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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General Edu > Volume 14(5); 2020 > Article
대학 교양교육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질문 중심 학습’ -고려대학교 공통교양 <자유정의진리>를 중심으로

초록

이 논문은 학생이 제안한 ‘질문’을 중심으로 편성되는 교양교육의 새로운 모델을 제안하기 위하여 작성되었다. 전공교육의 예비적 단계의 교육으로 간주되거나, 지식의 전수를 핵심으로 하는 재래의 교양교육 모델을 벗어나 융합적, 창의적, 수행적인 교양교육의 모델을 확립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는 학생 스스로가 질문을 생성하고 토론을 진행하며 협력을 통해 결론에 이르는 질문 중심 학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논문에서는 이의 실례를 공통교양교과인 <자유정의진리>의 교육과정에서 찾았다. 2018 년부터 2020년까지 본 교과를 운영해본 결과, ‘질문’은 학생 스스로가 창의적으로 제기하는 문제 설정에 해당하 며 이 질문이 다른 질문과 만나서 융합, 확산, 심화되는 과정을 관찰할 수 있었다. 학생의 질문은 1) 정보파악형 질문, 2) 비판적 질문, 3) 분석적 질문, 4) 확장형 질문, 5) 문제해결형 질문, 6) 창의적 질문으로 유형화되는데, 이 질문들은 각각 1) 사실판단, 2) 가치판단, 3) 부분의 분석, 4) 전체의 종합, 5) 대상 지향, 6) 주체 지향을 향해 있으며, 문제의식이 심화되면서 1), 3), 5)에서 2), 4), 6)으로 확장, 이행된다.
질문 중심 학습의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학습자의 자유의지를 고양하고 신장시킨다.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학생은 수동적인 교육의 대상이 아니라, 능동적인 교육의 주체가 된다. 질문을 통해서 학생 스스로 지식을 생산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둘째, 질문의 주체가 복수화되면서 학생은 필연적으로 타자를 만나며, 이들과의 융합을 경험하게 된다. 여기서 윤리적 교양교육의 가능성이 배태된다. 토론은 승패를 가리는 논쟁의 형식이 아니라, 타자와의 진정한 만남을 통해서 집단지성을 발휘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며 협력을 배우는 윤리의 무대가 된다. 셋째, 학생은 타자의 입장을 배려하는 데서 나아가 그 자신이 타자가 되며, 이로써 타자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감각하는 ‘감각의 재분배’(자크 랑시에르)가 일어난다. 타자가 되는 일이야말로 학습자가 개인, 계급, 젠더, 세대를 뛰어넘어 공동체를 복합적인 ‘나’로 감각하는 전환이다.

Abstract

This paper proposes the new goal of implementing a new model for liberal arts education organized around ‘questions’ suggested by students. The general courses should not be seen as preliminary versions of major courses; instead, general and major courses should complement each other. Moreover, general courses (character building education) should focus to a greater extent on the growth of the creative capacities of learners. The current education system, which is largely based on the traditional educational model (i.e., one that prioritizes the transfer of knowledge, or the development of individual competencies), should be restructured into a new system in which learners can develop the ability to both independently raise issues related to their subject, as well as to think these issues through for themselves. To achieve this, they should be given encouragement to put themselves in the shoes of those whom they study, as it were, or to “become the other,” rather than simply to “analyze the other.”
In order to illustrate this new general course paradigm, this paper introduces Korea University’s core general course “Liberty Justice Truth.” This is a course that emphasizes the importance of the process of students asking questions. From 2018 to 2020, as a result of running the curriculum for several years, the ‘question’ corresponds to a question set up by students themselves creatively, and observes the process of converging, spreading, and deepening this question with further questions. The questions from the students are categorized into 1) information grasping questions, 2) critical questions, 3) analytic questions, 4) extended questions, 5) problem-solving questions, and 6) creative questions.
2) value judgment, 3) analysis of parts, 4) synthesis of the whole, 5) object-oriented, 6) subject-oriented (It is hard to follow this numbering pattern in that I’m not sure what they relate to. For instance, does the latter 2 correspond to “critical questions” or new types of questions?) and as the awareness of the problem deepens, the questions (is that what you mean? The questions are expanded and implemented? Or their answers are implemented?) from 1), 3), 5) to 2), 4), 6) are expanded upon and implemented. Through this process, the learners’ collective intelligence enables their aesthetic, intellectual, and political judgments to converge.
The significance of the question-based class is as follows: First, it enhances and promotes the learners’ free will. Instructors in this course do not primarily transfer knowledge to the learners, but rather play the role of facilitators of the entire process of self-directed learning. Second, as the subject of the question becomes plural, the learner inevitably meets the “other” and experiences convergence with them. Third, the learner goes beyond considering the position of the other and becomes the other by themselves, thereby causing a “redistribution of sensations” to think, feel, and sense like the other. In The Ignorant Schoolmaster, Rancière stresses that even the students of an ignorant teacher can attain unique knowledge on their own. This paper provides a specific example which supports Rancière’s perspective.

1. 문제제기

역사적으로 근대 대학의 모델로 평가받는 것은 훔볼트 가 설립한 베를린대학이다. 훔볼트가 지향한 교육은 일반 인간교육(allgemeine menschenbildung)이라 불린다. 이것 은 “전문적이고 제한된 지식을 제공하는 직업교육이 아니 라 전인적인 향상을 촉진하고, 모든 인간에게 필요한 교양 을 제공하는 교육”(사사키 아타루, 2017: 44)을 의미했다. 여기서 ‘수업시대’나 ‘편력’과 같은 이미지가 제시되었다. 이것은 ‘좁은 의미의 자아를 벗어나 세계를 편력하고 이 과정에서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돌아오기’로 요약될 수 있는데, 여기에는 ‘출발/귀환’, ‘세계/자아’, ‘미성숙/성 숙’과 같은 모티프들이 결합되어 있다. 교양(Bildung)이 라는 개념에는 세계를 경험하기, 자아를 완성하기, 감정을 교육하기와 같은 의미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것이 현재 의 대학 교양교육의 이념에도 내포되어 있다.
여기에 전 지구적 자본주의화에 따른 기능적, 전문적 지식에 대한 수요가 폭증하면서, 대학은 ① 자본의 재생산 에 필요한 인력과 지식을 공급하는 전공 교육과 ② 세계를 편력하고 자아를 발견하기란 목표로 수행되는 교양교육 으로 이원화되었다.
  • 오늘날 세계 대학의 표준형이 된 것은 19세기 말 이후 발전한 미국식 모델로, 리버럴 아트 교육에 충실한 대학 위에 석박사 학위 시스템을 구조화한 대학원이 놓인 형태이다. 이는 폭발적으로 확장된 대중사회가 욕망하는 대학교육에 대한 기본적 수 요와 고도로 전문화된 산업 시스템이 필요로 하는 인재 수요를 모두 만족시키는 시스템이다.(사사키 아타루, 2017: 22)

