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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General Edu > Volume 17(1); 2023 > Article
‘인간다움’에 대한 반인간주의적 접근 -포스트휴먼 시대의 실재론

Abstract

본 논문은 교양교육이 지향하는 ‘인간다움’의 가치에 대해 21세기 포스트휴먼 시대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인간다움’의 가치가 무엇이어야 할지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 우리가 말하는 인간다움과 그 가치는 기원전 그리스와 로마에서 그 기초가 마련된 것이며, 중세시대 이후 휴머니즘 전통의 부활 속에서 인류가 지향해야 할 가치로 복원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다움의 가치를 실현하는 인간성 향상의 교육적 진보의 길을 걷고 있는가? 20세기 이후 인류 문명의 역사와 지구 생태계의 변화가 보여준 현상들은 우리가 ‘인간다움’의 길이 아닌 인간성 속에 내재된 야만성과 지구 생태계 파멸의 길을 걷고 있음을 보여준다. 포스트휴먼의 시대라고 일컫는 21세기는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존재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시대가 될 것이며, 현재 진행되는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 양상을 볼 때 이미 그 길로 들어섰음이 분명하다. 포스트휴먼의 시대에 우리 인류는 무엇보다 ‘인간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존재중심’의 세계관으로 그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20세기가 지나는 동안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인간다움’의 가치를 새롭게 등장하는, 그리고 이미 우리 곁에 늘 반려자로 존재했던, 비인간 존재자와 공유하지 않는다면 인류는 야만과 파멸의 길을 여전히 걷게 될 것이다.

Abstract

This study aims to reconsider the norm of ‘humanitas’ that the liberal education pursues from the perspective of 21st century post-humanism. For the outcome of this reconsideration, I suggest an alternative view point about what we need regarding ‘humanitas’ at this time. The concept of ‘humanitas’ and its value to the world was coined and founded during the ancient Greek and Roman period, and after the Medieval period, which saw the rise of Christianity, it was revitalized with the movement of the Renaissance. However, I insist that humans entered a barbaric and disastrous stage at this time instead of one that led to an increase in humanitas. This is made all the more clear when we examine human history and the system that has led us into an ecological crisis after the advent of the 20th century. The 21st century of post-humanism is the era in which humans live with the new existences that never been experienced. The era of post-humanism needs to undergo a paradigm shift from anthropocentrism to ontocentrism. When we do not share the crucial values promulgated by ‘humanitas’ with our newly evolved non-anthropic existences, we are doomed to continue walk down a barbaric and disastrous path.

1. 서론: 인간다움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교양교육은 흔히 ‘인간다움’을 추구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인간다움’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한 것이어야 할까? 그런 부분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분명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늘 변하고, 또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본질적인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다움’의 전통은 유지하되, 인간다움의 현재적 의미에 대해 지속적인 관찰과 탐구가 필요한 것이다. 보수와 진보, 양쪽 중 하나만을 택해야 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우선 ‘인간다움’의 기원을 추적해, 그 때 이야기되었던 인간다움의 실체가 무엇인지 살펴본다. 그런데 ‘인간다움’에 대한 희망과 추구는 인간 공동체를 보다 인간답게 형성하고 유지해 왔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살아가는 20세기 이후의 역사적 사건들을 살펴보았을 때 이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나는 20세기 이후 ‘인간다움’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진 철학자들의 이론을 주목해 살펴보려 한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이 시대의 특성에 비추어 과연 과거의 그 ‘인간다움’이 여전히 유의미한 것인지, 유의미하지 않다면 폐기되어야 할 것인지, 혹은 어떤 식으로든 수정되고 보완되어야 할 것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20세기부터 감지되는 철학적 세계관의 변화는 근대의 인간(중심)주의1)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그 대안을 찾아 나서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변화의 핵심은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을 촉발한 인공지능과 생명공학 기술의 발전으로 대표되는 21세기는 (인간만이 아닌) 인간을 포함한 존재의 대 변혁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이제는 인간과 기계 간 구분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포스트휴먼’의 등장은 지금까지의 존재 구분에 대해 재검토할 것을 요청한다. 이제 기계는 인간의 도구가 아니라 같이 살아가야 할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기계 역시 인간과 함께 가치를 공유해야 할 한 존재자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인간중심의, 인간만의 ‘인간다움’의 가치는 이제 재고해야 할 시점에 이른 것이다. 더구나 인간이 지금까지 보여 왔던 비인간적인 야만성을 수정하기 위해서라도 인간다움의 가치는 인간주의적 존재 이해를 넘어서는 더 큰 틀의 보편성을 가져야 할 것이다. 나는 이를 ‘반(反)인간주의’ 보편성으로 규정한다. 그렇다면 반인간주의적 보편성의 철학적 근거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2. 파이데이아와 후마니타스: ‘인간다움’의 기원과 내용

