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량기반 교양교육에 대한 교육적 타당성 비판

Criticism of the Educational Validity of Compentency-based Liberal Education

Article information

Korean J General Edu. 2022;16(2):11-30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2 April 30
doi : https://doi.org/10.46392/kjge.2022.16.2.11
손종현
대구가톨릭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교수, haksoson@cu.ac.kr
Professor. Daegu Catholic University

이 논문은 2021년 한국교양교육학회 교양교육 연구 프로젝트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Received 2022 March 20; Revised 2022 April 04; Accepted 2022 April 11.

Abstract

이 연구의 목적은 ‘교양교육이 핵심역량을 겨냥하는 것이 교육적으로 타당한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다. 이 논의를 전개하면서 연구자는 핵심역량 개념과 연관하여 대학 교양교육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있다. ‘핵심역량 제고를 위한 교양교육 체제 구축’ 혹은 ‘핵심역량 제고를 위한 교양교육과정 편성⋅운영’이라는 어법이 과연 성립 가능한 것인가, 과연 그것이 교육적으로 타당한 것인가에 대해 비판적으로 논의하고자 했다.

연구자는 ‘지금 여기’ 우리 사회의 대학 교양교육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핵심역량으로 교양교육을 쟁점화하는 비합리(非合理)에 대한 것이 아닐까 의심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핵심역량 담론이 교양교육의 본질과는 동행할 수 없다. 핵심역량은 전공교육과는 동행한다. 핵심역량은 차라리 직업교육과 대학 전공교육에서 감당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핵심역량이라는 말 자체는 주로 대학 전공학과에서 키워야 하는 능력과 관련되어 있다. 전공교육은 이미 전공 관련 핵심역량을 포함하여 전공능력을 키우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교양교육은 ‘교양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교양교육은 핵심역량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학습능력과 다양한 종류의 학습능력을 키운다. 이것이 대학 교양교육에서 키워야 하는 능력이다. 이런 교양능력을 키우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새삼 논의해야 한다.

Trans Abstract

This research aims to reconsider the idea that liberal education cultivating core competencies is an acceptable one in terms of the ‘educational validity question’. This research focuses on the identity of liberal education in a university in relation to the concept of core competencies. This study critically examined whether the usage of the ‘establishment of a liberal education to enhance core competencies’ or the ‘organization and operation of the liberal education curriculum’ to improve core competencies is suitable and valid.

This research looks into the problems that university liberal education is facing in our society ‘now and here’. The conclusions are as follows: The discourse of core competencies can not go along with the essence of liberal education. However, core competencies can go along with a student’s major. Core competencies may be covered in vocational education and in major education at a university. In fact, the phrase ‘core competency’ is mostly related to certain capabilities that are to be developed in the major departments of a university. Major education is already aimed at developing a student’s chosen major capabilities, including the core competencies of their chosen major. However, the goal of liberal education is to develop ‘cultural capabilities’. Liberal education does not develop core competencies but various types and kinds of learning abilities. These abilities should be cultivated in liberal education at a university. We need to reconsider how to cultivate these competencies once more.

1. 서론

연구자는 ‘지금 여기’ 우리 사회, 교양교육이 직면하고 있는 난제(難題)는 무엇인가 묻는다. 연구자는 ‘핵심역량’ 개념으로 교양교육을 쟁점화하는 비합리에 대한 것이 아닐까 의심한다.1) ‘2021년 대학 기본역량 진단’에서 말하는 “핵심역량 제고를 위한 교양 교육과정 체제 구축”(교육부⋅한국교육개발원, 2020.2.7)이라는 말이 과연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성립하는가를 문제상황으로 설정한다.

이 연구의 목적은 ‘핵심역량 담론’이 교양교육의 본질과 접합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답을 내놓고자 하는 것이다. 역량기반 교양교육이 그 자체로서 과연 교양교육의 본질을 담보할 수 있는가에 대해 따져 묻는다. 담대한 가설이 필요하다. 바꾸어 묻는다. 핵심역량 키우기, 이것이 교양교육이 지향할 바의 목적 혹은 근거가 될 수 있는가? 교양교육과 핵심역량교육은 무엇이 다른가? 핵심역량으로 교양교육을 쟁점화하는 것이 교육적으로 타당한가? 이것에 대한 답을 내놓는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논의한다.

첫째, ‘역량기반 교양교육’ 자체에 대해 비판적으로 논의한다. 핵심역량 담론에 대한 학술적 분석을 새삼 진척시키되, 정치경제학적, 교육인식론적, 개념분석론적 분면에서 비판적 논의를 전개한다.

둘째, 교양교육과 핵심역량교육의 차이에 대해 논의한다. 교양교육과 핵심역량교육은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상호 접합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논의하면서, 교양교육이 핵심역량을 겨냥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 것임을 주장한다. 타당성 비판의 요소로서 인재상과 교육목적, 교육과정, 학습경험을 포인트(point)로 삼아 그것을 논의한다.

이 연구목적과 연구내용을 궁구하고자 할 때, 연구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방법론적 관점을 가지고 접근한다.

첫째, ‘교육적 타당성 물음’의 관점을 가지고 방법적으로 접근한다. ‘타당성’이란 명제의 참값을 검증하고자 할 때 언제 어디서라도 승인할 수 있는 공리일 때 성립하는 성질을 지칭한다(이삭 편집부, 1985: 379). 교육적 타당성을 질문하는 반성적 숙고를 거치면서 대학 교양교육의 현상을 쟁점화하고자 한다. 여기서 ‘교육적 타당성 물음’이란 교육논리에 근거하여 교육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거기서 해법을 구하는 방식을 말한다.2), 이는 교육의 문제를 교육논리로 풀어내려는 교육인식론적 숙고와 맞먹는다. 교육적 타당성 물음을 가질 때 ‘교육인 것’과 ‘교육 아닌 것’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된다(손종현, 2018a: 52).

둘째, 이 연구를 진척하면서 교육을 바라보는 이론적 분기점을 선명하게 설정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부각한다. 어떤 경우에도 교육은 인간다움의 능력을 키우는 활동, 다시 말해 앎을 추구하여 자아를 확장하는 삶에 충실하도록 가꾸는 의도적 활동이다. 그것이 인간 발달을 견인한다. 이것이 교육에 대한 이론적 분기점이다.3)

이 두 관점에 서서, 연구자는 교육 문제를 정치⋅경제 문제가 아니라 인간 문제로 인식하고 질문하는 방식을 견지한다. 이 개념에 충실할 때 진정 인간교육과 교양교육이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2. 역량기반 교양교육에 대한 비판적 논의

2.1. 정치경제학적 비판4)

2.1.1. 신자유주의 경제논리의 위세

현재 자본주의 단계로서 우리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무한경쟁과 초과이윤을 강제하는 경제논리를 강조한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은 대학에 대해 고급인력 양성과 핵심역량 교육체계를 요구해 왔다. 교육부는 대학기관평가라는 기제를 통해 이것을 관철하고 있는바, 대학교육을 핵심역량 교육과정으로 체제화하면서 그 교육을 더욱 악성으로 내몰고 있다. 대학 총장과 보직자와 교수들은 이 기제에 관해 무사상으로, 무관념으로, 자발적으로 굴복해 왔다. 이리하여 정치와 경제가 이른바 최고교육기관인 대학의 교육에 직접 개입하게 되었고, 대학으로 하여금 수단적 가치에 매몰되는 교육과정을 펼치도록 요구하였다. 2010년대에 들어와 그 외적 힘은 더욱 강성해졌다. 이 세력들은 ‘역량중심 교육과정’이란 이름을 앞세워 중등교육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대학교육을 정치⋅경제⋅경영의 수단으로 삼고자 했다.

이 경제논리에 근거하여, 역량기반 교육과정은 기업 경영에 필요한 역량(기술⋅기능)을 중시한다. 그 경제논리에서 의사소통역량, 글로벌 역량, 자원⋅정보⋅기술의 활용 역량, 종합적 사고력, 대인관계 역량, 자기관리 역량 등이 추앙되고 있다(K-CESA 대학생핵심역량 진단 시스템). 그러면서도 예컨대 세계이해 및 비판 능력, 사회정의 능력, 노동자적 연대 능력, 투쟁 능력 등은 배제되고 있다. 평화공존과 공정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이 능력은 참으로 귀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이 능력은 항상 배제되기가 일쑤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OECD가 펀드를 지원한 DeSeCo 프로젝트는 다국적 글로벌 기업의 후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우리 사회는 전범(典範)으로 여기고 벤치마킹하고 있다. 이 작업에 참여한 연구자가 하는 말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대학생 핵심역량 체제 구축의 목적은 “국가경제를 선도하고 사회적 변화와 기업의 요구에 부응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국가적인 인적자원개발 체제를 확립하는 것”이라고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진미석⋅손유미 외, 2011: 471). 핵심역량체제 구축이 교육학적 이유가 아닌 정치경제학적 이유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고백이다. 문제는 정작 미국 등 선진사회에서는 핵심역량을 그렇게 강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김지현, 2010: 95). 조남민 등이 참여한 선행연구에서 “해외 국가나 대학에서는 역량기반 교육이 주로 전문 기술을 요하는 분야에 적용되는 경우가 많았고, (중략) 인문사회 분야와 같은 교양 영역에만 역량기반 교육과정을 적용하여 운영하는 예를 찾기는 어려웠다”(조남민⋅손달임 외, 2021: 281)고 분석하고 있다.

선진국가들은 시장원리에 입각한 교육개혁을 추진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정작 핵심역량을 운운하기보다 교양교육과 교양능력을 요구하고 있다. 이 사실은 우리 사회 대학이 교육개혁의 방향으로 진정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에 대해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2.1.2. 인간자본론의 일반화

‘핵심역량’은 정확히 따지고 보면 ‘인적자본’을 이론화하는 경영학 개념이다. 그런데 교육학에서, 특히 직업교육과 평생교육 분야에서 핵심역량 개념을 차용해서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다. 물론 직업교육이나 평생교육 분야에서 이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다. 그러나 이를 일반교육이나 교양교육에 일반화하는 방식은 개념적으로 실제적으로 정당하지 않다. 그런데도 초⋅중등교육이든 대학교육이든, 그 교육론이 과히 역량 투성이라고 할 수 있다. 교육목적에도, 교육과정에도, 교육방법과 교육평가에도, 교육제도에도 핵심역량 개념이 늘 붙어다닌다.

오늘날 대학교육 현실에서 교육과정을 수식하는 언어가 ‘핵심역량’이다. 교양교육과 교양교육과정에서도 ‘핵심역량, 핵심인재, 역량기반, 맞춤형⋅수준별 역량’의 어법이 위세를 떨치고 있다. ‘인적자원 개발’, ‘맞춤형 역량교육’, ‘산업화 중견인력 수요’ 그리고 ‘일류대학의 고급인력 공급’과 같은 정치경제학적 어법을 교육논리로 삼고 있다. 역량기반 교육과정은 그 배경을 따져 보면 한 마디로 인적자본론과 인물중심발전교육론에 다름 아니다.5)

인간자본론이 전횡하는 곳에, 인간교육의 이념이 무너진 곳에, 기술패권주의가 위세를 부리고 있다. 기술패권주의를 반영하는 인력관리 이데올로기가 발전교육론을 장식하고 있고, (그것이 지닌 사회성을 추상해 버린 채) 통제 명분이 된 발전교육론이 교육목표와 교육과정의 설계 지침으로 강화되어 직접 현장교육을 수식하고 있다. 무엇을 가르치고 왜 가르치는지의 타당성 질문은 다만 장식품의 치장에 불과하고, 가르치고 난 후의 결과로서 성적과 석차의 가치가 교육목표의 준거가 되었다. ‘그들에게’ 학생은 人力이지 세상을 조망하는 人間이 아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내용 없는 형식으로 탐구학습을 교육과정에서 허구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탐구는 공허할 수밖에 없고, 그 자체 흥미가 있을 리 없다.

