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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General Edu > Volume 14(3); 2020 > Article
동어반복의 오류를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초록

많은 논리학 또는 비판적 사고 교과서에서 전제와 결론이 동일한 명제로 이루어진 논증은 동어반복의 오류로 분류된다. 그러나 전제와 결론이 동일한 논증은 또한 연역적으로 타당한 논증으로도 분류된다. 본 논문의 목적은 교육 현장에서 이러한 두 가르침 사이에 나타나는 액면상의 충돌로 혼란을 느끼는 학생들에게 제공할 가장 바람직한 답변의 모델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자는 우리가 “동어반복의 오류”라고 칭하는 논증의 논리적 구조를 분석하고, 그것이 실제로는 몇 가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읽힐 수 있음을 보일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경우에서 동어반복의 오류가 발생하는 혹은 발생하지 않는 이유를 서술할 것이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중간 주장들을 뒷받침하기 위해 관련된 철학적 논의들을 이에 적용할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제공할 가장 적절한 답변의 모델을 세 단계로 나누어 정리할 것이다.

Abstract

Most textbooks concerning logic or critical thinking teach that an argument of which the premise and the conclusion are the same in contents a type of logic known as the ‘fallacy of repetition’. But on the other hand, those arguments are classified into a deductively valid inferences too. In this paper, I will search for an educationally proper answer to this apparent conflict. For this purpose, first I will analyse the logical construction of the arguments that we casually call “fallacies of repetition”, and then I will show that the arguments which fall into that category can in fact be read in several different ways. From this, I will draw out the reason why a fallacy of repetition arises, or doesn’t arise, in each case. Also, I will cite a few philosophical insights in order to justify some assumptions that are applied for my consideration. Finally I will propose the most proper model of answer in three steps for the students questioning the problem this paper discusses.

1. 동어반복의 오류와 연역적 타당성

교육 현장에서 많이 사용하는 교양 논리 교재들은 대체로 좋은 연역논증이 되기 위한 기준으로 타당성과 건전성을 제시한다.1) 연역논증이 타당하다는 것은 만약 전제가 모두 참이라면 결론이 반드시 참임이 보장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연역논증이 건전하다는 것은 타당할 뿐만 아니라 그 전제들이 사실관계에 비추어 모두 실제로 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2) 건전한 연역논증의 결론은 타당성과 건전성의 정의에 따라 실제로도 참임이 보장되기 때문에 결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제시한다는 논증 본래의 목적이라는 측면에서 평가할 때 좋은 연역논증으로 분류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또한 타당성이 좋은 연역논증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라는 것에 관해서도 재론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이러한 가르침을 강의 현장에서 학생들에게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이다. 예를 들어 다음의 [논증 1]은 타당할 뿐만 아니라 건전하기도 하다. 하지만 학생들은 [논증 1]과 같은 연역논증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 종종 혼란을 겪는다.
  • [논증 1]

  • 한국의 수도는 서울이다.

  • 따라서 한국의 수도는 서울이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학생들이 혼란을 겪는 연역논증은 다음과 같은 도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기호 “A”는 임의의 명제를 나타낸다.)
  • [도식 1]

  • A ⊢ A

[도식 1]을 따르는 논증은 비형식적 오류의 하나인 순환논증의 오류, 특히 그 가운데서도 동어반복의 오류 즉 전제와 결론이 사실상 같은 주장인 오류에 해당한다. 그래서 [논증 1]은 연역적으로 타당할 뿐만 아니라 전제가 실제로 참인 건전한 논증이지만, 동시에 동어반복의 오류를 범하는 논증이기도 하다. 학생들의 의문은 바로 이러한 표면상의 충돌에서 시작한다.
물론 이 질문에 대한 교과서적인 대답은 이미 명확하게 주어져 있다. 그 대답이란, [논증 1]과 같은 경우는 형식논리학과 비판적 사고 사이의 간극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것이다. [도식 1]과 같은 형식을 따르는 연역논증이 진리-보존적(truth-preservative)이므로 형식논리의 관점에서 볼 때 타당한 논증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비판적 사고의 시각에서 평가하면 위 논증은 “한국의 수도는 서울이다.”라는 주장에 대한 합당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으므로 좋은 논증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답변을 아울러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답변]

  • A1: [도식 1]은 연역적으로 타당한 논증 형식이다.

  • A2: 그러나 [논증 1]과 같은 논증은 결론을 받아들일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논증이 아니므로 나쁜 논증이다.

  • A3: 따라서 연역적으로 타당한 논증 형식이라고 해서 모두 좋은 논증은 아니다.3)

하지만 교육 현장에서 논리적 사고 또는 비판적 사고를 강의하고 있는 교수들이라면 공감하겠지만, 교수가 위와 같은 답변을 제시했을 때 학생들은 종종 이러한 답변을 임시변통에 불과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비판적 사고의 중심적인 구성 요소는 논증의 평가이다. 그리고 논증 가운데서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사람은 모두 죽는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와 같이 타당한 연역논증 형식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를 설명할 때는, 비록 연역논증의 타당성이라는 개념은 비판적 사고에서는 직접적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진리-보존성을 중심으로 한 설명이 학생들에게 제공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를테면 소크라테스가 사람이라는 것이 참이고, 사람들이 모두 죽는다는 것이 참이라면, 소크라테스가 죽는다는 것은 결코 거짓이 될 수 없다는 식의 설명이다. 그런데 이처럼 진리-보존성이 연역적 타당성의 핵심이라면, [도식 1]의 사례에 해당하는 모든 논증들도 그와 똑같은 뜻에서 명백히 진리-보존적이며 따라서 연역적으로 타당하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논증을 평가하는 동일한 기준이 논리학의 맥락과 비판적 사고의 맥락에서 임의적, 선별적으로 호출되는 것 같은 혼란을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해, 학생들의 시각에서는 똑같이 타당한 연역논증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논증은 좋은 논증으로 어떤 논증은 나쁜 논증으로 뚜렷한 기준 없이 구분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위의 [답변]이 교육 현장에서 학생들로부터 불만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비판적 사고의 맥락에서조차도 연역적 타당성이 좋은 논증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적용되는 분명한 사례들이 풍부하다는 사실에도 기인한다. 그럼에도 명백히 연역적으로 타당한 논증 형식인 [도식 1]을 따르는 논증들을 특별히 ‘동어반복의 오류’라는 이름을 붙여서 배제해야 하는 이유를 위의 [답변]으로는 학생들이 납득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연역적으로 타당하다는 면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현실 속의 논증 평가에서 우리가 [도식 1]을 따르는 논증들을 예를 들면 다음의 [도식 2]와 [도식 3]을 따르는 연역논증들과 구태여 다르게 취급해야 하는 까닭을 학생들은 좀처럼 납득하지 못하는 것이다.
  • [도식 2]

