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적 전환의 소란을 비판적으로 성찰함은 그 자체로 교육적 자원의 구축과 한 몸이다. 교육은 변화를 일방적으로 추수함으로써 그 일부가 될 수도 있지만, 그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확장함으로써 변화 자체를 재인식하고 삶을 재정향하도록 이끌 수 있는 까닭이다. 현재의 교육정책이나 대학의 실질적 움직임은 전자를 중심으로 하고 있음이 분명하나, 변화의 한 복판을 살아갈 이들이 교육의 또 다른 주체임을 고려할 때 후자와 같은 교육적 비전이야말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자신이 자리잡고 있는 인류사적 맥락을 되짚음과 더불어 이에 기반하는 자기 성찰의 가능성을 개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육적 단초는 4차산업시대의 선언과 더불어 확대되고 있는 기능적⋅기술적 교과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그 실마리는 변화의 격랑 속에서 점차 그 위상이 불안해지는 인문학의 지평에서 좀 더 풍부하게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2.1. ‘인간’과 ‘기계’의 재정의
4차산업시대의 파장이 인문학에 미친 영향은 ‘인간’ 또는 ‘기계’, ‘기술’에 관한 재정의가 활발하다는 데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단적으로, ‘트랜스휴먼’ 또는 ‘포스트휴먼’에 관한 논의가 대표적인데 개념만 놓고 보면 얼핏 ‘휴먼’에 집중된 듯하다. 하지만 ‘트랜스’ 및 ‘포스트’란 말이 함축하는 전이 운동을 주로 과학과 기술의 다양한 성과들이 촉발시켰음을 반추할 때, 이 논의는 필연적으로 확장된 기계 및 기술의 위상을 전제한다. 발전한 기술의 지배력이 확장되면 될수록 인간 정체성의 변화에 관한 담론과 논구 또한 활발하게 제기⋅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포스트휴먼 및 트랜스휴먼에 관한 논의, 이와 관련하여 신유물론적 접근, 인간과 세계에 대한 재정의 등 다양하고도 흥미로운 시각들이 지속적으로 제기⋅논의되고 있으며, 현재의 거대한 변화는 이 논의들의 정당성을 일정하게 보장하는 듯하다.
새로운 시선들은 ‘인간’뿐 아니라 인간이 마주하며 상호작용하는 ‘세계’까지 이전과 달리 바라본다.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인간’, 그리고 그 대상으로 일축된 ‘세계’를 재정의하는 것은 물론 양자 간의 경계마저 허문다. 예컨대 ‘인간’은 성속의 대체 이후, 즉 초월적 주체의 위상이 붕괴된 이후, 세계를 객체로 마주하는 유일무이한 주체로 정의되었지만 이제 상황은 달라졌다. 인간이라는 “주체가 대상을 구성하는 방식을 묘사한 수많은 신화”들이 붕괴되었으며, ‘세계’ 역시 생물과 무생물, 자연, 사회, 우주 등 순전히 ‘대상’으로 규정된 존재를 지칭하는 게 아니다(Latour, B., 1991/2008, p. 211). 디지털 혁명 등 첨단 기술의 보편화 이후 인간은 기존의 세계는 물론 ‘정보’들과 연관된 “정보적 유기체, 즉 인포그inforg”로 변화하며, 세계 또한 “생물학적 행위자들 및 공학적 인공물들과 함께 궁극적으로 정보로 이루어진 총체적 환경, 즉 인포스피어inforsphere”로 전환되었음이 선언되기도 한다(Floridi, L., 2010/2022, p. 24). 현재의 기술적 대전환이 특유의 철학적 사건까지 수반하는 셈이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 이들의 관계와 상호작용에 관해 근본적으로 새로운 관점이 출현함은 분명히 형이상학적 성찰의 개입을 의미하는 까닭이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재정의가 이처럼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음은 그 자체로 중대한 학문적⋅교육적 주제이자 소재다. 인간이 재정의되는 시기는 역사적으로나 지성사적으로나 언제나 격변기였다. 근대 휴머니즘의 정립은 세계사의 탈중세적 대전환과 분리되어 이해될 수 없으며, ‘존재의 거대한 고리’를 부정함으로써 ‘인간’은 물론 여타의 다른 존재들, 그리고 그에 대한 관계들까지 동시에 재정의하는 사건이었다(Taylor, C., 1991/2013, p. 11). 즉 인간을 포함하여 천사에서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유기체론적⋅전일론적 믿음을 거부함으로써, 인간 자신을 중심에 놓고 그밖의 다른 존재들 또한 동시에 재규정했던 것이다. 지금 전개되고 있는 인간 및 여타의 존재들에 재정의 또한 다르지 않다. 인간 재정의 담론의 범람은 기술적 진보, 연관된 정치⋅경제적 변화 등 인간이 포함된 거대한 관계망의 동요를 직접적으로 함축한다.
