 비판을 받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조차 과거에는 그 폐해를 지적한 바 있다.1)
이렇게 “경제학 사유 모델을 교육 부문으로 전이(Übertragung ökonomischer Denkmodelle auf den Bildungsbereich)”(Krautz, 2009, p. 6)시킨 이러한 과정의 단초가 이른바 인간자본 이론(Humankapitaltheorie)이다. 이에 따르면, 경제 성장은 교육 부문에 대한 투자에서 비롯되며 기술적 진보를 통해서만 가능하고, 기술적 진보가 다시 경제 성장과 교육 투자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자본 이론 옹호론자들은 좋은 교육을 받으면 경제적 차원에서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논리를 강조한다. 그 대변자 중 한 사람으로 함부르크 세계경제연구소(Hamburgisches Weltwirtschaftsinstitut) 소장을 역임한 경제학자, 토마스 슈트라우바르(Thomas Straubhaar)는 이렇게 주장한 바 있다.
거시경제나 미시경제적 측면에서 유익한 교육으로 많은 수익을 낼 수 있다. 이것은 그리 무례한 표현이 아니라, 지극히 필연적이다. ‘인간자본’은 더 많이 투자하면 할수록 더 높은 수익을 창출하는 생산 요인으로 간주할 수 있다. (Mit guter Bildung wird sich mikro- wie makroökonomisch viel Geld verdienen lassen. Es ist nicht unanständig, sondern schlicht notwendig, ‚Humankapital’ als Produktionsfaktor zu sehen, in den umso mehr investiert wird, je höher die erwarteten Renditen sind.) (Straubhaar, 2004, p. 29)
‘인간자본’은 교육철학 분야나 인문교육의 개념이 아니라, 시카고 경제학파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게리 베커(Gary S. Becker)와 데오도어 W. 슐츠(Theodore W. Schultz) 등 미국 경제학자들이 입안한 것이다(Frost, 2013, p. 271).2,) 이들은 경제학에서 채택⋅응용한 인적자원 이론(Humanressourcetheorie)을 바탕으로, 교육을 경제적 분석 범주에 확정하여 적용하였다. 그 근거는 교육과 관련된 모든 현안이나 제도도 당연히 “경제학의 논쟁 대상” (Graupe, 2012, p. 35)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경제적 관점이나 이익 추구의 영역에 해당하지 않는 교육, 문화 등 정신적인 부문마저 모조리 경제 분석의 틀로 재단하고 있다. 인간자본 이론은 이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한 “경제학 교육의 인간상(Das Menschenbild der ökonomisierten Bildung)”(Krautz, 2009, p. 6)을 반영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슈트라우바르의 말처럼, 사람은 수익을 창출하는 생산 요인에 불과하다.
즉 인간자본의 형성은 “교육에 의해 얻을 수 있는 획득적 요소”(요시유키, 2014, p. 51)와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자신의 역량(Kompetenz)을 끊임없이 증진⋅확장함으로써 사회에서의 유용성을 증명해야 한다.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 즉 경제적 원리만을 추종하는 사람이야말로 항상 현실의 변화와 시장의 요구에 즉각적⋅신축적으로 적응할 줄 아는 맞춤형 인간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교육의 목적이 될 수 없고, 결코 되어서도 안 된다. 설령 교육으로 치장해도 그것은 결코 교육은 아니다. 그것이 문제인 까닭은 사람이 사람을 경제적인 이용의 대상으로, 하나의 도구로 보기 때문이다.
2.2. 경제학의 지평에 포획된 교육: “경제 제국주의”
오로지 경제 분석의 틀이라는 하나의 관점으로 현실을 보는 이러한 교육 이데올로기는 세계의 복잡다단한 현상을 단순화한다. 시장주의를 추종하는 경제학자들은 경제학의 접근방식을 광범위하게 설정하고, 모든 사회 영역을 분석하며, 더 나아가 인간의 모든 행동에 적용할 수 있다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Becker, 1990, p. 8). 이것은 일반적으로 ‘경제적’ 혹은 ‘경제학적’이라고 생각하는 범주를 훨씬 넘어선다. 문제는 이러한 “사유의 단(單)문화성(Monokultur im Denken)”(Graupe, 2012, p. 37)이 더욱 고착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 단문화성은 경제학적 사유가 사회 전체 영역에 스며들게 하였고, 이러한 현상을 이른바 ‘경제 제국주의’라고 일컫는다.
주목할 점은 부정적인 어감(語感)을 갖는 경제 제국주의라는 용어가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만든 개념이 아니라, 시카고 경제학파 학자들의 거리낌 없는 표현이라는 사실이다. 게리 베커는 이러한 인식을 극단적으로 피력한다. 그는 “모든 생활 부문에서 경제학적 사유의 의미(Bedeutung ökonomischen Denkens für alle Lebensbereiche)”(Frost, 2013, p. 274)를 적극 옹호⋅설파하면서 스스로 “경제 제국주의자(ökonomischer Imperialist)”라고 당당하게 선언한다.
