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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General Edu > Volume 16(1); 2022 > Article
자유교육의 성격 다시 보기

Abstract

로스블라트(Sheldon Rothblatt) 교수는 역사적 고찰을 통해 자유교육의 성격이 특정 교과목이나 교과과정으로 규정된다고 볼 수 없으며, 인격형성, 리더십, 비판적 사고, 폭넓음 등과 같이 흔히 자유교육을 통해 얻게 되는 성과 역시 그렇게 명확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홍성기 교수는 부분적으로 공감하면서도 비판적 견해를 제시했다. 이 글에서는 로스블라트 교수의 견해, 그리고 그에 대한 홍성기 교수의 비판 각각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조명한다. 그 과정에서 자유교육의 성격을 교육과정에 의해 규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던 듀이(John Dewey)와 밀러(John William Miller)의 견해를 검토하고, 미국의 AAC&U가 21세기의 학부교육이 지향해야 할 모델로 실용적 자유교육을 제시한 것의 의미도 살펴본다. 아울러 마틴(Everett Dean Martin)의 통찰에 따라 자유교육의 정신은 인간의 삶을 더 나은 것으로 변화하도록 하는 데 있다는 점을 받아들인다면, 무엇을 가르치든 반복적인 투입에 의해 직접적인 산출을 기대하는 “훈련”이 아닌 가치와 의미를 얻게 하는 진정한 “교육”을 지향하는 것으로 자유교육의 성격을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Abstract

Professor Sheldon Rothblatt endorses the view that the nature of liberal education is not defined by the specific set of subjects. In addition, he suspects the alleged outcome of liberal education such as character formation, leadership, critical thinking, and breadth is not as clear as we assume to be. While acknowledging some of those ideas, Professor SungKi Hong gives a critical review of Rothblatt’s position.
In this paper, I examine Rothblatt’s position and Hong’s critical review respectively. I also discuss the ideas of John Dewey and John William Miller regarding the nature of both liberal and practical education. Furthermore, in view of Everett Dean Martin’s insights, I suggest that we can define the nature of liberal education not by what we teach, but rather how we teach, placing an emphasis on the meaning and value of life. For in doing so, we can at least guarantee that no matter what we teach, the “education” will not be reduced to mere “training”.

1. 들어가는 말: 자유교육의 영역과 역할

한국에서 ‘자유교육’(liberal education)이라는 말은 ‘교양교육’이라는 표현만큼 혼란을 일으킬 여지가 있다. ‘교양교육’의 내포 역시 무척 넓은 것이어서 적지 않은 대학 구성원들이 한국교양기초교육원에서 정의한 것과는 매우 다른 의미로 이해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하게 된다.1) 서양에서도 ‘자유’라는 말이 교육의 맥락에서 사용될 때 제대로 이해되지 않거나 혼란스러운 상황이 연출되곤 하는데, 미국에서는 종종 ‘liberal’이란 단어가 지닌 정치적 함의 때문에 학생과 학부모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킨다고 한다(Ferrall, 2011; 8). 그런 오해와는 거리가 먼 학계에서도 ‘자유교육’, ‘자유학예’(liberal arts), ‘일반교육’(general education) 등 여러 표현들이 혼재 내지는 혼용되어왔다. 실로 자유교육과 자유학예의 성격에 대한 논의는 오랜 시간 계속되어왔으며, 시대가 흐름에 따라 다양한 관점들이 새롭게 제시되기도 하였다.
로스블라트(Sheldon Rothblatt) 교수는 2021년 8월에 열린 창파강좌에서 자유교육에 대한 독특한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한국의 교양교육 학계가 자유교육의 성격에 대해서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는 역사적 맥락에서 자유교육 또는 자유학예의 성격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설명하면서, 학문 분야별 경계의 구분이 어려워진 오늘날 모든 지적 탐구의 영역이 자유교육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Rothblatt, 2021). 사실 로스블라트 교수의 강연은 대체로 그가 2003년 AAC&U에서 펴낸 리포트를 기초로 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유교육의 대상이 흔히 말하는 자유학예 과목들로 국한되지 않으며 자유교육의 옹호자들이 주장해 온 자유교육의 효과들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Rothblatt, 2003). 홍성기 교수는 이러한 입장에 대해 부분적으로 공감하면서도 비판적 고찰을 제시하고 있는데(홍성기, 2021a), 이 글에서는 로스블라트 교수와 홍성기 교수 각각의 관점을 다시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 자유교육의 성격에 대해서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먼저 홍성기 교수는 로스블라트 교수의 견해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검토하고 있는데, 그것을 다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 (1) 자유교육의 성격을 드러내는 지표는 어떤 과목을 가르치고 배우는 방식과 그것이 제공되는 정신, 그리고 그러한 가르침과 배움으로부터 귀결될 수 있는 태도에 있다. 어떤 과목이든 리버럴하게(liberally) 또는 리버럴하지 않게(illiberally) 가르칠 수 있다. 자유교육에서 가르쳐 온 과목이나 학문 분야가 분명한 기준에 의해 논리적으로 선택된 것은 아니며, 일단 선택되고 나면 제도화되고 이어서 기득권에 의해 보호되었다.

  • (2) 일반적으로 자유학예의 장점 또는 자유학예가 약속하는 인재의 모습인 ①인성교육(character formation), ②리더십, ③비판적 사고 능력, ④폭넓은 교육, ⑤일반교육(general education)으로서의 자유교육 등은 실은 자유교육 옹호자들의 ‘실체 없는 약속들’이다.

위에서 (1)은 자유교육의 영역에 관한 주장이며, (2)는 자유교육의 역할에 대한 주장이다. 로스블라트 교수의 두 주장은 대체로 자유교육과 관련하여 흔히 인식되고 있는 생각들에 도전하는 측면이 분명히 있기에 도발적인 문제 제기인 것처럼 보인다. 이제 그 두 주장에 대해서 자세히 검토해보자.