1977년 이합 핫산(Hassan, I.)에 의해 탄생한 조어, ‘포스트 휴머니즘’은 인간 재정의 담론 가운데 가장 포괄적인 함축을 갖는 개념으로 반서구중심주의, 반인종주의, 진화론, 페미니즘, 포스트모더니즘, 반인간중심주의 등의 문제의식이 복잡하게 뒤얽혀 있다(Ferrando, F., 2016/2021, pp. 59-65). 이 개념의 의미를 천착하면, 우리 시대의 통념화된 욕망, 가치, 지향 등을 재발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를 구축하는 현실적 맥락 및 역사적 운동까지 가늠할 수 있다. 예컨대, 반인간중심주의 담론의 갈래는 기술과 자본 지배시대의 환경위기 등을 독해하도록 이끄는 중요한 경로가 된다. ‘트랜스 휴머니즘’은 1950년대 중반 줄리언 헉슬리(Huxley, J. S.)에 의해 현재 사용되고 있는 의미에 가장 가까운 뜻으로 개념화된다(
이종관, 2017, pp 28-29). 이 개념은 포스트 휴머니즘과 중첩되는 지점이 없지 않지만, 과학기술에 의한 인간의 변이를 긍정한다는 점에서 대체로 구분하는 경우가 더 많다. 이 역시 과학과 기술의 지배력이 압도적인 현대 사회를 성찰하도록 이끌 뿐 아니라, 그같은 지배력에 대해 놀라울만큼 수용적인 우리 현대인의 태도를 다시 들여다 볼 수 있게 한다.
인간에 대한 재정의 담론은 인간은 물론 기계, 자연 등 인간이 관계 맺는 모든 존재를 재조망하는 것이기에 그 자체로 중요한 학술적 고구의 주제이지만, 동시에 교육적 함의 또한 자못 크다. 개념 및 담론의 함축과 형성 배경 등을 좇는 데서 우리가 몸담은 시대,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해 좀 더 선명한 부감이 가능해지는 까닭이다. 덧붙여, 점차 강화되는 기능적 교육 프로그램은 물론 이를 배치하도록 이끄는 현실적 맥락, 그밖에 다양한 기원들을 통합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바탕을 제공하기에 그 교육적 의미는 더욱 커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논구들은 기존의 인간관이나 세계관이 지닌 한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거나 인간-세계-기계의 새로운 전망을 격변의 규모와 속도에 걸맞게 제시해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환언하자면 그 속에 함축된 통찰력은 전환의 시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바탕을 제공한다. 아울러 인간을 비롯하여 인간이 마주하는 대상, 인간이 자리잡고 있는 세계를 재규정한다는 점에서 중대한 철학적 사건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새로운 견해들은 대체로 현재의 변화를 일종의 객관적⋅비가역적⋅확산적 흐름으로 간주하는 공통점을 지닌다. 말하자면 수용적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혹은 이 철학적 사건에서 상대적으로 윤리적⋅비판적 성찰의 위상은 그리 크게 다가오지 않는다. 예컨대, 디지털 사회를 향한 발걸음이나 그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첨단 기술의 위상을 강화하는 방향과 대체로 결을 같이 한다면, 비판적 질문 및 성찰은 이미 위축된 상태라 할 수 있다. 물론 새로운 시대의 선언과 수용에 불평등, 환경 등 현재의 위기를 의식한 수사가 없지 않지만, 변화의 공음(跫音)이 워낙 큰 탓에 그 뒤에 가려져 잘 들리지 않는다.