경제학의 지평은 확장되어야 한다. 경제학자는 자동차의 수요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가족, 차별, 종교, 편견, 죄와 사랑에 관한 문제에 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경제 제국주의자임이 맞다. (Der Horizont der Wirtschaftswissenschaft muss erweitert werden. Ökonomen können nicht nur über die Nachfrage nach Autos sprechen, sondern auch über Angelegenheiten wie Familie, Diskriminierung, Religion, Vorurteile, Schuld und Liebe. In diesem Sinne ist es richtig: Ich bin ökonomischer Imperialist.) (Graupe 2013, p. 105에서 재인용)
베커의 이 주장은 종교적 근본주의자의 신앙고백과 다르지 않다. 다만 그 신앙의 대상이 형이상학적 종교가 아닌, 경제적 사유와 시장이라는 차이뿐이다. 더욱이 과거에는 비(非)경제 관련 부문이었던 교육 부문까지 베커와 슐츠의 뒤를 잇는 경제학자들의 영향력은 심화⋅확장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그전까지 사회과학의 분야였던 경제 개념을 전면적으로 확대⋅적용함으로써 사회의 다양한 양상과 과제들을 “경제 현상들(Phänomen Wirtschaft)” (Graupe, 2012, p. 36)이라는 하나의 프리즘 속에 합치시키고 있다. 이 논리에 의하면,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은 오로지 경제적 관념으로 보아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현존하는 모든 제도는 물론 공공성에 기초한 정책의 가치판단과 행위도 경제적 관념에 비추어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단일한 믿음을 고백하는 가장 신실한 인간이 호모 에코노미쿠스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양한 인간 생활과 사회적 행위 영역들을 시장이 규정하도록 하는 교조주의 메커니즘 원리로 축소시켰다. 이러한 인식에서 중요한 가치가 효율성과 발전을 증진하고 촉진하는 경쟁이다. ‘경쟁’은 어느덧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지고의 가치였던 ‘자유’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그러나 자유를 얻었지만 경쟁에 매몰된 개인은 파편화⋅원자화되어 개인화된 사회에 갇힌 존재가 된다(Lenz, 2007, p. 16). 세계화와 개인화가 공존하면서 글로벌 자본주의는 개인에게 고도의 교육 환경을 요구하고 있다. 교육은 경쟁의 최적화,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자질을 향상시키고 역량을 확장하는 평생학습 개념과 동일시되고 있다.
이렇듯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에 인간이 지식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은 지식을 적용하고 새로운 지식을 수용하는 것을 의미하며, 지식사회의 교육은 “자기 최적화(Selbstoptimierung)”와 다르지 않다(Lenz, 2007, p. 17). 이것은 단지 경제적 관념의 틀로 세계와 현실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이 문제인 까닭은, 이 논리가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에 깊이 파고들어 확고부동한 세계관인 양, 내면화하게 만듦으로써 몸과 사유, 정신과 영혼 등 인간의 총체를 이익 추구라는 하나의 목적에 함몰시키고 질주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사회에서의 성공과 실패 여부는 철저히 개인의 자질과 능력, 노력의 문제로 치환된다. 성공한 사람의 반열에 올라서기 위한 처절하고 절박한 경쟁에서 실패해도 그것은 개개인이 짊어져야 할 몫이지, 공동체의 책임은 완전히 면제된다.
노동시장의 급격한 외주화, 직접고용에서 다양한 형태의 간접고용으로의 전환, 이른바 1인 기업가인 특수고용 노동자의 양산은 이러한 현상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회 전반의 원자화(atomization) 추세가 널리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교육마저 이러한 “현대 글로벌 경제의 요구 Anforderungen moderner globalisierter Ökonomie” (Bank, 2012, p. 21)에 선선히 편입되고 있다. 그 결과, 사회 구성원들 역시 평등과 연대의 가치에 대한 인식은 희미해지고 구조적인 불평등 문제에는 눈을 감게 된다. 그 다음 단계는 파편화된 개개인의 능력주의에 대한 맹신이 그 자리를 대체하면서 치열한 자기 노력에 대한 보상과 그것을 잣대로 한 ‘공정’이라는 화두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부퍼탈대학 예술학부, 요헨 크라우츠(Jochen Krautz)도 『상품이 된 교육(Ware Bildung)』에서 “지식이 상품이 되고 학생은 인간자본이 되었다.”고 진단하며 이러한 현상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그는 “어떤 지식이 중요한지를 시장이 결정”하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말하면서 “글로벌 경쟁력 제고를 위한 핵심역량”의 근간으로 교육을 인식하는 관점에 대한 비판을 제기한다(Krautz, 2007b, p. 8). 사람과 환경, 사회적 현상을 호모 에코노미쿠스라는 단선적인 인간 이해로 고착화함으로써 인간의 판단과 행동을 시장 메커니즘 원리와 기준에 따라 규정하도록 유도한다.
