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교양 교육으로서 최승자 시 읽기 -대학의 <시 읽기> 강의 사례를 중심으로
Reading Choi Seung-ja’s Poetry as University Liberal Arts Education : Focusing on the Case of University’s <Reading poe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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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이 논문은 대학 교양교육에서 명저 읽기 독서수업을 진행할 때 한국의 시 텍스트를 교육한 사례를 연구한 것이다. 독서 목록을 만들 때 이상적이고 완결된 목록을 제시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생명이 경시되는 현 세태, 대학의 교양 교육 시간에 활용할 시 목록에 최승자의 시가 자리해야 할 것임을 제안한다. 청년의 우울증이 증가해 가는 현 세태에 최승자의 시에서 죽음에 대해 사유함이 오히려 생에 대한 희망과 삶에 대한 의지로 작동하는 저항성을 줄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하였기 때문이다.
최승자 시에서 죽음은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비극이지만 이 비극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해야 극복 가능한 것인지를 알려 준다. 이 시적 화자의 태도는 반복되며 순환되어 단단해지고 있는데 학습자들은 시적 화자의 태도를 낭독하면서 죽음에 맞설 수 있는 저항의지를 학습한다. 본고에서는 코로나 이후에 죽음과 우울의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학습자들의 인성 교육과 시 독서의 의의를 최승자 시 학습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학습자들은 최승자의 시를 통해 죽음이 단정되어 있는 유한한 삶에서 죽음을 극복하는 방법을 발견하게 된다. 최승자의 시 읽기를 통해 획득한 저항의지와 현실 극복의 효과는 학습자가 쓴 ‘시평 쓰기’에서 확인된다. 이에 본고는 최승자의 시가 시 교육에서 매우 효율적인 텍스트로 기능할 수 있음을 밝혀 보았다.
Trans Abstract
This paper studies the case of teaching Korean poetry texts when conducting masterful reading and reading classes in university liberal arts education. It would be near impossible to present an ideal and complete list when creating a reading list for such a course. However, in this paper, it is suggested that Choi Seung-ja’s poetry should be placed on any list that deals with those times in life when life itself is neglected, as well as used in liberal arts education classes at universities. In our current age, which is seeing an increase in depression among young people, this paper argues that the theme of death as seen in Choi Seung-ja’s poem can actually give hope to its readers, and instill in them a level of resistance to death that will manifest as a will to life.
In Choi Seung-ja’s poem, death is a tragedy given to us humans, but it tells us how to deal with this tragedy so that we can overcome death. The attitude of the poetic persona is repeated and circulated and strengthened, and readers can adopt the courage needed to stand up to death by reading about the attitude of the poetic persona. In this paper, the significance of character education and poetry reading by learners living in an environment of death after COVID-19, can be confirmed in Choi Seung-ja’s poetry learning. Learners find a way to overcome death in a finite life where death is a certainty. This process was confirmed in the ‘Writing Poetry Review’, which was written during the process of learning Choi Seung-ja’s poetry. Thus, this paper revealed that Choi Seung-ja’s poetry can function as a very efficient text in poetry education.
1. 서론
시 읽기는 대학생들의 교양 과목으로서의 특별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 시는 언어를 통해 사물과 사물, 존재와 존재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를 읽고 감상하며 몰입하는 과정에서 학습자는 세계와 교감하며 인식지평을 넓히고 동시대의 중요한 가치들 간의 갈등 상항과 미래의 전망을 파악하고 도출할 수 있다. 이명희(2013)는 대학의 교양 교육은 인문학적 사유와 비판적 사고력에 바탕을 둔 종합적인 의사소통 능력을 기르는 것이라고 그 의의를 밝히고 있는데 시 읽기는 이런 교양 교육의 의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활동이다. 특히 다른 문학작품에 비해 작품의 기승전결을 단 시간에 파악하면서도 지적⋅감성적 영향은 매우 큰 장르이다.
최근에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폭력 사건이나 문제들을 바라보면 생명에 대한 소중함이나 인간애가 실종되었다는 인상을 받는다(이연승, 2016, p.189). 2021년 3월 통계청이 발표한 ‘국민 삶의 질 2020’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 우리 국민의 자살률은 1만 3천 799명으로, 하루 평균 37.8명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있고, 이 자살은 우울증과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강정화, 2023, p.158). 현대사회에서 점점 문제가 되는 우울증이 증가해 가는 세태에 본고는 최승자의 시에 나타난 죽음에 대한 사유가 변증법적으로 생에 대한 희망과 의지로 작동하는 저항성을 줄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하고 대학생들에게 교육적 활용도가 매우 높다고 판단했다. 본 연구의 목적은 대학의 비전공 학습자를 대상으로 한 시 교양 교육에서 최승자의 시를 능동적으로 경험하고 학습하는 과정에 있어서 얻게 되는 문학적 효과를 증명하는 것이다.