나아가 간혹 제기되는 비판적⋅윤리적 성찰이 보정, 보완의 수준을 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떨치기 어렵다. 예컨대, 인공지능에 사회규범의 알고리즘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또는 첨단 매체를 마주하는 ‘바람직한’ 자세는 무엇인가, 발생 가능한 문제들에 대한 규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은 디지털 사회로 진입할 때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임에 틀림 없다. 하지만 비판적⋅윤리적 성찰은 이같은 물음 속에서 단적으로 도구화된다. 첫 번째 물음의 경우, 특정 기술의 상용화란 대전제 아래 발생 가능한 위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명령어 프로그래밍’을 묻는 것이다. 여기서 윤리적 문제는 사회적 규범을 규칙화하는 수준으로, 따라서 프로그래밍을 위한 하위 절차로 위축된다. 만일 ‘자율성’이나 이에 근거하는 ‘책임’의 문제 등이 개입되면 ‘윤리적’이란 수사조차 어울리지 않는 게 된다. 두 번째 물음 또한 미디어의 첨단화 및 일상화 기조는 전제하며, 이에 대해 적절하게 대응하도록 하는 일종의 ‘매너’ 정립을 요청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기술지배의 경향 자체에 근원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게 결코 아니며, 오히려 수용적 관행의 창출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그러한 경향의 일방적 확산에 간접적인 호의를 표하는 것이다. 마지막 물음 역시 문제 발생을 확실하게 예견하면서도 법제 등 기존의 규제 장치의 연장선 위에서 문제를 처리하는 사회적 메커니즘의 기술적 고안을 고민하는 것에 불과할 수 있다.
6) 따라서 이와 같은 비판적 접근이란 윤리적이고 비판적인 성찰이 아니다. 그저 새로운 관행 또는 형식적 규칙의 산출에 집중하는 도구적 지평에 머무를 뿐, 지금 전개되고 있는 철학적 사건이 윤리적 비판의 심화에 기여하는지는 의문이다.
‘첨단기술시대’의 선언과 더불어 윤리 또는 가치의 문제는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걸음을 되도록 곧게 하려는 일 정도로 축소된 채 이해되곤 하는데 이는 충분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새로운 시대 선언과 실질적인 전환이 ‘첨단기술사회’ 또는 ‘디지털사회’를 지향한다고 할 때, 비판적⋅윤리적 성찰은 이 행선지의 정당성을 되물을 수 있고 또 마땅히 그러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 변화의 과정 자체와 그 끝이 “‘도덕적 문명’과 이상이 움츠러들게 방치하고, 원래 자신들을 위해 봉사하도록 창조한 기계에 스스로를 종속”시키는 것은 아닌지 자문함은 너무 거창해 보이지만 외면하기 어려운 일이다(Adas, M., 1989/ 2011, p 499). 인간 “그 자신마저도 그저 한낱 부품으로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추락의 낭떠러지 마지막 끝”은 아무래도 우리가 원하는 귀결은 아닌 듯하다(Heidegger, M., 1954/2008, p 36). ‘발전은 영원할 것이라는 환상’이 흔들림 없이 지속되고, 디지털 시대로 나아갈 때 “재앙은 없을 듯하며” 간혹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주요한 장애도 아닌 듯”하다는 믿음 역시 여전함은 아무도 비판하지 않는다는 사실, 설사 비판이 제기되더라도 극히 무기력하다는 사실을 일깨운다고 할 수 있다(Rist, G.. 2007/2013, p 386).
