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 교육을 통한 윤리적 관계 정립

Establishing Ethical Relationships through Care Edu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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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General Edu. 2022;16(1):105-115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2 February 28
doi : https://doi.org/10.46392/kjge.2022.16.1.105
김민영1, 김무영2
1 제1저자, 경운대학교 조교수, puremy@ikw.ac.kr
Assistant Professor, Kyungwoon University
2 교신저자, 경운대학교 조교수, kimmy@ikw.ac.kr
Assistant Professor, Kyungwoon University
본 논문은 2021 경운대학교 교내학술연구비 지원으로 연구되었음.
Received 2022 January 20; Revised 2022 February 14; Accepted 2022 February 22.

Abstract

이 글은 팬데믹의 공포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차별을 더 확연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지젝의 말처럼, 더 고통받고 더 차별받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시작한다. 이러한 시대에 공포와 차별에 더 노출된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도대체 어떤 방식의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현대사회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고 공동체의 윤리적 관계를 설정하는 데 있어 합리성이 유일무이한 도구인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합리성은 현대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한 도구가 아니라 유일하고 절대적인 도구인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제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배려 윤리에 집중한다. 특히 길리건으로부터 시작되는 배려 윤리가 기존의 합리성 중심의 윤리적 태도에 어떤 비판적 시각을 보여 주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이를 이은 나딩스가 이런 관점을 통해 배려 교육의 토대를 마련하고 있음을 개괄할 것이다. 배려 교육은 배려를 자연적 배려로부터 윤리적 배려로 이어지게 하면서 배려 윤리가 더 이상 친밀함이라는 사적 영역에 머무르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한다. 배려 교육의 필요성은 비단 윤리의 영역뿐 아니라 정치의 영역에서도 논의되고 있다. 나딩스와 더불어 트론토와 잉스터의 경우도 배려 교육을 체계화하고 이론화함으로써 보다 더 본질적인 관계로서의 공동체를 정립하고자 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특히 나딩스는 배려 관계에서 배려하는 자와 배려받는 자의 관계를 면밀하게 고찰하면서 배려하는 자의 일방적인 방향이 아니라 배려받는 자로부터 시작되는 배려 관계를 정립한다. 그리고 배려를 완수하는 자 역시 배려받는 자가 된다고 말함으로써 배려 윤리에서 타자중심적이고 타자지향적인 특징을 정립한다. 이를 통해 주체는 더이상 이기적이거나 독단적인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점이 드러난다. 그러나 또한 이로부터 주체는 오히려 타자를 위해 일방적으로 희생당하는 자로서 자리하게 된다는 우려가 있다. 이에 대해 우리는 배려하는 자와 배려받는 자의 관계를 보다 더 확장시킴으로써 해결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논의를 통해 우리는 나딩스의 배려 윤리가 여성적 관점을 넘어 인간에 대한 배려의 윤리로 확장될 수 있음을 이해할 것이고, 동일성에 기반하여 주체의 입장에서 타자를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부름에 응답함으로써 최초의 배려가 시작된다는 점에서 타자중심적인 시각을 함의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Trans Abstract

This thesis begins by acknowledging that there are more suffering and more discriminating people, as Zizek said, that the fear of Pandemic is more clearly revealing the widespread discrimination in our society. From this idea, I would like to answer the question of what the relationship with the other should be in this era. In particular, modern society seems to regard rationality as the only tool in solving social problems and establishing ethical relationships in the community. is rationality truly the one and only tool at our disposal to help us solve the problems of modern society?

In response to this question, we focus on the ethics of caring as a means to solve the problem in a ‘different’ way. In particular, we will examine how the ethics of caring, which begins with Gilligan, shows a critical view of the existing rationality-oriented ethical attitude. We then outline how Noddings, who followed, laid the foundation for ethical education through this perspective. The ethics of caring plays a role in making care lead from natural care to ethical care, and making the ethics of caring no longer remain in the private domain of intimacy. The necessity of caring education is being discussed not only in the realm of ethics but also in the realm of politics. In addition to Noddings, it should be understood that Tronto and Engster want to establish a community as a more essential relationship by systematizing and theorizing caring education.

Through this discussion, we will show that Noddings’ ethics of caring can indeed be extended beyond a feminine perspective to that of an ethics of caring for others. Morevover, we will show that an ethics of caring implies a perspective that is actually centered on others in that the first caring begins by responding to the call of others, rather than caring for others from the standpoint of the subject based on identity.

1. 서론

팬데믹 이후 과연 우리 공동체는 어떤 관계성을 지향하게 될 것인가?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에서 지젝은 팬데믹이 모든 것을 바꾸었고 어떤 것도 전과 같지 않다는 말은 맞지만, 동시에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고 말한다(Zizek, 2021:124). 오히려 팬데믹으로 인해 이미 존재했던 것이 더 선명해졌다고 말하고 있다. 팬데믹은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한 정도의 공포와 불편함을 주는 것 같지만 전세계를 강타한 바이러스 앞에서 우리는 공포에 있어서도 사회의 차별적인 구조의 민낯을 발견한다. 접촉이 금지되고 개인의 예방이 중요시되면서 직업이나 부에 있어 안정적으로 거리두기를 할 수 있는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이 선명하게 나뉘기 시작했다. 생계를 위해 접촉이 필수적인 직업군에서 안전하게 거처할 공간이 없는 노숙자까지, 그리고 이유없는 혐오에 희생되는 인종까지. 이런 문제는 결국 혐오와 공포 앞에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의 물음을 던진다. 우리는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어떤 행위를 통해 이 공포에 맞설 수 있을 것인가?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안전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지만 더 우선적인 문제는 이제 차별적인 공포 앞에 출구가 없는 존재를 위해 새로운 윤리적 접근과 교육이 필요하다는 요청이다.