이런 정의는 ①에 따른 전공교육을 대학 교육의 핵심에 두는 것이며, ②에서의 교양교육은 부수적이거나 예비적 인 교육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발생하였다.
첫째, 교양교육이 전공과목에 진입하기 전에 수행되는 예비적 단계의 교육으로 이해되었다. ‘말하기, 읽기, 쓰기’ 와 같은 기본적인 언어능력을 신장하는 기초 교양교육만 이 교양교육의 핵심으로 간주되거나, 기능적 교육이 교양 교육의 주된 내용을 이루게 된 것은 이러한 선이해 때문이 다. 그러나 의사소통능력, 정보수용능력과 같은 역량은 교양교육의 최종 목표가 아니라 고등교육을 수행하기 위 해 전제되어야 할 역량이다. 교양교육이 전공교육보다 질적으로 낮은 차원의 기초적인 교육이라는 선입견도 여 기에서 유래했다. 인성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수행되는 교 육 프로그램은 높은 차원의 합리적, 이성적 능력을 요구하 는 전공교육을 보완하는 부수적인 과목으로 간주되었다. 실제로 이러한 관념 아래서 수행되는 기능적인 교양교육 교과목은 전공교육에 종속되기 쉽다.
둘째, 전인교육이라는 교양교육의 목표가 전공과 유리 됨으로써 달성할 수 없는 개념, 불가능한 목표로 전락하였 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요구하는 전문화된 교육이라는 이념을 전공의 몫으로만 간주하면, 전인교육 역시 전공교 육을 거쳐야만 완성되는 이상(理想)이 되고 만다. 세계를 파악하고 자아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세계가 요구하는 기 술과 자질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에 대한 이해 없는 전인(全人)이란 그 자체로 모순된 개념일 수밖에 없다.
셋째, 이러한 맥락에서, 전인교육의 외연이 좁아져, 그 대상이 계몽주의적인 인물을 배출하는 것으로 전락하였 다. 현재의 교양교육이 제시하는 전인이란 합리성에 바탕 을 둔 인간이다. 즉 ①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② 가능한 한 폭넓게 세계를 파악하는 인물이다. ①의 모델은 논리적 인 언어구사, 수사적인 대화술, 연역적인 사고, 경험적인 판단력 등을 갖춘 인물이며, ②의 모델은 인문, 사회, 자연 과학의 각 영역에 대한 폭넓은 이해력, 문식력과 문해력을 갖춘 인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합리성만으로는 인간에 대해 온전한 이해에 이르렀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교양교육은 어떠한 교육이며,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 하는가? 전인교육이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는 다음과 같은 목표가 설정될 필요가 있다.
첫째, 교양교육을 전공교육의 사전적, 예비적 단계의 교육으로 간주하지 말고, 둘이 상호적으로 교섭하여 교육 의 외연을 형성한다고 간주해야 한다. 때로는 전공교육이 교양교육의 사전적, 예비적 단계의 교육이 될 수도 있다. 학생들이 자신들이 속해 있는 각 학과의 전문지식을 익힌 후에 교양과목을 이수하게 되면, 교양교육 교실은 각 분야 의 전공자들이 각자의 지식에 기반한 문제해결역량을 선 보이는 융합적, 창의적, 수행적 교육의 장이 될 것이다.
둘째, 인성교육의 목표를 학습주체의 창발적인 역량의 신장으로 조정해야 한다. 전인교육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학습자의 주체적인 자기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무엇을 잘 할 수 있는가? 내가 행복을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와 같은 본질적인 질문이 제기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학습자 스스로가 자기 욕망을 발견하고,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서 행해야 하는 역할을 스스로 찾아가는 일을 교육의 목표로 설정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교수자는 지식 전수자, 아는 자의 자리에 서 내려와, 학습자들의 자율적인 판단과 주체적인 문제의 식을 존중하고 신뢰해야 한다. 교수자는 계량화, 정량화된 평가를 포기하고 창의적인 사유를 무한히 격려해야 한다. 그 일환으로 대학은 상대평가를 포기하고 절대평가를 도 입할 필요가 있다.1)
셋째, 지식의 전수나 기능적인 역량의 계발을 목표로 하는 재래의 교육모델을 포기하고 학습자 스스로가 문제 를 제기하고 해결하는 역량을 목표로 교육체계를 개편해 야 한다. 랑시에르는 『해방된 관객』에서, 1830년대에 두 노동자가 나누었던 서신을 연구하면서, 자신의 교육 모델 이 선입견에 기초한 것이었음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 나는 문제가 무지와 지식 사이에 놓여 있는 것도 아니고, 능동성과 수동성, 개인성과 공동체 사이에 있는 것도 아님을 알게 됐다. 5월 어느 날, 나는 1830년대 두 노동자의 서신 자료를 열람하면서 당시 노동자들의 조건과 의식 형태에 관한 정보를 찾으려 했다. 나는 뜻하지 않게 전혀 다른 것을 만났다. 그것은 145년 전 또 다른 5월 어느 날 일어난 다른 두 방문객의 모험이었다. 두 노동자 가운데 한 사람은 메닐몽탕에 있는 생시몽 공동체 에 막 들어간 참이었다. 그는 친구에게 낮에는 노동 하고 수련하고 밤에는 게임하고 합창하고 낭송하 는 유토피아적인 일과 시간표를 전해주었다. 편지 수신자는 답신에서 자신이 동료 둘과 함께 전원 파티를 하며 봄날의 일요일을 만끽한 참이라고 했다. 그 수신자가 그에게 이야기한 것은 노동자의 휴일―다음 주에 일할 것에 대비해 심신을 회복하 기―과 사뭇 달랐다. 그것은 종류가 전혀 다른 여가 로의 난입이었다. 풍경의 형태, 빛, 그림자를 즐기 는 탐미주의자의 여가, 시골 숙소에 묵으며 형이상 학적 가설을 발전시키는 철학자의 여가, 길이나 숙소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모든 벗에게 신앙을 설파하는 데 애쓰는 전도자의 여가. 노동 조건과 계급 의식 형태에 관한 정보를 주겠거니 했던 이 노동자들은 전혀 다른 것을 나에게 제공했다.(자크 랑시에르, 2016: 31-32)

“낮에는 노동하고 수련하고 밤에는 게임하고 합창하고 낭송하는 유토피아적인 일과 시간표”는 마르크스가 꿈꾸 었던 해방된 노동자의 일과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편지를 받은 노동자는 전혀 다른 시간을 보냈노라고 말한다. 그것 은 계몽적인 교수자의 관념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었다. 그것은 노동의 시간을 위해 재충전하는 시간(휴식하기, 놀기)이 전혀 아니었다. 그런 시간은 그 내용이 어떠하든 노동에 종속된 시간, 따라서 노동의 연장으로서의 시간에 불과하다. 그는 전혀 다른 시간, 이를테면 탐미주의자의 시간, 철학자의 시간, 전도자의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노동자 각자의 욕망에 부응하는 시간, 그의 몸과 정신을 전혀 다른 감각과 사유에 개방하는 시간이었 다. 이 에피소드를 교수자와 학습자 사이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랑시에르, 2008: 37, 222)2) 교수자는 일과 시간표를 제공한 친구와 같은 계몽주의자, 지식 전수자, 생활 지도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반면 학습자는 저 노동자처럼 그 자신의 몸과 정신에서 빠져나와 다른 시간을 감각하고 누려야 한다. 이것은 ‘타 인을 생각하기’를 넘어서는 ‘타인이 되기’이다. 교양교육 은 학습자들로 하여금 이런 시간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 야 한다. 그 경험은 이성 뿐 아니라 감각, 무의식, 욕망, 감정을 포괄할 때 가능하다. 이 시대의 교양교육, 전인교 육은 이러한 측면들을 두루 포함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학생에게 무대를 열어주어야 한다. 교수자와 학생이 수평적으로 참여하는 공간, 학생 스스로가 질문을 생성해내는 플랫폼이 필요한 것이다. 학생들이 질문하는 역량을 스스로 키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학생을 신뢰할 수 있는 교육적 토대가 필요하다. 학생들이 비판적 성찰과 자율적 판단과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물적 토대가 마련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 입각하여 설계된 질문 중심 수업 의 사례를 소개하고, 이 수업이 재래의 교육모델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 이 수업의 의의는 무엇인가를 기술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 소개하는 수업 사례는 고려대학교 공통교 양 교과목인 <자유정의진리>이다.