이러한 비판적 접근은 로얼드 호프만(Hoffman, R.)이 “반(反) 플라톤주의”라 칭했던 것, 즉 “과학자(또는 기술자)가 세계를 지배하면 안 되는 이유”와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물론 호프만 스스로 인정하듯 “과장”된 수사이긴 하지만, 기술지배력 확장의 일방성을 경험하는 현재의 상황에 대해 간명하면서도 의미 깊은 메시지다. 호프만에 따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단순한 과학적 분석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과학자들의 세계는 수학적 분석으로 모든 복잡성이 해소되는 것이기에, “세상은 물론 생명 자체도 윤리적, 도덕적 논쟁거리이고, 정의와 동정심이 요구”된다는 사실이 간과된다. 따라서 고용의 평등이나, 마약 중독, 이 시대의 사랑에 관해 말하지 못한다. 시끌벅적한 토론이 끝 간 데 없이 이어져도 ‘참값’을 찾지 못하며, 그럼에도 불완전한 합의가 세상을 떠받치는 규준을 만드는 일은 아무래도 과학이나 기술의 영역 밖이다. 과학자 출신의 정치인이 존재함은 이에 대한 반박 사례가 되지 못한다. 이들의 정치적 활동은 과학적 수행과 무관하거나 확연히 다른 범주에 속하기 때문이다. 유의할 점은 호프만의 이야기가 ‘과학자’라는 인격적 존재를 비정치적 영역에 묶어두어야 함을 주장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의인화되었을 뿐 과학과 기술의 사회적 영향력이 일방적으로 과도해질 때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을 우려함일 따름이다(이상 Hoffman, R., 1996/2018, pp. 300-303).
과학적 또는 기술적 이해만으로 우리의 세상을 온전하게 파악할 수 없고, 따라서 그 이해가 근원적으로 불완전한 것이라면, 그에 기반한 통치도 불안한 것일 수밖에 없다. 과학자의 성찰과 앎 또한 ‘철(哲)’, 즉 지혜(sophia)에 속하는 것임에 틀림없지만, 호프만은 이런 이유로 이 ‘철인’들의 통치를 못미더워 했던 게다. 그의 통찰은 적어도 새로운 시대 선언의 어수선함에 관해 소박하지만 직설적인 메시지로 곱씹을 만한 여지를 갖는다.
2.2. 인간과 ‘로봇’7)
앞선 시대의 과학적⋅기술적 바탕 없이 새로운 기술의 탄생이 불가능하듯이, 다양하게,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폭발적으로 제시되는 새로운 인간-세계-기계의 정의도 마찬가지다. 양자는 모두 현 세기 특유의 창의적 발명 및 발상인 듯하지만, 실은 오랜 전사(前史)를 지닌다. 이 전사를 깊이 반추함은 교육적 영역에서 특히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오늘날과 같은 기술지배시대가 어떻게 도래했는지 가늠할 수 있도록, 즉 전혀 출구가 없어 보이는 시대적 상황에 관해 적어도 그 입구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전사는 복잡하다. 또는 다면적이고 다층적이다. 학문의 발전, 새로운 기술의 출현, 상상과 욕망의 확장,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변화 등이 교차하는 까닭이다. 따라서, 이같은 담론의 확산, 그리고 4차산업시대의 선언 등에 표면상 기술이 가장 중대한 요인인 듯 보인다고 해서 공학적 접근만으로 그와 연관된 모든 전경(全景)을 포착할 수는 없다. 학문분과를 기준으로 말하자면, 융합적이고 통섭적인 접근이 불가피한 것이다.
8)
따라서 과학, 철학, 문예, 문화 등의 영역과 그 역사까지 첨단기술지배시대를 통찰하는 훌륭한 바탕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전술한 인간-기계의 재정의 담론은 기술의 진보와 약진에 의해 촉발된 것이지만, 동시에 인류 사회에 대한 성찰과 문제의식을 담고 있으며 특히 주요 개념들의 탄생과 관련하여 문학적 상상 및 철학적 사유에 의존하는 바 크다. ‘트랜스 휴머니즘’의 경우, 단테(Alighieri, D.), 엘리엇(Eliot, T. S.)에 기원을 두며(Ferrando, F., 2016/2021, pp. 70-71), 아이작 아시모프(Asimov, I.)의 작품을 비롯한 SF 문학의 상상력에 의해 그 내포를 확장할 수 있었다(
신상규, 2014, p. 112). ‘포스트 휴머니즘’ 또한 근대 휴머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 트랜스 휴머니즘 등과 깊은 상관관계를 지니며, 하이데거에서 보스트롬(Bostrom, N.)에 이르기까지 여러 철학자들의 성찰과 얽혀 있다.
