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세를 위한 교양, 빅 히스토리

Big History -General Education for the Anthropocene

Article information

Korean J General Edu. 2022;16(1):11-22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2 February 28
doi : https://doi.org/10.46392/kjge.2022.16.1.11
김기봉
경기대학교 교수, nowtime21@gmail.com
Professor, Department of History, Kyonggi University
본 연구는 2021학년도 경기대학교 학술연구비(일반연구과제) 지원에 의하여 수행되었음
Received 2022 January 20; Revised 2022 February 14; Accepted 2022 February 22.

Abstract

교양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은 대체로 실체로서 교양이 있다는 전제로 제기하는 질문이다. 그런 전제에 따라 교양의 원형으로 인용되는 것이 “artes liberalis”와 “Bildung”이다. 이 둘은 서로 다른 의미가 있지만, 인간을 주체로 설정하고 인간성과 삶의 기술을 가르친다는 점에서는 같다.

인류 문명의 지속가능성을 넘어 인류 생존을 위협하는 인류세에는 인간중심주의를 탈피하는 새로운 교양 개념을 요청한다. 종래의 인문학 중심의 교양은 휴머니즘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 빅뱅부터 인류세까지 거의 모든 것에 관한 과학적 지식을 제공하는 빅 히스토리는 포스트휴먼 교양 개념과 교양교육 모델을 제시해 줄 수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은 빅 히스토리를 통해 인류세에 다시 교양 르네상스가 일어날 수 있는 길을 모색해보려는 목적을 가진다.

Trans Abstract

What is general education? This question usually presumes that general education exists as a substance. Following this presumption, “artes liberalis” and “Bildung” are considered as the archetypes of general education. These two have different meanings, but they both set human beings as the subject and they both teach humanities and living arts.

The Anthropocene, which threatens the survival of mankind, let alone the sustainability of human civilization, demands a new concept of general education that breaks away from anthropocentrism. The conventional Humanities-centered general education must break out of the egg of humanism. Big History, which provides scientific knowledge on almost everything from the Big Bang to the Anthropocene, can present a post-human general education concept and a general education model. Therefore, this thesis aims to find a way for a general education Renaissance in the Anthropocene through Big History.

1. 왜 다시 교양인가?

교양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이 질문은 실체로서 교양이 있다는 전제로 제기하는 경향이 있다. 그 실체를 지칭하는 막대기로 사용하는 말이 ‘자유 학예’로 번역되는 Liberal Arts다. ‘liberal’의 어원은 라틴어 liberalis이다. liberalis는 노예인 servile가 아닌 “자유민의 또는 자유민에 관련된(of or relating to free men)”(Kimball, 1986: 13)을 의미한다. 자유민에게 요청되는 삶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artes liberalis”이다. 이 말이 쓰인 최초의 기록은 고대 로마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키케로의 저작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고대 아테네 문헌에 그것과 연관된 단어인 “자유민에 적합한(fit for a free man, liberal) 일반교육(general education)”을 지칭하는 enkuklios paideia가 있기에, 키케로가 그 말의 창시자는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Kimball, 1986: 15). liberal과 liberty는 “빚을 지고 있지 않다” 또는 “사회적⋅정치적으로 제한되지 않은”을 뜻하는 라틴어 ‘liber’에서 유래했다. 채무를 이행하지 못해서 사회적 정치적 자유를 상실한 사람이 노예이고, 노예는 주인에게 구속되어 그를 위한 노동을 해야 할 의무를 지닌 자이다. 그리스 로마 시대에 자유란 일을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여유를 갖고 있다는 전제로 성립한다. 노동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기에 폭넓은 공부를 통해 온전하고(whole) 완전한(complete) 인간이 될 수 있는 삶의 조건을 갖춘 자유민을 위한 소양 교육이 “enkuklios paideia” 또는 “artes liberalis”이다.

교양의 유래를 설명하는 또 다른 용어가 독일어의 Bildung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교양(敎養)이란 말은 Bildung을 메이지 시대 일본의 지식인들이 유교의 수양(修養)과 접목하여 번역해서 만들어낸 용어다. 본래 Bildung은 그림 또는 조각과 관련해서 형성, 생성, 조성, 구성, 형태, 형상, 복사, 모조, 모방 등 다양한 의미로 쓰였다. 그것을 인간 됨을 함양한다는 의미로 변환시킨 사람은 독일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마이스터 에카르트(Meister Eckhart)다. 그는 원죄를 짓기 이전 상태인 추방된 낙원으로 복귀하기 위한 인간의 형성(formatio)과 변형(transformatio)을 지칭하는 말로 Bildung을 사용했다. 신을 원본으로 해서 인간다움을 형성하거나 완성할 수 있는 근거는”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했다는 구약성서의 <창세기> 말씀이다. 하지만 기독교적 Bildung 개념에는 어디까지나 “.말할 수 없는 것의 인식(Erkenntnis des Unaussprechbaren)” (Bechthold-Hengelhaupt, 1990)이란 차원에서 신과 인간 사이 선을 넘을 수 없는 관계설정이 규정됐다. Bildung은 인간이 신과 유사해지려는 의도를 함축하지만, 창조주인 신은 피조물인 인간이 자신의 형상을 만드는 것을 금지했다. 형상이 우상 숭배를 낳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오로지 신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Bildung의 본래 의미였다. 하지만 신에 대한 복종의 윤리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musar’가 그리스어로 어린이를 지칭하는 ‘paid’를 교육하는 것을 뜻하는 ‘Paideia’로 번역되면서, 헬레니즘의 자유 학예와 신의 율법에 대한 순종이 서로 긴장 관계를 이루는 의미의 결합이 Bildung 개념 안에서 생성할 수 있는 조건이 생겨났다(Meyer-Drawe, 1999: 165).