우리 사회의 경우, 신자유주의 추세를 반영하여 ‘인재대국’이 교육논리가 되어 교육의 관념과 실제에서 추앙되고 있다. 이는 19세기 말 개화기 시절의 ‘국가 교육조서’의 발전교육론을 연상케 하기에 충분하다. 과거 식민지 경험을 계승한 기존의 교육학에는 人才 양성이 모든 立論의 근거가 되었다. 인력 양성 관념이 교육과정과 교육제도를 수식하고 있다. 이는 인물중심발전교육론이라는 신진화론이 강력하게 작용한 탓에 기인한다. 그 이후의 현실 세상에 인물중심발전의 논리가 패권을 행사하고 있다. 이 논리의 바탕을 이루는 배경에, 또 그 연장선상에 핵심역량 담론이 지배적 담론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교육은 핵심역량을 키우는 것이고, 그 인재⋅인물은 ‘핵심역량’을 갖춘 엘리트 인재이다. 그들은 대체로 이런 어법을 이데올로기화 하고 있다.

  • 역량이 중요하고 핵심역량이 더 중요하다. 교육은 이것에 복무하는 것이다.

  • 핵심역량을 갖춘 인재⋅인물이 세상을 보기 좋게 이끈다.

  • 엘리트 인재는 소수이다. 이 소수가 사회지도자가 되고 국가경쟁력을 이끈다.

  • 그 엘리트 인재가 첨단기술을 개발하여 세계시장을 석권한다.

이 어법은 신자유주의, 신보수주의 사회에서 세력을 얻고 있는 인물중심발전의 논리이다. 인물중심발전의 논리는 그 자체로 반교육적인 것이다. 이 어법은 국가 개입과 기업 개입을 승인하고 유인하는 현실 자본주의 경쟁사회의 추세를 강화한다.

2.1.3. 否定의 否定: 인간발달 교육론

人才교육의 현실론을 펴는 모든 세력은 근본적으로 자기기만의 권력이라 할 수 있다. 인재인물양성론은 조선시대 과거제도와 그 이후 일제강점기 시험제도를 거치면서 증폭되었다. 그래서 품위 있는 교육학과 교육론은 뒷전에 밀리게 되었다. 인재인물양성론이 인적자본론으로 계승되었고, 이것이 우리 사회에 주류의 교육학이 되었다. 예컨대 교육은 소수 똑똑한 人才⋅人物을 키우는 것이라는 관념, 인재인물은 직무역량으로 판별 가능하다는 것, 학교는 역량 평가에 의한 성적과 석차를 산출하는 곳이라는 것, 선발은 시험 쳐서 人才⋅인물을 골라내는 것이라는 것, 이것이 교육학의 이론과 체제로서 정당화되었다. 사람 분별의 기제가 시험제도이고 평가체제였고, 그래서 보편적 교육론이 들어설 여치를 최소화하였다. 학교교육을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의 기제로서 통찰하고서, 국가주의 관치교육에 대해 개념적으로 인식하고 이를 비판하는 교사들의 사회적 성실성을 반교육적 사상으로 치부해버렸다. 관치교육에 편승하는 교육권력은 현장 교사의 교육과정 기획의 자율을 허용할 리 없었고, 언제나 그것을 행정 관리의 대상으로 규정했다. 인간교육을 지향한 교육문화가 시대의 특수성으로 인해 사상성(철학과 방향)을 잃게 되었을 때, 핵심역량 담론을 키워 얼마든지 그것을 억압적인 이데올로기 통제수단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이제 인적자본론에 근거한 그 교육학을 정통의 인간발달 교육론으로 대체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음을 분명히 한다.

연구자는 교육을 수단으로 여기는 경제논리를 거부하고, 인간을 ‘쓸모 있고 없고’로 바라보는 인적자본론을 거부한다. 연구자는 내재적 교육론, 즉 ‘쓸모없음의 쓸모’에 동의한다(조용기, 2005). 이 개념 위에서 오늘의 대학 교양교육을 철학하지 않을 수 없다. 왜 경제논리와 인적자본론의 관점을 거부하는가? 기본적으로 교육은 쓸모 있는 인물을 길러내는 투자 활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육은 인간을 수단화 하는 일에 복무할 수 없다. 교육은 과정을 무시한 채 성과만 따져서는 안 된다. 취업과 실용을 강조하면서 성과를 미리 작정하고 그 성과를 만들어내는 수단을 강구하는 활동을 두고, 거기서 도출된 교육 개념과 교육과정 개념, 그리고 교육체제 운영방법과 그것을 강화하는 교육정책에 동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제, 교육논리에 근거하여 학습형사회(교육사회)를 만들어내는 새로운 교육체제 구축에 대해 정책적으로 집중해야 한다.

2.2. 교육인식론적 비판6)

2.2.1. ‘다양한 형태의 학습능력’ 신장의 가치화

학생은 사회적 존재로서, 지적⋅사회적⋅도덕적 능력이 통합된 사회적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학생들로 하여금 그 다양한 형태의 능력을 키우고 발휘하도록 해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한 분면에 빠져 ‘그’ 능력만 키우는 것이 아니며, 또 한 특성(예컨대 사회성 혹은 시민성)만의 기능을 키우는 것이 아니다(Dewey, 조용기 역, 2016: 24-25).6)

‘지금 여기’ 우리 교육은 다양한 형태의 학습능력을 신장하는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렇다면 먼저 다양한 형태의 인간능력을 찾아내고 그것을 북돋우는 기제를 마련해야 한다. 예컨대 지식기반사회(4차 산업혁명시대)의 시대 흐름에 필요한 인간능력과 그 앎(지식)은 과연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가 숙고해야 하는 질문, 주로 다룰 반성적 질문은 이런 것이다.

  • 학생들이 가진 학습자원은 무엇인가? 관심, 의욕, 태도가 학습자원이 될 수 있는가?

  • 단지 앎을 수용하는 경험이 아니라, 발생적으로 앎을 만들어내는 교육적 경험이란 무엇이며, 이것을 제공하는 학습상황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 그 학습상황은 학력 혹은 교양능력과 어떻게 연관하는가?

  • ‘다양한 형태의 학력’이란 무엇이며, 이것을 어떻게 신장할 것인가?

  • 학생들이 가진 창의성을 어떻게 학습능력으로 키우고 그것을 기록할 것인가?

  • 그 창의성 학력을 주요 대상으로 삼는 입직⋅선발 방식을 어떻게 제도화할 것인가?

인간은 누구나 경험에서 배움을 얻고 앎을 만들어내는 의욕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의욕과 능력의 핵심은 경험을 반성하여 앎을 만들어내는 힘이다. 이 의욕과 능력이 ‘학습능력’이다. 학습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질이 더 높고 폭이 더 넓은 경험을 필요로 한다. 이른바 ‘교육적 경험’을 요청한다. 학교는 그것을 제공하는 시스템이다. 교양교육과 관련한 그 학습능력은 곧바로 교양능력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교양능력’이란 전공능력7),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학교가 기획한 교양교육과정을 통해 키우고자 하는 다양한 형태의 학습능력을 말한다. 이것은 전공능력 이외의 능력으로서, 학교교육(교양교육과정)의 효과로서 성취하게 된 능력을 통칭한다. 이것이 ‘핵심역량’과는 사실 무관한 것이다. 그 학습능력, 교양능력은 직업세계(세상)에 나가 ‘일다운 일’을 할 수 있는 태도와 능력으로 전화된다(손종현, 2021: 35-40).

여기서 ‘다양한 형태의 학습능력’을 실체화하면 그것은 무엇인가? 선행연구에서 연구자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개념화한 바 있다. “학교는 다양한 학습자원을 북돋우고, 의욕을 키우고, 자긍심도 키운다. 학교는 관계적 사고, 확산적 사고능력, 자유과 공존의 가치 등의 다양한 형태의 학습능력을 키우는 곳이다. 학교는 다양한 형태의 학습능력을 키우는 곳이지, 핵심역량을 키우는 곳은 아니라는 말이다”(손종현, 2014: 119). 요컨대 학교는 이런 개념의 다양한 형태의 학습능력을 키우는 교육기관이다. 이 학습능력을 인문학적 힘으로, 교양능력으로 키워야 한다. 상호 연관성이 부족한 몇 가지 역량을 키우는 곳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2.2.2. ‘다양한 종류의 학습능력’ 획득의 가치화

대학 교양교육에서 키워야 하는 것은 역량 혹은 핵심역량이 아니라 보편적 학습능력이다. 그것도 다양한 종류의 학습능력을 키워야 한다. 학교이고 교육기관이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학교는 학습능력(교양능력과 전공능력)을 키우는 곳이다. 학교의 학교기획과 교수의 교육기획를 통해 구성한 교육과정을 거쳐 지식, 태도, 기능을 키운다. 그것의 종류는 지적⋅정의적⋅심동적 능력이다. 교양교육 분야와 전공교육 분야에서 그것을 키운다.

이 경우 어떤 종류의 학습능력이 있는가? 이 지점에서 ‘한국교양기초교육원’(2016)에서 잘 정리하고 있다, ‘대학 교양기초교육의 표준 모델’에서 대학의 교양기초교육에서 함양해야 할 능력과 자질로서, 다양한 문해(Literacy) 능력, 정보수용 능력, 총체적 조망 능력, 지식창출 능력, 소통과 공감 및 협동 능력, 합리적 사고와 감성적 정서를 통합하는 능력 등을 열거하고 있다. 그 능력을 교육적 방법으로 키워야 한다. 그 능력을 키우고 있는가가 학교 혹은 교육기관의 인식 준거이다.

한국교양기초교육원(2016)은 특히 교양교육을 통해 키워야 하는 능력으로 다음과 같은 능력을 꼽고 있다. 이것은 능히 연구자가 말하는 ‘다양한 종류의 학습능력’이라 일컬을 수 있다.

복잡한 사안을 섬세하게 세분하여 명료화시킬 수 있는 분석적 사고 능력, 그리고 분석된 내용을 다시 종합할 수 있는 유기적 총체적 사고 능력, 보편개념을 다뤄 판단하고 추론할 수 있는 논리적 사고 능력, 부조리를 식별하고 바로잡을 수 있는 비판적 사고 능력, 새로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창의적 사고 능력 등의 지적 능력

물론 ‘다양한 종류의 능력’ 개념에 매몰될 때 전인적 발달보다는 주지주의적 인간을 만들기 쉽다. 인간의 전면적인 발달을 도모해야 하는데 주지주의적 능력 중심의 교육은 인간의 신체, 대인관계, 배려, 감정, 정서 등과 같은 면을 등한시할 수 있다(신득렬, 2021: 15). 이와 같은 부면을 조화롭게 키우면서, 다양한 종류의 학력을 학습능력으로, ‘교양능력’으로 키워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급하더라도, 교육의 분기점을 염려하면서 이것에 인식의 초점을 둘 수밖에 없다. 몇 가지 핵심역량을 지목하고 이것을 집중적으로 키운다고 해서 되는 문제는 아니다.

