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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General Edu > Volume 17(5); 2023 > Article
지능 자동화 시대, 탈-노동의 의미와 교양교육의 가치

Abstract

이 글은 인간의 노동과 지식의 가치가 달라지는 지능 자동화 시대에 탈-노동의 의미와 교양교육의 가치에 대해 논증한다. 특히 프랑스 기술철학자 시몽동과 스티글러의 관점에서 디지털 정보기술에 기반한 자동화 사회의 본질과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살펴보고, 이를 토대로 인공지능과 더불어 도래하게 될 탈-노동 사회의 새로운 삶의 기예로서 교양교육의 중요성을 밝혀보고자 한다. 시몽동의 기술정신과 기술문화는 인공지능과 경쟁하는 노동이 아니라 인공지능과 더불어 자신의 일과 공적 활동을 꾸려갈 수 있게 하는 탈-노동의 새로운 존재 양식을 보여준다. 스티글러는 자동화 사회의 알고리즘 통치성에 의한 노동과 정신의 위기를 새로운 지식과 일의 발명 기회로 전환할 것을 촉구하며 시몽동의 전망을 구체화한다. 지능 자동화 시대는 노동 생산성과 전문성 중심에서 탈-노동과 자유교양 중심으로 삶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킨다. 자동화로 인해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시간을 나 자신과 타인의 삶을 돌보며 문화적 유산의 상속과 새로운 가치 생산에 사용할 수 있도록 삶의 기예를 키워야 한다. 교양교육은 자동화 기술 환경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조건을 이해하고 인간 정신의 가치와 인간다운 삶의 의미를 새롭게 발굴할 수 있도록 인문학적 안목을 갖춘 디지털 리터러시를 함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Abstract

This article discusses about the meaning of post-labor and the value of liberal arts education in the era of intelligent automation, where the value of human labor and knowledge is changing. In particular, it examines the nature of Automatic Society based on digital information technology and the conditions of human life from the perspective of French technology philosophers Simondon and Stiegler. Based on this, the article reveals the importance of liberal arts education as a new life ‘ars’ in the post-labor society that will come with artificial intelligence. Simondon’s technical mentality and technical culture reveal a new model of post-labor existence that enables people to organize their work and public activities alongside AI, rather than in competition with it. Stiegler embodies Simondon’s outlook by calling for a transformation of the crisis of labor and spirit caused by the algorithmic governmentality of Automatic Society into an opportunity for the invention of new kind of knowledge and work. The era of intelligent automation shifts the paradigm of life from labor productivity and expertise to post-labor and liberal arts. We need to cultivate life ‘ars’ so that the time freed from labor due to automation can be used to take care of our own lives and the lives of others, inherit our cultural traditions, and produce new values. Liberal arts education should move toward fostering digital literacy with a humanistic outlook in order for us to understand the human condition of living in an automated technological environment and to discover the value of the human spirit and the meaning of human life.

1. 들어가며: 지능 자동화로 사라지는 노동과 사유 능력

2022년 11월 대중 앞에 공개된 대화형 인공지능 ChatGPT- 3는 알파고 이후 새로운 충격을 던져 주었다. 인간의 질문이나 요구에 망설임 없이 결과를 술술 내놓는 ‘생성 인공지능’의 등장은 그동안 체감하기 어려웠던 인공지능의 발전을 단번에 느껴볼 수 있게 했다. 기존의 정보검색 수준을 넘어서, 보고서나 이메일 작성, 엑셀, 번역 등 기본적인 문서처리 작업에서부터 소설, 그림, 작곡, 영상 등 다양한 창작과 프로그램 코딩에 이르기까지, 그동안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여겼던 인지적인 작업들조차 컴퓨터프로그램으로 대체하는 인지컴퓨팅(cognitive computing)이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발전한 것이다. 물리적 작업만이 아니라 정신적 작업에서까지도 디지털 자동화가 인간 삶의 기본 환경을 구축하게 된 것이다.
인공지능의 놀라운 발전과 관련하여 주로 인간 일자리가 사라진다는 분석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자칫 인공지능 대 인간지능이라는 대립 구도 속에서 문제의 초점을 흐릴 수 있다. 인공지능이 저숙련 노동자뿐 아니라 고숙련 전문 노동자의 일자리까지 대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인공지능 수준 이하의 일과 인공지능 수준 이상의 일로 인간의 자리가 재배치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노동에 대한 새로운 가치평가나 일의 재발명을 요구한다. 또한, 인공지능으로 자동화된 대부분의 일들에서 인간은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인 일이나 직업적인 일에서 이러한 인공지능 전문가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면, 그것은 자료를 찾고 판단을 내리는 일에서 우리의 지성적 능력을 훈련할 기회를 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박승억, 2016, p. 88). 요컨대, 인공지능 기반 자동화 사회의 전면화는 노동으로부터 탈-노동으로 삶의 패러다임이 전환되고 있다는 것, 이에 따라 인간의 일과 사고 능력을 갱신하며 삶의 방식을 재발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또한 노동 생산성과 전문성 중심의 교육으로부터, 자동화된 기술 환경을 토대로 인간다운 삶의 기예를 키우는 가장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자유교양 중심의 교육으로 전환되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공지능은 인간지능의 발명이며 결국 인간지능의 자동화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할 것이라는 SF적 상상력보다는, 인공지능이 노동의 주체가 되어 생산성을 향상시킬 때, 인공지능의 자동성을 토대로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삶을 재조정하고 일의 가치를 재창출할 것인지, 인공지능과 더불어 인간은 과연 어디로 나아가고자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인공지능 자동화는 과연 노동 착취를 개선하고 더 많은 자유 시간을 제공하여 인간적 삶의 즐거움을 누리고 사회정치적 참여를 활성화하는 데 기여할 것인가? 인공지능이 야기하는 고용의 위기와 노동의 종말을 인간다운 삶의 재발명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까? 자동화로 인한 무사유성과 탈전문성을 어떻게 새로운 앎의 생성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자동화 환경의 구축으로 인간의 노동과 지식의 가치가 달라지는 지능 자동화 시대에 요구되는 탈-노동의 의미와 자유교양의 가치에 대해 논증하고자 한다. 특히 시몽동, 들뢰즈, 스티글러로 이어지는 프랑스 기술철학의 관점에서 디지털 정보기술과 자동화 사회의 본질 및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살펴보고, 이를 토대로 인공지능과 더불어 도래하게 될 탈-노동 사회의 새로운 삶의 기예로서 교양교육의 중요성을 밝혀보고자 한다.