2. 자유교육의 영역

2.1. 리버럴한 방식으로 가르치기

먼저 로스블라트 교수의 주장(1)에 대해서 살펴보자. 주장(1)의 핵심은 자유교육의 성격을 교육과정에 의해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정 과목들이 자유교육의 대상이라는 접근 대신 교육의 정신과 방법 그리고 결과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홍성기 교수는 로마제국 시기에 아르테스 리베랄레스(artes liberales)라는 용어가 사용된 이래 그에 해당하는 과목 선택과 관련하여 학자마다 서로 다른 제안들이 있었고, 3학(trivium)과 4과(quadrivium)의 내용을 확정한 5세기의 카펠라가 건축과 의학을 자유학예에서 제외한 이유도 너무 간략하게 제시된 것 등을 근거로 로스블라트 교수의 주장이 일견 설득력 있어 보인다고 말한다(홍성기, 2021a: 94). 그러나 홍성기 교수는 궁극적으로 자유교육의 영역을 대상 중심으로 규정하는 대신 교수 방법이나 자유교육의 정신에 의해서 규정하려는 시도가 반드시 비교사적 관찰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결론은 아니라고 주장한다(홍성기, 2021a: 103). 그 이유는 “자유학예가 무엇인가?”의 질문에 초점을 맞추면 비교사적 관점에서 서로 다른 학문 분야와 교과목, 그리고 역할들이 중첩되기도 하지만 모순되기도 함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학예란 ‘대상’(entity)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지만, “‘자유학예’라는 용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하면 자유학예에 어떤 분명한 본질적 속성은 없다 하더라도 가족유사성 같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홍성기 교수의 관점과 달리, 필자는 우리가 자유교육을 말할 때 이미 가족유사성의 아이디어를 활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가족유사성 개념을 도입할 때, 그는 어떤 것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본질과 같은 것은 없고 교차하고 중첩하는 조금씩 다른 성질들로 묶을 수 있는 유사성만이 존재한다고 했다. 축구, 농구, 야구, 배구, 핸드볼은 전부 다른 스포츠다. 이들 종목을 관통하는 본질은 없다. 그러나 이들은 크기와 모양은 다르지만 전부 공을 사용하며, 게임에 참여하는 선수의 수와 승부를 내는 방법은 다 다르지만 그와 관련된 규칙들을 가진다는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그러한 유사성에 따라 이들 스포츠는 구기종목으로 분류된다(박병철, 2014: 197- 198). 자유교육을 구성하는 각 학문 분야를 관통하는 본질은 없다. 그러나 문학, 철학, 사회학, 경제학, 물리학 등 각각의 분야는 기초학문의 성격을 지니며, 바로 그러한 점에 기초하여 우리는 이들을 자유교육의 범주로 분류해왔다.
결국 홍성기 교수의 관점에서 자유학예의 영역을 가족유사성과 같다고 볼 수 있다면, 로스블라트 교수의 비교사적 관찰로부터 자유교육의 성격을 학문 영역이나 교과목 중심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홍성기 교수의 주장이 실제로 자유교육을 교수법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사실 필자는 로스블라트 교수가 말하는 “어떤 과목이든 리버럴한 방식으로 또는 리버럴하지 않은 방식으로 가르칠 수 있다”라는 주장이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교수법’에 따라 자유교육의 영역을 규정하려는 시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점은 로스블라트 교수가 제시한 논증을 재구성하면 쉽게 드러난다. 그에 따르면, 자유교육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 (1) 자유교육만이 보편적(또는 특수한) 존재론적, 도덕적 문제를 철저하게 탐색할 수 있다.

  • (2) 자유교육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또는 다른 삶과 관련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가장 중요한 질문에 집중할 수 있다.

  • (3) 자유교육은 의사결정 능력을 구축하는 지적이고 정서적 기초를 제공한다.

  • (4) 자유교육은 인간이 세계를 해석하거나 세계에 대한 포괄적인 견해를 갖기 위해 추구해온 수단이다.

  • (5) 결론적으로, 자유교육의 특징은 어떤 과목을 가르치고 배우는 방식, 그 과목이 제공되는 정신, 그리고 그러한 가르침과 배움으로부터 귀결되는 사고방식이다. (Rothblatt, 2003: 15)