9) 이렇듯 철학과 문학, 과학과 기술, 그리고 그 역사를 횡단하는 복합적 시선 하에서, 인간, 그리고 4차산업시대의 총아인 ‘로봇’은 자신들에 관해 흥미진진한 서사를 들려준다. 첨단 기술과 그 지배가 오래전의 우연한 접촉, 지속되는 욕망과 상상 등에 간과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게 연루되어 있음이 드러나는 까닭이다.
주지하다시피, 영혼이나 영성처럼 인간의 주변에 독점적으로 배치되었던 속성들이 과감하게 제거되기 시작한 사건은 이미 18세기에 발생했기 때문이다. ‘인간-기계’의 선언
10)은 ‘이성’ 중심의 인간 해명과 동시대에 이뤄졌고, 특정하게 프로그래밍된 역사 이해로 확장되었다.
11) 나아가 인간 사회의 다양한 기제들, 심지어 ‘국가’조차 “기계”로 간주되기도 하였다(Stirner, M., 1845/2023, p. 181). 하지만 새로운 철학적 관점의 출현 못지않게 혹은 그보다 더 중요한 맹아는 이미 전방위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측시(測時)의 감각을 외화할 뿐 아니라 그 부정확성이나 주관성을 단번에 극복할 장치, 즉 시계는 14세기에 유럽에 출현한 뒤 마침내 인류 사회의 풍경을 뒤바꿔 놓는다(Cipola, C. M., 1967/2013, pp. 53-113). 인간의 감각 또는 능력을 기계장치로 외화한 뒤 이를 통해 인간과 인간의 사회가 재규정되는 역전이 시계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최초의 시계가 성당에 배치되었음을, 그리고 성당의 공간적⋅권력적 중심성을 나란히 놓고 보면 과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금속을 가공한 정밀한 기계의 발전은 유럽에서 자연과학의 발전과 상호작용하며,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창조를 꿈꾸도록 이끈다. 이처럼 발칙한 욕망, 그리고 장난감과 사치품의 교차물이 이른바 ‘오토마타(automata)’다. 시계와 같은 어원을 갖는 이 자동기계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모습으로 그 동작을 재현하는 장치였고 기계장치의 복잡성과 정밀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전설적인 오토마타 제작자였던 보캉송(Vaucanson, J.)은 심지어 생명체의 온전한 창조를 시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병태, 2021, pp. 167-184). 인간과 생명의 창조를 향한 욕동은 과학과 상상의 지평을 가로지르며 당시에 강렬하게 증폭되고 있었다. 갈바니(Galvani, L.)의 ‘동물전기’
12), 즉 정전기의 발견은 호문쿨루스(Homunculus)나 골렘(Golem)의 전설을 이어받으며 생명 창조의 꿈과 상상을 자극했다. 오토마타, 과학적 발견, 오랜 전설 등은 뒤얽혀 괴테(Goethe, . W.)의
파우스트나 셸리(Shelly, M. W.)의
프랑켄슈타인, 호프만(Hoffman, E. T. A.)의
모래사나이 등을 스치며 더 넓고 깊은 서사의 역사를 구축하고 다시 욕망과 상상의 확장을 자극한다.