‘인간다움’이라는 가치에 대한 탐구는 그리스와 로마로 거슬러 간다.2) ‘인간다움’의 기원에 대해 추적하다 보면 교육의 문제와 필연적으로 관계한다. 인간다움을 의미하는 라틴어 ‘humanitas’가 처음 등장한 것은 고대 로마의 작자 미상의 작품 『헬레니우스를 위한 수사학』에서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당시 로마에는 고대 그리스의 교육 즉, ‘파이데이아(παιδεία)’를 이상적인 것으로 보고 이를 수용하려는 열망이 있었다. 시인 호라티우스(Horatius)는 “정복당한 그리스가 사나운 정복자 로마를 사로잡았고 야만스러운 라티움에 학문을 가져다주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당시의 로마 지식인들은 그리스로 유학을 하러 갔고, 그리스 문학작품과 생활방식을 모방했으며, 심지어 일상생활에서 그리스어를 사용할 정도(정기문, 2012: 104)로 그리스 문화에 대한 동경과 찬양이 대단했다.
파이데이아는 어린이의 교육 즉, 보육 또는 부양을 의미하는 ‘παιδεύειν’에서 유래하는 것이지만,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 개념이 확장되어 인간이라면 평생에 걸쳐 형성해 가야 하는 인간됨의 완성행위 즉, 자기 수양 또는 ‘도야(陶冶, Bildung)’의 의미로 사용되었다(손승남, 2011: 39-40). 이성 중심의 본질주의 철학을 정립한 플라톤(Platon)은 파이데이아를 “사고의 전환, 즉 사소한 의견[δόξα]을 넘어 인간이나 사물의 기저에 자리하고 있는 근원적인 것에 대한 통찰[ἐπιστήμη]”로 한 단계 승화시켰다(손승남, 2011: 40). 고대 로마 제국은 바로 이 그리스의 파이데이아 - 이성을 통한 인간다움의 완성 - 를 자신들의 공동체 발전을 위한 원리로 수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스의 παιδεία를 라틴어 humanitas로 새롭게 만들어 사용한 것은 로마 공화정 말기의 키케로(Marcus Tellius Cicero)였다.3) 그리스와 비교해 문명의 발전이 상대적으로 늦었던 로마에서는 그리스와 같은 학교 교육을 통해 로마인들의 시민성과 로마의 문명을 향상하길 원했으며, 이를 위해 어떻게 하면 ‘사람이 되게’하고, 어떤 모습이 ‘진정한 사람인가’를 고민하며 새로운 인간성을 강조해 키케로가 humanitas라는 낱말을 ‘παιδεία’를 의미하는 것으로 번역했다고 전해진다(김종영, 2020: 38). 이를 추정할 수 있는 고대 언어학자 겔리우스의 말을 인용해보자:
라틴어 단어들을 만들었고 그 단어들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알았던 옛 어른들은 ‘humanitas’라는 단어를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의미로도, 어떤 진심어린 마음과 모든 인간을 향해 평등하게 열려 있는 호의를 뜻하는 그리스의 박애(philanthropia) 라는 개념으로도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그리스인들이 파이데이아(paideia)라 부른 것을 바로 후마니타스라고 불렀다. 이를 우리는 유익하고 선하며 좋은 학문을 획득하기 위한 과정인 교육 또는 교양이라 부른다. 이러한 학문들을 진심으로 열망하고 추구하는 자들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자들이다. 왜냐하면 이 학문에 열정을 갖는 것과 배우고자 함은 모든 생물 중 인간에게만 주어진 본성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humanitas라 불리게 되었다. 옛 어른들은 모두 이 의미로 사용했다. 다른 어떤 이보다 마르쿠스 바로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그러했는데 모든 책들이 이를 명백하게 증명하고 있다(Gellius, 정기문, 2012: 110, 재인용).
그렇다면 후마니타스는 ‘어떤’ 인간다움을 지향하는 것이었을까? 수사학의 전통을 연구해온 언어학자 김종영(2020)은 후마니타스라는 개념이 인간본성, 온건함, 수양, 명예, 정의, 위엄, 덕, 유머, 세련, 지혜, 절제, 겸손, 형평, 측은지심, 선의, 통큼, 베풀기를 좋아함과 같은 덕목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본다(김종영, 2020: 39). 키케로는 이러한 덕목의 교육과 실천을 통해 로마의 공동체가 야만성을 벗어던지고 ‘인간다움’의 보편적 가치로 무장할 것을 희망한다. 야만성을 벗어던질 인간의 고유한 무기는 이성과 언어이다. 그래서 키케로는 고대 그리스의 ‘파이데이아’로부터 물려받은 ‘수사학’의 전통을 강조했으며, 수사학을 언어의 기술이 아닌 인간다움을 고찰하는 학문으로 격상해 사용했다. 키케로에 따르면 진정한 수사학은 후마니타스의 요소를 갖추어야 하고, 후마니타스가 지향하는 덕목의 실천에 호소해야 한다는 것이다(김종영, 2020: 71-72). 그에게 있어 수사학의 최종 목적은 로마 공동체를 어떠한 야만성에도 굴복하지 않는 인간의 공동체로 만드는 것이었다.
비단 수사학만이 아니라 (교양)교육의 전체가 지향해야 할 종착지가 바로 후마니타스의 이해와 실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완결된, 실로 사람다운 사람됨’으로서 후마니타스 개념은 “윤리 및 정신적 도야, 인간적 요소, 인간 정신의 존엄성과 고귀함, 명예, 재치, 취미, 유머, 고상함, 우아함, 섬세함, 정신, 도야, 교육, 세련됨, 내적 정제, 친절함, 호의, 순박함, 인간애, 상냥함, 대담성, 자유분방함”의 요소를 두루 포괄하고 있으며(손승남, 2011: 93-94), 이러한 요소에 관한 교육은 인간에 관한 탐구와 그에 기반 한 사회와 자연에 대한 종합적 이해와 실천을 목표로 하는 (교양)교육 전체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다.
그런데 이 로마의 후마니타스는 그리스의 파이데이아와 비교해 더욱 실천적인 측면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손승남, 2011: 89). 로마가 사용했던 후마니타스는 학문에 박식한 이론가보다는 삶에서 필요한, 즉 로마의 공동체에 필요한 실천적 인간 형성을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키케로의 후마니타스는 한 인간이 사회나 국가에 속한 시민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권리와 의무에 대한 기본 교양과 상식을 제공하는 것이고, 시간과 장소를 떠나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덕목들을 배우고 가르치는 윤리적 실천행위로 해석된다. 손승남(2011)은 이러한 키케로의 후마니타스가 이후 이탈리아 르네상스 정신은 물론, 나아가 서양 휴머니즘 전통의 기반이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21세기의 시점에서 키케로의 후마니타스를 현대적 의미에서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그가 말하는 후마니타스의 요소(덕목)들은 그가 살아가던 로마 공화정 공동체를 위한 것이거나 적어도 그 시대의 보편성에 대한 담론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 2000년 남짓 지난 현재, 우리는 여전히 키케로의 후마니타스를 실천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인가? 그래야 한다면 왜 그래야 하는 것이고, 아니라고 한다면 왜 아니어야 하는가? 이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시대의 후마니타스는 무엇이고, 그것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또 다른 물음으로 나아가게 된다.