따뜻한 테크놀로지라는 말이 있다. 기술이라는 것은 본래 가치중립적이다. 그런데 따뜻한 테크놀로지라니 모순형용이 아닌가. 1960년대 경제학자 프린즈 슈마허에 의해 제기된, 거대 기술에 반하는 것으로서 적정기술은 서구사회 중심의 기술이 아니라 제3세계 혹은 개발도상국에 걸맞는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는 지역 친화적이고 환경 친화적인 기술을 의미했다. 따뜻한 테크놀로지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소개되는 이 적정기술은 기술에서 배제된 인간 자체와 인간이 속하고 있는 자연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 기술이 실제로 세계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고 지금까지도 영향력 있는 것으로 다루어지고 있는가와는 별개로 이런 움직임 자체가 가진 따뜻함에 주목한다. 도청을 위해 작은 기기에 녹음이 되는 기능을 넣을 수 있는 기술이 불법적으로 유통되어 작은 사회를 파괴시킬 수 있고, 같은 녹음 기능을 활용한 기술을 통해 다시 보지 못할 자식이나 부모의 목소리를 저장함으로써 누군가에게 살아갈 희망을 주기도 한다. 다시 돌아가서, 따뜻한 기술은 있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기술의 주체가 되는 것이 ‘따뜻함’이라는 인성을 겸비한 자일 때 그때 가능하다는 답으로 귀결된다. 우리 사회가 약자에 주목하고 기술이나 미디어에 소외된 사람들을 배려할 때 기술은 드디어 따뜻한 것으로서 동반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관심의 전환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은 바로 배려 관계에서 비롯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배려 관계는 자연스럽게 습득될 수 있는 것인가? 본 논문은 타자와 근본적인 관계성으로서 배려의 관계를 주장하고 있다. 배려는 흔히 아주 작은 에티켓부터 시작해서 헌신, 희생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우리는 타자를 향하는 타자 중심적인 배려가 어떻게 해서 일방적인 나의 희생이 아닐 수 있는지를 살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 논문은 타자와의 관계의 핵심을 배려로 규정하고 있는 배려 윤리를 개괄하면서 배려가 주체와 타자 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지 보여 주고, 교육을 통해 배려를 습관화할 필요성에 대해 다루고 있다. 배려 교육을 통해 잘 배려하고 잘 배려받는 주체와 타자가 됨으로써 공포화 혐오에 근본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공동체를 이루는 데 기여하게 될 것이다.

2. 배려에 내재한 관계중심성

배려 윤리는 근대 이후 ‘개인’이라는 미명 하에 고독한 존재로서 독립적으로 내팽개쳐져 있는 각자에게 서로 배려하고 배려받는 관계라는 원초적 관계의 의미를 일깨워 준다. 이런 맥락에서 배려 윤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수동성과 공감이 과연 여성적인 정체성을 의미하에 국한되는가 하는 것은 사실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것은 배려 윤리의 구조에서 필수적인 요소이며 그로 인해 우리는 타자에게로 향할 수 있고 타자와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더 중요한 것은 배려 윤리에서 중점적으로 생각하는 관계 중심의 사고이다. 보통 우리는 윤리적 관계에서 의무나 규칙이 중요하게 다루어졌음을 안다. 설혹 동정이나 공감에 기초한 윤리적 관계를 말하고 있다 하더라도 사실상 더 중요한 것은 주체의 입장이었다. 배려 윤리에서 말하자면 배려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배려하는 당사자이고 배려를 받는 사람은 배려하는 자의 상대적인 입장에서 배려를 받는 수동적인 위치만으로 생각해왔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배려 윤리 역시 배려하는 자의 월권적인 혹은 지배적인 통제력이 있다고 바라보는 입장도 있다. 그러나 나딩스의 배려 윤리는 이런 관계에서 정확하게 타자의 지위를 살려낸다. 더 강하게 말하자면 배려가 시작되고 배려가 완료되는 모든 과정에서 배려받는 사람이 더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나딩스의 배려 윤리를 잘 살펴 보면 배려하는 사람과 배려받는 사람이 동일하다는 의미의 상호성의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배려 윤리에서 상호성이란 오히려 수용성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배려 윤리는 정의에 기반한 윤리가 주축이 된 윤리학 영역에서 새로운 목소리 혹은 다른 목소리의 윤리적 문제와 해결방법을 제시하면서 시작되었다. 배려 윤리는 비단 윤리학의 영역뿐 아니라 심리학, 정치학, 간호학, 상담학 등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캐롤 길리건의 논의로부터 시작하는 배려 윤리는 길리건의 저작 In a diffrerent voice가 의미했던 것처럼 전통적인 남성적 관점의 윤리 개념과는 ‘다른’ 여성적 특징의 윤리적 개념의 유의미성을 드러내고자 했다. 메이어옵은 On Caring에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은, 가장 핵심적인 의미에서 자신을 성장시키고, 또 실현하도록 돕는 것이다(Mayeroff, 1971:1)”라고 말하고 있다. 배려에 대해 이와 같이 정의하고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관계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사례로 들고 있다. 아버지는 아이의 성장을 돕는 과정에서 행복감을 성취하게 된다. 이것은 결국 헌신으로도 설명될 수 있는데 메이어옵이 계속해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통해서 배려를 설명하는 것은 배려가 결코 의무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강요나 필요악이 아니면서 책임인 이런 관계에서 배려는 기꺼이 하는 것이고 나의 만족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 하는 것이 된다. 메이어옵의 배려 정의를 살펴 보면 배려 윤리가 단지 배려하는 사람의 감정적인 변화나 동기에 의해 출발하기 때문에 주체의 감정을 타인에게 투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불식시킬 여지가 보인다. 배려 행위를 할 때 주체가 배려를 하면 그 배려 행위의 대상자인 타자는 대상자이면서 동시에 배려를 통해 성장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성장은 주체인 나에게 행복감을 선사한다. 그 성장은 결코 주체인 배려하는 자가 의도하는 방향이나 결과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배려하는 사람은 배려받는 사람에게 자신의 틀을 강요하는 강력한 힘 안에서 시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다. 특히 배려 행위 결과로서 배려 받는 사람이 성장한 것에 대해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지,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 배려 행위의 동기가 아니라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이것은 나딩스가 배려하는 사람으로서 교사를 말할 때, 보다 더 분명해진다. 나딩스는 이에 대해 배려 교육에서 교사의 역할이 배려하는 자의 자리라고 말한다.(Noddings, 2003:167) 배려자로서 교사는 배려받는 사람인 학생들에게 전념한다. 그리고 배려받는 사람인 학생들이 스스로 받아들이면서 기획하는 것을 통해 동기가 바뀌는 것을 경험한다. 교사가 질문을 하고 학생이 반응할 때 교사는 단순히 학생의 질문에 반응하는 것만이 아니라 받아들인다. 질문을 통해 학생이 무엇을 문제로 인식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교사는 단순하게 판단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 전체의 흐름 속에서 학생이 어떤 방식으로 이 사안에 관계하고 있는지 그리고 말과 말의 여백 속에서 어떤 것들이 오가는지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그 학생과 관계하고 있다. 교사는 배려하는 사람으로서 배려받는 학생의 필요에 따른 문답을 진행한다. 교사는 학생이 내 질문에 내가 원하는 답을 말함으로써 받게 될 나의 기분이나 감정을 위해 배려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받는 행복감은 학생이 수업이라는 배려 과정을 통해 이루게 될 지적 성장에, 그리고 학생의 필요가 충족되었다는 충족감을 느낌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감정이나 기분이 배려 윤리를 시작하게 하는 동기라고 볼 수는 없다. 배려를 통해서 타인이 성장하고 있다는 점으로 인해 나의 행복감이 증대될 뿐이다. 우리가 배려를 했고 그래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즉 배려 행위가 주체의 행복감을 보장한다면, 이것은 배려 행위의 결과이지 동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즉 어떤 일에 대해서 그 일이 일어난 후 특정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는 말이다. 통상 우리가 이기적 행복감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배려하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즉 결과를 마치 원인인 것처럼 생각한다면 원인과 결과를 혼동한 오류일 뿐이다.