오히려 로스블라트 교수가 자유교육이 제공되는 정신과 그러한 가르침과 배움이 학생들에게 가져다줄 변화 또한 강조하고 있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사실 로스블라트 교수가 말하는 교육과정의 이슈, 즉 자유교육에서 무슨 과목(또는 학문 분야)을 가르쳐야 하는가의 문제는 비단 자유교육이라는 넓은 범주에서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2) 자유학예의 한 분과 학문인 철학의 예를 들자면, 1980-90년대 미국 대학의 대부분의 철학과에서 데리다나 푸코의 저작은 철학으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영문과나 불문과에서 가르쳤다.3) 굳이 토머스 쿤이 주장한 과학 패러다임의 이데올로기적 측면4)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모든 학문에서 교육과정은 계속해서 변화하는 것이고, 시대적, 사회적, 정치적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교육과정의 변화는 역사적으로 빈번한 것이었기에 무엇을 가르치는지가 자유교육의 영역을 규정하는 기준이 되기 어렵다는 것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그러한 주장은 그리 새로운 것도 아니다. 윌리엄스 칼리지(Williams College)에서 가르쳤던 미국 철학자 존 윌리엄 밀러(John William Miller)는 다음과 같이 일갈한 바 있다.
자유교육은 주제를 통해 정의되지 않는다. 어떤 지식의 분야든 리버럴한(liberal) 방식 또는 리버럴하지 않은(non-liberal) 방식으로 배울 수 있다. 예를 들어, 역사는 도그마나 세뇌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 자유교육의 핵심 요소인 과학과 수학은 직업적으로 유용한 정보로 제공될 수 있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역사와 과학은 리버럴한 성격을 잃게 된다(Miller, 1943: 33).
어떤 지식의 분야든 리버럴한(liberal) 방식 또는 리버럴하지 않은(non-liberal) 방식으로 배울 수 있다는 밀러의 생각은 로스블라트 교수의 “어떤 과목이든 리버럴하게(liberally) 또는 리버럴하지 않게(illiberally) 가르칠 수 있다”는 주장과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 이 점에 대한 조금 더 구체적인 설명은 밀러의 생각에 대한 해설을 제시한 프랭크(Jeff Frank)에 의해 제공되고 있다. 프랭크는 리버럴아츠를 교육과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교육학, 법학, 경영학과 같은 분야는 자동적으로 자유교육에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질 것이고, 반대로 철학, 문학, 고전학은 자동적으로 적합한 것으로 여겨지겠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라고 한다. “그레이트 북스”를 예로 들자면, 그러한 책들이 새로운 사고에 영감을 주는 것은 맞지만, 어떤 책들을 읽지 않았다고 해서 자유교육을 받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단순히 책에 노출되는 것보다 어떤 방식으로 읽고 소화하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학문 분야들이 다른 분야보다 더 자유교육 친화적이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멤버십이 자동적으로 주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Frank, 2019: 41-43).
교과목이나 교육과정에 의해 자유교육의 성격을 규정하려는 시도에 대한 이러한 비판들은 오히려 오늘날 한국의 교육을 점검해보면 쉽게 수긍할만한 것들이다. 국가가 주도하는 한국 초중등 교육과정을 보면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대로의 자유교육 과목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의미의 자유교육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2015년에 개정된 교육과정에 따르면, 국어, 수학, 영어, 한국사, 사회, 과학, 체육, 예술 교과가 교과 필수 이수단위의 83%를 차지하고 있다(교육부, 2015: 14-15). 이들은 흔히 말하는 자유학예 교과들이다. 그러나 이들 교과가 자유교육의 정신에 따라 교육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문학을 배우지만 수능 ‘국어 영역’에서 문학 지문을 제시하고 정답을 찾게 하는 것이 “리버럴”하게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한 수능 ‘윤리와 사상’ 과목에서 단편적인 지식을 묻는 방식의 평가가 이루어질 때 교실에서 윤리적 판단과 도덕적 책무성을 담보하는 자유교육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을까? 국가가 교육과정을 설계할 때 어떤 원리와 정신에 따라서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교육 현장에서는 얼마든지 그러한 정신과 원리에 동떨어진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자유교육의 성격을 교과목이나 교육과정으로 규정하는 것은 기껏해야 절반만 진리라고 할 수 있다.

