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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General Edu > Volume 15(6); 2021 > Article
다름을 대하는 두 가지 관점과 이에 대한 교양교육의 역할 제고

Abstract

현대사회 규정하는 핵심적인 특성 중 하나는 ‘다름’의 부각이다. 과거 전통사회가 다름을 지양하고 통일성을 추구했다면, 현대사회는 다양한 종교, 정치, 문화, 철학적 관점의 존재를 거부할 수 없는 사회적 실존으로 인식한다. 이렇게 다름이 부각되는 사회적 실존 안에서 우리는 다름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가에 관한 질문에 끊임없이 노출된다. 본 논문을 통해 논자는 다름의 존재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두 가지 관점을 살펴보고, 이 두 가지 관점이 대학에서의 교양 교육의 정신에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보이고자 한다. 이 둘 중 하나의 관점은 다름의 존재를 궁극적으로는 극복해야 하는 잠정적 단계로 받아들인다. 이에 따르면, 다양한 종교, 정치, 문화, 철학적 관점이 존재함은 결과적으로 하나의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관점에 도달하는 과정에 있어 해소되어야 한다고 여겨진다. 다른 하나의 관점은 다름이 존재하는 현실 자체를 사회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이해한다. 이 관점에 의하면, 다름의 현실은 무엇인가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 거쳐야 하는 잠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인간이 받아들여야 하는 자연스러운 상태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중요한 것은 다원성의 현실을 더욱 드러내는 일이다. 이 두 관점은 지식에 관한 서로 상이한 인식론적 배경에서 기인하다. 인간, 사회, 자연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제공하고자 하는 대학의 교양교육은 이 두 관점에 대한 종합적인 지식을 알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할 것이다. 논자는 이 두 가지 관점에 대한 종합적 지식을 전하는 데에 있어 전공 교육은 충분히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없으며, 교양교육의 정신만이 이 둘을 모두 담을 수 있는 유일한 교육의 정신이라는 점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Abstract

One of the key characteristics that defines modern society is the emergence of ‘differences’. While traditional societies avoided ‘differences’ and sought unity, modern society recognizes the existence of diverse religious, political, cultural, and philosophical viewpoints as an undeniable given of a social existence. In this social existence where differences are highlighted, we are constantly exposed to the question of how to accept the existence of differences. Through this paper, the author examines two perspectives for understanding and interpreting the existence of differences, and attempts to show the effect that these two perspectives have on the spirit of general education in universities.
The first perspective sees that the existence of various religious, political, cultural, and philosophical viewpoints should be resolved in the process of reaching one objective and universal viewpoint. Another view sees the existence of plural views on various topics, including philosophical, religious, and cultural views as the exact description of human living. According to this viewpoint, the reality of difference is not a tentative state that must undergo the process of moving toward something, but rather a natural state that humans must accept as such.
These two views stem from different epistemological backgrounds regarding knowledge. In this article, the author argues that general education at universities, which aims to provide a broad understanding of humans, society, and nature, has an obligation to provide comprehensive knowledge when it comes to these two perspectives. The author further argues that university education focused on major subjects cannot sufficiently fulfill its role in conveying comprehensive knowledge concerning these two perspectives.

1. 들어가는 말

현대사회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주장, 해석으로 얽혀있다. 다양한 해석과 주장, 그리고 의견들이 표출되는 것을 지양하던 전통사회의 가치체계는 다름이 온전히 허용되기 시작하는 현대사회에 이르러 예전과 같은 권위를 유지하기 힘들어졌다. 금지와 처벌의 대상이었던 ‘다름’은 근대에서 현대까지 이르며 인간의 지성을 독단과 아집을 벗어나게 해주는 동기를 제공하였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다른 주장과 이해를 제공하는 이들은 각자의 합리성으로 무장하여 인간과 세계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제시하며 인간의 지적 영토를 확장시켜주었다. 하나의 주장이라는 배타성은, 다양한 주장이라는 확정성으로 교체되었으며, 이를 통해 인류의 지적 토양은 풍부해졌다. 하지만, 다름이 언제나 환영의 대상은 아니다. 인간은 여전히 배척해야할 다른 주장들을 마주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 모두 마찬가지로 인간은 단지 다름의 존중이라는 구호 아래 인간과 세계에 대한 모든 해석과 이해, 주장을 용인할 수 없다. 어떠한 주장과 이해는 그것을 가능케 한 나름의 합리성과 무관하게 배척되어야 하고 제거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과학적 방법론은 다름을 권장할 만한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특정한 대상에 대한 과학적 관찰의 결과는 서로 상충하는 두 가지 주장을 긍정할 수 없다. 상충하는 두 주장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접해, 무엇이 옳은 주장인지를 검증하는 과정 자체가 과학의 발전에 이바지한다고 할지라도, 그중 하나는 결과적으로 배척되고 제거되어야 한다. 과학적 방법론의 관점에 의하면 다름이란 종국에는 해소되어야 할 대상인 것이다. 이처럼, 다름을 바라보는 관점은 하나로 통일되지 않는다. 현대사회가 인간과 세계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주장, 해석으로 얽혀있다면, 이와 함께 현대사회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주장, 해석을 가능케 하는 다름의 존재에 대한 상반되는 관점으로 또한 얽혀있다 할 것이다.
본 논문의 목표는 대학의 교양교육이 ‘다름’의 현실을 대함에 있어 고려해야할 두 가지 관점을 제공하는 데에 있다. 이 두 가지 관점은 각각 다름의 존재를 해소의 대상으로 보거나 포용의 대상으로 본다. 논자는 전자를 동일성의 관점이라 부르고, 후자를 다원성의 관점이라 부르고자 한다. 교양교육이라는 거대한 목적을 추구함에 있어 ‘다름’이라는 존재를 이해하는 이러한 상이한 관점은 하나의 전문분야에 대한 교육에 담아져서도 안 되고, 담아질 수도 없다. ‘다름’을 해석하고 읽어내어 교육의 틀 안으로 흡수하는 작업은 이 둘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를 요구하며, 그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교육은 교양교육일 것이다. 본 논문의 목표는 다름에 대한 두 해석이 교양교육의 정신 안에서 종합적이고 포괄적으로 담길 수 있는 주장을 제시함으로써, 교양교육의 위상을 제고함에 있다.
이를 위해 본 논문은 다음의 과정을 거칠 것이다. 2장에서는 ‘다름’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관점을 소개하고자 한다. 3장에서는 ‘다름’을 보편성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전통적인 시각들을 소개하고, 4장에서는 ‘다름’을 다원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소개하고자 한다. 5장에서는 교양교육이 이러한 두 관점을 온전히 담아내는 데에 있어 가지는 이점을 전공교육과의 대비를 통해 제시하고자 한다.