2. 공통교양 <자유정의진리>의 교과 체계

<자유정의진리>는 2018년 고려대학교 1학년 공통교양 교과목으로,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의 융합을 통해 복합적으로 사고하고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며 협업을 통 해 해결책을 찾아가는 과정을 수행하기 위해 고안된 교양 교육 교과목”3)이다. 본 교과는 4단계 교육과정으로 이루 어져 있으며, 각 과정의 활동 및 과제는[그림 1]과 같다. 학문의 세 가지 핵심축인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을 망라하여 인류의 지성사를 장식했던 다양한 지적 성찰들 을 주제별로 탐구하는 동영상을 제공한 후에, 이를 바탕으 로 학생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플립트 클래스(Flipped class), ② 전공과 계열을 나누지 않고, 전체 계열의 다양한 전공자 전공자들을 한 강의실에서 만나게 함으로 써 각자의 지식과 사고가 교류하는 열린 교실, ③ 교수자가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재래식 교육방법을 지양하 고 학생들 스스로 질문, 글쓰기, 토론, 발표의 전 과정을 담당하는 학생 중심의 수업 설계, ④ 과제 및 활동의 결과 를 정량적으로 측정하지 않고, 문제 설정 및 해결 과정에 적극적, 능동적으로 참여, 협력하였는가를 측정하는 협력 기반 학습(Collaboration-Based Learning), 과정 중심 평가 (절대평가).4)
[그림 1]
<자유정의진리> 교육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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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정의진리>는 두 학기 수업으로 짜여 있다. <자유 정의진리>Ⅰ에서는 주체, 이성, 욕망, 구조, 시각, 예술을중심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와 가치 탐구의 양상을 탐구하 며, <자유정의진리>Ⅱ에서는 시각, 몸, 공간, 시간, 법, 비판정신을 주제로 세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인간의 능력과 실천적 범주를 살펴본다. 이를 통해 인간과 사회, 역사와 문화, 자연과 예술에 대해 인류가 제기해온 다양한 물음과 해법을 소개한 후, 이러한 지(知)의 패러다임이 어떻게 상호적으로 소통될 수 있는가, 어떻게 다른 시각과 사유를 소개하는가, 나아가 인간의 미래에 어떤 지평을 열어 보이는가를 학생 스스로 탐구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이 논문에서는 <자유정의진리> 4단계 교육과정 중 2단 계에 해당하는 ‘학생의 질문으로 구성되는 수업’에 논의를 집중하고자 한다. 이 논문에서는 질문기반형 학습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학생들의 다양한 질문 사례를 중 심으로 살피고자 한다. <자유정의진리> 교과목은 교수자 가 질문을 던지고 학생이 정답과 오답을 가려내는 수동적 학습 체계가 아니다. 학생 스스로 창의적인 질문을 던지는 데서부터 이미 문제해결 능력이 싹튼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학생의 ‘질문으로 구성되는 수업’은 이 논문이 제기한 문제의식을 함축하는 수업 방식이다.5)

3. 학생의 질문으로 구성되는 수업

3.1 ‘질문’이라는 문제 설정

질문은 문제를 해결하는 단계의 전(前) 단계에 불과한 것으로, 부수적이거나 잠재적인 활동으로 이해되기 쉽다. 그러나 본 교과목에서 사용하는 ‘질문’ 활동은 문제를 문 제화하는 것, 즉어떤 논제를 문제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인식의 전략이다. 문제는 ‘문제제기’처럼 그 자체가 생성 이다. 어떤 명제를 인식의 장 안으로 도입하거나 존재해왔 던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들뢰즈는 신화의 예를 들어, 문제와 대답이 모두 물음의 형식을 갖는다고 지적했다. “신화는 언제나 완수해야 할 임무, 풀어야 할 수수께끼에 서 시작한다. 사람들은 신탁에 대해 묻는다. 그러나 신의 대답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문제이다.”(들뢰즈, 2004: 158) 이야기는 신탁에서 시작하고, 신탁은 사람들의 물음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신의 대답도 물음이기는 마찬가지다. 그 대답 자체가 대답의 형식으로 제기된 수수께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음은 이야기를 시작하고, 이후의 이야 기의 성격을 규정하며, 마침내 대답을 자기 안에 담지한 질문, 즉 생성하는 생성(이후의 대답을 자기 안에 예비해 둔 것으로서의 생성)이 된다. 문제를 올바로 제기하는 능력에는 이미 창의적인 사고능력, 판단능력, 문제해결능 력이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질문은 열림/닫힘, 얕음/깊음 의 ‘수준’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는 문제 설정(Problem Setting)의 기제다.
여기서 ‘문제(Problem)’를 교육방법론의 중핵에 두는 문제 기반 학습(PBL, Problem-Based Learning) 방식을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 기반 학습은 학생의 능동성, 자기주도성을 강조하는 교육철학에 기반한 교수법이다. 이것은 학생의 자발성을 존중하고 “자기주도적 학습능 력”(장경원, 최정임, 2015: 44)을 강조하는 교수-학습 방 법이며, ‘비구조화된 문제’의 성격에 주목하여 학생의 문 제해결능력을 강조하는 수행 중심 교수법이다.
여기서 ‘문제(Problem)’를 교육방법론의 중핵에 두는 문제 기반 학습(PBL, Problem-Based Learning) 방식을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 기반 학습은 학생의 능동성, 자기주도성을 강조하는 교육철학에 기반한 교수법이다. 이것은 학생의 자발성을 존중하고 “자기주도적 학습능 력”(장경원, 최정임, 2015: 44)을 강조하는 교수-학습 방 법이며, ‘비구조화된 문제’의 성격에 주목하여 학생의 문 제해결능력을 강조하는 수행 중심 교수법이다
그러나 이 교수-학습법은 학습자의 지적 능력 및 학습 능력의 수준 차이를 전제한다는 점, 그 과정이 문제해결의 해답을 찾기 위한 활동으로 수렴된다는 점 등에서 이 논문 의 ‘질문’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학습자의 수준을 가늠하 는 행위는 교수자의 우월성을 토대로 하며, 이는 학습자 스스로 질문을 제기하는 능력을 회의하게 만든다. 또한 문제에 ‘올바른’ 해답이 있다는 전제는 수업과정 전체를 교수자가 설계하고 장악하고 인도한다는 전통적인 교수 자 모델을 은연중에 수락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차이점은 ‘누구의 질문인가’이다. 교수자가 질문을 던지고 학생이 답변하는 방식에서 주도권은 여전 히 교수자에게 있다. ‘질문’으로 구성되는 수업에서는 이 과정이 정반대이다. 학생의 질문은 교수자의 요구에 대한 응답이 아니라, 그 자체로 창의적으로 제기되는 문제제기 인 것이다. <자유정의진리> 교과목의 정체성을 <학생 중 심 수업>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통상적 으로 플립트 클래스에서는 동영상을 시청한 학생들에게 객관식 시험이나 퀴즈 등을 보게 함으로써 동영상을 통해 전달한 지식을 재확인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본 교과목 에서는 암기식 시험을 보거나 오답을 확인하는 게 아니라, 학생들이 자신의 질문을 통해 스스로 문제의식을 예각화 한다. 온라인 학습 후에 함께 논의한다는 점에서 ‘거꾸로’ 학습법(플립트 클래스)이기도 하지만, 학생이 제출한 ‘질 문’에서 시작하는 수업이라는 점에서 ‘거꾸로’ 수업이기 도 하다. 질문의 스펙트럼은 넓고 다양하다. 각 챕터의 온라인 동영상이 다양한 영역의 내용―사회적, 역사적, 형이상학적, 과학적, 예술적 내용 등―을 다루고 있기 때 문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학과의 학생들이, 각자의 전공지 식, 배경지식, 경험, 가치관에 기반하여 제출하는 질문이 기 때문이다.
교수자는 ‘무지한 자’의 자리에 한정된다. 랑시에르의 _무지한 스승_은 교육의 목적이 인간의 해방과 평등에 있다는 명제를 강조하면서, 진정한 스승은 학생이 스스로 배우게 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무지’는 무관심이나 방 관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태도’를 지칭하는 것이다. 교수 자는 어떤 태도를 요청받는가? 교수자는 지식의 전수자가 아니라 학생들의 자기주도적 학습 과정을 촉진하는 역할 에 머물러야 한다. 교수자는 학생들 스스로 자극을 끌어낼 수 있도록 수위를 조절한다. 랑시에르는 스승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학생들 스스로 특별한 지(知)에 이를 수 있음 을 조제프 자코토의 사례를 통해 보여준 바 있다.(랑시에 르, 2008: 40)6) 이 모델을 있는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겠으나, 교수자 스스로가 지식의 주체가 아니라 앎의 배경이 되며, 지식의 전수자가 아니라 앎의 촉진자가 되는 모델은 가능할 것이다. 이 모델은 교수자와 학습자 사이의 수직 적, 고정적, 일방적 관계를 포기할 때에만 가능해진다.

