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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General Edu > Volume 18(3); 2024 > Article
교양 교과 적합성에 대한 재고

Abstract

로스블라트(S. Rothblatt)는 어떤 주제이든 자유롭게 가르친다면 교양교육이라고 주장한다. 필자는 이러한 로스블라트의 주장에 부분적으로만 동의한다. 간단히 말해, 전통적인 자유학예라고 해서 모두 자유교육인 것은 아니라는 그의 주장에 동의하지만, 자유롭게 가르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자유학예 중심으로 교양교과를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한 필자의 논의는 세 단계로 구성된다. 첫 번째 단계는 교양교육을 구성하는 요소에 대한 분석이다. 이와 관련해서 필자는 로스블라트의 주장과 하버드의 사례를 분석하고 이에 기초해서 교양교육을 구성하는 요소로 시민적 기여와 적응력과 같은 것을 제시할 것이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이러한 교양교육에서 자유롭게 가르친다는 것을 구성하는 요소로 ‘기초성’과 ‘개방성’을 제시할 것이다. 즉 자유롭게 가르치기 위해서는 기초적 원리, 법칙, 가정 등에 대한 개방적 질문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초성과 개방성을 만족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자유학예에 속한 학문이 요구됨을 보일 것이다. 마지막 단계는 논리교육의 사례를 통해 이러한 기초성과 개방성이 요구됨을 보일 것이다. 특히, 그 과정에서 고전 논리학의 추론규칙을 사용하면서도 그러한 추론규칙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해 발생하는 문제를 제시하고,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질문의 개방성이 요구된다는 것을 보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기초학문 중심으로 교양교과목을 구성해야 하는 이유임을 다시 보일 것이다.

Abstract

Sheldon Rothblatt argues that the subject does not define liberal education but rather that anything taught liberally constitutes liberal education. We partially agree with Rothblatt’s assertion. In short, while we concur with his claim that not all traditional liberal arts automatically constitute liberal education, we believe that for liberal education to be taught and learned liberally, the curriculum should be centered around the traditional liberal arts. This argument unfolds in three distinct phases, each contributing to a deeper understanding of liberal education. The first phase delves into the elements that define liberal education, drawing on Rothblatt’s assertion and the case of Harvard’s general education. This analysis presents civic engagement and adaptability as crucial yet often overlooked components of liberal education. In the second phase, we introduce the concepts of ‘fundamentality’ and ‘openness’ as pivotal to liberal teaching within liberal education. ‘Fundamentality’ refers to the ability to question fundamental principles, laws, and assumptions openly. To satisfy these elements, we argue that disciplines from the traditional liberal arts are indispensable in liberal education. The final phase will demonstrate the need for ‘fundamentality’ and ‘openness’ through the example of logical education. We will illustrate issues that arise from using inference rules of classical logic without precisely understanding their meaning and show that overcoming these problems requires openness to questioning. This will show why the liberal education curriculum should be structured around traditional liberal arts disciplines.

1. 서론

교양교육을 구성하는 학문이 무엇인지와 관련해서, 로스블라트(S. Rothblatt)는 매우 흥미로운 주장을 통해 학계에 반향을 일으켰다(Rothblatt, 2003, 2021). 간단히 말해, 어떤 것도 자유교육(liberal education)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주장 자체는 그리 특별하지는 않다. 잘 알려진, 허치슨(J. Hutchins)과 듀이(J. W. Dewey)의 논쟁에서 보이듯이, 교양교육과 다른 교육 특히 직업교육과의 차이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논쟁이 있었기 때문이다.1)
필자가 이 문제에 주목하는 이유는 로스블라트의 주장이 갖는 함축 때문이다. 그의 주장은 기초학문 중심으로 교양 교과를 구성하는 일반적 관행에 대한 비판뿐 아니라, 교양교육의 정체성이 주제 있지 않고 교육 방법에 있다는 매우 중요한 통찰을 포함한다. 그래서, 필자는 로스블라트의 주장에 대한 논의를 통해, 교양교육이 갖추어야 할 요건을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어떤 주제도 자유롭게 강의한다면 자유교육이라는 로스블라트(2003)의 주장과 관련해서, 교양교육의 핵심적 특징을 확인하고, 그것에 기초한 교과목 선정 기준을 수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본 논문의 목적이다.
로스블라트의 논의와 관련해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자유교육의 비전과 역할에 대한 것이다. 그는 전통적인 자유교육의 요소들이 대부분의 현재의 대학에서 실현되기 어렵다고 주장하면서도, 자유교육만이 존재론적, 도덕적 질문에 대한 답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제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Rothbaltt, 2003, p.15). 그런데 ‘존재론적, 도덕적 문제에 대한 통찰’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은 전통적인 자유교육의 주요 주제이다. 더해서 이러한 주제에 답하는 것은 교양교육을 포함한 모든 교육의 목표이기도 하다. 따라서, 어떤 측면에서는 그의 주장은, 전통적인 자유교육은 불가능하지만 가능해야 한다는 비일관적인 주장으로 보일 수 있다. 그래서 그와 관련된 논의의 핵심은 이러한 겉보기 비일관성을 해소하는 것으로 모인다. 그리고 그러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자유롭게 가르친다’이다. 교양교육의 핵심은 주제가 아니라 자유롭게 가르치는 교육 방법에 있고, 그래서 어떤 주제든 자유롭게 가르친다면 교양교육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교육하는 것이 자유로운지가 분명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이 전통적인 자유학예 중심의 교과목 구성을 수정해야 하는 근거인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필자가 이 글에서 논의하는 주제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자유롭게 가르치고 배우기 위한 조건으로, 질문의 ‘기초성’과 ‘개방성’을 제시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초성’과 ‘개방성’이 비록 배타적이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기초학문 중심으로 교과를 구성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라는 것을 보일 것이다.2) 특히, 교양교육에 대한 로스블라트의 주장이나 많은 대학에서 도입한 배분이수의 구조를 수용하더라도, 교양교육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질문의 ‘기초성’과 ‘개방성’에 있다는 것을 보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필자의 주장을 구체적으로 보이기 위해 논리교육의 사례를 제시할 것이다. 그래서 본 논문에서의 필자의 주장은 전통적인 자유학예 학문이라고 해서 모두 자유교육이라는 것은 보장할 수 없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만, 자유롭게 가르치고 배우기 위해서는 질문의 ‘기초성’과 ‘개방성’이 보장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기초학문 중심으로 교양교육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으로의 논의를 위해 하나 더 언급할 것은 ‘자유교육’ (liberal education)과 ‘교양교육’(general education)과의 관계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교양교육’은 ‘자유교육’의 전통과 함께 ‘일반교육’의 특징 역시 갖는다. 그리고 이러한 ‘일반교육’과 ‘자유교육’과 관계에 대해서는 다양한 논의가 가능하다. 더해서, 로스블라트는 자유교육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로 ‘일반교육’을 제시하면서 매우 비판적으로 논평한다. 그러나 이 글의 목적은 ‘자유교육’과 ‘일반교육’의 관계가 아니라 교양 교과목 선정 기준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대학의 교양교육은 이 두 모형이 혼합된 구조를 갖는다. 따라서 필자는 오해의 여지가 없는 범위에서 로스블라트가 말하는 ‘자유교육’을 ‘교양교육’으로 확장해서 논의하고자 한다. 물론, ‘일반교육’과 대비하기 위해서는 ‘자유교육’이라는 용어를 제한된 의미에서 엄밀하게 사용할 것이다.