2. ‘다름’의 존재

우리는 항상 다름의 대상을 발견하며 살아간다. 다름의 대상을 발견하는 것은 일상적인 것이어서 이를 위한 의지적 노력을 수반하지 않는다. 우리는 별다른 노력 없이도 일상적으로 ‘다름’의 존재를 확인한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인식하고, 이해하며, 사용할 때, 그 대상과 그 대상이 아닌 것을 구분하며, 그 차이를 인식한다. 우리는 사용해도 안전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인식하며 아름다운 것과 그렇지 못한 것, 유용한 것과 쓸모 없는 것 등을 구별하는 과정에서 그 둘의 차이를 우선하여 확인한다. 학문은 다름의 인식을 통해 발전한다. 다름의 인식은 사물을 구분하고 분류하며, 체계화시키는 것으로 이어지며, 이는 곧 학문의 시작이다.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을 총괄하는 오르가논(organon)의 시작이 범주론(categories)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 그리고 사물의 특정한 범주를 확인함을 시작으로 철학적 분석을 시작하곤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적 버릇은 우연의 결과는 아니다(강성구, 2000: 134). 사물을 구분하여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인간이 지니고 있으며, 그 능력을 통해 사물이 그 다름의 경계 안에서 분류될 수 있음을 드러내는 것은 다름이라는 인식적 관찰이 인간의 지적인 삶의 토대를 구성하는 것을 잘 드러낸다. 즉, 일상적 다름의 인식이야말로 세상에 대한 지식을 쌓아올리는 전제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하지만, 다름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그 인식의 결과가 가져다준 지식의 보편타당한 인류사적 기여에도 불구하고, 다름을 바라보는 관점은 둘로 나뉘어 서로 경쟁해왔다. 이 둘은 서로를 극복의 대상으로 간주하며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하고자 시도해왔다. 하나의 관점을 하나의 관점을 극복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다른 하나의 관점은 다른 하나의 관점이 근거없음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관점의 상대적 우위를 주장했다. 이 둘은 서로 동시에 참일 수 없는 것으로 보이며, 각각의 방식에 따라 인류가 추구할 수 있는 지식의 내용과 범위를 계측한다. 다름이 지식의 체계를 쌓아올리는 기반이라면, 이 두 관점은 그 다름의 대상을 활용하는 방법이라 할 것이다. 그 방식의 차이에 따라 인류의 지식은 다른 방식으로 구성된다. 논자는 다름을 인식하는 이 두 가지 관점을 동일성의 관점과 다원성의 관점이라 부르고자 한다.
동일성의 관점은 특정한 대상에 대한 이해 혹은 해석과 주장이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양한 주장들은 결과적으로는 하나의 동일한 주장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다름이란 보편적 지식의 성취를 위해 해소되어야 할 바람직하지 못한 상태이다. 즉, 특정한 대상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다름은 그 대상에 대한 보편적인 지식이 아직 완성되지 못했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특정한 대상에 대한 다른 주장들은 동일하게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지식의 완성을 위해 서로 비교 검토되어야 하며, 상대적 우위의 확인을 위해 서로 경쟁해야 한다. 그 결과로 패배한 주장은 폐기의 대상이 되며, 이와 달리 승리한 주장은 그 대상에 대한 지식을 확장하여 우리는 그 대상에 대한 지식을 더욱 확보하게 된다. 프톨레마이오스 천체관과 코페르니쿠스 천체관의 다름이 프톨레마이오스 천체관의 폐기로 귀결되고, 그 결과 천체에 대한 인류의 지식이 확장되었듯이, 동일성의 관점은 다름의 대상이 결국은 해소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다름이 주는 이점이 무엇인지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다름이 주는 이점이란 다름의 해소를 통해 인류가 완성된 지식으로 한 걸음을 더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의 발전은 보통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축적되는데,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과학적 방법론에 의하면 특정한 대상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은 그 대상에 대한 하나의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과학적 해석의 성취를 위해 해소되고, 단일한 하나의 관점으로 동일해져야만 한다. 데카르트는 “[…] 한 대상에 대해 두 사람이 서로 다르게 판단한다면, 적어도 그 가운데 하나는 잘못된 것임이 분명하다”고 말하며, 확실하고 명증한 근거는 다름 사람(다른 주장을 제기하는 사람)을 납득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설득의 도구는 우리를 완전한 지식(perfectam scientiam)으로 이끄는 도구인 산술(Arithmetica)과 기하학(Geometria)이다. (Descartes, 1997: 20) 데카르트에 의하면, 다름은 산술과 기하학의 방법론을 통해 해소되며, 다른 의견을 피력했던 이는 자신의 주장을 폐기하고 완전한 지식에 가까운 주장과 동일한 주장을 취하게 된다. 즉, 다름은 해소되고 차이를 보이던 것이 동일한 것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다원성의 관점은 다름의 존재를 해소되어야할 특정한 대상 혹은 상태라 규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특정한 대상에 대한 다른 주장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세상에 대한 정확한 관찰의 결과이다. 다원성의 관점에 의하면 다름의 존재가 존재한다는 것은 세상의 올바른 모습이다. 이러한 관찰은 세상을 그 자체로는 그 무엇도 지향하지 않으며 강제하지 않는 동시에 하나로 통합될 수 없는 수많은 다름으로 구성된 하나의 전체로 이해한다.1) 따라서 이러한 인식은 특정한 대상에 대한 지식을 다양한 이해와 해석이라는 열린 공간 안에서만 이해한다. 다름의 존재, 그리고 다름을 만들어내는 주체는 더이상 보편적 지식의 관점이 다름을 바라보는 방식, 즉 제거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열린 공간 안에서 거주할 자유와 권리를 정당하게 확보한다. 물론, 이러한 다원성은 특정한 대상에 대한 지식 모두가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특정한 대상에 대한 지식이 다원성 안에서 열린 해석을 직면하게 된다는 것은 어떠한 해석도 열린 사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다원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특정한 대상에 대한 해석은 그 자신만의 논리와 합리성 안에서 해석의 근거를 제안한다. 그리고 그 논리와 합리성은 다양한 의견들 사이에서의 최소한의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존 롤즈는 이를 합당한 다원주의의 현실이라 부르며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는 단순한 포괄적인 종교적, 철학적, 그리고 도덕적 교리들의 다원주의에 의해서 특징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양립할 수 없는, 그러나 합당한 포괄적인 교리들로 이루어진 다원주의(a pluralism of incompatible yet reasonable comprehensive doctrines)에 의해서 특징지어지고 있다. […]” (Rawls, 1993) 롤즈는 단순한 다원주의의 현실이 아닌, 합당한(reasonable) 관점들 간의 다원주의의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합당한 다원주의의 현실을 인정하는 관점은 사회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주장들의 상대성을 인식하고 그들의 가치를 동등하게 평가한다. 이는 절대주의적이며 객관적인, 보편주의적 관점에서 하나의 주장이 다른 주장들을 압도하여 상대적 우위를 점하여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담고 있고, 그럼으로 인해 다양한 주장들 간의 상호 관용의 근거를 제공해준다.
이 두 가지 관점은 인류 지성사의 역사 안에서 서로 공존해왔으며, 현대 인류 사회에서도 여전히 공존하고 있다. 과학은 하나의 방법론(methodology)를 뛰어넘어 하나의 종교(scientism)로서 동일성의 관점을 향유하고 전파하는 반면, 다원성의 관점은 최소한의 합리성을 유지하고 있는 다양한 주장과 관점들 간의 상호 관용의 자세을 강조하며, 다름의 존재를 승인하는 삶을 반복적으로 제시한다. 이어지는 논의에서 논자는 이 둘을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3. 동일성의 관점