  • A∧B ⊢ A

  • [도식 3]

  • A ⊢ A∨B

[도식 2]와 [도식 3]을 따르는 논증은 [도식 1]의 사례들과는 달리 [답변]으로부터 자유로울까? 자유로우려면, [답변]이 말하듯이 두 도식을 따르는 논증들은 결론을 받아들일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가령 “철수는 학생이며 철수는 남자이다.”는 “철수는 학생이다.”를 받아들일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진술로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결론에 없는 연언지가 전제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만을 제외하면 [도식 1]과 [도식 2]는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도식 2]는 이미 타당한 연역논증인 [도식 1]에 전제 B를 더 추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연역논증의 타당성은 단조적(monotonic)이므로 전제 B의 추가는 원래의 논증의 타당성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다시 말해, [도식 1]을 따르는 연역논증이 동어반복의 오류라면, 그와 똑같은 이유에서 [도식 2]를 따르는 논증도 동어반복의 오류가 되는 것이다. 이는 [도식 3]도 마찬가지이다. [도식 3]은 다음과 같은 타당한 동어반복 논증 도식인 다음의 [도식 4]에 전제 ~B를 추가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은 ‘아니다’를 의미한다.)
  • [도식 4]

  • A∨B ⊢ A∨B

[도식 2]와 [도식 3] 뿐만 아니라 형식적으로 타당한 모든 연역논증은 본질적으로 보존적(conservative) 추론이라는, 즉 결론의 내용을 전제의 내용이 포함한다는 특징을 생각하면, 모든 타당한 연역논증은 동어반복의 오류라는, 받아들일 수 없는 귀결에 도달하고 만다. 필자를 포함한 그 누구도 이 귀결을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전제와 결론에 동일한 주장 내용이 포함된 타당한 연역논증과 우리가 동어반복의 오류로 분류하는 나쁜 논증 사이에 어떤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가를 어떻게 학생들에게 명료하게 정리하여 전달할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지금까지의 서술은 교양 교육 현장에서 동어반복의 오류에 관해 학생들이 당혹감을 느끼는 지점에 대한 것이었다. 이어지는 2절에서 필자는 학생들의 의문에 대한 만족스러운 답변의 모델을 제안해 보고자 한다.

2. 답변의 모색

우리가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사항은, [도식 1]은 다음의 서로 구별되는 두 일상 언어 논증 가운데 어느 것을 나타내는 도식인가의 질문이다.
  • [논증 2]

  • 만약 A라면, 그러면 A이다.

  • [논증 3]

  • A이다. 왜냐하면 A이기 때문이다.

[논증 3]에서의 표현 “왜냐하면”은 “그 근거는 …이다.”와 같은 뜻을 나타낸다.4) 그래서 [논증 3]은 “A이다. 따라서 A이다.”로 표현하더라도 본질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 [논증 2]와 [논증 3]은 논증을 제시하는 화자가 논의 맥락 안에 A가 참인 모형(model)과 거짓인 모형 모두를 포괄하는지 아니면 A가 참인 모형만을 포괄하는지의 지점에서 차이를 지닌다. 이를 다시 일상적인 어법으로 바꾸어 말하면, [논증 2]를 제시하는 사람은 전제 A가 참이라는 것을 선행 가정하지 않지만 [논증 3]을 제시하는 사람은 전제 A의 참을 선행 가정하고 있다. 따라서 [도식 1]을 일상 언어 논증으로 옮긴 것은 [논증 3]이 아닌 [논증 2]가 적절하다. 왜냐하면 [도식 1]은 임의의 모형에 대해서, A가 참인 모든 모형에서 A가 참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도식이기 때문이다. [도식 1]에 해당하는 것은 [논증 3]가 아닌 [논증 2]라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기 위해, 필자는 [논증 3]을 “A이다. 따라서 A이다.”가 아닌 위와 같은 표현으로 나타내는 것을 선호한다. [논증 3]을 “A이다. 따라서 A이다.”로 표현하면, 이 표현만으로는 논증을 제시하는 사람이 전제 A의 참을 선행 가정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분명하게 판별할 수 없기에 우리의 논의를 불필요하게 혼란스럽게 만들 우려가 있다.
실제 대화의 맥락 속에서 전제와 결론이 동일한 주장 내용을 포함하는 논증을 제시한 화자가 [논증 2]와 [논증 3] 가운데 어느 쪽을 제시하려 의도했는가를 일률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며, 화자의 명시적 시인과 대화 맥락을 포함한 많은 유관한 요소들을 총체적으로 고려해서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불분명함은 동어반복에 관한 문제에만 국한되지 아니다. 예를 들어 선우환은 동어반복의 오류를 포함하는 보다 넓은 개념인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가 왜 오류인지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그 논증이 제시되는 맥락을 포함하여 논증의 구조, 그리고 논증의 결론과 그 근거 사이의 ‘가까움’ 등 다층적인 요소들을 모두 고려해야 하며, 그 중 어느 하나만을 고려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음을 지적한 바 있다.5) 주지하듯이 이와 같은 맥락 의존성은 모든 비형식적 오류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서 다음의 [논증 4]가 인신공격의 오류에 해당하는지 아니면 정당한 귀납 논증으로 볼 수 있는지는 갑 박사에 관한 사실관계 뿐 아니라 이 논증을 주고받는 대화의 맥락까지 함께 고려하여 판단해야 한다. 논증을 제시하는 사람이 [논증 2]와 [논증 3] 중 어느 쪽을 의도했는지 또한 그와 비슷하게 다층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 [논증 4]

