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중세 유럽의 교양교육에 관한 역사적 고찰 -자유학예의 형성과 진화를 중심으로

A Brief History of Liberal Education in Ancient and Medieval Europe -Focusing on the Formation and Evolution of Liberal Arts

Article information

Korean J General Edu. 2022;16(3):45-58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2 June 30
doi : https://doi.org/10.46392/kjge.2022.16.3.45
송성수
부산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 triple@pusan.ac.kr
Professor, Pusan National University

이 과제는 부산대학교 기본연구지원사업(2년)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이 논문은 2021년 7월 30일에 있었던 한국교양교육학회 제5회 콜로키움에서 발표한 내용을 보완한 것이다. 발표의 기회를 주신 부산외국어대학교 박병철 선생님과 이 논문을 심사해 주신 익명의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심사위원 중에서 한 분은 호평을, 다른 분은 악평을 해 주셨다. 또 다른 한 분은 수정 혹은 보완할 사항을 꼼꼼히 지적하면서 관련 자료도 소개해 주셨는데, 그것은 이 논문의 내용과 표현을 개선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Received 2022 May 20; Revised 2022 June 01; Accepted 2022 June 17.

Abstract

이 논문에서는 교육사, 대학사, 철학사, 과학사 분야의 선행연구를 활용하여 자유학예의 형성과 진화를 중심으로 고대와 중세 유럽의 교양교육을 역사적으로 고찰했다. 교양교육의 초보적 형태는 기원전 4세기 그리스에서 출현했으며, 철학자 전통과 웅변가 전통이 교양교육의 두 접근법을 형성했다. 로마 시대에는 그리스 학문이 백과사전적 편찬의 형태로 수용되었고, 기원전 1세기에는 자유학예의 관념을 담은 ≪새로운 자유 학문분과≫가 발간되었다. 중세 초기에 세속적 학문은 암흑기를 맞이하면서도 자유학예를 매개로 그 명맥을 유지했다. 5세기에는 ≪필로로기와 머큐리의 결혼≫을 통해 자유학예가 자유칠과로 구체화되었으며, 6세기 이후에는 자유칠과가 3학과 4과로 구분되는 양상을 보였다. 12세기 르네상스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포함한 고대의 문헌이 대거 번역되었고, 그리스 철학을 자유학예와 연관시키려는 시도도 나타났다. 1250년경에는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 대학이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중세 대학은 대체로 학예학부, 신학부, 법학부, 의학부로 조직되었다. 13세기 후반부터 학예학부는 기존의 자유칠과에 자연철학, 형이상학, 윤리학 등 세 가지 철학을 추가함으로써 자유학예의 범위를 더욱 확장시켰다.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이 논문은 자유학예의 범위가 고정되지 않고 계속 변화해 왔다는 점과 고중세 유럽의 교양교육에서 인문학과 과학이 분리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 토의했다.

Trans Abstract

This paper examined the history of liberal education in ancient and medieval Europe, focusing on the formation and evolution of liberal arts using materials concerning the history of education, history of university, history of philosophy, and history of science. The elementary form of liberal education emerged at Greece in the fourth century BC. The philosophers’ tradition and the orators’ tradition made two approaches to liberal education. Greek scholarship was accepted in the form of encyclopedic publications in the Roman era, and Disciplinarium libri novem, the first work which contained the idea of liberal arts, was written in the first century BC. In the early medieval ages, so called dark ages, secular scholarship maintained its existence through the medium of liberal arts. In the fifth century, liberal arts became actualized into the seven liberal arts through De nuptiis Philologiae et Mercurii. Since the sixth century, the seven liberal arts were divided into trivium and quadrivium. In the Renaissance of the twelfth century, ancient writings were extensively translated including Aristotelian works, and the attempt to relate Greek philosophies and the seven liberal arts was tried. Circa 1250, some universities were set up in the major cities of Europe, and medieval universities were mostly organized with the faculties of arts, theology, law, and medicine. Since the late thirteenth century, the arts faculty extended the scope of liberal arts by adding three philosophies to the existing seven liberal arts: natural philosophy, metaphysics and ethics. Based on the above examination, this paper showed that the scope of liberal arts was not fixed but continuously changed, and that humanities and science were not separated in ancient and medieval Europe.

1. 서론

교양교육에 관한 영어 표기로 자주 사용되는 것은 ‘liberal education’과 ‘general education’인데, 이를 우리말로 직역하면 각각 자유교육과 일반교육이 된다. 이 중에서 general education은 학문이 분화되고 전문화된 이후에 등장한 개념으로 철학, 경제학, 물리학, 기계공학 등과 같은 전공에 관계없이 모든 학생들이 공통적으로 알아야 할 일반적인 지식에 주목한다고 볼 수 있다. general education은 19세기에 거론되기 시작한 뒤 1910년대 이후에 몇 차례의 실험을 거쳐 1960년대 미국 대학에서 본격적으로 제도화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O’Banion, 2016). 이처럼 general education은 19~20세기에 들어서야 개발된 개념이기 때문에 교양교육의 역사적 연원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liberal education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교양교육은 “자유로운 인간 존재를 양성하는 데 적합한 교육의 체계 혹은 과정”으로 정의되며, 그 기원은 ‘자유학예’로 번역되는 리버럴 아츠(artes liberales; liberal arts)에서 찾을 수 있다(https://en.wikipedia.org/wiki/Liberal_education). 여기서 아트(art)의 어원인 라틴어 ‘아르스(ars)’는 인간의 다양한 활동에 필요한 기본적인 기량(skill)에 해당하므로 자유학예는 자유로운 인간이라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역량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주지하듯이 자유학예의 골간을 이룬 것은 문법, 수사(변증법), 논리, 산수, 기하, 천문(화성학), 음악 등의 일곱 과목이었다. 이러한 일곱 자유학예(seven liberal arts)는 흔히 ‘자유칠과’로 번역되며 문법, 수사, 논리는 3학(三學, trivium)으로, 산수, 기하, 천문, 음악은 4과(四科, quadrivium)로 분류된다. 이처럼 교양교육은 자유학예를 근간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liberal education’ 대신에 ‘liberal arts education’이란 영어 표기가 사용되기도 한다.

교육의 역사나 과학의 역사를 다룬 국내의 저술에도 이러한 사실이 간략하게 언급되고 있다. 교양교육의 역사를 다룬 한 단행본에 따르면, “자유교과가 7개로 확정된 것은 고대 로마에 와서이며, 중세에 와서는 신학적 세계관과 결합하여 새로운 변용을 겪게 되고, 중세 대학에서는 신학, 법학, 의학과 같은 전공교과의 예비교과로서의 위상을 확립하게 된다”(손승남, 2011: 95). 또한 우리나라의 과학사 수업에서 교재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한 서적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중세 대학에는 신학, 법학, 의학 등 3개의 전공학부가 있었는데, 과학은 이들 높은 전공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수하는 교양학부(Arts Faculty)에서 다루어졌다. 중세 대학에서 교양과목으로 가르치던 교과목으로는 문법, 수사학, 논리학 등의 소위 三學(trivium)과 산수, 기하학, 천문학, 화성학 등의 四科(quadrivium)가 있었다”(임경순, 정원, 2014: 55-56).

이 논문의 목적은 자유학예의 형성과 진화를 중심으로 고중세 유럽의 교양교육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는 데 있다. 필자는 앞의 두 인용문이 당시 교양교육의 양상을 적절히 담아내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제기하고자 한다. 자유학예의 개념은 언제 등장했는가? 그 이전에는 교양교육이 없었는가? 언제부터 자유학예가 자유칠과로 구체화되었는가? 대학은 어떤 배경에서 탄생했는가? 중세 대학의 교양교육은 어떤 시스템 속에서 작동했는가? 중세 대학은 계속해서 자유칠과 중심의 교양교육을 실시했는가?