동일성의 관점을 서양의 지성사 안에서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오히려, 이러한 관점이 존재했던 시기를 피해가는 일이야말로 불가능에 가깝다 할 것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스토아학파, 데카르트, 칸트까지 이어지는 철학사 흐름 안에서, 인류의 지적, 도덕적 삶을 아우르는 보편적인 진리를 발견하고자 열망은 잠시도 끊어지지 않았고, 지금도 변함없이 그 명맥은 이어지고 있다. 보편적인 진리에 대한 탐구는 서로 상충하는 다양한 주장들 간의 다름을 하나의 동일한 주장으로 통일시킨다는 점에서 동일성의 관점의 또 다른 이름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동일성의 관점에 따르자면, 다름의 발견은 동일성을 추구할 수 있게 만드는 동기를 제공한다. 즉, 우리는 다른 주장과 이해가 존재함을 발견할 때, 차이를 해소하고 하나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강한 욕구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름이 존재함의 역할은 보편적인 지식에의 욕구를 촉발시키는 것에서 멈춘다. 그 다름의 존재는 곧이어 해소의 대상이 된다. 편견과 독단에 빠져있는 유럽을 과학과 이성을 통해 근본적으로 계몽시키고자 했던 볼테르 같은 경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엇이 되었건, 종파들이란 오류와 회의의 집결지이다. 스코투스파, 아퀴나스파, 실재론자, 유명론자, 교황주의자, 칼빈주의자, 몰리니스트, 얀센주의자이건 상관없이 모두는 다 똑같은 것의 가명일 뿐이다. 기하학에 종파란 없다. 그 누구도 나는 유클리드주의자요 나는 아르케미디안주의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Voltaire, 1971: 374)
데카르트가 산술과 기하학을 도구로 삼아 차이를 제거하고 동일한 진리를 도출해내고자 한 것과 같이, 볼테르 또한 기하학을 통해 다름을 제거하고자 한다. 그에게 있어, 다양하게 분리되어 있는 종파들이란 오류의 상징이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나뉘어져 있는 것, 분열된 것, 다원성의 세계의 성원으로 남아있는 것은 그것이 오류와 회의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의 증거이다. 하지만, 과학은 다르다. 기하학의 지휘 아래에서 그 특유의 방법론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과학은 기하학의 힘을 빌어 오류의 상징인 다름을 해소한다. 이와 같이 과학적 방법론을 그 영혼으로 삼는 학문은 그것이 전문화될수록 다름의 존재를 허용하지 못한다. 과학적 방법론을 주된 도구로 삼는 특정 학문이 그 전문영역 안에서 심화되고 발전할수록, 차이를 용납하지 못하는 과학적 방법론, 즉 동일성의 관점은 다름의 존재를 더욱 면밀하게 배척하고, 제거하고자 한다. 볼테르가 지적하였듯이, 그 누구도 자신이 유클리드주의자, 혹은 아르케미디안 주의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둘은 모두 기하학이라는 하나의 동일한 학문에 속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다양한 이론체계의 존재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잘 드러내는 다음의 인용문은 다름의 존재가 동일성의 관점에서 어떻게 이해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다른 모든 책에서 유용한 부분들을 뽑아 한 책에 모은 것은 만약 그것이 실행 가능한 것이라면 좋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실행 가능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남들이 적어놓은 것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은 종종 어려운 일이고, 그 안에서 단점을 제거하고 좋은 것만 뽑아내는 일도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이책 저책에 나누어져서 존재하는 특정한 진리들은 각자 분리돼 있고, 서로 독립적이다. […] 이런 것들을 찾아내는 것보다 자신의 발견으로부터 책을 적는 것에 재능이 있는 것이 좋다. […] 도서관 구석에 숨겨져 있는 책들에서 지식의 부스러기들을 찾을 능력밖에 없는 사람들은, 그 지식의 부스러기들을 선별하고 정리할 능력 또한 없을 것이다. (Descartes, 1970: 59~60)
데카르트의 서한집에서 인용한 위 구절은 데카르트가 다양한 철학 체계의 존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에 따르면, 데카르트는 다양한 책에 나눠어져 있는 지식들을 한 군데 모으는 작업이 불필요한 일이라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설사 그것이 유용한 것일지라도,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이들의 주장들의 장점을 모으고 단점을 버리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일에 익숙한 이는 지식의 부스러기를 찾을 능력 뿐이 없는 자들이며,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자신의 노력으로 지식을 구성해나가는 것이다. 다른 주장과 의견, 해석에 집착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며, 이는 그러한 재주밖에 없는 이들에게나 적합한 일이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자세는 철학사(history of philosophy) 자체의 효용을 묻는 것과 같다. 철학사를 작성하는 일은 철학의 중요한 주제들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연대기적으로 구성하는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은 오래된 것에 대한 새로운 것의 우위를 주장하지 않는다. 오래된 주장은 새로운 주장과 다른 주장으로 이해되고, 그 주장의 논리는 현재에 이르러서도 그 나름의 가치를 유지한다. 철학사는 철학의 중요한 주제들에 대한 다른 주장과 해석들의 연대기적 작성의 작업인 것이다. 데카르트가 도서관 구석구석 흩어져 있는 책들에서 지식을 모으는 작업이 불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동시에 철학의 주제들에 대한 다른 주장들의 가치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며, 동시에 철학사의 가치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만약에 하나의 철학 체계가 세계와 인간을 정합하게 설명하는 것에 충분한 역할을 수행한다면, 다른 철학 체계에 대한 공부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의 방법적 회의가 정초하는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진리가 철학을 완성하는 것이라면, 다른 권위에 의존할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여기에서도 우리는 볼테르의 정신, 즉 권위의 다원성 자체를 오류와 불완전성으로 인식하는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흩어져 있고, 분리되어져 있는 것은 하나로 이루어진 단일한 체계에 비해 중요하지 않다는 태도이다. 데카르트에게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구성하는 새로운 철학이다. 질송이 적절히 표현하였듯이, 데카르트의 철학의 목적은 스콜라 철학의 아리스토텔레스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철학으로 아리스토텔레스를 대체하는 것이었다. (Gilson, 1964: 99)
볼테르와 데카르트의 예는 서양의 지성사에 자리잡혀 있는 다름에 대한 동일성의 우위라는 특정한 경향성을 드러내는 한 단편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철학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동일성의 우위에 대한 주장은 기독교 신앙에서도 여실히 등장한다.2) 존 로크와 관용에 대한 서신을 교환한 것으로 유명한 조나스 프로스트(Jonas Proast)는 17세기 영국 사회의 혼란과 분열의 원인을 다양한 종파가 존재함으로 돌린다. 프로스트에게 있어 영국 사회의 혼란과 분열의 원인은 “하나의 진정한 종교”가 존재하지 않는 사실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진정한 종교는 어떻게 영국의 시민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이에 프로스트는 치안판사(civil magistre)가 아버지나 목사, 혹은 시민들의 영혼을 돌보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영국시민들에게 하나의 진정한 종교를 제공해주어야 함을 주장한다. (Wolfson, 2010: 25) 이러한 행위는 치안판사에게 특정한 형태의 권위가 부여되었을 때에만 가능하다. 비록 프로스트는 이러한 권위를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만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민들에게 좋은 것을 주는 능력을 가진 치안판사야말로 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며, 그가 휘두리는 칼은 공허한 것이 아니라 강제력을 가지고 있고, 치안판사는 이를 필요한 것에 사용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다.(Vernon, 1997: 97) 진정한 하나의 종교는 시민들에게 좋은 것이다. 따라서 이를 시민들에게 제공해주는 것은 치안판사의 의무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무의 실행은 다름의 존재로 대변되는 다양한 기독교 종파의 존재가 가져다 주는 혼란과 불안에 대한 기독교식의 한 해답인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는 동일성의 관점이 다름의 상황에 내리는 대답이기도 하다. 마치 기하학에 종파가 없듯이 다름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야말로 진정한 종교가 세워진다는 것이다.