2.2. 실용적 자유교육

특정 학문 분야나 과목이 자유교육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밀러의 생각은 1940년대에 등장한 것이지만, 이러한 생각이 나오게 된 배경과 맥락은 19세기 후반 본격적으로 산업화가 진행된 미국에서 고등교육에서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의 문제가 중요한 이슈로 대두된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 이슈의 중요성은 허친스(Robert Maynard Hutchins)가 1936년 출간한 『미국의 고등고육』(Higher Learning in America)에 대한 듀이(John Dewey)의 짧은 서평에서 촉발된 날 선 공방과 이어진 논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5)
30세에 시카고 대학 총장이 되어 무려 22년간 재임했던 허친스는 대학의 존재 이유는 진리 추구 그 자체를 위한 교육을 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자유학예가 지닌 고유의 영역이 사회적, 산업적 요구에 의해 위협받는 상황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랜드 그랜트 대학들이 다수 생겨나면서 기존의 리버럴아츠 교과 위주로 이루어지던 대학의 교육과정에 직업 교과들이 스며들게 된 당시 상황에 허친스는 위기감을 느끼고 우려를 나타냈던 것이다.6) 결국 허친스는 직업교육과 전문교육으로부터 자유교육을 완전히 분리할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그러한 생각은 듀이에게는 마치 인간의 본성이 고정되고 불변한 것이어서 시공을 초월해서 동일한 것이고 교육이란 그러한 공통의 인간 본성의 요소들을 이끌어내는 것으로 보는 것으로 명백히 잘못된 견해일 뿐이다(Dewey, 1936).
『민주주의와 교육』(Democracy and Education)을 썼던 1910년대부터 “리버럴아츠칼리지의 문제점”(The Problem of the Liberal Arts College)을 쓴 1940년대에 이르기까지 듀이는 자유교육과 직업교육의 이분법을 극복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프래그머티즘 철학자로서 듀이는 고정된 본질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교육에 있어서도 역사적, 사회적, 경제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그 목적이나 가치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보았다. 그는 자유학예가 고대 그리스에서 생겨난 배경과 맥락은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여가로서의 삶’을 추구하던 계급이 노동에 의존하는 삶을 살았던 노예 계급과 분화되었던 것에 있으며, 그러한 계급적 분화가 사라진 세상에서 자유교육(혹은 여가로서의 삶을 위한 교육)과 직업교육(혹은 노동의 효율성을 위한 교육)을 구분하거나 분리해서 이해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보았다. 듀이에게 이처럼 교육사에 나타난 가장 뿌리 깊은 이원론적 대립은 두 영역의 상호융합, 즉 교육에서 가능한 한 중첩되는 부분이 많아지도록 주의를 기울임에 의해서 해소되어야 할 문제다. 전통적으로 직업적 효용성과 무관하게 여겨진 교과에 대해서도 노동의 효율성을 최대한 강화하는 방향으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고, 노동의 효율성을 목적으로 한 교육도 지성의 교화가 일어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Dewey, 1916: 283- 284; Dewey, 1944: 392).
듀이는 그의 프래그머티즘과 그에 따른 교육철학의 이론적 토대 위에서 고대 그리스의 교육 체제가 만들어지게 된 사회, 경제적 배경은 결국 역사적 우연성에 의한 것으로 많은 세월이 지나고 산업적 토대가 크게 변화한 오늘날 자유교육이 규정되는 방식이 그때와 같을 수 없다는 주장을 제시하였던 것이고, 로스블라트 교수 역시 역사적 고찰의 결과로서 자유교육을 교과목이나 교육과정에 의해 규정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들어 그러한 생각에 동의하는 흐름은 더 커지고 있으며, 이는 자유학예와 관련한 논의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벨로이트 칼리지(Beloit College) 총장을 지낸 페럴(Victor E. Farrell, Jr)은 리버럴아츠칼리지는 특정 지식이 아닌 배움(learning)과 앎(knowing)에 대한 태도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며, 따라서 잘 가르치기만 하면 학생들은 거의 모든 교과목 군에서라도-심지어 전문화된 교과목들로 뒤범벅된 교육에서조차도-배움에 대한 열정을 얻을 수 있다고 역설한다(Farrell, 2011: 150-151). 실제로 최고의 리버럴아츠칼리지 중의 하나인 스워츠모어 칼리지(Swarthmore College)에는 엔지니어링 학과가 있으며 학생들은 토목공학, 기계공학, 전자공학, 컴퓨터공학을 전공할 수 있다. 공학 전공은 스미스 칼리지(Smith College)와 데이빗슨 칼리지(Davidson College)에서도 학과 단위로 제공되고 있으며, 프랭클린앤마샬 칼리지(Franklin & Marshall College)에는 경영학과도 있다. 물론 이들 엔지니어링학과와 경영학과에서는 해당 전공에 부합하는 공학과 경영학 교과목들을 개설하지만, 직업교육 위주의 교육에 경도되지 않고 자유학예의 맥락에서 공학과 경영학을 강조한다.78
아울러 로스블라트 교수도 언급하고 있듯이 AAC&U의 2002년 보고서 『위대한 전망』(Greater Expectations)에서도 “자유교육은 일군의 지식이나 특정 과목들 또는 교육기관의 유형이라기보다는 교육철학”이라고 하면서 “자유교육의 철학은 특정 주제보다 교수 및 학습에 대한 접근 방식에 의존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아울러 21세기에 최상의 학부교육은 자유교육에 기초하게 될 것이라면서 두 가지 점에서 변화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하나는 자유교육은 변화하는 세상에서 최상의 실용적인 형태의 학습으로 정의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교육이 단지 과거에 그랬듯이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상대적으로 특권층의) 교육이 아니라 모두가 받을 수 있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AAC&U, 2002: 25).
자유교육에 대한 이러한 접근에서 직업 훈련과 무관한 분야를 자유교육의 대상으로 삼고 그렇지 않은 분야를 배제하는 이분법은 설 자리가 없다. 『위대한 전망』이 제시하는 아이디어는 실용적 자유교육(practical liberal education)인 것이다. 자유교육이 실용적인 이유는 모든 시민들에게 필요한 능력인 분석적 역량, 효과적 의사소통, 실천적 지성, 윤리적 판단, 사회적 책무 등을 발전시켜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역사적으로 자유교육은 사회봉사라는 대학의 주요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과정에서 사회의 요구에 따라 교육 내용이 변화해 왔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초기부터 종교 지도자나 정치 지도자라는 직업적 요구를 준비하도록 해주는 교육이었고, 교회와 연계된 대학, 흑인들을 위한 대학, 사관학교 등이 그러한 사례들이라는 것이다(AAC&U, 2002: 26). 이러한 주장은 로스블라트 교수가 자유교육의 정신을 언급할 때 제시한 내용과도 일치하며, 이 보고서가 개인의 입장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학부 교육에서 자유교육을 증진하는 것을 주요 미션으로 하는 기구인 AAC&U가 21세기의 자유교육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준비한 자료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의 대학에서는 애초에 서양과 같은 자유학예의 전통에 따른 자유교육이 제대로 시행된 적이 없었던 관계로 대학마다 엄밀한 원칙 없이 자의적으로 교양교육과정이 구성되어 내려온 경향이 있고, 2000년대 중반 한국교양교육학회가 설립되고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교양기초교육원이 설립되어 교양교육의 정상화 및 체계화를 추진하면서 전통적인 자유교육의 이념 또는 개념에 따라 직업교육이나 전문교육의 성격을 배제하는 교육과정에 의해 자유교육을 규정하는 것이 당연시되어왔다. 그러나 듀이의 철학적 통찰과 로스블라트의 역사적 고찰에 의한 관점은 결코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듀이의 관점을 계승한 나딩스(Nell Noddings)는 이미 대학이라는 교육기관이 대중적인 직업교육을 포기할 가능성이 없는 상황에서 과거에 규정했던 것과 같은 자유교육으로 되돌리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본다. 더구나 대학의 교과목들은 너무 전문화되었고 실질적인 삶의 문제들과 분리되었다. 따라서 교과목들을 되돌린다 해도 자유교육의 정신이 되살아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관점에서 나딩스는 교육과정이나 교육성과를 떠나 자유학예의 정신을 새롭게 함으로써 자유교육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새롭게 되살려야 할 자유교육의 정신이란 지혜의 추구, 좋은 삶에 대한 이해, 도덕적 품성의 발전, 심미적 체감이며, 어떤 과목을 가르치건 이러한 정신에 충실한 요소들이 교육 내용에 포함되도록 노력하자는 것이다(Noddings, 2013: 77, 80).