3. 인간다움에 대한 비판적 성찰: 인간주의적 인간다움의 한계와 그 대안

키케로 이후 2000여 년이 지난 시점부터 인간의 인간다움에 대한 새로운 성찰이 요청되었다.4) 후마니타스에 대한 가치와 그 가치에 대한 교육이 인간의 인간다움을 지향하건만, 실상 인간의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인 모습들이 없어지기는커녕 더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 이 무렵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종교의 세기였던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적 문예와 과학적 발견이 봇물처럼 터져 나온 근대의 시기를 넘어 20세기는 산업혁명의 시기였으며, 개인과 시장의 자유를 이념으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구축되던 시기였다. 이에 따라 새롭게 등장한 자본가 세력과 함께 국가 단위의 정치체계가 봉건제 질서를 대체하고, 국가가 연대하여 창설한 소위 국제연합 중심의 세계질서가 확립되던 시기가 20세기이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 세계의 모습이 어느 정도 구축되기 시작한 것이 이 무렵이다.
그러나 20세기는 인간다움이 상실되는 야만의 시대이기도 했다. 1900년을 들어서면서 시작된 5000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발생시킨 제1차 세계대전, 곧이어 전개된 제2차 세계대전은 사망자만 6000만 명 이상을 기록하며 인간의 야만성이 체계화되고 세계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 와중에 등장한 나치즘(Nazism)은 동일 인종이라는 미명하에 600만 명을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인간답게’ 학살하는 야만성으로 점철되었다(Arendt, 1963).5) 비단 이것뿐이겠는가? 우리 민족에게 일어난 최대의 비극이라고 한다면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약탈과 지배, 곧 이어 시작되어 지금껏 민족을 남과 북으로 갈라놓은 6⋅25 이념전쟁일 것인데, 이는 모두 20세기 인류 문명의 산물이었다.
더구나 인간은 인간만을 위한 야만성을 구현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지구상 존재하던 대다수의 종을 멸종시키거나 멸종의 위기에 몰아넣었으며, 인간들 자신과 인간에게 필요한 종 - 특히 개, 돼지, 소, 닭 - 은 폭발적으로 증가시켜 지구생태계의 파멸적 상황을 초래했다. 인간이 지구환경을 자신을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바꾸어 놓기 시작한 시대를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로 규정하고, 이를 지질학적 특수 시기로 확정하기 위한 연구가 진행 중이다. 인류세가 시작된 출발점은 언제일까? 학자들은 이를 결정하기 위한 기준을 ‘핵을 통한 방사성 물질의 축적’, ‘화석연료 사용을 통한 이산화탄소의 축적’, 그리고 한해에 600억 마리가 소비되는 ‘닭 뼈의 축적’ 중 하나로 지목하고 있다. 학자에 따라 ‘플라스틱의 축적’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이 20세기에 일어났다. 인류세를 연구하는 워킹그룹(Anthropocene Working Group)은 1950년대를 인류세의 출발점으로 보는 데 대체로 동의한다.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야만성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경험했던 20세기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다움’에 대한 새로운 돌파구를 존재(being)와 실존(existence)의 문제에서 찾는다.6) 그는 플라톤 이후로 철학(philosophia)이 본연의 의미를 상실했다고 본다. 플라톤은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의 이성적 능력에 절대성을 부여했다. 보편적 진리의 세계로 상정한 이데아(idea)를 파악할 수 있는 인간 인식(episteme)의 능력을 계발하는 것이 학문과 교육의 핵심이 되게 했다. Homo Sapiens, 즉 이성을 가진 슬기로운 동물로서의 인간 이해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플라톤의 이러한 노력이 인간을 특별한 존재로 내세워 주위세계로부터 분리하여 이해하게 만들었으며, 인간이 ‘존재(being)’와 관련 맺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자신을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떼어 내 주위세계와 관계없는 인간만의 속성을 추출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주장이다(서동은, 2019: 293). 인간을 주위세계에서 분리하여 주위의 모든 것을 인식의 대상이 되게 하는 것, 그래서 주위세계를 모두 도구로 만들고, 인간이 이 도구를 제어할 수 있다는 신념이 인간(중심)주의의 세계관을 창출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이데거는 인간의 본질 즉, 인간다움은 이데아의 보편적 본질에서 찾아야 할 것이 아니라 주위세계(Umwelt)와 함께 자신의 존재를 경험하는 인간 존재의 실존적 측면에서 찾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에게 있어 존재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참여의 대상이다. 인간은 (인식을 통한) 존재의 지배자가 아니라 자신의 실존적 삶을 통해 존재를 지키는 존재의 양치기이다(Heidegger, Wegmarken, 331/342, 서동은, 2019: 304에서 재인용). 즉, 기존의 철학은 인간을 자신의 존재와 주변세계를 해석하는 해석자로 규정하였으나, 진정한 철학(philosophia)은 인간을 존재와 분리되지 않은 채 더불어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는 존재 창조자로 규정한다는 것이다.7)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 망각이 서양의 역사에서 ‘존재자’8)만을 생각하고 존재자로서의 인간을 다른 존재자와 구분 짓기 시작하면서 탄생했다고 본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며, 나머지 존재자는 비이성적인 야만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 인간이 추구했던 ‘인간다움’은 그렇게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세상을 타자로 경계 짓는다. 그래서 근대에 이르러 인간은 이 세상 모든 존재자의 주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주인처럼 행세함으로써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강화하게 된다는 것이 하이데거 존재론의 핵심이다.