후자에서 전자로 Bildung 개념의 세속화는 칸트의 계몽사상을 거쳐 신인문주의 교육이념으로 완성됐다.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형성되는 것이며, 그런 형성하는 주체로서 자의식의 각성을 촉구하는 유명한 선언이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이다. 칸트는 계몽을 “인간의 자기 자신이 책임이 있는 미성숙에서 벗어남(der Ausgang des Menschen aus seiner selbst verschuldeten Unmündigkeit)(Kant, 1784: 481)이라 정의했다. 여기서 미성숙은 외부의 다른 것에 의지 않고는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를 지칭한다. 칸트는 인간이 그런 미성숙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이성 자체가 불완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려는 결단과 용기를 갖지 못해서이기 때문에 그 책임은 전적으로 스스로에게 있다고 했다. 칸트는”그대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를 계몽의 모토로 제시했다.

칸트는 자기가 살고 있는 프로이센은 아직 “계몽된 시대”는 아니기 때문에, 계몽의 기획을 추진해야 할 역사적 사명을 띤 “계몽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런 계몽의 현실과 이상의 차이를 반영하여 과정(Prozess)인 동시에 상태(Zustand)라는 Bildung의 이중 의미가 성립했다. 인격 완성을 인간 삶의 궁극적 소명으로 삼는 것이 Bildung이라면, 그 과정은 개성을 가진 각자가 개별적인 노력으로 추구한다는 점에서 개체적이지만, 그 완성 상태는 우주의 근본원리에 닿아있다는 점에서 보편적이다. 독일 신인문주의 Bildung 개념은 보편적 이성을 강조하는 프랑스 계몽사상과 그에 대항해서 인간의 감성과 직관을 중시하는 독일 낭만주의를 종합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근대 교양인의 표상은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다. 귀족 출신이 아닌 그는 Bildung이란 지적 소양을 갖춘 주체적 개인이 근대적 인간의 전형임을 ‘교양소설(Bildungsroman)’ 속 주인공의 고뇌하는 삶을 통해 보여주었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라고 썼다. ‘자기 형성(Selbstbildung)’을 삶의 목표로 설정하고, 세계와 갈등하고 교감하면서 마침내 자아를 실현하는 주체적 능력을 배양하는 것을 Bildung이라 했다(안성찬, 2009: 107). Bildung으로서 교양은 특정 계층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던 삶의 기술이 시민계급까지 확장되는 근대로의 이행이라는 역사적 맥락을 함축한다. 그것을 노르베르트 엘리아스(Norbert Elias)는 “문명화 과정(Zivilisationsprozess)(엘리아스, 1999)이라고 일컬었다. “문명화 과정”은 근대 시민계급이 구체제의 신분적 위계질서를 타파하고 그들이 주도권을 갖는 방향으로 사회 질서를 재편성하는 근대 혁명의 일환이다. 근대 시민계급은 문명화되고(civilized), 세련되고(cultivated), 공손하고(polite), 품위 있는(polished) 예절과 매너(manner)를 무기로 삼아 귀족에 대항해서 문화 헤게모니를 쟁취하고자 했다.

근대는 누가 사회를 주도하는 세력인가를 신분의 표식이 아닌 능력으로 결정하는 문화혁명을 동반한다. 그런 문화혁명을 선도한 국가는 역설적이게도 근대 민족국가 형성에 뒤처졌던 독일이었다. 칸트와 괴테 같은 독일의 지식인들은 왕정을 타도하는 프랑스혁명과 같은 정치혁명이 불가능한 사회 현실에서 정신적 계몽과 교양의 이념을 통해 근대화를 성취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구체제의 신분질서에서 벗어난 ‘제3신분’이었던 그들은 위로는 귀족, 아래로는 노동자와 구분되는 계층적 정체성을 주조해내고자 했고, 그런 필요에 부응하여 재사용한 것이 Bildung이다. 그것을 메이지 시대 일본의 지식인들이 유교의 수양(修養)과 접목하여 교양(敎養)으로 번역한 것이 우리에게 이식되었다. 교양이란 배움을 통해 삶의 주체로 성장하고 인격을 배양해서 자아완성을 이루는 “배움 그 자체를 위하여 배우는” 행위이다.

칸트가 계몽으로 설파한 감히 알고자 하는 탐구의 노력이 ‘학문’을 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통해 전인적인 인격을 이룬 완성의 상태가 ‘교양’이다. 그런 “학문을 통한 교양(Bildung durch Wissenschaft)”을 담당하는 중심기관으로 대학의 형상을 창조한 프로이센의 철학자가 빌헬름 폰 훔볼트(Wilhelm von Humboldt)다. 그는 모든 학문은 정치적⋅사회적 강요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운 “고독과 자유 (Einsamkeit und Freiheit)”(Humboldt, 1967/68: 106)의 상태에서 펼쳐질 때 꽃피울 수 있다는 믿음으로 독일 근대화를 선도할 나중에 ‘교양시민층(Bildungsbürgertum)’이라 명명됐던 인재들을 양성하는 학문의 전당으로 베를린대학을 1810년에 설립했다. 대학은 자유롭게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는 학자들이 모인 상아탑이며, 국가와 사회가 당면한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지식을 사용할 줄 아는 역량을 가진 인재를 길러내는 산실이다. 그 같은 연구와 교육의 접합으로 근대 대학이 탄생했고, 여기서 교양은 연구와 교육의 두 기능을 결합하는 목적과 가치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훔볼트에 의해 건립된 베를린 대학은 연구와 교육을 연결해서 국가와 사회를 이끄는 미래 인재를 양성하는 전 세계 대학의 전형이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탈주술화 된 근대사회에서 대학이 “세속화된 교양종교”의 성소(聖所)의 기능을 할 수 있느냐다. 이 문제에 대한 가장 심각한 고뇌를 했던 유명한 글이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 학문” (Weber, 1988a)이다. 원래 1917년 대학 신입생을 대상으로 한 이 강연은 베버가 죽기 일 년 전인 1919년에 출판됐기 때문에 “학문적 유언장”이라 불린다. 베버는 직업으로서 학문의 길을 가려는 학생들에게 두 가지 충고를 했다. 첫째는 학자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 길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근대에서 학문 자체가 중대한 위기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앞서 훔볼트가 학자의 요건으로 고독과 자유를 말했다면, 베버는 직업으로서 학문을 수행하기 위해 치러야 할 자기희생을 강조했다. 그는 학자로서 탁월한 업적을 이루려면 고도의 전문성을 가져야 하고, 그러려면 수도승처럼 살아야 한다고 했다. 예컨대 그는 어느 고대 필사본의 한 구절을 판독하는 것에 자기 영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생각에 침잠할 수 없으면 학자가 되는 것을 포기하라고 했다. 내 앞에 이 필사본이 놓이기까지 이미 수천 년이 흘렀고, 내가 지금 이것을 판독하지 못하면 다시 수천 년이 경과 할 것이란 소명감 없이는 학자로서 삶을 살 수 없다고 했다. 그는 학문의 전형을 과학이 아닌 여전히 인문학으로 여겼다. 하지만 과학이 연구해낸 지식이 세상을 혁명적으로 바꾸는 시대에 그런 자기와 싸움을 하면서 학문의 길을 가는 것이 가능하고, 또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인가?