2. 자동 기계의 신화를 넘어서: 기술과 인간의 관계

시몽동은 자동 기계의 신화를 비판한다. “인간을 배제하면서 생명체를 흉내내는 순수한 자동성은 하나의 신화이며, 가능한 가장 높은 수준의 기술성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몽땅 기계들로 이루어진 기계란 없다”(시몽동, 1958/2011, p. 385). 그에 따르면 기술적 대상은 ‘추상적인 양태(구성 요소들의 부정합적인 조합과 분리된 기능들)’에서 점차 ‘구체적인 양태(구성 요소들의 상호 협력적이고 다기능적인 융합)’로 진화하는데, 구체화되면서 개별화될수록 자기-조절작용인 자동성이 강화된다. 이때 자동성이란 사이버네틱스적 의미에서 ‘정보 피드백을 통한 자기-조절작용으로 항상성을 유지하는 시스템’의 상태를 말한다. 기계들은 다양한 정도들에서 자동성을 구현할 수 있지만, 인간의 개입이 전혀 없는 ‘완전 자동화’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기계 작동의 결과는 내부 프로그램과 외부 정보의 관계 조절에 의해 산출되는 것인데, 기계가 아무리 완벽하게 자동화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런 조절은 오로지 기계 자신만으로는 실행될 수 없다. 왜냐하면 외부와의 관계에서 문제를 인지하고 문제 해결에 적합한 정보를 포착하는 의미작용 자체를 기계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시몽동은 ‘정보’를 말 그대로 ‘형태를 만드는(in- form)’ 것, 즉 시스템에 전송되는 데이터나 신호가 아니라 시스템의 변환(transduction)을 촉발하는 의미작용으로 이해한다. 즉 정보의 가치는 시스템의 항상성 유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왼쪽 각막 이미지와 오른쪽 각막 이미지 사이의 불균등성을 양자를 포괄하는 제3의 차원에서 하나의 시각 이미지로 해소하듯이, 외부 환경과의 관계에서 시스템에 제기된 문제, 즉 양립불가능하고 불일치하는 것들의 갈등을 새로운 구조화의 방식으로 해소하는 변환 과정에 있다(김재희, 2020).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잠재성을 현실화하는 자기-변환 능력은 생명체의 것이다. 생명체의 잠재성은 개체적 집단적 과거의 축적으로서 현재의 형태를 만들어 온 삶의 시간성 그 자체다. 지금까지의 기계는 바로 이러한 시간성을 갖지 못했다. 기계는 살지 않기 때문이다. 성장하고 노화하며 끊임없이 형태가 달라지는 생명체와 달리, 스스로 변화할 수 없는 기계에게는 잠재성이 아니라 이미 현실화된 데이터들과 데이터들의 조합이 있을 뿐이다. 물론 최근 현실화되고 있는 알파고나 ChatGPT와 같은 인공지능은 기존의 기계와는 다른 양상과 가능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들은 학습하는 기계이고, 학습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산출물로부터 피드백을 받아 이후의 산출물을 변화시킬 수 있는 역량을 갖는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두뇌 신경망을 본떠 알고리즘과 연산장치를 켜켜이 쌓아 만든 인공신경망인 심층 학습 기계(Deep Learning Machine)는 오류 역전파 방법을 사용해 신경망의 입출력 경로를 개선하여 구조화되지 않은 데이터에 대해서까지도 지속적으로 향상된 결과물을 내놓는다.
그렇지만 인간지능과 인공지능 사이에는 여전히 간극이 존재한다. 인공지능과 인간지능을 ‘정보 처리’뿐 아니라 ‘정보 생성’에서도 동일시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은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소위 데이터를 처리하는 유연한 ‘변환기(transducer)’로 기능할 수는 있다. 하지만,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것, 즉 수행해야 할 과제나 목적을 스스로 설정하는 것, 그리고 이를 해결하는 데 유의미한 정보를 통해 다른 구조나 형태로 자기 자신을 변환하는 것은 여전히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생명체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자동 기계는 자신의 행동과 미리 설정된 목적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점차로 좁히면서 수렴하는 방식으로 조건들 전체에 적응하는 것뿐이고 행동하는 도중에 목적을 발견하거나 발명하지는 않는다”(시몽동, 1958/2011, p. 303). 시몽동에 따르면, “로봇이라는 종(種)은 없다”(시몽동, 1958/2011, p. 72). 정보철학자 플로리디(Floridi, 2023)는 최근 등장한 ChatGPT를 ‘지능 없는 행위자’로 규정한다. 그것은 텍스트에 대한 이해력, 참과 거짓에 대한 구분, 논리적 추론 능력 등이 없으며, 대규모언어모델(LLM)에 기초하여 검색 엔진의 자동 완성 기능의 성공률을 더 높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환각(hallucination; 거짓말을 참말처럼 지어내는 것)’과 같은 한계를 잘 인식하고 사용한다면 인간의 작업에 유용한 도구로 활용될 수는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인공지능은 자율적인 사고 능력을 지닌 지능이 아니다. 이세돌이 대결했던 알파고는 하나의 독립적 개체가 아니라 컴퓨터-빅데이터-프로그램매니저-엔지니어들로 구성된 집합체였다. 바둑의 묘미를 알고 경기 후 승리의 기쁨을 누린 것은 알파고가 아니라 오직 인간들뿐이었다. 물론 산업형이든 생성형이든 인공지능은 인간의 작업 가운데 일반적이고 표준적인 작업을 대신함으로써 비용과 시간을 절약하고 효율성과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다. 또한 인류가 그동안 축적해온 데이터와 정보를 소수의 전문가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 모두가 응용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확산하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해야 할 정보 처리 작업을 자동화하는 도구이지, 지능을 갖춘 ‘자율적 존재’는 아니다.
통상 칸트적 의미에서 ‘자율성(Autonomy)’은 외부의 명령과 독립적으로 스스로 규칙을 정하고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다. 자율적인 존재는 자신의 의지나 내적 동기를 가지고 행동하고 결정할 수 있다. 반면 ‘자동성(Automation)’은 외부에서 주어진 지침에 따라 사전에 설정된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다. 가령, ‘자율주행차’는 사전에 설정된 주행 목적에 맞게 주변 환경에서 장애물을 식별하는 능력을 향상시켜 나가지만 주행의 목적을 중간에 스스로 바꾸거나 결정할 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사실상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자동적인 것’이다. 아무리 고도화된 자동성이라 할지라도 자동성과 자율성의 본성상 차이를 넘어설 수는 없다. 인공지능은 ‘어떻게(How)’ 해야 하는지는 알지만 ‘왜(Why)’ 해야 하는지는 알지도 묻지도 않는다.
시몽동은 자동성과 혼동될 수 없는 자율성의 근거를 생명적 변환성에서 찾은 것이다. 그에 따르자면, 기계의 자동화된 작업에는 반드시 인간 존재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겉보기와는 달리, 인간을 가장 덜 대체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자동적인 기계다. 이 자동 기계 안에 존재하는 조절 기능이 진행의 가변성이나 일할 때의 작동의 적용가능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자기-조절작용을 갖는 로봇들에 대한 아주 초보적인 열광은 바로 그 기계들이 인간을 가장 필요로 하는 것들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든다. 다른 기계들이 인간을 단지 보조자나 조직자로서만 필요로 하는 반면에, 자기-조절작용 기계들은 인간을 기술자로서, 즉 기계에 연합되어 있는 것으로서 필요로 한다”(시몽동, 1958/2011, pp. 180-181). 시몽동에게 고도의 기술성을 갖는 기계는 완벽하게 닫힌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자동 기계가 아니라, 외부 정보에 대한 감수성인 ‘비결정의 여지’를 지니고 있는 ‘열린 기계’이다. 이 비결정성으로 인해 다른 기계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고 새로운 기술적 앙상블을 구성할 수 있다. 인공지능의 향상 가능한 학습 능력도 이러한 비결정성의 여지에 근거할 것이다. 그러나 그 비결정성에 개입하여 내부 프로그램을 조정하고 다른 기계들과의 새로운 배치를 창안할 수 있는 정보생성자는 어디까지나 인간이다. 따라서 열린 기계들의 앙상블은 인간을 상설 조직자로, 기계들을 서로서로 연결시켜 주는 살아 있는 통역자로 상정할 수밖에 없다. 인공지능과의 관계 역시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3. 정보네트워크 사회의 탈-노동 기술문화