프로스트의 주장으로부터 기독교 종파들 간의 다툼을 해소할 방안으로 제시된 동일성의 관점을 확인하였다면, 우리는 다름 그 자체에 대한 기독교적 부정적인 관점을 기독교 성경 창세기 11장에 등장하는 바벨탑의 이야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온 세상이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낱말을 쓰고 있었다. […] 그들은 […] 말하였다. “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 그러자 주님께서 내려오시어 사람들이 세운 성읍과 탑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보라, 저들은 한겨레이고 모두 같은 말을 쓰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의 시작일 뿐, 이제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자.” […] 그리하여 그곳의 이름을 바벨이라 하였다. 주님께서 거기에서 온 땅의 말을 뒤섞어 놓으시고, 사람들을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기 때문이다. (창세기 11:6~9)
바벨탑의 이야기가 함축하고 있는 바는 하나로 통일된 것이 가질 수 있는 커다란 힘의 가능성이다. 이 커다란 힘을 드러낼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가능성으로 인해 기존의 힘이 위협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기존의 힘이란,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염려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그 위협의 발단을 흩어 버려 조각내야 할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의 통일된 힘이 가지게 될 힘은 기존의 신성(神聖)을 위협하는 ‘다른’ 신성(神聖)으로 이다. 통일된 힘은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을 인간 능력의 전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일된 인간의 의지가 이끌어내는 혹은 이끌어 낼 힘은 이미 형성되어 있는 권위를 위협하여, 하나였던 것을 둘로 나누는 사태를 이끌어낸다.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는 존재는 예전에는 하나였지만, 앞으로는 통일한 인간의 힘에 의해 경쟁함으로써 강력한 둘로 전환된다. 다시 말해, 통일된 하나가 유일한 실재였던 상황에서 다원성의 상태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는 유대-기독교 신앙의 핵심 전제인 단 하나의 권위와 그 권위의 유지에 전혀 유익하지 않음은 명백하다. 이러한 전제에 따르면, 하나에서 벗어나 다수로 분화된 것은 완전성에서 불완전성으로의 전환이며, 평화에서 갈등으로 전환된 것을 뜻한다. 신의 처벌로 인해 말이 섞이고 몸이 흩어진 인간의 삶, 다름을 전제로 하는 비통일성, 비단일성의 상태는 바벨이라는 땅의 성격을 규정한다. 이곳에서는 온 땅의 말이 뒤섞여 있고, 사람들은 땅의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게 된다. 흩어진 이들은 의미를 소통할 방법을 잃어버렸고,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분리된 것에 대한 통일된 것의 우위, 다원성에 대한 유일성의 우위에 대한 믿음은 바벨탑의 이야기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기독교 정신을 지배하는 이념이다. 유일성의 우위, 즉 다양한 것들을 동일한 것으로 전환하려는 희망은 다원화된 종교 세력들, 바벨탑의 우화의 맥락을 빌리자면 언어가 혼란스러워져서 세상 곳곳에 흩어져 있는 자들을 다시금 기독교 교회 안으로 통합해야 함을 종교적 의무로 만든다. 종교적 의무는 명령의 형태로 실천되며, 16세기 프랑스 왕정이 주창한 하나의 신앙, 하나의 법, 하나의 왕(une foi, une loi, un roi)이라는 슬로건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흩어진 이들을 한 군데로 모으기를 명령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명령의 수행은 두 가지 대상을 특정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즉, 포섭 가능한 종교와 그렇지 못한 종교를 특정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기준은 기독교적 관용의 원칙에 의해 결정되는데, 기독교적 관용의 원칙이란, 형제로 삼을 가능성이 남아있는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을 뜻하며, 전자에 속한 이들은 사랑과 관용으로 대해지며, 후자는 마치 16세기 프랑스의 하나의 신앙, 하나의 법, 하나의 왕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 위그노 개신교도들이 극심한 탄압을 당한 것과 같이 방식으로 처벌을 받게 된다.
초대 교회의 교부인 어거스틴은 형제로 삼을 가능성을 믿음의 동일성의 가능성으로 이해한다. 같은 믿음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은 기독교 신앙 공동체 안에 속하는 형제, 혹은 자매로 규정되며, 그 밖에 있는 자들은 이방인으로 분류된다. 여기에서도 분리된 것에 대한 통일된 것의 우위는 명백히 드러난다. 단일한 믿음 안에서 통일된 자들에 대한 관용과 사랑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어거스틴이 주석을 작성하기도 하며 자주 인용하는 갈라티아 신자에게 보내는 서간에서 다음과 같은 기독교적 관용의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갈라티아 신자에게 보내는 서간, 3:26~29)
기독교적 관용의 기준은 인종, 계급, 성별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위의 구절에서 그 관용의 기준은 같은 믿음을 동일하게 준수하는 이들이다. 어거스틴은 그들을 모두 형제라 이해하며, 그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신을 사랑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본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요한 4:20~21)
이 구절을 통해, 어거스틴은 동일성 안에 포함된 자들에 대한 사랑이 곧 신에 대한 사랑과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즉, 동일한 믿음 안에서 존재하는 사람들은 동일성에 의해 맺어지는 관계인 형제의 관계의 결과물인 사랑으로 연결된다. 형제 관계의 증표가 바로 사랑인 것이다. 더 나아가, 어거스틴은 형제 관계의 증표인 사랑과 신에 대한 사랑을 동일한 것으로 판단한다. 그에 의하면 “사랑은 부분으로 분리될 수 없다.” (Augustine, 2014: 1888) 부분으로 분리된 것은 동일성의 관계에서 벗어난 것이고, 동일성의 관계의 증표인 사랑에서도 분리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와 달리, 동일성으로부터 분리된 자들에 대한 어거스틴의 저주는 명확하다.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부하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라”,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밤낮으로 괴롭힘을 당할 것입니다”, “그들을 갉아먹는 구더기는 죽지 아니하고 그들을 사르는 불도 꺼지지 않으리니”- 이런 구절들을 공허한 위협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내가 반박한다기보다는 성경 그 자체가 분명하고 충분하게 반박한다. (Augustine, 2014: 1095)
형제애와 처벌의 차이는 동일성으로 묶여있는 이들과 동일성에서 벗어난 이들 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형제애가 내포하는 포용과 관용, 용서는 처벌이 담고 있는 괴롭힘과 위협에 비교하여 선호의 대상임은 당연한 일이며, 이러한 당연함은 다름의 상태에 대한 동일함의 관점의 우위에도 적용된다. 동일함의 관점이 다름의 상태에 대해 뛰어나고 인간이 지향해야할 목표인 것은 당연한 것이다. 다름의 존재들은 동일함으로 이끌어져야 하는 대상이고, 그렇지 못한 존재들은 차별과 처벌의 대상으로 특정된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논자는 동일성의 관점이 내포하는 두 가지 특성을 살펴보았다. 첫째, 동일성의 관점은 서양지성사의 오랜 역사 안에서 발견된다. 계몽주의의 시대에서부터 폭발적으로 발전한 근대과학은 동일성의 관점을 과학의 전제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관점 안에서 다름의 존재는 더욱 완성된 지식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결과적으로는 해소되어야 하는 대상이다. 비록 더 나은 지식으로 나아가는 시작점의 역할을 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동일성의 관점에 의하면, 다름의 존재가 남아있음은 지식이 완성되지 못함을 뜻한다. 또한, 동일성의 관점은 과학의 전제로만 중요시된 것이 아니었다. 기독교 사상은 이미 오래전부터 다름의 존재에 대한 동일성의 우위를 당연한 것처럼 전제하고 있었다. 따라서 기독교적 동일성의 관점은 기독교와 동일하지 못한 종교적 신념을 가진 이들을 동일성의 공동체 안으로 끌어들임을 기독교인의 의무로 만든다. 둘째, 동일성의 관점은 그 결과 동일하지 못한 존재들에 대한 명확한 성격 규정을 가능케 한다. 틀린 주장과 해석은 배제되어야 하고, 잘못된 믿음과 삶은 금지되어야 한다. 프로스트의 주장은 명백하게 잘못된 믿음과 그로 인해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지는 삶을 교정해야 하는 의무가 하나의 진정한 종교의 역할이라는 동일성의 관점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잘 드러낸다. 신에 대한 사랑과 형제에 대한 사랑을 설명하는 어거스틴의 입장은 형제들이 공유하는 같은 믿음이야말로 하나의 진정한 종교의 믿음임을 전제한다. 그리고 그 이외의 다른 믿음들은 배제와 해소의 대상임을 명확히 한다.