본 연구의 사례는 대학교에서 진행한 <시 읽기> 수업의 학습자들을 대상으로 한다. 이 강의는 시를 전공으로 하지 않는 비전공생들이 시를 학습할 수 있는 교양 교과목이다. 현재 교양 강의에서 시를 강의하는 강좌는 점차 줄어드는 추세이다.1) 이런 상황에서 학습자들이 꾸준히 이 과목을 선택하는 이유는 시를 전문적으로 학습하기보다는 다양한 유형과 주제의 시를 체험하기 위해서이다. 강의 목표에도 다양한 주제나 소재의 시를 학습자들에게 소개하고 시를 학습자에게 경험하고 내면화하는 것에 의의가 있다고 사전에 밝히고 있다. 이 강의는 시를 학습한 다음, 학습자들이 배운 시나 시인에 대해 시평을 작성한다. 시평의 내용과 형식에 관해서는 자유롭게 열어 두어 글쓰기의 부담감을 낮추어 주고 있다.
학습자들에게 제시한 최승자의 작품은 80년대에 주로 발표한 것이다. 최승자는 사회의 절망과 폭력을 주로 다룬다.2), 장석주(1994)는 삶의 비극인 죽음에 집중해 온 최승자의 작품 세계를 파악하고 그를 ‘죽음의 시인’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최승자의 시적 화자는 죽음이라는 공포를 직시하는 용기로 절망과 비극을 극복하고 있다. 최승자에게 죽음은 몸의 죽음일 뿐이며 죽음이라는 소멸을 오히려 더 소멸하는 방법으로 싸운다. 방법으로서의 부정인 것이다.
현대, 거의 대부분의 인류는 끊임없는 폭압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마르치아 엘리아데, 2006, p.162). 폭력적 사회가 될수록 주변부에 위치한 주체들은 폭력과 죽음에 더욱 노출되고 상처 입을 가능성은 더 높다. 최승자의 시에서 폭력과 죽음에 상처 입은 시적 화자는 이를 고독의 방법으로 극복한다(장정일, 1991, p.140). 최승자의 시적 화자는 삶에서 버림받는 그 고독과 홀로 버려진 자세를 오히려 용감하게 선택하고 있다. 동감을 불러일으키는 애절함보다는 용감한 저항과 독기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저항은 시적 화자의 어조와 태도에서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저항의 행위는 단번의 혁명적이고 일회적 저항이 아닌 반복의 동작으로 시 의미체계에서 구현되고 있다.
최승자는 1981년 <이 시대의 사랑>으로 시작하여 1984년 <즐거운 일기> 1989년 <내게 새를 가르쳐 주시겠어요(시선집)> 1989년 <기억의 집> 1991년 <주변인의 초상> 1993년 <내 무덤 푸르고> 1996년 <무엇으로 우리 다시 만나리> 1999년 <연인들>에 이르는 시집을 냈다. 본고에서는 이 시집들에서 주로 80년대에 발표된 시들을 중심으로 하여 반복적으로 확인되는 시어들이 있는 시들을 골라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한 개의 의미구조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 시를 다소 무리하게 선택한 감이 있으나 이로 인해 최승자 시에 나타나는 시적 화자의 죽음에 대한 태도는 더 잘 포착되리라 본다. 죽음이 전제되어 있는 삶이며 그리하여 더 소중한 삶이라는 것을 시를 통해 교육한 사례를 통해 교양 교육에서의 시 활용 가치를 확인할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2. 시 분석과 지도 방안
2.1. 최승자 시 읽기
2.1.1. 화자: 죽음을 대하는 단호한 태도
최승자 시인에게 세계는 그녀의 시 <빈 공책>에서 적어 놓은 것처럼 ‘누가 펼쳐 놓았’는지 모르는 대상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우주를 떠도는 미확인 비행물체, 그것을 우리는 이승의 삶이라 부른다.’ 이런 세상은 최승자에게 <중구난방이다>시에서 말한 것처럼 ‘질러대는 비명 소리들로 가득차 있다.’ 시인에게 자신을 죽이거나 끝장내는 방법은 죽음 이외의 방법이 있긴 하다. 이 ‘데데한 존재’ 자체를 아무 것도 아니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도는 타자가 자신에게 부여한 수동적 가치가 아니다. 타자에 의해 주변화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그렇게 규정짓는 적극적인 방식으로 시인은 그 자신을 이 세상에서 아무 가치가 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려고 한다. 비극적 인간에게 있어서 세계란 ‘無인 동시에 전체-아무 것도 아닌 동시에 전부이기’ 때문이다(루시앙 골드만, 1986, p.69.).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마른 빵에 핀 곰팡이’(<일찌기 나는>)
