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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General Edu > Volume 15(5); 2021 > Article
인문 교양으로서 죽음 교육의 필요성과 융복합 실천 방법

Abstract

이 글의 목표는 융합적 인문 교양 교육을 어떻게 개발하고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담론을 조성하고 촉진하는 데에 있다. 현재 인문 교양 교과는 대학에까지 침투한 자본의 논리에 의해 상당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죽음 교육은 인문 교양의 가치를 복원하는 중요한 동기가 될 수 있다. 학생들은 언젠가 반드시 자기의 죽음과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실존적이며 존재론적인 죽음 앞에서 학생들은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묻도록 강제되며, 이런 물음이야말로 인문 교양이 다루고자 하는 고전적인 본질을 담고 있다.
죽음은 단일한 전공 교과로만 다루어질 수 없는 매우 복잡하고 중층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 죽음을 온전히 다루기 위해서는 제(諸)학문이 결합하는 융복합 교육이 필요하다. 죽음이 총체적인 삶을 비추는 거울이 되려면, 죽음을 바라보는 다양하면서도 대립적인 견해와 입장들을 함께 숙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한 명의 교수가 죽음 교육을 담당하기보다는 가능하다면 전공을 달리하는 많은 교수가 강의에 참여하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연합교과로서 ‘삶과 죽음’의 강의를 설계하고 운영한 실례를 인문 교양 융복합 교육의 참고자료로써 제시하였다. 정답이 없는 죽음의 문제를 두고 학생들이 자유롭고 개방적인 토론에 참여함으로써 인간과 세계를 좀 더 폭넓게 이해하는 안목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인생을 반성하고 주체적으로 결단하는 계기를 가질 수 있음은 분명하다.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essay is to create and promote a discourse on how to develop and operate convergence education within the liberal arts. Currently, the liberal arts curriculum is suffering from considerable difficulties caused by the logic of capital that has penetrated into universities. In such a crisis situation, death education can be an important motive for restoring the value of liberal arts. Students must one day face their own death. In the face of existential and ontological death, students are forced to ask the most valuable and meaningful questions in life, and these questions contain the classic essence of the liberal arts.
Death has a very complex and multi-layered nature that can not be dealt with only by a single major subject. In order to fully and deeply deal with death, convergence education is needed. As death is a mirror that reflects life as a whole, it is necessary for us to review carefully the various and opposing views and positions on death together. Therefore, rather than having one professor in charge of death education, it is much more effective for many professors with different majors to participate in the lecture as possible. Seen in this light, a lecture on ‘Life and Death’ as an example of convergence education in the liberal arts is presented. By participating in free and open discussion about the problems of life and death without trying to provide only one right answer, students can gain a broader perspective on human beings and the world, as well as have an opportunity to reflect on their own lives and make independent decisions.

1. 대학 인문 교양 교육의 위기

일찍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시민 사회는 ‘등가 원칙’에 의해 지배된다. … ‘계몽’에게는 숫자로 환원될 수 없는 것, 나아가 결국에는 ‘하나’로 될 수 없는 것이 ‘가상(Schein)’으로 여겨진다.”(호르크하이머 외, 1995: 29)고 언급하면서 “실용적 생산성이 없는 인식의 기쁨은 창녀와 같은 것”(호르크하이머 외, 1995: 25)이라고 노골적으로 선언했을 때, 그것은 곧 대학의 인문 교양 교육의 퇴조나 소멸을 확정적으로 예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창녀의 운명이란 고객의 요구에 전적으로 좌우되는 법이다. 그리고 창녀가 순종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고객이 지불하는 돈 때문이다. 유용성이 시대의 전방위적인 진리로 등장하면서 실용적 생산성을 결여한 영역들은 모두 의심스러운 것들로 간주되었고, 이에 따라 대학의 인문 교양도 도태되어 마땅한 공소하고 사치스러운 담론으로 취급되어왔다. 패스트푸드업계의 대표 주자격인 맥도날드 매점을 분석함으로써 현대적인 삶의 구조를 통렬하게 드러낸 바 있는 리처에 의하면, 현재 세상에서 성공을 담보하는 요인들은 효율성과 계산가능성, 예측가능성, 자동화를 통한 통제이다. 이런 요소들이 갖추어질 때만이 다른 업체들을 물리칠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게 된다는 것이다(리처, 2004: 43-49). 이것은 단순히 패스트푸드업이라는 업종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현대의 삶이 이루어지는 모든 분야에서도 관철되는 것이고, 대학도 예외가 될 수 없다. 경쟁력을 갖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즉 수익을 내기 위해서는 대학도 리처가 제시하고 있는 패스트푸드점의 성공 원리를 따라야 한다. 대학 인문 교양을 조직하는 거스를 수 없는 환경이 조성되었고, 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할 경우 빨리 도태되느냐 아니면 약간 늦출 수 있느냐 하는 시기상의 차이만 있을 뿐 결국 소멸의 길을 갈 수밖에 없다는 점에 이의를 달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대세가 되어버린 이런 지배적인 시대의 조류는, 자연의 야만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계몽적 이성이 자연적 야만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문명적 야만을 초래했듯이, 그리고 수익만을 목적에 둔 맥도날드 식(式)의 계산적 합리성이 인간들 간의 상호이해와 대화를 저해하는 비합리성의 패러다임을 정착시켰던 것처럼, 대학 인문 교양의 교육에서도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비록 외적 명분은 그럴듯한 치장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결국 삶의 도구적 합리성이나 취업 제고와 같은 실용적 이익에 직접적으로 기여하지 못하는 것으로 판명난 인문 교양 교과들은 당연하기라도 하듯이 잉여 학문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축소되거나 폐지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살아남기 위한 거의 유일한 방법은 어떻게든 쓸모 있는 실용적인 교과로 스스로를 개조하고 변형시키는 것뿐이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대학 인문 교양 교육이 거의 파산지경에 이른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내가 볼 때, 가장 커다란 퇴조의 요인은 삶의 거의 모든 측면이 자본시장의 경쟁 구조로 편입된 지금, 학생들이 그토록 원하는 상품적 경쟁력을 인문 교양 교육이 키워주지 못하는 데에 있는 것 같다. 이런 상품성 제고에서 일정 정도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데에는 각 교수자의 역량보다는 인문 교양이라는 학문의 근본적 속성이 자리잡고 있음이 분명하다. 여러 방송 매체들이 현재 대학생의 고민과 바람을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다. 예를 들어 한겨레(2017)의 한 기사의 제목은 “대학생, 제일 큰 고민은 ‘취업’ …희망 직장은 ‘공무원⋅대기업’”이다. 일찍이 소크라테스는 눈에 보이는 재물과 권력의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아테네 시민들을 자기 육체의 종노릇이나 하며 생을 마감한다고 질책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진리를] 캐묻지 않는 삶은 사람에게는 살 가치가 없다.”(플라톤, 2003: 176)고 갈파했지만, 일반적으로 말해서 지금 학생들에게 순수한 진리에 관한 탐구나 삶의 가치에 대한 성찰은 사치에 가까운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야말로 학생들에게는 생물학적 차원에서 생존이 시급한 것인데, 이런 와중에 철학적 진리나 역사, 예술, 언어, 등을 논의하는 인문 교양이니 아무리 교수자가 그 필요성과 배움의 의의를 강조한다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이미 공염불에 가까운 것이 되고 만다. 좀 더 신랄하게 표현한다면, 인문 교양 교과들은 교수자들이 강단에서 밥벌이를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으로까지 여겨지게 된 것이다.