2.2.3. 삶을 통제하는 앎의 형성: 지적⋅도덕적 발달을 이끄는 교육적 경험의 제공

인간 존재는 자기 관심사를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추구하는 자이다. 또 인간은 그 결과로서의 앎을 가지고 삶을 통제하는 자이다. 그래서 인간 존재는 물음의 현장에 있다. 그 인간은 현장을 구성하고 그 현장에서 앎을 추구하고 그 앎을 확장한다. 그 앎을 추구⋅확장하기 위해 그는 다양과 창의를 산출하는 교육공간의 자원에서 도움을 받는다. 그 자원 중에서 교양교육만한 것이 없다. 이런 점에서 교양교육은 삶을 통제하는 앎의 형성과 관련된 것이다. 교양교육은 삶을 지도하는 앎을 형성케 하는 인간 활동이다. 교양교육은 그 형성된 앎이 삶의 밑천이 되게 하는 인간 활동이다. 교양교육은 그것에 복무하여 인간 삶을 풍성하게 한다.

근원적으로 교육은 젊은 세대의 삶의 안정(생존체계의 구축)을 향한 당대 세대의 근심이다. 삶의 안정을 이끄는 교육이 당대 세대의 공적 관심사이다. 삶의 안정은 어떻게 확보되는가? 앎에 통제되는 삶을 산다면 그는 삶의 안정을 확보할 수 있다. 인간은 앎을 가지고 삶의 안정을 확보하고자 한다. 그 삶을 통제하는 앎을 형성하기 위해 교육적 경험을 제공하고, 그 교육적 경험으로 지적⋅도덕적 발달을 이끈다. 인류는 이 교육을 발명하였고, 이 교육에 ‘교양교육’(자유교육)이라는 이름을 부가하고 있다.

이 경우, 앎은 지식과 이해와 탐구의 능력을 포함한다. 인간은 지식과 이해와 탐구의 능력을 획득하여 생존을 지속한다. 그 지식과 이해를 넓히기 위해 탐구를 지속한다. 그 지식과 이해는 탐구에서 나온다. 여기서 ‘물음-탐구와 발견-안목’의 도식이 성립한다. 그 도식은 그 자체가 교양능력이고, 이것을 키우는 것을 겨냥한다. 이 도식을 근거로 삼아, 앎을 형성하고 갈무리할 수 있는 교육적 경험을 제공하고, 다양과 창의를 허용하는 교실 공간을 만들고, 지적⋅도덕적 발달을 이끌고, 개성적 존재의 자기 관심사 추구를 허용한다. 이는 그 자체가 교양교육을 표상한다. 굳이 핵심역량 교육을 거론할 필요가 없다.

모름지기 교육의 목적은 지식⋅이해⋅탐구의 학습능력을 키우는 것이며, 이를 통해 지적⋅도덕적 발달을 성취하는 것이다. 단순히 몇 가지 역량의 획득과 확장이 아니라는 말이다. 인간은 지식과 이해와 탐구의 능력을 이용해서 자연에서 노동하여 생산물을 얻고서 생존체계를 구축하고, 사람과 교제하여 이웃을 얻고서 평화공존의 공동체 관계를 형성한다. 그 지적⋅도덕적 발달은 교육의 목적이자 인간다움의 조건이다.

교육은 이해와 공동체 관계(관계의 핵심은 관용 혹은 용서)의 삶의 방식에 의도적으로 관여한다. 의도적으로 관여한다는 것은 관여를 규범화한다는 것이다. 규범화는 사실과 설명의 교실, 그리고 진실과 체득의 학교를 가능케 하는 발전프로그램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교실사회 발전프로그램과 학교사회 발전프로그램을 가지고 교육을 문제제기하는 것이 교육의 논리를 지키는 일이다. 물론 그 논리는 교실과 학교를 넘어선다. 교육의 임계치는 삶의 방식의 변혁이다. 그것을 만들어내는 교육을 통해 학습형사회 혹은 교육사회가 성립한다. 이는 교양교육의 문제이지 핵심역량교육의 문제가 아니다.

2.3. 개념분석론적 비판8)

2.3.1. 역량 개념의 용법과 의미

역량은 대개 인적⋅물적⋅문화적 능력을 통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예컨대 코로나19 정례 브리핑에서 “역학조사의 역량을 시험받고 있는 상황”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코로나 사태가 위세를 더하자 의료진이 갖추어져야 하고, 의료 약품과 시설과 설비가 확장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공적 차원의 대응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말한다. 이 경우에 ‘역량’ 개념은 적합성을 띤다. 적합한 용법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상당 경우 역량 개념을 과도하게 이해⋅해석⋅적용하고 있다. 스킬(skill) 개념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역량이든 스킬이든, 그것에 대한 의미를 개념분석을 통해 명료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역량은 일단 영어 단어로 competency로 표기하고, 이것을 능력(capability)과 구별해서 이해하는 편이 옳다. 개념적으로 말해, 역량은 ‘무엇에 관한’ 능력을 표기한다. 모름지기 역량은 ‘무엇에 대해서’이다. 역량은 대개 주어진 시간 내에 어느 정도로 도달(숙달)했는가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문제는 ‘지식과 기술, 태도, 가치를 총망라하는 의미로서’ 개념화하면서 역량 개념을 과도하게 넓게 설정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렇게 정의하는 것에 대해 수용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상당한 정도의 쟁점이 되고 있다.

‘역량’ 어법과 ‘핵심역량’ 어법은 다르다. ‘역량’ 개념은 직업교육과 평생교육 분야에서 사용하는 용어이다. ‘핵심역량’ 개념은 주로 경영학(경제학)에서 사용하는 개념이다. 대학교육에 적용할 경우에 핵심역량 개념은 주로 전공교육에서 사용할 수 있다. 전공학과에서는 관련 분야에서 요구하는 핵심역량을 키워야 하는 것이다. 이를 교양교육 분면에 적용하면서 심각한 문제가 생겨난 것이다.

역량에는 단계가 있다. 낮은 단계에서, 역량은 주로 기능과 관련되어 있다. 역량은 일정한 조건 속에서 일정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말한다. 역량은 특정한 업무를 잘 수행할 수 있는 훈련된 능력, 다시 말해 그 무엇에 대해 잘 수행할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일컫는다. 그 무엇에 해당하는 가치를 실현하는데 필요한 충분한 수단(어떤 지식과 기술)을 알고 그것을 발휘한다는 것이다(김민남, 2012: 139). 높은 단계에서, 역량은 이론적으로 개념과 원리를 터득하는 것, 그것에 기초하여 흐름을 파악하고 난관이 생겼을 때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기능인(능숙하게 처리하는 자 人才)에 머물지 않고 기술자(흐름을 아는 자, 난관이 생겼을 때 흐름을 파악하고 이를 해결하는 자 人材)에 해당한다. 이는 대학교육과 연관시키면 전공교육에서 키워야 할 인물형이다.

역량을 키우는 교육이 교양교육이 될 수 있는가? 교양교육이 역량교육으로 전화할 수 있는가? 교양교육은 핵심역량 키우기가 아니라 교양 혹은 교양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교양(능력)은 인간임의 조건이며, 인간의 노고와 열정에 대한 믿음이며,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삶의 능력과 태도이다. 또 교양은 대상세계에 대한 앎, 예컨대 지리의 눈, 물리의 눈, 예술의 눈, 건축의 눈에 대한 것이다(손종현, 2014b). 그 교육을 통해 교양교육은 ‘앎이 행을 통제하는 삶의 방식’ 변혁을 이끄는 교육에 대한 것이다. 그 앎을 갈무리하여 삶과 행을 정돈하도록 지도한다(손종현, 2014b). 교양교육의 범주는 크게 문명에의 입문, 인간적 만개(滿開, flourishing), 학습기술 획득으로 나뉠 수 있다(신득렬, 2021: 11-21). 그것을 지시하는 것이 교양교육인바, 이는 핵심역량교육과는 무관하다.

교양교육에 대해 논의하면서 핵심역량교육과 뒤섞어 쓸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라고 교양교육을 핵심역량과 취업역량과 人才양성과 뒤섞어 사용하는 것은 범주적 착오를 범하는 일이다. 범주적 착오를 즐기는 무개념의 기본역량진단체제에서 기능하는 대학과 교수들은 경제주의, 취업주의, 경쟁주의의 교육모순을 재생산한다.

2.3.2. 태도와 의욕과 헌신의 문제

앞에서 역량은 모종의 가치를 실현하는데 충분한 수단이 무엇인지에 대해 잘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이때 그 충분한 수단은 모종의 지식과 기술로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 역량은 무엇에 관한 지식과 기술을 특별히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내포한다. 그렇다면 그가 그 일에 역량이 있다는 것은 그 일을 수행하는데 빠질 수 없는 지식과 기술을 가지고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량 개념은 지식과 기술에 국한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문제는 그것이 지식과 기술을 발휘할 때의 태도를 포함하는가 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태도가 의욕과 헌신과 같은 자세를 뜻하기도 한다. (때에 따라서는 태도가 모종의 철학, 관점, 성품을 뜻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면, 역량은 의욕과 헌신을 포함하는, 정의적 영역의 가치화와 인격화가 겨냥하는 삶의 방식까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9), 이 논의를 교육목표분류학에다 적용하면, 역량은 정의적 영역 중의 가치화(valuing), 조직화(organization), 인격화(characterization)의 능력을 포괄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가진다.10) 달리 말해, 역량 개념이 크게는 가치화와 인격화의 인간다움의 능력, 작게는 교양능력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역량 개념이 주로 지식과 기술에 적용되는 것임에 비해, 교양능력 개념은 그 역량에 집중하는 삶의 태도(삶의 방식)를 발휘한다는 것을 내포한다. 그 삶의 태도(삶의 방식)는 단지 그가 기능전문가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김민남, 2012). 이때 삶의 태도로서의 능력은 반드시 인문학적 교양능력이다. 그 무슨 일을 잘 수행한다고 하는 것은 그 일이 기대하는 실적을 낸다는 것이며, 그것에 익숙하고 그것에 동의하고 그것에 헌신하는 태도와 자세를 굳건하게 견지한다는 것이다. 그 태도와 자세는 교양능력으로 존재한다.

지식과 기술을 키워야 하고 태도와 헌신의 가치를 키워야 한다고 할 때, 그 전자 말고 후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역량교육이 아니고, 교양교육이 그것에 온전하게 대응할 수 있다. 그 능력은 교양능력에 기초한다. 역량 담론이 이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역량은 태도, 의욕, 헌신의 가치를 담보하지 못한다. 역량은 특정한 업무 혹은 노동을 잘 수행할 수 있는 훈련된 능력을 나타낼 따름이다.