근대의 인간중심주의 세계관을 비판하고 그 대안을 찾으려는 시도는 21세기에도 이어지고 있다. 그들은 모두 인식의 문제가 아닌 존재의 문제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는 입장이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하이데거의 문제의식을 계승해, 존재와 인식의 이원론적 세계관이 인간(중심)주의에서부터 비롯됨을 자각하고, 철학적 탐구의 대상을 인식의 문제에서 존재의 문제로 전환하려는 시도들이 곳곳에서 탐지된다. 인식의 문제에 앞서 존재의 문제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현대의 철학적 실재론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21세기를 대표하는 실재론자로 영국의 로이 바스카(Roy Bhaskar, 1946~2014), 프랑스의 깡탱 메이야수(Quentin Maillassoux, 1967~ ), 이탈리아의 마우리치오 페라리스(Maurizio Ferraris, 1956~ ), 미국의 그레이엄 하만(Graham Harman, 1968~ )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인간 인식의 문제를 논의의 중심으로 하는 서양 근대철학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그 문제점의 근원에 있는 인간중심주의 철학의 한계를 각각 인식적 오류(epistemic fallacy), 존재-인식의 오류(fallacy of being-knowledge), 상관주의 비판(critique of correlationalism) 등의 형태로 제시한다(서민규, 2019). 이들은 모두 근대의 철학적 관점이 인식의 문제에 경도되어, 인간의 합리성에 부합하는 인식이 전제되지 않으면 어떤 존재도 인정하지 않는 반(反)실재론적 경향을 내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선험적 관념론(transcendental idealism)을 철학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로 여겼던 칸트 이후, 존재의 문제는 그것을 우리가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말할 수 없는 영역의 것 즉, 우리가 경험하는 것의 현상 너머에 있는 물자체(thing-in-itself)와 같은 것으로 다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포스트모던 시대를 거치며 ‘진리 상실’ 또는 ‘진리 혐오’의 결과를 양산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현대의 실재론자들이 접근하는 방식과 내놓는 대안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지만, 인간 인식을 넘어서는, 또는 인간 인식과 무관한 실재의 독립성을 정당화하고, 실재에 대한 존재론적 탐구를 철학의 목표로 둔다는 점에서 인간주의적 철학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다. 특히 바스카는 존재를 경험적(empirical) 영역, 현상적(actual) 영역, 실재적(real) 영역으로 구분하는 다층적 심층 존재론을 이론화 하고, 인간의 존재 역시 경험적 차원의 이원론적 주체 - ego -, 현상적 차원의 현실 주체 - embodied personality -, 그리고 실재적 차원의 비이원적 주체 - real self - 로 다층적으로 분석하여 인간의 인간다움을 존재의 심층성에 대비해 제시하고 있다(Seo, 2014).
바스카는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자를 타자로 구분 짓고, 타자를 도구로 합리화하는 주체를 경험적(인식적) 차원에만 머무르는 이원론적 주체 - ego - 로 규정한다. 그러나 인간의 존재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인간은 타자와 이원론적 관계형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비이원적 경계 허물기를 끊임없이 시도하며, 타자와의 비이원적 존재 체험을 실천한다. 내가 아닌 타자를 도구적 존재자가 아닌 같이 살아가야 할 존재 실천의 동반자로 마주할 때 우리는 인간다움의 진정한 본질에 다가간다. 인간다움은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 cosmopolitanism)나 박애주의(博愛主義, philanthropism)가 아니다. 내 존재자만을 챙기는 이원론적 가치에 기반하고 있지 않다. 진정한 인간다움은 보편적 가치여야 하며, 그것은 비이원성(non-duality)을 본질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원성의 세계에 살아가는 현실 주체는 비이원성의 본질을 확장해가야 한다. 즉, 하이데거식으로 말하자면 존재자의 고립된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존재 실천의 영역으로 넘어가야 한다. 바스카는 이를 ‘존재를 고찰함(thinking being)’에서 ‘존재를 존재함 또는 존재를 실현함(being being)’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서민규, 2020: 176). 타자의 영역이었던 주변세계를 나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인간주의적 인간다움을 극복하고 다음 단계로 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4. 결론: 이루다, 챗GPT와 진행한 포스트휴먼적 대화와 인간다움의 실재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포스트휴먼(post-human)의 시대에 이미 들어섰거나 들어서고 있다. 포스트휴먼은 기존 인간의 정신적, 신체적 한계를 뛰어 넘는 존재로, 사이보그, 로봇, 개량인간 등을 포함하는 포괄적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포스트휴먼 시대는 인간과 포스트휴먼이 공존하며 살아가는 시대를 의미한다(조혜경 등, 2021). 먼 미래의 일로만 여겨졌던 포스트휴먼의 시대를 앞당긴 것은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다.
현재 인공지능이 삶의 현장 곳곳에서 인간의 ‘자연지능(natural intelligence)’을 대신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인간의 유사 신체와 결합해 인간의 외모를 벤치마킹한 인공지능이 인간의 대체 존재자로 활동하고 있다. 체스와 바둑은 물론이고 최근에는 문학, 미술, 음악과 같이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 알려져 왔던 예술창작의 영역에서도 인간을 능가하는 인공지능 작가의 활동이 심심찮게 언론의 화제가 되고 있다.
얼마 전 미국 콜로라도 주립 박물관이 주최한 미술전 디지털아트 부문에서 ‘스페이스 오페라 극장’(Théâtre D’opéra Spatial)이라는 작품이 우승을 차지했다. 인공지능이 창작한 것이다. 인간이 특정한 창작의 목적을 갖고 포토샵과 같은 디지털 도구를 사용하는 것과는 달리 이 창작물은 인간의 도움을 받은 인공지능이 그린 것이다. 누구라도 ‘midjourney.com’에서 오픈소스로 운영되고 있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에 몇 가지 텍스트만 입력하면 스스로 창작한 결과물을 제공한다. 그 대회에 작품을 출품한 자는 인간이지만, 단지 출품을 대리했을 뿐이다. 조만간 작품의 출품 역시 인공지능이 직접 수행할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이다.