학생들이 자본시장에서 상품으로 살아남기 위해 삶의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문제를 어쩔 수 없이 외면하고 현실에 매달려야 했던 것처럼 대학의 인문 교양 교육도 그래야 했다. 요컨대 시대의 지상명령인 바, ‘돈 이데올로기’의 닦달에서 인문 교양 교과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인문 교양 교육은 성공지향적 사회에서 무엇인가 공헌하는 바가 있음을 보여야 했고, 그래서 수강생들로 북적거릴 만한 시장적 교과목들을 다투어 출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머니투데이(2014)에 따르면 대학에서 개설된 인문 교양 교과목으로 ‘토탈컨디셔닝’, ‘와인 문화의 이해’, ‘결혼준비 특강’이 학생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또 동아일보(2009)는 이색적이면서도 호기심을 끄는 인문 교양 교과들의 출현을 알리고 있는데, ‘신촌의 대학생활에서 살아남기’, ‘한강변 100km 나누어 걷기’, ‘첫 번째 데이트코스 짜기’ 등이 그것들이다. 대학이 ‘취업’을 위한 전문적인, 그렇지만 어떤 면에서는 직업훈련소보다 못한 매우 비효율적인 기술 관료 양성소의 역할을 떠맡으면서, 학생들의 취업 준비를 위한 직접적이고도 구체적인 기술이나 지식을 제공하는 데 있어 전공 교과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리한 인문 교양 교과는 전공교육에 지친 학생들이 용이하게 학점을 딸 수 있거나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시민적 도락의 교과로 변신하곤 하였다. 때때로 이런 시도들이 신선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성공하는 경우도 있었다. 인문 교양 교과들이 이런 전략을 취함으로써 전공 교과에 대해 어느 정도 경쟁력을 획득한 점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미 자본에 침식당한 미국의 인문 교양을 분석하면서 블룸이 냉소적으로 말하고 있듯이, 이런 “인문 교양 교육에는 …내용이 없고 독특한 유형의 사기행위”(블룸, 1989: 391)에 가깝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유형의 인문 교양 교과를 가르치는 교수자들 스스로가 이런 사실을 알고 있다. 대체로 학부 학생을 위한 적절한 인문 교양 프로그램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결여 상태를 초래한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교육 사회적 환경에 쉽게 저항할 수 없다는 것에 인문 교양 교육이 처한 위기의 핵심이 놓여 있는 것처럼 나에게는 생각된다. 인문 교양 교수자들은 자기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본래의 학문적 고향을 떠나 낯선 곳을 전전해야 하는, 소크라테스가 그토록 경멸해 마지않았던 세속적이며 감각적인 세계로 학생들을 인도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셈이다.

2. 불가피한 타협 혹은 새로운 활로

본래적인 의미에서 인문 교양 교육은 현실에서 부와 명예나 권력을 획득하는 방법적 기술(技術)이나 처세술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세속적 욕망의 실현을 목표로 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주식투자에서 돈 버는 법을, 고상하게 와인 마시는 법을, 데이트코스를 잘 짜는 법을 주제화하고 가르치지 않았다. 대신에 “왜 인간은 사는가?”, “진리란 무엇인가?”, “역사는 어떻게 전개되는가?” “정의란 무엇인가?”, “예술의 본질은 무엇인가?” 등의 좀 더 고차적이고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져 왔고, 이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고 시도하였다. 이렇듯 인문 교양 교육은 현실적 삶과 밀착한 개별적인 지식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적 삶과 거리를 두고 자기 자신과 세계를 반성하는 가운데서 의미 있는 삶을 향한 거시적인 방향을 모색하여왔다. 물론 철학이나 역사, 예술에서도 삶에 대한 구체적인 실용성을 중시하는 조류들이 있지만, 이럴 때조차 그것들은 인간이 거쳐 온 여러 시대의 삶의 양식들에 대한 숙지와 반성을 전제로 하고서 그런 입장들을 견지하였던 것이다. 대체로 인문 교양은 축구 골대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공만을 쫒으며 상대편을 제치는 데에 열중하는 세인(世人)들에게 골대의 위치를 상기시켜 주고 “왜 경기를 펼치고 있는가?”의 의의를 알려준다고 볼 수 있다. 인문 교양 교육은 분주한 현실과 비판적인 거리를 둠으로써 현실과 관계 맺으며, 그럴 때 존립의 진정한 근거를 갖는다.
김성우와 최종덕은 이를 다른 식으로 표현한 바 있다. “결국 대학 [인문] 교양은 사회적 처세술이나 외국어 학습이나 단순 직업지향 교육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전공교육과는 독립적으로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스스로 확보하는 사람됨의 주체성과 덕성을 키우는 것이 교양 교육의 핵심”(김성우 외, 2009: 15-16)이라는 것이다. 인문 교양 교육은 단순히 생존을 위한 전문기술의 습득도 아니고, 출세를 위한 상황적 판단 능력의 배양도 아니며, 더군다나 삶의 안전성이 확보된 연후에 그럴듯하게 삶을 치장하는 취미나 예절의 습득도 아니다. 인문 교양이 근본적이고 심층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인간다운 삶에 대한 성찰이고 삶과 세계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탐구이며 또한 이를 바탕으로 한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도모하는 기획이라고 할 때, 인문 교양 교육은 학생들이 이런 문제들에 대해 숙고하도록 인도하고 학생들 스스로가 묻고 대답하도록 도와주는 것이어야 한다.
인문 교양에는 정답이 없다. 가다머가 일찍이 그리고 너무나도 유명해진 그의 저서에서 딜타이의 해석학을 비판한 이유는 역사, 철학, 예술, 언어 등을 다루는 정신과학은 자연과학의 방법을 통해서는 진리가 드러날 수 없는데도, 딜타이가 정신과학의 진리를 객관적인 방법에 의해 추출하려고 했기 때문이다(Gadamer, 1986: 235-246). 삶과 세계에 대한 이해는 오로지 과거의 텍스트와 현재의 해석자가 만나는 누적적이고 무한한 해석 과정에 의해 진리가 그때그때 드러날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영원히 불변하는 단일한 정답을 제출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말하자면 교수자나 학생이나 함께 대화하며 사태를 해석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인문 교양 교육은 그 독특한 가치와 위상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문 교양 교육이 다른 전공 교과와 동일한 수준에서 일합(一合)을 겨루기 위해 ‘기술’과 ‘방법’을 가르치고자 할 때, 얼핏 이색적인 흥미에 기대 잠시 연명하거나 번성할 수는 있겠지만, 대개의 경우 실패할 확률이 높다. 왜냐하면 거기는 인문 교양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홈그라운드가 아니기 때문이다.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저문 숙려의 시간에 밤하늘을 자유롭게 비행할 수 있지만, 대낮에 시내 한복판에 끼어들어 먹이 경쟁을 하다가는 자칫 날랜 짐승들에게 잡아먹히기 쉬운 것이다. 당장 불을 꺼트리지 않기 위해 인문 교양의 서까래를 빼다가 태우다가는 인문 교양이라는 건축물 자체가 붕괴될 것임은 어렵지 않게 예상해 볼 수 있다.