‘최승자의 시는 삶이 비극임을 철저히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그 비극의 의미를, 그 비극을 배태하는 현실의 위악성을 질문하고 충격적으로 깨닫게 해 주며, 동시에 그 세계를 바꾸어야 한다는 당위를 가차없이 촉구하는 것인데, 그리하여 나를 철저히 죽임으로써 나를 살리겠다는 태도의 표현’(정과리, 1984, pp.105-125)이다. 제대로 사는 것을 실천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최승자의 시적 화자는 싸움에 임한다. 싸움의 방법은 ‘소문으로 만들기’나 ‘죽기’를 연습함으로써 지금의 자신을 無化시키는 태도이다. 여기에서 이 저항의 시간이 소급되는 양상은 <散散하게. 仙에게>의 시에서도 나타난다. ‘일찌기 나는 흘러가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었다./다른 사람들이 길이로 넓이로 흘러가는 동안/나는 깊이로 흘러가는 것뿐이라고.’ 시인은 처음부터라고 말하지 않는다. 언제이든지 그 현재의 시간보다는 먼저인 ‘일찌기’라는 시간을 발견함으로써 저항의 시간을 앞당기고 있다. 이와 같이 시간적 인식에서도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싸움을 진행하는 행위의 철저성이 나타난다. 무화시켜버리기의 단호함을 볼 수 있게 하는 사유의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의 무화를 타인인 너에게 명령하며 이는 반복을 통해 주문이 된다. 띄어쓰기를 거부한 주문, ‘나는너를모른다’의 거부적 발화, 이는 반복되어 주문이 되고 그리하여 나는 ‘너 당신 행복’과 의도적으로 거리가 멀어지게 한다. 뚜벅뚜벅 멀어져가는 거리는 다음 행에서 ‘너. 당신. 그대. 행복.’의 거리로 구체화된다. 너를 쉼표가 아닌 마침표로 끊어 읽음으로써 나와는 먼 너라는 가치에서 난 스스로를 멀게 한다. ‘당신’이 나를 모른다고 말하게 만들고 명령하며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루머’로 만들어 버린다. 사회 속에 떠도는 존재로서 실체가 있으나 없기도 한 ‘소문’이 되게 만드는 것은 ‘내’가 선택한, 자신을 지워버리는 비극적 방법이다.
<사랑 혹은 살의랄까 자폭>에서 자신을 죽이는 행위를 ‘혹은’이라는 추측으로 사랑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준다. 죽음에 대한 요구와 철저한 확인까지 이르는 사유의 철저함은 스스로 비극을 초래하는 몸짓인데 이는 삶을 제대로 사랑하는 방법이다. 한밤 혼자 고독하게 있는 그 자세가 사랑이며 이는 죽음을 기다리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간은 ‘순간’이지만 ‘영원히’ 멈춰 있다. 이 고독의 시간에 시적 화자는 ‘내 목을 쳐라’고 요구한다. 자신을 죽이라는 것인데 심지어는 그 ‘모가지가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어야 ‘눈을 감겠다’는 단호함을 보인다. 시인의 죽음에 대한 지향은 시 <淑에게>에서도 나타난다. ‘자, 내가 가진 슬픔 다 모아/한 사발의 죽을 끓였으니/함께 들자꾸나.//죽음을 향해/한 발 더,/기운차게 내딛기 위해.’라고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2.1.2. 저항의 동작: 비극이 ‘흐르는’ 세계와 싸우기
최승자의 시는 살아간다는 것은 죽어간다는 것이고 이러한 인생을 ‘흐르다’라는 동사로 정리한다. ‘흐른다’가 향하고 있는 도착 지점에서 시적 화자의 자세를 확인할 수 있다. 최승자의 시에서 죽음을 마주하는 용감한 저항의 자세는 세계가 의미 없이 흘러가고만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사람들은 모두 흘러가고 있다. ‘시간은 저 혼자 능률 능률 흘러가고’(<여의도 광시곡>), ‘열려진 자궁으로부터 병약하고 창백한 아이들이/ 바다의 햇빛이 눈이 부셔 비틀거리며 쏟아져 나’와서 ‘오대주 육대양으로 흩어져 나와’(<겨울에 바다에 갔었다>) ‘홍수가 진행될’ (<여의도 광시곡> 중에서)정도이다. ‘일찌기 나는 흘러가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었다/다른 사람들이 길이로 넓이로 흘러가는 동안/나는 깊이로 흘러가는 것뿐이라고’(<散散하게. 仙에게> 中에서) 방법이 다를 뿐 흘러가는 것은 모두 다에게 주어진 운명 같은 것이라고 할 때 이 ‘흘러가는 것’은 곧 산다는 것이며 또한 죽어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흘러감은 결국 ‘헛됨을 완성하기 위하여’이다. ‘헛됨을 완성하는’ 자세의 다름이 ‘그들’과 ‘나’를 다르게 한다. <20년 후에 芝에게> 시에서는 흘러감의 방향은 언뜻 달라 보인다. ‘너’가 ‘강을 이뤄 흘러가는 것’에 비해 ‘나’는 추락함으로 깊이로 흘러간다. 나의 추락은 ‘연극적으로 죽어가는 것’이며 이것이 나의 ‘사랑법’이다. 