시몽동(1958/2011)은 기술성의 본질적 목표를 자동성에 두지 않는다. 자동성은 노동 도구의 편리함과 생산성 향상에 기여하는 것이고, 기술성은 노동과 경제 프레임을 넘어서는 존재론적 차원에서 근원적 실재의 생성 역량과 연결되는 것이다. 시몽동은 기술성의 진화에서, 그가 전개체적 실재(preindividual reality)라 부르는 자연의 근원적인 퍼텐셜리티(potentiality)가 기술적 대상들을 통해 운반되면서 인간과 세계의 관계 양상이 역사적으로 변화된다는 점을 포착한다.
18세기는 기술적 요소(연장), 19세기는 기술적 개체(증기기관), 20세기는 기술적 앙상블(정보네트워크)의 발달에 상응한다. 18세기 수공업적 생산양식에서는 자연과 인간이 연장들을 매개로 연속적인 관계를 맺었다면, 19세기 산업적 양식에서는 기술적 대상이 자동화된 개체가 되면서 자연과 인간 사이의 연속성이 끊어진다. 자동 기계 앞에 선 인간은 더는 연장의 운반자가 아니며 손에 잡힌 연장으로 느끼던 자연과의 직접적 접촉도 상실한다. 한 사람이 다 할 수 있었던 작업 기능도 개발자, 생산자, 사용자, 관리자 등으로 분업화-전문화하면서 인간들 사이의 관계조차 불연속적으로 변한다. 20세기의 후기-산업적 양식에서는 자동화된 기술적 개체와 노동하는 인간 개체 사이의 이러한 갈등을 재조정해야 할 과제를 갖는다. 자동 기계의 도입이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낳으면서 동시에 소외를 낳았기에 자연-기술-인간 사이의 관계를 재연결하여 소외(불연속)을 극복할 새로운 관계 양식이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시몽동은 20세기 초 등장한 정보기술이 산업 사회에서 분리되었던 자연-기계-인간의 연속적 관계를 회복할 것이라 기대했다. 그리고 노동하는 인간 개체의 역할을 자동화된 기술적 개체가 대체할 때, 인간이 기술적 개체의 하위 역할(요소들 돌봄)과 상위 역할(앙상블 관리)로 밀려나는 바로 그 시점이 ‘노동’ 패러다임에서 ‘기술적 활동’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할 시기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노동’은 기술적 대상과 인간의 관계가 신체적 접속을 통해 연속성을 지니며 인간이 연장의 운반자로서 기술적 개체의 역할을 대신하던 장인적 양식에서나 적합한 것이고, ‘기술적 활동’은 양립불가능하고 불일치하는 것들 사이에서 문제를 변환적으로 해결하며 새로운 관계 방식을 발명하는 것으로서 노동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수공업적 시대의 기술적 요소들로부터, 열역학적 에너지 시대의 기술적 개체들을 거쳐, 정보 기술 시대의 기술적 앙상블에 이르는 기술성의 진화는, 시몽동에게는 기술적 대상을 매개로 한 인간의 기술적 활동이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가는 과정이다. 시몽동은 정보기술이야말로 기계와 인간 사이의 공통된 상징체계 수립을 통해서 인간과 기계의 협력 작용을 가능하게 하고, 사회 시스템의 목적성과 조직화를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혁신할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개체초월적(transindividual) 관계양식1)을 정보네트워크를 통해 생성하게 할 것이라고 낙관했다(김재희, 2017, 4장). 장인의 작업장과 산업 공장을 변환적으로 계승할 후기-산업 사회의 실험실에서는, 마치 오늘날의 메이커 활동을 예견하듯, ‘지능적이면서도 솜씨 좋은’ 기술자들(생산자-사용자-경영자의 역량을 융합한 발명가)의 자유로운 기술적 활동이, 장인적 인식과 엔지니어적 인식 사이의 단절도 없고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위계적 차별도 사라진 ‘기술 문화’ 속에서 실현될 것이라고도 보았다(Kim, 2019).
그런데 여기서 기술 자동화와 노동의 관계에 대한 시몽동 사유의 한계를 짚고 갈 필요가 있다. 시몽동은 1989년 팀 버너스리(Tim Berners-Lee)가 월드와이드웹(WWW)을 발명할 때 생을 마감했다. 즉 정보기술이 실현할 것이라 예견한 기술적 앙상블의 수준에서, 인터넷, 빅데이터, 인공지능에 이르는 정보네트워크 앙상블이 마침내 인간의 연합환경으로 자동화되었을 때 제기된 문제 상황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가령 인터넷은 인류의 분산된 지식을 모두가 공유하고 이용할 수 있도록 연결성을 실현하여 산업 사회의 “정보의 동질성 결여”(시몽동, 1958/2011, p. 148)를 극복하였지만,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으로 강화된 21세기 디지털 네트워크는 오히려 자동화 시스템에 개체들을 종속시키고 파편화시키면서 새로운 개체초월적 관계를 방해하는 불연속을 낳고 있다. 시몽동은 사실상 ‘기술적 개체’의 자동화 수준에서 기계와 인간의 갈등에 주목했던 것이고, 오늘날 ‘기술적 앙상블’의 자동화 문제는 후대로 남겨둔 셈이다.
그럼에도, 시몽동은 인간지능과 인공지능이 상호협력적인 기술적 관계를 맺으며 함께 사회를 변형시켜나가는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시몽동은 범주횡단적 지식에 가치를 부여하는 ‘기술적 정신’을 강조했다. 경계를 넘어서는 유비적 해석의 힘으로 실재의 상이한 질서들에서 ‘조작적 작동(operational functioning)’의 공통 모드를 발견하는 기술적 인지 도식은 “범주횡단적 지식(the transcategorical knowledge)”을 산출한다(Kim, 2019, p. 327). 가령, 데카르트적 기계주의가 ‘손실 없이 이동하기’라는 인지 도식을 도르래 기계의 역학적 운동에서 논리적 연역 추론까지 적용한 경우라면, 사이버네틱스는 ‘목적성에 능동적으로 적응하는 피드백 조절 작동’이라는 인지 도식을 자동조절 기계장치로부터 생명체의 행동 및 지리적 기상학적 현상에 이르기까지 적용한 범주횡단적 지식의 사례다. 오늘날 요구되는 융합적 사유의 가능성이 바로 이러한 범주횡단적 지식을 산출하는 기술적 정신에서 찾아질 수 있다. 기술적 합리성을 특징짓는 개방성과 범주횡단적 지식은 경제적 생산의 효율성에 복무하는 것이 아니라, 인지적 정서적 사회적 접속들의 증폭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기여한다. 기술적 활동은 인간과 기술적 대상 사이의 관계만이 아니라, 기술적 대상들을 통해 소통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또한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노동 생산성의 프레임을 벗어나 기술적 본질에서 사유되고 발명된 기술적 대상은 산업적 양식에서의 고정자본과 같은 기계적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하위 부품들의 탈착가능성과 목적성의 실현에 맞추어 요소들의 재배치를 통해 언제든 변환될 수 있는 준안정적인 열린 기계이다. 이러한 기술적 대상들을 통해서 새로운 개체초월적 관계의 생성이 가능하다는 시몽동의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개인과 사회는 결코 분리된 대상이 아니다. 심리적 개체는 의식적 차원에서의 분리와 달리 무의식적인 정서적 차원에서 항상 이미 개체초월적으로 집단적 존재와 분리불가능하게 연결되어 있다. 심리적-집단적 개체화를 가능하게 하는 개체초월적 관계는 기술적 대상의 작동 및 조직화 도식에 내재되어 있다. 기술적 대상은 “개체초월적 관계의 매체이자 상징”이며 기술적 대상의 진화는 새로운 형태의 개체초월적 관계를 구성한다(시몽동, 1958/ 2011, p. 354). 바로 이런 관점에서 기술 발달과 사회의 관계, 즉 인공지능 네트워크 환경의 자동화가 어떠한 심리-집단적 개체화를 새롭게 구성하는지 분석해야 한다.