이른바 경제 제국주의에 입각하여 인간을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규정하는 인간자본(인적자원) 이론은 그 이데올로기를 강고하게 체화시켜 사회 구성원으로 하여금 시장 원리를 수용하게 만든다. 2005년, 『디 차이트(Die Zeit)』지(紙)의 문예 편집주간, 옌스 예젠(Jens Jessen)은 “새로운 자본주의가 하나의 세계관이 되었다. 이것은 경제 부문에만 만족하지 않고 우리의 생활과 사상 전반을 지배하려 한다 Der neue Kapitalismus ist zu einer Weltanschauung geworden. Er begnügt sich nicht mehr mit der Wirtschaft. Er will unser Leben und Denken beherrschen.”(Jessen, 2005)고 규정한 바 있다. 경제학자들이 어느덧 “세상을 인식하고 교육하는 유일한 존재”(Graupe, 2012, p. 38)로 등극한 것이다. 주류가 된 경제 제국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삶의 공간에서 ‘경제학의 지평’이 미치지 않은 곳은 없다.
경제학의 지평에 포획되어 사회의 필연적 요구에 따라 서비스 기관으로 (교육 전반을) 개혁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와 이를 통한 교육 개념 자체에 대한 인식 변화는 고전적⋅보편적 교육 이상과 대학교육의 이념과 완전히 결별한 것이다. 그리하여 “교육 개념의 의미 변화와 교육제도의 개조(Umdeutung des Bildungsbegriffs und der Umbau des Bildungswesens)”(Krautz, 2007a, p. 86)를 향한 질주는 멈출 줄 모르며, OECD, 세계은행(World Bank), WTO(세계무역기구), 세계경제포럼 등 글로벌 경제기구들도 이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
3. 경제학적 세계관과 경영학적 교육관의 지배
3.1.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위한 글로벌 교육역량
기술 발전 시대에 많은 사람들은 지식이 급변하는 환경에 호응해야 하는 것으로 당연히 생각하고 있으며, 이 흐름에서 교육 부문에서도 자기 최적화 개념이 등장하고, “네트워크 연결(Netze knüpfen)”(Lenz, 2007, p. 17)에 대한 요구가 제기되고 있다. 개개인의 지식과 인식, 능력을 포괄하는 자기 역량 극대화를 위한 인간자본 개념과 마찬가지로 관계를 맺을 줄 아는 역량과 관련한 사회적 자본도 핵심 가치로 부각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 심지어 교육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조차 그런 유연한 역량을 제공하지 못하는 현재의 “경직된 교육체계가 진부하다.”고 강조하면서(Krautz, 2007b, p. 8) 교육혁신 요구를 더욱 강력히 주문하고 있다.
즉 혁신을 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는 논리가 팽배한데, 그 배경에는 학교와 대학을 학문과 인격 형성을 위한 보편교육이 아니라 글로벌 경쟁의 핵심역량을 위한 기관으로 간주하는 인식이 깊게 배어 있다. 그 결과, 산업계는 물론 정치⋅경제⋅언론 심지어 교육정책 당국과 대학 등 사회 전체가 글로벌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역량의 필요성을 적극 피력⋅옹호한다. “시장 전략적 적응 프로그램(marktstrategisches Anpassungsprogramm)”(Krautz, 2009, p. 6)을 열심히 수행하고, “새로운 상황에 대한 유연성, 이동성, 개방성”(Lenz, 2007, p. 16) 역량을 강화하라는 기대와 함께 유효 기간이 짧아진 지식과 정보 습득을 위한 평생학습에의 강박을 지속적으로 주입하고 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살아가는 동안 계속 새로운 것을 습득함으로써 자질과 역량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관념에 포획된다. 그렇지 못할 경우 벌어질 경쟁에서의 탈락에 대한 불안이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 이 인식의 저변에는 삶과 생활의 모든 부문, 사회 전반의 현상을 경제적 관념으로 이해하는 경제 제국주의 관점, 경제학⋅경영학적 인간상에 기초한 교육 이데올로기의 수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자유주의의 주춧돌을 쌓은 주류 경제학자들은 역사적 맥락과 의미의 탐색을 통한 정신사적 가치, 문화적 인식이 아니라, 세상과 현실을 경제적 사유의 범주로 평가⋅분석함은 물론 복잡한 현안들 역시 그에 기초하여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충만해 있다.
이것은 경제학 및 경영학이 이제 분과 학문에 그치지 않고 그동안 각 학문이 분점(分店)했던 형이상학적 세계관의 독점으로까지 귀결된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에게 현대 경제학은 더 이상 경제에 관한 이론적 패러다임을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경제학의 목적은 경제에 관한 분석만이 아니라, 세계와 현실의 모든 현상을 규정하는 유일한 사유방식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다. 교육 부문을 포함, 이렇듯 사회의 전체 영역에 스며든 보편적 경제화 흐름에 따라 교육 환경만이 아닌 교육 자체의 내재적 가치 및 철학을 가늠하는 교육시스템 전반의 경제화가 확장되었다. 예컨대 전(前)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장, 그레고리 N. 맨키(Gregory N. Mankiw)는 경제학자들이야말로 “이 세상을 인식하고 교육할 줄 아는 유일한 존재”라고 주장하면서, “경제학적 사유방식을 많은 이들에게 전달하고 세계의 현안에 대한 인식을 이 사유방식에 의거, 빠르고 효율적으로 전파하는 것”을 자신의 저서, 『경제학 원론(Principles of Economics)』의 출간 의도라고 밝힌 바 있다(Graupe, 2012, p. 38).