다른 시에서는 ‘흐름’의 수평성을 재고한다. <散散하게, 仙에게>에서 깊이로 흘러서는 ‘바다’에 이를 수 없으며 깊이의 고독함과 빈약함을 해결하기 위하여서는 ‘역시’ 물과 같이 흘러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네게로>에서 볼 수 있듯이, 그저 ‘흐름’이 아니라 물과 함께 가되 다른 ‘알콜’과 같이 그리고 ‘니코틴’이나 ‘카페인’처럼 중독성이 강하고 지독하여 치료되기가 쉽지 않은 ‘매독균’과 같이 흘러가는데 이것이 바로 최승자의 자세이며 이는 바로 ‘죽음’이다. ‘죽음’은 우리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것으로 동일함을 획득하고 지독한 중독으로 우리 삶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비극적으로 죽어가고 있음을 우리는 반복하지 않을 수 없다. 살아간다는 것은 이 ‘죽어감’을 반복하는 것이다.3) 최승자는 이 비극적 반복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심지어 <내 수의를> 시에서 죽음을 초대하는 ‘수의’를 만드는 빗소리를 초대한다. 그는 밤이 깊을 때까지 죽음에 대해 사유를 멈추지 않고 한 올씩 ‘정성들여 죽음을 사유’한다. 죽음을 이어나가는 동작의 계속성은 연결어미‘-고’의 빈번한 사용으로 나타난다. 최승자의 시 제목에서는 이런 ‘-고’로 제목을 삼는 시들이 많다.<끊임없이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주인 없는 잠이 오고> <오늘 저녁이 먹기 싫고> <시간 위에 몸 띄우고> <돌아와 나는 시를 쓰고> 등이 있다. 그리고 시에서도 ‘- 고’로 행을 연결하는 것을 빈번하게 볼 수 있다. ‘나’는 이러한 비극적 자세를 ‘한평생’ ‘자동 반복’적으로 ‘끝없이’ 반복한다. 절망의 연속성과 반복성이 잘 나타나 있는 역설적인 시 <희망의 감옥>에서 그 반복적 절망을 읽을 수 있다.
<늘 저녁은 먹기 싫고>와 <주인 없는 잠이 오고> 시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비극적 시간은 미래가 결여되어 있지만 ‘-고’를 포함한 ‘흐르다’의 운동 방향은 미래를 지향하여 계속 반복하고 있기에 사실 최승자 시의 비극성은 이미 극복과 희망이 내재되어 있다.
2.1.3. 극복의 연습; 비극적 동작의 도형적 극복-원
시인이 철저하게 흘러가는 것은 ‘죽음’에 도달하기 위해서이며 이러한 ‘죽음을 반복하기로서 흘러가기’는 순환운동으로 원을 형상화하게 된다. 이 도형-원의 실재는 오로지 반복이나 참여를 통해서만 획득된다(마르치아 엘리아데,2003, p.47).4) 언어는 본질상 상징성을 띤다.(리꾀르, 1993, p.24) 이 상징은 시에서 어떠한 형상을 떠올리게 하고 형상적 이미지는 독자들에게 특별한 체계를 형성한다. 최승자가 비극을 용감하게 응시하고 전투적으로 사는 방법이 진정성 있는 이유는 삶이 곧 죽음이며 죽음은 곧 삶과 별 다를 바 없다는 순환적인 인식이 전달되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은 순환적인 것으로 죽음 또한 순환적인 세계의 운동을 통해 새로운 삶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생명의 순환적 체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 현상들 속에서 일정한 주기에 따라 동일한 형태로 반복되고 있다. 이 반복이 세계 내에서는 항상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그의 시 <도망>에서 이런 항문과 입구멍의 연결, 삶과 죽음의 맞닿아 있음은 자신의 입으로 꼬리를 물고 있는 뱀 우로보로스(Uroboros)의 형상으로 구체화된다. 에리히 뉴먼(2010)에 의하면 고대부터 원이나 구는 완전과 영원을 의미했다. 원은 시작도 끝도 없으며, 그 속에서는 이전도 없고 이후도 없다. 즉 시간이 없다. 그리고 위도 없고 아래도 없다. 이러한 이유에서 원은 철학적 우주관으로서 세계 창조의 근원으로서 여겨졌는데 이것이 우로보로스의 의미에 그대로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잠결에 무엇인가 내 꼬리를 물었다./그것은 나의 항문 속으로 들어와/창자를 거쳐 나의 위장 속으로/올라와 꼬물거리고 있다.’ 이 이미지는 매우 빠르고 유연한 모습으로 내 항문 속으로 들어 와, 내 몸을 거쳐 튀어 나오는 꼬물거리는 뱀이다. 뱀은 땅 위와 아래 그리고 주변에 있는 물의 역동적인 힘을 상징하는 것이며 자신의 꼬리를 입에 물고 있는 하나의 원을 형성한다. 이것은 많은 문화에서 땅을 둘러싸고 있는 원초적인 ‘물’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그리고 이 뱀과 물은 앞서 말한 ‘흐르고’의 시어와 상응을 이루게 된다.