4. 다원성의 관점

다름의 존재를 발견했을 때, 이를 배제하고 해소해야 하는 대상으로 간주하는 동일성의 관점은 어떠한 근거에서 다름의 존재들을 하나의 주장과 이해로 통합할 수 있을지를 고심한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다름의 존재를 동일성의 관점과는 다르게 이해하는 관점을 택하게 될 경우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된다. 이러한 다른 관점은 다름의 존재를 해소나 제거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세계와 인간에 대한 다양한 해석, 즉 동일하지 않는 다원적 관찰의 결과를 당연한 인간 인식의 결과로 받아들인다. 동일성의 관점과는 명확히 구분되는 이러한 관점을 논자는 다원성의 관점이라 부르고자 하였다. 이 장에서 논자는 다원성의 관점을 택하고 있는 네 명의 철학자의 주장을 살펴볼 것이다. 공통적으로 이들은 특정한 보편적인 지식에 대한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특정한 보편적인 지식에 대한 단일한 하나의 해석과 이해만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반대한다. 그들에게 있어 해석과 이해의 다원성은 보편적인 지식에 대한 인간의 피할 수 없는 결론이다.
우선, 프로스트의 이야기로 돌아가도록 하자. 프로스트는 진정한 하나의 통일된 종교 안에 영국의 시민들을 끌어안는 것이 영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필요한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치안판사의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프로스트와 오랜 시간 관용에 대한 편지를 주고받은 영국의 철학자 존 로크의 생각은 이와 달랐다. 그에 의하면, 영국 사회를 소란과 전쟁으로 이끄는 것은 종교적 의견의 다양함(diversity)이 아니라, 이러한 의견들에 대한 관용을 거부함으로 인한 것이다.(Locke, 2010: 42) 그에 의하면, 종교적 의견의 다양함은 피할 수 없는 것이며, 치안판사의 권위로 다양성을 통합하려는 시도는 의미 없는 일이다. 누구도 치안판사에게 그러한 권위를 부여하지 않았고설사 가능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신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다. (Locke, 2010: 7)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프로스트에 의하면 진정한 하나의 종교라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며, 로크 또한 이를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프로스트가 a) 이에 대한 하나의 옳바른 해석과 이해가 존재하며 b)이를 시민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시민들에게 좋은 것을 줌으로써 이득을 취하게 해야 하는 치안판사의 의무와 부합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로크의 주장은 진정한 하나의 종교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a’) 그것에 대한 주장과 이해는 다양할 수밖에 없으며, b’) 진정한 하나의 종교를 시민들에게 알리고 받아들이도록 하는 권위는 신도 인간도 치안판사에게 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경우, a)와 a’)는 동시에 참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둘의 관계는 모순율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일성의 관점과 로크가 주장하는 종교적 다원성의 관점은 동시에 참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a’)의 관점이 잘 드러나는 또 하나의 주장을 우리는 16세기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에서 발견할 수 있다. 몽테뉴는 자신의 책 수상록(Essai)의 가장 긴 분량을 할애한 “레이몬드 스봉에 대한 변론”에서, 다원적 해석과 이해를 옹호하는 주장을 강력하게 제기한다. 우선, 그는 다름의 기준을 세우는 인간의 지적 능력에 대해 강한 회의를 보낸다. 그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한평생에 단 한 시간이라도 […] 판단력이 […] 제자리 있기 어려운” 존재이다. 더욱이 이성이란, “그것이 비뚤어지고 절름발이고, 뼈가 어긋나고 하여도 거짓과 진실을 함께 가지고 늘 그대로 해 나가고 있기 때문에,” “이성의 오산과 혼란은 발견하기가 쉽지 않[고], […] 각자가 자기에게 꾸며 보는 […] 사색과 판단의 겉모양을 이성이라고 부른다.” 그에게 이성이란 “그 조건이 한 제목을 가지고 백 가지라도 반대 의견을 세울 수가 있으니, 늘이고 굽혀서 모든 왜곡과 척도에 맞출 수 있는 납이나 봉랍으로 된 연장이며, 그것을 주물러 맞출 재간만 있으면”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는 도구일 뿐이다. (Montaigne, 2015: 618~619) 따라서 인간이 판단력과 이성의 힘을 통해 세운 다양한 다름의 기준들은 모두 상대적인 가치를 가질 뿐이라는 것이다. 몽테뉴의 이러한 입장은 당장 데카르트를 떠올리게 만든다. 데카르트는 앞에서 사용한 인용문에서 그 스스로 말했듯이, 다양한 주장들의 장점을 모으고자 하는 노력은 중요하지 않으며, 오직 이성의 힘을 활용하여 “자신의 발견으로부터 책을 적는 것에 재능이”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하지만, 몽테뉴의 주장에 따르면, 데카르트가 이성의 힘을 사용하여 적은 책 또한 “백 가지라도 반대의 의견을 세울 수 있고, 늘이고 굽혀서 모든 왜곡과 척도에 맞출 수 있는” 다양한 주장 중 하나일 뿐인 것이다. 데카르트는 진지하게 사물의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 우리가 유념할 것은 이성의 자연스런 빛을 증대시키는 일(데카르트, 1997: 18)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몽테뉴에 의하면 이성이란 각자가 자기에게 꾸며 보는 사색과 판단의 겉모양일 뿐이다. 따라서 사물에 대한 지식을 한군데로 모아 통일적 관점에서 지식 전체를 조망하고자 하는 데카르트적 작업은 다원적 관점에 의하면 불가능한 작업인 것이다.
이러한 입장의 또 다른 예, 즉 a’)의 주장을 명확하게 담고 있는 예는 독일의 극작가, 고트홀트 레싱의 연극 작품인 현자 나탄에서 등장하는 반지 이야기에서도 발견된다. 현자 나탄은 이슬람제국의 왕인 살라딘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살라딘은 나탄의 지혜에 대한 소문을 들은바, 그의 지혜를 청하며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이란 다음과 같다. 나탄은 유대인이고, 살라딘 자신은 이슬람교도, 그리고 그 사이에는 기독교인이 있다. 이 셋 중에 분명 하나의 종교만이 옳은 것일 텐데, 이성과 통찰을 통해 이 세 종교 중 무엇이 가장 뛰어난 것인가? 이에 나탄은 살라딘에게 반지의 이야기를 전한다. 어떤 남자가 있었다.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고, 그는 세 아들을 똑같이 사랑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마법의 반지가 있었다. 이 반지는 신에게서 받은 것인데, 이 반지를 지닌 이는 신의 큰 사랑을 받게 된다고 한다. 나이가 든 남자는 누군가에게 이 반지를 물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 아들을 똑같이 사랑하는 남자는 누구에게 이 반지를 물려줘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고심 끝에 똑같은 반지를 두 개 더 만들었다. 모조반지들은 너무나 정교하게 만들어져, 그 누구도 진품과 구별해낼 수 없을 정도였다. 죽음의 순간에 이른 남자는 세 아들을 따로 한 명씩 불러 각자에게 마치 그것이 진짜 반지인 듯 물려준다. 남자가 죽은 후, 세 아들은 모두가 반지를 물려받았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되며 누구의 것이 진짜인지를 놓고 서로 다투게 된다. 결국 재판관을 찾아간 그들은 그에게 누구의 반지기 진짜인지에 대한 판결을 내려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재판관은 누가 진짜 반지를 물려받았는지를 확인하는 방법은 없다고 판결을 내린다. 하지만, 자신이 물려받은 반지가 진짜라는 것을 증명할 한 가지 방법을 알려주는 데, 그것은 세 아들 각자가 신의 사랑을 받을 만한 좋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최선으로 다하여, 자신이 물려받은 반지가 진짜임을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탄이 전하는 반지 이야기를 들은 살라딘은 크게 감동하여 나탄을 칭송한다. (Lessing, 1992: 77~85)
레싱의 이야기가 현재의 논의에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다원성의 관점을 대변하는 레싱의 이야기에 의하면, 이성과 통찰을 통해 진정한 하나의 종교에 대한 이해를 찾고자 하는 노력은 달성될 수 없다. 이슬람과 유대교, 그리고 기독교 중 무엇이 진정한 종교인지를 묻는 살라딘의 질문은 누구도 답할 수 없다. 각각의 종교를 믿는 이들이 자신의 종교의 상대적 우위를 증명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종교적 삶에 최선을 다하여 스스로의 상대적 우수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레싱에 의하면, 그 방법 만이 자신이 영위하는 종교적 삶의 방식이 올바른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러한 다름의 존재를 인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의 종교적 삶의 방식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교만한 일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반지가 진짜인지는 그 자신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각자 자신의 종교적 삶에 충실할 뿐, 남을 비난하거나 공격하려 하지 않으며, 상호 관용의 태도를 유지할 것이다.