13)
금속가공기술자들은 전문적인 분야가 정립되기 전에 시계, 총포 등을 함께 생산한 것으로 전해진다(Cipola, C. M., 1967/2013, p. 83). 인간의 피조물에 언제나 욕망이 담지됨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금속가공기술과 자동기계의 발전이 심지어 살상의 욕구까지 외화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14) 아울러 연산 등 인간의 추론 능력 가운데 일부 또한 시계의 경우와 유사한 외화의 과정을 거친다. 금속가공기술을 바탕으로 17세기 파스칼이 최초의 계산기를 제작할 수 있었고, 뒤이어 라이프니츠(Leibniz, G. W.)도 계산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비약은 배비지(Babbage, C.)에 의해 이뤄진다. 그가 설계한 계산기는 단순 연산을 넘어 알고리즘이 전제될 뿐 아니라 정보의 저장까지 가능한 장치였기에 현대 컴퓨터의 기원을 연 것으로 평가되곤 한다.
15) 이는 인간 지능의 외화 역시 하루아침에 발생한 사건이 아님을 말해준다.
우리가 현재 마주하고 있는 ‘로봇’은 이 모든 전사를 집약한 존재다. 하지만 ‘로봇’은 어떤 의미에서 특정한 기능을 하는 가시적 대상으로, 특이한 개체들로 존재하는 것만은 아닌 듯하다(
이병태, 2021, p. 174). 19세기에 이미 “국가-기계”를 개념화한 철학자가 있었음은 인간의 사회, 제도, 조직, 관계망 등을 특정한 목적을 위해 작동하는 지능형 장치로 바라보는 시선이 생각보다 오래된 것임을 말해준다. 예컨대 유어(Ure, A.)는 산업혁명기의 ‘공장’을 하나의 기계 장치로 간주하는 사유를 전개한다.
16) 마르크스(Marx, K.)는
자본론에서 유어의 이름을 자주 거론하는데(Marx, K., 1976/2015, pp. 503~684),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유어의 공장은 단순히 건물과 기계를 통칭하는 게 아니며, 노동자의 자리, 노동과정 등의 재조직화까지 아우르는 것이었다. 즉 인간의 대표적인 활동인 노동은 이 새로운 기계에 의해 완전히 새롭게 재구성된다. 나아가 삶을 지탱하는 활동의 재조직은 일정하게 인간의 의식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간단없이 움직이는 기계는 가령 ‘근면’의 가치를 전면화했을 뿐 아니라 이후 더 깊은 내면화를 이끌며 여전히 작동하는 까닭이다.
17)
이처럼 정교한 측시 기계의 우연한 출현은 사물, 그리고 생물⋅인간⋅사회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상상과 성찰을 고무했을 뿐 아니라, 정치적 야욕이나 전쟁, 과학과 기술의 발전, 경제적 발전과 사적 소유욕의 폭증, 전설과 상상 등과 상호작용하며 인간의 정체성, 나아가 사회적 특징까지 변화시켰다. 디지털 시대, 그리고 그 기술적 배치 또한 미증유의 수렴적 특징을 드러내며 기호와 취향, 문화와 예술, 교육과 노동 등 전 사회적 관계망을 새롭게 구축하고 있다. 방적기를 넘어 공장 그 자체, 그리고 국가까지 하나의 기계로 간주했던 사유는 이미 ‘인간’을 더 큰 기계의 일부로 간주하며 배면화하는 특징을 드러낸다. 이는 산업화와 자본주의 확장의 한 장면을 성찰한 것이지만, 현재 우리의 현실은 이 장면이 전면화된 상태에 도달한 듯하다.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는 지능형 장치’, 로봇은 이런 의미에서 인간이 마주하는 단순한 대상들로 분산되어 있는 게 아니며, 인간 그 자체를 포함하는 더 막대한 존재일 수 있다. 전술한 철학적 성찰, 문학적 상상, 과학과 기술의 발견들이 흐릿한 ‘미래’를 그리며 또 지향하는 것이었다면, 우리에게 그 미래는 도래한지 오래된 현재다. 전술한 기술지배시대의 전사, 정점의 기술들을 집약하는 ‘로봇’이라는 존재는 이처럼 우리 자신을 재성찰할 수 있는 중대한 창이다. 중대하기에, 그리고 어쩌면 현재 강화되고 있는 편향을 보정하기 위해, 이 창은 교육의 장에서 가능한 한 적극적으로 더욱 활짝 개방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