모든 것은 처음으로 ‘일찌기’ ‘흘러가’ 결국 끝이며 시작이 될 것이고 끝은 다시 생과 이어지는 ‘흐름’의 반복적 성질에 의해 무한히 반복되는 원의 무늬를 그리게 된다.
2.2. 시 감상과 시평 쓰기의 실제
시 수업은 텍스트에 대한 화자와 반복되는 시어 읽기를 우선으로 하여 최종적으로 시평쓰기로 진행되었다. 이 수업은 교양 과목 강좌이므로 시와 시인에 대한 심화된 지식을 전수하기보다는 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삶과 죽음에 대한 자세를 한 편의 비평문으로 작성하여 인간과 죽음에 대한 이해를 확장, 심화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를 향유하는 즐거움을 느낌으로써 교양인으로서 필요한 소양과 문식성을 키워나가도록 한다(이연승, 2016, p.180).
시를 읽고 쓰는 활동은 자신의 경험을 타자와 공유할 수 있는 ‘무엇’으로 만들기도 하는 과정(노만 홀랜드, 1988, p.303)이기 때문에 시평을 통해 학습자는 최승자의 시를 내면화하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비평문은 텍스트 읽기에 개입하는 가치의 문제를 다루면서 문학텍스트에 대한 내면화의 과정까지를 고려한다. 독자는 백지 상태가 아니라 이미 자신의 것으로 체화되어 있는 경험과 지식, 사유의 체계를 가지고 작품을 마주하고, 문학 텍스트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앞에서 분석한 최승자 시를 읽는 학습활동과 시평 쓰기를 통해 다음과 같은 교육적 효과를 거두게 된다. 우선, 읽기와 쓰기를 연계한 수업은 언어 영역에 총체적으로 접근하는 것이기 때문에 학생들의 의사소통 능력을 신장시키는 데에 도움을 준다(이연승, 2013. p.35). 시평 쓰기는 주제를 활용한 교양 교육의 영역에 해당되며 성찰적, 비판적, 도덕적 사고력 등을 키우는 데에 이바지한다(염철, 2015, p.55). 그리고 읽기와 비평적 쓰기는 기본적으로 삶의 체험을 확대해 가는 과정(김미혜, 2009, p.195)이기에, 텍스트의 내용을 자신의 삶과 결부시키게 된다.
이런 사유의 효과는 학생들의 시평에서도 이미 증명되고 있다. 작품을 감상하고 시평을 써 본 경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해 성찰하고 사유할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며 교양 교육의 목표를 달성하게 된다. 예시1은 학습자가 이러한 효과를 스스로 정리하여 쓴 시평의 예시이다.
예시1)
시평 쓰기 과제를 통해, 좋아하는 시를 몇 번이고 곱씹어 보며 다시 읽게 되었고, 그에 대한 생각을 직접 글로 써보았다. 종종 내가 읽는 문학들에 대해 글을 쓰곤 하지만, 좋아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나를 알게 되는 것 같다. 그것을 왜 좋아하는지, 어떤 부분에서 감동을 느꼈는지 등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과제는 나에게 과제로 느껴지지 않았고, 바쁜 학기 중 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5)
강의를 할 때 시평의 효과를 보기 위해 비평문의 전문성보다는 학습자가 시를 감상한 것에 대해 자유롭게 구성, 서술할 수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한 이유로 시평의 형식이나 특징에 대해 짧게 강의를 하고 사전에 여러 시평에 대해 참고를 할 수 있는 자료를 제시하여 읽도록 하였다. 서평을 쓰는 학습자는 감상과 비평을 쓰기 위해 우선적으로 텍스트에 대해 비판적 읽기를 하고 자신의 해석과 가치 평가를 쓰기 때문에(김미혜, 2009, p.159) 시를 보다 깊이 있게 내면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평 쓰기를 생산하면서 자신만의 텍스트 가치를 형성한다.
예시2는 최승자의 시를 대상으로 한 시평을 제출한 것이다. 학생들이 최승자의 시를 통해 깨달은 것이 무엇이고 또 이러한 우울감을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사례가 될 것이다. 시평의 형식은 자유이기 때문에 각각의 형식과 양이 통일되지는 않았다.