몽테뉴를 통해 데카르트를 발견했듯이, 레싱의 이야기는 자연스레 어거스틴을 다시금 불러세운다. 어거스틴은 형제와 형제가 되지 못하는 자의 기준을 기독교 종교로의 동일성에서 찾는다. 동일한 것, 하나로 합쳐진 것은 좋은 것이며, 하나의 진정한 믿음으로 합쳐진 형제들의 공동체는 사랑과 관용의 공동체이다. 하나의 진정한 믿음에서 갈라져나간 다른 존재들은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 […] 영원무궁토록 밤낮으로 괴롭힘을 당할 […]”(어거스틴, 2014: 1095) 대상으로 규정된다. 하지만, 다원성의 관점에서 세 종교를 바라보는 레싱의 이야기는 기독교적 관점 안에서 정당화되는 기독교의 상대적 우위에 대한 주장이 어리석은 것임을 강변한다. 진정한 하나의 종교에 대한 믿음은 설사 그 대상이 진정한 하나의 종교일지라도 하나가 아니다. 즉, 특정한 대상에 대한 믿음은 그 대상의 보편성과 상관없이 다원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특정한 대상에 대한 믿음의 통일이란 다원적 관점을 취하는 레싱에게 있어서 애초부터 가능한 일이 아니다. 애초부터 성취할 수 없는 동일성의 관점이라는 허상을 근거로 다름의 대상을 영원한 불에 들어가 영원토록 고통받을 대상으로 규정하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세 아들 각각의 종교적 믿음의 방식을 모두 긍정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는 레싱의 반지 이야기는 다양한 이해와 주장을 세상에 대한 자연스러운 인식의 결과라 주장하는 다원적 관점과 일치한다. 다른 주장과 이해, 해석은 그 자체로 세상과 인간에 대한 자연스러운 인식론적 결과이다. 그리고 이들 간의 우위를 가리는 노력들은 적어도 다원적 관점에 의해서는 정당화될 수 없다. 다원성의 관점은, 마치 반지를 물려받은 세 아들들이 그러하듯, 각자의 다름의 주장 간의 상호 관용과 동등성만을 강변한다.
마지막으로 현대 자유주의 이념 안에서의 다원성의 관점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앞에서 살펴본 로크와 몽테뉴, 레싱의 다원성의 관점은 철학적, 종교적 관점에서의 회의주의의 태도를 택한다. 회의주의는 크게 지식은 불가능하다는 입장과 진정한 지식이 가능하다는 증거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특정한 대상에 대한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구분된다. (Popkin, 2003: xvii) 로크와 몽테뉴, 레싱은 후자에 속한다. 그들은 모두 특정한 지식 그 자체를 부정하기 보다는 그것을 주장하기 위한 충분한 증거를 인간이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현대 자유주의 정치철학은 이러한 회의주의적 관점을 취하지 않으면서도 다원성의 관점을 옹호한다. 그 중, 자유주의 철학자인 존 롤즈는 회의주의를 적극적으로 채택하지 않으면서도 다원성의 관점을 옹호할 강력한 주장을 제기한다. (Rawls, 1998: 187) 롤즈의 정치철학은 자유주의적 사회 안에서 계약의 형태로 사회의 핵심적인 정치관에 동의하는 일련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 도덕, 철학적 관점에 주목한다. 그는 다양한 종교, 도덕, 철학적 관점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를 결정해주는 일련의 원칙들을 합의를 통해 도출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롤즈에 의하면, 이러한 합의는 사람들이 스스로 옳다고 믿고 있는 종교, 도덕, 철학적 관점 등을 포기해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인간과 세계에 대한 다양한 관점들을 온전히 유지하며,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에 대한 합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롤즈는 이를 중첩적 합의의 개념(the idea of overlapping consensus)이라 부른다. (Rawls, 1998: 166) 중첩적으로 합의되는 것은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와 관련된 원칙들이지만, 이러한 원칙을 도출한 주체들은 여전히 다름의 세계의 정당한 구성원으로 남아있다.
그렇다고 롤즈는 이러한 상황을 상대주의적 관점으로 해석하지도 않는다. 상대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특정한 사물에 대한 판단은 판단의 주체가 처해있는 특정한 상황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모든 주장은 그 주장이 만들어진 특정한 환경과 조건에 의존하여 결정되며 그 가치는 환경과 조건에 따라 상대적으로만 판단된다. 상대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사회의 기본구조를 결정하는 원칙들에 대한 합의를 진행하는 다양한 사람들은 그들이 믿고 있는 종교, 도덕, 철학적 관점들의 가치를 상대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의 관점을 다른 이들에 비해 우월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관점이 고작 상대적 가치만을 가진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롤즈는 사회적 합의의 당사자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여기는 다양한 신념체계에 대한 합당한 선호를 가지고 있다고 간주한다. 그리고 이러한 합당한 선호가 지시하는 다양한 종교, 철학, 도덕적 신념체계는 상대주의적 기준에서 그 가치를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다원주의적 기준에서 그 가치를 평가받는다.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은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를 구분하며 다음과 같은 예시를 사용한다. 상대주의적 태도란 누군가는 커피를 선호하고 누군가는 샴페인을 선호한다면, 그것은 그것으로 더 이상의 논쟁거리가 될 수 없다고 말하는 태도이다.(Berlin, 2013: 11) 누군가가 커피를 선호한다면, 그것은 그러한 선호를 가능하게 만든 선호의 기반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한, 누군가가 샴페인을 선호한다면, 그것은 그러한 선호의 기반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둘의 선호의 기반에 대한 논의가 논쟁거리가 아니라는 것은, 이 둘의 비교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상대주의는 이 둘의 선호의 기반이 단지 상대성에 기인한 것이며, 서로 소통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한다. 이에 따르자면,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 고귀한 행동이라 생각하는 어떤 사람의 선호는 단지 그 행동에 대한 그 사람의 선호일 뿐이다. 어려운 사람을 돕기보다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 행동해야 한다는 기준을 선호하는 사람의 입장에 대해 그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다원주의적 입장에 의하면,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은 커피를 좋아할만한 합리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으며, 샴페인을 좋아하는 이도 이에 대한 충분히 합리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다원주의는 이들의 합리성이 특정한 중첩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중첩의 가능성은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 샴페인을 좋아하는 사람의 선호를 이해할 가능성을, 그리고 샴페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의 선호를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다원주의적 태도에 의하면,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성(그것이 무엇에 대한 다양성이건 간에)은 나름의 타당한 설명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며, 우리는 이들 모두를 관통하는 어떤 공통점을 찾아낼 ‘가능성’을 희망할 수 있다. 현대 자유주의 정치철학이 제시하는 다원성의 관점은 회의주의와 상대주의의 한계를 벗어난 형태의 다원성의 관점이다. 자유주의적 다원성의 관점은 사회의 구성원들이 자유로이 자신의 신념체계에 따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의 삶을 영위하면서도 사회의 기본적인 정치관에 중첩적 합의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마치 다원성의 관점이 세상과 인간에 대한 자연스러운 관찰의 결과라 생각한 로크와 몽테뉴, 레싱의 입장과 같이, 롤즈의 자유주의 철학은 사회 안에 다양한 ‘다름’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사회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간주한다.