바야흐로 숫자가 경전이 된 시대에 숫자로 완전히 환원될 수 없다는 데에 인문 교양이 밟아야 할 비극적 운명의 맹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시대적 변화나 대학의 교육 환경을 애써 외면하면서 인문 교양 교육의 고답적인 가치만을 내세우는 것은, 내 생각에, 추상적 당위에 가깝다. 이런 입장은 학생들이 인문 교양을 자신들의 삶에 동화시키고 내재화하게 하기는커녕 낡아빠진 훈육적 잔소리로 여기게 만들 것 같다. 그렇다고 인문 교양 교육의 본질적 가치를 무시하고 킬링타임이나 쉬운 학점 따기, 혹은 호기심을 끄는 소재에서 출구를 모색하는 일은 인문 교양 교육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실제로는 반(反)인문적인 교양 교육을 행하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완전히는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 인문학적 본질을 보존하면서도 현실에 부합하는, 어찌 보면 매우 상충하는 바를 충족시키는 길을 찾아야 하는 난감한 과제가 인문 교양 교육에 주어졌다고 볼 수 있다. 식상한 말이겠지만 양자는 결합되어야 한다. 즉 주어진 현실과 인문 교양의 원래적 위상이 조응되는 형태로 스스로를 지양해야 하는 것이다. 장은주는 이런 맥락에서 인문 교양 교육의 새로운 활로를 ‘성찰적 실용주의(the reflective pragmatism)’(장은주, 2008: 124)에서 찾고 있다. 이는 실용성이라는 사회의 요구에 응답하면서도 반성적 역할을 수행하는 인문 교양 교육을 가리키며 ‘실용적 성찰주의’로 명명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는 성찰적 실용주의에 의해 현재의 대학교육 패러다임 안에서 교양 교육의 새로운 모색이 가능하고 “그 핵심에는 ‘학제간 융합교육’이 자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장은주, 2008: 118) 국내 대학들의 융복합 교양교과목 개발 현황을 광범위하게 조사한 이희용에 따르면, 현재 이런 취지에서 ppE 모델을 비롯하여 ‘도시, 예술, 문학’, ‘뇌과학과 정신구조’, ‘인문학과 법’, ‘고전 세미나’, ‘역사학과 디지털 콘텐츠의 만남’ 등 많은 융복합 교과목들이 개발되고 점점 활성화되어 가고 있다(이희용, 2012: 274-277).
이런 융복합 교과들이 그나마 인문 교양 교육의 대안적 활로로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지적 지형의 대변환이 놓여 있다. 디지털 기술 시대에 홍수처럼 쏟아지는 정보는 시간적 순차성과 공간적 배타성을 무너뜨렸는데, 이것은 전통적인 학문 경계의 장벽에 대한 고수가 얼마나 독단적이며 무용할 수 있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정보가 많다고 해서 지식이나 교양이 증대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보의 대량 유통과 유효 기간의 단축화는 삶과 세계의 총체적이며 체계적인 이해를 방해하는 요소로 등장하기도 한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정보의 파편화와 시각적 이미지가 난무하는 시대에는 “연관문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안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손동현, 2009: 15) 이런 점에서 점차 그 생명력을 잃어갈 수밖에 없는 “이러한 [기존의 교양] 교육의 분절적 경향을 극복하고 통섭적 사유와 소통의 기회를 확장하기 위한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예술학이 함께 어우러진 융합교과목의 개발은 무엇보다 절실한 실정이다.”(이희용, 2011: 15) 학생들의 현실적이며 구체적인 고민을, 삶과 세계 전체를 조망하는 융합적인 지식의 교차와 개방으로 고양시킬 수 있는 인문 교양 교과의 발굴이야말로 인문 교양 교육의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인문 교양 교육은 불가피하게 현대라는 시대에 종속된 시대의 아들들을 좀 더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지평에서 시대를 고민하는 아들들로 성장시켜야 한다. 나는 죽음 교육이 이런 여러 요건들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하나의 유력한 융복합적 인문 교양 교과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3. 죽음 교육의 필요성

시대별로 서구에서 죽음에 대한 관념이나 태도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추적한 아리에스(2016)는 아주 이상하게도 인류는 20세기에 들어서서 삶에서 죽음을 완전히 밀어내 버리고 죽음을 금기시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고대나 중세까지만 해도 죽음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 가까이 있었는데, 과학과 의학이 발달한 현대에 들어서 죽음은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경원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대 로마에서는 개선장군이 백마 네 필이 끄는 전차를 타고 시가행진을 할 때 뒤따르는 노예를 시켜 큰 소리로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를 반복해서 외치게 했다. 아무리 지위가 높고 인생의 최전성기에 다다른 인간도 “너도 죽는다.”는 경고를 들어야 했다. 중세 서양에서는 죽음에 대한 준비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천국에 가기 위해 중세인들은 매일 기도하였고 삶을 반성하고 회개하는 의식을 치루었다. 그렇지만 현대에 들어서서 상황은 반전된다. 심지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병원에서도, 죽음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시한부 환자에게도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금기시된다. 시한부 환자들을 집중적으로 관찰했고 죽음에 대한 인간의 심리적 변화를 최초로 학문화했던 퀴블러-로스는 우리가 죽음을 금기시하는 사회,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끔찍한 것으로 여기는 문화권에 살고 있으며, 그래서 인간이 평화롭고도 품위 있게 죽음을 맞이할 수 없게 된 상황을 구체적으로 예시하였다(퀴블러-로스, 2008: 8-22).