특히 메이어옵은 성장을 지향하는 타인의 욕구에 열렬히 반응한다고 말함으로써 감정의 쾌가 아니라 타자의 배려받고자 하는 욕구에 반응하고 응답하는 것으로 주체의 책임을 더 강조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감정과 유사하게 배려 행위가 따뜻한 관심에서 비롯되거나 좋은 의도 자체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배려가 메이어옵이 말한 대로 타인의 욕구 즉 배려받고자 하는 욕구를 받아들이고 그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라면 욕구 자체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이해와 분석에 따라 원하는 것을 제대로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적절하게 반응해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좋은 의도나 따뜻한 관심 자체가 좋은 결과를 보증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좋은 배려, 정확하게 말해 배려를 잘 하는 것은 우선 배려를 받고자 하는 자 혹은 배려가 필요한 자에 대해 잘 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배려 받는 사람이 누구이며 어떤 상황에 처해 있으며 어떤 능력이 있고 한계가 있는지를 아는 것, 그리고 진정한 욕구가 무엇인지 아는 것, 나의 배려가 그가 성장하는 데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정확한 판단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메이어옵은 명시적 앎과 암시적 앎을 구분하고, 직접적 앎과 간접적 앎을 구분함으로써 안다는 것에는 지식적 앎과 실존적 앎이 함께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Mayeroff, 1971:18-20) 이에 따르면 타인에 대한 정보를 아는 것은 물론 타인이 나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타인의 실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 배려에 필요하다는 말이다.

결국 배려를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타자 그 자체다. 타인에게 몰두하는 것은 그러나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자기상실은 아니다. 메이어옵에 따르면 배려를 위해 배려받는 사람에게 몰두하는 것은 자신이 관심을 주고자 하는 바로 그것에 몰두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다. 이를 메이어옵은 “자기자신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Mayeroff, 1971:20) 타자가 배려를 욕구하고 그 배려가 완료되기 위해서 배려하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은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배려하는 사람이 나 자신이 되기 위해서 배려받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 역시 분명하다.

여기서 주체와 타자 간의 중요한 관계가 드러난다. 배려하는 사람이 배려받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말은 인간의 존재방식의 근원이 관계성 속에 있다는 말이다. 서구 근대 개인의 개념에서 떼어버린 타자와 관계가 배려 윤리에서는 근원적인 것이 된다는 말이다. 이후에 살펴보겠지만 트론토 역시 인간의 근원은 취약함, 상처받을 가능성 그리고 관계 안에 있음(Tronto, 2021:87-88) 이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고립적인 존재, 독립적인 주체 개념은 고안하거나 상정한 것일 뿐 인간의 현실성 자체를 반영하고 있지는 못한다. 이런 이해방식은 하이데거의 인간 이해 방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즉 인간의 실존은 세계 안에 있음 혹은 세계내존재이며 함께 있음 혹은 공동현존재라고 보고 있는 하이데거 현존재 이해에 토대한다. 배려를 한다는 것에는 배려하는 사람과 배려행위가 있어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배려를 필요로 하고 배려를 요구함으로써 배려행위를 받는 타자가 함께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배려받는 자는 배려하는 자와 상호관련성 속에 함께 존재한다.