이 논문에서는 교육사, 대학사, 철학사, 과학사 등에서 이루어진 선행연구들을 다각도로 활용하여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가능한 한 수긍이 가는 대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물론 교양교육의 전반적인 역사를 검토하고 있는 몇몇 연구도 고중세 교양교육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지만(Kimball, 1995; 손승남, 2011), 이 논문은 자유학예의 형성과 진화에 초점을 두면서 이와 관련된 주요 개념의 기원과 전개에 대해 천착한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앞의 두 인용문은 자유학예가 처음부터 자유칠과로 이루어져 있었다거나 중세 대학의 교양과목이 계속해서 3학과 4과로 유지되었다는 인상을 주고 있는데, 이러한 서술이 어느 정도 타당한지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한 것으로 판단된다.

2. 교양교육의 기원과 자유학예의 출현

교양교육은 중세에 제도적으로 정착된 자유학예의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그 기원은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Axelrod, et al., 2001: 50). 기원전 5세기가 되면 폴리스마다 소피스트로 불린 교사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오늘날의 고등교육에 해당하는 학문을 배우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개인적인 교습을 실시했다. 소피스트들은 학생들에게 삶의 지혜를 가르칠 수 있다고 장담했으며, 인간에 관한 학문, 특히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것과 관련된 학문에 관심을 기울였다. 학생들은 일류급에 속하는 소피스트들로부터 논리학, 윤리학, 문학비평에 관한 내용을 중심으로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윌리암 보이드, 2008: 55).

주지하듯이 소피스트들은 상황에 적합한 논변을 중시했으며 그들의 철학적 기반은 상대주의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최초의 소피스트라 할 수 있는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490?-420? BC)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했는데, 이때 인간은 보편적 인류가 아니라 개별적 인간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Socrates, 470?-399 BC)는 교육의 목적을 절대적 진리에 접근하는 능력을 함양하는 데서 찾았으며, 보편적 이성을 가진 존재로서 “너 자신을 알라.”고 주문했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내면에 진리를 담고 있다고 간주했으며, 그것이 제대로 실현되도록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고 이성적으로 사유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던 셈이다.

기원전 4세기가 되면 아테네에서 고등교육을 담당하는 학교가 설립되었다. 이소크라테스(Isocrates, 436-338 BC)가 기원전 393년경에, 플라톤(Platon, 428-347 BC)이 기원전 387년경에 학교를 열었던 것이다. 이소크라테스가 당시에 현실적인 수요가 많았던 웅변 교육을 강조했던 반면, 플라톤은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따라 철학 교육을 중시했다(앙리 마루, 2019: 139-140). 이소크라테스는 기존의 소피스트와 달리 4년 정도의 긴 기간 동안 교육을 실시했고 학생들이 수사학적 기술을 연습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주었다. 이소크라테스의 학교에서 학생들은 이론만 배운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논쟁을 벌였다. 학생들은 역사적 사건이나 당대의 사건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주제에 대해 글을 쓰고 발표를 했으며, 교사가 설명한 원리에 비추어 자신과 다른 학생들이 수행한 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했다(윌리암 보이드, 2008: 57-58).

플라톤의 학교인 아카데미아(Akadêmia)는 실습이나 실제가 아닌 이론에 주의를 기울였으며, 요령의 습득이 아닌 진리의 탐구를 추구했다. 이와 관련하여 플라톤은 이성에 기초를 둔 진정한 지식으로 보편적인 답을 추구하는 에피스테메(episteme)와 개별화되어 있는 저속한 형태의 지식, 즉 의견을 뜻하는 독사(doxa)를 구분하기도 했다(앙리 마루, 2019: 149). 아카데미아가 진리탐구를 목적으로 학문을 추구하는 정신에 해당하는 아카데미즘(academism)의 어원이 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플라톤은 철학적 주장을 고정된 학설로 익히고 그것을 기억 속에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소크라테스가 실시했던 대화법을 사용하여 인간과 세계에 관한 근본적인 실재를 발견하는 것을 지향했다(윌리암 보이드, 2008: 58). 물론 플라톤도 변증법을 강조했지만 그것은 진정한 철학적 방법에 해당했다는 점에서 임기응변식의 수사나 웅변과는 차별화되었다.

플라톤이 구상했던 교육체계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청소년 시절에는 문학, 음악, 체육을, 20대에는 수학을, 최종적으로는 변증법을 중심으로 교육을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보였다(윌리암 보이드, 2008: 67-70). 플라톤이 거론한 수학은 산수, 기하학, 천문학, 음악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특히 그는 이데아에 접근하는 도구로 기하학을 중시했다. 그것은 아카데미아의 현판에 쓰였다는 경구인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 문으로 들어오지 마라.”에서 잘 드러난다. 여기서 산수, 기하, 천문, 음악은 훗날 ‘4과(quadrivium)’로 정립되는 분야인데, 그 기원은 피타고라스(Pythagoras, 580?-500? BC)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앙리 마루, 2019: 165).1), 피타고라스와 그의 제자들은 이러한 네 분야를 두루 탐구했으며, 산수는 순수한 수, 기하는 정적인 수, 천문은 동적인 수, 음악은 응용된 수로 간주했다(모리스 클라인, 2005: 402). 그러나 4과가 피타고라스학파에서는 주로 학자들 사이의 논의에 그쳤던 반면, 플라톤의 경우에는 학생들을 위한 교육과정에 포함되었다는 점에서 차별화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기원전 335년에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4-322 BC)가 리케이온(Likeion)이라는 학교를 세웠다. 그는 제자들과 산책을 하면서 강의와 토론을 했으며, 이에 따라 아리스토텔레스학파는 ‘소요학파(Peripatetic school)’로도 불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 논리학, 윤리학, 역사학, 정치학, 수학, 천문학, 물리학, 생물학 등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그는 ‘만학의 아버지’로 불릴 만큼 오늘날의 거의 모든 학문 영역을 다루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각 학문 사이에 논리적 모순이 없도록 조치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분야는 생물학이었는데, 그것은 그가 플라톤과 달리 경험과 관찰의 중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으로 풀이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물학을 비롯한 과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는 점은 리케이온을 통해 과학에서 일종의 연구전통(research tradition)이 생겨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조지 로이드, 2005: 169-170).

고대의 학문은 헬레니즘 시대를 통해 더욱 정교화되었다가 로마 시대에 들어서는 상대적으로 쇠퇴하는 경향을 보였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혹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로마인들은 법률과 도로를 비롯한 실용적인 일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이에 따라 로마 시대에는 학문이 크게 발전하지 못했고, 로마의 귀족층은 그리스 학문에 대한 백과사전적 지식에 만족하는 경향을 보였다. 로마 시대의 저술들은 독창적인 이론을 전개하기보다는 이전부터 알려진 각종 지식을 정리하여 전달하는 형태를 띠고 있었던 셈이다.