준비되지 않은 죽음이란 갑작스럽고 황당하며 허무한 종말이다. 그냥 생물학적으로 하루하루를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다가 생을 마감하는 것은 죽어라 가동되던 기계가 노쇠하여 폐기되는 꼴이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 전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가 황망해지고 결국 자기 삶의 회한에 빠지게 되는 전형을 똘스토이(2016)는 이반 일리치라는 인물을 통해 묘사하였다. 이반 일리치는 마치 죽음이란 남에게만 해당되는 사건이듯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는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가고, 그럴듯한 집기를 구입하는 데 신경을 곤두세우고, 승진에 마음을 졸이면서 신나면서도 바쁜 삶을 산다. 그는 이런 것이 삶의 모든 것이라는 데에 의심하지 않는다. 그의 삶은 부와 명예와 권력을 좇는 현대인의 분주한 일상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이다. 그러다가 아내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이사한 새 집의 커튼을 달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지면서 창틀의 구슬 장식에 옆구리를 부딪치게 된 그 하찮은 사건으로 모든 것이 끝장나게 된 것이다. 살기 위해 의사를 찾아보고 별짓을 다 하지만 소용이 없다. 이제 죽음 앞에서 그는 당황하고 분노하고 후회하며 허망해한다. 그는 잘못 살았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는 것이다. 취업과 생존을 위해 시간을 쪼개 활용하면서 일순간도 낭비하려 하지 않는 현재 학생들은 젊은 이반 일리치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호지가 아름답게 서술한 바 있는 라다크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누리는 여유, 명상, 느림, 놀이의 미덕이 이들에게는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다(호지, 2015: 65-153). 그렇게 느려 터졌다간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현재 학생들은 죽음에 대한 명상이 아니라 삶의 유지를 위한 계산을 하기만도 벅차다. 경쟁에서 승리하고 취업을 하는 데에 온 정신을 쏟아붓는 학생들은 자신이 맞이하게 될 최후의 종말에 대해 별로 깊게 생각해 보지도 않은 채 아등바등 살다가 마침내 이반 일리치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를 자책하고 자기 삶의 무가치함을 체험할 공산이 매우 크다. 죽음에 대해 전혀 준비되지 않은 이런 무방비의 상황은 역설적으로 죽음 교육의 필요성과 시급함을 반증하고 있다.
이런 시급함과 필요성 이외에 죽음 교육이 심각한 위기에 다다른 대학 인문 교양 교육에서 매우 그럴듯한 융복합 교과로 정립될 수 있는 좀 더 강력한 근거가 있다. 그것은 죽음이란 아무리 외면하고 무시하려고 노력해도 거기로부터 도피하기란 불가능하다는 현사실에 있다. 죽음에 대해 가장 깊은 사유를 전개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는 하이데거는 죽음이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의 죽음이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는 진지해지고 심각해질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 바 있다(하이데거, 1998: 317-357). “사람이란 죽기 마련이다.”는 관조적인 초월함도 실제로 죽는 대상이 바로 ‘나’임을 실존적으로 느끼는 순간 증기처럼 휘발된다는 것이다. 나의 죽음은 어떤 누구도 대신해 주거나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도 없는 자기만의 사건이라는 사실, 그리고 나의 죽음이 언제인지는 특정할 수는 없지만 반드시 오고야 만다는 엄연한 사실, 그런데도 내가 맞이하는 죽음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는 사실, 이런 죽음의 고유한 특질들로 인해서 우리들 각자는 근본적인 불안에 빠질 수밖에 없고, 자기의 죽음을 회피하려는 그 어떤 노력도 가상하기는 하나 무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찍이 죽음에 대해 고심할 필요가 없음을 논증한 에피쿠로스는 “악 가운데 가장 두려운 죽음이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죽음은 없고, 죽음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살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Epicurus, 1993: 63)라고 기치 넘치는 주장을 펼쳤지만, 이것은 순전히 머리로써 죽음을 분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은, 더군다나 ‘나’의 죽음은 아무리 죽음에서 도피하려고 용을 써도 소용이 없도록 만드는 기제를 갖고 있다. 죽음은 나의 죽음을 바라보도록 강제하는 불가항력의 힘을 갖고 있다. 내가 볼 때, 바로 이 위력이야말로 취업 준비에 바쁘고, 직접적인 현실적 유용성의 결여로 인해 인문 교양에 심드렁한 학생들에게 인문 교양의 가치를 생생하게 환기시켜 주는 강제적 동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취업이나 성공, 승리, 부와 명예 등이 아무것도 아님을 ‘나’의 죽음이 고지해 준다. 이런 면에서 죽음 교육은 학생들 각자에게 ‘나’의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대면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명령하는 실존론적이며 존재론적인 지위를 갖는다. ‘나’의 죽음과의 대면은 곧 ‘나’의 삶과의 대면으로 안내한다. 나의 죽음에 대한 성찰은 단순히 죽음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나의 삶의 의미, 가치, 방향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케이건이 강조한 바 있지만, 나의 죽음은 단 한 번뿐인 나의 삶에 대한 근원적인 각성을 불러일으키며 “살아가는 동안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내 인생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어떤 목표를 선택해야 할까?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어떤 목표가 가장 가치 있고 보람 있으며 의미 있는 것인가?”를 묻게 만든다(케이건, 2012: 428-433). 죽음에 대한 나의 태도가 삶에 대한 나의 태도를 결정짓는다. 나아가 나의 죽음이란 진정으로 나의 삶에 있어서 소중한 것과 하찮은 것, 가치 있는 것과 허접스러운 것,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 진실된 것과 거짓된 것, 의미 있는 것과 무의미한 것을 드러내 주는 시금석과도 같은 것이다. 김소희의 표현을 빌린다면, 죽음 교육이란 출세탑에 오르는 무한 질주의 욕망을 견제하는 새로운 지평으로써 “경쟁과 속도 그리고 성공이라는 주류적 가치관으로부터 탈주(脫走)하게 하는 대안적 가치관의 세계로서 이해할 수 있다.”(김소희, 2002: 207)