이 지점에서 논의를 진척시켜, 과연 ‘역량이 사고와 정서를 통합하는 능력의 가치를 담보하는가’에 대해서까지 추궁할 수 있다. 합리적 사고와 감성적 정서를 통합하는 능력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성과 감성의 통합이 실재(reality)로서 가능하다. 교양교육은 이것을 키우고자 하는 것이다. 또 합리적 사고를 넘어서서 이를 정서적 감응과 통합할 수 있는 능력, 과학적⋅수학적 사고 능력과 더불어 예술적 감수성을 통합하는 능력, 인문학적 직관과 도덕적 성찰 능력 등은 모두 교양과 관련된 것이고, 교양교육과 관련된 것이다. 이는 고도의 창의적 통합적 사고능력과 연관된 것이다. 교양교육은 능히 이를 보증할 수 있다. 그러나 역량은 사실 이 능력을 담보하지 못한다. 역량교육은 이 통합능력의 교육을 담보하지 못한다. 역량교육은 특히 삶의 ‘인문학적 힘’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것에 비해, 교양교육은 곧장 그것을 대변한다. 교양은 태도 혹은 신념이라는 능력을 포함한다. 태도는 마음의 작용에 의한 것이고, 마음(mind)의 힘에 따른 것이다. 태도는 인간 고유의 특성을 가리키는 행위양식인 바, 모든 사람에게 태도를 키울 수 있다. 그 태도 혹은 신념도 교양능력의 한 요소이다. 이 말은 역량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태도는 학교와 교사의 교육과정 맥락에서 형성되는 법이다. 학생들은 씨앗에 해당하는바, 열매를 맺게 하는 환경이 정의적 영역의 교사(학교)의 교육과정 맥락이고 가르치는 프로그램이다. 정의적 영역의 태도 혹은 신념이 작용하여 참여와 역할의 계기를 열고 그 효과의 기반을 다진다. 그 정의적 영역의 태도를 형성할 수 있고, 이는 교양능력으로서 갈무리된다.

인간의 마음은 이해, 태도(신념), 기능이라는 서로 다른 능력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이 三者의 능력의 형태는 인간의 고유한 능력 요소이다. 그 이해, 태도, 기능이 사회적 정신을 띠고 있고, 그래서 도덕적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그것이 교육적 가치로 승인된다. 이 경우, 이해⋅태도⋅기능을 신장하는 주된 교육적 방식은 이러하다.

  • 온전히 설명함으로써 이해에 이르게 한다.

  • 가치화와 인격화의 과정을 경험케 함으로써, 태도 혹은 신념을 형성한다.

  • 목적(준거, 표준)에 맞춤으로써 기능을 능숙하게 한다.

교육적 방식을 바탕으로 이해⋅태도⋅기능의 학습능력(형태가 서로 다른 능력)을 키우기 위해 애쓴다. 그 결과로서 학생은 이해와 태도와 기능을 밑천으로 삼아 일을 일답게 하고 즐겁게 일을 함으로써 교육목적을 완성한다. 이는 명백히 교양교육의 분면에 해당하는 것이다.

2.3.3. ‘실력’과의 개념적 연관 문제

학력은 실력을 내포하는 데 비해, 역량은 실력을 내포하는가? 역량은 실력과 동일시할 수가 있으되, 때로는 서로 다르다.

학습능력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학습능력은 실력으로 나타난다. 실력은 무엇에 관한 학습능력으로 나타난다. 실력은 그 사회의 요구에 적응하는 그 사람의 필요를 충족할 수 있는 삶의 요소이다. 이 경우 실력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실력은 그 일의 경지라고 판정할 수 있는 능숙한 일 처리 방식과 그 능숙성에 배어 있는 창조적 태도를 일컫는다”(김민남⋅손종현 외, 2013: 46). 그런데 역량은 전자를 보증하지만 후자를 보증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학습능력은 이 양자를 다 포괄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실력을 키운다고 할 때, 그것은 역량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학습능력을 키우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교양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실력은 자신의 삶을 살아온 내력에 뿌리내린 직분을 다하는 것을 내포한다. 간단히 말해, 실력은 삶에 뿌리내린 능력을 말한다. 그때 실력은 목적과 수단을 갖춘 체계적 행위를 하려는 태도와 병행한다. 이 경우 실력은 실제적 결과를 산출하기 위해, (또 그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죽을힘을 다하는 ‘전문가적’ 처신과 병행한다(김민남⋅손종현 외, 2013: 46). 그런 점에서 학습능력(교양능력)은 ‘실력’의 의미에서 역량의 경계 혹은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물론 ‘전문실력꾼’이라고 할 때는 헌신하는 태도를 갖추었기 때문에 교양능력을 가진 人材를 전제하기도 하고, ‘꾼’이기 때문에 전문가적 기술과 기능을 갖춘 人才를 전제한다고 할 수 있다.

2.3.4. 핵심역량 개념의 몇 가지 한계

여러 선행연구(손승남⋅김인영⋅송하석 등, 2021; 유현숙, 2004; 정훈, 2021; 최석민, 2021; Rychen & Salganik, 2000)에서 핵심역량 개념이 범주의 과잉, 의미의 과잉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연구자는 이를 인정하면서, 핵심역량 개념은 다음과 같은 한계를 잉태하고 있음을 지적하다.

첫째, 교양은 가치를 전제하는 데 비해, 역량은 탈가치를 내포한다. 좋은 의사. 좋은 법률가, 좋은 교사, 좋은 목수가 있다. 이들은 교양을 갖춘 전문가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기능적으로 뛰어난 의사, 법률가, 교사, 목수가 있다. 이들은 마냥 기능적 전문가일 뿐이다. 역량은 반가치를 포함한다. 나쁜(bad) 역량도 있다는 것이다. 소매치기 기술은 교양이 될 수 없지만 역량이 되기에 충분하다. 살인 기술은 교양이 되지 못하지만 역량이 될 수 있다. 나치에 편든 독일 핵물리 학자가 있고, 일제시대 관동군 병리학 의사가 있다. 그들은 쉽게 반교양적 전문가 역량인이 될 수 있었다.

교양이란 말 속에는 가치 있는 것을 이해하고 획득했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역량 개념 속에는 반사회적인 지식과 기술까지도 이해하고 획득했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나쁜 교양’이란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신득렬, 1983: 227). 그러나 ‘나쁜 역량’이란 말은 언제나 성립 가능하다.

둘째, 핵심역량 개념은 자칫 탈정치화를 전제하고 있다. 핵심역량의 개념에는 세계읽기의 눈, 문제의식, 모순인식, 모순에 대한 저항을 탈가치화한다. 탈가치화하는 만큼 탈정치화가 그 속에 잉태되어 있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핵심역량은 성과, 성공, 순기능의 가치에 복무하는 능력이다. 일반적으로 성과와 관련되는 지식, 기술, 행동, 동기 등 탈정치화된 심리학적 특성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사실상 정치적⋅사회문화적 변혁의 의미는 최소화되어 있다. 성과와 기능과 관련되는 限, 그는 탈정치화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교양 개념은 시대성을 띠지만, 역량 개념은 시대 인식을 어느 정도 벗어나 있다. 이 경우 시대성이란 당대의 정치경제학적 시대적 조건에 반응적인 것을 의미한다. 주지하듯이, 모든 지식은 중립적이지 않다. 다시 말해 지식은 가치편중적인 것이며 가치지향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역량 개념은 지식의 정치학에 대해 불문에 부칠 가능성이 크다.

셋째, ‘핵심역량’ 개념은 인간적인 진실의 안목(눈)과는 무관하다. 교양교육은 교양교육의 효과로서 교양의 덕을 획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교양의 덕은 인간의 자리를 가늠하는 눈의 기능을 한다. 인간의 자리는 인간적인 것을 쟁점화하는 윤리이다.11) 그 윤리는 진리와 진실의 눈으로 세상(사물과 사태)을 정돈하는, 다시 말해 사물과 사태의 관계에 대해 비판적 자세를 취하는 지성과 병행한다. 이에 비해 역량교육은 인간의 자리에 대한 안목을 배제하며, 마냥 탈가치화된 기술⋅기능을 키우는 것에 집중한다. 이를테면 역량은 인간의 자리를 인정하지 않으며, 이를 애초에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하며, 그것을 낭비해버린다. 역량은 다만 효율, 수단, 성취를 문제 삼는다. 역량은 존재 가치는 뒷전이고 수단과 효율을 살린다.

2.3.5. 일다운 일을 할 수 있는 능력과 태도의 문제

일을 일답게 하고, 그 일다운 일을 선택하고, 그것을 일다운 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교양능력을 쌓았기 때문이다. 핵심역량은 도무지 이것에 범접하지 못한다. 교양능력 문제는 人才, 인물, 인력이 아니다. 엘리트가 아니다. 교양능력 문제는 모든 학생들에게 삶의 진로를 지도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삶의 진로는 일다운 일을 하는 능력을 발휘하고 어떤 일에도 즐겁게 임하는 능력과 태도를 발휘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삶의 진로는 자신의 일의 경험을 가지고 세상을 발언하는 지성을 발휘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교양교육을 통해 그 일의 경험과 일에 대한 헌신을 (모두에게) 키우는 법이다.

교양능력은 일을 일답게 하는 태도와 연관한다. 무슨 일인가를 하게 하는 힘은 일에 대한 태도 혹은 관심이다. 학생들로 하여금 그 일을 계속하도록 하는 추진력은 그 일 전체에 대한 태도와 관심(일의 계속적인 발전에 대한 관심)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듀이의 말대로 “이 어려운 고비를 넘기게 하는 것은 추상적인 의무감이 아니라 일에 대한 관심이다”(Dewey, 이홍우 역, 1987: 501). 일에 대한 태도 혹은 관심이 곤란과 장애를 극복하는 힘이 되고 끊임없이 일을 추구하는 동력이 된다. 이는 교양능력을 지시하는 것이며, 도무지 핵심역량을 지시하지는 못한다.

교양능력 개념은 직업적 지식과 기술보다는 인문학적 지식과 태도를 풍부하게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비해 핵심역량 개념은 직업적 지식과 기술을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개념 속에는 기술과 기능을 잘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핵심역량을 갖추었다 해서 교양능력을 갖추었다고 말하지 못한다. 강의를 한다고 해서 교육을 하고 있다고 말하지 못하고, 시나 소설을 쓴다고 해서 문학을 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교양능력을 갖추면 그것이 곧 핵심역량을 발휘하고 있고, 또 핵심역량으로 전화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교양능력은 핵심역량이라는 말로 치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몇 가지 인위적 요소로 짜여진 ‘핵심역량’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교양능력은 몇 가지 분절적인 능력을 이리저리 짜맞추어 나열한 역량체계는 아니다.

3. 교양교육과 핵심역량교육의 차이

3.1. 인재상의 지향

3.1.1. 人才가 아닌 人材

인재상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교양교육의 지향을 분명하게 인식하기 위해서이다. 인재상에 대한 논의의 준거로서, 교양교육은 人才가 아닌 人材를 키우는 것임이 분명히 한다.

역량교육의 인재상은 글자 그대로 역량인을 겨냥하고 있다. 역량인은 人才, 동량(棟梁), 人力이라는 정예분자를 그리고 있다. 물론 그는 全人이라는 이상적 인간형이 아니다. 어쩌면 물질적으로 형상화되는 전사(戰士) 혹은 역군(役軍)이라는 실용적 인간형이다. 지식기반사회 직능분야에서 기술⋅기능 능력을 발휘하는 전문실력꾼을 의미한다. 이에 비해 교양교육이 겨냥하는 인재상은 글자 그대로 교양인이다. 그는 생활하는 현실 속에 묶여 있으면서 생활을 만들어내는 창조적 자유를 누리는 인간형이다. 그는 다방면의 다양한 재능을 가진 人材이다. 그는 창의적 문제해결능력을 쌓아 지식생산의 삶을 사는 자이다. 그래서 그는 다원화 시대를 선도하는 경세가(經世家)이다. 그는 자기 삶에 자기 색깔을 입히면서 타인과 ‘다르면서 같음’을 행위하는 자이다.