3. 자유교육의 역할

앞에서 보았듯이 자유학예와 자유교육의 성격 규정 및 그 멤버십과 관련하여 왜 20세기 초 듀이에서부터 최근의 일부 흐름에 이르기까지 교과목이나 교육과정만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아이디어가 꾸준히 나타나고 있는지 그 배경과 맥락을 살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사실 이 문제는 1절에서 요약한 로스블라트 교수의 주장(2)와도 관련되어 있다. 그의 주장(2)는 자유교육하면 떠올리는 역할과 성과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흔히 자유교육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특징들로 ①인성교육을 통한 인격형성, ②리더십 함양, ③비판적 사고 능력 함양, ④지적 폭넓음, ⑤일반교육으로서의 자유교육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 각각에 대해 로스블라트 교수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①먼저 인성교육에 대한 비판과 관련하여 로스블라트 교수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인성교육은 인격 형성(character formation, the molding of character)과 관련된 아이디어로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와 같은 소규모 공동체에서나 어울리는 교육으로 복잡한 현대 사회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자유교육의 기원이 되는 고대 그리스 교육에서는 정서와 지성, 몸과 마음 등 인격의 모든 부분을 조화롭게 통합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고 그런 전통이 낭만주의 문학이나 프로이트 심리학에도 남아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에서 고정되고 불변하는 질서는 없으며 사회 자체가 역동적이고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격 형성의 아이디어가 적용되거나 총체주의(holism)적인 교육적 이상이 적합한 세상이 아니라는 것이다(Rothblatt, 2003: 23-24).
이에 대해 홍성기 교수는 인성교육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에 대한 근거로 기숙형 대학에서 교수가 부모의 역할을 대신하면서 학생들을 훈육하는 형태의 인성교육은 오늘날 불가능하고 의미도 없는 것이지만, 가치판단은 사실판단에 근거해야 한다는 점과 교수들은 그러한 판단의 구분 및 선후관계에 대해서는 잘 가르칠 수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즉, 올바른 가치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학생들을 도울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인성교육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홍성기, 2021a: 104-105). 그는 인성교육이 ‘어떻게 삶을 살 것인지’와 관련된 물음을 다루고 있으며, 이는 ‘지혜로운 인간 양성’과도 연결된다는 점에서 가치의 영역을 다루는 것과 관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즉 ‘가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구별과 정당화의 문제를 다루면서 인문학을 통한 인성교육이 가능하다는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홍성기, 2021b: 3).
물론 그러한 측면은 당연히 대학교육이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홍성기 교수가 논의하고 있는 문제는 ‘가치교육’이 그 중심에 있다는 점에서 로스블라트 교수가 비판적으로 조망하고 있는 인성교육이라기보다는 시민교육 또는 자유교육의 한 분야로서 인문학의 영역에서 다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즉 인성교육을 인격형성 같은 개념과 동일시하지 않는다면 인성교육의 넓은 범주에서 고려할 수는 있겠지만, 여전히 우리는 인격형성이나 도야의 관점에서 인성교육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로스블라트 교수의 견해는 좀 더 전면적인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왜냐하면 로스블라트 교수의 논의는 부분적으로는 시민교육이나 자기계발의 아이디어와도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훌륭한 리더를 선출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도 리더십 교육이 필요하다는 홍성기 교수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복잡한 현대사회에 걸맞은 인성교육은 필요도 하고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연구를 소홀히 할 수 없으니 바쁘고, 부모 역할을 대신하기에는 어느 누구도 바라지 않기 때문에 인성교육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학생들이 대학에 오는 이유 중에 로스블라트 교수가 비판하고 있는 인성교육 (또는 리더십교육, 비판적 사고 능력, 폭넓은 교육)의 아이템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현대사회가 기능적이고 기술적으로 급속하게 발전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학생들이 학교에 가는 이유 중에 여전히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는 아이템이 있으며 대학 진학의 이유에서도 특별히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강의실 밖 캠퍼스에서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클래스메이트와 교류하고 함께 활동하는 것에서 결코 우리는 학생들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통적인 자유교육의 주제들은 강의실 안팎에서 독서건 토론이건 대학 간 교류건 다양한 활동을 통해 그러한 교육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즉, 현대사회가 너무 분화되고 복잡해져서 학교에서 교수가 더 이상 유사 부모의 역할을 해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 인성교육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②홍성기 교수는 로스블라트 교수가 비판하고 있는 리더십 교육과 비판적 사고 능력 역시 리더가 되기 위해서, 그리고 탁월한 비판적 사고 능력을 소유할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에서 자유롭다면 얼마든지 가능하고 필요하다는 견해를 제시한다(홍성기, 2021a: 106). 그러한 홍성기 교수의 진단과 달리 엄밀히 말하면 로스블라트 교수가 리더십 교육과 비판적 사고 능력 함양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주장은 리더십 교육과 비판적 사고 능력이 자유교육을 통해 함양된다는 생각은 그리 자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③그는 특히 비판적 사고는 연구중심대학의 탄생이 크게 기여한 부분이라고 보고 있다. 역사적으로 비판적 사고를 바탕으로 하여 권위에 도전하고 새로운 관점과 생각을 자유롭게 제시하는 분위기는 계몽주의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오히려 비판적 사고와 방법은 독일의 연구중심대학에서 등장한 것이고, 따라서 요즘은 자유교육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거론되는 덕목인 비판적 사고는 특수화를 강조하고 일반교육 발전을 저해한다고 여겨지는 연구중심대학의 성과로부터 자유교육이 수혜를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Rothblatt, 2003: 37).
이처럼 로스블라트 교수는 비판적 사고를 중요한 역량으로 생각하게 된 것 역시 유럽에서는 19세기 독일, 미국에서는 20세기나 되어서야 나타나게 되는 현상이며 그마저도 자유교육과 대척점에 있다고 인식되는 연구중심대학의 성과라는 점을 부각하면서 비판적 사고가 자유교육의 당연한 성과라는 생각에 대해 재검토할 여지를 제공한다. 이는 ‘비판적 사고’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겠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비판적 사고를 의사소통 능력의 일부로 이해한다면 로스블라트 교수의 역사적 고찰에 대한 비판적 대안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비판적 사고를 로스블라트 교수의 견해처럼 사회의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일종의 도전적 사고와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면, 귀족 문화에서 기존의 지배 가치를 지탱하는 역할을 자유교육이 담당했다는 측면에서 비판적 사고를 자유교육의 성과로 볼 여지는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비판적 사고가 말하기 능력, 글쓰기 능력과 뗄 수 없는 유기적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비판적 사고는 고대 그리스의 이소크라테스(Isocrates)에서부터 이미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겨졌음이 틀림없으며 자유교육의 중요한 한 축이었음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9) 게다가 우리는 자유교육에서 제공하는 비판적 사고 교육의 성과가 얼마만큼 효과성을 지니는지 평가해 봄으로써 비판적 사고가 자유교육의 성과의 목록에 정당하게 포함될 수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④자유교육이 폭넓은 교육을 제공한다는 인식, 그리고 ⑤배분이수제로 대표되는 일반교육(general education)이 그런 폭넓음의 사례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로스블라트 교수의 비판적 시각에 대해 홍성기 교수는 부작용과 불필요성을 혼동한 것 같다고 진단한다(홍성기, 2021a: 106). 즉 배분이수제가 노출하는 문제들은 교육과정 구성에서 오는 부작용이므로 부작용을 줄이기 위한 대안과 개선 노력이 어느 정도 폭넓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로스블라트 교수의 논의의 초점은 배분이수제의 필요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교양교육에서 흔히 운영하는 배분이수제가 자유교육의 대안 또는 대체제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 이 문제 역시 어제오늘 제기된 문제는 아니다. 그레이트 북스를 통한 자유교육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앨런 블룸(Allan Bloom)의 다음과 같은 진단은 로스블라트 교수의 문제의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에서의 기초과목을 골고루 듣게 하는 것, 이것은 그야말로 일반교육이다. 폭넓음과 열려있음을 강조하고, 다양한 분야에 대해서 조금씩 알게 되지만, 해당 분야의 전문가보다는 아래에 있다. (이것은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의 전공 선택지와 다른 분야에 대해서 알게 해준다. 무엇을 전공해야 할지 모르는 학생들에게는 유용한 가이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자유교육이 아니다. 이것은 그저 수준 높은 제너럴리즘은 없다는 것을 가르쳐줄 뿐이며, 진짜를 위한 예비과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줄 뿐이다(Bloom, 1989: 343).
그러나 잘못 가고 있는 일반교육(general education) 또는 배분이수제 대신 그레이트 북스를 통해서 진정한 자유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블룸의 관점을 로스블라트 교수(또는 듀이)가 수용할지는 의문이다. 아마도 그레이트 북스가 자유교육의 홀마크여야 한다는 입장은 자유교육의 범주에 드는 특정 과목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과 양립하기 어려울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10) 물론 한국의 대학처럼 자유교육이든 일반교육이든 그 토대가 빈약한 현실에서는 배분이수제라도 제대로 해보자는 것도 의미 있는 도전일 수 있다. 자유교육과 교양교육, 일반교육의 개념 정리 역시 어려운 과제인 현실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4. 자유교육의 투입과 산출