3.2 질문의 유형(Facces)

플립트 클래스에서 제공된 동영상을 보고 제기하는 학 생의 ‘질문’은 그 내용이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이를 형식 적인 차원에서 유형화하면 [도식 1]과 같다.7)
[도식 1]
질문의 유형(Fac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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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을 세 개의 축을 중심으로 여섯 개의 유형으로 나누 어볼 수 있다. 첫 번째 축은 정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 가와 관련된다. 동영상에서 제시된 개념이나 내용을 확인 하는 정보파악형 질문은 사실판단을 중시하는 반면, 동영 상의 내용 자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비판적 질문은 가치판단을 우선한다.
두 번째 축은 부분과 전체 가운데 어느 쪽을 중시하는가 와 관련된다. 분석적 질문은 동영상의 내용을 특별한 분석 의 기제를 동원하여 다양하게 이해하고 분석한다는 점에 서 전체를 부분으로 쪼개는[分析] 반면, 확장형 질문은 동영상의 전체 내용을 다른 분야와 연계하여 바라본다는 점에서 전체를 더 큰 전체로 합치는[綜合] 질문이다.
세 번째 축은 대상 지향이냐 주체 지향이냐와 관련된 다. 문제해결형 질문은 제기된 문제에 대해 대안이나 해결 방안을 촉구/제시하는 질문이라는 점에서 대상(object)에 초점을 맞춘 질문이며, 창의적 질문은 질문자 자신의 참신 하고 새로운 상상력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주체(subject)에 초점을 맞춘 질문이다.
[질문의 유형(내용)]
1. 정보파악형 질문: 동영상에서제시된 개념과 내용을확인하는질문
2. 비판적 질문: 동영상에서 내용 자체를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질문
3. 분석적질문: 동영상의내용을 자신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다양하게
이해하고 분석하려는 질문
4. 확장형 질문: 다른챕터의 내용과연결될 수 있는질문
5. 문제해결형 질문: 대안이나 해결 방안을촉구/제시하는질문
6. 창의적질문: 자신만의참신하고새로운 상상력을 발휘한 질문
[도식 1]의 윗부분(<질문의 유형> 1,3,5)은 제기된 문제 자체에 집중하는 질문(정보의 사실판단, 분석, 해법 모색) 이다. [도식 1]의 아랫부분(<질문의 유형> 2,4,6)은 문제 를 넘어서서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질문(정보의 가치판 단, 확장, 창의성 발휘)이다. 따라서 이 여섯 가지 유형은 서로 무관한 질문이 아니다. 윗부분의 질문들은 각자의 축을 따라 반대항의 질문으로 이행한다. 사실판단(정보의 파악)이 이루어지면 그에 따라 가치판단(비판적 판단)을 수행하게 된다(1→2). 부분의 파악(분석)이 완수되면 전체 를 파악할 수 있으므로 다른 전체와의 비교, 유비, 대조, 통합 등을 수행할 수 있다(확장)(3→4). 또한 질문 자체에 서 해법을 모색하는 활동(해법)은 그 자체로 주체의 개입 을 보장한다(창의성의 발현)(5→6).

3.3 질문의 확장과 이행

이를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실증해보자.
[학생 질문 사례 1] 정보에서 비판으로
인간의 학습은 계량화가 아닌 질적 인식으로 이루어지는 반면, 컴퓨터는 반복 학습을 통해 양적 자료를 대거 생성하여 질적 자료 의 유사성에 도달하는 방식인데, 이는 근사치라는 말의 의미처럼 유사한 것이지 같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 교수님과 학우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
동영상 <시각과 인식>에서 제공된 것은 인공지능의 학습 과정이 인간의 학습 과정과 유사하다는 사실이었다. 학생의 질문은 정보의 파악에서 나아가 인공지능과 인간 의 인식이 가진 ‘차이’에 주목함으로써 비판적 인식으로 나아간 경우라 할 수 있다.
[학생 질문 사례 2] 분석에서 확장으로
<자유정의진리Ⅰ>의 <이성의 역사>에서 배웠던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법의 관점에서 해석해보자. 정의롭지 못한 법을 준수하여 악행을 저지른 개인이 있을 때, 그 책임은 법에 있는가, 개인에게 있는가? 책임이 법에 있다고 생각하여 개인에게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아니면 개인에게 정의롭지 못한 법을 개정하지 못한(시민 불복종을 이행하지 않은) 사회구성원으 로서 책임을 물어야하는 것인가?
동영상의 주제는 <법과 정의>였다. 위 학생은 이를 다 른 동영상의 주제였던 <이성의 역사>에서 다루었던 ‘악 의 평범성’과 관련짓고 있다. 질문자는 ‘악의 평범성’의 사례인 ‘평범한 악인’의 경우, 그를 법의 지배하에 두는 것이 온당한가, 아니면 그가 자신을 둘러싼 법에 항거하고 불복종을 추구하는 것이 온당한가를 질문하고 있다. 이것 은 하나의 주제에 대한 분석이 끝난 후에, 이 주제를 다른 주제와 절합(節合)한 사례이다.
[학생 질문 사례 3] 해법에서 창의로
입시 미술을 하면서 3차원에 속해 있는 물체를 2차원의 종이에 구현해내는 연습을 했었다. 내가 그림을 좀 더 잘 그려 보이기 위해서 가장 신경을 썼던 점은 ‘과장’이었다. 명도를 눈에 보이는 것만큼만 해서는 현실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빛이 직접적으로 닿는 부분은 하얗게, 가장 빛을 받지 못하는 부분은 완전히 까맣게, 투시 의 소실점을 좀 더 가깝게 하는 것과 같이 실제보다 조금 더 과장해 야지만 2차원에서 3차원을 표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과투시를, 과한 어둠을 집어넣게 되면 그림을 보는 사람은 현실과 다른 형태 와 명도에 괴리감과 부담감을 느끼게 된다. 그 ‘적절한 과장’을 찾는 과정이 바로 학습의 과정이 된다. 현실의 물체와 닮아 보이기 위해 왜곡시키는 것은 과연 현실을 모방하는 행위일까? 사진을 찍는 것 또한 얇은 면에 현실을 옮기는 것이다. 카메라 렌즈로 보는 세상은 현실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지만, 자세히 살펴보게 되면 조금씩 왜곡된 모습이 보인다. 우리 인간의 시야 또한 2차원이 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질문자는 <시각과 인식>이라는 제목으로 제공된 동영 상을 보고, 닮음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왜곡’이 전제될 수밖에 없다는 해법을 제시했다. 이를 예증하는 사례로 자신의 체험을 소개하고 있다. 데생을 할 때 실제보다 명도를 과장함으로써 더 실제처럼 보이게 했다면, 그것은 대상의 왜곡인가, 창의적 변형인가, 현실의 창조인가, 비 현실의 강조인가? 질문자는 자신의 경험이 이런 이분법적 질문을 내파(內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해법의 모색에서 나아가 창의적인 결론(왜곡이 더 참되다 혹은 비현실이 더 현실적이다)에 이른 사례이다.