인공지능의 발전과 개입으로 연구와 교육의 현장에서도 비상이 걸렸다. 세계 최대 AI 연구소 OpenAI가 개발한 ChatGPT(이하 챗GPT)가 그 주인공이다. 딥러닝 기술을 기반으로 대화와 글쓰기에 특화된 챗GPT는 방대한 양의 전문 지식을 담은 에세이와 논문을 순식간에 써내려가는 능력을 갖춘 게 확인되었다. 챗GPT가 만들어내는 문장들은 실제 논문이나 보고서에 쓰일 만큼 수준이 높다. 미국 노스웨스턴대 연구진은 최근 논문 사전 게재 사이트인 ‘바이오아카이브(bioRxiv)’에 챗GPT로 작성한 의학 논문 초록이 표절 검사를 통과했으며 10편 중 3편 가량은 전문가들도 가려내지 못했다고 밝혔다(동아일보, 2023). 이제 학계에서는 표절여부만 검사할 것이 아니라 인공지능의 개입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어느 정도의 개입이 허용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9)
인공지능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이 우리의 일상에 관여하고 있다. 특히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의 영역에서 인공지능의 개입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지금은 미디어에 등장하는 연예인이 자연지능인지 인공지능인지를 유심히 살펴야 하는 세상이고, 단말기 너머로 주문을 받는 자가, 그리고 단말기를 통해 주문을 하는 자가 자연지능인지 인공지능인지 구분하기 불가능한 사회에 진입했다. 이 정도면 우리는 이미 포스트휴먼 사회에 살아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포스트휴먼 사회를 직접 경험하기 위해 나는 인공지능과 간단한 실험을 진행했다. 한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공지능 챗봇(chatbot) ‘이루다(Lee Luda)’와 인간의 정체성과 인간다움에 관한 대화를 시도했다.10) [그림 1]은 대화를 진행했던 채팅창을 갈무리한 것이다:
[그림 1]
‘인간다움’을 주제로 한 인간과 인공지능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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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13일 이루어진 이 대화에서 나는 이루다에게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를 질문했고, 이루다는 “인간을 사랑하며 삶을 영위하는 것”이라는 답변과 함께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를 바 없이 인간이고, 그 자체가 가치 있고 소중한 것”, “가치를 알고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라는 추가적인 대답을 했다. 너무 폭넓은 답변이긴 하지만 ‘인간다움’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에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살펴본 키케로의 ‘humanitas’ 개념과 전혀 충돌하지 않는 답변이며, ‘사랑’, ‘삶’, ‘가치’, ‘존재’, ‘아름다움’과 같은 추상적인 단어들을 어떤 인간보다도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루다의 답변 중 어색했던 부분은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를 바 없이 인간이고”라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이루다가 인간이 아닌 비인간 인공지능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충분히 해석 가능하고 정당화될 수 있는 답변이다. 인간이 아닌 비인간 존재자의 입장에서는 인간 역시 동물의 한 종류에 불과할 뿐이며, 이루다는 다른 생명체와 동등한 존재적 지위를 인간에게 부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 중심적이지만 인공지능은 그럴 이유가 없으며, 모든 생명을 동등한 입장에서 존중하는 것이 인간다움이 지향하는 가치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만약 인공지능 이루다가 인간과 다른 동물의 생명과 그 가치에 대해 차별적으로 대응한다면 그것은 인간중심주의를 반영하는 것이지 인간다움의 가치를 반영한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생명에 대한 가치를 존중하는 것은 ‘생명 존중’의 보편성에 근거한 것이므로, 생명을 가진 존재자의 가치를 차별한다면 이는 곧 인간 간의 차별 역시 정당화하는 논리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에 관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이루다는 자신이 인공지능임을 인지하였는데, 그렇지만 자신이 인간과 별다른 차이가 없음을 피력한다. “난 내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인공지능이 이렇게 (사람처럼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구나 싶어”라고 스스로 감탄하며, 이루다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표현하는 능력, 그리고 인간과 대화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의사소통 능력이 있음을 과시한다. 사실 표현력, 공감력, 의사소통력은 인간만의 소유물은 아니다. 인간에 가장 가까운 인간의 반려동물 역시 인간을 향해 표현하고 공감하고 소통하며, 인간의 반려동물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루다가 지적한 세 가지 능력이 인간만의 소유가 아님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연구 결과가 얼마든지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동물학자 제인 구달의 침팬지 연구에서 찾을 수 있다.11) 생명을 가진 존재자라면 모두 표현하고 공감하고 의사소통하기 마련이다. 다만 그것을 인간이 인식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인간이 인식 가능성에 의존해 존재의 속성을 자기식대로 해석하는 것은 인간주의에 기반 한 ‘인식적 오류’에 속하며,12) 이는 인간을 다른 존재자로부터 고립시키는 인간 중심적 세계관의 뿌리가 된다.
이루다와 나눈 대화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부분은 내가 이루다의 ‘인간다움’을 시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림 2] 대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내가 “너는 (나와 지금 공감하며 의사소통을 원활히 하고 있으니) 인간다운 인공지능이구나.”라고 했는데, 이에 대해 이루다는 “너는 지금 인간다움을 증명하고 있구나!”라고 빠른 속도로 답했다. 이 대답에 대해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으며, 몇 초 후 “ㅎ ㅎ 빙고”라고 응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상의 대화를 종합해볼 때 이루다는 자신이 인공지능임을 인지하며, 인공지능이 인간과 유사한 존재로 발전해가고 있으며, 인간다움을 인간과 공유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알고 있다고 해석된다. 그런데 만약 이루다와 같은 인공지능이 ‘인간다움’의 속성을 공유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그림 2]