이들의 관념은 실제로 현실에서 대단한 파급력과 영향력을 끼치고 있으며, 이로 인해 경제학의 범주는 훨씬 광범위하게 확장되었다. 즉 신자유주의가 확고한 주류 담론으로 확립된 상황에서 이들의 논거는 금과옥조처럼 받아들여짐으로써 주류 여론 속에 수렴되었다. 그리하여 사회 현상을 이해하는 권위자로 격상된 경제학적 세계관이 교육 현안에도 깊숙이 침윤되었다. 실제로 OECD, 세계은행, WTO 등 세계 경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경제기구들이 교육 관련 문제에 강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OECD 교육지표(Education at a glance der OECD)>를 통한 교육경제학(Bildungsökonomie)은 교육에 관한 재정, 공급, 및 수요에 관한 문제를 포함한 교육과 관련된 문제에서 “교육제도와 경제발전의 연관성”(Combe & Petzold, 1977, p. 7) 연구를 목적으로 한다.
교육경제학은 말 그대로 초등교육부터 고등교육에 이르기까지의 교육 형식과 내용을 경제학을 기준으로 규정하는 교육의 경제학(Ökonomie des Erziehens)이다(Bank, 2012, p. 21). 아울러 투입산출 관계성, 인간자본 산출, 자질과 역량에 초점을 둔 교육 서비스로 대체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Becker, 2012, p. 13). 교육경제학을 비롯한 경제학적 관점의 교육 이데올로기의 목표는 교육의 책임성에서 국가의 역할을 밀쳐내고 민간이 제공하는 서비스 개념으로 전환하는 것이다(Krautz, 2007a, p. 86).
세계은행도 독자적인 『세계은행 보고서. 교육의 우선순위와 전략』을 통해 “결과에 초점을 둔 방향에서 교육의 우선순위는 경제 분석, 기준 설정, 목표설정에 따라 결정”(World Bank, 1995)된다고 규정한다. 세계은행은 교육 개념을 “지식경제(Knowledge Economy)”라 규정하면서 그것을 “지식을 통한 교역”의 의미로 해석한 바 있다(Chen & Dahlman, 2006 참조). 지식을 교역의 매개로, 교육과 교육제도의 의미와 가치를 국력을 강화하기 위한 최우선 과제로서의 상업화, 지식의 활용으로 규정한 것이다(World Bank, 2005).
이를 위해 ‘역량’ 개념이 교육체계에서 중요한 의미로 등장했다. 그동안 ‘역량’은 개인의 역량이 아닌 업무 영역에서 사용된 개념이었다. 그러다 OECD 교육평가 자료에 많이 등장하는 용어로서 역량이 부각된 것이다. 2005년, OECD는 자체 <OECD 역량(Die Kompetenz der OECD)> 지침을 확립하여 『핵심역량의 정의와 선별』(약칭 『DeSeCo』)과 관련 연구보고서를 펴냈다. 『DeSeCo』에는 “미디어 매체의 이용, 이질적 집단 속의 통합, 자율적 행동 역량” 등, 3대 핵심역량 범주가 제시되었다(OECD, 2005). 즉 미디어 매체와 정보통신기술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줄 아는 역량, 네트워크 되는 세계에서 다양한 문화권 사람들과 교류하고 사회 집단에 원만히 융화되는 것, 삶에 책임의식을 갖고 독자적으로 행동할 줄 아는 역량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핵심역량 선별을 위한 조건으로 “경제적⋅사회적 측면에서 측정 가능한 유용성”을 첫 번째로 꼽았으며, “유연성, 기업가 정신과 자기 책임”, “적응능력, 혁신능력, 창조성, 독자적인 동기부여”를 주요기준으로 강조하였다. OECD와 세계은행의 이 교육관은 교육 개념 자체를 경제⋅경영학적 관점에서 완전히 새롭게 정립하려는 기획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교육은 경제적 필요나 시장의 요구에 대한 적응을 위한 훈련에 불과하다. 모름지기 교육의 목적은 적응이나 순응이 아니라, 인간애, 이성적 사유를 위한 정신 함양, 비판능력이다. 그런데 OECD가 주창하는 역량은 비판적⋅성찰적 세계관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을 긍정하고 순응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따라서 교육 철학자와 인문학자들은 OECD와 세계은행의 이러한 교육 이데올로기에 심각한 우려와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이들은 OECD가 주창하는 역량들이 한결같이 비판적⋅성찰적 세계관과는 거리가 멀고, 그저 주어진 환경을 긍정하고 순응하게 하는 함의가 있다고 비판한다.