“세계의 탈주술화”가 일어난 근대에 인간에게는 자기 삶의 주체가 되어 자기완성을 이룰 수 있는 계몽의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인간 스스로가 지식의 체계를 세우면서 동시에 그것의 정당성을 입증해야 하는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각자 나름의 합리성으로 추구한 지식의 주관성을 넘어설 수 있는 객관적 지식의 가능 조건을 어떻게 확립할 수 있는가? 베버는 계몽의 기획으로 획득한 인간 정신의 자유가 객관적 인식을 불가능하게 만든 모순을 학문이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뇌했다. 그가 근대 합리화 과정이 초래한 학문적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돌파구로 찾은 개념이 문화다. 그는 문화를 “세계에서 일어난 무의미하고 무한한 일들 가운데 인간의 관점으로부터 의미와 의의를 부여한 유한한 단면이다”(Weber, 1988b: 180)라고 정의했다. 인간의 모든 인식과 가치판단은 문화라는 가치체계에 입각해서 이뤄진다. 인간은 그 자신이 짠 문화라는 거미줄에 매달려 사는 거미와 같다. 우리는 모든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어느 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특정 장소에서 특정 시간대를 산다. 그런 인간의 실존적 조건을 전제로 베버가 가치의 상대주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궁극의 학문으로 문화과학(Kulturwissenschaft)을 제안했다. 그런 보편적 문화과학이 성립할 수 있는 토대를 “모든 문화과학의 선험적 전제는 우리는 어느 특정 문화 또는 문화 일반에서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깨어있는 의식으로 세계에 대한 입장을 정하고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과 의지를 가진 문화인(Kulturmenschen)”(Weber, 1988b: 180)에서 찾고자 했다. 그가 이상형으로 설정한 ‘문화인’이 바로 훔볼트가 구상한 교양을 가진 인간이다.

하지만 오늘의 대학이 베버가 말한 ‘문화과학’을 직업으로서 학문으로 연구하는 전당이고, 문화인으로서 교양을 가진 인재를 양성하는가? ‘문화과학’으로 학문을 재구축하려는 베버의 기획은 결국 그 자신도 비관적인 전망을 했던 것처럼 실패했고, 오늘날 대학에서 교양은 교육의 중심이 아닌 변두리로 전락했다. 훔볼트는 근대 대학의 창설을 통해 인간의 존재의미를 규정하는 종교의 세속적 기능을 하는 교양의 이념을 제시했다. 훔볼트가 창설한 근대 대학은 전 세계적으로 번창했지만, 문화적 구원으로서 교양의 기능은 대학에서 몰락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과학적 지식이 증가하면 할수록 탈주술화 과정은 심화되고, 그럴수록 교양과 인문학의 ‘유사 종교적’기능은 약화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과학이 정상과학의 패러다임으로 정착되면서 학문의 탈인문화 현상은 심화 되고, 이에 따라 훔볼트의 “학문을 통한 교양”은 망각 되어 점점 “교양 없는 학문”이 위세를 떨쳤다. 학문의 목적으로서 교양의 상실은 삶의 의미와 배움의 이유에 대한 성찰을 불필요하게 만듦으로써, 연구를 위한 연구로서 과학의 전성시대가 도래했다. 오늘날 휴머니즘을 과학적 탐구의 목표로 여기는 과학자는 별로 없고 오히려 그것을 연구의 걸림돌로 간주하는 경향성이 팽배하다.

학문의 패러다임을 과학이 지배할 수밖에 없게 된 상황은 무엇보다도 인문학과 과학 사이 지식의 증가 속도가 엄청난 차이로 벌어졌기 때문에 발생했다. 인문학의 근본 지식은 야스퍼스가 말하는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까지 약 500년에 걸친 차축 시대(Achsenzeit) 이래로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에 비해 과학은 지난 400년 동안 우주의 탄생을 설명하는 빅뱅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것의 기원을 밝히는 지식의 ‘판도라 상자’를 열고 있다.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우리는 물어야 한다. 인간은 무엇을 위해 과학을 연구하는가? ‘판도라 상자’가 열린 이후 인간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남은 희망과 같은 것이 교양이다. 과학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훔볼트가 주창했던 “학문을 통한 교양”을 부활시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런 문제의식으로 우리 시대에 요청되는 교양 개념과 교양교육 모델에 대해 고찰한다.

2. “학습하는 인류(Homo docens)”와 교양의 위기

실재한다는 것은 물질이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물을 수 있다. 존재의 전제조건인 시간과 공간은 어떻게 있는가? 시간과 공간은 무엇인가는 가장 어려운 형이상학적 문제로 여겨졌다.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도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뉴턴은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을 상정하고 사과가 떨어지는 이유를 사과와 지구 사이에 작용하는 중력으로 설명하는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를 썼다. 뉴턴 물리학을 토대로 인간이 무엇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 했던 철학자가 칸트다. 칸트는 시간과 공간은 인간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지만 선천적으로 아는 감각형식이라고 전제하고 인식의 가능 조건에 대해 탐구하는 『순수이성비판』을 썼다.