  • 시사평론가인 갑 박사가 내놓은 선거 결과 예측은 신뢰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갑 박사는 지금까지 선거 결과를 비슷하게나마 예측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주장은 두 가지이다. 첫째, [논증 2]는 명백히 연역논증이지만 [논증 3]은 실제로는 연역논증이 아니며 따라서 타당성을 거론할 이유도 없다. 둘째, 동어반복의 오류에 해당할 수 있는 논증은 [논증 2]가 아닌 [논증 3]이다. 다만 [논증 3]과 같은 겉보기 꼴을 지닌 논증이라고 해서 모두 동어반복의 오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첫 번째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논증 3]이 왜 연역논증이 될 수 없는지를 보여야 한다. 연역논증과 귀납논증을 구분하는 기준으로는, 국내 연구자들 사이의 활발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지만, 크게는 의도 기준과 실현 기준으로 분류된다.6) 홍지호와 여영서에 의하면, 두 기준은 다음과 같이 규정된다.7)
  • 실현 기준: 전제와 결론 사이에 실현된 뒷받침 관계

  • 의도 기준: 전제와 결론 사이에 의도된 뒷받침 관계

이 가운데 필자는 의도 기준에 찬성하며, 실현 기준을 따르게 되면 1절에서 서술한 것처럼 모든 타당한 연역논증이 동어반복의 오류에 지나지 않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현 기준과 의도 기준 가운데 어느 기준을 따르더라도 필자의 주장은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이 문제는 여기서 논의하지 않겠다. 필자의 주장은, 연역논증을 전제와 결론 사이에 필연적 뒷받침 관계가 실현되었든, 아니면 논증을 제시하는 사람이 필연적 뒷받침을 의도했든, 어느 경우로 보더라도 [논증 3]은 연역논증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논증 3]이 연역논증이 아닌 이유는 다음과 같다. 연역논증은 전제가 결론을 필연적으로 뒷받침할 것을 논증을 제시하는 사람이 의도하거나 혹은 그 뒷받침이 실현된 논증이다. 그런데 [논증 3]은 전제 A가 참인 모형들로 모형의 범위가 제한된다. 그러한 모형들에서는 [논증 3]의 결론인 A 역시 참이다. 따라서 [논증 3]은 아무런 근거 제시 없이 “A는 참이다.”라는 주장만 제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즉 [논증 3]에는 결론에 대한 뒷받침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결론의 필연적 뒷받침을 위한 의도와 실현 중 어느 쪽도 주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논증 3]은 연역논증은커녕, 올바른 뜻에서의 논증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 비슷한 방식으로 [도식 1]과 [논증 2]도 연역논증으로부터 배제할 수 있지 않느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귀결일 것이다. 하지만 [도식 1]과 [논증 2]는 [논증 3]과는 달리 엄연히 연역논증 또는 연역논증의 도식이다. 왜냐하면 그것들 안에는 “A는 참이다.”라는 주장은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독자들도 주지하듯이, 어떤 조건 하에서 명제 A가 반드시 참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명제 A가 반드시 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구별되어야 한다. 그리고 [도식 1]과 [논증 2]가 나타내는 것은 A의 참이 A의 참을 필연적으로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논증 3]은 [도식 1], 그리고 그 도식을 따르는 [논증 2]와는 구별되어야 마땅하다.
다음으로 필자의 두 번째 주장을 제시하겠다. 필자의 두 번째 주장은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첫째, [논증 2]는 동어반복의 오류가 아니다. 둘째, 어떤 [논증 3]은 동어반복의 오류가 될 수 있다. 우선 [논증 2]와 관련된 전자의 주장부터 정당화하겠다.
주지하듯이 동어반복의 오류와 같은 순환논증은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를 범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의 핵심은 전제의 입증 책임을 회피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논증을 제시받는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제시된 근거가 정당하다는 것을 논증의 제시에 앞서 입증할 것을 기대하는 반면에, 논증을 제시하는 측에서는 그 근거를 정당화 없이 받아들이므로 입증 책임을 다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최훈은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해설한다.
  • 앞에서 우리가 논증을 하는 까닭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전제로 해서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다소 놀라운 결론을 남에게 설득하려고 하는 것이라고 했다. 곧 전제가 결론보다 더 확실한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논증을 듣는 이가 전제로부터 결론을 합리적으로 받아들이게 할 수 있다. 그런데 결론의 근거, 곧 전제를 물어 보았는데 주장하려고 하는 바로 그 결론을 전제로 내세운다든가 아니면 전제 자체가 결론과 비슷한 말이어서 전제를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러면 그 논증은 전제가 받아들일 만해야 한다는 논증 평가의 첫 번째 기준을 어겼으므로 잘못된 논증이 된다.8)