길리건 역시 유사하다. 길리건이 In a different voice에서 콜버그의 도덕 발달 이론 즉, 도덕발달단계에 대한 합리성과 이성적인 접근에 반대해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배려 윤리를 주창할 때(Gilligan, 1982:18-20), 여성적 관점이라고 배제된 중요한 개념에 대해 다루고 있다. 남성적 입장에서의 권리의 윤리와 대비되는 측면에서 책임의 윤리인 여성적 윤리는 판단의 기준이 공감과 이해심 그리고 관계를 중시하는 태도인데, 콜버그의 실험은 이런 요소가 완전히 배제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길리건은 그렇다고 해서 여성적 윤리의 특징이 전체를 대표한다고 보지는 않았다. 다만 권리와 책임의 윤리가 차이가 있으며 각 두 진영에서 다른 방식으로 필요로 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두 진영이 필요로 하는 덕목이 다르며 권리는 평등을 책임을 형평성을 더 중요시한다는 것이다. 배려 윤리에서 형평성을 중요한 기준으로 보자면 형평성은 기계적 평등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에 상황과 관계를 살펴봄으로써 어떤 필요와 어떤 욕구가 있는지 파악하고 그것을 해결해야 한다. 배려 윤리가 타인의 욕구를 존중하고 형평성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공감과 배려의 기제 하에 행위할 수밖에 없다. 길리건은 콜버그의 이론이 남성적 입장에 치우쳐 있다고 비판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성적 관점의 배려 윤리에 종속된다고 보지는 않았다. 길리건에 따르면 이 두 윤리는 상호보완적(Gilligan, 1982:170-171) 관계에 있다.

3. 타자에 응답하기

나딩스는 배려를 관계의 윤리로 정립시킨다. 배려의 필수요소는 세 가지로, 배려하는 자, 배려받는 자, 그리고 배려 자체(Noddings, 2003:14.)에 있다. 이 말은 배려를 통해 배려하는 자와 배려받는 자가 상호 관계를 맺고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배려하는 자와 배려받는 자는 고립적이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어떤 관계를 맺고 있다(Noddings, 2003:76.)는 것이다. 이 관점은 하이데거가 배려가 인간의 근원적인 존재 방식이며, ‘세계-내-존재’인 현존재가 다른 존재자들에 대해 염려, 걱정, 헌신 등을 통해 관계 맺고 살아간다고 말했던 실존적 의미의 인간 이해와 맞닿아 있다.(임정연, 2012:58)

배려의 핵심적인 개념인 전념과 동기적 전이는 배려에서 배려하는 자와 배려받는 자의 역할과 의미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그것은 어떤 배려의 관계에서든지 완전하면서도 본질적인 것이다. 일례로 낯선 사람이 나를 붙잡고 길을 묻는다고 하자. 비록 아주 짧은 시간이라 해도 그 만남은 배려의 관계를 만들어 낸다. 나는 그의 요구를 주의 깊게 듣는다. 그리고 그가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방식에서 반응한다.(Noddings, 2002:53.)

이러한 배려하는 자의 수용 상태가 전념인데, 배려받는 자가 배려자의 ‘배려 노력을 수용할 때’ 배려 관계는 비로소 완성된다.(Noddings, 2002:42) 동기적 전이는 그가 나에게 직접적으로 요구하지 않더라도 도움이 필요한 상태에 처해 있을 때 나의 마음이 움직이는 상황을 의미한다. 나딩스는 신발끈을 묶는 아이의 예(Noddings, 2002:45)를 들어 설명한다. 즉 우리는 어떤 아이가 신을 신거나 옷을 입을 때 곧바로 도움을 주려고 하지는 않지만, 그가 신발끈을 묶기 위해 끙끙댈 때 그 손이 움직이는 대로 손가락을 함께 움직이고 있음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나딩스는 이렇게 타자를 향하는 상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로 움직이는 상태를 동기적 전이라고 말한다. 전념과 동기적 전이는 나딩스의 배려 윤리를 특징짓는 중요한 지점이다. 특히 동기적 전이에서 중요한 지점은 아이가 신을 신거나 옷을 입을 때 신발끈을 꿰거나 단추를 잠그는 서툰 손놀림에 우리가 즉각 반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돕고자 하는 마음이 타인을 향해 가고 있지만 곧바로 행동에 옮기지 않고 그의 부름을 기다린다는 사실, 배려의 행위가 주체의 일방성에 있지 않다는 점을 보여 준다. 또한 이 동기적 전이의 개념은 교사와 학생, 어머니와 엄마, 의료진과 환자라는 관계 속에서 배려 관계가 성립된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자신의 필요와 욕구를 충분히 인지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는 타자를 어떻게 배려할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하는 일단의 비판에 대해 어느 정도 답을 준다.

나딩스는 이 지점에서 주체와 타자 둘의 관계를 상호성으로 설명한다.(Noddings, 2010:306.) 그런데 이 상호성을 상호대등한 독립된 인격체가 똑같은 권리로 평등하게 만나는 관계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나딩스는 배려하는 사람과 배려받는 사람의 관계 속에 배려의 필수요소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특히 그는 Caring에서 메이어옵의 배려의 정의와 다르게 생각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메이어옵이 배려하는 자 즉 주체가 배려하는 자를 돕고 성장하게 만드는 것을 배려로 정의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주체의 힘을 통해 시혜를 베풀 듯 돕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나딩스는 계속해서 배려하는 사람이 배려받는 사람에게도 의존하고 있음을 상기시키며 타자의존적인, 즉 타자중심적인 시각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배려받는 자가 배려하는 자에게 의존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배려하는 자 역시 배려받는 자에게 의존한다. 우리는 모두 배려 속에서 타자에게 의존해 있다. 그래서 내가 추구하는 선인 윤리적 자아의 완성은 너 즉 타자에게 의존한다.(Noddings, 23.)