칸트가 학문의 탐구영역에서 배제한 시간과 공간의 실체를 규명한 20세기 최고의 과학자가 아인슈타인이다. 아인슈타인은 물질이 시간과 공간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물질의 질량 때문에 시공간이 생겨났다는 역발상을 했다. 그는 우주에서 시공간은 질량의 크기에 따라 휘어지는 정도가 다른 중력장의 형태로 성립하며, 그 중력장의 휘어짐 정도가 클수록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는 것을 중력장 방정식으로 정리하는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했다. 우리가 정한 시간은 지구의 중력장에서만 유효하다. 만약 내가 다른 별에 있다면 지구와 다른 시간 속에 살아야 한다. 같은 지구에서도 산과 바다처럼 지구의 중심과 떨어진 거리가 다르면 시간이 흐르는 속도도 다르다. 아주 작은 차이지만 산에 사는 사람은 바닷가에 사는 사람보다 빨리 늙는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얘기됐듯이 “시간은 중력이다.” 공간이 굽어있다는 것은 관측으로도 증명됐다. 지구와 수성 사이 전파 이동을 추적해보면, 이동선이 중력장이 큰 태양과 가까울수록 전파는 점점 느려지는 것으로 측정된다. 따라서 중력장에 따라 다른 속도로 흐르는 시간을 교정해서 계산할 줄 모르면 우주를 여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인슈타인의 시공간에 대한 혁명적 해석은 칸트가 진리의 근거로 삼은 “선천적 종합판단”의 공리가 되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인식 틀을 깨는 것으로 성립했다. 유클리드 기하학에 따르면, 두 점 사이 최대거리가 직선이란 것은 자명한 진리다. 하지만 공간 자체가 휘어져 있다면 그런 직선은 존재할 수 없다. 기본적으로 인문학은 인간의 관점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것으로 성립한다. 그렇다면 아인슈타인은 인문학자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공간이 굽어있다는 기상천외한 발상의 전환을 어떻게 할 수 있었는가?

누군가가 그에게 그의 천재성의 비밀에 관해 물었을 때, 그는 답했다. “나는 특별한 재능이 없습니다. 열렬한 호기심이 있을 뿐입니다”(아인슈타인, 2015: 57). 호기심은 인간이 모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갖는 생각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르는 것을 알고 싶은 호기심이 있어서 그것을 충족하려는 배움의 열망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배우기 위해 일차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아는 것’과 ‘모르는 것’사이 구분이다. 유교(儒敎)의 창시자 공자(孔子)는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編)” 17장에서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앎이다(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라고 가르쳤다. 지구상의 유기체 가운데 인간만이 세상 만물을 그 둘 사이 차이를 아는 메타인지(Metacognition) 능력을 갖고 있다. 인간이 그런 메타인지를 토대로 ‘모르는 것’을 ‘아는 것’으로 바꾸는 사고 작용에 의거해서 세운 지식 체계가 학문이다. 학문(學問)의 한자 뜻은 “배우고 묻는다.”이다. 아는 것을 배우고 모르는 것을 묻는 인간의 학문적 활동이 인간을 지구의 정복자로 위치를 상승시킨 원동력이다.

최근 뇌 과학 연구는 인간이 왜 배우는지, 그리고 어떻게 배우는지를 계속 밝혀낸다. 인지신경과학자 스타니슬라스 드앤(Stanislas Dehaene)은 인간 특유의 재능을 한 단어로 줄여야 한다면 ‘배움’이라 했다. 인간은 단순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아니라 호모 도센스(Homo docens), 내가 가르치는 곧 학습하는 인류다(드앤, 2021: 17). 인간 이외의 다른 동물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연에 산다. 그런 유기체의 존재 방식을 과학적으로 해명한 과학자가 찰스 다윈이다. 다윈은 유기체가 환경에 적응해서 생존하고 종의 번식을 할 수 있는 원리를 진화론으로 설명했다. 진화란 기본적으로 생물적 유전자가 후손에게 이어지는 과정에서 우연적으로 발생한 변이가 자연적으로 선택됨으로써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런 진화의 과정으로 인류가 탄생했지만, 인류는 단순히 환경에 적응하는 생존을 넘어 환경을 변화시키는 주체로 도약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런 도약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배움의 능력을 발판으로 진전시켜온 집단학습 덕분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인간에게만 그런 배움의 능력이 생겨날 수 있었는가?