여기서의 핵심은, 동어반복의 오류는 “주장하려고 하는 바로 그 결론을” 전제로 다시 사용하기 때문에 “전제가 받아들일 만해야 한다는”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므로 잘못된 논증이 된다는 것이다.
우선, 논증의 결론은 논증을 제시하는 사람의 주장이라는 자명한 원칙을 상기하자. 그리고 여기에 다음의 충분히 그럴듯한 논제를 추가해 보자. 주장행위를 하는 사람이 진실한 태도로 주장을 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 모든 주장행위는 그 행위를 하는 사람이 그 주장의 내용 즉 명제를 믿고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다시 말해, 다른 조건이 모두 정상적이라면, S가 A라고 주장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면, S가 A를 믿고 있다는 것은 반드시 보장된다. 그렇다면 논증 제시자는 무엇 때문에 자신이 믿는 바를 청자에게 근거를 들어가며 논증의 형태로 제공하는 행위를 하는가? 그 목적은 논증을 제시하는 사람이 자신이 그 결론을 믿고 있음을 보이기 위해서는 물론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말하면, 모든 사람은 자신이 믿는 믿음 A에 대하여 자신이 A를 믿고 있다는 것을 안다.9) 따라서 논증을 제시하는 사람 자신이 A를 믿고 있다는 것을 자기 스스로에게 뒷받침을 제공해야 할 이유도 없다. 또한 논증을 제시받는 상대방 청자 역시, 논증자가 A를 믿고 있다는 것을 논증 제시자의 주장 행위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논증을 제시하는 행위를 하는 이유는, 논증 제시자가 그 논증의 결론을 믿고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논증 제시자가 믿고 있는 믿음이 정당한 근거를 청자에게 제시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논증을 제시하는 사람은 그 논증의 결론 즉 주장 뿐 아니라 그 주장을 믿는 것이 합당한 근거를 함께 제시함으로써 논증을 제시받는 청자 역시 그 논증의 결론에 해당하는 명제를 믿는 것이 옳다는 것 역시 주장하는 행위도 한다는 것을 추가로 이끌어낼 수 있다. 이를 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다음의 (C1)이 실제 의사소통 상황에서 논증 행위를 통해 청자에게 제시되고 있다는 가정 하에서, (C1)로부터 (C2)를, 그리고 다시 (C2)로부터 (C3)을 이끌어내는 것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논증 행위의 최종 목적지는 (C3)이다.
  • (C1) Σ라는 근거(들)에 의해, A이다.

  • (C2) Σ라는 근거(들)에 의해, A라는 나(화자)의 믿음은 정당하다.

  • (C3) Σ라는 근거(들)에 의해, 당신(청자)은 A라고 믿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논증 2]를 제시하는 행위는 A라고 믿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설득하는 행위가 아니라, A가 참이라는 조건 하에서 A라고 믿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설득하는 행위이다. 이 행위는 두 경우로 다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논증 2]의 제시가 항진명제 “A이면 A이다.”(A→A)의 제시에 해당하는 경우이다. 이 항진명제에 대해 다음이 성립한다.
  • ⊢A→A

“A→A”를 결론으로 가지는 이 논증은 전제가 공집합(∅)인 타당한 연역논증으로 간주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결론에 대한 화자의 믿음은 정당하며, 청자 역시 그 결론을 믿는 것이 바람직하다.10) 둘째, 청자와 화자가 모두 A라고 가정한 상태에서, A를 믿는 것이 정당한가를 가늠하는 경우이다. 그런데 A라는 가정은 A가 참이라는 가정과 동치이다. 그리고 A가 참이라는 것으로부터 A라고 믿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이끌어낼 수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논의할 것이다.) 따라서 화자와 청자 모두 A라고 가정한다는 조건 하에서, A가 참이라고 믿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정당화된다.11) 따라서 어느 경우로 간주하더라도, [논증 2]를 제시하는 행위는 전제의 입증책임을 회피하는 행위로 볼 수 없으며 따라서 오류가 아니다.
반면에 [논증 3]은 전제의 입증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류가 된다. 무엇보다도 [논증 3]의 전제 A는 [논증 2]와는 달리 가정적 전제가 아니다. 논증의 화자는 전제 A가 실제로 참이라고 믿고 있을 것이나, 그 사실이 논증의 청자도 A가 참이라고 믿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청자가 A라고 믿는 것이 바람직하기 위해 주어져야 할 것은, A가 참이라고 믿을 좋은 이유인데 그 이유의 제시가 바로 전제 A의 참에 대한 입증에 해당한다. 따라서 [논증 3]에서 화자는 전제 A가 참이라고 믿을 좋은 이유가 무엇인지를 청자에게 입증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개고기 식용은 윤리적으로 허용될 수 없다. 따라서 개고기 식용은 윤리적으로 허용될 수 없다.”라는 논증은 앞서의 [논증 2]와 [논증 3]의 구분과 평행하게, 다음의 두 가지 서로 다른 논증으로 읽힐 수 있다.
  • [논증 5]

  • 만약 개고기 식용이 윤리적으로 허용될 수 없다면, 개고기 식용은 윤리적으로 허용될 수 없다.