어쭙잖은 세간의 평가에 좌우되지 않는 나의 본래의 삶의 모습은 바로 나의 죽음이라는 거울을 통하여 나에게 현시된다. 나의 죽음은 내가 의미 있는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끔 추동하는 일종의 축복이며, 나의 삶의 진정한 스승이다. 예컨대 인정이라곤 손톱 끝만치도 없는 수전노인 스크루지 영감으로 하여금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꾸기로 결단을 내리게 만든 것은 유령의 손에 이끌려서 보게 된 그 자신의 죽음이었다. 구로자와 아키라가 감독한 영화 이끼루(いきる)에 나온 공무원의 결단도, 아무 의미 없이 하루하루 시간을 축내는 삶을 보내 ‘미라’라는 별명을 얻고 있었던 그가 조폭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조그만 공원 하나를 만들어 놓고 마침내 그 공원의 그네 위에서 눈을 맞으며 생을 마감하는 그의 결단도 자신이 치유할 수 없는 암에 걸렸으며 그래서 조만간 맞이할 수밖에 그 자신의 죽음을 직시했기 때문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바, 죽음은 그 어떤 인문학적 주제보다도 지금 여기서 학생들 각자에게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가를 즉각적으로 일깨우고 그 문제에 몰입하도록 만들며, 학생들에게 주어진 현실적인 긴급한 과제들을 근원적이고도 전체적으로 검토하고 다시 조직하도록 하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지봉환이 언급하고 있듯이 이렇게 “죽음은 자신의 삶을 소중하게 이어가도록 하기 위한 가르침이며 참 삶을 위한 바람직한 길을 안내하는 삶의 한 과정”(지봉환, 2008: 54)이다. 그렇기에 최옥선의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얻는다. 즉 “일상적인 삶에서 자연스런 경험을 통해 학생 스스로 학습하도록 내버려두기보다는 정규교육과정에서 의도적인 교육의 형태로서 다루어져야 한다.”(최옥선, 1996: 91)
죽음이란 자신의 미래와 과거와 현재를 통합적으로 고찰하고 어떤 의미 있는 행위를 결단하도록 만드는, 인간의 유한성 자체가 허락하는 삶에 대한 가장 심대한 성찰의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좀처럼 이 기회를 활용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앞에서 언급했듯이 학생들이 살고 있고 살아야 하는 현대라는 시대가 인류가 생존해 온 이래 가장 죽음과 멀리 떨어진 삶의 양식을 조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문 교양을 외면케 하는 시대의 도도한 흐름에도 그것에 휩쓸려 들어가지 않을 수 있는 자신만의 보루를 학생들은 자체 내에 갖고 있다. 작금의 세태에 저항할 수 있는 원초적 힘이 바로 학생들 각자가 필연적으로 맞게 될 고유한 ‘나’의 죽음에 있다. 학생들 각자의 죽음은 자신에게는 마치 죽음이 오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외관(外觀)을 깨부수고 자신의 삶의 가치와 방향을 근본적으로 사유해 보도록 학생들을 강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인문 교양의 교두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4. 죽음 교육의 현황과 융복합 교과목으로서의 필요성

죽음을 쉬쉬하는 태도가 삶에 생산적이지도 않으며 올바른 것도 아니라는 점이 점점 명확해지고 있다. 죽음 교육에 대한 전면적인 개방화가 필요한 것이다. 외국에서는 20세기의 금기사항인 죽음을 깨는 여러 시도가 행해지고 있다(EBS <데스> 제작팀, 2014: 167-207). 가령 영국은 매년 5월 ‘죽음 알림 주간’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죽음 관련 행사를 개최하고 있고, ‘데스 카페’에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죽음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며, 어린아이들에게도 죽음에 관해 솔직하게 알려주고 있다. 다양한 실험 결과 죽음 교육은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순간이 얼마나 중요하고 값진 것인지를 새삼 깨닫게 되고 삶에 대한 충실함의 의지를 다지는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함이 밝혀졌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은 1960년대부터 정규교육과 평생교육으로 죽음 교육을 병행하고 있고 많은 대학교에서는 죽음에 관한 강좌가 진행되고 있다(곽혜원, 2014). 또 캐나다와 유럽, 일본 등에서도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생 때까지 전 교육과정에 죽음 교육을 포함하고 있고, 일반인을 대상으로도 죽음 교육이 시행되고 있다(데켄, 2002).
이에 비해 우리나라에서 죽음 교육은 그리 활발하지 않다. 간호조문사 신문(2019)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 절반 이상이 아예 죽음에 대한 대화를 거의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에서 죽음 준비 교육은 주로 노인종합복지관, 종교단체, 비영리재단에서 부정기적으로 행해지고 있고, 정규교육 과정 안에 자리잡고 있지 못한 형편이다. 더군다나 김은숙과 조항이 언급하듯이, 여전히 죽음 교육은 노인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관련 연구 또한 임종을 앞둔 노인이나 환자들을 대상으로 주로 수행되고, 청소년들, 특히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죽음 교육 연구는 매우 미비하다(김은숙 외, 2020: 31). 한마디로 죽음 교육은 아직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대전광역시 소재 일개 대학교에서 죽음학 관련 교양강좌를 2016년 8월부터 12월까지 15주 동안 수강한 대학생들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한 연구는 특기할 만한 점을 밝혀주고 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죽음 준비 시점과 관련하여, 교육 전에는 성인과 65세 이상, 죽음에 직면한 시기(암환자, 말기환자)로 생각했으나 교육 후에는 중⋅고등학교, 대학교에서의 죽음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이다.”(송현동 외, 2018: 307) 설문조사와 심층면접을 통해 수행된 또 다른 연구는 대학생 학습자들이 죽음학 교과목의 적극적인 필요성을 느끼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김재경 외, 2020: 195-198). 그리고 실제로 간호학 교수 3인과 심리학 교수 1인이 부산 소재의 일개 대학교의 대학생들을 상대로 5일간 1일 6시간씩 30시간의 죽음 교육의 프로그램을 실시한 결과, 학생들은 창조적인 활동(노동, 취미, 임무에의 열정)을 통하여 생의 의미를 발견하는 ‘창조적 가치 실현’과, 세상의 경험(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이나 자연, 예술작품)을 통해 생의 의미를 발견하는 ‘경험적 가치 실현’에서 유의미한 변화를 드러내었다(김숙남 외, 2005: 149-150). 죽음 교육은 금방 다가올 죽음을 예비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창창하게 남아 있는 살아갈 날에 대한 고민이고 선택의 계기이기 때문에 특히 청소년과 청년기에 지속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실시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중⋅고등학교에서 이런 교육이 본격적으로 행해지지 않기 때문에 대학의 인문 교양 교육이라도 그 짐을 떠맡아야 한다. 그렇지만 <표 1>에서 나타나듯이, 온라인 및 유선을 통해 확인한 결과 전국 4년제 일반 국립대학교와 교육대학교에서 2021년에 개설된 죽음 관련 교양 교과는 매우 드물다.