4. 자동화 사회의 알고리즘 통치성과 앎의 프롤레타리아화

20세기에서 21세기로 이행하는 시기, 들뢰즈(1995)는 컴퓨터와 정보기술이 ‘통제 사회’를 낳을 것이라 진단한다. 시몽동이 정보기술에서 소통과 연결의 긍정적 효과를 기대했다면, 들뢰즈는 정반대로 사회적 통제/제어(control)의 부정적 기능에 주목한 것이다. 통제 사회는 푸코가 분석했던 규율 사회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 할 수 있다.
규율 사회(Disciplinary Society)는 학교, 병원, 공장, 감옥 등 각각의 판옵티콘 장치들 안에서 신체에 규율을 각인시킴으로써 사회 시스템과 권력에 스스로 순응하는 근대적 주체들을 생산한다. 반면, 통제 사회(Control Society)는 모든 활동을 각각의 공간으로 분리시켜 규율화하지 않고 아이디와 패스워드로 정보 접근을 제어하면서 주체를 연속적으로 변조(modulation)한다. “통제의 디지털 언어는 정보에 대한 접근을 허용하거나 차단하는 코드들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더 이상 개체 아니면 집단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개체는 가분체가 되고, 집단은 샘플, 데이터, 시장, 은행이 된다”(Deleuze, 1995, p. 180). 규율 사회에서 적어도 함께 집단적 행동을 구성할 수 있었던 ‘개체(individual, 불가분체)’들이 통제 사회에서는 탈-개체화되어 집단적 저항력을 잃어버린 ‘가분체들(dividuals)’로 변해버린다. 가분체들은 더 이상 나눠질 수 없는 독특한 실체로서의 개체가 아니라, 데이터 마이닝 기술과 검색 엔진과 컴퓨터 프로파일링의 추상적인 디지털 산물이다. 그들은 광고, 보험회사, 여론 조사 등이 요구하는 디지털 신상 정보들이며, 특정 데이터를 추출하려는 국가나 기업의 관점에 따라 무한히 다르게 분석되고 구성될 수 있는 데이터 덩어리이다. 가분체들의 집단은 각자의 디지털 환경에 갇힌 부족들처럼 서로간의 소통 없이 무관심하게 존재한다. 들뢰즈의 통제 사회는 빅데이터 시대에 개체와 집단이 데이터화하면서 해체되는 양상을 탁월하게 보여준다.
스티글러(2016/2019)는 21세기의 인터넷, 빅데이터, 인공지능이 망라된 현 단계 디지털 기술이 시몽동의 후기-산업 사회의 낙관적 전망을 비껴갈 뿐만 아니라, 들뢰즈의 통제 사회보다 훨씬 더 강화된 초-통제의 ‘자동 사회(Auto- matic Society)’를 구축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디지털 대전환’으로 표현되는 디지털 자동화 과정의 전면화는 고된 노동을 스마트하게 처리하는 효율적인 ‘자동 사회’의 화려함 이면에서 사실상 24/7 자본주의에 복무하는 빅데이터 기반의 알고리즘 통치성(algorithmic governmentality)을 실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스티글러는 디지털 기술의 파르마콘(Pharmakon: 독이면서 치료약) 특성과 자동화 문제의 심각성을 깊이 있게 고려하지 못했다고 시몽동을 비판한다. “시몽동은 파르마콜로지의 문제를 던진 적 없고, 자동성 문제와 자동화의 결과를 크게 평가절하했다. 자동화가 지금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 그리고 기술적 자동장치를 통합 중인데, 이 통합은 디지털 기억술에 의해 심리적 집단적 개체를 해체 중이다”(스티글러, 2016/ 2019, p. 188). 자본과 권력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은 기술적 합리성으로는 자동화된 기술적 환경의 치명적인 파르마콘을 사유하기 어렵다. 디지털 자동화 기술은 시몽동이 기대했던 새로운 개체초월적 집단화의 생성을 차단하고 기술적 정신에 기초한 기술적 문화의 실현보다 오히려 정신의 프롤레타리아화를 더욱 가속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티글러(2016/2019)는 “만약 자동화가 모든 종류의 실천을 우리 손에서 빼앗아가는 것이 사실이라면, 자동화는 철저하게 우리를 멍청이로 만들고 있는 과정인 셈이다”라고 신랄하게 주장한다(p. 321). 그에 따르면, 19세기 기계적 산업 사회의 자동 기계는 노동자의 신체에 기입된 ‘할 줄 앎’을 박탈하며 생존(subsistence)의 조건을 프롤레타리아화했다. 기계적 자동화는 숙련 노동에서 배제된 노동자, 자동 기계에게 지식을 빼앗기고, 노동의 노하우를 상실한 인간을 낳았다. 또한, 포드주의로 대표되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자동화 시스템 구축과 더불어 등장한 20세기 아날로그 매스미디어 기술은 ‘강압적이지 않은 변조’의 방식으로, 즉 텔레비전이 소비자들에게 행한 ‘삶에 대한 주의와 욕망의 상업적 포획’을 통해서, 자기 결정능력과 개성적 삶을 ‘살아갈 줄 앎’을 빼앗으며 실존(exsistence)의 조건들을 프롤레타리아화했다. 소비주의에 매몰되어 감성과 정념이 빈곤해짐으로써 삶의 노하우를 상실한 인간이 산출된 것이다. 이제 21세기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의 디지털 기술은 완전 자동화를 구축해가면서 과학적, 도덕적, 미학적, 정치적 숙고의 사유 능력을 총체적으로 프롤레타리아화하고 있다. 과학적 방법과 이론화의 정신적 능력이 자동화된 예측과 통계로 대체되며 ‘이론적 앎’과 이를 통한 공동-존립(con-sistence)의 조건들이 해체되기에 이른다. 고성능컴퓨터처리로 실시간에 분석가능한 기가바이트 데이터로 이루어진 정보는 더는 어떤 이론도 이론가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디지털 자동장치는 사유와 행위의 모델이 될 이론을 구축하는 정신적 가치의 몰락을 초래하고 있다.