  • [논증 6]

  • 개고기 식용은 윤리적으로 허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개고기 식용은 윤리적으로 허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서술한 것처럼 [논증 5]는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논증 5]를 단일한 복합명제에 대한 주장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 경우 [논증 5]가 나타내는 복합명제 “만약 개고기 식용이 윤리적으로 허용될 수 없다면, 개고기 식용은 윤리적으로 허용될 수 없다.”는 항진명제이므로 어떠한 추가적인 근거 제시 없이도 이 명제가 참임을 믿는 것은 바람직하다. 둘째는 [논증 5]를, 화자와 청자가 개고기 식용이 윤리적으로 허용될 수 없다고 가정하는 경우로 간주하는 것이다. 앞선 서술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러한 가정 하에서 청자가 개고기 식용이 윤리적으로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을 믿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 도출된다. 따라서 어느 경우에나 청자가 각각의 믿음을 가지는 것은 바람직하다는 것이 얻어지므로 [논증 5]는 오류가 아니다.
반면에 [논증 6]에서 제시되는 주장은, 논증을 제시받는 청자가 개고기 식용이 윤리적으로 허용될 수 없다고 믿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개고기 식용이 윤리적으로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근거가 참이라는 것은 청자에게 아직 입증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개고기 식용이 윤리적으로 허용될 수 없다고 화자가 믿고 있다는 것만을 보였을 뿐이다. 그러나 화자의 그러한 믿음은 그 근거가 참임을 보이지 못한다. 따라서 [논증 6]은 입증책임을 회피한 논증이므로 오류이다.
앞에서 논의를 미루었던 한 가지 부분을 다루겠다. “A는 참이다.”로부터 “A를 믿는 것은 바람직하다.”는 것을 어떻게 도출할 수 있는가? 필자는 그 대답은 크게 두 갈래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참임 즉 진리 속성이 지닌 규범적 본성에 호소하는 답변이고, 다른 하나는 논증의 제시와 평가를 포함하는 우리의 의사소통 행위 전반에 관한 데이빗슨적 접근이다.
먼저 진리의 규범적 본성에 관해 살펴보자. 모든 철학자들이 진리가 규범성을 지닌다는 데 동의한다. 심지어 진리 속성이 본체적임(substantial)을 부정하는 최소주의자인 호리치조차도 진리의 규범적 본성을 인정하면서, 최소주의의 주장 즉 진리는 어떠한 뜻에서도 진정한 속성이 아니라는 주장에 따라, 다음의 논제를 진리의 설명력에 호소하지 않는 방식으로 설명하려 시도한다.
  • (VT) 참인 명제를 믿는 것은 바람직하며 참인 명제를 믿지 않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12)

그가 택하는 설명은, 진리는 그 자체로(for its own sake)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참인 명제를 믿는 것은 우리에게 실용적인 이익을 가져다주지만, 늘 그렇지는 않은 사실을 호리치는 지적한다. 그렇다면 진리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호리치에 따르면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믿음 행위를 하는 우리의 마음 안에 진리에 대한 규범적 가치평가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회 안에서 타인을 배려하는 규범 역시 실용적인 이익이 아닌 그 자체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규범적 가치평가가 우리 마음 안에 담겨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진리와 지식을 다른 실용적인 이익이 없더라도 추구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규범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설명을 호리치는 제안한다.13)
하물며 최소주의적 관점에서도 진리의 규범성이 인정되는데, 진리 속성의 본체성을 긍정하는 관점에서라면 말할 나위도 없다. 예를 들어 진리 속성 실현 관계의 다원성을 주장하는 린치는 진리-기능을 수행하면서 다원적으로 실현되는 모든 속성들에 포함되는 공통 특징(truish feature)의 세 가지로 객관성, 규범성, 탐구의 목적이 됨이라는 세 가지를 나열한다. 그 가운데서 규범성은 다음과 같이 규정된다.
  • 믿음의 규범: 명제 P가 참이라면 그리고 오직 그런 경우에만 P를 믿는 것은 일견 옳다.14)