로마 시대의 백과사전적 저술에서 일종의 모델로 작용한 작품으로는 ≪새로운 자유 학문분과(Disciplinarium libri novem)≫를 들 수 있다. 그것은 ‘로마의 가장 박식한 사람’으로 평가되는 바로(Marcus Terentius Varro, 116-27 BC)가 집필했으며, ≪학문분과를 다룬 아홉 권의 책(Nine Books of Disciplines)≫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여기서 바로는 문법, 수사, 논리, 산수, 기하, 천문, 음악, 의학, 건축 등 9개 과목을 교양학문의 분과로 규정하면서 각 분과에 대한 기초적인 해설을 제공했다. 이러한 9개의 교양학문 분과 중에서 의학과 건축을 제외한 나머지 7개 과목은 훗날 자유칠과로 자리 잡게 된다(데이비드 린드버그, 2005: 234-235).2), ≪새로운 자유 학문분과≫는 자유학예(artes liberales)의 관념을 담는 최초의 저술로 간주되고 있지만, 책이 소실되었기 때문에 바로가 자유학예라는 용어를 명시적으로 사용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현존하는 저술 중에서 자유학예라는 표현을 처음 채택한 것으로는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106-43 BC)의 ≪창안에 관하여(De Inventione)≫가 꼽힌다(Kimball, 1995: 13; Tempest, 2020: 479).

키케로는 로마의 교육을 웅변가 양성의 방향으로 흐르게 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교육의 주된 목적이 교양 있는 웅변가를 양성하는 데 있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웅변교육을 정치가가 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으로 간주했다. 이런 키케로가 그리스의 철학적 논의를 계승한 자유학예에 관심을 기울인 까닭은 무엇일까? 그는 철학과 웅변이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교육받은 사람이 되려면 철학과 웅변을 모두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적절하게 표현하는 능력이 없는 지식은 쓸모가 없으며, 지식이라는 재료가 없는 웅변은 무기력하다는 것이었다. 키케로는 ≪웅변가에 관하여(De Oratore)≫에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다만 두 경우에 차이가 있다면, “웅변가는 철학자가 부드럽고 맥 빠진 용어를 논의하는 바로 그 주제를 강력하고 매력 있게 개진한다는 것뿐이다”(윌리암 보이드, 2008: 110-112).

교양교육이 언제 시작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초보적인 형태는 기원전 4세기의 이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서 찾을 수 있다. 교양교육의 사상사를 검토한 킴볼(Bruce A. Kimball)은 교양교육의 두 가지 전통으로 지식탐구 자체를 최상의 선으로 여기는 ‘철학자(philosophers) 전통’과 지식을 표현하는 데 필요한 요령을 강조하는 ‘웅변가(orators) 전통’을 들고 있는데(Kimball, 1995: xvii), 플라톤은 철학자 전통에, 이소크라테스는 웅변가 전통에 위치 지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양한 학문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그리스의 철학자 전통을 집대성했으며, 로마 시대에 그리스 학문을 수용하는 방식은 백과사전적 편찬으로 나타났다. 그 과정에서 기원전 1세기의 바로는 로마인들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교양으로 자유학예에 주목했는데, 당시에는 7개가 아닌 9개의 과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바로와 같은 시대의 인물인 키케로는 철학자 전통인 자유학예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웅변가 교육을 더욱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처럼 교양교육의 기원은 기원전 4세기의 그리스로 올라갈 수 있지만, 자유학예가 공식적인 관념으로 정립된 시기는 로마 시대, 구체적으로는 기원전 1세기라 볼 수 있다. 그것은 자유학예(artes liberales)가 그리스어가 아닌 라틴어라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3. 자유학예의 존속과 자유칠과의 정립

중세 초기에는 이전에 비해 학문이 쇠퇴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529년에 아카데미아와 리케이온이 폐쇄된 것은 이를 상징한다. 중세 초기에 학문이 쇠퇴한 배경으로는 정치적 불안정과 도시 활동의 침체로 학문의 추구에 필요한 제반 조건이 열악해졌으며, 기독교가 지배하면서 자연이나 인간에 대한 탐구가 이교도 학문으로 배척을 당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와 함께 중세 사회가 기독교 중심으로 조직되면서 유능한 인재들이 교리나 선교와 같은 종교적 활동에 종사했다는 점도 세속적 학문의 탐구에 장애로 작용했다(에드워드 그랜트, 1992: 13-17). 물론 중세 초기에 이전의 학문에 대한 논의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소수의 수도원이나 수도원학교를 중심으로 몇몇 사람들이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중세 초기에 가장 주목을 받았던 고대 학문은 종교적으로 활용하기 용이한 플라톤의 철학이었는데, 그것은 플라톤의 조물주가 약간의 확대해석을 거치면 기독교의 하나님으로 변신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데이비드 린드버그, 2005: 251).

이런 상황 속에서도 교부철학을 창시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Hipponensis, 354-430)가 자유학예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철학은 신학의 시녀(philosophia ancilla theologiae)”라는 입장을 견지했는데, 그것은 세속적 학문을 억압하는 태도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상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 학문을 탄압할 대상이 아니라 길들여서 이용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했다. 그는 자유학예가 훌륭한 생활을 영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으며, 바로와 같이 자유학예에 관한 백과사전을 구상하고 일부 집필하기도 했다(윌리암 보이드, 2008: 139). 이에 대해 고중세 과학사에 대한 기념비적인 저작을 출간한 린드버그(David C. Lindberg)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시각을 제안한 바 있다.

초대 교회를 과학진보의 장애물로 보겠다고 마음먹은 비평가라면, 과학에 하녀의 상을 부여했음을 문제로 삼을 수 있다. … 진정한 과학은 그 무엇의 하녀도 될 수 없고 그 스스로 완전한 자율성을 유지해야 하는데, 아우구스티누스가 추구한 ‘길들여진 과학(disciplined science)’을 과학이라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비판은 완전히 자율적인 과학을 상정한다. 이처럼 자율적 과학을 매력적인 이상으로 삼을 수 있지만, 우리가 이상세계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과학사에서 중요한 발전 중에는 자율적 과학에 헌신하는 과정에서 이룩되기보다, 어떤 이데올로기, 사회개혁 프로그램, 실용적 목적을 위해 과학이 기여하는 과정에서 이룩된 것도 많이 있다. 과학사에서 더 빈번하게 제기된 문제는 과학이 하녀로서 기능하느냐 않느냐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 ‘어떤’ 주인에게 봉사하느냐에 관한 것이었다(데이비드 린드버그, 2005: 253-254).

심지어 아우구스티누스부터 일곱 자유학예, 즉 자유칠과가 정립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예를 들어 박승찬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일곱 자유학예를 언어 관련 학예인 3학과(trivium)와 실제 관련 학예인 4학과(quadrivium)로 구분했으며, 전자에는 문법, 수사학, 변증법(논리학), 후자에는 대수학, 기하학, 음악, 천문학이 포함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박승찬, 2003: 56-57쪽; 박승찬, 2010: 168-169).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유학예의 관념은 가지고 있었지만 3학과 4과의 개념을 명시적으로 표현했는지는 의문이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가 문법에 관한 책을 완성했고 음악에 관한 책 일부를 집필하는 가운데 변증법, 수사학, 기하, 산수, 그리고 철학에 관한 집필 작업은 후속 과제로 남겨 두었다는 지적에 비추어 보면(West, 1912: 4), 그가 자유학예를 7개로 구상했다는 점은 수용할 수 있지만 세부적인 목록에는 천문학이 제외된 반면 철학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카시오도루스(Flavius Magnus Aurelius Cassiodorus, 485?- 585?)에 주목하는 연구자도 있다. 예를 들어 남기원은 최근에 발간한 ≪대학의 역사≫에서 카시오도루스를 수도원에서 일반인 교육을 실시한 예외적인 사례로 거론하면서 “카시오도루스는 537년에 비바리움 수도원에 학교를 설립해 기독교 신앙은 물론 세속의 학문도 같이 가르쳤다. 커리큘럼의 첫 번째 부분은 기독교 신학 서적으로 구성되었고, 두 번째는 인문학 과목들인 3학(문법, 논리, 수사)과 4과(산술, 기하, 천문, 음악)로 구성되었다.”라고 썼다(남기원, 2021: 29). 카시오도루스는 543-555년에 수도사들을 위한 일종의 교범(敎範)으로 ≪종교학과 세속학의 연구(Institutiones divinarum et saecularium litterarum)≫를 집필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책의 제1부는 종교적 문헌에, 제2부는 일곱 자유학예에 할애되어 있으며, 수도사들이 수도원 도서관에서 원전을 찾아볼 수 있도록 출처를 명시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윌리암 보이드, 2008: 148-149; 스티븐 리브지, 소냐 브렌처스, 2019: 119-120). 다만 카시오도루스가 3학과 4과의 개념을 명확히 표현했는지는 의문이다.