자유교육에 대해서 논의하면서 로스블라트 교수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제 중의 하나는 역사적으로 자유교육이 직업 준비를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전문교육이나 직업교육과는 달리 교육수혜자에게 특정 노동시장에 대한 준비를 갖춰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투입’(input)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어도 그 ‘산출’(output)이 ‘투입’과 동등하게 될 것이라고는 결코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Rothblatt, 2021: 143-144). 전통적으로 자유교육이 배워서 바로 써먹는 성격의 것은 아니었으므로 이러한 견해는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홍성기 교수는 자유교육에서 투입-산출 관계가 느슨한 이유를 자유교육의 핵심이 그 쓰임이 아직 정해지거나 확정되지 않은 교육이기 때문이라고 본다(홍성기, 2021a: 110).
자유교육에서 투입과 산출의 느슨한 관계 자체에 대해서는 로스블라트 교수와 홍성기 교수 모두 공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관계를 통해서 자유교육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고 설명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입장의 차이가 존재한다. 역사적으로 자유교육이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계급을 위한 것이었고 그러한 경향이 이어져 직업 준비과정이 아닌 것이었기 때문에, 직접적이고 단기적인 학습성과에 대해 논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어떤 쓰임을 정해놓고 이루어진 교육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교육 비용과 투자에 대한 단기간의 대가를 요구하는 학부모와 고등교육의 이해당사자들의 사회적, 심리적 압력을 고려하면, 그러한 관점은 매우 공허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는 자유교육 무용론으로 이어져 자유교육의 위기를 불러오게 될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부분이 로스블라트 교수의 관점에서는 고려사항이 된 것처럼 보인다.
홍성기 교수는 자유교육의 산출에 대한 대응으로 ‘쓰임이 확정되지 않은 것’에 대해 ‘인간 조건’ 또는 ‘인간의 삶의 조건’이라는 제한을 둠으로써 자유교육에서 직업교육과 전문교육을 걸러낼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하고 있다(홍성기, 2021a: 110). 반면에 로스블라트 교수는 전문교육과 직업교육을 걸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유교육과 직업교육이 어떻게 교차하는지를 고려해야 하고 그러한 고민의 결과로 직업교육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의 기초로 ‘리빙 아츠’(the living arts)라는 개념을 ‘리버럴아츠’를 대체할 개념으로 제시한다. 그가 말하는 리빙 아츠는 현대문명에서 개인이 일상생활에서 기능하는데 필수불가결한 것의 교육을 뜻한다(Rothblatt, 2003: 13-14). 그는 혼란스런 용어인 ‘리버럴아츠’(liberal arts), ‘자유교육’(liberal education), ‘리버럴아츠앤사이언스’(liberal arts and sciences), ‘인문학’(humanities) 등을 폐기하고 ‘리빙 아츠’로 대체할 것을 주장한다. 리빙 아츠는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인간 경험을 질서 있게 하는데 필요한 실용적이며 인간 탐구와 스킬의 모든 가능한 형태를 포괄하는 것이라고 한다(Rothblatt, 2003: 16).
필자는 이러한 로브블라트 교수의 새로운 용어가 기존의 리버럴아츠나 자유교육보다 얼마나 더 명료하고 직관적으로 이해되어서 기존의 혼란을 해소해 주기에 충분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자유교육에 대한 과목 중심의 규정에서 벗어났을 때 취할 수 있는 방향으로 보인다. 변화하는 복잡한 세계에서 ‘살아가기’ 혹은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리버럴한 방식으로 교육하는 것을 자유교육의 지향점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업 세계로 진출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며, 따라서 누구라도 취업에 대한 우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또한 직업 세계에 진출해서도 문제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살아가는 기술(living arts)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직업 교과 역시 리버럴한 방식으로 교육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향성은 앞에서 보았듯이 듀이가 자유교육을 바라보는 관점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듀이의 기본 입장이 자유교육과 직업교육의 이분법을 해소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로스블라트 교수가 말하듯 직업 교과를 리버럴하게 가르치는 것 역시 그러한 입장에서 긍정적으로 수용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 성공적일 수 있다면, 어떻게 보면 홍성기 교수가 지적하고 있는 취업에서 학부 전공과 직무 간의 낮은 연관성을 오히려 개선하는 메카니즘으로 작동할 수도 있을 것이다(홍성기, 2021a: 107-108). 따라서 홍성기 교수의 ‘삶의 조건’ 개념이 어느 정도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로스블라트 교수의 ‘리빙 아츠’ 개념에 대해 적절하게 비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리빙 아츠’ 개념은 자유교육 안에서 직업교육을 수용하겠다는 것인 반면, ‘삶의 조건’ 개념은 직업교육과 전문교육을 배제하는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5. 나가는 말: 훈련이 아닌 교육을 위하여