물론 의과대학에서도 ‘죽음에 대한 과학적 이해’, ‘노화와 죽음에 대한 성찰’, ‘삶과 죽음’ 등을 다루는 교과목이 개설되어 있다. 그러나 의과대학에서의 죽음교육이란 인간적인 죽음보다는 의학적 죽음에 치중되어 있다. 한 의사는 많은 임상과목을 배웠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배우지 못했다고 고백하고 있다(매일신문, 2021). 이것은 죽음을 다루는 데 있어 하나의 단일한 학문적인 시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시사한다. 물론 특정 전공 분야에서 죽음 교육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죽음이란 단순한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총체적인 삶과 씨줄과 날줄로 연결된 것이다(Luper, 2014). 그러기에 죽음에 대한 성찰은 삶 전체에 대한 반성과 포개진다. 성숙하고 온전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철학, 역사, 문학, 심리학, 예술, 신학, 의학, 생물학, 사회학, 인류학, 경제학, 정치학 등 제학문의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는 것처럼, 학생들은 이런 다양한 분과들의 통합적이고 융복합적인 교육에 의해서만 죽음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획득할 수 있고, 죽음에 대한, 바꿔 말하자면 삶에 대한 총체적이며 의미 있는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철학이라는 한 분과만 하더라도 동서양 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철학자들이 죽음에 관한 자신만의 고유한 견해를 피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정동호 외, 2004). 죽음 교육과 관련해서 한 명의 전공 교수자보다는 되도록 전공을 달리하는 많은 교수자들이 참여하는 인문 교양의 통합적인 교육이 바람직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렇지만 <표 1>이 보여주듯이, 그렇지 않아도 드물게 개설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죽음 관련 교양 교과 중에 2인 이상의 교수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연합교과로 운영되는 경우는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표 1>
전국 4년제 일반 국립대학교와 교육대학교 2021년 죽음 관련 교양 교과목 개설 현황
연번 4년제 대학교 죽음 관련 인문 교양 교과목 내용 연합교과 여부
1 강릉원주대학교(본교) 없음
2 강원대학교(본교) 사랑과 죽음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사유의 기회 제공 N
3 경북대학교 없음
4 경상국립대학교 없음
5 경인교육대학교(본교) 일상과 철학 고통의 감정과 죽음의 문제, 벌과 교육, 인공지능의 문제를 다룸 N
6 공주교육대학교 없음
7 공주대학교 없음
8 광주교육대학교 없음
9 군산대학교 없음
10 금오공과대학교 없음
11 대구교육대학교 없음
12 목포대학교 없음
13 목포해양대학교 없음
14 부경대학교 삶과 죽음의 철학 삶과 죽음이 균형을 이루는 삶, 행복과 의미가 균형을 이루는 삶을 모색 N
15 부산교육대학교 없음
16 부산대학교 없음
17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없음
18 서울교육대학교 없음
19 순천대학교 없음
20 안동대학교 없음
21 전남대학교(본교) 없음
22 전북대학교 없음
23 전주교육대학교 없음
24 제주대학교 없음
25 진주교육대학교 없음
26 창원대학교 없음
27 청주교육대학교 없음
28 춘천교육대학교 없음
29 충남대학교 없음
30 충북대학교 없음
31 한경대학교 없음
32 한국교원대학교 없음
33 한국교통대학교 없음
34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없음
35 한국체육대학교 없음
36 한국해양대학교 없음
37 한밭대학교 없음
융복합적인 죽음 교육은 학생들에게 철학자나 정신분석학자, 심리학자, 소설가, 인류학자, 생물학자, 종교학자 등 개별적인 전공 분야를 가리지 않고 많은 인물을 만나 대화하는 시간을 제공할 수 있다. 자신의 고민을 풀기 위해서는 자기가 익숙한 세계로부터 떠나 다른 세계를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다. 다양하고 대립하는 견해들을 접하고 검토하고 상호 토론하는 가운데서 학생들은 스스로 사유하고 결단하는 역량을 키울 수 있다. 학생 상호 간, 나아가 교수자와 학생 간에 마음을 열고 진지하게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가운데서 죽음에 대한 이론적 논구를 넘어서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인문 교양의 물음이 추상적인 차원에서 삶의 구체적인 지평으로 학생들에게 자연스럽게 삼투될 수 있을 것이며, 애초에 인문 교양의 새로운 돌파구로써 서술한 바 ‘실용적 성찰주의’가 관철될 수 있을 것이다.

5. ‘삶과 죽음’ 인문 교양교과목의 개발과 운영 사례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나(H)를 포함하여 3명의 교수자가 1년여의 준비 기간을 거쳐 ‘삶과 죽음’이라는 교과목을 공동으로 개발하였는데, 이것은 2018년 1학기부터 대전에 소재한 일개 대학교에 개설되었으며 수강인원 제한이 120명으로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융복합 인문 교양 교육은 한 명의 교수자가 맡아 진행할 수도 있겠지만, 여건이 허락된다면 서로 다른 전공 교수자들이 함께 참여하는 편이 동일한 주제에 대해 학생들이 다양하거나 대립적인 여러 입장을 접하고, 그럼으로써 해당 주제에 대해 폭넓은 이해와 학문 분과들 간의 연결 지평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훨씬 유리하다. 즉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을 고려해서 전공을 달리하는 3명의 H, C, K 교수가 교과목 개발과 운영에 공동으로 참여하였고 현재까지 변동은 없다. H는 서양철학, C는 동양철학, K는 독일문학 전공자이다. 전공이 다른 3명의 교수가 공동으로 교과를 개발하고 강의를 하는 일은 이 대학교에서는 최초의 시도여서 우리는 여러 가지 숙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여기에서 그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것은 이 강좌가 완전하다는 것을 내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가 기획하고 경험했던 과정을 소개함으로써 앞으로 개발될 다양한 융복합 인문 교양 교과목과 관련해서 하나의 참조할 만한 자료를 제공하기 위해서이다.
융복합 인문 교양 교육을 전공이 다른 여러 교수가 공동으로 진행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일은 강의 교안을 집필하는 것이다. 단독 강의보다 더욱 치밀하면서도 체계적인 강의 설계도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사 강의의 계획서와 관련 도서들을 참고하여 먼저 다룰 주제를 선별하고 어떤 순서로 진행할 것인가를 정해야 한다. 죽음과 관련된 여러 문제 가운데 우리가 선택한 15주차 강의의 주제는 <표 2>와 같다.
<표 2>
‘삶과 죽음’ 강의 교재의 목차
제1주: 죽음에 대한 성찰의 필요성(주관교수: H)················································································································································· 3
제2주: 제사의 의미(주관교수: C)········································································································································································· 22
제3주: 죽음을 바라보는 다양한 철학적 입장들(주관교수: H)·························································································································· 52
제4주: 죽음에 대한 종교적 이해(주관교수: C)·················································································································································· 76
제5주: 죽음을 받아들이는 현대인의 태도(주관교수: H)································································································································· 101
제6주: 죽음과 영혼의 불멸(주관교수: K)·························································································································································· 120
제7주: 자살에 대하여(주관교수: C)··································································································································································· 159
제8주: 중간고사···································································································································································································· 187
제9주: 죽음과 노동(주관교수: H)······································································································································································· 188
제10주: 죽음과 사랑(주관교수: K)····································································································································································· 121
제11주: 죽음과 축제(주관교수: H)····································································································································································· 247
제12주: 죽음과 의료기술(주관교수: K)····························································································································································· 265
제13주: 생명이란 무엇인가?(주관교수: C)························································································································································ 285
제14주: 웰빙과 웰다잉(주관교수: K)································································································································································· 307
제15주: 기말고사·································································································································································································· 349
▣ 부록 : 유명인들의 유언·················································································································································································· 350
교안을 제작할 때 연합 강의인 점을 십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교안 자체부터 교수들 간에 협력적인 작업이 상호 교차적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 한다. 우리는 각 주차별 강의 내용에 따라
주관교수(교수 1)와 참여교수(교수 2, 교수 3)로 구분하였고, 이 역할을 번갈아 하였다. 예컨대 1주차 주제인 ‘죽음에 대한 성찰의 필요성’의 주관교수가 H이고 참여교수가 C와 K였다면, 4주차 주제인 ‘죽음에 대한 종교적 이해’의 주관교수는 C이고 보조 참여교수는 H와 K인 식이다. 해당 주차의 강의 교안은 주관교수가 집필하였다. 분량은 최소 A4 용지 6쪽 이상이었고, ppT로만 작성은 금지했으며, ppT를 사용할 경우 하나의 쪽에 두 개가 들어가는 크기로 하였다. 강의안 다음에는 주관교수가 주차별 강의 내용과 관련된 고전 텍스트들을 발췌해서 학생들에게 읽기 자료로써 제공하였다. 분량은 10쪽 내외로 하였다. 강의안과 읽기 자료 다음에 참여교수들이 주관교수의 강의안에 대한 각자의 논평을 달았다. 이런 논평의 분량은 각 참여교수 당 2쪽 이상이었다. 가령 6주차 주제인 ‘죽음과 영혼의 불멸’의 경우 주관교수 K는 그가 집필한 강의안에 영혼의 불멸을 부정하는 그 자신의 견해를 개진하였고, 이 글에 대해 참여교수인 H는 소크라테스와 칸트의 이론에 기대어 K의 입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논평글을 썼고, 또 다른 참여교수인 C는 진화생물학 입장에서 영혼을 부정하는 그의 단호한 주장을 피력하였다. 그리하여 학생들은 교수들의 일치하지 않는, 때로는 적대적인 입장을 보고 이 주제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생각하게 되었으며, 정답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토론에 참여하고자 하는 의욕을 드러냈다. 마지막 순으로는 학생들이 수행해야 할 과제를 내주었다. 이런 구성으로 총 362쪽의 교안이 제작되었고, 학생들은 학교 사이버자료실에서 내려받기를 하거나 학교복사실을 통해 구입할 수 있게 하였다. 강의 교안 구성방식은 <표 3>과 같다.