카시오도루스에 앞서 자유칠과를 논의했던 인물로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마르티아누스 카펠라(Martianus Capella, 360-420)를 들 수 있다(Kimball, 1995: 22-23; 찰스 해스킨스, 2021: 55). 카펠라는 자유칠과를 우화적으로 표현한 저서로 ≪필로로기와 머큐리의 결혼(De nuptiis Philologiae et Mercurii; On the Marriage of Philology and Mercury)≫을 발간했다. 책은 신랑 머큐리와 신부 필로로기의 결혼식을 묘사하고 있는데, 신부의 들러리로 참여하는 7명의 학식이 자유칠과를 상징하고 있었다. 책의 1-2권은 결혼식의 배경 무대를 설정하고 있었고, 3-9권은 자유칠과를 차례대로 설명하고 있었다. 카펠라는 자유칠과의 각 과목을 개성 있는 여성 캐릭터들로 의인화했으며, 그것은 중세와 르네상스를 통해 그림, 판화, 스테인드글라스, 부장품, 그릇 등에서 널리 채택되었다(한수영, 2020: 12-13). 카펠라의 책은 이교도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경향 때문에 표준적인 교재로 사용되지 못했던 반면, 카시오도루스의 책은 “지혜가 그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었다.”는 성서 구절과 연관시킴으로써 표준적인 교재로 널리 사용되었다는 견해도 있다(윌리암 보이드, 2008: 149).

6세기 이후에는 자유칠과가 3학(三學, trivium)과 4과(四科, quadrivium)로 구분되었다. 보에티우스(Anicius Manlius Boethius, 480-524)는 산수, 기하, 천문, 음악을 네 개의 길이 만나는 곳이라는 의미의 ‘4과’로 칭했다(에드워드 그랜트, 1992: 24). 4과는 수를 다룬다는 공통된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오늘날의 용어로 표현하면 수리과학(mathematical sciences)에 해당한다. 보에티우스가 4과를 규정한 이후에 자유칠과 중 나머지 세 과목은 3학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세 개의 길이 만나는 곳이라는 의미의 3학은 언어와 연관되어 있었다. 자유칠과가 3학과 4과로 구분된 근거로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리스도교의 가르침(De doctrina christiana)≫에 주목하는 견해도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학문은 사태(사물)에 대한 것과 표징에 대한 것이다(omnis doctrina est de rebus vel de signis)”라고 언급했는데, 이를 바탕으로 자유칠과가 언어 관련 학예(artes sermocinales)와 실제 관련 학예(artes reales)로 구분되었다는 것이다(박승찬, 2003: 56-57; 박승찬, 2010: 168-169).

중세를 통해 세속적 학문에 대한 개설서로 널리 보급된 책자로는 이시도르(Isidore of Seville, 560?-636)가 20권으로 발간한 ≪어원론(Etymologiae)≫을 들 수 있다. 그는 “이단보다는 차라리 문법이 낫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세속적 학문을 아는 것이 그릇된 교설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는 데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이시도르의 책은 사물의 이름에 대한 어원 분석을 중심으로 해당 사물에 대한 백과사전식 해설을 제공했다. 자유칠과, 의학, 법학, 역법, 신학, 인류학, 지리학, 광물학, 농학 등 다양한 학문분과가 두루 논의되었다. ≪어원론≫은 현존하는 필사본이 1,000종을 상회할 정도로 상당한 인기를 누렸으며, 12세기 전까지 고대 학문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매개물로 작용했다. ≪어원론≫은 중세의 가장 으뜸가는 종합 개설서로 간주되었지만 그 학문적 수준이 조약하여 “사실상 한심하기 그지없는 작품”으로 평가되기도 한다(데이비드 린드버그, 2005: 262-263; 윌리암 보이드, 2008: 152-153).

8세기 말에는 소위 ‘카롤링거 르네상스(Carolingian Renaissance)’로 불리는 일종의 고전부흥운동이 있었다. 프랑크 왕국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Charlemagne, 742-814) 대제는 확장된 왕국의 국민들에게 학문을 널리 보급하는 정책을 구상하면서 782-796년에 잉글랜드 출신으로 요크 학교의 교장을 지낸 알쿠인(Alcuin, 735?-804)을 교육장관으로 임명했다. 알쿠인은 <요크 교회의 주교와 성자>라는 시(詩)에서 문법, 수사, 음악, 천문, 기하 등 요크 학교에서 다룬 교과목들을 훌륭하게 개관한 바 있었다. 샤를마뉴 대제는 782년에 설교집을 전국적으로 배포하면서 “우리는 모든 백성들에게 그들의 능력이 미치는 한도 내에서 자유학예를 연마하도록 명령하며 우리 스스로가 그 모범을 보이고자 한다.”고 선언했다. 이어 787년경에는 성서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심전력으로 공부에 열중해야 한다는 교서를 성직자들에게 보냈으며, 789년경에는 수도사에게 보낸 칙령에서 모든 수도원에 학교를 세워 청소년들에게 음악, 산수, 문법 등을 가르쳐야 한다고 명령했다(윌리암 보이드, 2008: 164-170).3)

11세기를 전후하여 유럽 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 등의 모든 방면에서 부흥의 조짐을 보였다. 한층 강력한 군주들이 출현하여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고, ‘중세의 산업혁명’으로 평가될 정도로 지속적인 기술혁신과 경제성장이 잇따랐다. 이를 배경으로 1000년과 1200년 사이에 유럽의 인구는 두 배 이상 증가했으며, 수천 명의 인구가 밀집한 도시들이 곳곳에서 형성되었다. 이러한 도시들에는 다양한 형태의 학교들이 설립되어 교회나 정부의 지도자가 되기를 염원하는 야심찬 학생들을 위해 실질적인 지식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교육과정을 재정립했다. 당시에 급부상한 도시학교로는 성당학교를 들 수 있는데, 성당학교는 종교적 목표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수도원학교를 닮았지만 이전에 비해 한층 유연한 관점을 견지하면서 매우 다양한 과목을 포함시키기 시작했다(데이비드 린드버그, 2005: 311-314; 남기원, 2021: 31-38).4)

당시의 성당학교에 자유학예를 도입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로는 999-1003년에 교황 실베스터 2세로 활약한 제르베르(Gerbert of Aurillac, 946-1003?)를 들 수 있다. 그는 스페인에서 라틴어로 번역된 아랍의 몇몇 저술들을 구한 후 자유칠과와 관련된 지식을 두루 섭렵했다. 제르베르는 972-989년에 랭스의 성당학교에서 선생과 교장을 맡아 자유칠과를 가르치면서 특히 수리과학에 해당하는 4과에 본격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예를 들어 그는 하늘을 나타내는 천구를 어떻게 만드는지에 대해 설명했으며, 천구의 표면에 철사를 고정시켜 별의 위치를 표시하기도 했다. 제르베르가 그리스 학문의 최상급 수준에 도달한 것은 아니었지만 라틴 서구 전체에서 수 세기 동안 그와 비견될 만한 사례를 찾기 힘들 정도였다. 그의 능력과 열성에 감명을 받은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열심히 전파하면서 수리과학을 성당학교 교육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강조했다. 사실상 11-12세기에 유럽에 등장한 많은 성당학교들은 제르베르의 제자들이 세웠거나 가르쳤던 공간에 해당했다. 라옹, 옥세르, 사르트르, 콜로뉴, 유트레히트, 상스, 킹브라이 등이 여기에 속했는데, 이러한 성당학교들은 12세기 후반에 대학이 출현하기 전까지 자유학예에 대한 교육을 제도화한 학문적 중심지로 기능했다(에드워드 그랜트, 1992: 32; 데이비드 린드버그, 2005: 307-310).