예시2>6)
친구들과 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었다. 지구온난화가 심각해져 2030년 이후면 인류가 생존의 위협을 겪을 것이고, 누군가의 예언대로라면 곧 세계대전이 일어날 것이라는 얘기들.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우리가 말하고 있는 건 분명 끝에 관한 것이었다. ①죽음을 걱정하면서 밥을 먹고 있다는 점이 웃겼다. 최승자 시인의 시를 읽으면 ‘헛됨’ 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밤이 되면 어질러질 것을 알면서도 아침이면 이부자리를 정리하는 것, 다시 배고파질걸 알지만 밥을 먹는 것, 결국엔 헤어질 관계일 것을 알지만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어쩌면 ②우리가 산다는 건 헛되고 헛된 일들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최승자 시인은 1979년 등단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어둡다. 삶의 허무함과 공허함을 표현하지만 어쩐지 거기엔 삶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는 듯하다. 『즐거운 일기』에 수록된 「오늘 저녁이 먹기 싫고」 에서 화자는 삶에서 필연적인 요소들을 거부하는 자세를 보인다. 저녁이 먹기 싫다는 것, 아침이 살기 싫다는 것과 같은 시어들은 ③무엇보다도 죽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그럼에도 화자는 왜인지 열심히 살아간다. 죽음 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여기저기 떠돌다 결국 다시 삶의 공간으로 돌아왔을 때 화자를 마주하는 건 다시 죽음이다. 이처럼 한 없이 무거울 수 있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가볍게, 능청스럽게 할 수 있는 것이 그의 매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삶과 죽음에 대한 커다란 무엇들을 가볍게, 그렇지만 간단하지는 않게 풀어낸 그의 언어들이 좋았다.
④언젠가부터 나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시에서 말하는 늙은 니힐리스트라던가 죽음의 월부금 같은 것 시어들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죽음을 생각하던 나는 전화벨이 울리면 기꺼이 받았을 것이다. 그러 나 시의 화자는 전화벨을 무시하고 귀와 눈을 닫는다. 아침엔 밥을 부르고 저녁엔 잠을 쑤셔 넣으며 열심히 살지만 지칠 것을 알고 결국 전화의 부름에 응답해야 하는 것을 안다. 이런 화자의 태도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던졌던 질문의 답을 희미하게 찾을 수 있었다. 삶의 이유 같은 건 없다. 그저 헛되고 헛됨을 이루는 허무의 기계만이 돌아갈 뿐이다. ⑤최승자 시인의 시를 읽으며 결국 모든 건 죽음에 가까워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된 일이지만 결국엔 그 헛된 것을 위해 사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싶다.
예시3)7)
1. 서론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밥 먹어야지.’라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밥 먹자.’고 이야기 한다. ’식구’라는 단어의 한자가 ‘먹을 식’ 에서 왔다는 것도 우리가 먹는 것에 대해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드러나는 지점이다. 그리고 오늘같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무너지는 날에 나를 찾아와 밥을 먹이는 시가 있다. 최승자 시인의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다.
버팀목도 하나 없는 날에는 멍하니 보내는 시간만이 쌓인다. 배꼽시계는 울려도 침대 밖으로 나갈 생각이 들지 않을 때,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속 한 구절이 떠오르며 최승자 시인의 시적 순간이 나에게도 찾아온다. 그러고 나면 오늘 분의 쌀을 밥솥에 앉히고 밥이 다 지어지기를 기다리며 간소한 반찬을 차릴 작은 힘이 생긴다. 그런 힘을 내게 해주는 시와 시인을 더 오래도록 간직하고 기억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의 주관적인 의미 해석을 진행했다. 글 마지막엔 시인에 대한 조사도 조금 덧붙였다.
2. 시적 표현과 시인의 삶
2-1. 시적표현
씹어 삼켜야 할 오늘의 닭고기와 눈물
⑥화자는 괴로운 이별의 순간에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내고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고 말한다. 한계 상황에서도 음식을 씹어 삼켜낸다는 표현으로 삶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는 이 문장이 현실에 굴복하지만은 않는 화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바스라진 주먹의 다짐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않겠다 다짐하지만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콘크리트 벽이라며 결국에는 비유한다. 동시에 화자의 비유를 주먹으로 표현하는데, 주먹은 바스라진다. 화자는 아마 비유로 단단한 현실의 벽을 무너트리지 못했을 것이다. 주먹이 비유라는 것과 모든 것이 구체적인 콘크리트라는 표현은 비자동적이기 때문에 시인만의 낯선 언어(원시의 언어)로 볼 수 있다. 결국 무언가를 시로써 표현하는 시인은 그게 부서질지라도 비유로써 하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해 기다리는 사랑, 삶
화자는 초연히 바스러진 주먹을 받아들이며 가질 수 없는 무언가를 떠나보낸다. 그런 동시에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라 살아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무참히 꺾여질 것을 알고 있음에도 살아 기다린다. 그것이 화자가 삶을 대하는 태도이고 사랑이다. 기다리는 것이 대항하거나 투쟁하는 것은 아니지만 화자는 도망치지도 않는다. 오늘도 눈물을 삼키며 닭고기를 먹을 뿐이다.