4. 질문 중심 학습의 의의

질문은 이처럼 유형화된 분류를 넘어서 하나의 극에서 다른 극으로 이행해간다. 질문은 비판정신을 가동시키고, 유비적이거나 반어적인 사고로 확장된다. 이로써 학생 즉 질문자는 주체적이고 창의적인 해법을 모색하게 한다. 이를 통해 어떤 교육적 성과를 이룰 수 있으며 어떤 목표 에 도달할 수 있는가?

4.1 자유의지의 확립: 교육의 대상이 아닌 교육의 주체로

수가타 미트라의 ‘자기조직 학습환경(SOLE, Self-Organized Learning Environment)’ 이론에 따르면, 학생 은 문해력이나 교육수준과 무관하게 자신이 선정한 문제 를 다른 학생들과 서로 협력하면서 ‘자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8) 이때 교수자는 학생들이 어떤 모험을 할지 사전 에 정할 수도 없고, 주체화가 어떻게 이뤄질지 알 수도 없다. 교수자는 학생의 정서와 생각과 의견을 결정하거나 예측할 수 없다. 교수자의 의도에 따라 학생들을 능동적으 로 변화시킨다는 기획이 불가능한 것이다. 최근 많은 대학 에서 교육혁신과 융복합 교육의 중핵으로 삼고 있는 과정 적 지식(process knowledge)(정연재, 2017: 14)은 학생 스 스로 자발적인 앎의 차원을 개시하는 실천적이고 창의적 인 과정 자체를 핵심으로 삼는다.(양윤의 외, 2016: 144) 학생들이 ‘토의의 결과를 미리 계산할 수 없다는 점, 전체 과정에서 필연성이나 인과성이 배제되지만 그 원인이 학습 자의 자유의지라는 점(랑시에르, 2008: 29)9), 학습자 스스 로 미적⋅지적⋅정치적 판단력이 융합되는 협력적 결과 물, 즉 집단지성의 결과물을 도출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학생 질문 사례 4] 주체화의 사례
사진 한 장의 파급력이 그렇게 세다는 것은 사진이 고통과 약자성 을 타자화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불행과 고통을 전시하는 빈곤 포르노에 반대한다.
[학생 질문 사례 5] 주체화의 사례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전쟁 현장이나 아이들이 굶어 죽어가는 지역 에 가서 그 참혹함을 직접 목격할 수 없고, 그렇다고 그에 무관심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사진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을 접하되 폭력적 인 시선을 최대한 배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 아닐까?
동영상 <시각과 인식>에서 작성한 질문의 입장이 선명 히 갈린 경우다. 보도사진은 전쟁이나빈곤의 참상을 고발 할 수 있으나, 그 사진에 내재된 시선의 권력은 타자의 고통을 ‘전시’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사례 4]의 질문자 는 이런 사진이 “고통과 약자성”을 대상화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빈곤 포르노일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반면 [사례 5]의 질문자들은 사진이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못하 는 ‘현장성’을 우리에게 제공함으로써, 그곳의 생생한 실 상을 우리가 느끼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전자는 사진의 대상화하는 성격(사진에서의 시선은 타자와 자신을 분리 한다)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후자는 사진의 현장성(사진 은 우리의 감각을 확장시켜준다)에서 능동성을 느낀다. 사진에서 전자는 타자와의 분리를, 후자는 타자와의 만남 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식이 객관화된 사물의 일종 이 아니라, 주체의 참여에 의해서만 의미화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질문 중심 수업을 통해 질문자는 자유의지를 발휘하고 자율적인 판단을 내리며 그 스스로 주체가 된다.

4.2 윤리적 교양교육의 가능성: 타자의 발견

질문은 대답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질문자는 언제나 타 자 앞에 있다. 논쟁은 이 과정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입론과 반론, 재반론을 거치며 질문은 타자와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질문은 복수화되고 확장된다. 질문 중심 수업은 논쟁의 기술을 연마하는 장이 아니다. 토론의 목적은 상대를 제압하고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과 질 문이 만나는 것, 그로써 내가 아닌 다른 세계의 존재를 알아 가는 것이다. 따라서 질문 중심 수업은 ‘논쟁’이나 ‘정답’ 찾기와는 전혀 다른 것, 이를테면 ‘협력’이나 ‘다양성’ 생산 하기의 장이 된다. 질문이 협력 기반 학습(collaborationbased learning)을 위한 또 하나의 방법론이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학생 질문 사례 6] 타자의 발견
  1. 루소와 몽테스키외가 주장한 것처럼 다수가 권력을 갖는 것이 소수가 권력을 갖는 것보다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플라톤 의 철인군주를 생각해본다면, 무지한 다수의 정치가 오히려 더 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동영상을 보면, 마치 인민 주권이 좀 더 발전된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사실 왕권신수설에 기반 한 소수의 정치와 소수의 법이 나라를 더 안정적으로 이끌 수 있는 가능성도 있지 않은까?