린치는 진리의 규범성을 진리의 자명한 본성의 하나로 보지만, 결코 사소한 본성은 아님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어떤 명제가 참이라는 사실과, 우리가 어떤 믿음을 가지는 것이 옳다는 것은 다른 범주에 속하는 두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질적인 두 사실이 어떻게 공외연적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린치는 믿음이 다른 인지 상태와 중요한 차이가 있음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상상함, 가정함, 희망함을 생각해 보자. 이러한 인지 상태들은 합리적이거나 불합리하다고 평가될 수 있다. 혹은 생생하거나 희미하다고 평가될 수도 있다. 그러나 믿음과는 달리 이러한 인지 상태들에 대한 평가에는 ‘참’이 기준이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떤 희망함이 정당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평가할 때 그 희망 내용이 실제로 참인가를 기준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가령 우리나라가 30년 내에 통일되기를 바라는 나의 희망은 “우리나라가 30년 내에 통일된다.”가 설령 미래에 거짓으로 판명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정당한 희망일 수 있다. 반면에 믿음은 그렇지 않다. 어떤 믿음이 정당하거나 합리적인 이유는 그 믿음 내용이 실제로 참이거나 참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15)
“P이다.”라는 주장 행위로부터 “(청자 역시) P라고 믿는 것이 바람직하다.”라는 주장 행위를 온당하게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에 힘을 실어주는 또 다른 철학자는 데이빗슨이다. 데이빗슨에 따르면 화자의 발화에 대한 해석은 그의 발화가 참이라는 가정 하에서 일종의 삼각형 구도로 이루어진다. 삼각형의 두 꼭짓점은 화자와 청자이고 다른 한 꼭짓점에는 화자의 발화가 지향하는 대상이 있다. 자비의 원리에 의하면 지금 화자의 발화는 청자 즉 해석자가 지향하고 있는 것과 같은 바로 그 대상을 지향하고 있다고 가정된다. 삼각형의 한 변이 이렇게 고정된다. 그리고 청자는 자신의 마음 역시 바로 그 대상을 지향한다는 자기-지식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또 다른 변이 고정된다. 이 두 변에 기초해서 삼각형의 나머지 한 변, 즉 화자의 발화에 대한 청자의 해석이 얻어진다는 것이다. 단, 세계에 대한 지식, 나 스스로의 생각에 대한 지식, 타인의 생각에 대한 지식은 마치 삼각대의 세 다리와 같이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는 구도임을 주의해야 한다. 세 종류의 지식 가운데 어느 것도 다른 어느 것보다 더 원초적이거나 방법적으로 우선하지 않는다.16) 데이빗슨의 해석 이론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타인의 발화나 생각의 내용에 대한 지식에 어떻게 도달하는가에 관한 가장 그럴듯한 설명의 하나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화자의 발화 P를 청자가 해석할 때 중요하게 의존되는 전제가 바로 P가 참이라는 전제라는 부분이다. 이 전제에 기초해서 화자는 청자가 함께 공유하는 삼각형의 한 꼭짓점으로서의 세계의 특정한 한 부분, 즉 P의 진리 조건에 의거하여 P의 의미에 대한 지식에 도달하게 된다.
데이빗슨의 이론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중요한 통찰은, 명제 P를 참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화자의 진실된 태도가 해석자가 그의 발화 “P”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발견하기 위한 중심 증거가 된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발견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자비의 원리 즉 화자의 합리성을 극대화하는 가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발화 행위와 해석 행위에 관한 이 통찰을 논증의 제시와 그에 대한 평가라는 의사소통 행위에 적용하면, 우리는 논증 제시자가 주장하는 결론과 그 근거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청자가 자신의 믿음에 동의하기를 원한다고 전제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청자는 논증 제시자가 논증을 통해 주장하는 내용이 청자인 자신을 설득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고 전제해야만, 그의 주장 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 그리고 그 논리적 근거가 무엇인지를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데이빗슨의 이론은 논증의 결론을 비롯한 화자의 발화 “P이다.”는, 단순한 “P이다.”가 아니라 “P”가 참이라고 받아들이는(hold true) 것이고, 더 나아가 “나는 P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나아가 나의 발화 행위를 통해 당신 역시 나의 믿음에 대한 동의에 다다르기를 목표한다.”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통찰은 (C1)에서 (C3)로 이어지는 추론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17)
이제 필자의 두 가지 주장 가운데 두 번째 주장의 뒷부분에 해당하는 주장, 즉 동어반복의 오류에 해당할 수 있는 논증은 [논증 3]과 같은 논증이라는 주장을 제시하겠다. 사실 이 주장은, ① [논증 3]과는 달리 [논증 2]는 동어반복의 오류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과, ② [논증 3]과 같은 도식을 공유함에도 불구하고 동어반복의 오류로 간주될 수 없는 몇 가지 특별한 경우들이 있다는, 두 주장으로 구성된다. ①에 대해서는 이미 서술했다. 따라서 여기서는 ②에 대해 설명할 것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어떤 논증이 [논증 3]과 같은 꼴을 지녔음에도 동어반복의 오류가 되지 않는 경우에는 적어도 두 가지가 있다. 두 경우의 공통점은, 전제 A가 논증의 제시에 앞서서 화자와 청자 모두에게 이미 정당화가 제공되었다고 간주할 수 있는 경우들이라는 점이다. 그러한 경우에 [논증 3]과 같은 논증은 전제의 입증책임을 회피하였다고 볼 수 없으므로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로 취급될 수 없다. 따라서 필자가 제시하는 다음의 두 가지 경우 이외에도, 화자와 청자에게 전제 A의 정당화가 제시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면 그 경우 [논증 3]과 같은 꼴을 공유하는 논증이더라도 그 논증은 동어반복의 오류에 해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2.1 전제가 항진명제인 경우

전제 A가 항진명제인 경우에는 [논증 3]과 같은 꼴을 지닌 논증을 동어반복의 오류로 볼 수 없다. 앞서 필자는 [논증 2]의 결론과 전제가 동일한 항진명제인 경우에는 그 논증의 결론을 믿는 것이 바람직하므로 논증 제시자가 전제의 입증책임을 회피했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전제와 결론인 A가 항진명제인 [논증 3]의 경우들도 동어반복의 오류에 해당하지 않는다. 일상적인 화법에 기대어 예를 들자면, 다음의 [논증 7]을 논리적 오류로 간주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 [논증 7]

  • 철수가 사람이라는 것과 철수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모두 참일 수는 없어. 왜냐하면 철수가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닐 수는 없으니까.18)

2.2 전제가 토대 진술인 경우

논증을 제시하는 사람과 제시받는 사람 앞에 빨간 사과가 있다고 하자. 그리고 시각적 감각을 포함한 모든 감각 경험의 조건이 정상적이라고 가정하자. 지식에 관한 토대론자들은 이러한 경우 “이 사과는 빨갛다.”와 같은 진술이 우리 지식의 정당성의 토대가 될 수 있는 진술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진술을 토대 진술이라고 부르자. 토대론에 따르면, 토대 진술은 그 진술이 지식이 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감각 소여(sense data) 이외의 어떤 추가적인 정당화도 필요로 하지 않으므로 다른 지식들의 적절한 토대가 될 수 있다.19) 비록 우리가 토대론에 동의할 필요는 없지만, 토대 진술이 전제로 사용되는 경우, 정상적인 인식 조건 하에서 그 전제는 참일 뿐 아니라 화자와 청자의 경험 이외의 다른 어떤 추가적인 정당화도 필요치 않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다음의 [논증 8]은 올바른 뜻에서의 논증도 아니거니와, 일상적인 대화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무의미하고 비생산적이라고 간주될 수는 있을지언정, 근거 제시의 회피가 발생한다는 뜻에서의 논리적 오류는 아니다.
  • [논증 8]

  • (정상적인 인식 조건 하에서) “이 사과는 빨간색이야. 왜냐하면, 봐. 빨간색이잖아.”