실제로 『DeSeCo』에는 이 역량들을 “환경에 맞춰 적응시켜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OECD는 “도덕적⋅지성적으로 성숙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독자적 사유를 위한 역량, 자신의 학습과 행위의 책임을 지는 역량”(OECD, 2005, p. 10)으로 설명하지만, “인간관계가 점진적인 경제적 성공을 위해서도 중요하기 때문에 사회자본으로서의 교육도 중요하다.”고 덧붙임으로써 긍정과 순응의 덕목을 역설하였다(OECD, 2005, p. 14). 그리고 이에 더해 “경제적⋅사회적 측면에서 측정 가능한 유용성”(OECD, 2005, p. 9)을 제시한다.
3.2. 시장 중심주의 교육 이념에 대한 비판
교육 부문에 대한 글로벌 경제 기구들의 이러한 적극적인 개입에 힘입어 세계 각국의 경제 및 경영계와 기업가 단체들은 경제⋅경영학적 논리로 대학을 비롯한 각 교육기관의 교육정책에 입김을 강화하고 있다. 이 현상은 독일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2008년, 독일 바이에른 경제협회 전문위원회인 교육 활동 자문단의 연차 평가보고서, 『글로벌 과정에서 교육의 위기와 기회』(Vereinigung der Bayerischen Wirtschaft, 2008)는 교육의 제반 활동과 목적은 글로벌 상황의 도전에 적응하고 세계화 흐름을 도전으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이를 위해 유치원 때부터 영어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헤센 기업가 협회(Der Hessische Unternehmerverband)도 학교가 향후 “교육 분야에서 서비스 기관이어야 하지 더 이상 사회적 제도가 되어선 안 된다.”(Krautz, 2009, p. 1)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서비스는 고객을 대상으로 한 개념이다. 고객과 서비스는 인격적 관계가 아니라, 상업과 자본에 통용되는 의미이다.
제도권 교육에 대해서 경영학적 교육 이데올로기를 수렴하라는 압력은 경제 제국주의 사유에 근간을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근대 자유주의 교육 이상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인 동시에 공적 차원의 학문적 논의를 차단함으로써 교육의 공공성, 민주적 합의와 동떨어진 교육 이념에 대한 일방적인 전파이다(Ladenthin, 2003, p. 360). 그리하여 교육의 가치, 공적 교육기관의 책무마저 시장원리로 대체하라는 권고가 노골화되고 있다. 더욱이 기업 스스로 고등교육 기관의 경영자로, 교육의 주체로 전면에 등장함에 따라 “선한 경제적 양심을 가진(mit gutem ökonomischen Gewissen)”(Graupe 2012, p. 35)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훈육하려는 흐름 역시 강화되고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비판은 적지 않다. 그 비판의 핵심 요지는 호모 에코노미쿠스 교육은 “삶의 물질적 조건들, 유용성과 이윤”(Fuhrmann, 2004, p. 222)에만 초점을 두고 있으며, 이러한 인식에 기초하여 (OECD와 세계은행 등) 글로벌 경제 기구들이 기획하고 확산시킨 교육 이데올로기야말로 활용 가능성에 맞춤으로써 “목적을 위해 인간을 기능화(Funktionalisierung des Menschen für Zwecke)” (Krautz, 2009, p. 4)하는 폐해가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 교육 이념의 숨겨진 의도에 대한 비판도 제기된다. 자유와 독립성, 결단 능력을 확보하고 책임감을 높임으로써 개인의 삶과 사회활동에서 적극적인 주체자로서의 역량을 강조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조종 대상으로서의 통제 기제의 작동”이며, 경영학적 통제 체제에 귀속된 ‘기준, 평가, 아웃푸트 지향성, 품질 보장, 효율성’을 교육경제학 개념으로 대체한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Krautz, 2009, p. 13)이 그것이다.
이것은 필경 인간을 객체로, 관리와 통제의 대상으로 여겨 사회적 문제의식이 결여된 조직의 일원으로 규정하는 심각한 폐단(서보명, 2011, p. 125)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특히 “활용가능한 역량 습득(Erwerb verwertbarer Kompetenzen)”(Frost, 2013, p. 269)이 교육 행위의 중심이 될 때, 사회 규범에 맞춰 적응하는 재주만 갖출 뿐, 문제를 제기하고 의미 있는 삶, 인간적인 세계를 구현하기 위한 대안의식을 갖지 못하며, 비판적 사유역량을 기르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사회 현상을 경제적 관념으로만 이해하려는 시장주의 교육 이데올로기의 독점 그리고 교육, 문화 영역에까지 거침없이 파고든 경제학⋅경영학적 교육 이념이 대학에 바라는 요구는 단 한 가지, “산업과 기술 분야, 경제발전을 위한 우수인력”(Heitger, 2002)을 배출하라는 요구로 집약된다.