2. 로스블라트의 주장과 교양교육의 두 요소

로스블라트(2003)는 자유교육의 특징을 ‘전인성(holism)과 인성교육(character formation)’, ‘리더십’(leadership), ‘폭’(breath), ‘자기개발’(personal development),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 ‘일반교육’(general education)으로 제시하면서 자유교육의 역사적 변천을 소개하고, 이러한 자유교육의 이상이 실현되기 어려운 이유를 제시한다. 특히, 전인적 인격 형성이나 리더십 등 전통적인 자유교육의 목표가 실현되기 어려운 이유를 제시한다.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로스블라트의 주장과 관련해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자유교육의 특징은 주제가 아니라 교육 방법에 있다는 그의 주장이다. 특히, 자유롭게 가르치면 그것이 무엇이든 자유교육이라는 로스블라트의 주장은, 많은 국내외 대학의 교양교육의 구성과 다를 뿐 아니라, 한국교양기초교육원의 표준모델과는 상반되는 것을 보인다. 이에 홍성기(2021), 박병철(2022) 등 국내 학자들은 로스블라트의 주장을 분석하고 평가하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특히, 홍성기(2022)는 비트겐슈타인이 제시한 가족유사성과 같은 언어철학적 논의에 기초해서 로스블라트의 주장을 비판한다. 로스블라트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자유학예와 그렇지 않은 학문을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에 기초하는데, 홍성기의 주장은 이 점을 비판하는 것이다. ‘게임’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가족유사성에 기초해서 설명할 수 있듯이, 자유학예와 다른 학문을 엄밀하게 구분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자유학예’가 갖는 특징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과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것은, 로스블라트가 전통적인 자유교육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자유교육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그가 제시한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박병철(2022, p.25)이 정리했듯이, 로스블라트는 자유교육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제시하고, 그에 기초해서 자유교육은 “가르치고 배우는 방식, 그 과목이 제공되는 정신, 그리고 그러한 가르침과 배움으로부터 귀결되는 사고방식”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자유교육만이 제공할 수 있는 것으로 로스블라트가 제시한 것은 존재론적, 도덕적 문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와 관련된 문제, 의사결정의 지적, 정서적 기초, 세계에 대한 포괄적 견해와 같은 것들이다(Rothblatt, 2003, p.15). 그리고 이것이 로스블라트가 전통적인 자유교육을 거부하지는 않는다고 필자가 주장하는 이유이다. 존재론적, 도덕적 문제에 대한 탐색이나 의사결정의 지적, 정서적 기반과 같은 것은 전통적인 자유교육의 주제일 뿐 아니라 모든 교육이 지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앞에서 언급했듯이, 로스블라트(2003)는 이러한 것을 지향하는 전통적인 자유교육이 실현되기 어려운 이유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예를 들어, 전인적 인성교육은 대규모 연구 중심 대학에서는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주장은 전통적인 자유교육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가능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측면에서는, 그의 주장은 비일관적으로 보일 수 있다. 물론, 로스블라트가 위와 같이 주장하는 이유를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자유교육의 핵심은 주제가 아니라 교육 방법에 있으므로, 주제와 무관하게 자유롭게 강의한다면 자유교육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역시, 위에서 제시한 자유교육만이 가능한 요소들과 함께 생각하면, 전통적인 자유교육이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교육에 대한 로스블라트의 주장이 완성되려면, ‘자유롭게 가르침’의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특히, 전통적인 자유교육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자유롭게 가르침’의 의미가 확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관련된 로스블라트의 주장은 그리 명확하지 않다. 그리고 이것이 필자가 이 글에서 밝히고자 하는 주요 주제이다.
문제는 ‘자유롭게 가르침’의 의미를 규정하기 위해서는 교양교육이 무엇인지부터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롭게 가르침’의 의미는 교양교육의 목적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양교육’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답하기는 쉽지 않을 뿐 아니라, 로스블라트의 경우에는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는 결과를 초래한다. 로스블라트가 ‘자유롭게 가르침’을 도입한 이유는 교양교육의 정체성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제시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교양교육에 대한 대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로스블라트의 논의를 평가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와 관련해서, 필자는 로스블라트가 제시한 교양교육의 요소와 하버드의 교양교육과의 비교를 통해 앞으로의 논의에 필요한 최소한의 공통적 요소를 찾고자 한다.3) 필자가 하버드에 주목하는 이유는, ‘레드북’(Redbook)으로 불리는 1945년 보고서를 포함한 다양한 보고서를 통해 교양교육에 대한 논의를 주도할 뿐 아니라, 로스블라트와 달리 자유교육과 일반교육적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스블라트와 하버드 교양교육에 공통된 요소를 찾을 경우, 우리는 적어도 로스블라트나 자유교육에게 편향된 관점에서 교양교육을 분석하지 않을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이 경우 로스블라트도 만족할 수 있는 객관적인 논의의 출발점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로스블라트는 자유교육적 특징이 강하고 하버드는 자유교육과 일반교육적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으므로, 이들에 공통된 요소에 기반할 경우, 편향되지 않으면서 로스블라트도 인정하는 교양교육의 특성을 확인할 수 있고, 그것에 기초해서 ‘자유롭게 가르침’의 의미를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로스블라트 먼저 살펴보자. 앞장에서 확인했듯이, 로스블라트는 교양교육의 6가지 요소를 제시한다. 우리는 이러한 요소들을 크게 두 부분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전인성과 같이 전통적인 자유교육을 구성하는 요소와 관련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연구 중심 대학의 교육환경과 관련된 것으로 경쟁 사회의 현실, 특히 생존과 밀접한 것이다. 그래서 비록 배타적이지는 않더라도, ‘전인적 인성교육’, ‘리더쉽’, ‘폭’은 전자와 관련된 요소로 분류될 수 있으며, ‘비판적 사고’, ‘자기개발’, ‘폭’, ‘일반교육’은 후자와 관련된 요소로 분류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로스블라트(2003)가 말하듯이, 전인적 인성교육은 전통적인 자유교육에서는 매우 중요한 요소였지만, 현대사회 및 연구 중심 대학에서는 부차적 요소로 여겨지며, 비판적 사고는 연구 중심 대학의 중요한 기여이지만 전인성보다는 경쟁 사회에서의 생존에 적합한 능력과 밀접하게 관련된다는 측면에서, 이러한 구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점은 일반교육과 관련해서 잘 드러난다. 연구 중심 대학에서 많이 채택하는 배분이수적 구조와 밀접하게 관련된 일반교육에 대해서 전인성을 강조하는 로스블라트(2003, pp.38-42)는 매우 부정적 관점을 제시하기 때문에, 전인성과 일반교육을 나누어서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요소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폭’이다. 일반적으로 폭은 지식의 범위 혹은 적응력을 의미하지만, 로스블라트는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접근한다. 로스블라트(2003, p.32)는 ‘폭’을 ‘서로 다른 형태의 지식을 결합하고 서로 다른 범주의 정보를 연결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하면서, 사소한 문제와 중요한 문제를 식별하고 해답을 찾는 마음의 습관(habit of mind)으로 규정한다. 즉, 폭은 단지 지식의 다양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지식을 결합하고 연결하는 통합적 능력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특히, 사소한 문제와 집중해야 하는 문제를 구분하는 마음의 습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폭’이 연구 중심 대학의 교양교육뿐 아니라 전통적 자유교육에도 포함될 수 있는 이유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앞에서 언급했듯이, 로스블라트는 비록 현대사회에서 실현되기는 어렵다고 주장하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자유교육을 교양교육의 핵심 요소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로스블라트도 자유교육만이 수행할 수 있는 역할에 의사결정의 지적 기반과 세계에 대한 포괄적 견해 역시 포함한다. 이 점은 현대사회의 존재론적, 도덕적 문제는 과학, 기술의 발전과 밀접하게 관련되어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과학, 기술에 대한 이해가 요구된다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간에 대한 생물학적, 인지과학적 이해는 존재론적, 윤리적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많은 경우, 생물학적, 인지과학적 연구는 ‘마음’에 대한 물리적 이해를 함축할 수 있는데, 이는 전통적인 인간에 대한 이해와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뒤에서 논의할, 인공지능과 관련해서도 잘 드러난다. 인공지능 역시 전통적인 인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인지능력의 기계적 실현 가능성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양교육이 특징은 하버드의 경우에도 잘 드러난다. 최근의 교양교육의 변화와 관련된 보고서에서 하버드는 교양의 목표 및 영역을 변화하는 세계의 시민적, 윤리적 개입, 다양한 학문 영역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 자아실현으로 설정하고 그에 적합한 교육프로그램을 제시한다(Harvard University, 2015). 그런데 여기에서의 ‘자아실현’은 주로 학생 스스로의 교과 선택과 관련된 요소이므로, 교과의 교육 내용을 통한 주요 목표는 앞의 두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요소 중 전자는 시민교육의 특성이 강하며 후자는 다양한 영역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여러 학문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이 필요한 이유는 결국 다양한 영역에 효과적으로 적응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양한 학문 영역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은 경쟁 사회의 생존과 관련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적응력과 로스블라트가 제시한 교양교육의 요소 중 가장 밀접한 것은 ‘폭’이다. 다양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여러 영역에 적용가능한 지적 자산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하버드 역시 적응력과 관련된 교육뿐 아니라 전통적인 자유교육의 주제인 인격 및 시민성과 관련된 교육적 요소를 포함한다. 특히 2007년 보고서에서는 교양교육의 중요한 목표에 사회적 참여, 윤리적 관점의 개발 등을 포함하였다(Harvard University, 2007).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참여나 윤리적 관점은 로스블라트가 제시한 존재론적, 도덕적 문제 및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그래서 우리는 로스블라트와 하버드의 사례에서 공통된 두 요소를 찾을 수 있다. 하나는 전통적인 의미의 전인교육의 특징을 갖는 것으로, 세계와 사회의 문제를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해결하는 능력과 관련된 측면이라고 할 수 있으며, 다른 하나는 다양한 영역에 적용가능한 포괄적인 지적 능력이다. 즉, 하나는 전인성, 리더십, 폭 등과 관련된 ‘자아 및 시민적 기여’이며, 다른 하나는 비판적 사고, 폭 등과 관련된 ‘다양한 영역에 적용가능한 적응력 혹은 지적 능력’이라는 것이다.
하나 주의할 것은 이러한 구분이 자유교육과 일반교육의 차이는 아니라는 것이다. 로스블라트는 일반교육, 특히 배분이수의 구조를 갖는 일반교육이 자유교육인지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지만, 앞에서 확인했듯이, 자유교육만이 할 수 있는 요소에는 세계에 대한 포괄적 이해가 포함되는데, 배분이수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세계에 대한 포괄적 이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일반교육에도 유사하게 적용된다. 배분이수적 구조를 갖는 대부분의 대학에서의 교양교육의 목표가 전인적 인성교육과 관련될 뿐 아니라. 이러한 대학의 교양과정에는 대부분 윤리학 및 시민교육 관련 교과목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즉, 배분이수로만 교과를 구성하더라도, 교양교육의 궁극적 목표 중 하나가 인성 혹은 시민교육이라는 것을 거부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3. 질문의 기초성과 개방성