그러나 배려하는 자와 배려받는 자가 서로에게 의존한다는 사실이 평등한 관계에서 똑같은 몫의 상호평등성을 의미한다고 봐서는 안 된다. 상호성이라는 것이 곧바로 배려하는 자와 배려받는 자 사이의 직접적인 상호성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나딩스는 배려받는 자 역시 배려 윤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배려받고 있음을 표현해야 한다. 배려받는 자가 응답해야 한다는 것은 배려 윤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특히 이것은 배려가 제대로 되고 있는지, 혹시라도 그 배려가 주체중심적인 시각에서 행해지는 일방적인 것이 아닌지 검토하게 만들어 준다. 배려의 핵심은 그것이다.

그리고 이 둘의 위치는 그 관계에서 바로 역전되지 않는다. 즉 배려하는 자는 배려하기 위해 배려받는 자를 쳐다보고 그의 필요를 느끼고 움직여야 한다. 이때 배려받는 자는 배려하는 자처럼 배려하기 위해 배려하는 자를 쳐다보지 않는다. 그는 단지 배려받고 있을 때 배려받고 있음만을 표현하면 된다. 이 둘은 구분되어야 한다. 나딩스는 배려하는 자와 배려받는 자 둘 사이에 어떤 의존이 있다고 보고 있지만 이런 의미에서 이 둘의 관계를 상호적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나 즉 배려하는 자는 절대적인 책임만이 있을 뿐이다. 배려하고 응답해야 하는 책임이 그것이다. 내가 타자를 절대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나는 해야 해’(Noddings, 2003:73.)를 받아들이는 것이 윤리적 자아가 되는 길임에는 분명하다. 그리고 ‘나는 해야 해’를 받아들여야 하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나 즉 배려하는 자가 된다. 이 둘의 관계가 바로 역전되지 않는다는 것은 중요하다. 내가 배려하는 자가 됨과 동시에 배려 후 다시 타자로부터 배려를 받는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다면 그 배려는 진정한 배려가 아니라 관계후에 나에게 올 배려를 계산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단순한 주고받기에 불과하다.

‘해야 한다’는 것은 무엇으로부터 나올 수 있을까? 아무 문제도 없고 평온한 상태에서 윤리적 행위가 시작되지는 않는다. 내가 무엇인가에 대해 ‘해야 한다’고 마음먹을 수 있는 것은, 나아가 실제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은 무언가를 해 줄 필요가 있는 상황 때문이다. 그 상황은 타인에게서 나온다. 배려가 배려받으려는 욕망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배려가 완수되었음을 알리는 것 역시 배려를 받았고 그 배려가 나의 요구에 맞는 것이라는 반응을 보여야 한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배려 관계가 배려받는 자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배려 윤리는 지나치게 타자중심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배려하는 자의 지나친 희생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이 때 배려 관계에서 배려하는 자는 영원히 배려하는 자로서의 자리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관계 속에서 배려받는 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함께 갖고 있다. 중요한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이런 가능성은 이미 이루어진 배려 관계에서 곧바로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배려하는 자의 위치에 잊지 않아도 된다. 어떤 관계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배려를 받을 수도 있다. 배려 관계 자체가 정립되면 배려하는 자와 배려받는 자와의 배려 관계는 일단 확정된 것으로 유동적이지 않다. 그러나 또다른 관계가 맺어지면서 수많은 배려 관계가 생겨나고 사라진다. 그런 점에서 배려 윤리의 상호성은 영원히 배려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불균형을 최소한으로 해소해주는 장치가 된다.

이렇게 본다면 나딩스의 상호성을 상호주체성과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여기서 상호성이라는 것은 나는 배려하는 자로서, 너는 배려받는 자로서 상호관계가 있다는 것을 의하는 것일 뿐, 내가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처럼 너도 이 관계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배려하는 자로서 내가 정체성이 형성된다면 그 때 나는 배려하는 자로서만 타자와 관계 맺는다. 그 관계가 끝난 후 내가 다른 누군가와 배려관계를 맺는다면 배려받는 자가 될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지, 이미 맺어진 관계 속에서 서로 번갈아가면서 배려하는 바와 배려받는 자의 역할을 맡는 것이 아니다. 배려하는 자는 배려하는 자에게 요구되는 것을, 배려받는 자는 배려받는 자에게 요구되는 것을 행하면 된다.(Noddings, 2003:80-81.)

사실 배려 윤리에서 배려하는 자와 배려받는 자의 관계는 레비나스가 끊임없이 말해 주고 있는 주체의 책임, 그리고 주체의 응답과 유사한 점이 많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주체가 타자의 자리에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내가 타자에 설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말하는 순간, 타자는 신비로운 수수께끼로서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예측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것이 됨으로써 주체중심적 시각에서 타자에게 가했던 폭력을 답습할 위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딩스는 주체와 타자의 입장을 곧바로 전환시키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주체의 독단성과 이기성에서 타자를 구하고는 있지만, 배려하는 자가 배려받는 자가 될 가능성을 열어줌으로써 주체의 자기희생이라는 비판에 대응하는 최소한의 장치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배려 윤리에서 더 강조되어야 할 것은 배려받는 자의 요구와 그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4. 배려 교육의 필요성