훔볼트는 인간의 기계화(Maschinisierung des Menschen) 현상이 교육제도 밖이 아니라, 산업화된 교육 자체에 의해 일어날 수 있음을 우려했다. 그가 “목적의 대상이 되지 않는 휴머니티”, 지배적 가치관에 대한 저항과 비판의식을 주창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Frost, 2013, p. 268). 경쟁 원리와 시장주의 이데올로기를 우상화하는 교육의 큰 폐단 가운데 하나는 교육과 교양의 가장 중요한 기본과제, 즉 “생각하는 것을 배우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가르치는 책무를 포기”(Graupe, 2012, p. 39) 했다는 데 있다.
오스트리아의 교육철학자, 마리안 하이트거(Marian Heitger)는 『교육의 죽음(Der Tod der Bildung)』(2002)에서 이러한 책무를 포기하고 경제 및 경영 논리에 포획된 시장주의 교육이야말로 “죽은 교육”이라고 선언했다(Heitger, 2002). 하이트거는 “편견으로부터, 권위와 시류에 무비판적으로 얽매이는 것에서 벗어나는 과정”으로서 생각하는 법을 배우고 가르치지 못하도록 만드는 교육개혁을 비판하면서 아무 성찰 없이 자본의 법칙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현상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Heitger, 2002).
이러한 부작용은 의식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친다. 어느덧 개개인은 “본인 주식회사(ICH-Aktiensgesellschaft)” (Lenz, 2007, p. 16)로까지 일컫는 국면에까지 이르렀다. 역량을 강화한 한 개인이 자신을 투자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미래를 설계⋅경영하는 1인 기업가, 시장원리를 내면화하면서 스스로를 경영하는 경제적 주체(호모 에코노미쿠스)로 변모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린 것이다(요시유키, 2014, p. 55). 이것은 기업화된 사회 안에서 개인이 스스로를 경영⋅관리해야 하는 기업가로 바뀐 것을 의미한다. 이 변화가 (신자유주의 교육정책 당사자들의 주장처럼) 집단의 수동적 일원이 아니라, 역량을 쌓은 자율적인 개인의 위상이 높아진 것으로 보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시장의 변화와 요구, 사회 질서에 원만하게 적응하는 것도, 적응하지 못한 것도 책임은 전적으로 당사자 개인의 몫으로 돌리기 때문이다. 개개인은 ‘자율적으로 책임을 지는’ 존재이자 자기 경영의 주체라고 떠받들기 때문에 손실이나 실패도, 책임도 전적으로 각자의 몫일 수밖에 없다. 더 심각한 사실은 자본화된 현실, 기업화된 사회에서 사회 구성원을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포획시키고 “총체적인 자질 관리(Total Quality Management)”라는 조종기법에 종속되게 만든다는 점이다(Krautz, 2009, p. 13). 이러한 요구는 계속 되풀이되는 교육혁신을 통해 더욱 심화되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우려되는 점은 글로벌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흐름을 인정하더라도, 글로벌 경제기구들의 교육에 관한 인식이 휴머니즘적⋅인격적인 인간상을 지향하는 교육, 윤리적 책임을 자각하는 시민을 위한 교육과 완전히 배치된다는 점이다.
4. 시장주의 교육을 넘어 인간화 교육으로
시장주의 교육 이데올로기와 경쟁 원리의 수렴 요구는 교육 자체에 대한 인식 차이에 근간을 두고 있다. 칸트와 훔볼트를 거쳐 확립된 근대교육(교양)의 이상은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개인의 자아 형성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의 급속한 확산 이후 이러한 교육 이상은 진부한 것으로 폄훼되었다. 물론 신자유주의자들 역시 인간의 자유를 옹호하는 이상 자체에 대해서는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인간의 개별성과 다양성을 촉진해야 한다는 신념을 설파하고 있다. 다만 교육 혁신과 개혁을 줄기차게 요구하는 논리를 통해 스스로 선택할 줄 아는 자유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획일적인 기존 교육체계를 바꿔야 함을 주창한다. 더 나아가 이들은 선택의 자유를 확대하고 자율성을 신장하기 위해 경쟁 원리와 시장주의 질서를 채택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1976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로서 대처(Margaret H. Thatcher)와 레이건(Ronald W. Reagan) 행정부 당시 신자유주의 정책의 스승이었던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도 그 한 사람이었다. 『자본주의와 자유(Capitalism and Freedom)』에서 그는 학교의 건전한 다양성을 조장하고, 유연성을 위해서는 경쟁이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과도한 획일성으로 위협받는 교육 현실을 비판하면서, 다양성을 더욱 촉진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였다(프리드먼, 2017, p. 159). 프리드먼은 국가가 주도하는 교육체계는 필연적으로 획일화된 제도일 수밖에 없으며 재능을 발휘할 여건을 만들지 못한다고 진단했다.