필자는 교양교육의 특성에 부합하는 자유롭게 가르치는 방법이 질문의 ‘개방성’과 ‘기초성’이라고 생각한다. 필자가 개방성과 기초성에 주목하는 이유는 둘이다. 하나는 교양교육이란 특정한 영역의 전문교육이 아니면서 동시에 학술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2장에서 언급한 교양교육의 주요 요소인 ‘자아 및 시민적 기여’와 ‘다양한 영역에 적용가능한 적응력 혹은 지적 능력’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질문의 개방성과 기초성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 이유, 즉 교양교육은 전문교육이 아니면서 학술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되는 당연한 조건이다. 그리고 이것이 필자가 이와 관련된 논의를 2장에서 제시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특정한 영역의 전문교육이라면, 대학에는 전공뿐 아니라 선택 영역도 존재하므로 굳이 교양 교과로 편성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융복합 등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특정 분야의 전문성을 모든 학생이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학술성’ 역시 쉽게 설명된다. ‘학술성’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가능하지만, 적어도 단순한 체험이나 정보라면 그것을 굳이 대학에서의 정규 수업을 통해 학습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필자가 ‘폭’에 주목하는 이유이다. 포괄성이란 전문화된 지식이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지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보편성과 포괄성을 ‘폭’을 통해 만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폭’이 요구되는 것은 전공과 직업의 연계성이 약하다는 연구 결과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4) 간단히 말해, 졸업 후 다양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폭넓은 지식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분야의 학문적 성과를 교육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 경우 합리적인 선택지는 포괄적인 기초적 질문 중심으로 교양 교과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 점은 앞장에서 논의한 교양교육의 요소인 ‘다양한 영역에 적용가능한 적응력 혹은 지적 능력’과 관련해서보다 분명하게 나타난다. 졸업 후 부딪치게 될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유형의 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므로, 기초적 질문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초적 질문’이란 여러 현상을 포괄하는 기본적 원리나 법칙 혹은 가정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초적인 자연과학적 법칙을 학습하는 것이 특정한 영역의 응용지식을 학습하는 것에 비해 세계에 대한 포괄적 이해에 적합하고, 응용지식보다는 다양한 영역에 적용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초성은 ‘자아 및 시민적 기여’와 관련해서도 요구된다. 이 점은 로스블라트가 제시한 자유교육만이 할 수 있는 것을 통해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존재론적, 도덕적 질문이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와 관련된 질문을 기초적이지 않은 실용적 질문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 점은 하버드의 보고서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잘 알려져 있듯이, 2007년 하버드 보고서에서는 ‘가정을 흔들어 놓고, 친숙한 것을 낯설게 하고, 겉으로 드러난 것의 배후를 드러내고, 방향감각을 혼란 시킨 후 학생 스스로 방향감각을 되찾게 도와주는 것’을 교양교육의 사명으로 제시한다(Harvard University, 2007).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가정을 의심하고 친숙한 것을 낯설게 함’은 당연한 것으로 수용하는 가정을 그것이 흔히 논의되지 않은 맥락에서 논의한다는 것으로, 그러한 가정에 대해 다시 생각함을 함의한다. 그리고 이것은 곧 그 가정이 기초하는 보다 더 기초적인 법칙, 원리, 가정을 확인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모든 인간이 동등한 인격체라는 것을 전제하지만, 이 주장을 다양한 조건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인격체’ 개념이 무엇인지 다시 질문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법이나 정치철학적 문맥에서 논의되는 ‘인격체’ 개념을 과학적 논의의 맥락에서 다시 봄으로써, ‘인격체’ 개념에 대한 기존 이해의 한계를 인식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인격체를 인지능력에 기초해서 정의할 경우, 그리고 인지능력을 주어진 문제를 효과적으로 분석하고 해결하는 능력이라고 규정할 경우, 일부 영장류나 인공지능을 인격체로 볼 수 있고 그래서 도덕적 권리의 담지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다양한 논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인간을 인격체로 이해하는 이유가 인지능력에 있다는 주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위와 같은 주장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질문의 ‘기초성’이 요구되는 이유이다. 조금 전에 확인했듯이, 인격체 개념을 다른 조건 혹은 맥락에 놓음으로써, 보다 기초적 질문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질문의 ‘기초성’은 현대사회의 시민 및 윤리교육의 특성과 관련해서도 잘 나타난다. 현대사회에 윤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과학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에 대한 지식이 요구될 뿐 아니라, 시민교육은 규칙을 잘 따르는 수동적 관점이 아니라, 규칙 제정에 참여하는 능동적 주권자로서의 교육이기 때문이다. 즉, 규칙 제정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정의로운 규칙이 무엇인지 스스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정의’, ‘공정함’ 등에 대해 비판적, 논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기초학문 중심으로 교양 교과목을 구성해야 하는 이유이다. 위에서 제시한 것과 같은 기초적 질문을 제기하고 그와 관련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전문성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조금 전에 언급한 ‘정의’의 원칙에 대해 학생들과 논의하기 위해서는 관련된 철학적, 윤리적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기초학문이라고 해서 모두 교양교육인 것은 아니다. 특정 분야의 전문지식의 전수라는 관점에서 강의한다면, 그것이 기초학문이라고 하더라도 교양교육으로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기초학문을 포함해서 특정 학문의 지식을 전수하기 위해서는 그 학문의 기초적 가정, 법칙, 연구 방법 등에 대한 수용을 전제해야 하는데, 이러한 교육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 양성에는 효과적일 수 있지만, 교양 교과로서의 적합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전공 및 직업교육과 교양교육의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점이기도 하다. 