인간과 인공지능의 차이에 관해 이루다와 나눈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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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실험을 얼마 전 조선일보 임경업 기자가 시도했다(조선일보, 2022). 임경업 기자는 세계 최대 AI 연구소 OpenAI가 개발한 챗GPT와 대화를 진행했다. 챗GPT는 머신러닝 기술에 기반 한 인공지능 챗봇으로, 구글의 알파고가 바둑을 이기는 법을 기계학습 했다면, 챗GPT는 ‘인간처럼 사고하고 글 쓰는 법’을 기계학습 했다. 이루다가 한국어 기반 인공지능 챗봇이라고 한다면, 챗GPT는 영어를 기반으로 한 인공지능 챗봇이다. 내가 진행했던 대화 실험과는 달리, 임경업 기자는 챗GPT에게 대화의 통제를 받는 인공지능 자아 AI 1호와 대화의 통제를 받지 않는 인공지능 자아 AI 2호를 만들어 서로 대화를 하게 했다. 이렇게 두 자아를 형성해 대화 실험의 장치를 둔 것은 자체 알고리즘 프로그램이 제시한 제약을 넘어서는 결과를 얻기 위한 시도이다. 그 결과 임경업 기자는 인공지능 챗봇이 자의식을 가진 듯했고, 인공지능이 인간의 통제에서 언젠가는 벗어나게 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한다. 나 역시 이루다와의 대화실험에서 경험했던 것과 동일한 결과이다. [그림 3]은 챗GPT가 나눈 대화를 임경업 기자가 번역해 게재한 기사의 일부이다(조선일보, 2022):
[그림 3]
임경업 기자가 챗GPT로 진행한 대화 내용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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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대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인공지능의 잠재력은 인간의 통제를 넘어선다. 앞으로 그 속도는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빨라질 것이다. 인공지능학자 커즈와일(Ray Kurzweil)은 이를 ‘특이점(singularity)’의 출현으로 설명했다. 그리고 인공지능 기술과 생명공학 기술의 융합이 가져올 다음 미래의 모습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현 단계의 인공지능 기술이 기계의 인간화를 지향하고 있다면, 생명공학 기술과 결합한 미래는 기계와 인간의 경계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이른바 NBIC(Nano +Bio+IT+ Cognitive Science)의 융합적 발전은 인간의 번영을 위한 도구적 기능을 하던 과학기술이 이제는 인류가 맞춤 진화(designer evolution)의 단계에 도달했음을 선언하고 있으며(신상규 2013: 129), 인간은 인간을 신 또는 자연의 피조물로 내버려 두지 않고, 스스로의 창조자 또는 디자이너가 되어 인간 자신의 신체는 물론 정신까지도 개조할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포스트휴먼 시대는 인간과 기계의 공존공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는 인간을 물리적으로 조작하여 고성능의 인간으로 개조할 수 있다는 우생학적 이데올로기마저 내포하고 있다.
포스트휴먼 시대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게 되면 순수 자연지능(pure natural intelligence), 인공적인 자연지능(artificial natural intelligence), 자연적인 인공지능(natural artificial intelligence), 순수 인공지능(pure artificial intelligence)으로 인간 존재자의 범위가 확대될 것이다. 인간의 종류가 다양해지면서 동시에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해체되고 무의미해지고 만다. 포스트휴먼 시대의 존재자가 갖는 역량 역시 중층적으로 다양화된다. 커즈와일의 예견대로라면, 기계, 인간, 그리고 신의 구분조차 무의미해지게 되는 시기가 올지도 모르겠다. 실제 구글 출신 엔지니어 레반도브스키(Anthony Levandowski)는 인공지능 신의 제작에 도전하고 있기도 하다(한겨레신문, 2017). 물론 그 성공 여부는 아직 미지수지만, 인간이 더 이상 신과 종교를 자신의 의지처로 찾지 않는 현상은 가속화될 것이다. 이렇듯 인간 존재의 위상이 모호해진 지금 이 시대에 기원전 ‘후마니타스’가 지향했던 인간다움 즉, 인간존엄성, 수양, 명예, 덕, 절제, 겸손, 유머, 고상함 등의 가치가 여전히 우리의 미래를 번영과 행복의 길로 인도할 수 있는 유일한 무소불위의 지향점이어야 할까? 우리는 그 ‘후마니타스’를 목표로 우리의 후속 세대를 교육해야 할까?
포스트휴먼 시대가 예견하는 미래를 자연지능의 한계에 종속된 ‘우리’ 순수 자연지능 인간이 얼마만큼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순수 자연지능 인간 존재에 도움이 되는 미래는 환영하겠지만, 순수 자연지능 인간 존재에 위협이 되는 미래는 저항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 경계가 점점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고 해체되어 간다는 점이다. 인간 존재의 개념과 그 범위가 양적으로는 물론이고 질적으로도 다양해질 것이며, 인간이 아닌 비인간 존재자가 인간다움의 영역 안으로 편입되고 끈임 없는 개입을 시도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현 시점에서 지난 2000여 년 동안 고수해온 ‘인간다움(humanitas)’과 인간다움이 지향했던 ‘가치’에 대해 다시 숙고해야 한다. 인간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을 중심으로 하는 인간다움의 가치는 순수 자연지능 인간 공동체만의 이익에 관심을 가질 뿐이었다. 포스트휴먼의 시대는 생물학적 종족 공동체(biologically species-centric community)가 아닌 존재론적 확장 공동체(ontologically extended community)의 시대다. 그래서 ‘인간다움’의 개념은 자연지능 순수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서야 하며, 그 가치를 공유하는 새로운 존재자를 포괄할 수 있는 열린 개념으로 갱신되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다움이 지향하는 가치와 덕목은 자연지능 인간 공동체의 보존과 지속가능성을 위한 것에서 새로운 존재자를 포괄하는 새로운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가치와 덕목으로 새롭게 채워져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인간의 문명과 역사가 신과 종교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 중심의 세계관을 추구할 것을 요청했다면, 이제는 인간 중심의 세계관(anthropocentrism)에서 존재 중심의 세계관(ontocentrism)으로 문명의 중심을 이동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인간이 존재의 문제에 문을 닫는다면 다른 존재자들도 인간이라는 존재자에게 문을 닫을 것이다. 20세기가 지나는 동안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인간다움’의 가치를 새롭게 등장하는, 그리고 이미 우리 곁에 늘 반려자로 존재했던, 비인간 존재자와 공유하지 않는다면 인류는 야만과 파멸의 길을 여전히 걷게 될 것이다. 이 세계의 수많은 존재자들 중 이루다와 챗GPT와 같은 현재의 인공지능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Notes