  2. 루소는 일반의지를 각 개인이 자발적으로 모은 힘으로 구성원의 인격과 재산을 보호하고 자유를 지키는 의지라고 말했다. 그러 나 현실에서는 이런 일반의지가 공동체주의, 나아가 전체주의가 될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가치관 자체가 그들 개인의 것이 아니라 기득권에 의해 세뇌당한 것이라고 가정한다 면 그들의 의지는 일반의지가 아닌 한 권력을 가진 개인의 의지 가 되고, 그 개인이 사람들을 국가에 헌신하도록 만든다면 이는 전체주의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생 질문 사례 7] 타자의 발견
동영상에서 언급한 것처럼 상대적으로 균질한 확장성을 가진 공간 과 달리 장소는 인간이 개입하며 특수성이 부여된다. 같은 맥락으 로 우리가 도심의 랜드마크나 오래된 사적지를 방문하는 이유는 그곳에 인간의 상상과 시간과 이념이 투사되었기 때문이다. 장소는 지각하는 주체마다 그 의미가 달라진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인간의 삶을 수치화하며 매스미디어가 장소의 상징성을 퇴색시킨다는 동 영상 내용에 동의할 수 없다.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사회는 이미지가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장소가 모방한 형상에 불과할지라 도 각종 매체에 의해 끊임없이 소비되고 새로운 의미를 생산해낸다.
[사례 6]은 동영상 <법과 정의>에서 작성한 두 학생의 질문이다. 질문자 A는 정치체제가 일인에서 소수로, 다시 소수에서 다수로 ‘발전’한 것처럼 기술된 것에 의문을 갖는다. 플라톤은 다수에 의한 정치가 중우(衆愚) 정치로 타락할 수 있으며 철인(哲人)에 의한 통치가 이상적이라 고 보았다. 그렇다면 소수에 의한 정치체제가 더 우월한 체제일 수도 있지 않은가 하는 질문이다. 반면 질문자 B는 다수에 의한 정치체제가 일반의지, 즉 다수의 선한 의지들의 총화로 기능하는 게 아니라 전체주의로 기능할 수도 있지 않은가를 묻는다. 다수가 한 개인의 권력에 의해 ‘세뇌’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 질문은 그 방향은 다르지만, 다수에 의한 정치체제가 가진 위험성을 지적한 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우려를 포함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토론의 과정에서 두 질문은 (물론 다른 질문들 과의 무수한 접속을 포함하여) 서로의 비판에 대한 반론 으로 기능하기도 했다. A의 경우, 다수에 의한 통치가 소수에 의한 통치보다 더 나은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전 자가 후자보다 우월해서가 아니라) 후자가 전자보다 오류 의 가능성을 줄일 수 있어서인데, 그것은 전자에는 B에서 말한 ‘일반의지’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B의 경우 일반의지가 전체주의로 타락하는 것은 다수가 소수(이 경우에는 독재자 일인)에 의한 선동에 휘둘렸기 때문인 데, 그렇다면 그것은 소수에 의한 통치가 우월할 수 있다 는 A의 전제와 모순된다. 게다가 그처럼 개인에 의해 전체 주의화되는 정치는 다수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소수에 의한 통치가 아닌가? 결국 두 질문 모두 소수에 의한 통치 가 어떤 점에서든 다수에 의한 통치보다 우월할 수는 없다 는 것을, 질문들의 충돌과 교차를 통해서 폭로하게 된사례 이다.
[사례 7]은 <공간과 장소>를 다룬 동영상을 보고 학생 이 제출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서 질문자가 반론의 대상으 로 삼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에 의해 획일화된 공간 ‘이소 토피아’다. 질문자는 ‘랜드마크’와 ‘사적지’를 예로 들어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대에도 고유한 장소들이 존재하 지 않는가를 묻는다. 이미지화된 현대사회에서 이것은 불가피한 현상이기도 하다. 이 문제제기에는 ‘사적지’는 이소토피아의 사례가 아니며, ‘랜드마크’는 자본화의 상 징이지 이소토피아의 상징이 아니라는 반론이 제기되었 다. 대량으로 생산되고 모방되고 소비되는 이미지를 그 자체로 고유한 것이라 말할 수 없다는 반론도 있었다. [사례 7]의 질문은 비판적인 질문의 유형에 속하는데, 또 다른 비판 즉 타자의 견해에 의해 변형―철회, 교정, 종합 ―된다. 질문은 이처럼 타자와의 만남을 전제로 하는 것이 다. 또한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윤리적인 판단에 관해서 도 질문받게 된다. 예컨대 소수에 의한 통치는 권력자의 선한 의지를 전제해야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가([사례 6]), 랜드마크의 독자성을 인정하기 위해서 는, 자본주의의 상징물을 ‘고유한 것’으로 가치화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온당한가([사례 7]) 하는 질문과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주체(subject)에는 두 가지 의미가 존재한다. 자율적이 고 자유의지적인 행위자로서의 주체와 동시에 신민 (subject)으로서의 주체 즉 대상에게서 끊임없이 영향을 받는 주체가 있다. 전자가 앞절에서 기술한 4-1에 해당한 다면, 후자는 본 절에서 기술하고 있는 4-2에 해당할 것이 다. 주체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자유의지를 가진 자율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타자와의 대면을 피해서는 안 된다. 주체는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서 비로소 그 자신이 된다. 질문하는 주체는 타자의 또 다른 질문 앞에 소환된 주체이기도 하다.

4.3 감각의 재분배: 타자가 되기

‘질문’ 즉 ‘자율적인 주체가 되기’가 첫 번째 단계라면, ‘질문과 답변하기’ 즉 ‘타자를 만나기’가 두 번째 단계가 된다. 세 번째 단계는 이 과정을 거쳐서 그 자신이 ‘타자가 되기’이다. 학생은 질문과 응답을 반복하면서 서로의 입 장을 교환하고, 상대의 자리에 서는 체험을 하게 되고 마침내 상대방처럼 생각하고 느끼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도 학생들의 질문은 종결 되지 않는다. 질문들은 해결되거나 해소되지 않고, 종합되 거나 소멸되지 않고, 다만 누적되고 점층된다. 게다가 다 양한 학과에서 온 학생들의 질문이 결합되면서, 질문이 배가되기도 한다. <자유정의진리> 수업 속에서 학생의 질문은 수업의 전(前) 단계에 부분적으로 부수적으로 활 용되지 않고 수업의 전(全) 단계에 적용된다. 학생들은 단순히 질문의 테크닉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보는 방식’ 즉 전혀 다른 프레임, 조망점을 갖게 된다. 그 시선은 하나의 단일한 시선이 아니라 다른 두 개의 시선이 겹쳐져서 ‘시차’를 발생시켰을 때, 확보되는 조망 점이다. 그것은 이론이나 지식을 이론적으로,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인지적 작용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상호작용 즉 이질적인 시간, 다르게 살기, 타자의 시간을 살기라는 감각의 재분배를 통해 가능해진다.
  • 권력은 감각되는 것, 생각되는 것, 지각되는 것, 명명되는 것을 정하는 분할의 체계를 강제한다. 그 체계 안에는 자신이 느끼는 것, 자신에게 지각되 는 것을 말하고 표현하는 것이 금지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말하고 표현하는 행위를 랑시에르는 보고자 한다.(랑시에르, ⌜미학 안의 불 편함⌝, 옮긴이 서문, 2008: 19)