2-2. 시인의 삶
최승자 시인의 삶과 투병 최승자 시인은 도발적 감각과 자유분방한 언어로 여성성을 탈피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1979년 등단했다. 활동 초기에 아직까지도 명문으로 인용되는 구절들을 남겼고, 시집들도 베스트 셀러에 올랐지만 3평 고시원 생활에 밥 대신 소주만을 마시며 심신 쇠약과 정신 분열증, 조현병을 앓았다. 아직까지도 정신과 입퇴원을 반복해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인은 미국에서 ‘서양 점성술’을 처음 접한 그 순간 시인의 작품 전반에 자리한 허무주의가 이미 준비해 온 것처럼 자신을 깊은 구덩이로 데려갔다고 말했다. 21년도 출판된 시인의 산문집 등에 관련 글들이 수록되어 있고, 책 출간 당시에도 입원 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3. 결론
혜성같이 등장해 많은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충격’을 선사한 한 시대의 문학가가 입원 생활을 십년 넘게 해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럼에도 시인이 계속해서 약과 병원밥을 씹어 삼키는 생활을 한다는 것은 여전히 삶의 의지를 내버리지 않았기 때문일 테다. 시인이 정말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시인은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이 다시 꺾여지게 된들 계속 살아 기다리고 있다. ⑦쉽지 않은 투병중임에도 본인의 시처럼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으로 시를 보고 힘을 얻는 내겐 역시 감사한 일이다. 오늘도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를 읽으면서 당장의 힘듦과 괴로움이 한끼 밥을 먹고, 한숨 잠을 자고 일어나면 전보다는 조금 나아질 거라고 믿는다. 그렇게 또 한번 밥을 지으며 이 슬픔이 지나가기를 기다려 본다.
예시2)의 ①~⑤번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에서도 나타나듯 학습자는 최승자 시에서 나타나는 삶의 헛됨과 죽음을 피하지 않고 기꺼이 사유한다. 수업 시간에 최승자의 시에서 시적 화자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해 친구들과 토의를 하고 죽음의 속성에 대해 바라본다. 능동적으로 읽으며 시의 내용을 내면화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의 예시 3)의 ⑥에서 학습자는 죽음과 이별이 가득한 현실에 대해 굴복하지 않는 태도에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⑦에서 시와 시인에 대해 읽으면서 살아갈 힘을 얻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학생들의 시평에서는 공통적으로 시인의 삶, 시, 시에 대한 감상, 그리고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이유 등의 내용을 쓰고 있는데 이는 공통적으로 사전에 강의한 바에 근거하며 자유롭게 기술하도록 했다. 무엇보다 시평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점은 학생들이 시를 통하여 자신을 성찰하고, 힘들고 우울한 상황을 시인이 시에서 제안하는 극복의 방식으로 내면화하였다는 것이다. 학습자는 특히 최승자의 시를 능동적으로 읽었을 때 그 역할이 제대로 작동하였다는 것이다. 시를 읽으며 죽음을 통한 사유를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삶을 살아갈 의지를 획득하는 사유의 확장에까지 나아갔음을 시평에서 확인할 수 있다.
3. 결론
루카치에 의하면 죽음에 바쳐진 비극의 주인공들은 죽기 전에 이미 오래 전부터 죽어 있었다고 한다. 비극적 세계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자세가 선택이라면 비극적 인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러한 반복과 순환의 사유방식은 사실 자연의 생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계절은 순환하고 반복하며 그러한 시간 속에서 사실 인생은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고 있다. 이러한 반복은 처음부터 원에 대한 사유를 배태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극의 탄생을 사유했던 니체8) 또한 만물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죽어가는 과정을 관찰하여. 이러한 과정이 단순히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반복적인 사건이라는 것,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탄생과 죽음의 드라마가 동일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여 이것이 시간과 함께 반복적으로 순환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탄생과 죽음은 다시 재탄생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극복의 방식을 성립하기 위하여 최승자의 ‘나’는 ‘기꺼이’ 인생을 바라보고 용감하게 ‘죽은 듯 누움’으로써 ‘흘러가’는 동작의 반복은 영원의 순환을 지속하게 된다. 최승자는 ‘죽음을 영원히 그리고 기꺼이, 기필코 연습하는 자세’(<슬로우 비디오>)를 통해서 그녀가 죽음이라는 생래적 비극과 그 비극을 이겨내는 과정을 보여준다. 최승자는 비극을 극복할 수 있는 용감한 자세를 취한다. 시 <장마>에서 말했듯, ‘누워야 흘러 떠내려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시대를 사랑하는 ‘허공의 여자’ 최승자의 시를 읽으면서 작지만 씩씩한 여전사를 만나게 된다(김정란, 2001, p.163). 이 여자는 ‘슬픔의 장칼’을 들고 ‘머리는 이승의 꿈속에 처박은 채, 두 발은 저승으로 뻗은 채 기다림을 세워 놓고 시간에게’(<허공의 여자>) 말한다. ‘나를 눕혀라’고.