<표 3>
각 주제에 대한 강의 교안 구성방식
해당 주제 교안 1. 주관교수 1의 강의안
2. 읽기 자료
3. 참여교수 2, 참여교수 3의 논평
4. 과제
융복합 인문 교양 교육에서 연합 강의를 한다는 것은 각 교수자의 병렬적이고 순차적인 강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상호 침투적이며 융합적인 시너지 효과를 목표로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교안 제작에서 교차적인 구성방식을 택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강의 운영방식도 이를 고려하여 해당 주차의 강의안을 작성한 주관교수가 그 주제를 강의하고 이에 대해 다른 두 교수가 의문을 제기하며 갑론을박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그리고 학생들이 여기에 자유롭게 토론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구체적인 강의 운영 방안은 <표 4>와 같다.
<표 4>
‘삶과 죽음’의 강의 운영방식
1교시(30분) ▪ 주관교수 1: 해당 주제와 관련된 강의
▪ 주관교수 1: 해당 주제 관련 기본적 지식 제공
1교시(30분) - 2교시(20분) ▪ 참여교수 2와 참여교수 3: 주관교수 1의 강의 내용에 대한 의견 개진
▪ 주관교수 1과 참여교수 2와 3: 선별된 핵심적인 독서 자료에 관해 학생들과 함께 의미 탐구
2교시(20분) - 3교시 ▪ 교수1, 교수 2, 교수 3은 학생들과 함께 자유토론
▪ 주제 일탈을 방지하기 위해서 주로 정해진 기본적인 텍스트 내에서 논의 진행
과제 ▪ 다음 주 논의될 주제와 관련된 과제 제기
▪ 과제는 되도록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주제로 선정
강의 운영방식에서 드러났듯이, ‘삶과 죽음’의 강의에서 우리는 교수와 교수, 교수와 학생들, 학생들과 학생들 간의 토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거기에 기꺼이 참여하였다. 요즘 학생들은 단순한 관람자나 청취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쌍방향 의사소통을 선호하며 자유로운 표현에 익숙하고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주체로서 참여하고자 하는 성향을 갖는다(민경찬, 2009: 25). 인문 교양의 본질적 특성인 바, 어떤 사안에 대해 하나의 정답이 있을 수 없는데, 이런 특징은 개방적인 토론에서의 생산성을 일정 정도 약속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죽음 교육의 교수 방법과 관련해서 학생들은 일방적 강의식 교육방식이 아닌, 상호 간에 교감을 가질 수 있는 직접적인 방식과 토론을 선호하고 있다(김은숙 외, 2020: 41). 나는 수업 중에 이런 교감을 가진 적이 적지 않았다는 점도 부언하고 싶다. 한 학생이 자신의 자살 시도 경험을 이야기하자 다른 학생들도 내밀한 자신들의 불안과 아픈 좌절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치유의 느낌을 갖게 되었다.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인간에 대한 신뢰의 감정이 되살아났다. 몇몇 학생들은 학기가 끝난 후 강의를 총평하는 란(欄)에 자신들이 그때 함께 공유했던 느낌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적었다.
나아가 ‘삶과 죽음’ 교육은 그 내용의 보편성으로 인해 참여자 누구나가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음으로써 비판적이고 보편적인 소통능력을 함양할 수 있는 마당이기도 하다. 자유로운 문답 속에서 창의적인 착상과 결단이 생겨난다. 그러나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의사소통적 개방성은 동시에 내용 없는 신변잡기 식의 잡담으로 흐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기본적인 지식이 없거나 부족한 곳에서 행해지는 토론이란 무익한 시간낭비일 가능성이 크다. 가다머가 누누이 강조한 바 있지만, 우리가 어떤 것을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서는 이미 그것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권위 있는 지평으로서의 선지식이 있어야 한다(Gadamer, 1986: 281-290). 기존 지식의 축적 없이 상상력만으로 인문 교양 교육이 이루어질 수는 없다. 예컨대 바둑에서 신수(新手)란 이전에 두어졌던 수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전에 두어진 적이 없는 수일 때에만 그것은 신수로 간주될 수 있다. 따라서 바둑 정석이나 이전의 기보(棋譜)를 모르는 사람은 본인이 설사 신수를 두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신수인지를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학생들이 각자의 삶에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바를 추구하려면, 이전의 현자(賢者)들이 추구했던 삶과 죽음에 대한 견해나 태도를 경유해야 하며,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대개의 경우 자신이 기울인 노력의 결과는 빈약하거나 무익한 수고에 그치기 쉽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삶과 죽음이 자기에게만 설득력을 갖는 그런 아집적이고 자의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하다못해 어떤 물건을 살 때에도 우리는 사용 후기를 참조한다. 하물며 삶과 죽음이라는 이 중차대한 문제에 있어서야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의미와 해석을 요구하는 인문 교양의 물음 앞에서는 단 하나의 정답이란 불가능하다. 엄밀한 과학적 사실을 설명하는 데에서는 원리적으로 정답이 있을 수 있지만, 삶과 죽음의 의미나 가치를 찾는 작업은 해석의 지평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사태를 바라보는 단 하나의 눈이 있다는 주장은 허구라고 주장하면서 “수많은 눈들이 있다. 스핑크스 역시 눈들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수많은 ‘진리들’이 있고, 따라서 그 어떤 진리도 없다.”(니체, 2004: 289)고 천명한 바 있다. 인간이란 각자 자기가 놓인 특정한 처지에 따라, 즉 그가 처한 양육 조건이나 교육, 역사, 문화, 환경 등에 따라 사태를 달리 인식하고 또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동일한 사건이나 텍스트라 하더라도 그것을 보는 관점의 차이에 따라 상이하거나 대립적인 해석을 낳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모든 해석이 하나의 견해에 불과하며, 자기의 해석도 그렇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스스로 독단을 깨부수는 데 있어 제일의 조건이 된다. 자기 주장의 한계에 대한 각성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삶과 죽음에 대해 수행한 수많은 해석들과 진리들을 봄으로써 획득되는 것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서 필요한 경우 우리 교수자들은 상이하거나 대립적인 기존의 고전적 이론이나 입장들을 설명하고 학생들이 이것들을 소화할 수 있게 해 줌으로써, 그들이 문제의식을 예리하게 가다듬고 스스로 사유하고 삶의 태도를 결정하는 데에 조력자의 역할을 하였다. 특히 자유로운 토론식으로 강의가 진행될 경우, 학생들은 아무런 준비 없이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교안에 있는 내용을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에 일정 분량 제출하였다. 특히 ‘삶과 죽음’ 같은 융복합적 인문 교양에서는 학생들이 기본적인 배경 지식 위에서 활발한 토론을 해 나가도록 해야 하는 점이 중요하다.