‘감각의 재분배’란 우리가 감각하는 것, 생각하는 것, 지각하는 것, 명명하는 것―이 모든 것의 질과 양을 새롭 게 배치하는 것이다. 권력은 자신이 지배하는 자들의 감각 을, 그 감각의 사용방식과 크기와 형태를 규정한다. 이데 올로기는 관념이나 생각을 결정할 뿐이지만, 감각은 생각 하는 방식, 느끼는 방식, 지각하는 방식 모두를 결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의미의 감각을 새롭게 분할하고 배치 하고 배분함으로써, 우리는 다르게 느끼고 생각하고 지각 할 수 있다. 타자가 되는 체험은 바로 이런 체험―타자의 감각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지각하는 체험이다. 우리는 타자의 자리에 서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타자가 된다.
[학생 질문 사례 8] 타자가 되기
인간의 몸은 상품화되어서는 안 되며, 특정한 몸이나 몸의 능력에 대한 사회적, 자본주의적 선호는 몸에 대한 소외와 잘못된 사회적 관념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여성의 몸이 어떠한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며, 이것이 페미니즘의 주장을 타당하게 만드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영상강의에서 스포츠 선수에 대해서는 몸의 운영 과 개발은 사회적 지위의 획득과 차별화의 수단으로 부상하게 된다 고 말하고, 그것이 상품화된 몸을 육체자본이라는 개념으로 파악한 다. 육체자본이란 다양한 자원들을 축적하는 데 필수적인 권력 및 남과 구별되는 상징을 소유하고 있는 몸을 의미한다고 말하며 몸의 상품화는 곧 육체자본이고, 이는 사회적인 힘 혹은 권력이라 고 표현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중략) 스포츠, 보디빌딩, 모델 등과 같은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몸의 상품화는 긍정적인 것인가?
[학생 질문 사례 9] 타자가 되기
온라인 강의에 나오는 ‘육체자본’에 대하여 질문하고 싶다. 이 강의에 서 나온 육체자본이라는 단어 혹은 개념 자체가 차별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버틀러(Butler)는 단어 하나하나가 수행성(performativity) 을 갖는다고 말한다. 육체가 자본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을 단어로 만들어 설명하는 강의는, 은연 중에 외모지상주의나 성차별주의 (특히나 성 그 자체가 자본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은 여성에게)를 심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뒤에서는 페미니즘 얘기를 통해 이러한 부분이 잘못되었음을 어느 정도 설명하려 하지만, 다른 파트로 나누어져 있어 이 파트의 육체자본이라는 용어 자체가 가진 수행성을 인지하고 피하기에는 쉽지 않다. 동영상의 이러한 부분은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른 학생들의 생각을 듣고 싶다.
[사례 8]과 [사례 9]는 <몸의 역사>라는 제목의 동영상 을 보고 제기한 질문들이다. [사례 8]에서는 인간의 몸이 상품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는 대의를 표명한 후에, 그런데 스포츠 선수의 몸이 ‘육체자본’(부르디외)이라면, 그것은 권력이 아닌가 질문하고 있다. 상품화된 몸은 소유 하는 몸이 아니라 소유되는 몸, 그것도 권력에 의해 지배 되는 대상화된 몸인데, 스포츠 선수의 몸은 권력을 가진 몸이라면 개념의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가? 나아가 그것은 몸의 상품화를 긍정하는 요소로 쓰이는 것은 아닌가? “궁 금하다”는 표현으로 질문을 완화했으나, 이 질문자의 비 판의식은 약하지 않다. 질문자는 대상화된 몸/대상화하는 몸이라는 분열 속에서 그 자신을 타자화하고 있다.
[사례 9]는 확장형 질문의 사례다. 질문자는 주디스 버 틀러의 수행성 개념을 가져와서 ‘육체자본’이라는 용어 자체가 그것의 사용을 정당화하는 폐해를 낳는 것이 아닌 가 하고 묻는다. 스포츠선수, 모델 등의 몸을 육체자본으 로 인정한다면 외모지상주의나 성차별과 같은 폐해나 불 평등을 어떻게 방어할 수 있는가? 적어도 용어가 가진 영향력을 고려한다면, 이 용어는 폐해를 확대하고 불평등 을 심화하는 데 소용되고 말 것이다. 여기에는 젠더에 대한 타자적 자의식이 개입해 있다. 가치중립적으로 보이 는 학술용어에도 젠더 차별적인 흔적이 묻어 있음을, 질문 자는 성차를 뛰어넘는 타자적 감각을 통해 간파하고 있다.

5. 결론: 질문 중심 학습의 과제와 개선방향

새로운 교양교육을 제안하기 위해 어떤 질문이 제기되 어야 할 것인가? 새로운 교양교육의 모델은 어떤 담론에 기초해야 할까? 기존의 교육 모델은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이 세공한 네 가지 담론에서 ‘대학 담론(University’s discourse)’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라캉의 대학 담론에서 “지배적⋅명령적 위치를 점하는 것은 지식의 기표 S2이다. 객관적 지식, 체계적 지식의 위치에서 실재계의 나머지/기억체인 오브제 a(대상 a: 인 용자)에게 강론한다. 이 오브제 a는 교육학적 관점에서 볼 때 ‘야생으로서의 미개한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이 다.”(박찬부, 2007: 115) 이 담론을 ‘대학 담론’이라 부르 는 것은 지식의 기표가 교수자(강론자), 오브제 a가 학습 자의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학습자는 상징계의 질서 를 온전히 습득하지 못한 어린아이/미개한 자에 불과하 고, 지식의 대표자가 자신의 지식을 전수함으로써 교수자 의 결핍을 대신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가르침과 배움 의 구조는 그대로 대학 강단으로 연결되어 탄탄한 지식체 계로 무장한 교수들의 지적 담론을 ‘순진한’ 학생들이 일방적으로 전수받는 S2a의 구조를 형성한다.”(박찬부, 2007: 115) 대학 담론에서 학생은 자율적인 방법이 아니 라 타율적인 방법을 통해 존재를 형성하게 된다. 이때 교육의 내용은 주어진 지식을 재생산하고 재확산하는 데 바쳐진다. 학생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학생은 다만 강요된 선택 앞에 노출될 뿐이다. 대학 담론이 보여주는 대학의 한계는 바로 교육의 한계이기도 하다.
대학 담론은 주인 담론(Master’s discourse)에 봉사한 다.10) 주인 담론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주 인 기표(S1)인데, 이것은 어떤 정당화도 없이 주어진 권력 을 용인하는 작인을 말한다. 주인은 노예를 착취하며 노예 는 주인을 위해 지식(잉여가치)을 생산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궁극적으로 분열된 지식이 생산된다. 이것은 주입식 교육이 횡행하던 이전의 교육 모델과 유사하다. 대학 담론에서 교수자는 주인의 위치(를 대행하면서)에서 학습자를 노예처럼 착취하여 자본이 요구하는 지식(잉여 가치)를 생산한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진리는 은폐되거 나 분열되어 있다. 따라서 대학 담론이나 주인 담론에서 새로운 대학 교양교육의 정체성을 도출할 수는 없다.
반면 히스테리 담론(Hysteric’s discourse)에서는 분열 된 주체가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이 주체가 주인 기표 (S1)에게 말을 걸고 그 말을 의심한다. 이 질문의 과정에서 지식이 생산되며 진리가 분열된 주체의 것으로 전유된다. 이 주체를 주인(subject)이자 신민(subject)인 학습자라 부 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교수자의 말을 따르면서도 그것 을 추종하지 않고 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 주체로서의 학습자는 배움의 과정에서 지식을 생산하고 기존 지식에 의심을 품는다. 새로운 교양교육의 모델은 바로 이 질문하 기, 의심하기를 통해서 지식을 생산하고 진리를 발견하는 주체를 주인공으로 삼아야 한다.
결론을 대신하여, <자유정의진리>를 운영하는 과정에 서 제기된 ‘질문 중심 학습’ 모델의 한계와 개선 방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 모델은 처음에 학생들에게 동영상을 제공하고 (플립트 클래스), 이를 바탕으로 학생들이 질문을 제기하 며, 이 질문들의 충돌과 융합을 통해서 종합적, 비판적 사고능력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과정이 원활하 게 수행되기 위해서는 동영상의 질이 담보되어야 한다. 융복합적 사고를 촉발할 수 있는 주제를 선정하고 이를 여러 학문분야에서 어떻게 다루는지를 기술해야 하므로, 동영상의 제작에는 여러 분야 전공자들의 참여가 필수적 이다. 나아가 지식의 고정화, 정형화를 피하기 위해서는 매년 동영상의 수정과 갱신이 뒤따라야 한다. 이를 위한 인적, 재정적 지원이 필수적이다.
둘째, 다양한 학과에서 참여하는 학생들의 논의를 예각 화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촉진하고 중재하며 종합하는 교 수자의 역량이 요구된다. 질문 중심 학습 기반의 학생 중심 수업에서 교수자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해당 주제에 관한 더 많은 전문적 지식이라기보다는, 제기된 의견을 중재하고 종합하는 역량이다. 목표로 삼은 학습자의 위상 이 달라지는 것처럼 교수자의 역할 역시 촉진자로서의 역할로 전환되어야 한다.
셋째, 다양한 학과의 학생들이 질문을 제시하기 때문에 학습자 본인의 전공이 아닌 다른 전공의 접근법에 대한 비판이 흔히 제기된다. 정보의 오류는 바로잡아야 하지만, 다른 전공의 해당 주제에 대한 접근방법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대화의 대상이다. 학습자에게 이 점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넷째, ‘과정 중심 평가’, ‘학습을 위한 평가’를 위해, 학생들의 다양한 수행 과제들을 개발 및 평가 기준이 설계 단계에서 미리 준비되어야 한다. 또한 학생 중심 수업에 서, 배움은 고정적인 지식에서 양산되는 게 아니라 교수자 와 학습자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생성되므로, ‘학습을 위한 평가’를 위해서는 교육 현장에서 교수자의 역량과 공력이 요구된다.
이 글은 교양교육의 정체성을 새롭게 설정하고, 이의 실현 가능성을 질문 중심 수업의 사례를 통해서 검토해보 고자 했다. 문제를 설정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며 의미 있는 결론에 이르는 전(全) 과정을 학생 스스로, 협력을 통해 수행하는 수업이 모색되어야 한다. 이것이 질문 중심 수 업, 즉 학생 중심 수업의 정체성을 이룬다. 배움은 교수자 의 지식 전수나 기능적 장치들의 구비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학생들은 공동의 아젠다를 설정하고 그것의 해결 을 위한 집단지성의 총합을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스스로 지식을 생산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 이것은 학생 스스로 비판적 문해성(Critical Literacy)을 갖추는 일이며, 이것이 야말로 대학 교양교육의 가장 높은 질적 성취 가운데 하나 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교양교육의 새로운 패러다 임 설정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Notes

