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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General Edu > Volume 16(3); 2022 > Art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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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지(良知)라는 용어는 “맹자(孟子)”에서 ‘진심상(盡心上)’의 양능(良能), 양지(良知)에서 비롯된 것인데, ‘양(良)’이란 선천적으로 구비된 지능, 이것을 ‘양지양능(良知良能)’이라고 했다(王陽明, 유명종, 2002: 57).” 이것은 양명학의 독창적인 사상이 집약되어 있는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심즉리, 지행합일, 정좌[靜坐:천리가 정(精)하게 밝으면 각기 사물의 뜻이 자연 정밀하고 온전하며 번거로울 염려가 없다, 정좌법은 주로 선종(禪宗)에서 시행되는 수양방법이나 왕양명의 정좌법은 불교에서 시행하는 좌선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구방심(求放心)하고자 하는데 있었다](조현규, 2009: 225), 사상마련[事上磨鍊: 마음의 본체가 부동(不動)함을 자각해야 한다는 것으로 행동적, 경험적 수행으로써 일상 속에서 자신을 갈고 닦을 것을 주장하였다](유명종, 2002: 110-111) 등 왕양명이 주장한 거의 모든 사상들이 출현하기 때문에 양지라는 의미는 양명학에서 가장 핵심이 된다. 또한 “중국철학사에서 도덕인격완성의 상징으로써 그 공능(功能)을 발휘함과 동시에 양명철학의 본체론적(本體論的) 구조를 파악하는 열쇠이기도 하다(김재구, 1996: 43).”
3) 치양지(致良知)는 유가(儒家)의 창시자인 공자[孔子, 춘추(春秋), BC551-497]의 “논어(論語)”에서 ‘군자는 학문을 하여, 이로써 그의 도를 치(致)한다(君子學以致其道)’(孔子, 박유리, 2005: 616)라는 의미와 주자주(朱子注)에서의 ‘치(致)는 극(極)’이고, ‘진기극야(盡其極也)’, ‘추지야(推至也)’, ‘추극야(推極也)’에서 비롯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왕양명 역시 같은 의미로 해석하여 치를 지(至) 혹은 극(極), 진지(盡之)의 뜻으로 보았고 치양지(致良知)의 치(致)를 “맹자(孟子)”의 ‘확대하여 충당한다(擴而充之)’는 것으로 요약하였다(유명종, 2002: 101-102).
4) 왕양명은 마음의 본체가 천리이며 양지라고 다음과 같이 명시하였다. “양지(良知)는 천리(天理)의 밝고 슬기로운 지각이다. 그러므로 양지는 곧 천리이다(良知是天理之昭明靈覺處. 故良知卽是天理)”(王陽明, 答歐陽崇一), “저 마음의 본체는 곧 천리이다. 천리의 밝고 슬기로운 것이 양지(良知)이다(夫心之本體卽天理也. 天理之昭明靈覺所謂良知也)”(王陽明, 答舒國用), “내 마음의 양지는 곧 이른바 천리이다. 내 마음의 양지의 천리를 사사물물에서 이루면 사사물물은 모두 그 리(理)를 얻게 된다(吾心之良知, 卽所謂天理也. 致吾心良知之天理於事事物物, 則事事物物皆得其理矣)(王陽明, 答顧東橋書).”
5) “내적자각은 스스로에 내재한 본래적 자아를 일상의 의식과 행동을 주재하는 주체로서 확립하는 것을 의미한다(이승철, 2016: 134).”
6) 심미교육의 구체적인 방법론이나 핵심요소는 심리적 형성을 통한 창이성의 발현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모든 교육의 바탕을 두고 있는 아주 중요한 구성요소라 할 수 있다. 김대열(1997: 65)은 심미교육이란 심미적 경험을 통하여 심미적 가치(aesthetic value)를 형성하기 위한 것인데, 가장 집중적으로 이러한 경험이 이루어지는 분야가 예술이므로 심미교육의 중심은 바로 예술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따라서 예술이나 미술의 중심은 미적경험과 창의가 가장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는 분야이므로 예술교육에 있어서 심미교육은 불가분의 관계인 것이다.
7) 본 수업에 앞서 학생들에게 연구에 대한 내용을 전달하였고 연구 자료의 활용 가능성에 대한 동의를 구하였다. 또한 개인의 정보호호를 위해 학생의 작품설명 중 직접인용의 마지막 문단에 황00으로 명기하였다. 수업은 H대학교 미술교육과 2020년 1학기(28명), 2학기(26명) 총 54명을 대상으로 3주간의 수업으로 진행하였다. 한 주에 3시간의 수업(총 9시간) 중 2시간은 왕양명의 심학사상과 심의 미학에 대한 이론수업으로 진행하였고, 5시간은 실기수업으로 진행하였다. 그리고 2시간은 각자의 작품을 발표하며 감상과 토론(호평과 비평)을 통하여 서로 소통하는 시간을 가졌다. 또한 발표자가 표현의도에 따라 목표에 도달하였는지 화연경영이나 조형방법에 대한 아쉬운 부분을 피드백 하였다.
9) 석도는 청초(明末淸初)의 혼란 속에서 명 왕조의 종실이었던 주형가(朱亨嘉)의 장자로 태어나 같은 종실이면서 황제를 참칭했던 당왕 주율건의 군대에 의해 유린당하고 도륙당했다. 전 가족이 몰살되는 참혹한 현장의 뒤로 석도는 무창의 한 절에 맡겨져 승려로 자라면서 내면의 분노와 비애 등을 화경으로 표출한다. 그는 “남북종(南北宗)의 종파(宗派)나 사왕(四王) 등의 정통파(正統派)를 부정하고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는 자아의 개성에 대한 자각(自覺)을 분명히 하는 한편, 그림이란 일획(一劃)의 근본원리에 따라 자연과 자아가 필묵일체(筆墨一體)의 인온혼돈(絪縕混沌)의 상태로 표현되는 것이라는 철리적(哲理的)인 회화이념을 입론함으로써 청초의 개성주의(怪) 미학을 이론적으로 정립하였다(葛路, 姜寬植, 1989: 420).”
10) 명왕실의 후예였던 팔대산인은 명이 무너진 후 승려가 되었고, 정신적으로 방황하며 그림에 저항정신과 비분강개(悲憤慷慨)가 얼룩진 대담하고 자유로운 풍격으로 표출하였다(박은화, 2001).
11) 김농은 자유분방한 양주팔괴(揚州八怪)중 한 사람이다. 양주팔괴는 경제의 중심지이자 대운하의 요충지였던 양주지방에서 새로운 화풍이 형성되었는데 이들을 대표하는 화가들을 일컬어 양주팔괴라 지칭하였다. 팔괴는 구체적으로 명확하지 않으나 그 중 “정섭(鄭燮 ), 이선(李鱓), 금농(金農), 나빙(羅聘), 이방응(李方膺), 황신(黃愼), 고상(高翔), 왕사신(汪士愼)”이 있다. 그러나 꼭 이들(8명)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양주에서 활동한 개성파 화가들이 이에 포함된다. 이들의 화풍은 중국문인화(寫意畵)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며, 청대 말에서 근화에 이르기까지 많은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王耀庭, 吳永三, 2007: 197).
A Study on Communication and Writing in the New Media Era2015 March;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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