특정 분야 전문가를 양성하거나 전통의 전수가 교육의 목적일 경우, 강의 방식이 반드시 비판적일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비판적’이라는 것은 그것에 대한 거부를 배제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쿤(T. Kuhn)의 패러다임(paradigm)과 정상과학(normal science)의 관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인 과학인 정상과학 시기의 과학자의 활동은 패러다임을 구성하는 기초적 법칙, 원리 등을 받아들이는, 즉 패러다임을 의심하지 않는 활동으로 규정된다.5) 따라서 이러한 정상과학에 대한 학습 역시 패러다임에 대한 수용을 전제하는 것이다. 특히, 기초적 법칙, 원리를 표준적 사례에 적용하는 과정을 통해 패러다임을 익히는 과정이다. 즉, 기초적 법칙을 관련 규칙에 따라 적용하는 과정을 통해 전문가로서 훈련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쿤의 논의를 모든 분야에 적용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특정 분야의 전문가 교육을 위해서는, 비록 제한된 범위에서는 비판적일 수 있지만, 그 분야의 기초적 원칙, 가정 등에 대한 동의가 요구된다는 것 또한 거부하기 어렵다. 지식의 활용에 초점을 둘 경우, 이 점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교양교육은 특정 분야의 전문가 양성을 위한 것이 아니다. 교양교육의 관점에서는 그러한 지식을 통해 보여주는 세계의 모습이 무엇이고 그것이 다른 학문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에 대한 명시적이고 비판적 이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교양교육에서 과학의 역할 중 하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실제 모습에 대한 통합적 이해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앞에서 언급한 하버드의 보고서와 관련해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2007년 보고서와 같이, 과학을 표준적 환경이 아닌 전혀 다른 맥락에서 논의되는 문제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기초적 가정에 대한 명시적 이해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학습을 위해서는 질문의 개방성이 요구된다. 기초적 법칙과 관련된 질문이 개방적이지 않다는 것은, 그러한 법칙 및 그 법칙을 해석하는 특정한 관점에 대한 수용을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전통적인 기초학문이라고 하더라도 자유롭게 강의하지 않는다면 교양교육이 아니라는 주장이 성립하는 이유이다. 예를 들어, 기초적 개념에 대한 개방적 질문이 없는 윤리학 강의를 생각해보자. 우리가 왜 도덕적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 없이 대표적인 윤리학 이론을 소개할 경우, 이러한 수업을 교양교육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 경우, 해당 수업은 윤리적 반성이 아니라 기존 이론에 대한 전수 혹은 소개에 그치기 때문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학생들은 소개되는 윤리학 이론에 포함된 중요한 가치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윤리교육, 특히 교양으로서의 윤리교육의 목표는 아니다. 교양으로서의 윤리교육의 목표는 특정한 윤리학 이론을 몸에 익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보편적이고 기초적 관점에서 우리가 왜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와 관련해서 ‘정의’, ‘공정성’ 그리고 ‘인격’이 무엇인지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윤리교육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가 앞에서 예로든 주권자로서의 시민교육과 관련된다는 것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개방성’의 특징은, 많은 대학이 배분이수교과로 편성하는 인공지능과 관련된 논의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의 가능성을 인격의 문제와 연결하는 강의라면, 특정 학문을 넘어서는 기초적 질문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우리는 인공지능의 가능성뿐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대한 물리적 이해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논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인공지능을 통해, 전통적으로 비물리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온 인간의 ‘마음’에 대한 물리적 이해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인간과 기계의 차이를 전제한 강의 혹은 인공지능과는 다른 인간의 인격적 요소를 전제하는 강의는, 앞의 강의에 비해, 질문의 개방성이 현저하게 약하다. 즉, 인간은 비물리적 대상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인공지능과 구분되는 인간의 특성을 찾는 강의는 개방성에서 그렇지 않은 강의보다 약하다는 것이다.
더해서, 이 경우 질문의 기초성 역시 제한된다. 전자의 경우에는 인간을 포함하는 세계에 대한 통합적 설명 가능성이 논의될 수 있는 것에 비해 후자의 경우에는 비물리적 마음의 존재를 전제하므로, 이러한 질문 자체가 제시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질문의 ‘개방성’ 없이는 질문의 ‘기초성’도 없는 이유이다. 사실 필자는 ‘마음’의 비물리성을 전제하는 이러한 유형의 강의 보다는 인공지능의 과학적, 기술적 측면만을 논의하면서 그러한 영역 안에서의 개방성을 확실하게 보장하는 강의가 더 큰 개방성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인간과 인공지능이 본질적으로 다름을 전제한 경우, 인공지능의 기술적 모형에 대한 불필요한 제한이 포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질문의 ‘기초성’과 ‘개방성’이 요구되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더욱이 이러한 기초성과 개방성은 지식의 활용을 넘어서 기초적 법칙이나 가정에 대한 비판적 이해와도 밀접하게 관련된다. 이 점을 보이기 위해 그리고 위에서 제시한 기초성과 개방성의 구체적 특징을 보이기 위해, 필자는 다음 장에서 논리 교육의 사례를 논의하고자 한다.
이러한 사례에 대한 분석 이전에, 지금까지의 논의 통해 우리가 파악한 것을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필자는 2장에서 로스블라트의 논의를 제시하면서, 그의 논의를 분석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특히 ‘자유롭게 가르침’의 의미를 분석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그와 하버드 교양교육에 공통된 요소를 제시하였다. 그리고 3장에서 이러한 공통된 요소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질문의 개방성과 기초성이 요구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특히, 개방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앞에 언급했듯이, 질문의 개방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기초성도 확보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자유롭게 가르치는 것의 의미이다. 즉, 자유롭게 가르친다는 로스블라트의 주장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질문의 개방성과 기초성이 성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의 개방성과 기초성은 결국 기초학문을 통해 잘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다음 장에서 필자가 논리학의 사례를 제시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4. 논리교육과 개방성