이상의 논의에서 보듯, 중세의 상당 기간 동안 세속적 학문은 일종의 암흑기를 맞이하면서도 자유학예의 형태로 그 명맥을 유지했다. 특히 5세기에는 자유학예가 자유칠과로 구체화되기 시작했는데, 자유칠과의 관념을 최초로 논의한 인물은 아우구스티누스나 카시오도루스가 아니라 카펠라로 판단된다. 6세기 이후에는 자유칠과가 3학과 4과로 구분되었으며, 이시도르의 ≪어원론≫은 자유칠과에 대한 교재로 널리 활용되었다. 11세기를 전후하여 유럽 사회에서는 도시를 중심으로 다양한 학교들이 등장하는 가운데 제르베르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성당학교에서 자유학예에 대한 교육이 제도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4. 대학의 조직화와 자유학예의 확장

11세기 말에 십자군 전쟁이 발발하면서 유럽 세계는 이슬람 문명권과 활발히 접촉하기 시작했다. 사실상 유럽이 암흑기를 맞이하고 있을 때 그리스 학문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일은 이슬람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이슬람에서는 그리스의 서적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것은 물론 독자적인 학문 탐구도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Sabra, 1987; 데이비드 린드버그, 2005: 269-300). 이와 같은 성과는 1085년에는 십자군이 스페인의 톨레도를 함락하는 것을 계기로 유럽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세속적 학문에 대해 지적 호기심과 갈증을 느끼고 있었던 유럽의 지식인들은 아랍어로 된 그리스 문헌에 빠져들게 되었다. 당시에는 고대의 지혜에 대한 일종의 신앙심이 생겨나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12세기 초에 사르트르의 베르나르(Bernard de Chartre, ?-1130)는 “우리는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어서 이전 세대보다 더 멀리 바라볼 수 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스티븐 리브지, 소냐 브렌처스, 2019: 141; 남기원, 2021: 38).

톨레도가 탈환된 이후에는 아랍어로 된 서적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이를 지칭하는 용어가 ‘위대한 번역의 시기’ 혹은 ‘12세기 르네상스’이다(Haskins, 1927). 당시에는 철학, 수학, 천문학, 의학, 법학 등에 관한 고대의 문헌들이 대거 번역되었으며, 특히 톨레도의 지적 풍부함에 깊은 인상을 받은 제라르(Gerard of Cremona, 1114?-1187)는 70편을 넘는 책자를 번역하기도 했다(에드워드 그랜트, 1992: 35-40). 고대의 문헌들 중에서 가장 인기를 누린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었는데, 주된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이 매우 포괄적이고 체계적이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5),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상당한 주목을 받았던 인물로는 12세기 아랍 학자로 본명이 이븐 루시드(Ibn Rushd)인 아베로에스(Averroes, 1126-1198)를 들 수 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다양한 학문에 대해 자세한 해설을 수행했으며, 당시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위대한 학자(the philosopher)’로, 아베로에스는 ‘가장 위대한 주석가(the commentator)’로 불렸다(에드워드 그랜트, 1992: 48).

고대 그리스의 풍부한 학문 세계가 수용되면서 이를 자유학예와 연관시키려는 시도도 나타났다. 예를 들어 귀족 가문 출신의 여성으로 1167년에 호헨부르그 수도원의 원장이 된 란스베르그의 헤라드(Herrad of Landsberg)는 <철학의 여왕과 자유칠과(Philosophia et septem artes liberales)>라는 도상을 제작하여 여성 수도사들의 교육을 위한 자료로 활용했다. 그 도상에서 철학의 여왕은 윤리학(etica), 논리학(logica), 자연학(phisica)을 상징하는 삼면 왕관을 쓰고 있으며, 손에는 “모든 지혜는 신으로부터 나오며 현명한 자만이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적힌 띠를 들고 있다. 여왕의 우측에는 “철학으로부터 7개의 지혜의 샘물이 분출되어 교양과목을 이루며”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왼쪽으로 분출된 세 줄기는 3학, 오른쪽으로 분출된 네 줄기는 4과를 상징했다. 원의 바깥에는 네 명의 남자가 앉아 있는데, 그 위쪽에는 “순수하지 못한 영혼에 의해 이끌리는 시인과 마술사”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이런 식으로 <철학의 여왕과 자유칠과>는 신의 지혜, 철학, 자유칠과를 서로 연결하여 한 장의 회화적 도상으로 재현하고 있었다(한수영, 2020: 15-19).6)

더 나아가 볼로냐와 파리를 비롯한 몇몇 도시에서는 새로운 유형의 고등교육기관으로 스투디움 게네랄리스(studium generalis)가 등장했다. ‘일반학습소’로 번역할 수 있는 스투디움 게네랄리스는 출신 지역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배움의 장소를 의미했다. 일반학습소가 크게 팽창하면서 학생들과 교사들은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조직화의 수순의 밟았다. 당시에 상공업 분야에서 발전하고 있었던 길드가 모델을 제공했는데, 선생은 선생끼리, 학생은 학생끼리 자발적 결사의 형식으로 조합을 만들었다(윌리암 보이드, 2008: 187-188). 1190년경부터 고향이나 국적이 같은 학생들은 동향단(natio)을 구성했으며, 1250년경에는 더욱 포괄적인 결속체로 오늘날 대학의 어원이 되는 ‘우니베르시타스(universitas)’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선생들도 연합된 학생들의 이해관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교수단(collegium doctorum)과 같은 조합을 구성했다(크리스토프 샤를, 자크 베르제르, 1999: 21-23; 볼프강 베버, 2020: 22-23).

중세 대학 중에 볼로냐, 파리, 옥스퍼드는 ‘위대한 어머니 대학들(great mother universities)’로 평가된다(윌리암 보이드, 2008: 176). 초기의 대학들은 새로 설립된 것이 아니라 기존 학교로부터 점진적으로 성장해 왔기 때문에 특정한 설립 시기를 확정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대략적으로 볼로냐는 1150년경, 파리는 1200년경, 옥스퍼드는 1220년경에 대학의 조건을 갖춘 것으로 평가되며, 13세기가 되면 명백한 행정적 기능을 갖춘 법인으로 대학이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다(데이비드 린드버그, 2005: 336). 볼로냐 대학은 법학에서, 파리 대학은 신학과 자유학예에서 강세를 보였다. 옥스퍼드 대학에서는 기숙사(collegium)에서 출발한 칼리지(college)가 대학의 중요한 구성요소로 자리 잡았다.7), 중세의 대학은 대부분 200-800명의 학생 수를 유지했으며, 주요 대학에는 이보다 많은 학생들이 다녔다. 옥스퍼드 대학과 볼로냐 대학에는 14세기에 1,000- 1,500명 정도, 파리 대학의 경우에는 절정기에 2,500-2,700명 정도의 학생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데이비드 린드버그, 2005: 339).