人才는 핵심역량이 뛰어난 자이고 생산성이 높은 사람이다. 人材는 다양한 형태의 학습능력을 가진 자이고 인간성(인간적 성품)이 좋은 사람이다. 역량교육은 人才를 겨냥하는 데 비해, 교양교육은 人才가 아닌 人材를 겨냥한다. 엄밀하게 구별해서 말하면, 핵심역량교육은 人才, 역량인, 산업전사 배출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직장에, 기업체에 공헌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에 비해 교양교육은 人材, 교양인, 휴머니즘적 신사 양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것은 평생 여러 직업에 종사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개념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대학은 학생을 학습능력을 갖춘 人材로 키우는 곳이다. 人材란 지성과 도덕성을 균형 있게 갖춘 사람을 지칭한다. 핵심역량을 갖춘 소수 人才로 키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교양능력을 키우는 人材교육(교양교육)은 결코 핵심역량을 키우는 人才교육(핵심역량교육)으로 환원될 수 없다.12)

3.1.2. 기능인이 아닌 자유인

교양교육이 겨냥하는 人材는 ‘자유로운 정신’을 가진 사람이고 자유로운 사색가이다. 생활사태에서 말하면, 삶의 밑천을 장만하고 자기 앞가림하기에 충분한 지성과 도덕성을 갖춘 교양인이다. 진로⋅직업의 장면에서 특정하면, 낮은 자리에 거처하면서 흔전만전 널려 있는 일을 일답게 할 수 있는 태도와 능력을 가진 자이다. 그는 가히 지식기반사회의 인재형이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 교양교육은 자유인의 형성이라는 개념구조 속에서 추구된다. 교양교육의 이상은 합리적 사고력과 도덕적 실천력을 가진 ‘자유시민’을 키우는 것이며, 한마디로 말해 자유인의 발달이다. 그 교양교육은 편협한 전문화, 지식의 구획화를 반대한다. 이에 대해, 상대적으로 핵심역량교육은 기능인을 배출하는 것을 지향한다. 이 교육은 편협한 전문화와 지식의 구획화를 조장한다. 이것은 기능인에 적합한 기술기능적 능력의 획득과 발휘를 강조한다.

일상언어에서 교양인이란 지적 및 미적인 훈련을 통하여 획득된 탁월성을 가지고 예절에 있어서 세련된 태도, 직업적인 지식과 기술보다는 인문학적인 지식이 풍부한 사람을 의미한다(신득렬, 1983: 227). 그러나 기능인은 이것을 담보하지 못한다. 그는 다만 직업세계의 요구에 부응하는 지식인, 전문인, 직능인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지식기반사회는 새로운 인간형으로서 반드시 어디에 써먹을 人才를 요구하고 있고, 거기서 핵심역량 개념이 도출되었다. 문제는 진정 지식기반사회에 대응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人才(기능인)인가 人材(자유인)인가? 플라톤의 논리로 말해, 웅변가(Sophist)인가 철학자(Socrates)인가? 명백히 자유인이고 人材이다. 웅변가가 아니고 철학자이다.

3.1.3. 동원되는 자아가 아닌 모험하는 자아

교양교육은 人才가 아닌 人材의 양성을 겨냥한다고 했다. 人才가 아닌 人材를 실체화해서 말하면, 그는 ‘모험하는 자아’로 표상된다. 연구자는 모험하는 자아를 교양교육의 인재상으로 설정한다.

‘모험하는 자아를 형성한다’는 것, 이것을 구체적으로 자긍심(몸과 마음이 움직이는 자아)을 심는다는 것으로 등치해도 된다. 그는 동원되는 자아를 비껴나 도전하고 추구하는 삶을 산다. 여기서 ‘동원되는 자아’란 누가 시키는 대로, 수익을 창조하기 위해 언제나 쓰임을 당하는 人才를 말한다. ‘모험하는 자아’란 “나는 모험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표상된다. 여기서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의 특성과 ‘모험하는 자아’의 범주적 특성을 규정하면 다음과 같다(손종현⋅김동일 외, 2011: 20).

  • 인간으로 살아가는 삶의 세계는 모두가 문제상황이다. 고정된 것은 없고, 정답은 없다. ‘나’는 문제상황을 풀어야 한다.

  • 나는 탐구하는 존재다. 문제상황을 만나 당혹스러워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방황하고 그래서 모험한다. 모험을 통해 탐구하고 문제해결을 하면서 스스로 감탄한다. 그 존재론적 본성인 자아를 발견하고 또 재발견한다.

  • 나는 발달하는 존재다. 지적으로, 도덕적으로, 직업적으로 발달한다. 그 발달은 가르치는 자의 지도에 의해 가장 적합하게 이루어진다.

  • 나는 세상에 대해 모험한다. 학문에 대해 모험한다. 사회적 실천에서 모험한다. 적업세계에 대해 모험한다. 지식과 정보의 생산에서 모험한다. 진로능력과 직업능력 개발에서 모험한다. 모험한 것으로서 세상에 봉사한다. 모험한 것으로서 세상 사람들을 사랑한다. ‘나’는 진정 모험가이다.

교양교육은 모험하는 자아를 행위하는 자유시민을 만들어내는 것이 목적이다.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 양보할 수 없는 제1의 목적이다.

3.1.4. 창의융합형 인재 양성

교양교육은 창의융합형 인재를 키울 수 있다. 그런데 핵심역량교육은 실제로 창의융합형 인재를 키우는 데 많은 난점을 가지고 있다.

과연 창의융합형 인재가 누구인가? 그는 근본적 학습능력, 교양능력을 골고루 갖춘 사람이다. 다방면의 다양한 능력(지식과 기능)을 갖추고 그것에 헌신하는 자세(태도)를 갖춘 자이다. 그 지식과 기능과 태도를 잘 통합하고서 문제상황을 새롭게 해결해나가는 인재이다.

어떻게 창의융합형 인재를 키울 것인가? 지식과 기능과 태도의 통합이 새로운 지식과 기능과 태도의 통합을 만들어낸다. 그 통합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창의융합형 인재를 키운다. 또 다양한 학문세계에 대한 이해와 탐구를 이끌고 주제몰입의 프로젝트를 수행하도록 합리적으로 강제함으로써 창의융합형 인재를 키운다. 하버드대학은 이것에 대한 정책연구팀을 구성했고, 그 프로젝트의 성과로서 중핵 커리큘럼(Core Curriculum)에서 ‘학제간 융합형 교양교육과정’으로 전환했다. 학제간 융합형 교양교육과정이 겨냥하는 인재는 창의융합형 인재이고, 그는 앞으로 어떤 일이든지 그 일을 일다운 일로 만들어 그 일의 취지와 목적을 구현하는 태도와 능력을 갖춘 사람이다.

문제는 핵심역량교육이 과연 창의융합형 인재를 키울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핵심역량교육은 창의융합형 인재를 키우기가 상당정도 어렵다. 핵심역량교육은 그 자체로 학문기초능력뿐만 아니라 이론적⋅학술적 사고와 표현 능력을 최소화하고 태도 혹은 자세의 형성을 최소화하기 때문이다. 핵심역량교육이 창의력을 포함시킨다 한들 그것을 키우는 것과는 무관하다. 방법론상에 한계가 많고, 어법상의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핵심역량(직무역량) 중심 교육론에서 다양한 형태의 학력(교양능력) 신장 교육론으로 다시 방향을 잡아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핵심역량’ 개념은 결국 어디에 써먹을 ‘동원되는 자아’를 승인하고 있다. 핵심역량중심 교육체제는 결국 人才 타령에서 나온 것이다. 핵심역량주의자는 人才교육 강화론자이다. 핵심역량주의의 고정 관념을 해체해야, 역설적이지만, 人材강국에 들어갈 수 있는 법이다. 人才가 아닌 人材, 기능인이 아닌 자유인, 동원되는 자아가 아니고 모험하는 자아, 창의융합형 人材를 키워야 한다.

3.2. 교육목적의 근거

3.2.1. 존재적 이유 對 기능적 이유

추구하는 교육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교양교육과 핵심역량교육의 양자 간에는 이유가 서로 다르다. 달리 말해 교양교육과 핵심역량교육은 질문하는 물음에 차이가 있다.

교양교육이 지향하는 물음은 이런 것이다. 그것은 존재적인 것과 연관한다.

  •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인간의 삶의 의미와 목표는 무엇인가?

  • 진리는 무엇인가? 나는 지금 무엇을 알고 있는가? 대상세계에 대한 기본적 앎은 무엇인가?

  •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어떤 세계를 만들 수 있고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이에 비해 핵심역량교육이 지향하는 물음은 이런 것이다. 그것은 기능적인 것과 연관한다.

  • 나는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그 수행력을 갖추고 있는가?

  •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어떤 효용가치를 만들어내는가?

  • 나는 어떻게 그 일을 효율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가?

이런 점에서 양자 간에는 추구하는 이유가 다르고, 지향하는 물음이 다르다. 전자는 존재적, 인식론적, 본질론적인 것이라면, 후자는 기능적, 효율가치론적, 성과론적이다.

교양교육은 교양능력을 키워야 하기에 교육목적과 교육내용이 본질적, 학술적, 보편적이어야 한다. 핵심역량교육은 핵심역량을 키워야 하기에 교육목적과 교육내용이 수단적, 기능적, 상대적인 것이다. 교양교육은 전자를 겨냥해야 함이 당위이다. 후자는 직업훈련, 직업교육에서나 적합한 것이다.

3.2.2. 정신의 개발 對 기술의 확장

교양교육은 정신(mind)을 개발하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에 비해, 핵심역량교육은 기술(skill) 혹은 기능(function)을 습득하고 확장하는 것에 초점을 둔다. 교양교육은 편협한 전문화, 지식의 구획화에 반대해서 강조되지만, 실생활에서 필요한 당장의 능력을 등한시할 개연성은 크다. 그러나 핵심역량교육은 이와 반대의 성격을 띤다.

허친스(Hutchins)에 의하면 교양교육의 목적은 지혜, 이해와 판단, 훈련된 지성, 자유정신, 위대한 대화 등을 이끄는 것이다(신득렬, 2002: 234-242). 그는 외재적 목적을 성취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재적 목적인 바람직한 인간형성을 소망하였다. 그에 의하면, 사람은 하나의 전문가가 되기 이전에 보편적인 인간성을 가진 인간이 되어야 한다. 교양교육의 궁극적 목적이 인간을 만드는 데 있다면, 만인은 인간이 될 기회로서 교양교육을 받을 기회를 가져야 한다. 이에 반해 핵심역량교육의 목적은 하나의 전문가, 전문직능인, 핵심역량인을 기르는 것이다. 그 목적은 사회변화에 효율적으로 적응하면서 기술적 기능적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人才로 키우는 것이다. 교양교육은 전통적으로 전자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미래에도 전자가 요청된다. 전자는 후자를 내포할 수 있지만, 후자는 전자를 포섭할 수 없다.

3.2.3. 삶의 방식의 전환 對 직무능력의 습득

교양교육은 삶의 방식의 변화를 꾀한다. 핵심역량교육은 직무(직업⋅취업⋅창업) 능력의 획득과 유지를 겨냥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교양능력은 내재적 교육목적을 상정한다. 교양교육의 목적은 근본적 문화능력을 키워서, 제 앞길을 단속하면서 자기 삶을 꾸려가는, 인간으로서 온전하게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결국 인간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핵심역량교육은 내재적 교육목적 없이도 성립 가능하다. 사실, 핵심역량교육은 내재적 목적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인간존엄성 개념 자체가 전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핵심역량교육의 목적은 실생활 적응, 지위 유지, 지식기반사회 적응력 등이다.