스티글러에 따르자면, 디지털 기술의 알고리즘은 정서적 차원의 연대와 의미 공유를 통해 시몽동적 의미의 개체초월적 집단을 생성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체들을 데이터집합의 가분체들로 분해하고, 미시적 차원에서 무의식적 자동성을 지배하며 그 형성을 막는다. 개체화는, 시몽동의 테제로서, 불일치하고 양립불가능한 것들 사이의 갈등을 제3의 차원에서 변환적으로 해결할 때 생성되는 개체발생을 말한다. 시몽동은 심리적 개체와 집단적 개체의 분리불가능성은 전개체적 실재라는 자연의 힘이 개체초월적 관계로 이들을 묶고 있기 때문이며 기술은 그 매체로 기능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스티글러는 전개체적인 것을 더는 자연과 동일시할 수 없으며 기술을 포함한 문화와 역사의 산물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전개체적 자연 환경들이 이미 기술공학적-산업적으로 변형되어 있고, 인간의 상징적⋅정신적⋅운동적 기능들은 다양한 기술적 보철물들을 통해 외재화되며, 이 기술공학적 보철물들이 인간 생체와 정신을 제어하고 조절하기 때문이다. 심리적-집단적 개체화는 이들보다 먼저 이미 존재하는 공통의 기술적 환경에 접속해야 구성될 수 있다. 즉 “개체화는 이중이 아니라 삼중이다. 즉 심리적, 집단적, 기술적인 이 각각의 개체화는 다른 것들이 없이는 생각될 수가 없다. 그것들은 세 갈래의 변환적 관계 속에 있다” (Stiegler, 2014, p. 70). 스티글러는 심리적-집단적-기술적 개체화가 서로를 ‘가로지르면서 넘어가는(trans-)’ 하나의 시스템으로 동시에 구성되는 것을 ‘관개체화(trans- individuation)’2)로 정의한다. 심리적 개인과 기술적 인공물과 사회적 제도 등이 하나로 얽혀 있는 관개체화는 특정 사회와 문화를 특징짓는다. 그런데 디지털 환경은 데이터 차원으로 획일화된 가분체들의 몰개성적이고 분열된 집단을 산출하면서 관개체화의 생성 회로를 차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스티글러(2016/2019)는 “알고리즘적 통치성은 집단적 규모로 생성된 자동적 예지의 테크놀로지이다. 그것은 모든 우둘두툴함, 예상되지 않은 모든 것, 비개연적인 모든 것을 제거해버린다”고 주장한다(p. 314).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에 기초한 알고리즘 통치성은, 신경 마케팅과 신경 경제학의 방식으로, 디지털 기술을 통해 무의식적 자동적 수준에 침투하여 의식적 수준의 의사결정 능력을 지배하면서 칸트적 의미의 지성(Verstand)에 해당하는 우리의 인지 능력을 체계적으로 액체화한다. 인공지능에 의존하는 인간지능의 인식능력은 감성(감각적 경험)으로부터 분리된 알고리즘의 분석력으로 대체되면서 자동화된다. 정보는 신선 상품처럼 소비되며 알고리즘이 처리하는 데이터로 환원될 뿐, 항구적인 반복가능성을 갖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식을 형성하지 못한다. 통상 정보는 데이터가 의미 있는 형태로 구성되고 조직화되어 있는 상태(기사, 보고서, 통계, 사진 등)를 가리킨다면, 지식은 이 정보를 분석, 이해, 해석, 의미 부여하는 종합적 인지 과정을 통해 형성되며, 문제해결, 의사결정, 창의성 등의 능력과 관련된다. 스마트 마케팅과 인지컴퓨팅은 정보의 ‘선택’, ‘해석’, ‘결정’ 능력을 약화시키고, 계산될 수 없는 지성적 예지와 목적의식성을 자동 생산된 예측으로 대체한다. 디지털 환경은 파지와 예지의 종합 능력이 사라진 탈개체화된 가분체들을 산출한다. 가분체들의 인공적 집단은 클라우드소싱과 빅데이터 경제의 원천이 될 뿐 새로운 가치와 문화를 생성할 개체초월적 관계를 창출하지는 못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개인화된 미디어와 온라인 네트워크 안에서 ‘홀로 함께’(Together Alone)’ 움직이는 프로필 주체들은 지식 생성의 주체라기보다 데이터를 소비하면서 동시에 데이터를 생산하는 가분체들로서 자동화 시스템의 주요 자원으로 기능한다. 프로필 주체는 조회, 공감 표시, 팔로우, 댓글 남기기, 친구 맺기, 크라우드 펀딩 참여, 후원, 정기 구독 등 활발하게 움직이지만 이러한 수행은 대개 인공지능 추천 알고리즘에 따라 콘텐츠를 이용하는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터넷 검색엔진이나 모바일 앱에서의 문장 자동완성 기능, ChatGPT나 Bing과 같은 생성 인공지능의 글쓰기는 언어적 상상력을 평균치 데이터의 수준으로 하향평준화하고 기술-논리적 도식에 따라 개성적 차이와 불일치를 제거함으로써 이에 기초하는 관개체화의 새로운 생성을 막을 수 있다. 데이터의 알고리즘 편향성과 인지 편향을 강화하는 유튜브와 소셜네트워크 역시 독특성과 차이들을 지우며 평균적 상태로 점차 엔트로피화한다.