생물학적 진화가 생식을 통한 자기복제로 후손에게 우연으로 일어나는 것이라면, 문화적 진화는 집단기억과 집단학습이라는 인위적인 연결로 후손들이 정보량을 확대 재생산 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배움(learning)을 뇌 과학적으로 정의하면, 현실의 일부를 움켜쥐어 그걸 우리 뇌 안으로 가져와서 마음속에 세상의 모델을 만드는 행위다(드앤, 2021: 36). 우리는 배움을 통해 실재로서의 세상을 그대로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획득한 정보나 지식을 토대로 뇌 속에서 우리 나름의 매트릭스를 구축하고 그것을 토대로 주변 환경을 우리에게 맞게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뇌 안에서 이뤄지는 모든 학습은 신경세포들 사이 전기신호를 매개로 한 시냅스의 강화로 일어난다. 그런 뉴런의 전기신호를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로 전환해서 on/off 스위치 역할을 할 수 있는 반도체로 설계한 인공의 뇌가 컴퓨터다. 컴퓨터의 0과 1의 디지털 기호에 해당하는 인간 학습의 2 코드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모든 배움의 출발점은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의 구분이다. 그 구분의 중요성을 강조한 인류의 스승이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언을 남긴 소크라테스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모든 지혜의 원천이라 말했다. 칸트가 주창한 계몽도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무지를 일차적으로 자각을 하고 감히 알고자 하는 노력으로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라는 주문이다. 그런 앎의 주체가 되어 배움을 통한 자기완성을 성취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존재 이유라는 가르침을 주입하는 것이 바로 교양교육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시대 가장 잘 배우는 존재는 더는 인간이 아니라 인공지능이라는 전대미문의 상황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인공지능은 인류 집단학습이 만들어낸 최고의 발명품이지만, 어쩌면 인류의 멸망을 초래할 마지막 발명품이 될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정보를 0과 1의 디지털 기호로 변환해서 연산할 수 있는 컴퓨터의 발달은 소리, 영상, 감각 등의 모든 형태의 정보는 물론 서로 다른 학문 영역의 지식을 총망라해 서로 연결하여 통합해서 빅데이터를 생산하는 정보혁명을 일으키고, 결국 미래 언젠가는 인간의 지능을 초월하는 ‘초지능’이 출현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인공지능은 스스로 작업하는 능력을 가진 기계를 지칭하는 로봇(Robot)이 체코어로 ‘일한다(Robata)’라는 말에서 유래했듯이 기본적으로 자율성이 없는 노예다. 주어진 답을 푸는 능력은 컴퓨터가 인간을 능가한다고 해도 여전히 인간이 독보적으로 우월한 것은 문제를 만드는 창의력이다. 노예는 스스로 문제를 내지 못하고 주인 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제를 수행하는 역할을 한다. 옛날에 어느 주인이 외출하면서 집에 있는 하인에게 놀지 말고 일하라는 취지로 과제를 부여했다. 마당에 쌓아 놓은 돌무더기 가운데 큰 돌과 작은 돌을 나눠서 분리해 놓으라고 했다. 주인이 돌아왔을 때, 하인은 전혀 그 과제를 수행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자기 능력으로는 그런 어려운 일은 할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어느 돌이 큰 돌이고 작은 돌인지를 판단할 수 없었기에 종일토록 돌들을 이렇게 저렇게 나눠놓은 일을 반복하다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포기했다. 결국, 자율적 사고를 할 수 없다는 것이 하인이 무능한 이유였다.

스스로 사고할 줄 모르면 아무리 많은 정보가 있다고 해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지 못한다. 유사 이래 전례 없는 문명사적인 전환이 일어나는 우리 시대에 누가 낸 문제의 정답을 맞힐 수 있는 지식을 습득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이 문제인가를 새롭게 구성할 줄 아는 사고력이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만약 내가 내 인생의 운명을 걸어야 할 문제를 한 시간 내에 풀어야 한다면, 55분 동안은 적절한 물음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데 써서 일단 진정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아낸 연후에, 나머지 5분 동안에 문제를 풀 수 있도록 하겠다.”(Jirout and Klahr, 2020: 729).

만약 교양을 학문의 목적으로 설정한 훔볼트에게 우리 시대 가장 이상적인 교양인이 누군지를 묻는다면, 인문학자가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과학자인 아인슈타인이라 말할 것이다. 그가 세상에서 가장 큰 호기심을 가졌고 상상력이 풍부했으며, 인류의 평화와 문명의 미래에 대해 가장 큰 고뇌를 했다. 오늘날 대학의 인문학자들조차도 교양교육을 학문의 목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의 심각성은 인문학 위기는 교양의 위기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인문학자들 스스로가 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문학이 교양이라는 보루를 상실했기에 위기가 발생했다면, 오늘의 인문학은 일차적으로 교양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길부터 모색해야 한다. 과학이 정상과학이 된 오늘날 학문의 지형도에서 인문학이 다시 교양의 본래 역할을 할 수 있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선 자신이 책임이 있는 학문적 미성숙에서 벗어나는 계몽부터 할 필요가 있다.

3. 인문학의 틀을 깬 과학과 ‘물질적 전환’

현생인류는 직립해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인문학자가 보는 하늘은 윤동주가 <서시>에서 성찰의 거울로 삼은 하늘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반성이 인간의 무늬를 만드는 인문학의 정수다. 이에 비해 갈릴레이는 망원경으로 하늘을 관찰했다. 하늘을 통해 자기 내면을 성찰하는 것 대신에 별을 관찰해서 그 운동방식을 계산해서 자연의 법칙을 알아내고자 했다. 그런 탐구 정신이 천동설로 대변되는 당대 학문의 틀을 깨는 과학혁명을 촉발했다. 갈릴레이는 경험을 넘어 실험을 통해 보편적 진리를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경험은 자연이 보여주는 것만을 알 수 있지만, 실험은 자연에게 알고 싶은 것에 대해 직접 물어 답을 알아낼 수 있다. 전자와 다른 후자 방법론의 출현은 세계관의 변동을 함축한다. 관찰과 실험으로 자연에 관한 지식을 얻으려는 갈릴레이의 태도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교회가 가르치는 목적론의 틀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성경은 신의 말씀을 당대인의 인식 틀에 맞춰서 이야기로 전하는 것이지만, 자연은 신의 창조행위를 직접 읽어낼 수 있는 책이라 생각했다. 신이 우주를 창조한 철학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는 수학이라 했다.