사회적 삶의 선택과 실천에 토대가 되는 앎과 진로에 대한 기획이 교양교육이다. 교양교육은 세태에 흔들리지 않는 인간정신(예컨대 詩의 정신, 詩의 진실)을 문제 삼는 것이고, 필요(수단, 취업)와 실용에 머물 수가 없다. 이런 점에서 교양교육은 삶의 목적으로 성립하며, 그런 점에서 목적 실현의 효과로서 교육적 가치가 성립한다. 그 목적은 지적 도덕적 인간 발달이며, 모험하는 자아의 확장이다. 존재론적 이유, 정신의 개발, 삶의 방식의 전환을 교육목적으로 겨냥하는 교양교육이 추구되어야 한다. 마냥 물질적, 기술의 확장, 직무능력의 습득에 매몰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어느 시대나 교육이 그릇된 길로 나아간 것은 지식의 수단성에 매몰될 때였다. 핵심역량 중심 교육과정이 거기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이 지점에서 새삼 대학교육협의회의 관점과 허스트(Hirst)의 관점을 되뇌일 필요가 있다. 대학교육협의회가 제시하는 대학 교양교육의 목표는 “성숙한 인격체가 지녀야 할 품성, 세계시민으로서의 소양, 정보화 사회에서 요청되는 판단력과 도덕성 등을 지향”하며, “제반 학문 분야에 대한 지적인 호기심을 일깨우고 자기 표현력과 의사소통능력 등을 계발”시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손동현⋅김진량 외, 2007: 11). 이 목표 진술은 교양교육의 목적에 근접한 것이지, 핵심역량 목적을 표기하지는 않는다. 교양교육의 목적은 대학교육협의회의 목표 개념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교양교육의 목적이 변전하여 핵심역량 배양으로 전화(轉化)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교양교육의 목적과 연관하여, 허친스는 교양교육을 받은 사람, 즉 언제 어디서나 사용할 수 있는 교양능력을 습득하여 실생활은 물론 더 넓은 세계에 대한 이해를 가진 사람들을 그리고 있다. 이는 핵심역량을 갖춘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 이 언표는 대학이 교양대학의 성격을 견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대학 교양교육은 교양교육을 잘 받은 사람을 키우고자 하는 것이다.

3.2.4. 다양한 형태의 학력 신장 對 실행력⋅수행력⋅행동력의 신장

핵심역량교육을 통해 몇 개의 특정 능력을 키우는 것, 그것이 정당한가? 몇 가지 종류의 능력을 (핵심적으로) 상대적으로 중요하게 키우는 것은 교양교육이 아니다. 그것은 직업교육 혹은 직무능력 훈련에 해당한다. 교양교육은 다방면의 다양한 형태(지식⋅태도⋅기능의 다변⋅다층)의 학습능력을 키우는 것을 말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교양능력은 전체적인 교육목적(다양한 형태의 학력, 다양한 종류의 학력)을 표상한다. 이에 비해 역량은 능력을 구성하는 것 중의 하나의 하위 요소, 예컨대 주로 실행력, 수행력, 행동력을 겨냥한다. 지식과 이해가 하나의 하위 요소라고 한다면, 실행력, 수행력, 행동력도 하나의 하위 요소이다. 역량은 그만큼 수단에 해당하는 소수의 능력을 지칭하는 것이다.

핵심역량 키우기, 이것이 교육목적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핵심역량은 특별히 요청되는 기계적 수행력, 기술적⋅기능적 수행력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역량이 실행력, 수행력, 행동력을 나타내는 그 경우에 한해서 그 역량은 교육목적이 될 수 있다. 핵심역량이 실행력, 수행력, 행동력과 같은 분면으로 쓰일 때, 그 경우에 한해서 교육목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해력, 창의력, 헌신의 태도와 자세 등이 포함되어야 그것이 온전한 교육목적이 될 수 있다.

거듭 말하거니와, 교육은 능력(학습능력 혹은 교양능력)을 키우는 것이지 역량을 키우는 것은 아니다. 실력을 의미하고 실행력과 수행력을 지시하는 그 경우에서만 역량이 교육목적이 될 수 있다. 자연과학을 포함하여, 다양한 학문세계에 대한 이론적 이해와 삶의 태도의 변화를 내포할 때 그것은 교양교육의 대상이 된다. 문제는 역량교육이 이것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3.3. 교육과정의 중핵(中核)

3.3.1. 지식형식론 對 테일러리즘

전통적으로 교양교육 개념은 합리적 정신을 개발하기 위해 인류가 발명⋅축적해온 지식의 형식에 입문시키는 것이었다. 인류적 문명(공적 전통)에의 입문이라고 해도 된다. 이는 지식형식 중심 교육과정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 역량 개념은 기업 경영의 새 바람을 일으킨 테일러주의자(Tailorist)들에 의해 창안되었다. 그것이 교육과정론에 적용되었던 바, 미국 교육과정학의 창시자인 보비트(J. F. Bobbitt)는 테일러리즘의 신봉자였다. 보비트 류의 교육과정의 ‘체제적 모형’은 역량 개념을 교육과정의 원리로 삼은 데서 유래하는 것이다.

교육목표설정-학습경험선정-학습경험조직-평가로 이어지는 교육과정의 ‘체제적 모형’은, 마치 숙련 노동자의 동작과 생산량을 표준 모델로 제시하듯이 명세화된 교육목표의 제시를 요구하였다. 또한 교육목표는 그 달성여부를 평가를 통해 바로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제한되었다. 이러한 체제적 교육과정은 교육이 아닌 효율과 결과를 앞세운다는 점에서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손종현⋅김동일 외, 2017: 155-156).

교양교육과 핵심역량교육은 실제로 교육과정의 중심이 서로 다르며, 방향(지향의 내용)이 서로 다른 질문을 하고 있다. 교양교육은 지식형식론에 기반하고 핵심역량교육은 테일러리즘에 기반한다.

3.3.2. 全人교육론 對 직무역량개발론

교양교육은 全人교육을 표상한다. 교양교육은 전인을 키우는데 적합한 교육과정이 무엇인지 문제삼는다. 지⋅덕⋅체의 조화로운 발달을 염두에 두고, 거기에 걸맞는 교육과정을 구안한다. 그것에 비해 핵심역량교육은 기술적⋅기능적 역량을 키우는데 적합한 교육과정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한다. 그 역량을 키우는 프로그램 개발에 관심을 집중하고, 그것을 매칭(matching)시키는 데 여념이 없다.

교양교육은 전이력이 높은 앎, 대상세계에 대한 지식체계 입문을 겨냥한다. 교양교육의 본래의 취지는 대상세계(인간⋅자연⋅사회⋅수리⋅예술⋅종교… 등)에 대한 지식의 추구이다. 그 지식은 주로 ‘관계적 사고’와 관련되어 있다. 동시에 교양교육은 정서에 대한 것, 의지에 대한 것을 주요하게 대상으로 삼는다. 합리적 사고와 감성적 정서를 통합하는 능력, 심미적 공감 능력, 공동체 의식과 시민정신 함양, 이것을 키우는 교육과정을 강조한다.

이에 비해 역량교육을 위한 교육과정은 그 직종에 대한 잡다한 지식과 정보와 기술을 소개하는 것, 그것을 숙지하고 숙달케 하는 것이다. 핵심역량 개념은 직업적인 지식과 기술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반적인 보편적인 인문적인 교양능력과는 사실 거리가 멀다. 그 지식과 정보와 기술의 능력을 개발하여 능숙하게 기능적으로 발휘하는 것이다. 핵심역량교육은 허스트가 말하는 그 구조화된 지식형식의 추구를 자칫 무용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역량교육은 직무와 관련한 지식과 정보와 기술의 습득으로 구현된다.

3.3.3. 인문학적 힘 對 실무직무 역량

교양교육과정은 그 지향이 인문학의 전반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를 넘어서서 학문(구조화된 지식의 형식)의 보다 심오한 탐구와 관련되어 있다. 그 이유로 교양교육은 높은 지위를 얻게 된다. 지식 그 자체를 특징짓는 최고의 원리에 교양교육이 기초하기 때문에 교양교육은 교육의 궁극적인 형식이었다(신득렬, 1983: 242). 이에 대해 핵심역량교육은 그 지향이 교육의 상대적 수단적 가치를 추구한다. 핵심역량교육은 실무직무 역량의 가치를 승인하며, 당장의 필요한 물질적 성과에 관심을 갖는다.

교양교육과정은 인문학적인 것, ‘인간다움’을 추구한다. 물론 인간다움은 일상의 삶의 질을 나타내는 형용이며, 고착되고 고정된 정답을 가진 것은 아니다. 인간다움을 묻고 묻는 물음이 그 자체로 인문학적 삶(휴머니즘)을 배태하고 있다. 이에 비해 핵심역량 교육과정은 직능 분야의 일의 수행능력을 추구한다. 이는 직능 분야의 일의 수단 가치를 나타내며, 반복적으로 훈련된 기술⋅기능을 의미한다. 실제 수행상의 기술공학적, 처리능력 등을 대상으로 한다,

인문주의자가 철학과 과학 그리고 예술을 직업적 기술보다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들이 가치 있는 정신상태를 가져다준다고 믿기 때문이다(신득렬, 1983: 170). 이와 상대적인 것으로서, 역량주의자가 실무직무와 기술⋅기능을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것이 직접 더 큰 이윤, 성과, 업적을 가져다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정작 학습자의 요구도 최종적으로는 취업⋅직업보다는 앎 그 자체의 확장을 요구한다. 실제로, 학생들은 교양적 앎의 획득을 더 소중한 가치로 희망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대학교육(교양교육)은 전자에 복무해야 하는 것이다.

3.3.4. ‘학습기술 획득’의 문제

교양교육과 역량교육이 접점을 넓힐 수 있는 분야는 의사소통능력과 문제해결능력 부문이다. 핵심역량교육이 교양교육과 호응할 수 있는 여지는 학습기술 획득과 관련될 때이다. 이것을 ‘교양적 기술’이라고 부를 수 있거니와, 이것은 교양교육에서도 강조하고 역량교육에서도 강조한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도 가치가 있지만 다른 목적을 위해 수단으로서 활용되기 때문이다.

말하고 듣고 읽고 쓰는 네 가지 의사소통능력도 실제에 있어서는 소통의 기술⋅기법과 관련되어 있다. 글쓰기와 말하기의 교과목을 이수하여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의 의견을 말과 글로 효과적으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듀이(Dewey)가 강조하는 비판적 사고, 반성적 사고, 문제해결적 사고도 사실 학습기술과 관련되어 있다. 학습기술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학습하는 방법의 학습으로서, 평생학습의 도구로서, 표현의 도구로서 유용성을 지닌다.

학습기술 획득으로서의 교양교육은 기능의 획득과 더불어 더 많은 성장을 위해 탐구하려는 선의지와 열정이 함께 획득되도록 해야 한다(신득렬, 2021: 18-19). 핵심역량교육에서도 이것을 보증할 수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그 자체로 한계를 지니고 있다.

3.3.5. 창의성 키우기의 이론과 실행의 문제

교양교육이든 핵심역량교육이든 창의성 키우기를 강조한다. 어느 경우이든 교육과정이 창의성 배양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창의성의 의미를 달리 적용하고 있다. 이론적 인식의 창의성(예컨대 역사의 경우, 사료 해석의 새로운 관점으로서의 창의성)인가, 기술적⋅기능적 기교의 창의성인가 하는 점이다.