3. 바람직한 답변의 모델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면, [질문]에 관한 적절한 답변은 다음의 세 단계로 제시되어야 한다.
  • [질문]

  • “A이면 A이다.”는 연역적으로 타당한 논증이다. 동시에 이는 동어반복의 오류이다. 즉, 좋은 논증이면서 동시에 나쁜 논증이다. 이 충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 [1 단계]

  • 학생들은 주어진 논증이 [논증 2]와 [논증 3] 중 어디에 더 가까운가를 먼저 판별해야 한다. 물론 그 판별은 논증이 제시되는 다양한 맥락과 주제, 그리고 화자의 의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교수자의 세심한 지도가 병행되어야 한다. [논증 2]와 [논증 3]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논증을 제시하는 사람이 전제의 참임을 선행 가정하는지 아니면 전제가 참인 경우와 거짓인 경우 모두를 포괄하면서 그 중 참인 경우를 가정하는 것인지의 차이임을 전달한다.

  • [2 단계]

  • 학생들에게 [논증 3]과는 달리 [논증 2]와 같은 꼴의 논증은 동어반복의 오류에 해당하지 않음을 전달한다. [논증 2]의 꼴을 따르는 논증의 경우, 전제 A가 참이라는 가정이 주어졌다는 조건 하에서는 결론 A가 참이라고 믿는 것이 정당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논증 3]의 꼴을 따르는 논증의 경우, 화자가 전제 A를 참이라고 믿는다는 사실은 청자가 그 전제를 참이라고 믿을 적절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즉 이 경우에는 전제의 입증 책임이 회피되고 있으며 따라서 청자가 결론 A를 믿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 역시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우의 논증은 오류이다.

  • [3단계]

  • 앞서의 단계에서 서술한 것처럼, [논증 3]의 꼴을 따르는 논증은 원칙적으로는 전제의 입증 책임이 회피되고 있다는 점에서 오류로 취급되어야 한다. 그러나 화자와 청자가 전제의 참이 이미 주어졌다고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논증 3]과 같은 논증이 오류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한 경우의 예로는 전제와 결론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명제 A가 항진명제인 경우, 그리고 토대 진술인 경우가 있다.

이렇게 세 단계의 학습 내용을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논문의 앞부분에서 서술한 학생들의 의문에 답할 가장 적절한 모델이라고 필자는 주장한다.

4. 덧붙이는 말

3절에서 제시한 답변 모델로서 본 논문의 결론은 이미 제시되었으므로, 본 논문에서 논의한 주제와 관련된 두 가지 첨언을 덧붙이면서 논문을 맺고자 한다.
첫째, 현재 우리나라 대학의 교양 논리 교육은 대체로 형식논리학과 비판적 사고가 뒤섞인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할 때 작금의 교양 논리 교육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은 형식논리학의 추론 규칙과 일상적인 말과 글의 분석 사이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시키는 것이다. 본 논문에서 고찰한 연역적 타당성과 동어반복의 오류 사이의 문제도 그에 포함되지만, 그 이외에도 “관계자 외 출입금지”처럼 자구 상으로는 필요조건으로 분석되지만 화자의 의도를 반영하여 필요충분조건으로 읽어내는 것이 더 적절한 일상 언어 표현에서처럼, 일상 표현의 구문론적 논리 구조와 화용론적 의도가 일치하지 않는 사례들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형식논리학과 비판적 사고가 혼재된 지금의 교양 논리 교육은, 일상적인 말과 글을 형식논리학의 틀을 적용하기 좋도록 다소간 작위적으로 분석하는 경향을 띄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쨌든 이러한 현실은 쉽게 바꿀 수 없을 것이므로, 연구자들은 학생들이 형식논리와 비판적 사고 사이의 괴리에서 받는 혼란을 최소화할 방안이 무엇인지에 대해 보다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둘째, 2절의 논의에서 남는 한 가지 숙제가 있다. 어떤 전제 A에 대해서 화자와 청자 모두 믿음의 정도가 1의 값에 근접한다고 하자. 그런데 전제 A는 항진명제도 토대 진술도 아니다. 이런 경우, [논증 3]의 꼴을 따르는 다음의 [논증 9]는 분명 오류로 보인다.
  • [논증 9]

  • (화자와 청자 모두 독실한 종교인인 경우) “신은 존재한다. 왜냐하면 신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화자와 청자는 이 논증의 전제가 이미 정당화되었다고 받아들일 것이며 따라서 입증 책임을 회피하는 논증이라고도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논증 9]가 오류가 되는 이유를 입증 책임의 회피가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한 가지 가능한 대답은 전제에 대한 ‘입증’의 경로가 논리적 또는 인과적으로 적절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류가 된다는 분석이다. 또 다른 가능한 대답은 입증 책임에서 ‘책임’을 요구할 권리를 지니는 범위를 실제적인 의사소통 참가자를 넘어 잠재적인 의사소통 참가자까지 확대해야 한다는 분석이다. 그렇지 않으면 제 3의 대답을 모색해야 할 수도 있다. 이 문제는 동어반복의 오류와 연역적 타당성에 관한 문제를 넘어, 일반적인 논증에서의 입증 책임의 본성에 관해 연구해야 하는 문제로서 본 논문의 주제 바깥으로 나가서 논의해야 할 듯 보인다. 필자는 이 문제를 후속 연구의 과제로 남겨두고자 한다.20)

Notes

1) 예를 들어 송하석(2017) pp. 39-43, 박은진.김희정(2008) pp. 164-177 등 참조.

2) 단, 최원배(2018)는 건전성이라는 용어 대신에 ‘합당함’이라는 용어를 쓴다. (pp. 28-29.) 건전성(soundness)은 1차 논리 체계가 지니는 특징인 완전성(completeness)과 쌍을 이루는 용어이기 때문에 합당함이라는 용어가 혼란의 여지가 더 적으며 바람직하다는 점에서 필자도 최원배의 용어법에 찬성한다. 하지만 본고의 목적은 교육에서의 실제 적용에 기여하는 것이므로, 본고의 서술도 교육 현장에서 많이 쓰이고 있는 용어인 ‘건전성’을 따르겠다.