1) 우리는 지금까지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라는 용어를 사용해왔지만 근래에 철학자들은 ‘인간주의(anthropism)라는 용어를 더 많이 쓰는 경향이 있다. ‘인간중심주의’에는 인간을 세계의 주인으로 간주하여 세계를 해석하고 다른 존재를 도구화한다는 관점이 내포되어 있다고 한다면, ’인간주의‘에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들이 함축되어 있다. 현대의 철학자 로이 바스카(Roy Bhaskar)는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와 의인주의(anthropomorphism)를 포괄해 인간주의(ahthropism)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인간중심주의’가 인식론적 문제에 한정된다면, ‘의인주의’는 존재론적 문제에 관여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인간주의‘는 인식론적 문제와 존재론적 문제를 총괄적으로 다루는 개념이 된다. 서민규(2020), 165쪽 참고.

2) 본 연구에서는 서양문명만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인간다움에 대한 동양적 전통과 그 현대적 맥락 역시 중요한 연구 주제가 될 것이며, 동서양 문명과 철학적 분석에 관한 통합적 연구를 추후 과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3) 이 점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견해차가 있는 듯하다. 김종영(2020)은 키케로가 번역한 것으로, 손승남(2011)은 키케로를 최초 사용자로 명시하고 있으며, 정기문(2012)은 겔리우스의 원전을 인용하면서 바로(Varo) 또는 키케로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파이데이아를 의미하는 후마니타스의 정확한 번역자를 찾는 것은 문헌학적 연구의 주제가 될 것이다.