교육과정의 목표와 내용에 있어서, 교양교육과 핵심역량교육은 창의성에 대해 어떻게 연관하는가? 창의성은 근본적으로 대상에 대해 깊이 들어가 보는 ‘체험함’으로 인해 성립한다. 창의성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능력감(자부심과 자존감)을 바탕으로 성립한다. 손종현(2014b)에 의하면 창의성은 인류보편의 지적 성취, 소통 도구, 직업세계와의 소통능력을 바탕으로 형성된다. 손동현 외(2007)에 의하면, 창의적 사고능력이란 대안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 이제껏 인식하지 못했던 새로운 측면을 발견하는 능력, 낯선 상황을 이해하고 설명하고 제어할 수 있는 능력, 사태의 이해로부터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능력, 미래에 대한 통찰력 및 적응력을 말한다. 어떻게 정의하든, 창의성은 교양교육을 통해 키워야 할 능력이다. 핵심역량체계에서 창의성을 주요 요소로 삼고 있지만, 그것은 주로 기교와 기법상의 창의성을 말한다.

창의성의 저변은 학습능력이다. 그 학습능력을 교양교육에서 키워야 한다. 거듭 말하거니와, 교양교육은 기초학력, 창의력, 학습상황과 관련되어 있다. 이에 비해 핵심역량교육은 주로 ‘학습기술’과 관련되어 있다. 문제는 교양교육이 학문기초를 중시하고 있고, 학습기술의 이론적 토대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전자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의미의 창의력의 학습능력을 교양교육에서 키워야 한다. 창의력을 위시한 다양한 종류의 학습능력을 교양교육에서 키워야 한다. 원래 그것이 고래로부터 현실의 요청이다. 이상적 논의가 아니며, 추상적 논의가 아니다. 창의성을 학력으로, 교양능력으로 키워야 하는 것이다. 핵심역량 개념에서 창의성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컨대, 창의성(창의적 사고능력)은 교양능력의 하나이다. 물론 핵심역량교육에서 공통적으로 창의성을 강조한다. 문제는 창의성은 핵심역량이 강조되기 이전부터 인류 보편의 교육적 가치로서 인정되어 왔다는 점이다. 교양교육에서 창의력을 학습능력의 하나로 중요하게 키워야 한다.

3.4. 학습경험의 방법

3.4.1. 이해와 탐구의 문제

교양능력 교육과 핵심역량 교육 간에는 학습경험과 연관하여 방법적 차이가 존재한다. 교양교육의 방법으로 지목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이해와 탐구이다. 이때 이해와 탐구는 지식과 그 체계(개념과 개념체계)에 대한 것이다. 이해는 지식을 논리적으로 가정한다. 이해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그는 어떤 지식을 탐구했는지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에 대해 탐구했다는 것은 학생 스스로 그 지식에 물음을 제기하고 그 물음으로 대답을 구해가는 방식을 터득했다는 것이다. 물론 핵심역량도 이해와 탐구를 강조한다. 그때 그 이해와 탐구는 문제해결을 위한 기능적 기술적 이해와 적용을 강조한다. 이 경우 이해보다는 탐구를 더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핵심역량은 실증, 체험, 문제해결의 교육적 경험을 더 강조하는 법이다.

3.4.2. 학습의욕의 진작

인간은 누구나 학습의욕을 가지고 있다(김민남, 2021: 88). 언제 어디서나 학습의욕이 실재(實在)하고 선재(先在)한다. 학습의욕을 발휘하여 인간은 누구나 지식활동을 한다. ‘지식활동’이란 물음을 가지고 답을 구성하는 활동을 말한다. 그래서 교양교육은 학습의욕을 자극하는 데서, 학습의욕을 진작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이를 통해 지식활동을 이끈다.

학습의욕을 진작하기 위해, 학생이 자신의 경험을 섞어서 하는 말을, 교수는 자신이 하는 설명의 개념과 얼마든지 결합할 수 있다. 그럴 때 학생의 눈과 귀를 깨어나게 만들 수 있다. 학습의욕을 진작하기 위해 그의 삶의 사회적 상황과 연관 짓는다. 이것에 비해, 핵심역량교육은 학습의욕을 근본적인 것으로서 문제 삼지 않는다. 학습결과, 결과의 효율성, 효율적 적용 가치를 더 중요하게 문제 삼기 때문이다.

3.4.3. 모델링의 위상

교양은 교육을 통해 형성되기보다는 ‘지도’를 통해 숙성되는 경우가 많다. 교양교육에서는 교육보다는 지도라는 언어가 더 잘 어울린다. 교수자는 사고의 과정에 대해 지도하고 학습자는 그 사고의 과정을 따라가면서 배운다. 도덕적 인간이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도덕적인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성장하도록 하는 일이다(신득렬, 1983: 185). 이 경우 교수자는 지도자로서 그리고 모델로서 지적이어야 하고 도덕적이어야 하며, 지적⋅도덕적으로 좋은 모델이어야 한다. 이에 대해, 핵심역량은 교육을 통해 형성되기보다는 반복 훈련을 통해 단련되는 경우가 많다. 트레이너(trainer)가 하는 수행의 과정을 따라가면서 흉내 내면서 배운다. 핵심역량교육에서는 교육보다는 모방과 훈련이라는 언어가 더 잘 어울린다.

교양교육에 있어서는 주입이나 훈련은 지적 몰입을 이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유보하고, 사회화나 조건화는 억압적으로 행동형성에 치중하기 때문에 유보한다. 교양교육에서 그 교수방법이 주입, 훈련, 사회화, 조건화 같은 것일 수 없다. 이에 비해 역량교육은 주입과 훈련을 통해 수행력을 키우고 능숙성을 키우면 된다. 사회화나 조건화를 통해 행동수정과 행동형성을 강화한다. 역량교육의 교수방법은 주입, 훈련, 사회화, 조건화가 주를 이룬다.

3.4.4. 교육적 관계의 형성 여부

교육적 상황에서, 교육적 관계는 실재한다. 교수와 학생의 지적⋅도덕적⋅인격적 관계, 그것이 교육적 관계를 만들어낸다. 그 교육적 관계가 교육하는 법이다. 교양교육은 이것을 형성하고자 한다. 교양교육에서 교수와 학생의 ‘지적⋅도덕적 관계’가 더 잘 형성된다. 역량교육에서는 이것을 담보하기가 쉽지 않다.

교양교육에서 교육적 관계가 보다 쉽게 형성될 수 있다. 교육적 관계를 맺으면서 힘든 지적 과정을 거쳐야 하고 친숙한 인격적 모델링을 거쳐야 한다. (지적 작업이 인격적 과정을 일으키고 이끈다.) 그 교육적 관계의 형성을 위해, 대학은 핵심역량 교육이 아닌 교양능력 교육을 기획⋅실행한다. 이에 비해 핵심역량교육에서는 이 교육방법이 무기력해져 버린다. 이 교육은 교육적 관계 형성을 염두에 두지 않으며 그것을 가치로 여기지 않는다. 핵심역량교육에서는 이 교육적 관계의 형성에 상당한 한계를 갖는다.

3.4.5. 도야⋅훈육 對 반복훈련

교양교육은 방법적으로 도야 혹은 훈육(discipline)을 포함한다. 교양교육에서 학습능력은 이론의존적 도야를 통해 키워진다. 학습능력은 교육적 도야를 필요로 한다. 또 원리와 규칙을 따르는 사람을 키우는 것이 필요하므로 훈육은 중요한 교수법에 해당한다. 그러나 역량은 꼭 그렇지는 않다. 역량은 굳이 이론의존적 도야와 실천적 훈육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에 대한 이론적 앎을 생략하고서도 그렇게 수행할 수 있다. 역량교육은 지식체계에 대한 이론적 근거가 박약할 가능성이 크다.

핵심역량교육은 방법상으로 기능⋅훈련⋅연습으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 역량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면서 동시에 후천적으로 길러지고 개발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교육 개념과 동일한 패턴을 가진다. 물론 역량교육에는 반복훈련이 더 잘 기능하는 법이다. 역량은 환경과 효과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능력으로, 기술능력, 기능능력, 수행능력에 가까운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핵심역량교육은 사실 몇 가지 프로그램이면 족한 것이다.

3.4.6. 교수자(teacher) 對 훈련자(trainer)

누가 교육하고 누가 훈련하는가? 교육과정을 편성⋅운영하는 자의 지위는 무엇인가? 이 점에서 가르치는 자의 위상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교양교육은 교육자이고, 교수자이다. 교수자가 학습능력을 키운다. 역량교육은 직업훈련자이고, 트레이너 혹은 코치이다. 트레이너가 역량을 키운다. 요컨대 교육, 교양교육, 교양능력 키우기여야 한다. 훈련, 역량교육, 핵심역량 키우기이어서는 안 된다.

교양을 갈무리하고 철학하는 사람이 교양을 가르칠 수 있다. 교양은 문제풀이 연습과 반복으로 가르칠 수 있는 그런 대상이 아니다. 적어도 교양을 코스워크로 기획하는 교수가 교양을 가르친다. 교양은 텍스트 읽기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호침투하는 콘텍스트(교육적 관계)에서 형성된다. 교양교육은 궁극적으로는 자기교육이다. 자기교육 차원에서, 스스로를 갈고 연마한다. 그 자기 삶에 대해 책임을 진다. 삶은 자아를 탐색하는 고행의 길이다. 그것이 현장의 리얼리티(reality)이다. 그 길을 가는 내적 만족감이 그를 지적 도덕적 성장으로 인도하는 힘이 된다. 핵심역량교육은 도무지 이를 감당하지 못한다.

교양교육을 몇 가지 종류의 역량의 훈련으로 축소시킬 수 없다. 사실 그 몇 가지 역량에 집중하는 대학교육은 큰 의미가 없다. 그때 몇 가지 역량은 전이력이 없는, 기초가 되지 않는 능력에 지나지 않는다. 다양한 종류의 학력, 다양한 형태의 학력을 가르쳐야 한다. 그것이 지성과 도덕성을 성립시킨다.

4. 결론

이 연구의 목적은 2021년 대학기본역량진단이 전국 각 대학의 교양교육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상황에서 과연 ‘역량기반 교양교육’이 교양교육의 본질을 담보할 수 있는가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비판적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었다. 이 논의를 전개함에 있어서 연구자는 ‘교육적 타당성 물음’, 즉 정치⋅경제논리가 아닌 교육논리를 바탕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고자 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역량기반 교육과정에 대해 정치경제학적으로, 교육인식론적으로, 개념분석론적으로 비판하였다. 정치경제학적 측면에서 볼 때, 역량기반 교육과정 개념과 그 실제는 신자유주의 경제논리에 의해 입안된 것이며,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인적자본론과 인물중심발전론의 연장선상에서 도출된 것이다. 교육인식론적 측면에서 볼 때, 교양교육은 몇 가지 핵심역량을 지목하고 거기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며, 다양한 형태의 학습능력을 키우는 교육활동이다. 또 교양교육은 다양한 종류의 학습능력을 키우는 것이며 삶을 통제하는 앎을 형성하는 것으로서, 대상세계에 대한 이해와 탐구의 능력을 키우는 교육활동이다. 또 개념분석론적 측면에서 볼 때, 핵심역량 개념이 실용과 취업에 관련된 지식과 기술을 겨냥하는 것으로서 (인문학적) 태도와 의욕과 헌신의 가치를 담지하지 못한다는 것, 핵심역량이 사고와 정서를 통합하는 능력의 가치를 담보하지 못한다는 것, 핵심역량이 탈가치의 경향이 있다는 것, 그것이 탈정치화를 잉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교양교육의 최종적 가치로서 일다운 일을 할 수 있는 능력과 태도의 가치를 담보하지 못한다는 것을 논의하였다.