대학의 규모가 커지면서 대학 내부의 조직화도 요구되었다. 중세 대학의 내부 조직은 시공간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보였지만 대체로 4개의 학부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학예학부(faculty of arts), 신학부, 법학부, 의학부가 그것이다. 학예학부는 대학에 입학한 모든 학생들이 공통으로 이수하는 학부였다. 신학부, 법학부, 의학부는 상위학부(higher faculties)에 해당하는데, 학예학부를 마친 학생들에게 상위학부의 입학이 허용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8), 네 개의 학부는 종종 에덴동산의 네 강줄기에 비유되었으며, 학예학부는 건물의 기초, 법학부와 의학부는 벽, 신학부는 지붕에 비유되는 경우도 있었다(남기원, 2021: 94). 대학별로 차이가 있긴 했지만, 많은 경우에 네 학부 중에 대학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것은 학예학부로 평가되고 있다. 선생과 학생의 수가 많아 행정과 재정의 규모가 컸으며 학예학부장이 대학 전체의 운영을 맡는 사례가 많았다. 또한 학예학부는 젊은 선생들을 많이 확보하고 있었으며 교회 당국에 저항하는 데도 앞장섰다(윌리암 보이드, 2008: 195-196; 요시미 순야, 2014: 75).9)

중세 대학에서는 학사(bachelor), 석사(master), 박사(doctor)와 같은 학위 시스템도 생겨났다. 학예학부에서 3-4년 동안 수강한 학생은 학사학위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으며, 이 시험을 통과하면 학예학사(bachelor of arts, BA)의 자격을 취득했다. 학사학위시험에서는 토론에서 답변할 수 있는 능력이 중시되었는데, 답변 능력이 있으면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수준에 오른 것으로 간주되었다. 학사가 자발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면, 석사와 박사는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사람을 뜻했다. 학예학부에서 석사나 박사를 받기 위해서는 학사학위를 받은 후 적어도 2-3년 정도가 추가적으로 소요되었다. 오늘날의 용례와 달리 석사와 박사가 위계적이지는 않았는데, 예를 들어 이탈리아에서는 박사, 프랑스에서는 석사가 주로 사용되었다. 길드 시스템과 비교하자면, 일반 학생은 도제(apprentice), 학사는 직인(journeyman), 석사와 박사는 장인(master)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길드 시스템의 장인이 가게를 운영했던 것처럼, 석사와 박사는 스스로 학교를 열고 영업을 할 수 있었다(크리스토프 샤를, 자크 베르제르, 1999: 51-52; 데이비드 린드버그, 2005: 338-339).

이와 같은 학부 시스템과 학위 시스템을 고려해 볼 때 중세 대학의 학예학부는 오늘날 대학의 교양과정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고 평가할 수 있다. 오늘날 대학에는 교양과정을 담당하는 기구가 전공을 담당하는 학과(부)에 비해 세력이 약한 경향을 보이지만, 중세 대학에서는 학예학부가 대학 전체의 운영을 주도하는 경향을 보였다. 또한 중세 대학의 학예학부에서 수학하는 기간은 적어도 3-4년이었던 반면, 오늘날 대학에서는 학생들이 1년 정도의 분량으로 교양과목을 이수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중세 대학의 학예학부가 오늘날의 학제로는 대학원 이전에 밟는 학부(undergraduate)의 일종이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신학부, 법학부, 의학부와 같은 상위학부는 오늘날의 대학원(graduate school)에 해당하는데, 그것은 중세 대학의 학생들이 학예학부를 마친 후에 상위학부로 진학했다는 점에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중세의 학제를 오늘날의 학제와 단순하게 비교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으나 그만큼 중세 대학에서 교양교육의 비중이 높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14-15세기 독일 대학의 역사를 분석한 쉬빙에스(R. Chr. Schwinges)는 당시 대학생들의 유형을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는 학예학부를 2년 정도 수학하고 대학을 떠난 경우였다. 둘째는 학사학위를 받은 후 하급학교의 교사나 가정교사로 활동하는 유형이었다. 셋째는 학사학위를 받은 후 2-3년 동안 추가적인 공부와 보조강의를 수행하여 학예학부의 석사를 받는 유형이었다. 이 유형 중에는 학예학부의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상위학부를 이수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들은 ‘교사학생(Magisterstudent)’으로 불리기도 했다. 넷째는 학예학부에서 학사학위를 받은 후 상위학부로 진학하여 상당한 세월을 거쳐 석사나 박사까지 이르는 경우였다. 다섯째는 고위 신분의 학생으로 자신의 신분과 관련된 학위를 적당하게 취득하는 유형이었다(볼프강 베버, 2020: 43-44).10)

중세 대학에서 학생들은 상당한 이동의 자유를 누렸다. 특히 여러 분야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고자 하는 학생은 대학을 빈번히 옮겨 다녔는데, 이러한 점은 과학혁명의 선구자에 해당하는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의 경력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1491년에 폴란드의 크라쿠프 대학에 입학하여 학예학부에서 논리, 기하, 천문 등을 배웠다. 4년 뒤 고향인 토룬으로 돌아가 사제가 되었으며 1497년에는 프라우엔부르그 대성당에서 참사원 직을 받았다. 코페르니쿠스는 1496년에 교회법을 배우기 위해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에 입학한 후 1500년까지 법학 공부를 하면서 천문학 연구도 병행했다. 1501-1503년에는 파도바 대학의 의학부에서 수학했으며, 1503년에는 페라라 대학에서 법학박사를 받았다. 이처럼 코페르니쿠스는 약 12년 동안 대학을 다니면서 학예학부, 법학부, 의학부를 두루 섭렵했다. 이후에 그는 교회법과 의학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 천문학 연구에 몰입할 수 있었다(요시미 순야, 2014: 49-51). 이와 같은 이동성이 보장되었던 이유 중의 하나로는 “중세 대학들은 강조점과 전문성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동일한 교재로 동일한 과목을 가르치는 공통의 교육과정을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데이비드 린드버그, 2005: 343).

중세 대학의 수업은 각 교과목에서 권위 있는 텍스트의 문장 하나하나를 사변적으로 따지는 스콜라 학풍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스콜라적 교육방식은 강의와 토론을 중심으로 긴밀하게 배치되었다. 강의는 텍스트를 개략적으로 풀이하는 특별강의와 텍스트에 대한 심도 있는 해설을 제공하는 일반강의로 구성되었다. 특별강의는 상급생이나 학사가 맡았고, 일반강의는 석사 이상의 선생이 담당했다. 토론은 질문(question), 응답(response), 결정(determination)의 순서를 밟았다. 선생이 질문을 제기하면 학생들은 그 질문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근거를 들어 응답했으며, 마지막으로 선생이 여러 입장을 종합하거나 정확한 해법을 제시하는 결정을 담당했다(크리스토프 샤를, 자크 베르제르, 1999: 48-50; 볼프강 베버, 2020: 49-51).