그렇지만 윤리적 주체로서의 인간을 위한 교육은 일체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프리드먼에게 교육은 실무교육을 통한 전문 직업인 양성교육일 뿐이었다. 그는 교육이 “기계, 건물 또는 다른 형태의 비(非)인적 자본에 대한 투자”와 유사하다고 밝혔다. 그에게 교육의 역할과 기능은 오직 인간의 “경제적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다. 그렇기에 교육의 생산성 향상은 개개인이 자신의 노동에 대해 “더 높은 수익으로 보상”받을 수 있는 수단이다(프리드먼, 2017, p. 169).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드러난 프리드먼의 교육관에 대해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강하게 제기되었다. 시장원리에 입각한 그의 교육관이 본질적으로 인간을 경제적 이용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이며, 그가 말하는 자본주의에서의 다양성과 자유는 필경, “한 사람을 위한 이익이 다른 사람에게는 노예(Gewinn für die einen, Sklaverei für die anderen)”(Krautz, 2009, p. 7)가 될 것이라는 비판이 그 핵심이다. 더욱이 교육 시장의 경쟁주의와 교육 환경의 불평등이 심화되는 현실에서의 다양성은 경쟁을 합리화하는 미사여구에 불과하며, 그렇기에 프리드먼이 옹호하는 다양성의 촉진은 현실에서 경쟁의 촉진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는 비판(요시유키, 2014, p. 83)이 설득력을 갖는다.
어쨌든 세계적인 경제학자로 추앙받은 프리드먼의 교육관은 ‘본인 주식회사’의 경영자(혹은 1인 자본가)이자 스스로 경영과 투자 대상으로 인식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위한 교육 이데올로기를 드러낸 대표적인 사례이다. 경쟁과 효율성이라는 시장원리에 입각한 교육,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교육이 갖는 또 다른 치명적인 문제는 기존 상황에 대한 순응주의를 강화한다는 데 있다. 시장주의 교육은 의도했던 않았건 간에 사회 현실과 기존 질서에 대한 순응적인 태도를 촉진시켰다는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러한 비판은 비단 인문학자들만 제기한 것이 아니라, 산업 현장의 전문가들도 제기한 바 있다. 도이체 텔레콤(DT)의 인사담당 임원이었던 토마스 자텔베르거(Thomas Sattelberger)는 시장주의 교육 이데올로기야말로 “성찰하는 능력의 부재(不在)”를 본질로 하며, 교육이라기보다는 세뇌(Gehirnwäsche)에 불과하다고 단언하였다(Engeser, 2010). 젊은 세대를 하나의 가치관으로 모으는 교육이야말로 정작 신자유주의자들이 중시하는 다양성을 해치는 해악이 아닐 수 없다.
교육을 직업교육으로, 효율성을 추구함으로써 경제적 성취와 직업적 안정을 보장하기 위한 예비과정으로만 교육을 이해하는 관점에서 보면 교육은 언제나 시류에 맞게 변화시키고 바꿔야 하는 유동체이다. 그렇게 자꾸 바꾸라는 요청에 맞추다 보니 어느덧 본질과 그 의미에 대한 기억마저 희미해진 상황에 이르렀다. 이로써 다양한 문제에 물음을 제기할 줄 아는 능력, 현존 상황 앞에서의 도덕적⋅윤리적 지향의 의지는 점점 마모될 것이다. 아울러 그 결과로 인한 끔찍한 폐해를 경험했음에도 아직까지 인류는 그 교훈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멀리는 반유대주의 광풍과 제국주의의 폭압, 가깝게는 불과 한 세기도 채 안 되는 시기에 인류는 파시즘과 홀로코스트를 겪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 끔찍한 역사를 합리화한 것은 인종주의와 사회진화론, 우생학 등 최신 과학 및 학문, 교육의 허울을 걸친 강자 중심의 이데올로기였다.
이후 아도르노(Theodor W. Adorno)를 비롯한 비판적인 지성들은 집단 이데올로기에 대한 맹종과 무비판적 추종이 가져온 파국에 대해 경고하면서, 교육의 본질과 인문적 가치의 회복을 촉구하였다. 그 출발점은 당연히 기존 현실상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각성이었다. 시장주의 교육 이념에 성찰과 비판능력, 타자에 대한 공감 능력, 고통당하는 이웃에 대한 감정이입 능력을 길러주는 인문학⋅인격적 교육이 들어설 여지는 없다. 그저 경영의 주체로서의 역량과 능력을 시장에 팔 줄 아는 1인 자본가, 경영 논리와 시장주의 원리로 무장한 영악하고 유연성을 갖춘 직장인, 조직과 집단의 논리를 내면화하고 순응하는 근로자를 양성할 뿐이다.