“이 우주라는 책은 수학의 언어로 쓰여 있으며 삼각형, 원 그리고 다른 기하학 형상들이 바로 그 언어의 철자입니다. 수학의 언어가 없다면? 우주라는 책에 쓰인 단 한 구절도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그 도움이 없다면 우리는 어두운 심연에서 헛되이 헤매기만 할 겁니다.”(오철우, 2009: 228)

갈릴레이는 신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한 이야기꾼이 아니라 수학적 원리로 만물을 있게 만든 기하학자라고 주장했다. 그가 위에서 말한 ‘철학’은 더 이상 인문학이 아니라 과학이다. 인문학이 이야기를 통해 “존재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꾸는 작업으로 성립한다면, 과학은 수학을 통해 “존재하는 것(to be)”을 “측정할 수 있는 것(to be measurable)”으로 변환시키는 것에 근거한다. 과학에 따르면, 측정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인간은 그것에 대해 알 수 있다. 현대 물리학의 최고봉인 양자역학의 유명한 모토가 “닥치고 계산하라(Shut up and calculate)!” (Bricmont, 2015)이다

인간이 컴퓨터를 만들 수 있는 것은 반도체를 만들 수 있는 과학기술 덕분이고, 그 기초는 양자역학에 의해 마련됐다. 양자역학은 분자, 원자, 전자, 소립자 등 미시적인 물질세계를 설명하는 현대물리학의 기본 이론이다. 과학은 우주라는 거시세계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물질을 이루는 미시세계의 구성에 대해서도 밝혀냈다. 양자역학은 전자가 존재하는 위치들을 유추할 수 있게 해주고, 전기를 흐르게도 안 흐르게 조절할 수 있는 반도체를 만들 수 있는 원리를 알려줌으로써 TV, 컴퓨터, 스마트폰 같은 우리 삶의 필수품이 생겨났다. 오늘날 경제의 3분의 1이 양자이론으로 개발한 레이저, MRI(자기공명영상), 반도체 등과 같은 생산물에 의존한다(로젠블룸, 2012).

인공지능의 빠른 학습능력은 인간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휴머니즘 세계관에 대한 일대 도전을 야기했다. 인간이 인식주체가 되어 만물을 보는 관점을 전도시키는 “물질적 전환(material turn)”이 하나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대두했다(라투르, 2009; 홍성욱, 2010; 김환석, 2020). 모든 시작은 빅뱅이고, 빅뱅을 통해 처음 생겨난 것이 물질이다. 모든 것은 물질의 진화로부터 탄생한다. 생명도 마찬가지다. 물질의 기본 단위가 원자라면, 생명은 세포로 이뤄져 있다. 생명체는 하나 이상의 세포로 구성된다. 무생물의 물질이었던 분자가 복잡하게 합쳐지면서 자연발생적으로 살아있는 세포가 생겨났다. 단세포인 박테리아는 원핵생물인데, 그것이 다른 박테리아와 결합하여 공생관계를 맺음으로써 진핵생물이 탄생했다. 그 과정에서 생명의 역사를 바꾸는 획기적인 두 가지 세포내 소기관이 출현했다. 하나는 광합성을 하는 시아노박테리아와의 결합으로 엽록체를 가진 식물이고, 다른 하나는 산소를 이용하여 에너지를 생산하는 미토콘드리아라는 세포 발전소가 생겨났다.

박테리아는 지구상에 동식물이 나타나기 이전 20억년에서 30억년 동안 꾸준히 진화했고, 그 과정에서 현재의 인류가 탄생해서 살고 있다. 지구 생태계에서 전개된 진화의 대사서시를 파악하려면 기껏해야 30만 년 전에 출현한 현생 인류의 관점에서 벗어나 적어도 5번의 대멸종이 일어났던 지구의 ‘깊은 역사(Deep history)’에 대해 알아야 한다. 2020년부터 전 세계 인류는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에 2년에 걸쳐 커다란 고통을 받고 있다. 생명이 아닌 물질로 취급되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인류 역사에 개입한 이유는 무엇인가? 의사이자 사회학자인 크리스타키스(Nicholas A. Christakis)는 2020년 초의 인류는 ‘일리아스’ 속 트로이전쟁에서처럼 ‘신의 화살’ 맞고 있다고 했다. 그는 2020년에 벌어진 사건은 인류가 처음 겪는 일은 아니었고, 단지 ‘우리’가 처음 겪는 일이라고 했다. “우리는 구체적이고 효과적인 바이러스 대응책을 실시간으로 마련해냄으로써 전염병이라는 장구한 위협에 맞선 역사상 첫 세대”(크리스타키스, 2021: 23)로 기록될 것이다. 과학 덕분에 백신이라는 방패로 바이러스의 창을 막아내는 모순의 변증법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이 전쟁에서 인간은 결코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없다. 인간이 마무리 백신을 개발해도 결국 바이러스의 변이를 따라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백신은 바이러스에게 변종을 생산하는 진화적 압력으로 작용하여 또 다른 창을 만들어내는 효과를 낳는다. 천연두처럼 집단면역 형성을 통해 코로나바이러스를 박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1918년 스페인 독감처럼 평범한 감기 바이러스로 길들이는 방향으로 차선책을 강구해야 한다. 결국 인류가 할 수 있는 현명한 선택은 코로나바이러스와 공생하는 ‘위드 코로나(With Corona)’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인간을 형성하는 것은 결국 몸과 마음이다. 지구 행성에서 인간만이 행위자가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이 나름대로 행위자이며, 그런 행위자들의 연결 네트워크로 자연생태계는 순환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코로나바이러스라는 행위자에 의해 촉발된 감염병이다. 인류는 지난 2년 동안 그들을 박멸하려고 벌였던 전쟁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들과 공존을 모색하는 ‘위드 코로나’로 전략을 수정하는 감염병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고 있다. 인류가 진정으로 ‘위드 코로나’로 코로나바이러스와의 공존에 성공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순전히 인간의 이해관계에 근거해서 코로나바이러스를 상대하는 자세에서 탈피하여, 코로나바이러스의 입장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성찰을 할 필요가 있다. 그런 역지사지(易地思之)로 비인간적 존재에 대한 공감 능력을 확장하려면 모든 물질적 대상까지를 포괄하는, 유기체이든 비유기체이든 모든 존재가 서로 관계를 맺으며 연결되어 있다는 ‘관계적 존재론’의 사고방식이 요청된다. 그럼 맥락에서 최근 등장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물질적 전환(material turn)’이다. 칸트의 계몽과 훔볼트의 교양이 휴머니즘에 입각한 것이었다면, ‘물질적 전환’은 인간중심주의를 탈피하는 포스트 휴머니즘에 따른 계몽과 교양을 추구한다.