5. 탈-노동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조건들

그러나 스티글러는 자동화로 인한 앎의 프롤레타리아화가 근본적으로 극복 불가능한 사태는 아니라고 진단한다. 왜냐하면 기술은 본질적으로 파르마콘이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기술적 인공물이 인간 기억의 물질적 외재화이자 체외기관화의 산물이라고 이해한다. 축적된 과거 경험의 기술적 외재화와 체외기관화는 인간지능의 특징이다. 기억기술적 환경은 단기적 충동의 에너지를 장기적 욕망의 에너지로 승화시키며 충동의 만족을 지연시킬 줄 아는 인간화를 가능하게 한다. 인간의 지성적 삶은 이러한 체외기관들의 장착과 더불어 발달한다. 그것들은 인간 존재의 필수불가결한 보철물로서 인간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약)이면서 동시에 불가능하게 하는 조건(독)’으로 작동하는 파르마콘이다(김재희, 2021). 디지털 기술 역시 파르마콘으로서 약인 동시에 독이다. 마케팅이라는 목적과 단기적 이윤만을 위해 이용된다면 그것은 서서히 우리 자신의 능력과 앎, 즉 할-줄-앎(생존)과 살-줄-앎(실존)을 조직적으로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보조수단이 될 것이다(Stiegler & Kyrou, 2015/2018, p. 23).
따라서 스티글러는 디지털 자동화 기술의 치명적인 독성을 치료법으로 변환하여 정신의 체계적 어리석음을 낳는 자동화 사회를 ‘위기’에서 ‘기회’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파르마콘의 유해한 논리를 뒤집음으로써 탈프롤레타리아화에 기반한 자동화 사회를 구성하는 새로운 초-산업 시대를 불러와야 한다”(스티글러, 2016/2019, p. 133). 스티글러는 시몽동이 전망했던 후기-산업 사회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디지털 자동화 기술을 탈-프롤레타리아화와 탈-자동화의 도구로 재발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자동화를 토대로 탈-자동화된 문화를 창설하기 위해선, 즉 불가능의 조건을 가능의 조건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지식’이 요구된다. 자동화로 해체되었던 실존의 새로운 형태(살아갈 줄 앎), 생존의 새로운 조건(할 줄 앎), 공동-존립의 이론적 기획(함께 살아갈 줄 앎)을 구성할 수 있게 하는 지식의 혁신이 필요하다. 이 새로운 지식은 들뢰즈가 통제 사회에 대한 저항가능성으로 본 ‘예술(Art)’의 차원을 넘어서는 ‘기예(Ars)’의 발명을 의미한다(Stiegler, 2016). ‘기예’는 예술과 기술 모두에 요구되는 숙련된 노하우, 테크닉, 솜씨 등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익히고 체득해야 하는 앎이다. 장인 정신에서 엿볼 수 있는 이 기예는 기술 자동화 이후에 다시, 기술적 인공물들을 독에서 약으로 전환하여 사용함으로써 자신과 타자의 삶을 돌보고 가꾸어가는 기예로 재발명되어야 한다. 가령 인터넷은 이윤추구에 포획된 ‘계산(computation)’의 도구(독)로 머무를 수도 있지만 지식공유에 기반한 ‘돌봄(care)’의 도구(약)로 전환될 수도 있다(김재희, 2021, p. 47).
자동화로 인한 위기를 탈-자동화의 기회로 전환하는 이런 기예의 발명은 무엇보다 자동화된 알고리즘이 상업적으로 포획하고 있는 ‘삶에 대한 주의(attention)’를 다시 삶과 세상을 돌보는 방향으로 되돌리는 것에 기초한다. 삶에 대한 주의는 현재의 지각과 과거의 기억을 종합하여 미래의 행위를 기획하는 인간지성의 본질적 특징이다. ‘주의’는 본래 라틴어 ‘attendere(주의를 돌리다, 환자에게 주의를 기울이다, 그의 병을 돌보다)’에서 파생된 단어다. ‘주의를 기울이다(paying attention)’는 ‘돌보다(taking care)’와 동의어이다. 대상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단순히 대상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해 ‘사려 깊은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대상의 어디를 어떤 방식으로 보고 다루어야 할지 신중하고 사려 깊게 대하는 ‘주의 깊은 태도’는 일종의 문화적 태도로서 교육을 통해 형성되어야만 하는 사회적인 앎이다. 다시 말해, ‘주의’를 익히게 하는 ‘교육’은 곧 심리적 개체로서의 나와 사회적 개체로서의 집단을 동시에 형성해나가는 과정의 핵심이다. 심리적 개체는 끊임없이 변형되는 과정 속에 있으며 그 자체로 안정적 상태나 동일자가 아니다. 심리적 개체화의 과정은 집단적 개체화의 과정 속에 기입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세상에 주의하는 방식들이 정교해지고 안정화되는 것은 교육을 통해 집단적 경험을 배우면서, 세대들의 축적된 경험을 유산으로 받으면서, 관개체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삶을 꾸려 나가는데 필요한 노하우나 인지적이고 이론적인 지식들은 사실상 ‘주의’의 여러 형태들이다. 공부를 하고 지식을 얻으려면, 글을 읽고 쓸 줄 알아야 하는데, 이는 곧 문자, 책, 펜, 노트북, 컴퓨터 자판 등 글쓰기와 글쓰기의 기술적 도구들에 대한 특정한 ‘주의’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기, 글쓰기, 기술적 도구 사용하기 등 수많은 방식으로 사물을 다루는 법, 즉 돌보는 법을 배우는 것은 체외기관화가 인류의 초기부터 요구하던 실천적 앎이자 ‘기예’이다. 문화라는 것은 개별 경험이 집단화되는 과정―심리사회적 기억이 기술적으로 외재화되고 매체화되어 관개체적으로 전승되는 과정―에서 발명된 ‘주의 형태들의 세대 간 전송’에 다름 아니다. 모든 사회들은 주의의 형태들, 지식의 유형들, 관심과 돌봄의 체계들, 자신과 타자를 돌보기 위한 기술의 유형들, 문화적 유형들에 의해 특징지어진다(김재희, 2021, pp. 38-40). 기예는 실재에 대한 순수 관조적 인식이 아니라 삶에 대한 주의에 기초한 실용적 앎이다. 스티글러가 말하는 기예의 발명은 자동화 사회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동화된 기술 환경을 토대로, 자동화가 벌어준 시간 속에서 다시 발명해야할 삶의 양식을 위한 새로운 지식이다.
나와 타자를 돌보는 ‘삶의 기예’를 새로이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또한 자동화로 가능해진 여유 시간을 ‘생각하는 시간’으로 재분배하는 작업, 즉 자동장치의 시간과 꿈의 시간 사이의 재배치가 필요하다. 자동화 사회의 24/7 자본주의는 잠 잘 시간도 꿈 꿀 시간도 주지 않으며 모든 시간을 생산성 향상에 쏟아붓는다. 그러나 “자동화로 얻은 시간은 탈자동화, 즉 네겐트로피 생산을 위한 새로운 능력에 투자되어야 한다”(스티글러, 2016/2019, p. 78). 인간지능이 인공지능 자동화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지성의 고차원적 특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시간, 즉 의미를 이해하고 생각하고 결정할 시간, 상상하고 꿈을 꾸며 발명할 수 있는 시간이 확보되어야 한다. 테크네의 본래적 힘이 바로 이 꿈을 실현하는 능력이다. 능률, 기능성, 속도, 계산의 우선성에 대항하여, 계산불가능하고 예측불가능하며 비개연적인 것(improbable)의 실현가능성과 그 기회를 확보해야 한다. 스티글러(2016/2019)는 자동화된 기계들로 인해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시간이 다음 노동을 위한 단순 휴식이나 실업 상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여가, 즉 ‘오티움(otium)’이나 ‘스콜레(schole)’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티움’은 라틴어로 한가함, 유유자적, 책을 읽고 사색하고 글을 쓰며 평화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품격 있는 여가를 의미한다. ‘스콜레’는 학교(school)의 어원으로서 일하지 않고 한가하게 공부하는 것을 뜻한다. 상업적으로 포획되어 있던 삶에 대한 주의를 되돌려 새로운 관개체화를 형성하는 지식, 즉 기술적 발명, 예술적 창조, 정치적 제도나 경제적 기획의 창안, 다양한 사회적 운동 등의 실천적 기예를 습득할 수 있는 시간을 자동화로부터 획득해야 한다. “프랑스어의 르아지르(loisir), 그리스어의 스콜레(schole), 라틴어의 오티움(otium)은 교양(Bildung)으로서의 자유를 의미한다. 노동의 부재, 즉 불가피하게 해야 하는 일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스티글러, 2016/2019, pp. 456-457) 르와지르, 스콜레, 오티움은 모두 한가한 자유 시간을 의미하지만 이는 단순히 노동하지 않는 휴식 시간이 아니다. 교양을 쌓는 시간, 즉 나와 공동체의 삶을 돌보는 데 필요한 기예들을 습득하고 꿈을 실현할 수 있게 하는 그런 자유 시간이다. 요컨대, 오티움과 스콜레는 자동화로 인해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시간을 문화적 유산의 상속과 새로운 가치 생산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삶의 기예를 갖추게 하는 자유 교양의 시간이다.
스티글러는 이러한 자유 시간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또한 ‘무관심의 경제’에서 ‘기여경제’로의 이행을 통해 노동의 가치를 재규정하는 작업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본다(2015/2018, 2016/2019). 그는 자동화가 야기한 ‘고용’의 위기를 오히려 고용에 종속되었던 진정한 ‘일(work)’의 가치를 되찾고 일의 역량을 새롭게 개발할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용의 종말은 노동의 탈프롤레타리아화로 그리고 그러한 의미에서 노동의 ‘재발명’으로 이어질 수 있고 이어져야 한다”(스티글러, 2016/2019, p. 477). 단지 급여를 받기 위해 어딘가에 소속되어 노동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고유성과 독특성을 실현하는 활동이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고유한 삶을 실현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계기로 기술 자동화를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과 고용 중심의 ‘무관심의 경제’가 경쟁과 소비를 가속화하고 냉혹한 자본 논리 외에 나와 타인의 삶에 대한 어떠한 관심도 갖지 못하게 한다면, ‘기여경제’는 자신의 앎을 나누고 그 혜택을 함께 누리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지향할 수 있게 한다. “기여경제란 어떻게 살고, 행동하고, 세계를 이해할지, 각각의 방식을 재구성하고, 그리하여 새로운 돌봄의 시대를 형성하는 경제를 말한다”(스티글러, 2016/2019, p. 119). 기여경제는 소비가치가 아닌 실용가치, 즉 자신의 잠재성을 실현하여 지속적으로 공유되고 계승되면서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앎을 창출하는 일을 할 수 있게 한다. 요컨대, 스티글러는 더 이상 고용된 노동이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일을 ‘할 줄 알고’, 기술적 도구들을 ‘사용할 줄 알며’, 성취의 기쁨과 앎을 공유하면서 ‘더불어 살아갈 줄 아는’ 삶을 실현하는데 기여하는 자유 교양의 시간과 탈-노동의 일에 진정한 가치를 부여하자고 주장한다.