로스블라트 교수가 자유교육에서 산출이 투입과 동등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사실 자유교육의 특징일 뿐 아니라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교육이라고 부르는 것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러한 특징은 20세기 초 미국 성인교육 분야에서 영향력 있는 사상가였던 마틴(Everett Dean Martin)의 통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교육을 입력에 의한 지식의 습득이나 축적된 정보의 양으로 이해하는 관점은 잘못된 것으로 본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자유교육의 교과라고 여겨져 온 것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교육하느냐에 따라 자유교육은커녕 진정한 의미의 교육이 아닌 것이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배운다는 것은 문화적이건 실용적이건 무엇인가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고 암기하는 것인가? 아니면 배운다는 것은 인간의 삶의 가능성으로부터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 내도록 노력하게 되는 그런 많은 방식들에 대한 폭넓은 견해와 공감적 이해를 갖추어서 누군가의 미래 경험의 질을 변화하게 하고 그가 그저 효율적일 뿐 아니라 지혜롭게 행동할 수 있게 해주는 어떤 종류든 진리를 추구하는 모험인가? 만일 이 뒤의 질문이 옳다면, 진정한 질문은 우리가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왜, 그리고 어떤 목적에서 배우는가여야 한다. 배운다는 것은 휴머니즘이라는 정신적 자유에서의 모험인가, 아니면 동물 훈련의 반복된 과정인가? 문화적 지식과 실용적 지식 모두 동물 훈련으로 전락할 수 있으며, 대체로는 그렇다(Martin, 1926: 27).
동물에게 반복된 훈련을 통해서 무엇을 할 수 있게 한다면 투입과 산출의 관계는 직접적이고 명확한 것이겠지만, 마틴은 그것을 교육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교육’이라고 말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는 허친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 자체로 좋은 것을 추구하는 (문화적) 교육과 그저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실용적) 교육을 구분한다. 그러나 그 자체로 좋은 것을 추구하는 교육을 자유교육과 동일시했던 허친스와 달리 마틴은 두 교육 모두 진정한 의미의 자유교육이 되지 못하고 동물 훈련으로 전락할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문화적 교육이 진정한 교육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실용적 교육을 저급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있고, 반대로 실용적 교육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문화적 교육을 현실 세상으로부터의 도피 혹은 사치에 불과하다고 깎아내리곤 한다. 그러나 마틴은 이 두 편 모두를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들은 무엇을 가르치는가에 집중하는 나머지 교육을 단지 지식의 습득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 교육받은 사람은, 그것이 호라티우스의 시를 강의하는 것이거나 기차 운전이거나 소송 업무거나 배관을 고치는 것이거나, 그저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교육받은 사람은 또한 그가 하는 일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이며, 어떤 일은 해서는 안 되고 하려고 하지도 않는 사람이다. 그는 일련의 가치를 배워서 알게 된 사람이다. 그는 분명한 입장을 지니며, 그것은 그 자신의 생각이다. 그는 그가 하는 행동의 이유를 안다. (중략) 그러한 사람은 자유교육을 배운 것이며, 그가 철학을 배웠건 공학을 배웠건 큰 차이가 없다. 그는 기계적으로 행동하는 사람(automaton)에서 생각하는 존재로 변화한 것이다(Martin, 1926: 28).
즉 전통적으로 자유학예의 교과라고 여겼던 학문도 암기 위주로 가르치거나 왜 배우는지의 의미를 모른 채 가치를 찾을 수 없는 방식으로 배운다면 결국 동물 훈련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반대로 직업교육의 대상이라고 여겼던 공학도 단지 무엇을 할 수 있게 되는 효율성을 넘어서 가치와 의미의 차원을 다루는 방식으로 가르친다면 자유교육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틴은 중세 스콜라 교육은 암기를 통해 학생의 사고를 고정된 틀에 집어넣었다는 점에서 동물 훈련이었으며, 근대 이후의 교육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Martin, 1926: 32-36). 자신의 영역 밖에 대해서 무지하고 호기심마저 결여한다면, 그가 철학자건 과학자건 진정으로 자유교육을 받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지적은 20세기의 학문이 너무 전문적이고 깊이 있는 내용을 다루게 되면서 실제 삶의 문제와는 동떨어지게 되었다는 듀이의 문제의식과 일맥상통한다.11)
마틴이 활동하던 시대로부터 100년 가까이 흐른 오늘날 대학교육에서 실용성과 효율성에 대한 요구는 더 증대되었고 학문의 전문화 역시 크게 심화되었다. 그렇지만 인간, 그리고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추구함으로써 나와 나의 삶을 더 나은 것으로 변화하도록 하는 것이 자유교육의 정신이라는 점에 여전히 동의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유교육에서 투입-산출의 관계에 대해 좀 더 분명한 입장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즉, 투입-산출 관계가 정직하고 즉각적이라면, 차라리 그러한 관계는 인간이 아니라 기계에나 적용 가능한 관계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낫다. 자유교육의 성격에 대해서 고민할 때, 우리는 인간의 교육을 염두에 둔 것이지 인간이 아닌 무엇을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님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자유교육의 영역이 어떻게 규정되어 왔건 간에 우리는 인간을 교육한다고 말하지 기계에 대해서는 교육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설사 인공지능과 관련해서 머신러닝이나 딥러닝이라는 표현은 써도 인공지능을 교육시키거나 깊이 교육시킨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처럼 투입-산출의 정직하고 직접적인 관계는 기계에나 적합한 표현이라고 말하는 것이 맞으며, 따라서 대학 교육에서 즉각적인 효과를 나타내는 것에 대해 우리가 언제부터 교육이라고 잘못 말하기 시작했는지 반성(또는 적어도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점은 동물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반려견에 대해서 배변 훈련을 시킨다고 말하지 배변 교육을 시킨다고 말하지 않는다. 만약 누군가가 배변 교육이라는 표현을 고집한다면, 우리는 반려견을 인간의 제일 친한 친구로 우대해준다고 생각하기에 앞서 훈련을 교육으로 착각하여 인간을 동물 수준으로 격하시킨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되돌아봐야 한다.
이제 우리는 투입-산출의 관계가 직접적이고 명확한 ‘훈련’과 그렇지 않은 ‘교육’을 구분하고, 대학의 교육과정에 어떤 과목이 포함되든 훈련은 배제하고 교육에 집중하는 데 신경써야 할 것이다. 물론 전통적 리버럴아츠 교과조차도 때로는 암기과목처럼 여겨지는 오늘날 한국의 현실에서 미케니컬아츠 교과인 경영학이나 공학이 쉽게 자유교육의 성격을 띠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하지만 전통적인 리버럴아츠 교과부터 자유교육의 정신을 새롭게 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많은 시간과 노력을 감수하더라도 그러한 정신이 직업교과에도 적용될 수만 있다면, 자유교육은 시대와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응하면서 그 영역과 역할을 확보하고 지속 가능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교육이 결국은 인간의 삶을 위한 것이라고 할 때, 교육에는 지름길이 없다는 마틴의 말을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교육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유일한 시간 낭비는 그 시간을 아끼려고 쓰는 시간이다(Martin, 1926: 17).