앞에서 확인했듯이, 교양교육의 규정하는 데에는 질문의 ‘기초성’도 중요하지만 ‘개방성’이 더욱 중요한 요소이다. 법칙이나 가정을 익숙한 조건에만 활용하는 것을 넘어서 그러한 법칙이나 가정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그것의 의미를 익숙하지 않은 조건에서 확인하기 위해서는 ‘개방성’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물론, 지식의 활용이 갖는 중요성 특히 이해와 관련된 중요성을 필자가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법칙이나 가정을 명시적으로 제시하지는 못하더라도, 반복적 적용을 통해 획득한 활용 능력 및 이와 관련된 암묵적 지식 역시 중요한 지적 자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법칙이나 가정을 익숙하지 않은 조건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요구되며, 이를 위해서는 해당 법칙이나 가정을 비판적으로 이해해야 하는데, 이러한 비판적 이해를 위해서는 질문의 ‘개방성’이 요구된다. 예를 들어, 아래와 같은 ‘무모순율’이나 ‘타당성’을 비판적으로 이해할 필요 없이, 논리학 교과서에 포함된 것과 같은 표준적 조건에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무모순율(law of noncontradiction)이나 타당성(validity)을 익힐 경우, 이들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폭파원리’(principle of explosion)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한다.6)
무모순율: 어떤 문장도 참이면서 거짓일 수 없다.
타당성: 전제가 참이면서 결론이 거짓일 수 없는 논증
폭파원리: 임의의 문장 P와 그것에 대한 부정(not-P)으로부터 모든 문장이 참이라는 것이 도출된다.7)
폭파원리가 논쟁적인 이유는 분명하다. 모순으로부터 모든 것이 도출된다는 것은, 논증, 추론에 대한 우리의 직관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폭파원리 역시 활용에 기초해서 이해할 수 있다. 폭파원리란 모순을 허용하지 않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즉, 모순으로부터, 위에서 제시한 타당성에 대한 정의에 의해, 모든 문장이 참이라는 사소성(triviality)이 도출되는데, 이러한 사소성을 수용할 수 없으므로, 모순을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논리철학적 이해가 없는 경우, 고전논리학의 추론 및 연산체계에 익숙한 사람들 조차 대부분 폭파원리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리고 이것이 암묵적 이해와 명시적 이해의 차이기도 하다. 간단히 말해, 많은 경우 실제로 폭파원리를 전제하는 고전논리학의 추론규칙을 사용하면서도, 그러한 폭파원리에 대해 명시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명시적으로 이해했을 경우 고전적 추론규칙을 수용하면서 폭파원리를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일관성이 발생함을 의미한다. 폭파원리를 거부하면서 그것이 포함된 고전논리학의 추론규칙을 사용한다는 것은, 폭파원리를 거부하면서 거부하지 않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폭파원리에 대한 이해는 단지 철학적 논점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논리학의 적용과 밀접하게 관련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모순적인 정보만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비일관적 정보와 믿음에 노출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러한 정보와 믿음을 모두 거부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그러한 비일관적인 정보와 믿음에 기초한 추론을 수행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환경에서도 적절한 추론규칙을 사용할 수 있으려면, 자신이 사용하는 추론규칙이 갖는 특성과 한계에 대한 이해는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추론규칙의 특성과 한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기초적 전제들에 대한 명시적 이해가 요구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그러한 전제들에 대한 수정이나 거부를 허용하는 개방적 질문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점을 확인하기 위해, 폭파원리를 다시 살펴보자. 폭파원리는 ‘타당성’에 대한 정의 및 무모순율에 기초한다. 따라서 폭파원리의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전제하는 타당성과 무모순율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다양한 논리체계가 도입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무모순율에 대한 거부를 통해, 위에서 제시한 타당성 개념을 유지하면서도, 폭파원리를 거부하는 양진주의(dialetheism)가 도입되기도 하였다.8) 이 점은 다른 규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예를 들어, 무모순율을 거부하기 위해서는 ‘참’과 같은 더 기초적 개념 및 관련된 규칙에 대한 개방적 질문이 요구된다. 결국, 논리학을 실제 삶에서 직면하는 비일관적 정보나 믿음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논리학의 기초적 법칙에 대한 명시적 이해가 요구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그러한 법칙에 대한 개방적 질문이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개방적 질문은 논리적 규칙을 비일관적인 정보나 믿음에 적용하지 않기 위해서도 요구된다. 논리학의 범위를 제한하기 위해서도 그것의 의미는 정확하게 규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질문의 개방성과 관련된 특징은 논리학의 또 다른 기초적 규칙인 배중률에도 적용된다. 사실 논리학의 적용 범위와 관련된 문제는 배중률과 관련해서 더 자주 발생한다. 로스블라트(2003, p.26)가 제시했듯이, ‘자유교육’에 속하는 학문과 그렇지 않은 학문을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에 기초해서, 자유교육의 정의적 특징을 규정하기 어렵다고 주장하는 것도 배중율과 관련된 사례이다. 물론, 로스블라트의 주장은 자유교육의 역사적 변화를 소개한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영구적인 학문분류는 없다는 주장이라는 측면에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추가적 논의 없이 ‘자유교육’의 적용 범위가 모호하다는 것에 기초해서 그것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은 논리적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대부분 ‘모호성’(vagueness)의 특징에 기초한다. ‘키가 큼’과 같은 모호한 용어는 그것이 적용되는 영역과 그렇지 않은 영역을 구분하는 절단점을 확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m 50cm인 사람부터 2m인 사람을 1mm의 간격으로 나열했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이러한 대상들을 구분하는 ‘키가 큼’의 절단점을 제시할 수는 없다.9) 이는 아주 작은 차이로 모호한 용어가 적용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구분할 수 없다는 ‘관용의 규칙’(rule of tolerance)에 근거한다.10) 그리고 이것은 무모순율과 함께 ‘참’에 대한 가장 기본적 직관 중 하나인 배중률과 관련된다.11)
배중률: 모든 문장은 참이나 거짓 둘 중 하나의 값은 반드시 갖는다.
이러한 배중률의 거부는 ‘키가 큼’의 절단점이 없다는 주장이 성립하기 위한 핵심적 요소이다. 배중률을 수용하면 모든 진술은 참이거나 거짓이므로, 모든 사람은 키가 큰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되기 때문이다. 윌리엄슨(1994)과 같이 모호한 용어 역시 분명한 절단점을 갖지만,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한, 다시 말해, 모호성은 인식적 차원에서만 성립한다고 주장하지 않는 한, 절단점이 없다는 주장을 진지하게 제시하기 위해서는 배중률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교육’이라는 용어가 적용되는 범위를 확정하는 절단점이 없다는 것에 기초해서, 그것을 규정할 수 없다는 주장은 배중률의 거부를 함축한다. 이러한 주장을 제시하는 사람이 ‘자유교육’이 적용되는 영역과 그렇지 않은 영역을 구분하는 절단점이 있지만,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뿐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교육’에 대한 위의 주장은, ‘키가 큼’의 절단점이 없다는 것에 기초해서 ‘키가 큼’을 규정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구조를 갖는다. 따라서 이러한 주장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배중률에 대한 거부나 제한을 전제해야 하며, 그것은 곧 고전논리학에 대한 거부나 제한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고전논리학에 기초하기 어려운 경우, 더해서 논리학적 대안이 없거나 적어도 확실하지는 않은 경우, 우리는 논리적 규칙보다 실제 언어사용에 주목해야 한다. 