블룸이 예리하게 지적했듯이, 인문 교양 교육 강의를 수강하는 학생들은 “나는 [아직 자기 길을 찾지 못한] 하나의 인간입니다. 전체로서의 나를 형성하도록 도와주세요.”(블룸, 1989: 389)라고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전공 교과에서도 그렇겠지만 학생들은 특히 인문 교양교과목에서 자기 삶의 안내자나 멘토로서 교수자들과 만나기를 희망한다. 요컨대 그들은 지식적 차원을 넘어 감정적인 유대를 원하며, 직접 교수자들이 살아오면서 겪어 온 체험적 지혜를 공유하고자 한다. 이런 측면에서 교수자들은 단지 사실판단에 기초한 지식만을 전달하거나 논의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들의 가치관, 인생관, 역사관, 종교관 등을 진솔하게 개진할 필요가 있다. 하나의 인간이 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교수들 또한 전문가 이전에 하나의 인간이 되어야 한다. 학생들이 자신들의 솔직한 인생관이나 가치관을 드러낼 수 있는 유력한 유인 중의 하나는 교수자들이 학생들에게 바라는 만큼 자신들의 삶의 궤적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데 있을 것이다.

6. 나가는 말

지금까지 나는 자본에 의해 식민지화된 대학을 둘러싼 열악한 환경에서 인문 교양이 나아갈 수 있는 하나의 유력한 방안이 죽음 교육이며, 왜 그럴 수 있는지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였다. 학생들은 무제한적인 경쟁 구도 속에서 닦달당하고 있고, 따라서 인문 교양의 여러 고전적인 주제를 진지하게 고려할 만한 여유가 없다. 그렇지만 학생들이 아무리 삶의 근본적인 의미와 방향을 묻는 문제와 동떨어진 곳에 있고 또 그럴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그들을 인문 교양으로 돌려세우는 강제적인 기제가 있다. 그것은 학생들 자신이 언제 어떤 방식인지는 모르지만 필연적으로 맞이할 수밖에 없는 각자의 죽음이다. 자신의 죽음을 살아 있는 동안 의식하는 인간은 자기 자신의 죽음만은 어떻게 해도 외면할 수 없고, 또 거기로부터 도피할 수도 없다. 학생들이 자신들의 삶을 진지하게 반성하게 하고 값진 삶을 살도록 결단하게 만드는 원천은 바로 실존론적인 자신의 죽음, 그것이다. 나는 죽음의 이런 강제적인 동인이야말로 현시대가 학생들을 정신없이 바쁜 분주한 세상사로 내몬다 해도 이들을 인문 교양의 본질적 가치의 세계로 전향하게 하는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적인 삶의 문제와 인문학적 성찰이 죽음 교육을 통해 결합될 수 있다. “나는 틀림없이 죽는다.”는 현사실은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케 하는 필연적인 사유의 경로이다.
그렇다면 죽음 교육은 왜 융복합적인 인문 교양 교육이 되는 것이 바람직한가? 죽음이 총체적인 삶을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제학문에서 논의되는 죽음에 대한 다양하고 심지어 대립하는 견해들은 우리의 삶의 전체적인 모습을 밝혀주는 것이고, 삶을 거시적이고도 전체적인 연관 속에서 파악하게 하여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주체적이면서도 의미 있는 삶을 결단하도록 견인하는 것이다. 거꾸로 표현할 수도 있겠는데, 삶의 총체적인 시각이야말로 죽음을 온전히 드러내는 기반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죽음 교육은 매우 통합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만드는 인문 교양 교육의 광맥과도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 한 명의 전공 교수자가 죽음 교육을 담당하는 것보다는 다양한 전공 교수자들이 이 교육에 참여하는 것이 더욱 나은 까닭도 여기에 있다. 특정한 전공 교수자가 이 교과를 담당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죽음이라는 주제가 갖는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속성을 감안해 본다면,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의 전공자들이 함께 강의를 진행하는 편이 훨씬 풍요롭고 다채로운 논의를 학생들에게 제공할 수 있음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나는 앞에서 인문 교양 교과로서 전공이 다른 3명의 교수가 운영하는 ‘삶과 죽음’의 교과를 소개했는데, 3명의 교수가 모두 인문학 전공자인 점은 아쉽다. 이제는 비대면 수업 운영도 많이 활성화되어 있으므로 전공을 달리하는 많은 교수자들과 학생들이 대단위로 모여 함께 토론하는 장도 마련될 수 있고, 시너지 효과도 극대화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이냐?” 혹은 “어떻게 살 것이냐?”의 물음에는 단일한 정답이 존재할 수 없다. 학생들은 강의를 통해, 또 교수자들과 학생들 상호 간의 열린 대화를 통해 자기 나름의 답을 모색할 수 있다. 타인의 가치관, 인생관, 종교관을 이해할 수 있고, 좀 더 폭넓게 인간과 세계를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의사소통의 도가니가 융복합적인 죽음 교육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음을 나는 강조하고 싶다.
나는 앞에서 융복합적인 인문 교양 교과의 하나인 ‘삶과 죽음’의 강의 설계와 운영 실태를 보고하였다. 이 하나의 교과가 인문 교양 교과를 대표할 수 없을뿐더러 죽음과 관련된 교과목 전체를 대표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이것을 보고한 까닭은 융복합 인문교양 교과목을 기획하거나 강의하고 있는 교수자들에게 좀 더 나은 교육을 위해 하나의 구체적인 참조 자료를 제공하고자 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 기탄없는 조언이나 비판을 다른 동료 교수자들로부터 받고자 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부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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