6. 나가며: 교양교육의 가치, 인간다운 삶의 기예 재발명

아렌트(1958/2019)는 인간적 삶의 근본 조건을 노동(labor), 일(work), 활동(action)의 세 가지로 구분한다. ‘노동’은 생명체로서의 인간이 생물학적인 삶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다. 삼시 세끼 챙겨 먹어야 하는 것처럼 매일 소비되지만 반복할 수밖에 없는 수고롭고 힘겨운 일이 노동이다. 그러나 인간은 노동만 하며 살지는 않는다. 인간은 ‘노동’과는 다른 ‘일’과 ‘활동’을 할 줄 안다. ‘일’은 지속가능하고 유의미한 인공적 생산물들을 만들어 문화적 세계를 창출하는 것이라면, ‘활동’은 함께 사는 삶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언어를 통해 서로의 관점과 의견을 주고받으며 공적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일’과 ‘활동’은 ‘노동’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인간적 행위의 독특성과 창의성을 보여준다. 인간다운 삶은 노동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노동을 넘어선 ‘일’과 ‘활동’이 갖추어져야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의 모든 행위는 ‘노동’으로 규정된다. 육체노동, 정신노동, 인지노동, 감정노동, 창작노동 등 계량화하기 어려운 정신적 작업이나 정서적 관계도 시간 단위의 노동량으로 촘촘히 계산해서 임금으로 그 대가를 지불한다. 산업혁명 이후 자동화된 기계적 공장 시스템을 갖춘 근대 산업 사회의 생산양식이 인간의 삶을 노동으로 집약시키는 데 성공하면서부터, 기술자동화에 따른 산업화가 발달할수록, 소비품을 대량 생산하는 ‘노동’ 앞에서 지속가능한 가치를 창출하는 문화예술적인 ‘일’도, 차이와 다양성으로부터 공적 의미를 길러내는 사회정치적 ‘활동’도 그 가치를 잃어간다. 인간 행위의 모든 결과물들은 노동 생산물과 마찬가지로 교환가치나 시장가치로 계산되며 일회용 상품처럼 소비된다. 시장 경쟁력이 얼마나 있는지, 생산성과 이익이 얼마나 창출되는지, 인간 행동의 모든 가치가 경제 논리에 매몰된다. 노동하지 않는 ‘자유 시간’조차 다음 노동을 위한 일시적 휴식이나 자동화 사회의 데이터 소비-생산에 복무한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의 자유인들은 비록 노예들의 노동을 토대로 얻게 된 것이긴 하지만 자유 시간을 공론장에서의 정치적 활동에 사용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노동하지 않으면 무능한 실업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인간이 되는 것이었다. 고용 아니면 실업이라는 양자택일 속에서 소비대상을 생산하는 노동만이 인간적 행동의 전부인양 생각하게 만드는 삶의 패러다임을 노동 이외의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는 탈-노동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업무를 보조하고 보완하는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인공지능은 대량의 데이터를 분석하고 패턴을 찾아내는 데에 능숙하며, 이를 통해 인간은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창조적인 과제와 더 복잡한 문제 해결에 집중할 수 있다. 인공지능이 인간이 하던 일을 자동화할 때, 자유 시간을 교양교육에 할애함으로써 인간지능의 창조적 생산력은 오히려 증가할 수 있다. 인공지능이 일부 표준적인 작업을 대체함으로써 인간은 새로운 기술과 도구에 대한 학습과 개발에 더 많은 시간과 자원을 할애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인간은 새로운 분야나 창업 등의 기회를 찾을 수 있으며, 이는 오히려 인간지능의 다양성과 창의성을 촉진할 수 있다. 인공지능 배후로 밀려난 인간노동의 저평가는 전문성과 노동 생산성 중심의 프레임에 입각해 인공지능의 노동과 인간의 노동을 비교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을 돕고 관리하는 인간의 일, 또는 인공지능을 활용한 더 창조적인 인간의 일에 인공지능보다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기술성의 진화가 인공지능과 더불어 자동화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생성 인공지능의 등장으로부터 인공일반지능(AGI, 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의 일상화에 이르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인공지능은 생산성 향상을 목표로 한 자동화 도구이다. 인간지능은 인공지능과 대결할 것이 아니라, 인공지능의 형태로 자동화된 인간지능의 역량을 다른 차원으로 업그레이드하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인간의 자율성은 자동성에 기초한다. 자율적인 사고와 행위능력의 결과로 얻게 된 경험과 지식들 중 기초적인 것들은 반복을 통해 ‘습관’의 형태로 자동화되고,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창의적인 사고와 새로운 작업은 이를 토대로 펼쳐진다. 감성, 지성, 이성, 직관, 상상력 등 종합적인 사유능력을 갖춘 인간지능은 축적된 앎을 기술적 대상의 형태로 발명함으로써 새로운 앎의 자동화된 토대로 활용한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노동을 대신할 때, 인간은 인공지능 자동화로 절약된 시간을 개인과 집단의 삶을 가꾸는 새로운 문화 창조와 공동체 혁신에 투여해야 한다.