위의 경우, ‘키가 큼’이라는 용어를 우리가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 우리는 ‘키가 큼’이 모호하지만, 그 용어를 사용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는 것에 기초해서, ‘키가 큼’과 같은 모호한 용어의 특징을 이해하고 설명해야 한다. 다시 말해, 키가 큰 대상과 그렇지 않은 대상을 구분하는 절단점을 제시할 수 없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키가 큰 대상과 그렇지 않은 대상을 구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명백하게 키가 큰 대상을 지목할 수도 있다는 것에 기초해서 ‘키가 큼’의 특징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 ‘키가 큼’의 모호성으로부터 그것의 정의적 특징을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은 도출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모호성과 관련해서 배중률을 거부하더라도, 모호한 용어를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은 도출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이러한 경우에도 고전적 관점을 유지하면, ‘키가 큼’이라는 용어의 정의적 특징을 규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 도출된다. 고전논리학은 기본적으로 외연이 확정된 분명한 개념에만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키가 큼’이 절단점이 없는, 즉 외연을 확정할 수 없는 용어이므로 그것의 정의적 특징을 규정할 수 없다는 주장은, 외연을 확정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는 배중률을 포함한 고전적 추론규칙을 거부하면서, 정의적 특징을 규정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는 외연을 확정할 수 있어야 정의적 특징을 규정할 수 있다는 고전적 가정을 유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폭파원리와 유사하게, 고전논리를 거부하면서 거부하지 않는 비일관성이 발생한다. 사실, 이 역시 폭파원리처럼 대부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많은 경우 모호한 용어와 관련해서는 배중률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고전논리의 추론규칙을 그대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물론, 배중률과 같은 논리학의 기초적 규칙에 대한 명시적 이해를 모두에게 요구하기는 어렵다.12) 그러나 우리 삶의 많은 영역에 논리적 추론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관련된 규칙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는 전제되어야 한다. 이 점은 한국어와 같은 자연언어의 용어들이 대부분 모호하다는 것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실제 삶에서의 추론을 위해, 우리는 모호성과 관련된 추론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배중률을 거부하는 비고전적 추론까지는 아니더라도, 배중률을 거부하면서 그와 관련된 고전적 규칙을 제한 없이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고전논리학의 추론규칙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적용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이러한 조건을 파악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앞에서 예로든 ‘키가 큼’의 특징은 한국어의 능숙한 사용자라면 모두 잘 아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모호성과 고전논리학의 관계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모호한 용어가 절단점이 없다는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고전논리학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비일관적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표준적 적용사례를 통한 반복적 학습만으로는 이 점을 인지하기 쉽지 않다. 이 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배중률과 같은 논리학의 기초적 규칙이 논의의 대상에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실제로 잘 활용하는 모호한 용어에 고전논리학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이 논리학의 기초적 법칙인 배중율에 대한 최소한의 비판적 성찰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질문의 개방성이 요구되는 이유이다. 최소한의 비판적 성찰을 위해서는 그러한 규칙이 거부되거나 수정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지는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논리학을 삶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기초적 가정에 대한 최소한의 비판적 성찰이 요구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질문의 개방성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 점은 무모순율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의 언어가 모호하듯이 우리의 정보나 믿음이 비일관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논리교육이 이러한 개방성을 전제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전공 교육을 위해 필요한 특정한 논리연산 규칙을 훈련하는 사례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양교육으로서의 논리교육은 이러한 개방성을 전제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교양교육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는 다양한 영역에의 적용 가능성인데, 이를 위해서는, 위에서 확인했듯이, 모호하거나 비일관적인 경우를 포함해서 논리학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기초학문 중심으로 교양 교과목을 구성해야 하는 이유이다. ‘배중률’이나 ‘무모순율’과 같은 기초적인 논리 규칙이나 개념에 대해 학생들과 논의하기 위해서는 논리철학적 이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3장에서 제시한 윤리학이나 인공지능의 경우에도 유사하게 적용된다. 교양교육의 특성은 결국 기초적 질문을 개방적으로 제시하는 것인데, 이에 적합한 학문이 기초학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기초학문 전공자라고 해서 모두 개방적 질문을 효과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일반적인 조건에서는 기초적 질문은 기초학문에서 주로 논의하는 것이므로, 기초학문 중심으로 교양 교과를 구성하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보다 합당하다는 것은 도출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비판에 대해 질문의 기초성이 학문분야의 기초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특히 기초학문 중심의 기초성이 개방성과 상충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필자가 제시한 ‘개방성’이란 학문 사이의 개방성이 아니라 질문 자체가 갖는 개방성이다. 특히, 기초적 질문에 대한 개방성이다. 그리고 이것은 곧 앞에서 보았듯이 해당 분야의 기초적 법칙, 개념, 원리 등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러한 기초적 법칙, 개념, 원리에 대한 거부를 배제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개방성을 만족하기 위해서는 기초학문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기초학문의 특징이 바로 수용하는 전제가 작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기초학문의 범위가 고정된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변화한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기초학문이 그렇지 않은 학문보다 기초적 가정 혹은 전제가 작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고 그래서 개방성과 기초성을 만족시키는 데에는 기초학문이 적절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기초학문 교과가 교양교육인 것은 아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학문의 전수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경우, 기초학문에서 이러한 질문의 개방성은 약화되기 때문이다.