배려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배려하는 자가 배려 요구에 대해 응답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엄마가 자식의 요구에 반응하는 것처럼 자연적인 배려가 일어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다른 관계에서도 여전히 배려받는 자의 요구에 응답할 수 있는 가능성은 무엇에 기인하는 것일까? 관계에서 배려하는 자로서 주체의 책임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래서 나딩스는 배려 교육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나딩스는 사실 직접적 배려가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배려이며 간접적 배려는 초기에는 오히려 부정하기까지 했다. 배려를 실천할 수 있는 조건으로서 유일한 것을 나딩스는 친밀함, 즉 가까움이라고 보고 있는데, 진정한 의미에서 배려란 배려하는 주체와 배려 받는 타자, 이 둘이 형성하는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 특히 배려가 완료되었다고 배려받는 타자가 반응할 때 그리고 그것을 배려하는 타자가 인지할 때 비로소 그 배려는 완료된다. 다시 말하자면 배려 과계가 완수되었고 그 때의 배려가 끝이 났다는 것은 누구를 통해서인가, 바로 타자다. 레비나스와 마찬가지로 나딩스의 배려 윤리는 이로 인해 타자 중심적인 관점을 내포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로 인해 레비나스와 마찬가지로 나딩스 역시 지나친 주체의 희생이 아닌가 하는 지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런 나딩스의 생각에 따르면 즉, 배려가 배려 받는 자의 욕구와 필요를 잘 충족시켰으며 그것을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따르면 결국 가까이에서 직접적으로 확인 가능한 지점이 배려 윤리의 한계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나딩스는 멀리 떨어져 있는 굶주림에 시달리는 제3세계의 한 원주민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배려는 없다고까지 말하고 있다.(Noddings, 1992:114-115) 이런 귀결은 얼핏 비윤리적으로 보이지만 초기 나딩스의 관점에 따르면 일관적이고 논리적인 귀결이다. 그러나 이런 귀결에 따르면 배려 윤리는 내 가까이에 있는 직접적으로 만나는 사람에게만 유효하며,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윤리적 책임을 질 필요가 없게 된다. 이렇게 되면 배려 윤리가 우리 사회에 필요한 윤리로서, 더 큰 공포와 불편함을 겪는 배려받아야 할 자를 구할 수 있을 것인가?

나딩스는 간접적 배려가 ‘정의감’이며, 그것도 역시 중요한 것이고 유일한 배려의 형태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 인정한다.(Noddings, 2018:152) 앞서 말한 것처럼 나딩스는 간접적 배려가 힘들고 어렵다는 것, 그리고 불확실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게 하면서도 배려가 완성되었음을 직접 배려처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참여가 필요하다. 개인적 참여를 넘어 공동체와 국가적 수준에서 그리고 세계적 수준에서 관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교육이 되어야 하고, 그런 사람이 관리자가 될 수 있게끔 감시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배려 윤리의 차원은 정확하게 필요한 것에 대해 배려되는가, 배려받는 자의 입장에서 완료가 선언되는가를 충족시키는 수준에서 이행되어야 한다.

친밀함과 가까움을 통해 배려 윤리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멀리 떨어진 사람에 대한 배려는 불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멀리 떨어진 사람이 없는 것처럼 폐쇄적으로 살 수는 없다. 배려 윤리 자체에도 개방성이 함축되어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나딩스는 이에 대해 배려의 원과 사슬의 관계(Noddings, 2003:43-45)를 말한다. 원과 사슬의 관계 설명에 따르면 나딩스는 배려에 정도차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배려하는 사람이 중심이 있다고 할 때 친밀감의 정도가 높은 사람은 중심에 가까이 있고, 낮아질수록 중심에서 점점 멀어져 있다. 그런 관계들이 사슬처럼 연결될 수 있고 다시 중심에 따라 재배치되는 형식으로 묶인다. 배려의 원을 형성하면서 나와 직접적으로 아는 관계와 나를 중심으로 만난 사람들끼리 다시 만나거나 여러 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 배려 관계가 이런 관계를 통해 실질적으로 전 인류를 아를 수 없을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어느 정도의 확장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나딩스의 배려 논의에서 자연적 배려(Noddings, 1984:95)가 어떻게 윤리적 배려로 이어질 수 있는가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 나딩스는 자연적 배려가 직접적인 체험으로부터 오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요청의 필요가 없이(Noddings, 1992:290) 자연스럽게 일어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자연적 배려로부터 윤리적 배려로 어떻게 이어질 수 있는가? 내가 배려 받았던 상황을 어렴풋이 떠올리는 것만으로 내가 타자를 위해 배려해야 한다는 당위를 어떻게 불러 올 것인가? 특히 나딩스는 윤리적 배려의 순간에도 어떤 준칙이나 원칙을 따르는 데서 행위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고, 자연적 배려가 시행되었던 상황을 떠올림으로써 가능하다고 했는데, 어떤 의지적 결단도 아니면서 자연적 배려의 순간을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가?

이에 대해 나딩스가 ‘배려 능력’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방치된 아이들이 자신이 배려 받을 것이라는 기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혹은 배려가 박탈되었을 때도 본인보다 더 어린 배려해야 할 타인을 위해 배려하는 영웅적인 내적 능력에 의지할 때가 있다. (Noddings, 2002:51)

즉 나딩스는 배려가 경험에서 오는 자연적이라는 것은 여전히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배려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 이에 따르면 배려는 타고난 능력 혹은 자질로서 부여되어 있거나 후천적 경험을 통해 습득될 수 있다는 점이다. 후천적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배려를 할 수 있다는 말과 그렇지 못한 환경에서도 배려할 줄 아는 선천적 능력일 수도 있다는 말은 일견 모순된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적 배려에 대한 나딩스의 이런 두 가지 이해로부터 결국 배려 교육의 필요성이 도출된다는 점이다. 배려는 부모나 그런 환경을 통해 모방된다는 것, 혹은 선천적 자질을 이끌어 내는 것으로부터 가능하다면 이 두 가지 방식으로 습득을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배려 받는 법을 아이들이 배울 수 있도록 하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함으로써 타인을 배려할 수 있는 어떤 능력을 갖추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학교의 주요 목적이 타인 배려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나딩스, 2002:55)