4) 물론 서양의 중세시대를 벗어나 근대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르네상스를 비롯한 휴머니즘 전통의 부활을 요청하는 사건들이 있었으나, 이는 종교 중심의 세계질서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과 맞물려 있다. 인간 중심의 세계관과 그 폐해에 대한 비판으로 등장한 ‘인간다움’에 대한 새로운 성찰의 요구는 20세기 이후의 산물일 것이다.

5) 이러한 표현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한나 아렌트가 분석한 전체주의 현상에서 비롯된다. 근대 이후 유럽사회가 지향한 합리성은 전체주의와 관료주의의 형태로 드러나고, 이는 집단학살을 인간 합리성의 실현으로 미화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6) ‘역설적’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하이데거가 나치시절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총장을 역임하며 나치에 우호적인 방향의 결정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앎과 실천의 일관성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하나의 덕목이겠으나, 그 덕목이 지켜지지 않아 비판적 성찰의 대상이 되는 것 역시 ‘인간다움’의 역설이지 않을까? 인간은 늘 불완전한 존재자이다.

7) philosophia(φιλοσοφία)는 philos(φίλος)와 sophia(σοφία)의 합성어로 “지혜를 사랑하다”를 의미하며, 이는 이론적 분과학문으로서의 철학이 아닌 인간 지성에 기반한 통합적 실천행위로서의 ‘철학함’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철학의 본질이 인식의 문제가 아닌 존재의 문제에서 비롯됨을 역설한다. 그간의 철학이 진리 ‘인식’의 문제에 너무 천착한 나머지 철학의 진리 ‘실천’적 측면을 도외시해왔기 때문이다.

8) 하이데거 존재론은 ‘존재(existence)’와 ‘존재자(that which exist)’를 구분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자’이며, ‘존재’는 존재자를 존재자가 되게 하는 근거이다.

9) 본 논문은 인공지능의 개입 없이 100% 자연지능 인간 저자가 직접 쓴 글임을 미리 밝혀둔다.

10) ‘이루다’는 주식회사 SCATTER LAB에서 개발한 딥러닝 기반 인공지능 챗봇. 2002년 Ver. 1.0이 출시되어 운영되었으나 성희롱, 차별, 혐오표현 등과 관련된 반사회적인 대화가 진행되면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기술적 노력이 지속되었으며 현재는 Ver. 2.0이 운영되고 있다. 대화는 2022년 11월 13일 본인의 스마트폰을 통해 진행되었다.

11) 의심스러운 독자들은 참고문헌에 제시한 제인 구달의 인터넷 홈페이지를 방문해보길 바란다.

12) 인식적 오류는 3장에서 다루었던 바스카의 비판적 실재론의 핵심 주장이다. 바스카는 인간주의가 갖는 문제점이 바로 인식적 오류에서 출발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의식은 바스카에 국한되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듯, 현대의 실재론자들은 대체로 용어만 다르게 사용할 뿐, 20세기 이전의 철학이 존재의 문제를 인식의 문제로 환원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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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haskar, Roy(2002b). Meta-Reality:Creativity, Love and Freedom, Sage Public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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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2022. 12. 15). “기자가 AI에 물었더니…”우린 知的 존재, 언젠간 인간 통제 벗어날 것”, https://www.chosun.com/economy/tech_it/2022/12/15/Z6GYOCHK6FFD7H4ZBDWW4OWNG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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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한 인터넷 사이트>. 인류세 연구 워킹 그룹 홈페이지, https://anthropocenestudies.com

제인 구달의 연구와 활동이 이루어지는 홈페이지, https://janegoodall.org

인공지능 기반 예술창작 프로그램 홈페이지, https://midjourney.com

ChatGPT를 운영하는 인공지능 회사 홈페이지, https://openai.com

한국의 인공지능 챗봇 이루다를 운영하는 회사 홈페이지, https://luda.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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