3) 실제로 이와 같은 답변이 이좌용⋅홍지호(2009)에서 제시된다. (pp. 231-234.) 그들은 “만일 어떤 논변이 연역적 함축에 성공하고 있다면, 그 논변은 무조건적으로 좋은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답은 ‘아니오’이다.”라고 말한다. 그 근거로 동일한 말을 반복하는 논변은 상대방을 설득시키는데 실패한다는 것을 든다. (p. 232.) 즉, 이들 역시 본고의 문제를 인식하고 있으며, 그 답변을 논증 제시자와 평가자 사이의 화용론적 측면에서 찾는다고 정리할 수 있다.

4) 구태여 이 언급을 하는 이유는 철학의 논의 주제에 따라서 “왜냐하면”이 무엇을 나타내는가가 상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5) 선우환(2019) 참조.

8) 최훈(2003), pp. 266-267.

9) 단, 필자 역시 이 말은 어디까지나 일반적으로만 성립한다는 점을 분명히 인지한다. 모든 심적 상태 M에 대해서 주체 C가 M에 있다는 것이 성립한다면 C는 자신이 M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안다는 논제는 철학에서 이를테면 ‘데카르트의 잔재’의 하나로 간주된다. 그리고 믿음은 전형적인 심적 상태이다. 데카르트적 논제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자기-지식(self-knowledge)의 문제 때문이다. 만약 이 논제가 언제나 예외 없이 성립한다면, 가령 내가 고통이라는 심적 상태에 놓일 때마다 나는 그것을 알 어떤 특권적 위치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고통을 느끼고 있음을 안다는 나의 지식은 틀릴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착오의 가능성은 위의 데카르트적 논제와 명백히 충돌한다. 필자 역시 우리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가 그것을 믿는다는 믿음을 가지는데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논증의 제시와 평가의 행위로 제한해서 본다면, 논증을 제시하는 화자가 논증에 포함된 어떤 명제를 믿는다면 그 화자는 자신이 그러한 믿음을 가진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과도하게 모험적인 가정은 아니다. 자기-지식의 문제와 관련하여 데카르트적 논제에 대항하는 논증의 예로는 Steup, pp. 217-219를 참조.

10) 이에 대해 항진명제 또한 여전히 근거 제시를 필요로 한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진리표는 항진명제가 참이라는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표는 주어진 항진명제가 참이라는 근거가 아니라, 그 항진명제를 구성하는 진리 함수가 모든 가능한 경우에서 참의 값을 산출하는 함수라는 사실로부터 도출되는 귀결이다.

11) 특별히 이 부분에서 [논증 2]를 [논증 3]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논증 3]을 제시받는 청자는 전제 A가 참이라고 가정하지 않는다.

12) Horwich(2010), p. 57.

13) Horwich(2010), pp. 66-67.

14) Lynch(2009), p. 10.

15) Lynch(2009), pp. 10-11.

16) Davidson(1991), 특히 p. 220 참조.

17) 한 가지 더 추가할 수 있는 그러나 좀 더 약한 논거는 실험철학의 연구이다. 진리 실용론의 주장은 다음의 P1과 P2의 결합으로 간주될 수 있는데, P2와는 달리 P1은 직관적으로 자명하다.

P1: 만약 어떤 명제가 참이라면, 그 명제를 믿는 것은 우리에게 실용적으로 도움이 된다.

P2: 만약 어떤 명제를 믿는 것이 우리에게 실용적으로 도움이 된다면, 그 명제는 참이다.

일반인들이 ‘참’에 대해 가진 직관을 조사하기 위한 울라토프스키의 실험(Ulatowski(2017), pp. 106-111.)에 따르면, 일반인들이 P1에 동의하는 정도는 P2에 동의하는 정도보다 훨씬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어떤 믿음이 실용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것은 그 믿음을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 물론 일반인들이 진리에 대해 어떤 직관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의 본성에 대한 어떤 통찰을 강하게 뒷받침하는 논거로 보는 것은 성급하다. 그러나 이는 어떤 명제가 참이라는 것이 그것을 믿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지지하는 약한 증거는 될 수 있을 것이다.

18) 어떤 독자는 [논증 7]의 전제와 결론이 완전히 동일하지 않으므로 [논증 3]과 같은 꼴의 논증으로 볼 수 없다고 지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동어반복의 오류’라고 분류하는 오류는, 전제와 결론의 표현에서의 동일성이 아닌 그 주장 내용에서의 동일성이라는 특징을 지닌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이병덕(2015)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표현의 자유가 침해되기 때문이다.”라는 논증이 오류인 이유를 “‘A. 그러므로 A.’의 형식이기 때문”이라고 해설한다. (p. 261.) [논증 7]의 전제와 결론의 주장 내용은 ~(A∧~A)로 동일하다. 그러므로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표현의 차이를 기준으로 하여 [논증 7]을 [논증 3]의 온전한 사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19) 필자가 토대론을 옹호하지 않음에도 ‘토대 진술’이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는, 화자와 청자 모두 논증의 전제가 경험적으로 참이라는 것을 정상적인 인식적 조건 하에서 동의하는 경우에, 그러한 전제를 일반화하여 가리키는 용어로 철학자들에게 친숙한 토대론에서 따온 명명보다 더 편리한 명명은 없기 때문이다. 논의의 편리성 이외에는 이 명칭을 쓰는 다른 이유는 없다.

20) 유익한 지적을 해주신 익명의 심사위원께 감사드린다. 부끄럽게도 수정 시간의 촉박으로 인하여 그들의 지적과 우려를 모두 반영하지는 못하였다. 후속 연구에서는 제공해 주신 지적들을 충실히 고민하고 반영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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