나딩스로부터 배려 교육의 필요성을 도출했다면 다음으로 배려를 교육할 수 있는가에 대해 트론토와 피셔의 논의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트론토는 배려를 사적 영역이 아닌 공적 영역으로의 확장 가능성에 대해 말하고 있고 배려 속에 내재한 존재론적 토대를 통해 배려의 필요성을 보여 준다. 또한 배려를 일반적인 4단계와 특수하고 구체적인 경우를 추가한 5가지 단계로 나누어 각 단계에서 필요한 윤리적 자질을 매칭시키고 있는데, 이는 배려 윤리를 교육의 과정으로 정립하고자 할 때 체계화하고 배려 행위에 대해 분석하고 평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마련해 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트론토와 피셔는 배려의 과정을 네 단계로 규정하고 있다. 첫 번째는 관심 배려caring about1),다. 이 단계는 배려의 첫 번째 단계로 개인이나 집단이 충족되지 않은 배려의 필요를 감지한다. 두 번째 단계는 안심 배려caring for의 단계다. 이제 필요가 확인되었기 때문에 개인이나 집단은 필요가 충족될 것이라는 확신을 줄 책임을 진다. 세 번째는 배려 제공care-giving의 단계다. 이 단계에서는 실질적인 배려 활동이 있어야 한다. 네 번째 단계가 배려 수용care- receiving의 단계다. 실질적인 배려 노동의 단계에 접어들면 안심 배려를 받아온 개인, 사물, 집단, 동물, 식물 또는 환경의 반응이 발생한다. 반응이나 반응을 통한 판단을 관찰하는 것이 이 단계다. 배려받는 사람이 반응할 때 그 반응을 살피지 않아도 되지만 어떤 경우에는 배려에 대해 반응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배려가 충분했는지 새로운 배려가 더 필요했는지 판단이 가능하려면 이 수용 단계가 필요하다. 트론토는 여기까지가 일반화된 수준의 배려 과정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일반적인 수준에서 더 나아가 구체적인 수준에서 배려를 고려하기 위해서는 다섯 번째 단계를 추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함께 배려함caring with의 단계이다. 이 마지막 단계에서는 네 단계를 통해 충족된 배려의 필요와 방식이 모든 사람을 위한 정의, 평등, 자유에 대한 민주적 기여와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Tronto, 2021:71-72) 즉 가장 넓은 배려의 실천은 결국 어떤 특정한 성이나 영역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속하는 실천이어야 한다. 배려 교육의 목표는 배려를 실첨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다 함께 잘 살 수 있음에 대해 확신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Tronto, 2021:85) 이렇게 배려에 대해 단계를 설정했을 때 이제 배려 교육은 그 과정과 평가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배려 윤리의 네 단계에 상응하는 도덕적 자질에 대해서도 트론토는 네 가지로 말하고 있다.(Tronto, 2021:93) 먼저 관심의 단계다. 배려의 첫 번째 단계인 관심 배려의 단계에서 개인이나 집단에서 충족되지 못한 배려의 필요를 파악한다.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이해관계를 앞세우지 않고 진정으로 배려가 필요한 사람의 처지에서 바라볼 수 있는 능력과 관심이 요구된다. 두 번째는 책임성이다. 안심 배려의 단계에서 배려의 필요가 확인되면 개인이나 집단은 이러한 필요를 충족시켜야 하는 책임을 맡아야 한다. 세 번째는 수행성이다. 배려 제공의 단계에서 책임을 맡는 것이 실제 배려 행위를 하는 것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은 익히 알 수 있다. 배려를 실제로 실시하는 것이 세 번째 단계인데 여기서는 배려를 수행함이라는 도덕적 자질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배려를 수행하는 것은 도덕적 실천의 덕목이지 단순한 기술적 의미가 아니라는 점이다. 네 번째 단계인 배려 수혜의 단계에서 응답성이 있다. 일단 배려가 수행되면 개인, 집단, 동물, 식물, 환경 등 배려의 대상으로부터 반응이 있다. 반응을 살펴 보고 반응에 대해 판단하는 것은 응답성이라는 도덕적 자질을 필요로 한다. 필요를 충족시키는 돌봄을 제공하는 사람은 응답의 과정을 종결시켜야 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응답을 확인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 응답은 배려 행위가 필요를 충족시켰다 하더라도 새로운 필요가 등장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과정은 계속된다. 또한 트론토는 함께 돌봄의 단계에서 필요한 윤리적 자질로서 복수성, 의사토론, 신뢰, 존경을 바탕으로 하는 연대성을 들고 있다. 트론토 외에도 배려 윤리에 필요한 윤리적 자질에 대해 논의한 학자들은 많지만 트론토가 특별한 것은 자질 자체를 과도하게 강조함으로써 배려 윤리를 어떤 하나의 자질로만 규정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배려 윤리에 대한 존재론적 토대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개인이 관계 안에서의 존재라는 점이다.(Tronto, 2021: 87-88) 배려 윤리의 관점에서 개인은 각자 따로 떨어진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언제나 상호 관계를 통해서 존재한다. 물론 그 관계를 멀리 하려고 할 수도 있지만 여전히 멀리하는 ‘관계’ 안에서 존재한다. 그리고 베려 윤리의 관점에서 인간은 취약하고 허약한 존재다. 레비나스가 타자에 대해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인해 주체가 그에 대해 윤리적 책임을 진다고 했을 때 상처받을 수 있고 죽어갈 수 있는 존재로서 인간의 근본성을 이해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해의 근저에는 죽어가는 존재로서 혹은 죽음이 도래할 존재로서 인간을 바라보는 하이데거의 실존적 관점 역시 내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을 취약하고 허약한 존재로 보는 것은 신체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이 삶의 일정 구간에서는 질병과 고통에 허덕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인간의 일생에서 어떤 구간이라도 누군가를 의지하거나 누군가에게 의지가 되지 않는 구간이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다음으로 이런 이유로 인간은 언제나 배려받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배려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배려의 전형적인 이미지와 유사하다. 물론 배려의 필요와 능력은 시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이해에서 의존을 핵심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기존의 인간 이해에서 핵심으로 자리잡은 자유롭고 독립적인 인간형에서 흠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 오던 배려받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게 된다. 즉 근대 민주주의의 이해에서 인간형은 어떤 흠이 없는 독립적이고 당당한 존재로서 받아들였기 때문에,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흠이 있는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존재론적으로 인간의 본성 속에 함께 함과 의존함이 내재되어 있다면 배려를 주고받는 것은 본성상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또한 인간이 관계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과 이타적인 것은 차이가 있다. 이타심은 주체가 가지는 자신의 결정이며 이것은 타인과의 어떤 관계에서 도출되는 것이 아니다. 이타심은 이타적인 행위 자체가 배려의 본질에 대해 상기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는 매우 중요하지만 관계를 근본으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배려 실천의 행위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결국 배려 윤리는 인간의 이타성에 배려윤리의 실천을 기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져야 할 책임을 배려 행위의 동인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배려하는 사람의 정서적 상태 자체가 배려 행위의 동인이기 때문에 가변적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게 된다.