4. 포스트휴먼 교양으로서 빅 히스토리

‘물질적 전환’은 인간의 정신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물질로 환원시키는 세계관이 아니라 모든 것의 근본으로 되돌아가서 ‘인식의 나무’를 재구축해 보기 위한 학문 패러다임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생명 이전에 물질이 있었다. 생명체는 기본적으로 “경계를 지닌 물리적 실체”(너스, 2021: 199)로 성립한다. 생명의 특성은 기능적 기본 단위인 세포로부터 나온다. 여러 물질이 혼합해서 지구에서 살아있는 세포가 만들어진 것은 단 한 번 일어난 사건으로 추정된다. 모든 생명체가 동일한 유전자 암호를 갖고 있다는 것이 생명이 하나의 기원 세포로부터 진화했다는 증거다. 살아있는 세포의 중요한 특징이 물질대사(metabolism)라 불리는 화학반응을 한다는 것이다. 모든 생물체는 주변 환경이나 다른 생물들을 통해 자신에게 필요한 영양물질을 흡수하고, 그것을 분해하거나 합성하여 에너지로 바꾸는 화학 작용을 하는 것으로 생존하고 자기복제를 한다.

46억 년 지구 역사에서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진화했다. 그런 연결을 재인식하게 만드는 사고 프레임인 ‘물질적 전환’은 휴머니즘의 틀을 깨고 지구에서 인간의 생태학적 위치를 성찰하게 만든다. 배리 카머너(Barry Commoner)는 지구 생태계는 ‘닫힌 원(closing circle)’으로 순환해야 지속 가능하다는 전제로 다음과 같은 생태학의 4가지 법칙을 제안했다(카머너, 2014).

제 1법칙: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들과 연결되어 있다(Everything is connected to everything else).

제 2법칙: 모든 것은 어디엔가 남아 있게 된다(Everything must go somewhere).

제 3법칙: 자연이 제일 잘 안다(Nature knows best).

제 4법칙: 공짜 점심 같은 것은 없다(There is no such thing as a free lunch).

팬데믹이나 기후위기는 결국 인간이 4가지 생태학 법칙을 위반한 징벌로 찾아왔다. 그것의 심각성은 6번째 대멸종의 징조라는 점이다. ‘물질적 전환’을 통해 휴머니즘의 틀을 깨자는 주장을 하는 이유는 인간 위주로 조망된 역사의 인식 지평을 지구와 우주의 관점에서 재인식하지 않으면 현재 인류가 직면한 생존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돌파구가 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의식이다.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은 몸이 물질대사를 한다는 것 이외에 의식을 갖고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 곧 생태학의 4가지 원칙에 따르는 삶을 살도록 이끄는 것은 의식이다.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이기적 유전자의 노예로 태어났지만,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알고 유전자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다. 인간이 그럴 능력을 갖추게 된 것은 뇌의 전전두 피질 영역이 뇌의 여러 부분과 복잡한 연결 네트워크 관계를 맺게 되면서부터다. 그로부터 발현된 ‘자기 주지적 인식’은 시간과 관련하여 그 자신에 대한 심적 모델을 형성하는 능력을 부여했다. 그것을 통해 인간은 자신을 개인적 과거를 가진 실체로 경험하는 한편, 미래에 가능할 수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상상력을 갖도록 하고, 더 나아가 결국 존재하지 않게 될 실존에 대해 자각까지도 할 수 있는 의식 수준에 이르게 했다(르두, 2021: 485).

인간의 의식을 깨우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 “우리는 어디서 왔고,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의 3문(問)이다. 마지막 질문이 가장 중요하다. 결국, 앞의 2 질문은 3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만들려는 목적으로 제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속 가능한 미래를 찾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인간이 과학을 통해 알아낸 첨단의 지식이다. 그런 과학적 지식을 토대로 우주의 모든 것의 기원과 정체성을 밝히는 ‘현대판 창조신화(modern creation myth)’로 오스트레일리아 대학의 크리스천(David Christian)이 창안한 역사학 밖의 역사가 빅 히스토리(Big History)다(크리스천, 2009). 빅 히스토리는 우주가 어떻게 시작했고, 별이 어떤 과정으로 생성했고, 지구에서 어떻게 생명이 발생할 수 있었고, 생명의 진화로 생겨난 인간이 집단학습을 토대로 문명을 건설해서 지금에 이르렀는지를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 모델을 추구한다. 빅 히스토리는 우리의 기원과 정체성에 관한 종합적인 과학적 지식을 제공하는 플랫폼 역할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거대한 기획에 비해 빅 히스토리의 학문적 반향은 미미하다. 빅 히스토리는 과학의 감옥에 갇혀서 인간 삶의 의미와 연관된 문명사적 이야기를 충분히 펼쳐내지 못하는 한계로 인해 역사학으로 인정을 받지 못한다. 가르쳐주는 과학사적 지식의 양은 엄청나지만, 자유로운 자기실현을 위한 교양과 연관된 의미는 빈곤하다는 것이 빅 히스토리의 인문학적 전환이 필요한 이유다(김기봉, 2018).

내 삶과 인류 문명 미래를 과학에 온전히 맡길 수 없으므로 인간 정체성과 실존적 의미에 대해 성찰하는 인문학의 역할이 중요하다. 빅 히스토리는 과학적 지식을 토대로 빅뱅 이래 모든 것의 생성과 인류의 현재에까지 이르는 대서사시를 구성한다. 그 서사시를 말하며 듣는 주체와 대상은 인간이다. 인간중심주의는 탈피해야 하지만, 인간이 없는 역사는 허공 속의 메아리처럼 공허하다. 우주에서 일어난 모든 것은 사라지지 않고 그 흔적은 어딘가에 있다. 20세기에 인류는 빅뱅의 지문을 우주 공간의 모든 방향에서 같은 강도로 들어오는 전파인 우주배경복사를 관측해서 해독해냈다. 모든 것은 138억 년 전 대폭발을 했던 작은 한 점에서 시작됐다. 그런 엄청난 과학적 사실을 알기 전과 알고 난 다음의 인간 삶은 같을 수 없다. 세이건(Carl Sagan)은 1990년 보이저 1호가 태양계를 벗어나 해왕성 궤도를 지나가는 지점에 다다랐을 때 태양계 6개 행성의 기념사진을 찍자는 제안을 했고, 그 사진을 보고 다음과 같은 소감을 썼다.