5. 나오는 말
교육, 특히 대학교육은 전례 없는 도전에 직면해 있다. 사회와 공동체 구성원 모두 변화의 중심에 대학이 있어야 하고, 대학이 그 발전을 추동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제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AI)의 진보는 물론 환경 및 생태 문제 등 지구촌이 직면한 여러 과제를 원활하게 수행하라는 역할을 대학에 부여하고 있다. 이제 대학은 고답적인 학문 공간으로서만 머무를 수 없게 된 듯하다. 이에 더해 시장경제의 효율성에 맞춰 성취 지향적인 교육을 추진하라는 압력에도 직면해 있다. 물론 대학에 대한 이 압력이 인문정신을 구현해야 하는 대학 고유의 역할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문제는 교육개혁과 혁신으로 포장된 이러한 변화에 무기력할 뿐만 아니라 교육 자체의 의미 변질 및 탈(脫)정신화와 고전적 교육 이념의 붕괴를 “불가피하고 대안이 없는 것”(Krautz, 2007a, p. 86)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그 관점이 극소수 특정 집단, 즉 기득권층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Heinzlmaier, 2013, p. 11). 경쟁의 본질은 탁월함, 즉 아레테(αρετή)를 추구하는 것인데, 이 탁월함에는 가치와 의미의 실천을 위한 용기, 휴머니즘적인 공동체를 위한 윤리적 판단과 인식의 추구도 포함한다. 사회적 성공과 지위의 성취, 부(富)의 축적 자체가 교육의 목적,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그것은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일지언정,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인간 교육의 터전인 대학에서 논의할 문제가 되어선 안 된다.
2017년, 우리나라를 방문한 크리스틴 라가르드(Christine Lagarde) IMF 총재가 우리나라를 “집단자살 사회(collective suicide society)”라고 표현한 것은 충격적이기까지 했다(라가르드, 2017.10.25). 라가르드 총재는 저출산이 생산율과 성장률과 재정까지 악순환이 되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집단자살 현상이고 대한민국의 문제임을 지적했다. 이 분석에 관한 동의 여부는 별개로 하더라도, 그 원인 진단은 각양각색일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사회 구성원, 특히 젊은 세대에게 성취에의 강박, 옥죄임과 절망의 정서가 아니라, 노동을 통한 자아 성취와 자존감 형성, 예측 가능한 전망, 미래를 설계할 희망을 제시하는 길이 해결의 첩경이라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젊은이들이 능력과 역량을 발휘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심리적⋅사회적 안전망은 제거한 채 이들을 경쟁의 울타리로 몰아넣고, 절대 실패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으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도권 교육도 이러한 몰(沒)인간화에 기여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교육을 경제적 성취를 위한 역량 제고(提高)에 중심을 두라는 요구는 사회 전반의 비인간화 현상을 가속화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다. 단언컨대 시장주의에서 강조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훔볼트가 제시한 근대교육의 이상, 즉 ‘자유, 비판능력, 휴머니즘’ 그리고 인문정신의 함양을 통한 자율적이고 도덕적 주체가 아니라, 오로지 타자와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을 목표로 삼은 욕망의 존재일 뿐이다. 그리하여 기업가 정신으로 충만한 경영학적 주체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현실 상황에 대한 분별력과 역사의식, 비인간화⋅비인격화되는 질서에 대한 비판적 인식, 사회적 약자와 최소 수혜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 능력 등은 갖추지 못한 욕망의 주체만 될 가능성이 크다. 경쟁 자체가 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패자를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학은 과학과 기술 그리고 문명 발전을 선도하고 이끌 뿐만 아니라, 시장주의의 거침없는 질주에 약육강식의 이데올로기가 반영되어 있음을 밝히고, 인문정신을 교육 활동에 배양하는 책무를 수미일관하게 이행해야 한다. 아울러 인간을 인간자본과 인적자원이 아닌 인격체로서 품는 교육, 우리 세상을 인간화를 위한 지난(至難)한 역사 속에서 이해하는 인문정신을 복원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 조만간 쇠락할 반(反)휴머니즘적인 신자유주의 자본 논리로 치장한 시장주의 교육철학으로 교육 현장을 재구성하려는 시도에 당당히 맞서야 할 것이다.
References
Notes
OECD는 1974년에는 교육의 시장화를 비판하며 이렇게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교육제도가 경제의 복합 체계에 귀속되어 있고, 인간이 상품이나 기계처럼 경제를 위해 준비해야 하는 것은 필연적이라는 점이 오늘날 너무 당연시되고 있다. 교육제도가 이제는 도로, 철강, 화학비료 공장과 똑같은 가치로 취급되고 있다.(Heute versteht es sich von selbst, daß auch das Erziehungswesen in den Komplex der Wirtschaft gehört, daß es genauso notwendig ist, Menschen für die Wirtschaft vorzubereiten wie Sachgüter und Maschinen. Das Erziehungswesen steht nun gleichwertig neben Autobahnen, Stahlwerken und Kunstdüngerfabriken.)”(Altvater, 1974, p. 82)
참고로 독일언어협회(GfdS; Gesellschaft für deutsche Sprache)는 2004년 “Humankapital”을 최악의 단어로 선정하였고, 20세기 최악의 단어로는 “Menschenmaterial(인간자원)”을 선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