1) ‘결과를 위한 평가’가 아니라 ‘학습을 위한 평가’가 도입되어야 한다. 학생들의 질문을 상대화하거나 서열화하지 않는 평가방법이 모색되어야 한다. 수업의 다양성을 확보하고 학생들 서로가 서로를 자극하는 ‘질문’의 역할을 할 때, 그 질문을 질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요시미 순야는 대학이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경영되는 관료제적 기업체”가 되어간다고 말하면서, 대학의 어려움을 내파하기 위해서는 ‘수월성(秀越性)’ 개념과 투쟁해야 한다고 말한다. “대학은 차츰 ‘수월성’에 준거하는 글로벌한 관료제적 경영체가 되고 있다. ‘수월성’이라는 개념은 하이퍼화된 금융경제와 마찬가지로 내용을 가지지 않으며, 그 진위조차 문제되지 않는다. 수월성 담론은 정 성을 지니고 있지만 전혀 이데올로기적이지 않다. 즉 이 개념은 고유의 어떠한 정치적, 문화적 경향성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비지시적이며 경영적인 개념이다.”(요시미 순야, 2014: 292-295)

2) 랑시에르 철학에서 ‘교육’과 ‘연극’의 유비는 이미 유의미한 방식으로 언급된 바 있다. 무지와 앎, 지능의 차등이라는 교육(학)의 신화에 대한 비판적 논의는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론(2008)를 참고할 수 있다.

3) 이 교과목은 2018년에 1학년 공통교양으로 개설된 교과목(학기 별 자유정의진리Ⅰ,Ⅱ로 나뉘며, 총 6학점)이다. 이 논문은 2018학년도 1학기부터 2020학년도 2학기까지 진행된 수업 내용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본 교과목은 매학기 시의에 따라 교육 내용 및 과제가 수정 및 갱신되고 있다. 교과목 소개는 2020-1 <자유정의진리> 강의계획서 참고.

4) 이를 학습이 이루어지는 주요 메커니즘으로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질문 기반형 학습 ② 자기 주도적 학습 ③ 협력 학습 ④ 과정 기반 학습 ⑤ 학습을 위한 평가로서의 절대 평가. 이를 통해 <학습자 중심의 학습> <촉진으로서의 학습>이 일어날 수 있도록 다양한 질문으로 학생들을 자극하고 학생들의 생각을 맥락화한다.

5) 지면의 제약 상 <자유정의진리>에서 설계한 다른 세 가지 교육 과정―플립트 클래스, 토론 수업, 발표 수업―은 다른 지면을 기약한다.

6) 랑시에르는 학생이 스스로 배우는 과정을 ‘보편적 가르침’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개인을 지적으로 해방시키는 것은 스스로 배움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개인은 “자신이 받은 지적 해방의 혜택을 다른 이들에게 알림으로써 남을 도울” 수 있다.

7) Facces는 아래에서 다룰 여섯 가지 유형(Fact, Analysis, Creative, Critic, Expansion, Solution)의 앞글자를 모은 것이다. 그런데 본래 ‘유형화’는 질문을 몇 개의 그룹으로 가두는 방법이므로 그 가짓수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질문 제기’와는 어울리기 어렵다. 다만 질문을 그 형식에 따라 분류할 수는 있다. 형식이란 내용의 외화(外化)이므로, 내용의 목적과 방법, 성격은 그 형식에서 최종적인 모습을 갖춘다. 범주(category)를 이런 형식의 묶음으로 간주한다면 내용의 다양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이를 유형화할 수 있을 것이다.

8) https://www.ted.com/participate/ted-prize/prize-winning-wishes/school-in-the-cloud 인도의 교육학자 수가타 미트라의 <벽 속의 구멍 The Hall in the Wall> 프로젝트 내용을 참고하면, 컴퓨터를 처음 접한 저소득층 아이들이 컴퓨터 사용법을 스스로 익히고, 자신이 깨우친 지식을 동생에게 알려주는 모습이 관찰되었다. 아이들의 <자기조직력>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다음 글을 참조. Mitra, Sugata, 2005)

9) 시에르에 따르면 스승과 학생 사이에는 의지와 의지의 관계만이 성립된다. “평등의 방법은 먼저 의지의 방법이다.” 사람은 배우고자 할 때, 자기 자신의 욕망의 긴장이나 상황의 강제 덕분에 ‘설명해주는’ 스승 없이도 배울 수 있다.(랑시에르, 2008: 29)

10) “대학 담화는 주인의 의지에 대한 일종의 적법화나 합리화를 제공한다.”(브루스 핑크, 2010: 242)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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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원, 최정임(2015). PBL로 수업하기, 학지사.

정연재(2017). “창의융복합적 사고 함양을 위한 융합교육 방안 연구-「크로스오버1:인간의 탐색」 사례를 중심으로”, 교양교육연구 11, 13-38.

Mitra, , Sugata, (2005). “Self Organising Systems for Mass Computer Literacy:Findings from the 'Hole in the Wall'Experiments”, International Journal of Development Issues June;71-81.
crossref
브루스 핑크(2010). 라캉의 주체, 이성민 옮김, 도서출판b.

사사키 아타루(2017). 제자리걸음을 멈추고, 김소운 역, 여문책.

요시미 순야(2014). 대학이란 무엇인가, 서재길 옮김, 글항아리.

자크 랑시에르(2008). 무지한 스승, 양창렬 역, 궁리.

자크 랑시에르(2008). 미학 안의 불편함, 주형일 역, 인간사랑..

자크 랑시에르(2016). 해방된 관객, 양창렬 옮김, 현실문화.

질 들뢰즈(2004).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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