여기가 우리의 고향이다. 이곳이 우리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 당신이 들어봤을 모든 사람들, 예전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이곳에서 삶을 누렸다. … 지구는 우주라는 광활한 곳에 있는 너무나 작은 무대이다. 승리와 영광이란 이름 아래, 이 작은 점의 극히 일부를 차지하려고 했던 역사 속의 수많은 정복자들이 보여준 피의 역사를 생각해 보라. 이 작은 점의 한 모서리에 살던 사람들이, 거의 구분할 수 없는 다른 모서리에 살던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잔혹함을 생각해 보라. 서로를 얼마나 자주 오해했는지, 서로를 죽이려고 얼마나 애를 써왔는지, 그 증오는 얼마나 깊었는지 모두 생각해 보라. 이 작은 점을 본다면 우리가 우주의 선택된 곳에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 우리의 작은 세계를 찍은 이 사진보다, 우리의 오만함을 쉽게 보여주는 것이 존재할까? 이 창백한 푸른 점보다, 우리가 아는 유일한 고향을 소중하게 다루고, 서로를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는 책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있을까? (세이건, 2001: 26-27)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하는 인류는 실제로는 먼지보다도 작은 존재다. 그런데 경이로운 사실은 그런 하찮은 존재가 세이건의 말처럼 우주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어디서 왔고,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에 대해 성찰하는 의식이 있다는 점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인문의 본질은 의식이고, 그 의식을 깨우고 키우는 것이 교양교육의 목적이다. 빅 히스토리는 그런 교양교육의 차원을 지구를 넘어 우주로까지 확대해 줄 수 있는 과학사적 융합교육을 위한 콘텐츠와 방법을 제공한다(김윤지, 2019). 하지만 빅 히스토리가 과학사적 지식을 융합적으로 가르치는 과학을 위한 교양교육에만 머무르면 인간을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형성하는 교양의 본래 목적을 성취할 수 없다. 배움을 통해 인간다움을 형성하고 존재의미를 실현하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 교양교육의 핵심이며, 그것은 지식의 전수를 넘어 의식의 각성을 통해 이뤄질 수 있다. 양자역학에서도 관찰자 없는 인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과학이든 인문학이든 중요한 것은 인간의 의식이다. 우리가 왜 사는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사는지에 대한 의식을 갖고 살아야 우리는 인간 됨을 형성할 수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인간을 주체로 설정하는 근대 문명이 종말을 고하는 전환기에 살고 있다. 2020년 이래 우리는 코로나19 팬데믹의 긴 터널에서 아직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기차가 굴속에 들어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기차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듯이, 코로나19 팬데믹이 점령한 세상에서도 문명은 정지하지 않고 오히려 더 빠른 속도로 달린다. 팬데믹이 발생하기 이전에도 인류는 빠른 성장을 통해 인간과 지구의 생물물리학적 지형을 바꾸는 ‘대가속(Great Acceleration)’ 시대를 살았다. 그러다가 팬데믹이 현실 공간을 점령하면서 10년 걸릴 4차 산업혁명의 디지털 변환(digital transformation)을 단 1년 만에 성취하는 것을 통해 ‘초가속(Hyper-Acceleration)’ 시대로 진입했다. ‘대가속’ 시대에는 성장의 속도가 너무나 빠르다는 것이 문제였다면, ‘초가속’ 시대에는 방향 자체가 바뀌면서 이전의 비정상적이었던 것이 새로운 정상으로 자리를 잡는 ‘뉴노멀(New normal)’을 통해 문명의 전환이 일어난다는 특징을 가진다. 팬데믹, 곧 바이러스의 공습은 이번이 끝이 아니라 계속된다는 것이 분명해진 상황에서 인류는 문명의 방향 전환을 하지 않고는 또 다른 굴속에 빠지는 시험에 들 것이다.

팬데믹은 인류 역사상 처음이 아니고 여러 번 나타나서 중세의 흑사병처럼 시대를 바꾸는 변화의 동인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이번의 위기는 역사를 바꾸는 수준을 넘어 인류 생존 자체를 위협한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현생인류는 환경을 지배를 받고 생존해야 하는 생명체가 환경을 바꾸는 행위자의 위치로 부상하여 46억 년 지구 역사에서 ‘인류세(Anthropocene)’라는 자기 종(種)의 이름을 새기는 지질 시대의 신기원을 이룩했다. 현생인류가 지구의 정복자로 등장하는 생명 진화의 대서사시는 대멸종의 연대기로 점철된다. 지금 존재하는 생명체는 이전의 99.99%가 멸종하고 남은 0.01%이고, 그 가운데 한 종이 현생인류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인류세라는 6번째 대멸종이 본격적으로 도래하고 있다는 징후로 읽힌다. 그것을 발생시킨 구조적 원인이 지구온난화에 있다는 것은 거의 공인된 사실이다.

교양의 원형(archetype)으로서 “artes liberalis”와 “Bildung”은 인간을 주체로 설정하고 인간성과 삶의 기술을 가르치는 교양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하지만 인류세에는 그런 인간중심주의를 탈피하는 새로운 교양 개념을 요청한다. 종래의 인문학 중심의 교양은 휴머니즘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 과학적 지식에 기반해서 앞서 말한 3문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빅 히스토리는 교양 개념에 내재한 인간중심주의 틀을 깨주는 어미 닭의 부리 역할을 할 수 있다. 빅 히스토리에 의한 줄탁동시(啐啄同時)로 포스트휴먼(post-human) 교양이 부화한다면, 근대 문명의 가을과 함께 도래한 인류세에 다시 교양 르네상스가 일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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