5. 동일성의 관점과 다원성의 관점, 그리고 교양 교육

동일성의 관점과 다원성의 관점은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인류 지성사의 오래된 전통 안에서 서로 공존해왔으며 또한 경쟁해왔다. 이들이 서로 경쟁한 이유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해석의 결과를 신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 둘의 견해의 차이가 근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a) 특정한 대상에 대한 지식에 대한 하나의 올바른 이해가 존재한다는 주장과, a’) 특정한 대상에 대한 지식은 하나일 수 없다는 주장의 차이는 심원하다. 하지만, 이러한 심원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학의 교양교육에 있어 이 두 관점을 어떻게 담는지는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동일성의 관점과 다원성의 관점은 인류 지성사의 주요한 주인공이며, 대학의 교양교육은 이들에 대한 종합적인 지식을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무는 교양교육의 목표와 바로 연관을 맺는다. 김혜영, 박일우는 교양교육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교양기초교육이란 대학교육 전반에 요구되는 기본적 지식 및 자율적 학구능력의 함양을 포함하여 인간, 사회, 자연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올바른 세계관과 건전한 가치관을 확립하는 데 기여하는 교육으로, 학업분야의 다양한 전문성을 넘어서서 모든 학생들에게 요구되는 보편적 교육이다.(김혜영&박일우, 2017:1)
김혜영, 박일우가 교양기초교육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한국의 대학교육이 더 이상 교양교육을 ‘교양’에 대한 교육으로 한정하지 않고, ‘기초학문’의 위상을 가진 교육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김혜영, 박일우, 2017: 1) 하지만, 교양교육이 ‘기초학문’의 위상을 획득하였든, 아니면 ‘교양’교육에 머물러 있건 간에, 교양교육이 지향하는 교육의 목표가 포괄적이며 종합적인 교육을 제공함에 있다면, 대학의 교양교육은 동일성과 다원성의 관점에 대한 포괄적이며 종합적인 관점을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김혜영, 박일우가 지적하듯이, 교양교육은 “인간, 사회, 자연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 다양한 전문성을 넘어서서 모든 학생들에게 요구되는 보편적 교육”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신은 화이트헤드가 제시하는 교양의 정신과도 일치한다. 화이트헤드는 교양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교양(culture)이란 사고력의 활동이며, 아름다움과 인간적 감정에 대한 감성이다. 단편적인 정보는 교양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우리는 문화와 특수한 전문지식을 갖춘 인간을 육성해야 한다. 전문지식은 인간에게 출발해 필요한 무대를 제공하며, 교양(culture)은 그것들을 철학의 깊이와 예술의 높이로까지 이끌어준다.4) (Whitehead, 2007: 37)
화이트헤드가 교양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문분야의 학문이 아니라, 인간의 지적 활동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사고력의 활동 전반을 뜻한다. 이러한 사고력의 활동인 교양은 하나의 학문에 머무르지 않고, 포괄적이며 종합적인 하나의 문화를 도출해낸다. 그리고 전문지식은 이러한 기반 위에서만 철학과 예술의 지위를 얻을 수 있다.5) 논자가 보기에, 이러한 교양교육의 포괄성, 종합성, 그리고 학문의 토대로서의 역할을 동일성의 관점이 지배하는 학문이 전적으로 담당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동일성의 관점은 특정한 대상에 대한 지식에 대한 올바른 이해 및 해석이 단 하나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을 전제로 인간과 세상을 인식한다. 대표적으로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사물을 파악하고 다름을 해석하며 이를 해소의 대상으로 판단하는 일련의 전문분야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 학문의 공통적인 특징은 역사가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강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데카르트의 경우와 같이, 보편적인 지식의 체계의 완성은 역사와 무관하다. 그가 말하듯, “지식의 부스러기들을 찾을 능력밖에 없는 사람들은 그 지식들을 선별하고 정리할 능력 또한 […]” 없다. 데카르트에게 철학함이란, 예전의 것은 예전에 묻어버리고 현재의 성취에 집중하는 것이다. (Gracia, 1992: 110) 따라서 과학적 방법론으로 무장한 전문분야의 학문은 다름을 과거에 남겨놓고, 현재에 집중한다.
하지만, 인간과 세상에 대한 폭넓고 종합적인 관점을 제공하는 교양에 대한 교육은 단 하나의 해석이 존재한다는 입장과 상충한다. 왜냐하면, 인간과 세상에 대한 폭넓고 종합적인 관점이란, 다양한 다름의 주체들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현실 세상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양교육은 인류의 지성사에 집중하고, 위대한 고전들을 다시 읽어보기를 요구하기도 한다. 고전 읽기는 과거에 쓰여진 지식의 흔적을 현대에 되살리는 작업이며 그 안에 담겨져 있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현대로 이어나가는 작업이다. 이와 같이 특정한 시간대에 유행하는 학문의 경향, 그리고 그 경향이 도출하는 학문의 성과를 뛰어넘어, 교양교육의 정신은 인류의 지성사 전체를 조망하는 교육을 지향한다. 동일성의 관점이 지배하는 전문분야의 학문, 예를 들어 과학적 방법론이 학문적 가치를 판단하는 일련의 학문들, 혹은 특정한 배타적 종교관이 지배하는 신념체계 일반에 파생되는 전문분야의 학문들은 교양교육의 지향점을 제대로 충족시킬 수 없다.
이와 달리, 다원적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특정한 전문분야의 학문이 존재한다. 이러한 전문분야의 학문은 다원적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 사회, 자연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추구하는 교양교육의 이상과 일맥상통하다 할 것이다. 이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전문학문으로 주로 문학과 철학, 역사학과 분과학문을 들 수 있으며, 실제로 대학에서 실시하는 교양과목은 이러한 인문학의 도움을 크게 받는 것이 현실이다. 철학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철학은 데카르트와 같이 동일성의 관점에서 인간과 세상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는 하나의 보편주의적 학적 체계를 지향하는 철학 이론을 가르침과 함께, 인간과 세상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근거고서 제시되는 회의주의 철학 이론 또한 그 교육의 내용 안에 포함하고 있다. 앞서 살펴본 몽테뉴의 경우가 그 예라 할 것이다. 철학은 보편성과 개별성, 동일성과 다원성 모두를 포괄하는, 인간이 사유하는 방식에 대한 종합적인 체계들에 대한 지식을 가르친다. 이러한 점에서 철학, 그리고 문학, 역사학과 같은 소위 말하는 인문학은 동일성의 관점의 지배를 받는 전문분야의 학문이 가지지 못하는 범용성을 확보한다.
하지만, 철학과 문학, 역사학과 같은 인문학이 교양교육의 이상을 독자적으로 충족시킬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각자 자신만의 독자적인 학문의 방법론을 통해 교양교육이 추구하는 것과 다른 학문의 목표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철학이 추구하는 목표는 수많은 상이한 목표설정에도 불구하고 진리 그 자체에 대한 탐구로 일반화하여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교양교육이 추구하는 “인간, 사회, 자연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올바른 세계관과 건전한 가치관을 확립하는 데 기여하는 교육”의 목표와 동일하다 말할 수 없다. 철학과 문학, 그리고 역사학과 같은 인문학은 교양교육의 정신과 중첩되는 교육의 목표를 지닐 뿐이며, 이를 통해 교양교육의 정신이 지향하는 바에 기여할 뿐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논자가 제시하고자 하는 바는, 동일성의 관점의 지배를 받는 전문분야의 학문이 교양교육을 떠안을 수 없고, 다양성의 관점을 허용하는 인문학 전문분야의 학문이 교육을 떠안을 수 없다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여지껏의 논의를 통해 논자가 주장하는 바는, 교양교육이야말로 동일성과 다양성의 관점을 동시에 충족할 수 있는 유일한 학문분과라는 것이다. 인류의 지성사는 동일성과 다원성의 관점의 경쟁과 다툼을 목도해왔다. 그리고 특정한 전문분야의 학문은 이 둘의 다툼을 동시에 담기 매우 어렵다. 설사 담아낸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의 전문분야의 학문 내에서 나뉘어지는 두 가지 이론의 파벌을 만들어낼 뿐이다. 이는 마치 철학사 안에서 데카르트와 몽테뉴가 서로 구분되는 것과 같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 과정에서의 벌어지는 두 관점 간의 경쟁과 다툼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전문분야의 학문은 동일성의 관점의 지배를 받아서도 안되고, 다원성의 관점의 지배를 받아서도 안된다. 교양교육는 그 교육의 이상으로 인간, 사회, 자연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독립된 전문학문이 철학과 예술로 그 깊이를 더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함을 목적으로 한다. 독립된 전문분야의 학문에서 속하지 않고, 다양한 전문분야의 학문들을 포괄할 수 있는 교양교육이야말로 바로 이러한 다름의 존재에 대한 두 가지의 관점을 온전히 교육의 내용으로 담을 수 있는 분과학문이며, 이러한 역할은 온전히 교양교육에게 일임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6. 나가며