Notes

1) 한국교양기초교육원의 대학교양교육컨설팅이 10년 가까이 진행되면서 교양교육과정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여전히 대학에서 “경영학원론”과 같은 과목이 왜 교양과목이 아니냐고 항변하는 교수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한국교양기초교육원이 제시하는 교양교육의 의미에 대해서는 “대학 교양기초교육의 표준 모델”을 참고할 것. www.konige.kr/data/general_edu.php

2) 사실 로스블라트 교수에 따르면, 교육과정의 우위를 다투는 문제는 대학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Rothblatt, 2003: 12).

3) 흥미롭게도 당시 미국 대학가의 서점에서 그들의 저작들은 버젓이 철학 섹션에 진열되어 있었다.

4) 여기에는 특정 분과 과학의 교육과정이나 교과서에 어떤 내용이 포함되어야 할 것인지의 여부도 해당된다.

5) 이 논쟁과 관련한 간략한 소개는 Heldke(2005)를 참고할 것. 논쟁의 발단이 된 듀이의 서평과 허친스의 반론은 Dewey(1936), Dewey(1937), Hutchins(1937)를 각각 볼 것.

6) 이러한 우려는 다음과 같은 언급에 의해 잘 드러나고 있다. “대학에서 지식 자체를 위한 지식의 추구는 빠르게 약화되고 있으며, 아마도 곧 소멸될지도 모른다”(Hutchins, 1936: 36).

7) 물론 이와 관련한 이슈는 현재진행형이다. 자유교육에 대한 허친스의 순혈주의적 관점을 고수하려는 경향도 여전히 존재하는데, 스미스 칼리지에 공학 전공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된 한 졸업생이 더 이상 모교에 기부금을 내지 않기로 했다는 에피소드는 그런 경향을 잘 보여준다(Heldke, 2005). 반면에 2016년에 개정된 하버드 칼리지의 교양교육 프로그램은 그러한 순혈주의로부터 탈피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새로운 이수요건에 따르면, 4개 영역의 교양교과 외에 배분이수로 3개의 학문 분야에서 학과 전공을 들어야 하는데 그 중 1개는 (기초과학이 아닌) 공학과 응용과학 전공과목 중에서 필수로 이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즉 전통적으로 리버럴아츠로 여겨지지 않았던 응용수학, 생명공학, 컴퓨터과학, 전기공학, 환경공학, 기계공학 등의 학과에서 개설하는 전공과목이 배분이수의 범위 안에 들어온 것이다(Harvard University, 2016). 또한 대부분의 교육 프로그램이 STEM 분야로 구성되어있는 하비 머드 칼리지(Harvey Mudd College)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리버럴아츠칼리지로 규정하고 있는 점도 참고할만하다.

8) 경영학을 어떻게 리버럴한 방식으로 교육할 수 있는가의 문제와 관련하여 Nesteruk(2008)을 참고할만하다.

9) ‘자유교육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이소크라테스는 자신의 교육을 ‘말(logos)의 탁월함’에 도달하기 위한 것으로 규정했는데, 이때 ‘말의 탁월함’은 웅변술이나 기계적 의미의 수사학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기와 글쓰기를 통해 아테네의 공공의 영역에서 실천적 지혜와 도덕적 인간이 되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었고, 그 점에서 오늘날 말하는 비판적 사고의 요소가 작동하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자세한 논의는 박병철(2021)을 참고할 것.

10) 자유교육이 특정 과목이나 학문적 주제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는 관점에서는 그레이트 북스나 고전만이 자유교육의 주요 텍스트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 책은 새로운 사고를 자극할 수 있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지 자유교육을 위해서 누군가 반드시 읽어야 할 아이템인 것은 아니다. 아무리 훌륭한 책이라도 배우는 과정에 있어서 어떠한 영감을 주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한 논의는 Frank(2019), Chapter 3을 볼 것.

11) 교육의 문제에 대한 듀이와 마틴의 관련성에 관해서는 Day and Harbour(2013)를 참고할 것. 듀이의 영향을 받은 로티(Richard Rorty)는 가다머(Hans-Georg Gadamer)가 사용한 ‘Bildung’ 개념을 영어의 ‘edification’으로 번역하면서 우리가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말하고, 더 많이 쓸수록 다른 사람이 된다는 의미로 사용한다. 이를 자유교육의 관점에서 재구성하자면, 우리는 자유교육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리메이크”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이나 칸트의 저작을 읽는다고 자동적으로 자유교육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책을 읽고 어떤 과목을 학습하건 자신을 리메이크 해준다면 그것이 바로 ‘교화’(edification)인 것이고 자유교육인 것이다(Rorty,1979: 359-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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