중세 대학에서 학예학부가 담당한 자유학예의 범위가 고정되지 않았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학예학부의 교육과정은 3학과 4과를 포함한 자유칠과를 기본으로 삼았지만, 새롭게 부상하는 분야에 대한 개방성도 보였다. 이와 관련하여 2002년에 ≪유럽 대학의 역사≫를 발간한 볼프강 베버(Wolfgang Weber)는 “13세기 후반부터 학예학부에서는 고전적인 3학과 4과에 ‘3개의 철학(three philosophies)’, 즉 형이상학, 자연철학 및 도덕철학(윤리학)이 덧붙여졌다.”고 서술하고 있다(볼프강 베버, 2020: 136).11) 13세기 후반 이후에 중세 대학의 자유학예에는 자유칠과에 세 가지 철학이 추가되는 양상을 보였던 셈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중세 대학 학예학부의 주된 교육과정은 오늘날 과학에 해당하는 분야들(4과와 자연철학)과 인문학에 속하는 분야들(3학, 형이상학, 윤리학)로 구성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자연학≫, ≪형이상학≫, ≪윤리학≫ 등과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 학예학부의 주요 교재로 사용되면서 자유학예에 대한 교육의 수준은 한 단계 고양되는 계기를 맞이했다.

학예학부의 교육과정이 보여주는 또 다른 특징으로는 오늘날 과학에 해당하는 분야가 상당한 위상을 차지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과학은 인문학과 함께 모든 학생들이 이수해야 하는 오늘날의 필수 교과에 해당했던 것이다. 다소 과장된 면이 있어 보이지만, 그랜트(Edward Grant)는 1971년에 발간한 ≪중세의 물리과학(Physical Science in the Middle Ages)≫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중세 대학의] 필수 교과 과정은 중세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신학과 형이상학으로 짓눌려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논리학(문법적인 것을 많이 흡수한)과 물리학(모든 종류의 물리적 변화를 포함한), 우주론, 그리고 천문학과 수학의 요소들로 구성되었다. 사실상 학예학부의 모든 학생들이 공통된 교과 과정에 따라 공부했기 때문에 중세의 고등교육이 근본적으로 논리학과 과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이같이 논리학과 과학이 모든 학생들에 대한 고등교육의 바탕이 되었던 것은 전후무후한 일이었다(에드워드 그랜트, 1992: 42).12)

13-14세기의 대학에서 문법과 수사학이 상대적으로 중시되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라틴어 문법은 대학에 들어오기 이전에 미리 배워야 할 과목으로 여겨졌으며, 논리학이 논증 방식에 대한 학습을 주관하게 되면서 수사학의 위상도 낮아졌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르네상스 인문주의(humanism)를 매개로 반전되는 경향을 보였다. 인문주의는 키케로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전해지는 ‘후마니타스(humanitas)’에서 이후의 역사가들이 끌어온 용어이다. 15세기 이탈리아 대학에서 인문학은 문법, 수사학, 문학 등의 분야를 포괄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정교한 라틴어 혹은 그리스어를 구사하면서 우아한 문학적 스타일을 추구하는 것을 중시했다. 이와 함께 소규모 국가들이 난립하는 상황에서 정치적 참여도가 높은 시민을 양성하기 위해 수사학이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피터 디어, 2011: 62-63; 손승남, 2011: 133).

이상 4절에서는 중세 대학의 출현과 조직화 속에서 자유학예가 어떻게 진화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12세기 르네상스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포함한 고대의 문헌이 대거 번역되었고, <철학의 여왕과 자유칠과>와 같이 그리스의 철학을 자유학예와 연관시키려는 시도도 이루어졌다.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는 새로운 유형의 고등교육기관으로 스투디움 게네랄리스가 등장했으며, 1250년경에는 오늘날 대학의 원형이 되는 우니베르시타스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중세 대학은 대체로 학예학부, 신학부, 법학부, 의학부로 구성되었으며, 그 중 학예학부는 모든 학생들이 공통으로 이수하는 학부로 대학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13세기 후반부터 학예학부는 기존의 자유칠과에 자연철학, 형이상학, 윤리학 등 세 가지 철학이 추가된 교육과정을 운영함으로써 자유학예의 범위를 더욱 확장시켰다. 기존의 자유칠과 중에서 논리학과 4과는 꾸준히 교육되는 경향을 보였던 반면, 문법과 수사학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5. 맺음말

이 논문에서는 교육사, 대학사, 철학사, 과학사 분야의 선행연구를 활용하여 자유학예의 형성과 진화를 중심으로 고중세 유럽의 교양교육을 역사적으로 고찰했다. 오늘날 교양교육의 기원은 기원전 4세기 그리스에서 찾을 수 있으며, 철학자 전통과 웅변가 전통이 교양교육의 두 접근법을 형성했다. 로마 시대에는 그리스 학문이 백과사전적 편찬의 형태로 수용되었고, 기원전 1세기에는 자유학예의 관념을 담는 최초의 저술에 해당하는 ≪새로운 자유 학문분과≫가 발간되었다. 중세 초기에 세속적 학문은 암흑기를 맞이하면서도 자유학예를 매개로 그 명맥을 유지했다. 5세기에는 ≪필로로기와 머큐리의 결혼≫을 통해 자유학예가 자유칠과로 구체화되는 가운데 6세기 이후에는 자유칠과가 3학과 4과로 구분되면서 이에 대한 교육이 본격화되었다. 12세기 르네상스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포함한 고대의 문헌이 대거 번역되었고, 그리스 철학을 자유학예와 연관시키려는 시도도 나타났다. 1250년경에는 유럽의 주요 도시에서 대학이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중세 대학은 대체로 학예학부, 신학부, 법학부, 의학부로 조직되었다. 13세기 후반부터 학예학부는 기존의 자유칠과에 자연철학, 형이상학, 윤리학 등 세 가지 철학을 추가함으로써 자유학예의 범위를 더욱 확장시켰다.

본문의 논의에서 드러났듯, 고중세 유럽에서 자유학예의 범위는 고정된 것이 아니었고 계속해서 진화하는 양상을 보였다. 자유학예 자체가 역동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자유학예의 역사에서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 것으로는 기원전 1세기에 자유학예의 관념이 탄생했다는 점, 5세기에 자유학예가 자유칠과로 구체화되었다는 점, 6세기에 자유칠과가 3학과 4학으로 구분되었다는 점, 13세기에 자연철학, 형이상학, 윤리학 등의 세 가지 철학이 자유학예에 포함되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처럼 자유학예는 역사적으로 계속적인 변화를 겪었으므로 자유학예와 자유칠과를 구분하지 않거나 자유학예의 구성을 획일적으로 표현하는 서술은 보다 세련된 논의로 보완될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고중세 유럽의 자유학예가 오늘날의 인문학과 과학을 함께 포괄했다는 점도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자유칠과 중의 3학은 오늘날 인문학에, 4과는 오늘날 과학에 연관되어 있으며, 세 가지 철학 중에서 자연철학은 오늘날 과학에, 형이상학과 윤리학은 오늘날 인문학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다면 몇몇 선행연구들이 채택하고 있는 ‘인문교양교육’이란 표현은 특별히 오늘날의 인문학에 초점을 두지 않는 이상 ‘교양교육’으로 변경하는 것이 합당해 보인다. 사실상 오늘날과 달리 고대와 중세에는 인문학과 과학 혹은 철학과 과학이 분리되지 않았다. 철학의 어원은 ‘지혜에 대한 사랑’을 뜻하는 그리스어인 ‘필로소피아(philosophia)’이며, 과학은 ‘안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시엔티아(scientia)’에서 파생되었다. 필로소피아는 그리스어이고 시엔티아는 라틴어일 뿐 철학과 과학은 모두 학문 전반을 포괄하는 용어였던 셈이다. 물론 ‘인문교양교육’이란 어법에는 한국 사회의 독특한 맥락과 문제의식이 반영되어 있으며, 그것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추적하는 작업은 별도의 연구과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논문의 범위를 넘어서긴 하지만, 인문학과 과학의 분리를 특징으로 하는 오늘날의 학문체계가 형성된 계기로는 16-17세기 과학혁명을 들 수 있다. 과학혁명을 통해 근대과학이 출현하고 그것이 더욱 전문화되면서 점점 인문학과 분리되는 양상을 보였던 것이다. 물론 과학혁명의 주역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계속 ‘철학’이라고 불렀지만, 그것은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철학(new philosophy)’이었다. 뉴턴(Isaac Newton, 1642-1727)이 ≪프린키피아(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 “나는 가설을 만들지 않는다.”고 선언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뉴턴은 물체들 사이의 운동이 유지되는 일차적인 원인으로 만유인력에 주목했지만, 그러한 원인의 본질이나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면서 이를 가설로 배격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철학이 차츰 기존의 철학과 분리되어 오늘날의 과학으로 자리 잡게 되었던 셈이다(김영식, 2009: 89-90).