5. 결론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필자는 자유교육의 특징이 주제가 아니라 교육방법, 즉 자유롭게 가르치는 것에 있다는 로스블라트의 주장을 검토하면서, 자유롭게 가르치는 것과 관련된 필자의 주장을 제시하였다. 위에서 확인했듯이, 교양교육의 중요한 요소가 ‘자아 및 시민적 기여’ 및 ‘다양한 영역에 적용가능한 적응력 혹은 지적능력’이라고 할 경우, 교양교육을 정의하는 교육방법은 질문의 기초성과 개방성에 있다는 것이다.
더해서, 이러한 기초성과 개방성, 특히 개방성이 기초적 법칙, 가정, 개념에 대한 비판적 이해와 관련된다는 것 역시 확인하였다. 이러한 필자의 논의는 일종의 ‘비판적 상승’을 포함한다. 앞에서 확인했듯이, 특정한 지식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기초하는 기초적 개념, 법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논리학을 비일관적 정보나 믿음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폭파원리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요구되는데, 이는 다시 무모순율, 타당성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측면에서는, 이러한 ‘비판적 성찰’은 지나치게 이론적 특징을 갖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모든 교과목에서 이러한 비판적 성찰의 궁극적 지점까지 도달할 필요는 없다. 논리 교육의 사례를 통해 언급했듯이, 제한된 범위에서라도 비판적 성찰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교양교육을 기초학문 중심으로 구성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서론에서 말했듯이, 전통적인 자유학예에 속하는 기초학문이라고 해서 모두 교양교육인 것은 아니라는 로스블라트의 주장을 필자는 수용한다. 그래서 본 논문에서의 필자의 논의는 자유롭게 가르치는 것이 교양교육의 핵심적 요소라는 로스블라트의 주장을 수용하면서도, 기초학문 중심으로 교양교육을 구성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롭게 가르치는 것의 핵심은 질문의 개방성과 기초성에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기초학문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Notes