둘째, 교양교육이 핵심역량을 목적으로 겨냥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는 것임을 논의했다. 교양교육은, 역량교육과 달리, 역량인이 아닌 자유인, 人才가 아닌 人材, 동원되는 자아가 아닌 모험하는 자아를 인재상으로 키우는 것이다. 교양교육과 핵심역량교육은 추구하는 교육의 이유가 서로 다르다. 기술의 확장이 아닌 정신의 개발, 직무능력 습득이 아닌 삶의 방식의 전환, 실행력⋅수행력⋅행동력의 신장이 아닌 ‘다양한 형태의 학력’의 신장이 그 목적이다. 교육과정론의 입장에서 볼 때, 교양교육의 교육과정은 테일러리즘에 대해 지식형식론에 근거하고, 직무역량개발론에 대해 全人교육론에 근거하며, 직무역량 키우기 교육과정에 대해 인문학적 힘 키우기 교육과정을 겨냥하며, 기술적⋅기능적 창의에 대해 이론적⋅학술적 창의에 대한 것이다. 학습경험에 있어서 교양교육은 대상세계에 대한 이해와 탐구를 지향하고 있고, 학습의욕 진작을 전제하고 있으며, 반복훈련이 아닌 모델링 차원의 ‘지도’에 의한 것이며, 진정 교육적 관계 형성을 가능케 하고, 가르치는 자는 훈련자가 아닌 교수자이어야 한다.

연구자는 ‘교육적 타당성 물음’을 견지하면서 교육을 바라보는 이론적 분기점을 선명하게 설명해보고자 의도하였다. 이 논의를 통해 이전과는 다소 분명한 의미를 발견한 바 있다.

교양능력 담론과 핵심역량 담론은 각각 서로 대척적인 관점에서 사물과 사태를 묘사하고 설명하고 해석하는 앎의 체계이다. 사실상 각각은 그 개념의 기원, 이론적 배경, 의의와 성격, 기능과 용법이 서로 다르며, 실제로 서로 간에 정반대의 대척점에 있다. 이에 대한 이론적 인식을 새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교육 관념과 교육 실천이 바뀌고, 대학 교양교육의 본령을 회복할 수 있다.

이 연구에서 연구자는 교양교육의 全人의 이상을 오늘의 문제로 다시 진술하고 있다. 사회에 적응하고 그리고 그 사회를 이끌어갈 능력과 태도를 함양하는 것이 시대적 과제임을, 그 일반적 능력과 태도는 당대 젊은 세대의 필수적 ‘교양’이 되어야 한다고 천명한다. 전통적으로나 현실적으로, 그리고 미래에 있어서도, 대학은 전공능력뿐만 아니라 교양능력을 키우는 곳이다. 대학은 교양교육을 책임교육으로 실천하는 최고교육기관임을 분명히 한다. 몇 가지 핵심역량을 키우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대학교육은 전공교육과 교양교육을 전문적으로 하는 곳이다. 전문적 교양교육 문제이고, 교양능력 키우기 교육과정 문제이다. ‘인력’ 개념을 ‘물리학의 눈을 가진 사람’이라는 개념으로 대체해야 한다. 물리의 눈, 지리의 눈, 수리의 눈, 역사의 눈이 실재한다. ‘인력’은 역량교육(전공교육)의 근거이고 지향이라면, 한편 ‘물리학의 눈’은 교양교육의 근거이고 지향이다. 대학은 핵심역량교육이 아닌 그 교양교육에 헌신해야 한다.

연구자는 “핵심역량 제고를 위한 교양 교육과정 체제 구축 운영”이라는 이 언표가 도무지 어법에 맞지 않는 것임을 논증해왔다. 교양교육을 핵심역량 제고와 연관시키는 것은 인식의 왜곡임을 말해왔다. 이 논거에서 ‘역량기반 교양교육’ 개념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다시 강조한다. 교육 문제는 인간문제이다. 인간문제는 교양 문제이지 역량 문제가 아니다. 교양은 정치⋅경제(권력과 돈)의 위력을 잠재우고 존재(자아의 확장) 가치를 살려낸다. 교양은 삶의 전반에 걸쳐 위력을 발휘하는 국가⋅정치⋅경제 같은 경계선을 허물고 함께 참가하여 운영하고 결실을 나누는 모둠살이의 공동체 가치를 복원한다. 그런데, 역량은 존재 가치는 뒷전이고 수단과 효율을 겨냥한다. 역량은 국가와 기업의 경쟁력 가치, 기술과 기능의 성과 가치에 집중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핵심역량은 교양능력과는 그 개념의 내포와 위상이 대척적 지점에 놓여 있다. 교양은 역량으로 환원될 수 없다.

거듭 말하거니와, 교양교육은 교양능력을 키우는 활동이다. 교양교육은 특히 대상세계를 다양한 관점과 안목으로 사고하고 표현하는 학습능력을 키우는 교육활동이다. 역량교육은 여기에 현저히 미치지 못한다. 교양교육이 핵심역량 제고와는 무관해야 한다. 교양교육은 역량기반 교육과정이 아니다. 대학 교양교육에서 취업과 실용에 경도되는 직무역량을 가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연구자는 교양교육이 역량기반 교육과정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다. 역량교육은 교육목적, 교육과정, 교육방법, 평가에 있어서 교양교육과는 서로 대척적인 것이다. 역량교육이 교양교육의 본질과 접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교양능력을 키우는 것, 그것을 교육목적으로 완성하도록 대학과 사회를 진작해야 한다.

‘교양교육의 이념’을 살려야 한다. 교양교육의 이념은 명목상의, 액자 속의 죽은 이념이 아니다. 이를 밖으로 드러내어 함께 음미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교양교육의 목적, 교양능력 키우기로 귀결된다. 그 교양능력 키우기가 학교의 교육력을 반영하여 발생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그 교육력 구조가 대학의 교육과 행정과 평가를 지도하는 도덕적 분위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교양교육과 연관된 교육력 구조에 대한 탐구가 후속연구로 이어질 필요가 있다. 또 교육부가 관철시키는 ‘대학 기본역량진단’을 대체하는, 새로운 형태의 대안적 평가방안 개발에 대한 탐구가 후속연구로 이어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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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1)

이 연구는 연구자의 선행연구인 “핵심역량 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교양능력 키우기의 교육실천론”에 대한 더 보탬이다. 선행연구(2021: 50)에서 연구자는 현행 대학 교양교육 자체에 대한 ‘교육적 타당성 물음’이 요청되는 것임을 말한 바 있다.

2)

연구자는 ‘교육적 타당성 물음’이라는 방법론적 언어를 가지고 본질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을 취한다. ‘교육논리’란 정치논리와 경제논리를 대체하는, 교육적 타당성을 묻고 묻는 방식이다. 이 개념은 한국교육과 교육체제가 여전히 교육 ‘안’이 아닌 교육 ‘밖’의 필요에 끝없이 잠식되는 현실에 대한 否定의 변증법에서 도출된 것이다(손종현, 2014a: 301. 손종현, 2018a: 51).

3)

이론적 분기점과 관련하여, 가장 극명하게 논점을 밝힌 철학자로서 대표적인 학자가 바로 임마뉴엘 칸트(I. Kant)이다. 그는 교육이 ‘인간성의 최대한의 실현을 증진하는 데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고 일갈하고 있다. 그는 교육을 인간이 되는 과정으로 정의하고 있다. 듀이는 칸트의 교육론을 자신의 경험주의 교육론으로 재정립하고 있다(Dewey, 이홍우 역, 1987: 165-166).

4)

‘정치경제학적’이란 당대의 정치적 경제적 조건이 교육을 규정한다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역량기반 교양교육’이란 것에 대해 정치경제학적 비판을 전개한다. 그 비판은 자본주의 경제논리에 대한 안티테제(anti-these)가 될 것이다.

5)

역량기반 교육과정 담론은 당대의 ‘인적자본’ 개념에서 한 발짝도 더 나가지 못한 형국을 보이고 있다. 인간자본론을 수용하는 교육학자들은 반교육의 인적자본론 개념과 논리를 참인 것으로 알고, 믿고, 실천하는 자들이다. 그것이 그들의 철학이다. 그들은 인간을 언제나 수단으로 가치화한다. 그들에게 인간은 ‘쓸모’ 있어야 한다. 쓸모는 모종의 실체화된 역량을 나타내는 것이고, 그것은 언제나 수행력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들이 보기에, 그 역량은 언제나 성과로서 측정할 수 있다. 그 역량은 국가와 기업에 봉사하는 것이며, 이윤추구의 수단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6)

‘교육인식론’이란 지식(앎)과 도덕(행)의 교육 문제에 대한 이론적 인식을 뜻하는 말로 쓰고 있다. 인식론은 그 앎과 행이 어떤 것인가를 확인하고 이를 정당화하는 방법론을 가지고 있다. 이 인식론을 새롭게 정교화하는 것은 언제나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7)

‘전공능력’이란 각 단과대학 또는 계열, 전공학과의 관련 분야에서 요구하는 직무, 과업, 역할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지식, 기술, 태도를 포함하는 복합적⋅종합적 능력(교육부⋅한국교육개발원, 2020: 51)을 말한다.

8)

분석철학적 방법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개념의 명료화’라는 차원의 분석방법론을 시도해보자. 여기서 ‘역량’과 ‘역량 기반’과 ‘역량 교육’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개념적으로 따져볼 필요가 있다.

9)

연구자가 보기에, 역량은 태도의 가치, 의욕과 헌신과 같은 자세를 포함하지는 못한다. 이를테면 역량은 헌신적 자세와 창조적 태도를 보증하지는 않는다. 스킬 개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역량주의자들은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포함시켜 개념화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

10)

여기서 가치화는 가치 수용, 가치 판단, 확신이라는 세 가지 수준을 포함한다. 조직화는 가치의 개념화, 가치체계의 조직이라는 두 가지 수준을 포함한다. 인격화는 일반화된 행동태세와 인격화라는 두 가지 수준으로 이루어진다(교육목표분류학, 1967: 177-228).

11)

여기서 ‘인간의 자리’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기준을 지칭한다. 인간의 자리는 사물과 사태를 제자리에 놓고 바라보는 ‘눈’에 의존한다. ‘눈을 뜬다’는 것은 기준점 혹은 초점을 가지고 흐트러진 것들을 정돈한다는 것이다. 눈을 뜬다는 것은 어떤 혼돈의 와중에도 인간적인 것을 쟁점화하는 능력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물론 그 눈은 개인에게 그리고 사회에 그 눈을 보호해주는 (혹은 지속시키는) 시스템을 필요로 한다.

12)

人材교육은 계발교육 개념을 소환한다. 계발교육이란 페스탈로치에 의하여 제창된 교육방법으로서, 문답법을 써서 학습자가 타고난 능력을 자기 힘으로 개발함을 목적으로, 자주적 학습의 태도와 습관을 길러주는 것을 말한다. 이는 주입교육과는 극을 이룬다. 그런 점에서 페스탈로찌, 듀이, 킬패트릭의 관점에서는 교실과 학교를 탐구능력 계발의 교실공간으로, 학습사회로 건설해야 한다. 여기서 ‘학습사회 건설’이란, 이돈희(2019)의 용법을 빌리면, 관조적 지식을 탐색적 지식으로 변환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교실 공간을 여는 것을 말한다. 프레이리(1987)의 용법으로, 은행저금식 교육에서 문제제기식 교육으로 전환해야 함을 의미한다. Dewey(1916)의 어법으로 말하면, 주지주의 교육에서 경험주의 교육으로 전환해야 함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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