기술의 본성에 근거한 시몽동의 기술정신과 기술문화는 인공지능과 경쟁하는 노동이 아니라 인공지능과 더불어 자신의 일과 공적 활동을 꾸려갈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존재 양식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또한 스티글러는 시몽동이 놓친 디지털 자동화로 인한 위기와 기회를 포착하고 새로운 앎과 일의 발명 조건을 분석함으로써 시몽동의 전망을 구체화한다. 이러한 기술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공지능과 더불어 인간지능이 자동화되는 이 시대에, 탈-노동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은 교양교육의 강화를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생성 인공지능의 자동화된 결과물을 평가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일이다. 단지 시장가치만이 아니라, 예술적 가치, 윤리적 가치, 공유가치, 기여가치 등 다양한 가치를 발굴하고 의미화하는 것은 더더욱 인간지능의 역할이다.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판단하는 작업은 감각적 인상이나 단순 경험의 수준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감각적 경험을 토대로 논리적이고 비판적인 추론과 상상력과 종합적인 숙고의 작업이 요구된다. 심리학자 키스 스타노비치(Keith Stanovich)와 리처드 웨스트(Richard West)의 이중시스템이론(Dual process theory)에 따르면, 인간의 사고는 자동적이고 즉각적으로 처리하는 빠른 “시스템 1”과 의식적이고 처리가 느린 “시스템 2”의 두 가지 모드로 이루어진다(카너먼, 2011/2012). 전자가 인상, 직관, 감정 등으로 즉각 반응하며 생각할 시간도 갖지 않고 판단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전자로 처리할 수 없는 복잡한 문제에 직면해 선택과 주의 집중 등 시간과 노력을 들여 생각하며 최종 판단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스템 2는 시스템 1의 잘못된 직관이나 편향된 감정을 못 알아채고, 이에 근거하여 잘못된 믿음이나 행동을 할 수 있다. 시스템 1의 그럴듯한 인상, 멋대로 이어붙인 이야기를 점검하지 않고 게으르게 믿는 시스템 2를 바로잡는 작업이 바로 비판적 사고력이자 메타인지의 역할이다(배식한, 석기용, 2023, pp. 29-32). 생성 인공지능은 장차 우리 일상의 당연한 조건이 될 것이고, 우리의 사고 과정에 침투한 자동적 기초가 될 것이다. 시스템 2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 인간지성의 고차원적 능력을 게으르지 않게 관리하고 키우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따라서 교양교육은 인공지능과 더불어 도래하게 될 탈-노동 사회의 필수조건이다. 교양교육은 자유교육(Liberal Education)이자 일반교육(General Education)이다. 자유교육에서의 ‘자유’란 특정 주제, 직업적 유용성, 익숙한 전제와 관행, 그리고 시간과 에너지의 효율적 활용이라는 부담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다양한 분야의 학술적 접근, 관점, 탐구 방법들을 최대한 두루 접해보도록 하는 일반교육을 통해 교양교육은 이 네 가지 자유에 입각한 지적 탐구의 기회를 최대한 제공함으로써 비판적이고 창의적이며 전문적이면서도 특정 지식에 편협하게 매몰되지 않는 사유의 역량을 함양시킨다(배식한, 박민영, 2019, pp. 40-41). 가령, ‘자유교육’을 표방하는 하버드대 학부과정의 일반교육은 공적 참여를 준비시키는 것, 자신의 취향, 생각, 가치가 어떤 전통의 산물임을 이해시키는 것, 변화에 비판적이면서 건설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자기 언행의 윤리적 차원에 대한 이해력을 높이는 것 등 4가지를 기본 목표로 삼고 있다(배식한, 2018, p. 119). 바로 4차 산업혁명의 자동화 시대가 요구하는 지식이다. 시몽동이 강조했던 개방적이고 범주횡단적인 지식, 스티글러가 촉구했던 삶의 기예, 즉 나 자신과 타인의 삶에 대한 주의와 돌봄의 태도를 양성하는 지식, 바로 이것이 자동화를 토대로 열어갈 탈-노동 시대에 요구되는 자유 교양이다.
모두가 예술가가 될 필요가 없듯이 모두가 엔지니어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누구나 예술가나 엔지니어가 될 수 있도록 자동화 도구들을 토대로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구성해 갈 수는 있어야 한다. 교양교육은 “평생교육의 토대로서 자신의 인생을 끊임없이 변화시킬 수 있는 자기갱신능력, 자동화로 환원될 수 없는 자기만의 독창성을 구현할 수 있는 능력, 자기 스스로를 가치 있는 존재로 여기며 공존의 삶을 실천하는 능력”을 키운다(정연재, 2020, p. 71). 디지털 대전환을 위해 인공지능 전문가 양성에만 자원을 투자할 것이 아니라, 인공지능 자동화 도구를 어떤 방향으로 사용해야 할지 그 의미와 가치를 평가하고 인공지능 자동화로 도래할 탈-노동 사회에 상응하는 인간적 삶의 기예를 만들어갈 교양교육 강화에 힘을 실어야 한다. 또한 교양교육은 자동화 기술 환경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조건을 이해하고 인간 정신의 가치와 인간다운 삶의 의미를 새롭게 발굴할 수 있도록 인문학적 안목을 갖춘 디지털 리터러시를 함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Notes

1) 시몽동의 ‘개체초월적 관계’는 원자적 개체들 간의 상호주관적(intersubjective)이거나 개인간(interindividual) 관계가 아니라, 개체들에 내재하고 있던 전개체적 실재성이, 이 개체들을 ‘가로질러(trans-)’ 정념-감동적(affective-emotive) 차원에서 연결되면서, 생물학적 개체 수준을 ‘넘어서는(trans-)’ 새로운 차원에서 형성되는 심리적-집단적 관계를 의미한다.

2) 스티글러의 transindividuation의 번역어로는 관개체화, 통개인화, 포월개체화 등이 있다. 이 개념은 시몽동의 transindividual 개념을 스티글러가 변용하여 새롭게 전유한 것이다. 시몽동의 transindiviual이 생물학적 개체 차원을 넘어서는 심리적-집단적 개체화를 가능하게 하는 관계성으로서 ‘개체초월성’을 강조한다면, 스티글러는 심리적-집단적-기술적인 세 개체화의 상호변환과 동시발생을 강조한다. 여기서는 세 개체화를 관통해서 성립한다는 의미를 강조하여 ‘관(貫)개체화’를 번역어로 삼는다(김재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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