1) 허치슨과 듀이와 관련된 논쟁은 박병철(2022), Heldke(2005) 등을 참조할 수 있다.

2) 이 글에서 ‘기초학문’이라는 용어는 ‘자유학예’보다는 조금은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대략, 인문학, 자연과학, 사회과학을 포괄하는 용어로 이해해도 된다. 물론, ‘자유학예’처럼 ‘기초학문’에 대해서도 모호성과 관련된 비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의 필자의 논의는 ‘기초성’과 ‘개방성’이라는 요소에 의해 교양교육을 규정하는 것이므로, 이러한 모호성이 필자의 주장을 반박할 요소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3) 교양교육과 관련해서 필자가 주목하는 자료 중 하나는 한국교양기초교육원의 표준모델이다(한국교양기초교육원, 2022). 다만, 이 모델은 기초학문 중심의 교양 교과 구성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어서, 논의의 출발점에서는 배제하였다. 참고로, 필자가 제시하는 기준은 한국교양기초교육원의 표준안과 같이 기초학문 중심의 교과구성을 지지하는 것이다.

4)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다양한 국가들에서 확인된다. 예를 들어, 일본의 경우에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다. 이와 관련해서는, Kaneko(2014)를 참고할 수 있다.

5) 이와 관련된 논의는 오카샤(2017, pp.127-129) 등을 참고할 수 있다.

6) 폭파원리란 모순으로부터 모든 것이 도출된다는 고전논리학의 규칙이다. 더해서, 앞으로의 논의에서 필자는 ‘진리’와 ‘참’을 같은 의미로 사용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논리학에서는 ‘진리’나 ‘참’ 모두 타르스키 도식 ‘<P> is true if and only if P’(<P>란 문장 P에 대한 이름이다)을 통해 이해하기 때문이다. 폭파원리에 대해서는, Similey & Priest(1993), Priest(2006) 등을 참조할 수 있다.

7) 일반적으로 폭파원리는 ‘P, ¬P ⊨ Q’로 나타낸다. ‘⊨’은 논리적 귀결(logical consequence) 관계를 나타낸다.

8) 정확하게 말하면, 양진주의자들은 무모순율을 거부한 결과로 폭파원리를 거부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양진주의의 핵심적 주장은 어떤 경우에는 P와 not-P가 모두 참인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 Q가 거짓이면 폭파원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전제가 참이면서 결론이 거짓이기 때문이다. 양진주의에 대해서는 Beall(2009), Priest(1979. 2006), Weber(2021) 참조.

9) 위의 논의와 관련된 것이 잘 알려진 더미 역설(sorites paradoxes)이다. 더미 역설과 관련해서는, Fine(1975), Williamson(1994) 등을 참조할 수 있다.

10) ‘관용의 규칙’과 관련해서는 Wright(1975), Gaifman(2010), Nicholas(2009) 등을 참조할 수 있다.

11) 무모순율이나 배중율에서 말하는 ‘문장’은 참이나 거짓일 수 있는 문장을 의미한다.

12) 이 점은 앞에서 논의한 ‘무모순율’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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