지금까지 논자는 동일성과 다원성의 관점을 살펴보고, 이 둘이 온전히 담겨질 수 있는 가능성을 교양교육이 가지고 있다는 점을 주장했다. 세계화의 바람을 통해 전 세계는 하나의 문화권, 경제권으로 묶여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변두리의 문화는 선진국의 그것을 따라 적어도 비슷해져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고, 지역에 국한된 변두리의 경제는 세계 경제의 흐름 안에 동참하여야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세계화의 문법을 통해 세계를 하나의 단일한 문화, 경제로 묶어 내려는 시도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이 유효하지 않다. 변두리의 문화는 그 안에서 가치를 찾아가고, 약소국의 경제는 세계화의 물결에 노출되었을 때의 위험을 인지하게 되었다. 동일성의 관점으로 세계를 하나로 묶어내려는 시도는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원성의 관점으로 다름을 긍정하는 태도가 세상을 지배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여전히 긍정할 수 없는 다름의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무분별한 다름의 존중은 인간이 축적해온 전통과 문화를 해체시키고 인간과 세계를 파편화시킨다. 현재의 세계는 이 둘을 동시에 인식하고 해석할 수 있는 교육의 틀을 그 어느 때보다 요구한다. 논자가 본 논문을 통해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교양교육이 그 역할을 담당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교양교육의 이상과 가치는 논자가 제시한 두 가지 관점의 차원 이외의 차원에서도 얼마든지 긍정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교양교육이 추구하는 교육의 이상은 이 두 가지 관점에 대한 인식과 고려를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논자가 제시한 두 가지 관점을 통해서만 제고될 수 있는 교양교육의 가치가 존재한다고 논자는 믿는다. 전 지구에 걸쳐 갈수록 격해지는 다양한 신념들과 문화들의 충돌이 야기하는 파괴적인 결과들은 대학에서 교양교육을 담당하는 교수자들의 어깨에 책무를 더해준다. 다름의 갈등과 충돌을 교양교육의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했던 본 연구가 현 세계 안에서 충돌하는 동일성과 다원성의 관점의 소용돌이 안에서 교양교육이 어떤 위상을 취할 수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Notes

1) 한나 아렌트는 그녀의 저서 인간의 조건에서 이러한 다양성이라는 인간의 실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행위의 근본조건은 다원성으로서 인간조건, 즉 보편적 인간(Man)이 아닌 복수의 인간들(men)이 지구상에 살며 세계에 거주한다는 사실에 상응한다. 인간조건의 모든 측면들이 다소 정치에 관련되어 있지만, 특별히 다원성은 모든 정치적 삶의 ‘필요조건’일 뿐만 아니라 ‘가능조건’이라는 의미에서 절대적 조건이다.” Arendt, Hannah(1996), 인간의 조건, 이진우, 태정호 역, 한길사, 56쪽

2) 기독교 안에서의 동일성의 관점은 기독교와 여타의 다른 종교와의 동일성의 관점을 뜻하지 않는다. 물론 기독교가 이교도의 세력들을 기독교 안으로 통합하고자 노력한 것의 역사 또한 오래된 것이다. 하지만, 외적 대상으로서의 이교도를 기독교 안으로 끌어들이는 작업과 기독교 안의 분파들을 하나의 동일성으로 완성하고자 하는 작업은 그 성격이 다르다. 논자가 이곳에서 주목하는 것은 기독교 안의 분파들 사이에서 요구되는 동일성의 관점이다.

3) 신이 치안판사에게 이러한 권위를 내린 적이 없다는 주장은 로크의 관용에 대한 편지의 주된 주장 중 하나이다.

4) 김재현은 그의 논문, 「화이트헤드 철학과 교양교육」에서 오영환이 culture를 교양이라 번역한 것에 무리가 없다고 판단한다. 이는 culture라는 단어가 교육이나 훈련을 통해 무엇인가를 개선하거나 발전시킨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에 착안한 것으로 보인다. 논자 또한 그러한 번역에 무리가 없을 것이라 판단한다. 김재현(2011). “화이트헤드 철학과 교양교육”, 교양교육연구 5(1), 37~66쪽.

5) 손동현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며 전문교육의 토대로서의 교양교육을 말한다. “사실세계의 인과관계에 대한 지식이 어떤 교육을 통해 습득되고 가치를 품는 목적적 관계에 대한 지혜가 어떤 교육을 통해 숙성되는지 생각해 본다면, 보편 지성교육이 소홀히 되고 전문 직업교육이 강조돼 온 한국의 대학교육이 어떤 방향으로 개선되어야 할지 그 답은 분명해 보인다.” 여기에서 손동현이 말하는 사실세계의 인과관계에 대한 지식은 전문지식을 가르치는 전공교육을 말하고, 그러한 교육을 숙성케 하는 목적적 관계에 대한 지혜를 가르치는 교육은 교양교육을 뜻한다. 손동현(2019). 대학교양교육론, 철학과 현실사,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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