잉스터는 배려 윤리를 개인적 차원의 윤리에서 공동체 윤리로, 그리고 정치 이론으로 확대하려는 시도로 배려 윤리를 롤즈의 정의론에 필적하는 이론으로 격상시키면서 정치 영역에서 적용되는 근본이론으로 발전시킨다. 그가 주장하는 배려 의무론은 우리가 왜 타인을 돌봐야 하는가에 대해 대답하고 있다(Engster, 2017). 왜 우리는 가까이 있는 돌봐야 할 친구나 가족, 친척뿐 아니라 돌봄을 요구하는 혹은 필요로 하는 사람들까지 배려해야 하는가. 그 핵심에는 우리가 원초적으로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있다. 인간 존재에는 의존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타자의 얼굴이 상처입을 가능성, 연약함으로 나타난다고 보는 레비나스의 사유와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타자에게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나의 책임 없이는 죽어가야 할 자라는 것을 그가 얼굴로서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Levinas, 1974).

5. 결론

나딩스는 교육의 일차적 목적이 배려 관계를 유지하고 관계를 고양시키는 것이라고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Noddings, 1984:182) 배려 윤리는 모든 이론이 그렇듯 어느 정도의 약점을 노출한다. 길리건과 나딩스가 주목했듯, 친밀함에 근거한 관계정립은 배려 윤리에서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합리적 판단을 저해할 수도 있다는 점, 그렇기 때문에 공명정대한 판결 혹은 문제해결이 불가능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비판받는 지점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주지했듯, 친밀함은 배려 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시원적 접근에서 필요한 개념이지 배려 윤리의 전체를 아우르는 것은 아니다.

또한 배려 윤리를 여성의 윤리라고만 치부하는 것이 정당한가의 문제는 보다 더 분명하게 해결될 수 있다. 메이어옵이나 길리건, 나딩스에 이르기까지 나아가 잉스터에 이르기까지 배려 윤리가 하나의 성을 대표한다거나 하나의 성만을 위한 것이라는 점은 부정된다. 특히 나딩스는 직접적으로 칸트의 학문과 사상이 남성적 관점을 보여 주고 있지만 남성에게 국한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배려 윤리는 여성적일 수 있지만 배려 윤리에서 중요한 경험과 사유가 여성에게 국한되지 않는다(Noddings, 2007:294)고 말한다. 더 나아가 이들은 여성적이라는 표현을 쓸 때 그것을 고정된 본질이라고 인식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특히 배려에 함의된 의미들이 기존의 윤리학에서 배제되어 왔다고 말할 때 거기에 속한 의미와 개념들의 사용과 이해는, 성별에 따른 차이보다 오히려 개인별 차이가 클 수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나딩스와 잉스터를 통해 우리는 배려 윤리가 가까움의 윤리에서 더 먼 사람들에게 응답해야 할 필요와 응답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이해할 수 있었다. 특히 배려를 하나의 능력으로 본 나딩스의 시각은 그 능력의 발현을 돕기 위한 교육의 필요성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또한 배려 자체가 인간의 본질 속에 내재되어 있는 의존성에서 비롯된다는 잉스터의 생각은 인간을 관계성 속에서 파악하는 시각이 함축되어 있다. 이런 시각에서 배려 윤리를 통해 우리는 윤리의 근본성과 보편성을 엿볼 수 있다. 윤리는 어디서 일어나는가, 혹은 필요한가. 평등함이 절대적으로 이루어지는 곳에서 윤리의 문제는 도래하지 않는다. 윤리적 문제는 분배의 문제만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움’을 실현해야 한다는 요구에 처했을 때, 즉 ‘인간다움’을 실현해야 하는 곳에서 발생한다.

배려 윤리에서는 배려를 하나의 원칙이나 원리로 고정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배려 윤리의 약점이자 강점이다. 타자와 진정으로 마주하는 순간이 중요하며 그 때 나는 ‘그’의 요구에 응답할 수 있는 자로서 최고의 가치를 갖게 된다. 내가 배려 관계 속에서 만나는 그 사람은 나를 책임 있는 사람이 되게 하고 윤리적 주체로 서게 만든다. 상황과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한 움직임이 아닌, 해야 한다는 당위로 인해 나는 움직이기 어렵고, 나의 상황이 허락하거나 내가 원할 때만 움직이는 것은 틀렸다.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단 하나의 사실, 그가 나에게 바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바람에 응답함으로써 나는 비로소 인간성을 갖춘 인간 자체가 될 수 있다.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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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s

1)

김희강⋅나상원은 트론토의 Caring Democracy를 돌봄민주주의로 번역하고 있다. 주로 돌봄으로 번역되는 영역은 정치학과 간호학, 복지학 등의 영역에서다. 번역본을 참조하되 care 개념은 배려 윤리에서의 개념이해의 연장선에서 배려로 쓰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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