지금까지 최승자 시를 대상으로 시에 대한 감상과 분석을 거쳐 시평 쓰기 활동으로 수업의 내용을 진행하고, 젊은 세대들의 생명에 대한 중요성, 허무한 삶을 극복하는 데에 시가 학습자에게 미치는 중요한 역할을 살펴보았다. 최승자 시인의 시적 화자가 단호하고 용감하게 죽음에 저항하는 태도는 반복되는 우울감을 두려워하지 않음에 있는데 학생들의 시평 예시를 통해 보았듯이 학생들은 시를 감상하면서 시적 화자의 저항과 의지를 내면화하고 있다. 생명에 대한 포기, 우울감 증가에 따른 사회적 문제가 심각해지는 현재, 교양 교육의 역할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때에 자신과 세계에 대한 사유를 심화하는 시 교양교육은 서정시의 본질이 세계와의 동일화라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교양교육의 목표와 가장 잘 부합하는 문학장르라 할 수 있다.
이상 최승자의 시를 통해 죽음과 이를 극복하는 시적 화자의 태도를 강의하고 이를 학습한 학생들의 시평을 통해 시의 교육적 효과를 살펴보았다. 사례 연구와 예시가 많지 않아 양적으로 검증하는 데에까지는 나아가지 못한 것이 본 연구의 한계가 될 것이나 이는 추후 연구로 보완하고자 한다. 최승자의 시를 텍스트로 삼아 수업을 하는 방안과 그 효과에 대한 양적 검증 연구는 후속 연구과제로 남기게 되었다. 최승자의 시를 활용한 교육 사례가 시를 감상하여 세계와 소통하는 능동적 학습자를 양성하는 교양 교육 수업에 참고가 되기를 희망한다.
References
Notes
한국대학교육협의회 한국교양기초교육원(2019.10)이 공동으로 실시한 대학교양교육 현황 조사 연구에 따르면 교양 선택의 경우 문학 예술 영역이 전체 13.01%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언급하는 최승자의 시는 해당 년도에 출판한 시집에서 인용함을 밝힌다.
“신화의 시간은 역사 속에 말려 들어가 있는 ‘주름진’ 시간이나, 철학의 시간은 역사의 천을 잡아당기는 ‘편편한’시간이다. 인간은 이런 신화적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왔다. 인간은 항상 그 자리에 서 있지만 살의 경계선인 죽음의 지대로 내몰리고 있다. 시간은 인간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다. 그것은 객관적 형식으로서 항상 흘러가고 있다. 더욱이 그것은 죽음의 그늘을 언제나 늘어뜨리고 다닌다. 그래서 인간은 이러한 시간 또는 <역사의 공포>를 회피하기 위해 ‘제의’를 자신의 삶에 도입했다. 즉 우주 창조를 재현하는 일련의 제의에 의해서 주기적으로 시간을 폐기하고, 과거를 소멸시키고, 시간을 재생시키려고 의식적, 자발적으로 노력했다.” 장영란, 원시 신화 속에 나타난 여성의 상징 미학, 여성의 몸에 관한 철학적 성찰, 한국 여성철학회 엮음. 철학과 현실사. 2000, 59-60.
인간의 모든 행위가 태초에 어떤 신이나 영웅 조상에 의해 행해진 행위를 정확하게 반복하는 한에서만 행위로서의 유효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방○○학생의 글, 2023.11.27
심○○학생의 글,2023.11.27
김○○학생의 글,2023.11.27
최승자의 죽음은 그녀의 기질적인 니힐리즘과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목도한 시대의 부조를 부정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철저하게 파괴한다. ...최승자의 니힐리즘은 상당부분 의식화되어 있는 니힐리즘이다. 말을 바꾸면 이는 명확한 ‘문화의 태도’이다....최승자의 태도는 많은 평자들에 의하여 ‘방법적 비극’이라고 불린 바 있는. 분명한 사회적 반항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최승자의 니힐리즘은 고드스불룸이 <니힐리즘과 문화>에서 ‘적극적 니힐리즘’이라고 부르고 있는 태도에 가깝다. 고드스 불롬, 니힐리즘과 문화, 천영균 역, 문학과 지성사, 1993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