이 논문에서 살펴본 고중세 교양교육의 역사가 오늘날의 교양교육에 함의하는 바는 무엇인가? 물론 과거의 역사에서 직접적인 교훈을 찾는 것은 곤란하겠지만, 교양교육의 기본적 성격에 대한 일반적인 시사점은 도출할 수 있다. 우선, 고중세를 통하여 자유학예의 목록이 지속적인 변화를 겪었듯이, 오늘날의 교양교육도 교육환경의 변화에 개방적이고 유연한 자세를 견지할 필요가 있다. 교양교육은 자유로운 인간의 양성을 지향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데, 자유로운 인간에게 요구되는 역량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또한 고중세의 교양교육이 인문학과 과학을 함께 포괄했다는 점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인문학과 과학을 대립시키거나 교양교육의 요체를 인문학으로 환원하는 것은 총체적 인간성을 함양하는 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인문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족한 과학에 대한 교양교육을 확충하고, 더 나아가 인문학 속에서 과학을, 과학 속에서 인문학을 찾으려는 전향적인 자세가 요구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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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1)

여기서 음악은 청소년기와 20대에 두 번 등장하고 있다. 청소년기에는 음악을 감상하는 것이, 20대에는 음악에 관한 수학적 이론을 공부하는 것이 중시되었다. 고중세의 음악 학습은 오늘날과 같은 연주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음정에 대응하는 수의 비율을 다루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2)

바로의 9개 과목 중에서 의학은 교양교육이 아닌 전문직교육의 대상이 되었고, 건축은 아트가 자유학예와 기계적 학예(mechanical arts)로 분화되면서 자유학예에서 제외된 것으로 판단된다. 자유학예는 정신적인 활동을 강조했던 반면, 기계적 학예는 반복적인 숙달을 중시했다고 볼 수 있다.

3)

카롤링거 르네상스가 과연 르네상스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견해도 있다. “카롤링거 왕조의 르네상스란 수적으로 극히 제한된 일부 엘리트계층만을 위한 르네상스로 교회와 손잡은 카롤링거 군주제에 행정가들과 정치가들을 위한 작은 묘판을 제공하는 구실밖에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자크 르 고프, 1999: 38-39).

4)

중세의 사회경제적 변동에 대해서는 Gimpel(1976); 자크 르 고프(2008)를 참조.

5)

아리스토텔레스 학문의 수용에 대해서는 박승찬(2001)을 참조. 이와 관련하여 이정우는 ‘아리스토텔레스 혁명’이란 개념을 사용하면서 “12세기에 이루어진 방대한 번역 사업은 서구 학계에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거성(巨星)을 등장시켰고, 이 변화는 엄청난 지적 지진을 일으켰다.”고 평가한 바 있다(이정우, 2011: 711).

6)

<철학의 여왕과 자유칠과>의 주요 내용에 관한 해설은 Tidbury(2020)를, 교육적 의미에 대한 분석은 한수영(2020a)을 참조. <철학의 여왕과 자유칠과>에서는 윤리학, 논리학, 자연학이 철학으로, 문법, 수사, 변증법, 음악, 산수, 기하, 천문학이 자유칠과로 분류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자유칠과의 범위가 시공간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7)

볼로냐 대학, 파리 대학, 옥스퍼드 대학에 관한 자세한 분석은 이광주(1997: 63-166); 이석우(1998: 99-257)를 참조.

8)

‘faculty of arts’는 교양학부, 인문학부, 문학부, 철학부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이 논문에서는 자유학예의 전통을 감안하여 ‘학예학부’로 표기했다. 또한 신학부, 법학부, 의학부를 포괄하는 ‘higher faculties’는 전공학부, 전문학부, 고급학부 등으로 번역되고 있지만, higher의 사전적 의미를 따라 ‘상위학부’란 역어를 선택했다. 이와 관련하여 2011년에 ≪대학이란 무엇인가≫를 출간한 요시미 순야(吉見俊哉)에 따르면, “19세기 영국을 필두로 한 유럽의 여러 대학에서 법학부나 의학부, 신학부와 병존하는 또 하나의 학부에 붙여진 명칭은 학예학부에서 철학부(faculty of philosophy)로, 이어서 문학부(faculty of letters)와 이학부(faculty of science)로 변화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문학’이 아니라 ‘인문학(humanities)’이 대학의 학부 명칭으로 빈번하게 사용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이다”(요시미 순야, 2014: 119). 학예학부, 철학부, 문학부, 인문학부 등의 용례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향후의 연구과제로 남겨두기로 한다.

9)

중세 대학의 네 학부에서 이루어진 교육의 구조와 내용에 대해서는 볼프강 베버(2020: 45-77); Ridder-Symoens ed.(1992: 307-441)를 참조.

10)

데이비드 린드버그(2005: 340)에 따르면, 학예학부에서 석사를 마친 사람이 상위학부의 학위를 받는 데는 의학 5-6년, 법학 7-8년, 신학 8-16년과 같은 “참으로 긴 세월의 인내”가 요구되었다.

11)

이러한 점은 데이비드 린드버그(2005: 341); 김영식(2009: 75-76)에도 언급되어 있다.

12)

이와 관련하여 1254년 파리 대학에서 학예학부의 학위를 위해 제시한 필수도서목록은 다음과 같다(Norton, 1909: 136-137). (1) 구(舊)논리학: 포르퓌리오스의 ≪이사고게≫, 아리스토델레스의 ≪범주론≫과 ≪해석론≫, 보에티우스의 ≪분할론≫과 ≪변증론≫, (2) 신(新)논리학: 아리스토델레스의 ≪분석론 전후편≫, ≪소피스트 논박≫, ≪토피카≫, (3) 도덕철학: 아리스토델레스의 ≪윤리학≫, (4) 자연철학: 아리스토델레스의 ≪자연학≫, ≪천체에 관하여≫, ≪기상학≫, ≪동물에 관하여≫, ≪영혼에 관하여≫, ≪생성과 소멸에 관하여≫, ≪감각과 감각대상에 관하여≫, ≪수면과 걷기에 관하여≫, ≪기억과 회상에 관하여≫, ≪삶과 죽음에 관하여≫, ≪식물에 관하여≫, (5) 형이상학: 아리스토델레스의 ≪형이상학≫, (6) 기타 도서: 길베르투스 포레타누스의 ≪6원리의 서≫, 도나투스의 ≪대문법≫, 프리시아누스의 ≪문법강요≫, 코스타 벤 루까의 ≪원인론≫, ≪원인론≫의 다른 번역서인 ≪정신과 영혼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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